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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용기사의 두 아들이 1.

 

황실의 기니피그님이 2.

 

황제 폐하는 3위에 불과하다.

 

 

 

 

 

...라는 것이 최근 시장의 대세적인 의견이다.

 

미드가르드로 내려온 지 벌써 수 달이 지나고 이레네오는 인간도 부러워할 삶을 살고 있었다.

 

때가 되면 바쳐지는 과일과 채소.

 

부드러운 톱밥과 찢어진 서류로 만들어진 멋진 집.

 

원목을 깎아 만든 집과 장난감과 심지어는 기니피그용 수영장까지.

 

작은 강아지만하게 커진 이레네오가 궁이나 정원 안을 걸을 때면 곱게 옷을 차려입은 시종들이 기니피그님~ 기니피그님~ 하면서 웃는 낯을 보인다.

 

어쩌다 작은 손이라도 내밀어주면 기니피그님의 손! 손톱! 귀여워!를 외치기도 하니 마흔줄에 접어든 기사의 눈에는 오히려 그들이 아이 같아 귀여운데다 외출을 허락받아서 궁 앞의 작은 시장에 산책이라도 나가면 여기저기에서 황실의 기니피그님이라고 부르며 야채를 잔뜩 내미는 덕분에 요즘 밥값이 안 든다며 이야기 하는 것도 들었다.

 

우연히 예민한 후각으로 속이 곪은 과일 같은 것을 몇 개 집어냈을 뿐인데 기니피그님은 영험하시다 소리까지 들으니 인간 삶 따위 부질이 없지 않으냐.

 

기묘한 깨달음을 얻을락말락한 그 때.

 

문을 나선 이레네오의 앞에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 즈음이면 사람으로 와글거릴 시간이건만 길에는 사람 하나 없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야채 가게는 한 곳에 모였으며 심지어 가게 앞마다 깨끗한 면보에 작은 접시를 올리고 그 위에 채소 조각을 올려두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뒷발로 일어섰더니 황실의 기니피그님을 위해 붙여준 고운 시종이 흐트러지는 비단옷을 고쳐 입혀주었다.

 

기니피그님이 어느 채소를 고를지가 요즘 시장의 최대 얘깃거리라 상인들끼리 자기네 것을 제일 많이 드셨다 하였습니다만... 그 이야기가 좀 과열되어 이렇게 자리를 만든 모양입니다. 상품은 평소보다 다섯 배는 더 벌 수 있는 제일 좋은 자리라고 하지요.”

 

?

 

다섯 배?

 

이레네오는 두 발로 선 채 생각하다가 천천히 네 발을 땅에 디뎠다.

 

그렇잖아도 자기가 당근을 잔뜩 먹은 탓에 당근값만 몇 배로 뛰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자리 싸움에까지 끼게 되었다.

 

사람이었다면 분명 원망 들을 일인데 기니피그라서 원망 들을 일은 없겠구나.

 

기니피그라서 참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좀 전까지 시종이 배를 만져주자 발라당 드러누워 짧고 통통한 네 다리를 허우적거린 사실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이레네오는 근엄하게.

 

우선은 가장 가까운 가게로 발을 옮겼다.

 

후일 시종이 이 날을 두고 이야기하기를, 뒤뚱뒤뚱 토도돗 달려가는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의 팔 할이 쓰러졌다나.

 

여하간 기니피그님이 가까이 오자 가게 주인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쥐어짰다.

 

이레네오는 눈인사를 건네고는 접시 위에 작게 잘린 당근 조각을 냉큼 입에 넣었다.

 

오독 오독.

 

허어 이것은 달구나, 신선하고 단단하고 좋은 당근이로다.

 

작은 머리를 끄덕이고 다음 가게로 달려가니 이것 역시 나쁘지 않도다.

 

아니? 이것은 기름에 볶았구나! 그래 당근은 살짝 익혀 먹는 것이 몸에 좋다지, 훌륭한 향이야.

 

그렇게 하나하나 먹다보니 마지막 가게가 남았다.

 

슬슬 배가 부르니 이것은 어이해야할꼬.

 

심지어 마지막의 저 상인은 평소 행실이 나쁘다 소문이 나기까지 했는데 자신이 배까지 불러버렸으니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못하면 가여운 일이 벌어진다.

 

지금도 보아라, 긴장을 해서는 개를 옆에 두고 자기 양배추를 쓰다듬고 있지 않느냐.

 

어허 심지어 떨기까지 하는구나.

 

이레네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까이 다가가 발등 위에 앞발을 척 얹었다.

 

그러자 상인은 화들짝 놀라 저 뒤로 도망가버렸다.

 

가여운 자로다.

 

이레네오는 총총 접시로 돌아갔다.

 

마지막 당근은 어째 주황색이 강하고 냄새도 좀 이상했으나 상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디어디, 앞발- 아니, 손에 들고.

