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호랑이!!!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라이언 왕자를 위해

2021. 10. 4. 01:13 | Posted by 호랑이!!!

 

사랑은 장미처럼 피어나고 우리의 운명은-”

 

아름답게 꾸민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시각적인 미에 둔감한 사람이라도 그 노랫소리에, 청각적인 미에 둔감한 사람이라도 그 모습에 한 번은 고개를 돌릴만했다.

 

그러나 긴 테이블 끝에 앉은 사람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혹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에게 인사도 없이 맨손으로 잡도록 손질한 새고기를 집었다.

 

이 나라, 이름을 말하자면 바르너는 수렵을 주로 하는 국가이고 고기요리도 그렇게나 다양하게 나오는데 이 궁에 오고서부터는 한 번도 나이프를 쥐어본 적이 없다.

 

무딘 나이프 한 자루로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옆에서 몸소 본 덕분이겠지.

 

자신이 왕자 시절일 때도 가져보지 못한 자신만의 궁전은 마구간과 커다란 욕조와 그 욕조가 있는 욕실까지 넣어도 모자랄 만큼 커다란 침실이 있었고 만찬을 위한 곳은 그 방만큼이나 커다랬다.

 

커다란 궁전에 커다란 방에, 저녁식사를 위한 테이블조차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길고 넓은데 거기 앉은 것은 라이단 전 왕자를 제외하면 차르 하나뿐.

 

특별히 데려온 가수를 제외하면 시중을 들어줄 시종조차 없어 그 넓은 공간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기대어린 표정으로 라이단을 지켜보던 차르는 결국 몸이 달아 입을 열었다.

 

몇 번 들어본 노래지?”

 

라이단은 입을 열어 으깬 감자를 넣었다.

 

감자를 으깨고 양념하고 치즈와 생선알을 얹어 호사스러운 것이나 음식을 가르고 덜어 입까지 가져가는 동작은 감탄도 만족도 없이 기계적일 뿐.

 

기껏 가장 유명하다는 가수를 데리고 와서 노래까지 가르쳐 놨건만, 라이단은 차르는커녕 가수에게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라이언 왕자.”

 

낯간지러워하던 별명이 불리었음에도 라이단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차르는 가수에게 이리 오라 손짓을 했다.

 

그것을 감지하면서 라이단은 지친 손짓으로 식사하던 것을 내려놓았다.

 

놀랍지도 않게 쨍그랑, 소리가 났다.

 

차르 앞에만 놓였던 고기용 나이프는 어느새 가수의 목에 그 날을 빛냈다.

 

저 나이프는 음식용이니 그렇게까지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쥔 사람은 그걸로도 치명상을 입힐 만큼 힘이 셌다.

 

톱날같은 나이프의 날이 살갗을 누르자 황제가 직접 불러 주었다는 자부심에 기뻐하던 가수는 덜덜 떨었다.

 

떨림에 나이프는 날이 조금씩 파고들었고, 차르는 그것을 보았지만 날을 떼지는 않았다.

 

라이단은 그 가수를 보았다.

 

공포에 입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시선이 라이단에게 닿았다.

 

눈동자가 그 마음을 대변하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한때는 저런 눈에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긋지긋하다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의무감에 가까울 정도의 목소리로.

 

라이단은 입을 열며 방치된 지 오래였던 경첩에서 나는 것 같은 삐걱거림을 느꼈다.

 

“...많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차르가 고개를 홱 들었다.

 

여전히 제 쪽으로는 고개도 들지 않는 라이단이었지만 그래도 입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움직인다!

 

“...바뀌었군요.”

 

아무래도 궁전에서 불러도 될 만한 노래로 바꾸다보니까, 일부 가사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 김에 가사가 바뀌었고-”

 

내팽개쳐진 가수는 비틀비틀 물러나서 혹여나 다시 잡히기라도 할까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후로 라이단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식탁에서는 이야깃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또 옷이 커졌네.

 

라이단은 왕자 시절일 때부터 애용하던 바지를 쭉 잡아당기더니 허리끈을 꽉 졸라매었다.

 

딱 맞았던 바지는 점점 늘어나서.

 

...아니지.

 

라이단은 금과 염료로 칠하고 보석으로 장식한 호사스러운 거울에 몸을 비추어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한때 말을 타고 뛰고 구르던 몸은 고작 한 달 사이에 많이 상해서 근육도 살집도 존재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인이 새로 지어진 바지를 꺼내들었다.

 

얇고 부드러운 털가죽과 좋은 천을 쓴 편하고 따뜻한 바지였으나 라이단은 그를 못 본 척 끈을 잘 매듭지어 묶었다.

 

이 곳은 해가 빨리 진다.

 

하인은 걷어 두었던 커튼을 쳤다.

 

새까만 하늘과 수없이 많은 별들이 두터운 천에 가로막히고 보온을 위해 벽난로에 잘 말린 장작이 들어간다.

 

침대 위에는 새의 부드러운 속깃만을 써서 만든 이불과 베개.

 

그 속에는 따뜻한 물을 채운 물주머니.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보온을 위해서는 방이 낮고 좁아야 할 텐데 새로 단장했다는 이 방은 다른 방의 세 배는 넓고 절반은 더 높다.

 

그 높은 천장에서 바닥에 닿기까지 벽에는 금실과 비단실로 짜인 태피스트리가 정교하여 그 위에 새겨진 많은 동물과 영웅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바닥은 맨발로 걸어도 좋을 만큼 두터운 털가죽이 빈틈없이 깔렸고 가구 하나하나에 장식을 새겨 호사스러움을 드러냈다.

 

손이 직접 닿지 않게 만든 화로가 놓이고 불 위에는 물이 든 주전자가 부드러운 김을 내뿜었다.

 

왕이 끼고 도는 애첩이나 갓 태어난 왕자를 위해 만든 것 같은...

 

어느 쪽이든 라이단에게 기꺼운 설명이 아니었다.

 

분명 호사스럽고, 유지하는데만 어마어마한 돈이 들 거고, 그 말인즉 말도 안되는 구조에 말도 안되는 편함이 있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그 편하다는 것은, 또 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런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 위에 무언가가 얹히는 기분이다.

 

침대를 정리하고 하인 하나는 방 안에, 하인 하나는 테라스로, 하인 하나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하인은 촛불 몇 개를 더 켜고는 양초를 조금 더 꺼내놓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촛대를 놓고 라이단은 습관처럼 벽난로 앞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밝고 따뜻한 곳이건만 머릿속은 갉아먹히는 것처럼 시끄럽다.

 

문 밖에서 달각거리는 소리가 나고 차 트레이와 책이 몇 권 들어왔으나 라이단은 오늘도 차를 마시지 못할 것이고, 책은 한 장도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손에 책을 쥐어도 책은 넘어가지 않는다.

 

머릿속을 갉아먹는 것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게, 들어도 듣지 못하게 날뛰고 있다.

 

글자가 읽히지 않는다.

 

첫 장, 고작 몇 줄.

