“사랑은 장미처럼 피어나고 우리의 운명은-”
아름답게 꾸민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시각적인 미에 둔감한 사람이라도 그 노랫소리에, 청각적인 미에 둔감한 사람이라도 그 모습에 한 번은 고개를 돌릴만했다.
그러나 긴 테이블 끝에 앉은 사람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혹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에게 인사도 없이 맨손으로 잡도록 손질한 새고기를 집었다.
이 나라, 이름을 말하자면 바르너는 수렵을 주로 하는 국가이고 고기요리도 그렇게나 다양하게 나오는데 이 궁에 오고서부터는 한 번도 나이프를 쥐어본 적이 없다.
무딘 나이프 한 자루로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옆에서 몸소 본 덕분이겠지.
자신이 왕자 시절일 때도 가져보지 못한 자신만의 궁전은 마구간과 커다란 욕조와 그 욕조가 있는 욕실까지 넣어도 모자랄 만큼 커다란 침실이 있었고 만찬을 위한 곳은 그 방만큼이나 커다랬다.
커다란 궁전에 커다란 방에, 저녁식사를 위한 테이블조차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길고 넓은데 거기 앉은 것은 라이단 전 왕자를 제외하면 차르 하나뿐.
특별히 데려온 가수를 제외하면 시중을 들어줄 시종조차 없어 그 넓은 공간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기대어린 표정으로 라이단을 지켜보던 차르는 결국 몸이 달아 입을 열었다.
“몇 번 들어본 노래지?”
라이단은 입을 열어 으깬 감자를 넣었다.
감자를 으깨고 양념하고 치즈와 생선알을 얹어 호사스러운 것이나 음식을 가르고 덜어 입까지 가져가는 동작은 감탄도 만족도 없이 기계적일 뿐.
기껏 가장 유명하다는 가수를 데리고 와서 노래까지 가르쳐 놨건만, 라이단은 차르는커녕 가수에게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라이언 왕자.”
낯간지러워하던 별명이 불리었음에도 라이단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차르는 가수에게 이리 오라 손짓을 했다.
그것을 감지하면서 라이단은 지친 손짓으로 식사하던 것을 내려놓았다.
놀랍지도 않게 쨍그랑, 소리가 났다.
차르 앞에만 놓였던 고기용 나이프는 어느새 가수의 목에 그 날을 빛냈다.
저 나이프는 음식용이니 그렇게까지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쥔 사람은 그걸로도 치명상을 입힐 만큼 힘이 셌다.
톱날같은 나이프의 날이 살갗을 누르자 황제가 직접 불러 주었다는 자부심에 기뻐하던 가수는 덜덜 떨었다.
떨림에 나이프는 날이 조금씩 파고들었고, 차르는 그것을 보았지만 날을 떼지는 않았다.
라이단은 그 가수를 보았다.
공포에 입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시선이 라이단에게 닿았다.
눈동자가 그 마음을 대변하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한때는 저런 눈에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긋지긋하다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의무감에 가까울 정도의 목소리로.
라이단은 입을 열며 방치된 지 오래였던 경첩에서 나는 것 같은 삐걱거림을 느꼈다.
“...많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차르가 고개를 홱 들었다.
여전히 제 쪽으로는 고개도 들지 않는 라이단이었지만 그래도 입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움직인다!
“...바뀌었군요.”
“아무래도 궁전에서 불러도 될 만한 노래로 바꾸다보니까, 일부 가사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 김에 가사가 바뀌었고-”
내팽개쳐진 가수는 비틀비틀 물러나서 혹여나 다시 잡히기라도 할까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후로 라이단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식탁에서는 이야깃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또 옷이 커졌네.
라이단은 왕자 시절일 때부터 애용하던 바지를 쭉 잡아당기더니 허리끈을 꽉 졸라매었다.
딱 맞았던 바지는 점점 늘어나서.
...아니지.
라이단은 금과 염료로 칠하고 보석으로 장식한 호사스러운 거울에 몸을 비추어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한때 말을 타고 뛰고 구르던 몸은 고작 한 달 사이에 많이 상해서 근육도 살집도 존재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인이 새로 지어진 바지를 꺼내들었다.