 

그렇게 한 입 깨문 이레네오는 머릿속을 울리는 충격적인 맛에 당근을 툭 떨어드렸다.

 

아니, 이 맛은...!

 

왜 저러시지?”

 

저기 당근이 특출나게 맛있나?”

 

저 집은 싼 맛에 자주 갔었는데 맛도 다른데보다 나았던 모양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이레네오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자 시종이 조르르 따라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어서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그것이 제일 맛있습니까?”

 

이레네오는 접시를 들었다.

 

가장자리를 야무지게 잡고 뒤로 돌자 사람들은 오오, 저것을 선택하셨나보다, 하고 감탄사를 여기저기서 내뱉었다.

 

그리고.

 

이레네오는.

 

틀었던 몸을 다시 돌리며 거대한 원반같은 접시를 상인의 머리에 던졌다.

 

"이놈! 먹는 걸로 장난질을 하다니 못된 놈이로다!"라는 말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였겠지만.

 

 

 

 

 

 

당근에서 났던 것은 마약의 씁쓸한 맛이었다.

 

 

[미드가르드 드레이크] 책임에 대하여

2019. 9. 20. 16:03 | Posted by 호랑이!!!

(*아이들이 말할 때 아이들은 머릿속에 이미 완전한 말을 생각하면서 말하기 때문에 발음을 다시 해보라던가 틀렸다고 말하면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혼란이 생기게 됩니다. 본 소설에서는 아이들의 발달단계와 귀여움을 강조하기 위해 포함시켰으나 사마낙처럼 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배경은 스키르헤임입니다)

 

아빠 책임이 모예요?”

 

이제 글자를 깨우치고 책을 읽기 시작한 아이들이 물었다.

 

, 해야지.”

 

.” “.”

 

.”

 

.” “.”

 

, .”

 

모모모모!” “머머멈머!”

 

. . .”

 

모예요?” “머예요?”

 

사마낙은 읽던 책에서 눈을 뗐다.

 

아이들이 동글동글한 눈으로 이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책임은 행동을 하고 거기 일어나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자세 같은 거란다.”

 

행동을 하고?”

 

결과?”

 

그래, 예를 들면 감히 반역을-”

 

했다가 전부 참수 당한다던가, 라고 이야기하던 사마낙은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할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저기 보면 아빠 보이지?”

 

아이들은 고개를 돌렸다.

 

.” “.”

 

법적으로는 너희 아버지가 아니란다.”

 

하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지, 하고 자상하게 설명을 마친 사마낙은 다시 책을 들 뻔 했다.

 

했다.

 

아이들이 다음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정리를 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

 

“...그거 지금 말해줘야 해?”

 

.”

 

똘망똘망하게 반짝이는 눈을 보며 사마낙은 신음했다.

 

날씨도 좋겠다 공기도 따뜻하고 평화로운데 마음에 평지풍파가 일고 있고나.

 

결국 대답한 것은 이런 것이다.

 

생각 좀 하고 말해도 될까?”

 

이잉.”

 

왜애?”

 

사마낙이 대답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두 아이의 표정이 표독하게 변했다.

 

저 표정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지?

 

아빠 생각할 동안 저기 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

 

그리고 말랑말랑한 뺨을 톡톡 건드려주었더니 알았다며 쪼르르 달려나간다.

 

사마낙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슬그머니 문을 닫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뛰어나가고 가장 처음 마주친 것은 아르카디아네 부모님이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 잘 있었어?”

 

우리 빵- 아르카디아는 저기 밖에 있단다.”

 

같이 곰굴에도 들어갔던 친구의 이름이 나오자 아이들의 고개는 반사적으로 바깥을 향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뛰어나가는 것만큼은 멈출 수 있었다.

 

있자나요.”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요?”

 

그리고 그들 역시 당황했다.

 

? 사람?”

 

왜 그런 질문을...?”

 

일레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몰라요?”

 

그러자 아르데스가 냉큼 안다며 입을 열었다.

 

-”

 

아르데스.”

 

프레드릭이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노련한 기사 답게 상황을 모범적이고 바르게 수습하기로 했다.

 

얘들아, 아이가 어떻게 생기냐면... 그래, 여기 있군.”

 

프레드릭은 마련된 책꽂이에서 적당히 책을 집어들었다.

 

수정에 대한 게... 그래, 120페이지부터 170페이지까지-”

 

이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집어들자 일레하와 에샤드카는 반사적으로 끼악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다다닥 뛰어갔다.

 

공부 시러!”

 

시러!”

 

아이들이 다음으로 뛰어가다 마주친 것은 기니피그였다.

 

기니어피그다.”

 

쪼끄매.”

 

살살 쓰다듬어주고 다시 뛰어가려고 하는데 기니피그가 두 발로 일어서더니 사마낙만큼이나 커다란 기사로 변했다.