 

초점을 잃은 눈에 글자가 흐릿하게 번진다.

 

하인이 잡는 손에 정신을 차려보면 날카로운 책 옆면을 문지르는 손가락이 벌겋다.

 

낫지 못하는 상처는 터지고, 또 덧씌워지고, 그럼에도 충분히 아프지가 않아.

 

하인은 상처를 싸매고 축 늘어진 손 위에 큼지막하게 만든 장갑을 씌웠다.

 

이 손으로도 책장을 넘길 수 있을까?

 

한 글자도 읽지 않은 페이지지만 두꺼운 장갑을 낀 채로 책을 넘기려 해도 손이 미끄러질 뿐 책장이 잡히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서걱거리는 소리만 이어서 이어서 나고 어느 순간 고개를 들면 하인이 자신을 위험한 것 보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깜박.

 

눈꺼풀을 움직이자 마른 눈동자 위로 덮이는 피부까지 느껴진다.

 

하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밤에 사용하는 모래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 곳은 해가 늦게 뜨는 곳인데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하품을 하던 하인이 시간을 확인하였다.

 

아침식사를 내올까요.”

 

벌써 이틀을 꼬박 새웠으니 몸에 잠이 부족해서 뻣뻣한 것이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도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속에 넣으면 잠이 올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하인은 커튼을 걷고 손도 대지 않은 차를 트레이에 싣고 나갔다.

 

곧 해가 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하늘은 밀도가 높다.

 

테라스로 나가자 화로를 앞에 두고 꾸벅꾸벅 졸던 하인은 얼른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

 

더 자도록 하게.”

 

아닙니다. 모피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테라스 밖으로 몸이라도 던질까 걱정하는 것인지 하인은 이 쪽을 흘깃흘깃 보면서 들어가기에 보기라도 쉬우라고 화로 곁에 앉았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얼려버릴 것처럼 옷 속으로 속속들이 파고들고 마른 장작을 몇 개비 더한 화로는 밝게 타오르며 이기려고 애를 쓴다.

 

불티가 검은 어둠 속으로 날아올라 사라지고 불은 일렁이며 기세를 키운다.

 

얼마나 불을 보며 멍하게 있었을까, 어깨에 두툼한 모피가 얹혔다.

 

다소 차가운 감은 있었지만 체온으로 데워지겠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자 차가운 하늘 위로 하얗게 빛이 밝아진다.

 

해는 하늘로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세상을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어쩌면 이 곳은 해 하나 떠오르는 것조차 마이언스와 같지 않냐는 말이다.

 

고개를 돌렸다.

 

같은 것이라고 해 봐야 겨우 이 타오르는 불 뿐이란 말이야.

 

충동적으로 하인이 가져다둔 나무를 한 묶음이나 들어 화로에 쏟아부었다.

 

마른 장작이라 한들 한꺼번에 처넣어서야 불이 붙지 않는다.

 

오히려 불이 서서히 죽어가는 통에 하인이 급히 지푸라기를 쑤시고 부싯돌을 당겼다.

 

천천히 불이 붙느라 연기가 오르고 급히 대롱을 들어 후 불자 이내 활활 불이 타올랐다.

 

다시 의자에 앉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 테라스에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옆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니 외려 불에 시선이 잠겨 한없이 보게 되었다.

 

많은 나무에 옮겨붙은 불은 거세게 타오르고 천장에 자란 고드름이 녹으며 아래로 뚝뚝 떨어졌는데 녹은 물이 흐르는 것에 걸레를 가져오던 하인은 라이단이 저도 모르게 화로로 손을 뻗는 것을 보자 대경실색하여 그를 방 안으로 돌려보냈다.

 

불에 달아오른 금속이 참으로 따뜻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는데.

 

밝아지는 바깥을 보는데 목소리가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티크타 전하께서 듭십니다.”

 

창가에서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이단은 몸을 일으켰다.

 

명분이야 어쨌거나 포로의 입장이니 허락 같은 것을 구하는 말은 없었다.

 

문을 열어주자 반짝이는 붉은 머리카락에 밝은 녹색 눈의 사람이 들어왔다.

 

라이단은 난롯가에 걸린 주전자를 내렸고 아침식사를 가져온 하인은 그것을 차리는 대신 차르가 멋대로 두고 간 물건들 중에서 과자상자를 찾아왔다.

 

티크타는 권하지 않은 의자에 앉아 찻잔에 입술을 대고 하인처럼 묵묵히 테이블을 차리는 라이단을 지그시 보았다.

 

고집불통.

 

전 마이언스 왕이 가장 사랑한 아들을 위해 가장 공들여 만든 물건.

 

‘...그 기분이 어떤지 알지

 

라이단은 다시 창 밖으로 흘끗 눈을 돌렸다.

 

날씨가 추운 바르너는 창문이 전부 작았지만 라이단에게는 마이언스와 비슷한 양식으로 만든 커다란 유리벽이 주어졌다.

 

하필이면 왕궁에 있던 것과 같아 어디선가 레지가 아장아장 기어와서 쌓기놀이라도 하다가 또 무언가 발견하고 걸음마로 지나갈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창이.

 

, 아니, 차르의 누나인 티크타가 앞에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중에도 무심코 빠져들게 되어 버린다.

 

라이단.”

 

.”

 

마악 빠져들 수 있는 참이었는데 티크타가 부르는 소리에 라이단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티크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소에 마시던 차가 있는데, 그건 아마 네가 끓이는 쪽이 맛있을 거야. 내 방에 있는데 그것 좀 가져올래?”

 

“...제가 말입니까?”

 

리우나, 라는 이름을 부르자 문 밖에 있던 시종이 사뿐사뿐 걸어와 인사를 올렸다.

 

둘이 같이. 나는 찻잔을 새로 가져올 테니까.”

 

.”

 

리우나와 라이단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티크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다른 시종에게 새 찻잔을 가져오라고 이야기하고 방 안을 돌아보았다.

 

참으로 살풍경한 방이다.

 

차르가 보내준 온갖 화려한 장식물이 방 구석구석에 있고 귀한 가죽으로 표지를 한 책도 몇 권이나 있다.

 

보석이 박힌 촛대도 있고 이 찻잔도 유리와 금을 사용한 귀한 것.

 

침대의 베개나 이불 같은 것에도 부드럽기 그지없는 털가죽을 썼다.

 

손 닿는 곳에는 간식거리가, 빈 공간마다 비싼 포장지를 사용한 선물상자들, 돌을 깎아 만든 체스 테이블에 침대 위에 놓은 쿠션에까지도 금사와 은사가 들어갔다.

 

자신이 사용하는 방보다 화려하고 황제의 방보다도 장식과 사치품이 많다.

 

그런데도.

 

참으로 살풍경한 방이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물건들은 이렇게나 반짝이고 있는데도, 손가락만 가져다 대면 흙과 먼지로 변해 사라질 것 같을까.

 

티크타는 옷장을 뒤지고, 서랍장을 뒤지고,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첫 번째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서랍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서랍에도 아무것도 없다.