얇고 부드러운 털가죽과 좋은 천을 쓴 편하고 따뜻한 바지였으나 라이단은 그를 못 본 척 끈을 잘 매듭지어 묶었다.
이 곳은 해가 빨리 진다.
하인은 걷어 두었던 커튼을 쳤다.
새까만 하늘과 수없이 많은 별들이 두터운 천에 가로막히고 보온을 위해 벽난로에 잘 말린 장작이 들어간다.
침대 위에는 새의 부드러운 속깃만을 써서 만든 이불과 베개.
그 속에는 따뜻한 물을 채운 물주머니.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보온을 위해서는 방이 낮고 좁아야 할 텐데 새로 단장했다는 이 방은 다른 방의 세 배는 넓고 절반은 더 높다.
그 높은 천장에서 바닥에 닿기까지 벽에는 금실과 비단실로 짜인 태피스트리가 정교하여 그 위에 새겨진 많은 동물과 영웅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바닥은 맨발로 걸어도 좋을 만큼 두터운 털가죽이 빈틈없이 깔렸고 가구 하나하나에 장식을 새겨 호사스러움을 드러냈다.
손이 직접 닿지 않게 만든 화로가 놓이고 불 위에는 물이 든 주전자가 부드러운 김을 내뿜었다.
왕이 끼고 도는 애첩이나 갓 태어난 왕자를 위해 만든 것 같은...
어느 쪽이든 라이단에게 기꺼운 설명이 아니었다.
분명 호사스럽고, 유지하는데만 어마어마한 돈이 들 거고, 그 말인즉 말도 안되는 구조에 말도 안되는 편함이 있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그 편하다는 것은, 또 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런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 위에 무언가가 얹히는 기분이다.
침대를 정리하고 하인 하나는 방 안에, 하인 하나는 테라스로, 하인 하나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하인은 촛불 몇 개를 더 켜고는 양초를 조금 더 꺼내놓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촛대를 놓고 라이단은 습관처럼 벽난로 앞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밝고 따뜻한 곳이건만 머릿속은 갉아먹히는 것처럼 시끄럽다.
문 밖에서 달각거리는 소리가 나고 차 트레이와 책이 몇 권 들어왔으나 라이단은 오늘도 차를 마시지 못할 것이고, 책은 한 장도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손에 책을 쥐어도 책은 넘어가지 않는다.
머릿속을 갉아먹는 것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게, 들어도 듣지 못하게 날뛰고 있다.
글자가 읽히지 않는다.
첫 장, 고작 몇 줄.
초점을 잃은 눈에 글자가 흐릿하게 번진다.
하인이 잡는 손에 정신을 차려보면 날카로운 책 옆면을 문지르는 손가락이 벌겋다.
낫지 못하는 상처는 터지고, 또 덧씌워지고, 그럼에도 충분히 아프지가 않아.
하인은 상처를 싸매고 축 늘어진 손 위에 큼지막하게 만든 장갑을 씌웠다.
이 손으로도 책장을 넘길 수 있을까?
한 글자도 읽지 않은 페이지지만 두꺼운 장갑을 낀 채로 책을 넘기려 해도 손이 미끄러질 뿐 책장이 잡히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서걱거리는 소리만 이어서 이어서 나고 어느 순간 고개를 들면 하인이 자신을 위험한 것 보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깜박.
눈꺼풀을 움직이자 마른 눈동자 위로 덮이는 피부까지 느껴진다.
하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밤에 사용하는 모래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 곳은 해가 늦게 뜨는 곳인데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하품을 하던 하인이 시간을 확인하였다.
“아침식사를 내올까요.”
벌써 이틀을 꼬박 새웠으니 몸에 잠이 부족해서 뻣뻣한 것이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도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속에 넣으면 잠이 올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하인은 커튼을 걷고 손도 대지 않은 차를 트레이에 싣고 나갔다.
곧 해가 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하늘은 밀도가 높다.
테라스로 나가자 화로를 앞에 두고 꾸벅꾸벅 졸던 하인은 얼른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
“더 자도록 하게.”
“아닙니다. 모피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테라스 밖으로 몸이라도 던질까 걱정하는 것인지 하인은 이 쪽을 흘깃흘깃 보면서 들어가기에 보기라도 쉬우라고 화로 곁에 앉았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얼려버릴 것처럼 옷 속으로 속속들이 파고들고 마른 장작을 몇 개비 더한 화로는 밝게 타오르며 이기려고 애를 쓴다.
불티가 검은 어둠 속으로 날아올라 사라지고 불은 일렁이며 기세를 키운다.
얼마나 불을 보며 멍하게 있었을까, 어깨에 두툼한 모피가 얹혔다.
다소 차가운 감은 있었지만 체온으로 데워지겠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자 차가운 하늘 위로 하얗게 빛이 밝아진다.
해는 하늘로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세상을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어쩌면 이 곳은 해 하나 떠오르는 것조차 마이언스와 같지 않냐는 말이다.
고개를 돌렸다.
같은 것이라고 해 봐야 겨우 이 타오르는 불 뿐이란 말이야.
충동적으로 하인이 가져다둔 나무를 한 묶음이나 들어 화로에 쏟아부었다.
마른 장작이라 한들 한꺼번에 처넣어서야 불이 붙지 않는다.
오히려 불이 서서히 죽어가는 통에 하인이 급히 지푸라기를 쑤시고 부싯돌을 당겼다.
천천히 불이 붙느라 연기가 오르고 급히 대롱을 들어 후 불자 이내 활활 불이 타올랐다.
다시 의자에 앉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 테라스에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옆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니 외려 불에 시선이 잠겨 한없이 보게 되었다.
많은 나무에 옮겨붙은 불은 거세게 타오르고 천장에 자란 고드름이 녹으며 아래로 뚝뚝 떨어졌는데 녹은 물이 흐르는 것에 걸레를 가져오던 하인은 라이단이 저도 모르게 화로로 손을 뻗는 것을 보자 대경실색하여 그를 방 안으로 돌려보냈다.
불에 달아오른 금속이 참으로 따뜻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는데.
밝아지는 바깥을 보는데 목소리가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티크타 전하께서 듭십니다.”
창가에서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이단은 몸을 일으켰다.
명분이야 어쨌거나 포로의 입장이니 허락 같은 것을 구하는 말은 없었다.
문을 열어주자 반짝이는 붉은 머리카락에 밝은 녹색 눈의 사람이 들어왔다.
라이단은 난롯가에 걸린 주전자를 내렸고 아침식사를 가져온 하인은 그것을 차리는 대신 차르가 멋대로 두고 간 물건들 중에서 과자상자를 찾아왔다.
티크타는 권하지 않은 의자에 앉아 찻잔에 입술을 대고 하인처럼 묵묵히 테이블을 차리는 라이단을 지그시 보았다.
고집불통.
전 마이언스 왕이 가장 사랑한 아들을 위해 가장 공들여 만든 물건.
‘...그 기분이 어떤지 알지’
라이단은 다시 창 밖으로 흘끗 눈을 돌렸다.
날씨가 추운 바르너는 창문이 전부 작았지만 라이단에게는 마이언스와 비슷한 양식으로 만든 커다란 유리벽이 주어졌다.
하필이면 왕궁에 있던 것과 같아 어디선가 레지가 아장아장 기어와서 쌓기놀이라도 하다가 또 무언가 발견하고 걸음마로 지나갈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창이.
샤, 아니, 차르의 누나인 티크타가 앞에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중에도 무심코 빠져들게 되어 버린다.
“라이단.”
“네.”
마악 빠져들 수 있는 참이었는데 티크타가 부르는 소리에 라이단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티크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소에 마시던 차가 있는데, 그건 아마 네가 끓이는 쪽이 맛있을 거야. 내 방에 있는데 그것 좀 가져올래?”
“...제가 말입니까?”
리우나, 라는 이름을 부르자 문 밖에 있던 시종이 사뿐사뿐 걸어와 인사를 올렸다.