 

외국어 사전이 다섯 번째 서랍에 있고.

 

티크타는 우아하게 미간을 찡그리며 다른 곳을 찾아보려다가 다섯 번째 서랍 안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미묘하게 빛깔이 다른 부분이다.

 

그 부분을 살짝 눌렀더니 서랍 바닥이 밀린다.

 

아래에서 나온 것은 귀금속이나 넣었을까 싶은 작은 상자.

 

“...이게 뭐지?”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나무패.

 

투박한 육각형, 납작하고.

 

뭔가 새겨져 있기라도 하면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많을 텐데 칼로 긁어내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아래에서 수첩을 발견한 순간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티크타는 급히 서랍을 닫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차를 새로 끓이고 자리에 앉아 티크타를 마주하다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라이단은 불쑥 입을 열었다.

 

차르 황제에게 저를 고문하라고 하실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제 행동에 따라 마이언스의 사람들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무엇 때문에 오신 것인지 여쭈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티크타의 손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의 끝을 쥐고 손가락에 감는다.

 

유감스럽게도 저 동작은 라이단에게 익숙하다.

 

머리카락 색은 다르지만 샤르 역시 고민을 할 때면 온 머리카락이 새둥지가 되도록 꼬고 꼬고 또 꼬아댔다.

 

계속 티크타의 손을 보면 샤르를 떠올리고 말 것 같아서 라이단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널 알고 싶어서 왔어....라고 할까?”

 

“.....”

 

인간관계는 편협하지만 눈치만큼은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티크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뭘 알고 싶다는 거지?

 

마이언스? 마이언스의 백성들? 마을? 공작에 대해서? 그도 아니라면 마이언스의 왕에 대해?

 

황녀님을 즐겁게 해 드릴 정도로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며 내려왔다.

 

방금 전까지 이리저리 꼬이던 머리카락은 손가락에서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구불구불하다.

 

샌드위치 재료는 뭘 좋아하지?”

 

대뜸 티크타가 물었다.

 

뭐든 좋습니다.”

 

바르너는 마이언스에 비해 추운데 견디기 힘들지는 않고?”

 

티크타님과 폐하의 덕분으로 견딜만합니다.”

 

여기 와서는 쉬는 시간에 주로 뭘 하지?”

 

이렇다 하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마이언스의 왕궁에서는 뭘 했나?”

 

왕궁에서 제가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황녀는 라이단이 세우는 이 벽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티크타는 머리카락에 다시 손을 가져가다가 단단하게 꼬인 것이 손가락에 닿자 주먹을 꽉 쥐고 손가락을 내렸다.

 

라이단은 그 모습을 전부 보았다.

 

보았다기보다는 티크타의 손가락이 라이단의 시선을 낚아채듯 고정시켰다.

 

마이언스의 무엇에 대해 알고 싶습니까?”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했잖니. 무엇이든 좋아, 어떤 사소한 것이든.”

 

저에 대해 필요한 만큼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물론 녹색 기사 라이언이라면 20권 전부 다 있지만.”

 

라이단의 차가운 표정에 금이 갔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르너에는 20권밖에 안 나왔군요.”

 

이번에는 뿌듯하게 가슴을 펴고 있던 티크타의 표정이 깨졌다.

 

뭐어? 마이언스에는 몇 권이나 나왔는데!?”

 

작년에 24권이 배포되었습니다. 계속 쓰고 있었다면 지금쯤 26권이 나왔을 겁니다.”

 

전쟁만 없었다면, 이라는 가시가 뾰족했다.

 

그리고 티크타는 라이단의 눈빛 사이에서 스쳐지나간 죄책감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체 하며 티크타는 과자를 깨물었다.

 

“...어어.”

 

맛이 이상한가요?”

 

“...아니...”

 

티크타는 다른 나라에서나 나는 과일로 만든 잼을 채우고 겉을 설탕으로 덮어 태운 과자를 와작와작 거칠게 깨물었다.

 

이 자식, 내가 이거 달라고 할 때는 겨우 몇 개 줬으면서!

 

동생놈 키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구만.

 

라이단은 그런 모습을 보다가 과자가 든 상자를 통째로 가져다 그에게 밀어주었다.

 

그러자 천진난만 천사같은 화려한 미인은 그 녀석한테는 말하면 안돼, 라며 과자를 반토막냈다.

 

아 그 녀석은 정말이지!”

 

과자를 몇 개 더 먹다가 울컥한 티크타는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니, , 라이단. 들어봐, 글쎄! 그 녀석이 말이야, 내가 이거 달라고 했을 때는 얼마 없다고 겨우 한 접시 주고 말더니!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우리가 말이야, 삼십 남매 중에서 서열로 따지면 한 십위쯤 됐거든? 위로 황후님 계셨겠다 집안 좋은 황비님들 있었겠다. 그나마 어머니가 평민이나 노예가 아니라 그 정도는 되었는데 그래도 그게 별로 높은 건 아니거든? 우리보다 낮은 신분인 애들은 슬슬 눈치보다가 적당히 백작위나 받거나 누구네 집안에 하사되거나 했는데 말이야... 어휴, 우리가 어쨌든 얼굴은 보기 좋잖아? 안 팔려가게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휴.”

 

한참이나 투덜거리던 티크타는 한숨을 푹푹 쉬더니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라이단은 어쩌다가 그 녀석을 만났어?”

 

라이단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찻잔의 가장자리를 힘주어 꾹꾹 눌렀다.

 

재작년 여름의 일입니다.”

 

==

 

친애하는 나의 동생 레지날드 R. 마이언스에게

 

. 인적이 드물어 길 중간에마저 풀이 돋은 곳.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청년이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탄 말은 보기 좋은 장미색이고 갈기는 구름 같은 연회색이라 여느 집 도련님들이나 타고 다닐 법 했지만 로브를 눌러 쓴 청년이 입은 것만은 다 낡고 너덜거렸다.

 

나는 지금 야생동물로 유명한 래스퍼 백작령의 옆에 있는 산을 걷고 있단다

 

흔들리는 말 위인데도 마치 책상에서 글을 쓰듯 그 청년은, 가끔씩 자신의 말에게 한두마디 하며 식물의 속껍질을 모아 만든 수첩에 글을 써나갔다.

 

이맘때는 비가 적고 날씨가 선선해 노숙하기 좋아 마음은 한가롭고 몸은 여유롭구나. 지금 걷는 길은 붉고 누른 낙엽이 가득 깔려있단다. 궁에는 만수무강을 상징하는 상록수만 심겨져 있으니 너는 아직 이 장관을 보지 못했겠구나. 언젠가 그림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보여주마. 그리고

 

여기까지 썼을 때, 저만치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청년은 수첩에 급히 몇 자 더하고 그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구나. 나중에 다시 쓰겠다

 

무늬가 새겨진 뿔로 만든 고급 활에 질 좋은 옷, 보석으로 장식된 비싸기 짝이 없는 신발을 보아하니...