“둘이 같이. 나는 찻잔을 새로 가져올 테니까.”
“네.”
리우나와 라이단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티크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다른 시종에게 새 찻잔을 가져오라고 이야기하고 방 안을 돌아보았다.
참으로 살풍경한 방이다.
차르가 보내준 온갖 화려한 장식물이 방 구석구석에 있고 귀한 가죽으로 표지를 한 책도 몇 권이나 있다.
보석이 박힌 촛대도 있고 이 찻잔도 유리와 금을 사용한 귀한 것.
침대의 베개나 이불 같은 것에도 부드럽기 그지없는 털가죽을 썼다.
손 닿는 곳에는 간식거리가, 빈 공간마다 비싼 포장지를 사용한 선물상자들, 돌을 깎아 만든 체스 테이블에 침대 위에 놓은 쿠션에까지도 금사와 은사가 들어갔다.
자신이 사용하는 방보다 화려하고 황제의 방보다도 장식과 사치품이 많다.
그런데도.
참으로 살풍경한 방이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물건들은 이렇게나 반짝이고 있는데도, 손가락만 가져다 대면 흙과 먼지로 변해 사라질 것 같을까.
티크타는 옷장을 뒤지고, 서랍장을 뒤지고,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첫 번째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서랍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서랍에도 아무것도 없다.
외국어 사전이 다섯 번째 서랍에 있고.
티크타는 우아하게 미간을 찡그리며 다른 곳을 찾아보려다가 다섯 번째 서랍 안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미묘하게 빛깔이 다른 부분이다.
그 부분을 살짝 눌렀더니 서랍 바닥이 밀린다.
아래에서 나온 것은 귀금속이나 넣었을까 싶은 작은 상자.
“...이게 뭐지?”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나무패.
투박한 육각형, 납작하고.
뭔가 새겨져 있기라도 하면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많을 텐데 칼로 긁어내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아래에서 수첩을 발견한 순간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티크타는 급히 서랍을 닫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차를 새로 끓이고 자리에 앉아 티크타를 마주하다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라이단은 불쑥 입을 열었다.
“차르 황제에게 저를 고문하라고 하실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제 행동에 따라 마이언스의 사람들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무엇 때문에 오신 것인지 여쭈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티크타의 손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의 끝을 쥐고 손가락에 감는다.
유감스럽게도 저 동작은 라이단에게 익숙하다.
머리카락 색은 다르지만 샤르 역시 고민을 할 때면 온 머리카락이 새둥지가 되도록 꼬고 꼬고 또 꼬아댔다.
계속 티크타의 손을 보면 샤르를 떠올리고 말 것 같아서 라이단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널 알고 싶어서 왔어....라고 할까?”
“.....”
인간관계는 편협하지만 눈치만큼은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티크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뭘 알고 싶다는 거지?
마이언스? 마이언스의 백성들? 마을? 공작에 대해서? 그도 아니라면 마이언스의 왕에 대해?
“황녀님을 즐겁게 해 드릴 정도로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며 내려왔다.
방금 전까지 이리저리 꼬이던 머리카락은 손가락에서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구불구불하다.
“샌드위치 재료는 뭘 좋아하지?”
대뜸 티크타가 물었다.
“뭐든 좋습니다.”
“바르너는 마이언스에 비해 추운데 견디기 힘들지는 않고?”
“티크타님과 폐하의 덕분으로 견딜만합니다.”
“여기 와서는 쉬는 시간에 주로 뭘 하지?”
“이렇다 하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마이언스의 왕궁에서는 뭘 했나?”
“왕궁에서 제가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황녀는 라이단이 세우는 이 벽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티크타는 머리카락에 다시 손을 가져가다가 단단하게 꼬인 것이 손가락에 닿자 주먹을 꽉 쥐고 손가락을 내렸다.
라이단은 그 모습을 전부 보았다.
보았다기보다는 티크타의 손가락이 라이단의 시선을 낚아채듯 고정시켰다.
“마이언스의 무엇에 대해 알고 싶습니까?”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했잖니. 무엇이든 좋아, 어떤 사소한 것이든.”