 

여행자를 꿈꾸는 어딘가의 도련님이렷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것도_몰랐던_아름다운_계절  (0) 2022.09.12
#아침장사 (글숨봇)  (0) 2022.07.04
글숨봇(매짧글): 상상의 동물  (0) 2021.07.20
각설탕 놀이 (글 파레트 사용)  (0) 2021.05.14
Alien (글 파레트 사용)  (0) 2021.05.12

[파크라이4/페이건 민x아제이] 단빙님 리퀘

2021. 9. 23. 00:53 | Posted by 호랑이!!!

아제이는 밀주 한 병을 들고 언덕에 앉았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DJ 라비의 방송이 유쾌하고 발 아래로는 양귀비밭이라 바람이 불 때면 짙은 색 꽃송이들이 차르르 흔들리며 짙은 향기가 코와 입을 막았다.

 

낮 동안 데워진 땅은 선선한 바람에 식어가고 목조 울타리로 구분된 길은 하얗게 정돈된 데다 산 너머로 저물어가는 해에 지상의 것은 실루엣만이 보인다.

 

이 곳에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해치우는 중임에도 일견 머릿속이 빌 정도로... 비워도 좋을 정도로, 안전하게 느껴졌다.

 

혹자는 이것을 평화로운 광경이라고 하겠지.

 

저 아래에서는 불침번을 서는 아미타의 사람들이 낄낄거렸다.

 

다시 말해 페이건 민보다 세이벌을 더 싫어하는 것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주사위 하나와 총알 몇 알 가지고도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어떤 과학 실험 같은 것에 빠져서 불침번용 오두막 근처로 가면 불쾌할만큼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그 아래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모한의 아들!”

 

듣자하니 누군가 야크 육포를 가져온 모양이다.

 

육류라면 제일 싼 통조림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냥을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건 꽤 드문 일인데다 아제이는 물건을 소비하기보다는 날라 주는 쪽이었기에(그리고 술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근래 아미타의 일을 몇 가지 처리해주었더니 그들은 아제이가 그들과 함께 한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들 게임에 끼워줄 생각은 없는지 그 중 하나가 일어나더니 꽉 찬 술 한 병, 육포 몇 조각, 동글동글한 뭔가를 몇 개 건네주고 돌아갔다.

 

종이에 그린 낡은 게임판이 보였지만- , 누가 그들을 나무라겠는가.

 

이 밭까지 오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몇 개인데.

 

그러니 아제이도 모처럼 술이니 경치니 하면서 여유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술 한 병에 크기가 들쭉날쭉한 육포를 깨물다가 건네받은 물건 중 둥글둥글한 것에 시선이 갔다.

 

본의로 약물을 이것저것 접하다보니 이게 뭔지 직감적으로 알 것 같다.

 

파이프에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아래에서 쨍그랑,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연기를 깊이 들이쉬었다가 악기를 연주하듯 훅 불었다.

 

검게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재가 부유하고 아제이는 이런 순간이라면 멈춰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아제이.”

 

할 뻔 했는데요 이...

 

너도 이제 성인이니 잔소리는 많이 하진 않겠지만, 몸을 망치고 싶다면 이것보다 더 건전한 방법이 많이 있단다. 정 궁금하면 나랑 한 번 알아보지 않겠니?”

 

눈을 뜨자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파이프는 이미 땅을 구르고 있었고 이 몸뚱어리도 땅에 뒹굴고 있군.

 

시선을 위로 돌리자 이 척박한 키라트에서는 보기 드문 깨끗한 옷과 잘 정돈된 머리가 보였다.

 

팔이 들렸다.

 

힘을 아주 조금 주었을 뿐인데 마치 나무토막의 아래를 밀어올린 것처럼 올라가서 페이건의 멱살을 잡았다.

 

“...이건 촉감도 느껴지는군...”

 

세상에, 아제이! 얼마나 한 거야? 애가 정신을 못 차리네!”

 

약 효과 죽여주네.

 

아제이는 페이건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왁스를 발라 빗어넘긴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쿡 찔러 망가뜨리고 얼굴도 쭈욱 잡아당기자 뒤에서 당황하는 것 같은 발소리가 났다.

 

앉은 것이 무색하게 뒤로 몸을 기울여 고개를 꺾자 군화를 신은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군인?”

 

페이건은 아제이를 내려다보다 이쉬와리의 눈 위에 손을 덮었다.

 

속옷 한 장까지 빠짐없이 벗고 망이나 보러 꺼져

 

달빛이 대낮처럼 환했다.

 

페이건은 군인이 옷을 벗는 것을 기다리다 짜증을 내며 그 머리에다 속옷을 내던졌다.

 

손바닥 아래에서는 아제이가 눈을 떠 보려고 하는 것인지 속눈썹이 간지러웠다.

 

방금 군인이 총을 들고...”

 

군인? 무슨 군인?”

 

손이 치워지자 아제이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페이건 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옆을 더듬어 파이프를 찾았다.

 

그런 건 하등 좋을 바 없어.”

 

그럼-”

 

자신이 내는 목소리가 너무 높거나 낮게 들렸다.

 

“...알려 줘, 건전하게 몸을 망치는 방법...”

 

말이야, 하고 더 잇기도 전에 아직도 잡힌 멱살이 가까이로 당겨졌다.

 

성급하게 당긴 손인데도 페이건은 거기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왔다.

 

 

 

 

 

 

더보기

그렇게 입술이 닿았다.

 

페이건이 키스도 안 하고 살았냐며 핀잔 주는 말로 미루어 보아서는 이가 닿았을수도 있겠다.

 

감각이 이렇게나 둔해졌나, 하는데 입술에 손가락이 닿았다.

 

서늘한 바람에 식은 체온하며.

 

지문의 요철까지 간질간질하게 입술을 긁었다.

 

그것을 자극하자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페이건은 커다랗게 뜨인 눈을 보고는 짧고도 기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대해 묻기도 전에 손이 아제이의 옷 위를 긁어내렸다.

 

보지 않아도 촉감이 느껴지나? 어떻게?

 

아제이의 눈이 필사적으로 아래를 향해, 손을 감지하려고 했다.

 

페이건은 손톱을 세웠다.

 

아, 하고 짧은 탄성이 튀어나갔다.

 

어느 순간에인가 아제이는 자신이 숨을 헐떡이고 있음을 알았다.

 

옷이 끌려내려가자, 아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골 깨지겠네.

 

아제이는 찌르는 것처럼 강한 햇살에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덮고는 커튼을 치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이 곳이 양귀비밭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새빨갛게 피어난 양귀비.

 

하늘은 새파랗고.

 

굴러다니는 갈색 병을 제외하면 짙은 녹색 풀과, 길은 하얀색...?

 

아제이는 제 밑에 깔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 군복은 대체 뭐야?”

 

 

글숨봇(매짧글): 상상의 동물

2021. 7. 20. 00:55 | Posted by 호랑이!!!

 

아가, 또 왔어?”

 

너도 벌레면서 왜 나보고 아가래?”

 

그랬더니 가게 카운터에 난 버섯 위, 새파란 몸을 한 애벌레는 껄껄 웃으며 피우던 담배를 껐다.