“저에 대해 필요한 만큼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물론 ‘녹색 기사 라이언’이라면 20권 전부 다 있지만.”
라이단의 차가운 표정에 금이 갔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르너에는 20권밖에 안 나왔군요.”
이번에는 뿌듯하게 가슴을 펴고 있던 티크타의 표정이 깨졌다.
“뭐어? 마이언스에는 몇 권이나 나왔는데!?”
“작년에 24권이 배포되었습니다. 계속 쓰고 있었다면 지금쯤 26권이 나왔을 겁니다.”
전쟁만 없었다면, 이라는 가시가 뾰족했다.
그리고 티크타는 라이단의 눈빛 사이에서 스쳐지나간 죄책감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체 하며 티크타는 과자를 깨물었다.
“...어어.”
“맛이 이상한가요?”
“...아니...”
티크타는 다른 나라에서나 나는 과일로 만든 잼을 채우고 겉을 설탕으로 덮어 태운 과자를 와작와작 거칠게 깨물었다.
이 자식, 내가 이거 달라고 할 때는 겨우 몇 개 줬으면서!
동생놈 키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구만.
라이단은 그런 모습을 보다가 과자가 든 상자를 통째로 가져다 그에게 밀어주었다.
그러자 천진난만 천사같은 화려한 미인은 그 녀석한테는 말하면 안돼, 라며 과자를 반토막냈다.
“아 그 녀석은 정말이지!”
과자를 몇 개 더 먹다가 울컥한 티크타는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니, 얘, 라이단. 들어봐, 글쎄! 그 녀석이 말이야, 내가 이거 달라고 했을 때는 얼마 없다고 겨우 한 접시 주고 말더니!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우리가 말이야, 삼십 남매 중에서 서열로 따지면 한 십위쯤 됐거든? 위로 황후님 계셨겠다 집안 좋은 황비님들 있었겠다. 그나마 어머니가 평민이나 노예가 아니라 그 정도는 되었는데 그래도 그게 별로 높은 건 아니거든? 우리보다 낮은 신분인 애들은 슬슬 눈치보다가 적당히 백작위나 받거나 누구네 집안에 하사되거나 했는데 말이야... 어휴, 우리가 어쨌든 얼굴은 보기 좋잖아? 안 팔려가게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휴.”
한참이나 투덜거리던 티크타는 한숨을 푹푹 쉬더니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라이단은 어쩌다가 그 녀석을 만났어?”
라이단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찻잔의 가장자리를 힘주어 꾹꾹 눌렀다.
“재작년 여름의 일입니다.”
==
⌜친애하는 나의 동생 레지날드 R. 마이언스에게⌟
산. 인적이 드물어 길 중간에마저 풀이 돋은 곳.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청년이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탄 말은 보기 좋은 장미색이고 갈기는 구름 같은 연회색이라 여느 집 도련님들이나 타고 다닐 법 했지만 로브를 눌러 쓴 청년이 입은 것만은 다 낡고 너덜거렸다.
⌜나는 지금 야생동물로 유명한 래스퍼 백작령의 옆에 있는 산을 걷고 있단다⌟
흔들리는 말 위인데도 마치 책상에서 글을 쓰듯 그 청년은, 가끔씩 자신의 말에게 한두마디 하며 식물의 속껍질을 모아 만든 수첩에 글을 써나갔다.
⌜이맘때는 비가 적고 날씨가 선선해 노숙하기 좋아 마음은 한가롭고 몸은 여유롭구나. 지금 걷는 길은 붉고 누른 낙엽이 가득 깔려있단다. 궁에는 만수무강을 상징하는 상록수만 심겨져 있으니 너는 아직 이 장관을 보지 못했겠구나. 언젠가 그림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보여주마. 그리고⌟
여기까지 썼을 때, 저만치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청년은 수첩에 급히 몇 자 더하고 그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구나. 나중에 다시 쓰겠다⌟
무늬가 새겨진 뿔로 만든 고급 활에 질 좋은 옷, 보석으로 장식된 비싸기 짝이 없는 신발을 보아하니...
여행자를 꿈꾸는 어딘가의 도련님이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