 

뭐야, 또 담배 피웠어? 내가 가게에서 피우지 말랬지.”

 

등에 커다란 날개가 돋은 백마는 뒷발로 일어서더니 있는 힘껏 날갯짓해 담배 연기를 밖으로 날려보냈다.

 

같이 날아갈뻔 한 애벌레는 길쭉한 담뱃대를 카운터에 딱딱 내리치며 화를 냈다.

 

, 애기 왔네.”

 

손바닥만 한 작은 요정은 쟁반에 음식을 쌓고 종종걸음치다 인사를 건넸고 연못에서 상체만 내민 인어들은 과일을 넣고 만든 차가운 샹그리아를 홀짝였다.

 

지상의 여름은 진짜 너무 덥다니까.”

 

맞아맞아, 이런 걸 먹는 건 좋아하지만... ..., 거기 인간 아기. 우리랑 같이 바다 갈래? 거기 엄청 시원하다?”

 

인어들이 바위에 몸을 기대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거기 인어들, 뒤 좀 보지?”

 

길고 푹신한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여우는 대리석 매트 위에서 등을 대고 누워 있다가 앞발로 홱 가리켰고, 인어들은 뒤를 보았다가 그들을 엄하게 내려다보는 한 쌍의 새를 보고 깜짝 놀라 팔을 저었다.

 

아니, 저희가 뭘 하려고 한 건 아니구요...!”

 

날이 더우니까요! !”

 

쟤만 그랬어요! 저는 그럴 생각 없었어요!”

 

배신자!”

 

금방 첨벙거리는 소리가 나고 물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 중에서 도포 소매를 적신 백호랑이가 있었는데 그는 혀를 끌끌 차며 흰까치가 내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았다.

 

시럽 좀 타오래도.”

 

어르신 나이를 생각하세요. 단 거 줄여야 하지 않습니까.”

 

좀 먹게 두어라. 요즈음은 담배도 안 피우지 않나.”

 

호랑이님 담배를 피웠어요?”

 

, 인간 아기가 왔구나. 요즘 아기들은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라는 말을 모르나?”

 

알고 있어요.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아하, 요즘은 담배 먹는다는 말을 안 쓰는구나.”

 

백호랑이는 도톰하고 보송보송한 앞발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까치님은 왜 하얀색이에요?”

 

새 비단옷에 벼루 엎은 것은 내 손주놈이거든.”

 

그 녀석이 어릴 때부터 방정맞기 짝이 없었지...

 

흰까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미간을 깃털로 꾹꾹 누르다가 고개를 푸르르 저었다.

 

아무튼 인간 아기야, 너 아주 잘 되었구나. 내가 이래봬도 길조란다.”

 

까치가 깍깍 울었다.

 

그리고 이 분이야 말해 무엇하랴, 존재만으로도 삿된 것들을 물리치는 길함의 상징! 모든 길짐승의 왕! 온 산의 산군!”

 

엣헴, 하며 백호랑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러니 문 밖의 저것도 못 들어온 게지.”

 

그리하여 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니 백호랑이 앞발이 눈을 가렸다.

 

어허, 아기한테 괜한 소리를 하는구나. 얘야, 저런 것 보지 말고 이만 가 보아라. 사람들 기다리게 하지 말구.”

 

사람들이 기다려요? 라고 묻는데 흰까치가 날개를 얼굴 앞에서 펼치는 바람에 차가운 연못 위로 넘어졌다.

 

인어들이 꺄악 소리를 지르고 나뭇가지에선 봉황새가 놀라 깃털을 퍼덕였다.

 

첨벙, 소리가 들리고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더니.

 

“-선생님, ㅇㅇ환자 눈을 떴습니다!”

 

방 안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도 문 밖으로 시선이 갔다.

 

열린 문 틈으로 검은 옷자락이 스르르 사라졌다.

 

코 끝에는 옅은 담배 냄새가 걸려 있었는데 그조차 점차로 희미해져 병원의 소독약 냄새만이 그 대신으로 강렬해졌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장사 (글숨봇)  (0) 2022.07.04
라이언 왕자를 위해  (0) 2021.10.04
각설탕 놀이 (글 파레트 사용)  (0) 2021.05.14
Alien (글 파레트 사용)  (0) 2021.05.12
동양풍/황제공 도망수  (0) 2021.03.16

문자

2021. 6. 23. 17:17 | Posted by 호랑이!!!

핸드폰의 LED가 조용히 반짝였다.

 

놀랄 만큼 빠르게 손에서 너클이 벗겨지더니, 크나트는 얼른 물에 손을 씻었다.

 

아니, 꼭 지금 그래야겠어요?! 정말로?!”

 

뭐 묻은 손으로 액정을 만질 수는 없잖아.”

 

그런 말은 과자 구울 때나 하세요!”

 

녀석 참.

 

크나트는 상자 뒤로 몸을 웅크린 어린... 젊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무스가 손에 묻어 질겁하고 다시 씻었다.

 

그런거 쓰지 말랬지. 오존에 구멍이 뚫린단 말이야.”

 

잰체하며 우아하게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자 조직원은 크악, 소리질렀다.

 

나이든 티 나요!”

 

뭐 임마. 아저씨 손에 죽어 볼래? 엄호나 잘 해봐. 얼른 보내고 다시 할 테니까.”

 

근무 태만!!!”

 

놀랍게도, 크나트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늘은 언제 옵니까?

 

나도 빨리 보고 싶어. 달링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문자가 돌아왔다.

 

저녁을 만들어야 하니 물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달링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크나트는 얼른 너클을 끼고 근접한 사람의 머리를 세차게 가격했다.

 

퍽 퍽 치면서도 한 손으로 열심히 타자를 치는 도중, 갑자기, 피가 액정에 튀었다.

 

아 이것도 쇠라고 피가 튀네...”

 

크나트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손수건에 물을 적셔 액정을 닦아냈다.

 

그럼 달링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얘기야?

 

이제야 다시 잘 쳐진다.

 

보지도 않고 발로 총을 든 손을 힘주어 밟으며 연달아 문자를 보냈다.

 

내 사랑스러운 작은 딸기라고 부르는 건 괜찮다는 소리군

 

 

보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답장이 돌아왔다.

 

좋아,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딸기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크나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밟고 있던 팔을 콱 내리찍었다.

 

대체. 설마 싸우면서 인스타라도 보고 있어요?”

 

신부님이 느낌표를 보냈어.”

 

젊은 마피아는 그래서요? 라는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다른 설명이 더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신이 나서 손을 씻었다가 핸드폰을 만졌다가 닦았다가 하는 율리케 씨를 보았다.

 

대체 신부가 느낌표를 쓴 게 뭐 어떻단 말인가.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율리안이 고통받는 세계관

2021. 5. 22. 01:17 | Posted by 호랑이!!!

어이, 거기 까만 아기고양이.”

 

이 사람이 정말.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길, 율리안은 두꺼운 서류철에 가방을 꽉 쥐고 눈을 있는 힘껏 사납게 떴다.

 

이제 하다하다!!!?”

 

후후, 제법 앙칼진걸?”

 

율리안은 자신의 길을 막은 청년을 보고, 서류철을 더 꽉 쥐었다.

 

이탈리안은 다 이런가?’

 

나는, 인상이 제법 나쁘지 않은가?

 

..., 혹시 이것은 기선제압? 돈을 뜯는 행위 이전에 일부러 내 기를 죽이려고 그러는 거구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율리안은 안심해서 가방을 뒤적였다.

 

원만하게 넘어가려면 차라리 돈을 줘 버리는 게 좋으니.

 

저도 시간강사라 그렇게 돈이 있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 봐주십시오.”

 

커피 한 잔으로 까만 아기고양이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

 

????

 

??????????????????

 

“...케이크? 쿠키? ?”

 

율리안은 스스로는 놀란 상태지만 타인에게는 더 무시무시해 보일 표정을 수습하지도 못 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

 

지금 작업 거는 겁니까?”

 

!”

 

이 치안 좋은 동네에 이런 게 돌아다니다니.

 

마피아가 산다는 시점에서 질 나쁜 농담 같은 생각을 하며 율리안은 자기 학생 또래의 청년 앞에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저는 동거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고양이의 기사는 지금 없잖아? 즐겁게 놀고, 안전하게 잘 바래다줄게. 내가 아는 좋은 가게가 있는데~”

 

율리안은 상냥하고 친절하게 동거인의 신상정보를 말해주었고, 그 사람은 예의바르게 도망쳤다.

 

하다하다 별 일이 다 있어.

 

하지만 커피는 좋은 생각이다.

 

뜨거운 에스프레소 한 잔 하면서 학생들 숙제나 채점해 볼까.

 

동거인에게는 카페에서 한 잔 하고 들어간다는 문자를 남긴 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키고 해 안 드는 자리에서 빨간 색연필을 들었다.

 

이 부분 해석은 다르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학생은 아주 이해를 완전히 잘못했군.

 

이건 심지어 교재 예문 그대로인데? 이걸?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두통이 생길 즈음 때마침 커피가 나왔다.

 

시선은 학생들 시험지에 두고 컵을 들어 한 모금, 홀짝-

 

으윽!?”

 

웬일로 그렇게 단 걸 먹어?”

 

연분홍 음료 위에 듬뿍 올라간 휘핑 크림과 색색으로 반짝이는 설탕 조각과 깜찍하기 짝이 없는 별 모양 쿠키에 당연하다는 듯 올라간 아이싱까지...

 

사랑스러운 모양의 유리컵을 내려놓으며 율리안은 차마 뱉지 못한 것을 삼키고 학생들의 숙제를 정리해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걸 시키진 않았습니다만 가게 측에서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여기, 묻었어.”

 

입술이 닿았지만 퍼득거릴 기력이 없다.

 

생기없는 눈으로 율리안은 크나트의 손에서 거칠게 도기 잔을 뺏었다.

 

하얀 잔 안에 진한 갈색 액체가 뜨끈뜨끈한 하얀 김을 내뿜는다.

 

그래, 이런 걸 원했어.

 

, 잠깐, 그건-”

 

달아!!!!!!!!!!

 

율리안은 눈을 질끈 감고 잔을 내려놓았다.

 

여기 메뉴 잘못 나왔습니다.”

 

율리안이 손을 들자 머릿수건을 한 종업원이 깜짝 놀랐다.

 

에스프레소 두 잔 주십시오.”

 

“...달링, 나는 코코아 맞는...”

 

에스프레소 두 잔 주십시오.”

 

크나트에게 자기 앞으로 나온 기가 막힌 음료를 밀어주고 기다리고 있으니 새로 음료가 나왔다.

 

주문하신 멜론 소다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애플 사이다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카라멜 더블 라떼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스트로베리 초콜릿 프라푸치노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바닐라 라떼 엑스트라 휘핑크림&시럽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인어공주와 바닷속 친구들 버블티 파르페나왔습니다.”

 

주문하신 러블리큐티바니바니 달걀 초콜릿 아이스크림나왔습니다... 어라?”

 

우리 가게에 이런 메뉴가 있었나?

 

초콜릿 토끼와 당근 모양 과자가 듬뿍 올라간 기기묘묘한 것을 보다 율리안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애플 사이다를 찔끔 마시고 크나트가 나머지를 해치우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각설탕 놀이 (글 파레트 사용)

2021. 5. 14. 00:30 | Posted by 호랑이!!!

다그락.

 

다그락.

 

각설탕이 비틀비틀 쌓였다.

 

비틀비틀, 비뚤비뚤 쌓인 각설탕은 기둥도 없고 주춧돌도 없이 성이 되고 산이 되었다.

 

이걸 좀 보라고 부르는 말.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며 두꺼비를 부르는 노래.

 

꼬마들이 하는 놀이.

 

빈 각설탕 상자는 바람에 굴러 날아가고 부스러진 설탕은 입으로 들어갔다.

 

때로는 부스러지지 않은 것도.

 

마지막 아침으로, 세 개를 한 번에 입에 털어넣고 지레 찔려 웃었다.

 

각설탕 몇 개가 밥 한 그릇이라고 했더라?”

 

마치, 이 녹슨 버스 환승 정류장에, 내가 혼자이지 않은 것처럼.

 

마치 이 세상에, 나 외에 누군가 살아있는 것처럼.

 

 

Alien (글 파레트 사용)

2021. 5. 12. 00:52 | Posted by 호랑이!!!

(※핸드폰이 읽어주는 문장은 실제로 번역기를 돌린 후 옮긴 것입니다)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맹.”

 

쩌렁쩌렁하게 스피커가 울렸다.

 

그리고 손가락이 다시 세모 버튼을 톡 눌렀다.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맹.”

 

금색, 오렌지색, 갈색, 반짝이는 머릿결의 청년들은 둥글고 삐죽삐죽한 구조물 앞에서 핸드폰을 높이 치켜들었다.

 

사람들은 어느 모로 보나 한국인은 아닌 사람들이 내민 핸드폰에 귀를 기울였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맹.”

 

.

 

우리가 외계인 있다. 성하지...”

 

, 누군가의 발걸음이 멈췄-

 

으르르르르르

 

어허, 안돼 보리야! !”

 

. .

 

우리가 외계인 있...”

 

형제님들 교회 다니세요?”

 

톡톡톡톡...

 

우리가 외계인... 배터리가 5퍼센트 미만입니다!”

 

핸드폰은 똑같은 문장만 수백 번 반복하다가 주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5! 퍼센트! 미만이라고!

 

그리고 픽, 화면이 꺼지자 핸드폰 하나에 옹기종기 붙었던 세 명의 청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 충전기 가지고 있는 사람]”

 

“[전 없음다]”

 

“[시간도 늦었고. 그냥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핸드폰을 가지고 있던 청년은 제 앞에 네이티브 노인이 멈추자 드디어 반응이 왔다는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외계인...”

 

그건 실컷 들었어, 이눔아!!!”

 

따악!

 

금발이 찬란한 청년은 이마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어어?”

 

“‘?’는 뭐가 ! 어어디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외국 나오면서 외국어 한 마디 안 익혀서 나와!”

 

이 건방진 놈! 이 자문화중심주의 놈!

 

으아악 교수님! 미안해 학새... 어어, 아임 쏘리? 이 분이 나쁜 분은 아니셔!”

 

, 이 조교! 한국에서 이 좋은 한국어를 놔두고 양놈 말을 쓰다니! 너도 한패냐!”

 

교수님 진정하세요!”

 

저런 놈들을 오냐오냐 받아주니까 맨날천날 존잘님의 연성에 ‘eng plz :)’같은 게 붙는 거야!”

 

아이고 교수님 트위터 그만 하세요!!!

 

이 조교의 손에 교수님은 질질 끌려갔고 지팡이로 위협당한 세 명의 청년만 폭풍이 지나간 뒤에서 심신이 낡고 지쳤다.

 

집에 가고 싶다.

 

해가 지고 어두컴컴하니 별도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 세 청년은 고개를 들어 자신들의 우주선을 돌아보았다.

 

고향별 최고 기술로 만들어진 화력 무기가 실려 있었으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우리... 외계인이라고...]"

 

"[항복... 했으면 좋겠다...]"

 

 

[이쿼프레] 아기수박

2021. 5. 5. 00:39 | Posted by 호랑이!!!

“.....”

 

프레이는 이쿼녹스의 꼬리를... 정확히는 꼬리에 달린... 덩어리... 열매... 아기...를 쳐다보았다.

 

동그랗게 구르는 모습에 수박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기 아우라는 이쿼녹스의 꼬리 끝에 야무지게 매달려서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움직여도 떨어질 기색이 없었다.

 

“당신...”

 

“프레이, 왔어?”

 

...무엇이 문제인가.

 

1. 삐졌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저 아기 아우라

2. 어린이가 꼬리에 위험천만하게 매달려있는데도 떼어내지 않는 어른 아우라

3. 떼어내기는커녕 뭐가 문제냐는 듯한 저 태평한 표정의 어른 아우라

 

 

4. 저 아우라.

 

“...이라는 사람은!”

 

찰싹!

 

손바닥이 등에 작렬했다.

 

“아기가 꼬리에 달려 있잖아요! 비늘이랑 가시도 있는데! 찔리거나 베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 그치만-”

 

그치만이고 저치만이고!

 

프레이는 수박이를 덥석 잡아 들어올렸다.

 

그러나 수박이는 팔다리를 놓지 않아 꼬리까지 덜렁 들렸다.

 

수박이를 이렇게 위로 들어 보고.

 

“...꼬리 당겨, 프레이...”

 

수박이를 이렇게 옆으로 들어 보고.

 

“프레이이, 나 꼬리-”

 

수박이를 이렇게 탈탈탈탈탈.

 

“으아아아아아!!!”

 

“...힘이 좋은걸...”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힘이 좋았던가? 프레이는 아기 수박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이잉!”

 

그제야 수박이가 꼬리에서 고개를 뗐다.

 

베인 곳도 긁힌 곳도 없군, 좋아.

 

이쿼녹스는 무심결에 꼬리를 움직이지 않도록 꾸욱 비늘을 눕히며 등 뒤에서 일어나는 대화에 뿔을 기울였다.

 

“그래요 그래요.”

 

“저 사람이.”

 

“꼬리를 줬는데.”

 

“잡고 걸어서...”

 

꼬리를 잡고 걸었는데 저 사람이 몸을 돌리는 순간.

 

날았다고.

 

불길한 기운에 이쿼녹스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흉흉하게 번뜩이는 붉은 안광이 있었다.

 

 

 

 

 

약간의 마찰음과 약간의 소음과 약간의 대화 후, 프레이는 다시 아기 수박에게 말을 걸었다.

 

“이젠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아마도.”

 

자아 다시 잡아 보세요.

 

프레이의 손길에 아기 수박은 다시 땅을 디디고 서서 이쿼녹스의 꼬리 끝을 잡았다.

 

시험삼아 이쿼녹스가 텁 텁 텁 걸음을 옮기자, 아기 수박은 톡토톡톡톡 뒤를 따랐다.

 

그 흐뭇한 광경을 지켜보다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기 수박이는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네에, 이리 와서... 잡으라구요?”

 

끄덕끄덕.

 

프레이는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랑말랑한 꼬리를 손가락 끝으로 잡았다.

 

텁 텁 텁.

 

톡톡톡톡톡.

 

그 뒤를 무릎걸음으로 슬슬 따라가는데 아기 수박이 이쿼녹스의 꼬리를 톡 톡 잡아당겼다.

 

“이제 부-웅 안 해?”

 

“안 할 겁니다.”

 

그렇죠? 라고, 이쿼녹스를 올려다본 프레이가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쿼녹스는 말하지 못했다.

 

또! 를 외치는 아기 수박을 놀아주고 놀아주고 또 놀아주다가 그만두는 바람에 삐지게 만들었다는 것을.

 

 

[bns]탈론을 위한 괴담2

2021. 3. 17. 18:22 | Posted by 호랑이!!!



"운동회!"

폭죽이 팡팡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말따마다 상인처럼 보이는 하티아 문파장은 대상들이나 쓸 법한 금장식에 녹색 비단을 두르고 악당의 손에 들려있을 법한 점화장치를 덜렁덜렁 들고 다녔다.
그 폭죽 소리에 잠을 깬 문파원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오거나 베개를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다.
전자의 예시로는 꼬마와 청이가 있고.
의외로 후자의 예시는 새암이었다.

"졸려... 죽여...."
"암살자가 그런 농담 하면 못 써"

청이가 새암이에게 한마디를 하자 새암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를 쥐어뜯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활동 시간이 아침(혹은 새벽)부터 저녁까지라면 암살자인 그는 오후부터 새벽까지인 탓이다.

"다들 일어나. 모처럼 다른 문파와 연합해서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더니 잠만 자고! 우리 문파 사람이라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활동을 해야 할 거 아냐. 자꾸 그렇게 늦잠을 자면 머리도 아프고 소화도 안되고 매일 피곤하고 가정이 무너지고..."

이상하다. 왜 안 조용해지지.
새암이는 인상을 썼다.
이 문파에 암살자는 자신만 있는게 아닌데. 이미 진작에 잡아서 조용히 시켜야 할 사람이 대체 어디로 갔담.
당분간 조용해질 것 같지 않아 억지로 눈을 뜨고 밖으로 나오자 이미 뭔가 했는지 거대한 공이 굴러다니고 준비성 좋게 마련된 응원 도구와 돗자리도 있었다.
팬더 옷을 입은 린족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마구 휘두르며 다녔고, 그 뒤를 따라 응원 도구를 하나 든 붉은 눈 곤족이 뛰어다녔다.
종목은 평범했고 각 문파에서 뽑힌 사람들은 산을 뛰어다니며 바통을 넘기거나 서로의 몸을 붙들고 씨름을 하거나 줄에 매달려 힘을 겨루었다.
마지막 주자로 뛰다가 온 새암이는 꼬마가 넘겨준 물을 벌컥 마시다가 졸린 눈을 비볐다.

"꼬마"
"뭡니까 낭자"
"탈론 사형 못 봤어?"

꼬마는 고개를 저었다.
청이도 고개를 저었고.
아는 사람마다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몰라서 임무라도 나갔나보다 하는데 하티아가 다가왔다.

"새암!"
"네!"
"박 터뜨리기 하고 와!"
"네?"

하티아는 금종이를 붙인 부채를 촤악 펼치더니 비밀 얘기라도 하는 마냥 입 가까이에 대었다.
사실 이 운동회에는 상금(문파에서 각출한)이 걸려있고, 이번 박 터뜨리기에서 결과가 정해진다고.
새암이를 뽑은 것은 암살자가 쓰는 무기 중에서는 표창도 있으니 콩주머니 던지는 것도 잘 하리라는 하티아의 계산이었다.

"탈론 사형은 어디 갔어요? 사형한테 시켜도 될 텐데"
"자 자 어서 나가 어서"

곧 보게 될거라며 떠밀린 새암이는 콩이 들어간 하얀 주머니를 잔뜩 받았다.
오늘도 문파장이 영 수상쩍었다.
그리고 곧 와아아 요란한 함성 속에 박이 등장했고, 그 박을 본 새암이는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장대 위에 묶인 것은 커다란 종이 박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탈론이었다.


동양풍/황제공 도망수

2021. 3. 16. 00:31 | Posted by 호랑이!!!

“폐하!”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폐하!!!”

 

높고도 높은 황제의 집무실, 여느 때라면 이 근처로는 다가오지도 못할 시종들이 밧줄에 묶여 끌려왔다.

 

두려움으로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흙먼지가 묻고 찢어진 옷은 이 아름다운 건물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인데다 채 빗지 못하여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시종들의 짧은 앞날을 짐작케 했다.

 

그들이 질질 끌려들어오는 모습에 영영은 주먹을 꽉 쥐다 바닥에 털퍽 엎어져 불경하게도 황제의 옷깃에 매달렸다.

 

“폐하! 도망한 것은 이 다리이고 저들을 속인 것은 이 몸이오니 제발 저만 벌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영영이 검은 비단 자락을 쥐고 빌고 또 빌자 소름끼치도록 우아한 손가락이 영영의 턱을 들었다.

 

“내 어찌 너를 벌하겠느냐.”

 

흑단같은 머리카락은 금과 귀한 홍옥, 진주로 틀어올려 화려하지만 그 아래 눈은 빛 드는 일 없이 새까맣다.

 

사랑하는 영영의 울음을 감상하는 내도록 모양 변하는 일이 없던 그 눈.

 

그 눈은 이번에도, 다정한 모양으로 일그러진 입과 달리 매캐하기만 했다.

 

차마 고개는 떨구지 못하고, 영영은 시선을 내렸다.

 

저에게서 달아나는 시선에 황제는 기분이 나빠진 듯 끌려 들어온 이들 중 하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금을 받아 자리를 비켜주었다지. 그 좋아하는 금을 펄펄 끓여줄 테니 마음껏 손에 쥐도록 하라.”

 

영영은 소스라치게 놀라 시선을 들었다.

 

“폐하, 초하 형은 무인입니다! 그 전대, 전전대부터 황실을 섬긴 가문의-!!!”

 

그리고 당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있었던!

 

“...너는 어쩌면 울음소리까지도 새 지저귐 같구나.”

 

웃는 황제는 커다란 무쇠솥과 열 관의 금을 가져오라 명하였다.

 

금편이 절그럭 절그럭 솥에 담기고 아래 장작을 때자 그 불길이 거세짐에 따라 모양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영영은 필사적으로 황제의 옷깃에 매달렸으나 황제는 냉정해서, 그가 볼 것이 못 되니 병사들에게 영영을 방 밖으로 내보낼 것을 명했다.

 

“폐하! 다시 생각을, 폐하, 폐-”

 

문이 닫혔다.

 

둔중하고 화려하지만 차가운 문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황제가 몸을 돌리자, 붉은 관에서 검은 신발까지를 장식한 온갖 옥 장식과 보석이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의 빛을 퍼뜨렸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일을 시작해야지.”

 

검은 비단에 붉은 빛이 어른거려 핏빛으로 보인다.

 

빛 드는 일 없는 그 눈도 불빛이 일렁여서.

 

마치 저 황제가 어릴 적부터의 친우였던 충실한 신하를 고문하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일컬어지는 하늘의 자손은 열둘에 왕의 이름을 얻었고 열다섯에 빼어남을 보이고 태자가 되어 마침내는 황제가 되었지.

 

그저 명석하고 빼어난 자질을 지녔을 뿐, 한때는 저 눈에도 어린 자다운 순진한 기쁨과 희망으로 빛이 어리었건만, 이제 그 텅 빈 눈에는 잔인함만이 무저갱으로 남고 굳은 얼굴에는 위엄과 무자비함만이 어린다.

 

초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금편 들어간 솥이 끓으며 기포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아.

 

이 손.

 

4세에 검을 잡고 6세에 말고삐를 잡았던 이 손은 이제 다시는 쓰지 못하겠구나.

 

황제는 손수 그의 완갑을 벗기고 양 금군에게 명하여 잡아 눌렀다.

 

“용금군대장 초하여. 네 죄를 네가 알고 있으렷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잡은 두 군인은 처참한 얼굴로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입술로 황제가 속삭였다.

 

“아주 크게, 비명을 질러라.”

 

“죄인 초하, 명을 받듭니다.”

 

초하는 부글부글 끓는 솥을 보았다.

 

좀 멀리 있었다.

 
언제 옮길까?

그 솥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명을 지르래도.”

 

“...예에?”

 

“이 몸에게 세 번이나 말하게 할 참이냐.”

 

귀를 기울이면 문 밖에서는 아직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하!

 

곧 명령을 이해한 초하는 다소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숨을 훅 들이쉬고.

 

전방을 향해 5초간 함성을 발사했다!

 

...이렇게요?

 

...라는 눈으로 돌아보자 황제는 울화통이 터졌다.

 

“비명을 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더 고통스러워해라, 더 아파해라! 더 크고! 괴롭게! 비명을 지르란 말이다!!!”

 

“크아아아아악!!!!!!!!!!”

 

그리고 문 너머에서 귀를 대고 듣고 있던 영영은 문에 기대 주르르 쓰러졌다.

 

“죽강 영영, 얼굴이 창백합니다!”

 

“죽강 마마, 궁으로 드시지요.”

 

“화, 황제가... 폐하께서...”

 

미치셨어.

 

차마 불경죄로 입에 못 올릴 생각을 하며 영영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비명 소리에 입술을 덜덜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