 

놀랐지?”

 

놀랐어! !”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면서 손을 뻗자 갈색 머리의 기사는 으쓱한 표정으로 무릎을 굽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그래,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고 있었어? 그러다 넘어진다?”

 

맞아, 그거 물어보려고요.”

 

뭘 물어보려고?”

 

아이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다가 기니피그의 요정에게도 묻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요?”

 

잠시 침묵.

 

그리고 이레네오는 무릎을 굽힌 모습 그대로 기니피그로 변했다.

 

황새가 물어다준단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이라며 사라지는 모습은 재빨랐다.

 

황새?”

 

큰 새?”

 

아이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아까보다는 느려진 걸음으로 다시 자박자박 복도를 걸었다.

 

새가 물어다준다고?”

 

하지만 새 사냥 하잖아.”

 

그럼 출생률에 문제가 생길 텐데.”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보자며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많이 있는 방이었다.

 

다행히도 한 번씩은 인사를 해서 아는 얼굴들이었다.

 

아이들은 문에서 제일 가까이 있던 로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안녕하세요.”

 

아이는 어떻게 생겨요?”

 

마치 잘 지냈느냐고 하는 듯 자연스럽게 묻는 말에 로엘은 잠시 당황했다.

 

아이들에게는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손을 내려 골반을 잡았다.

 

그 모습은 마치 옛날에 내가 사람을 좀 죽였는데~ 라고 아이들 앞에서 망한 농담을 했던 사마낙과도 같았다.

 

아래를 써서 만드는-”

 

그리고 동시에.

 

이 쪽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덮쳤다.

 

잡아!”

 

묶어, 묶어!”

 

“거기 잡아, 입 막아!”

 

애들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크아아악!”

 

그 난장판을 은근슬쩍 몸으로 가리며 로브나프가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부터 미래에 관심이 많다니 장하구나. 너희의 미래가 기대되노라.”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손에서 머리를 빼 그 뒤를 기웃거렸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은 신성함으로 아이들의 눈을 가렸다.

 

그게 왜 저희 미래예요?”

 

언젠가는 너희도 하게 되느니.”

 

동생이 태어나나? 하고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그 이상 답을 얻을 것 같지 않자 뒤를 가리던 신성이 사라지면 로브나프를 지나쳐 다음 사람에게로 갔다.

 

검은 머리가 물결치며 떨어지는 이 사람은 로안 경이라고 사마낙 아버지가 그랬지.

 

머리가 길다는 점이나 수염이라던가가 익숙해서 아이들은 냉큼 경의 양쪽을 차지하고 앉았다.

 

질문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던 로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뜸을 들인 다음 말했다.

 

“...사랑의 신으로서 로브나프님이 만들어 준단다.”

 

하지만 방금 할아버지는 우리가 한다고 했는데-”

 

정말이란다. 결국은 다 신의 손끝에 달린 일이지.”

 

그렇게 대답하고 웃는 얼굴은 선량해 보였다.

 

일레하와 에샤드카는 그렇구나- 라고 대답하다가 방을 살금살금 나가는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루카스 아저씨는 뭐라고 대답해줄 거예요?”

 

“...하하,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들은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루카스에게 흉흉한 기세로 한 걸음씩 타박, 타박 걸어갔다.

 

우리가 애라고 그러는 거예요?”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삐죽, 뾰족하게 변했다.

 

어디 가요?”

 

왜 그렇게 나가요?”

 

그것도...”

 

루카스는 재빠르게 뛰쳐나갔다.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이들의 눈은 그 뒤를 따라 나가려는 사람에게 향했다.

 

몸에 덩굴 문신이 있는 삼촌(중 하나)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하려는 듯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칸 삼촌.”

 

“...도망가려는 거 아니지요?”

 

그리고 칸수스는 그 말을 듣자 아예 눈을 접고 웃었다.

 

아하하하.

 

그리고 아이들은 표정이 더 뾰족해졌다.

 

“...아핫.”

 

그렇게 또 하나가 도망갔다.

 

이제 남은 것은 둘이다.

 

폐하 아빠.”

 

드미르 삼촌.”

 

각오했다는 표정으로, 에셀리온은 목을 가다듬고 드미르치카샤는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얘들아, 그렇게 도망가면 안 되지.”

 

프레드릭이었다.

 

아이들은 그 기사의 옆구리에 끼어 온 것이 아르카디아라는 것을 보고 놀람에 시선이 흔들렸다.

 

아르...?”

 

빵돌아...?”

 

프레드릭은 방 안에 생겨난 거대한 황금 새장을 지나치며 한 손에는 커다란 책을 가지고 왔다.

 

순식간에 방 안에 책상과 의자가 셋 생겨났다.

 

공부 싫어! 라고 외치고 싶었던 에샤드카와 일레하는 손을 꼭 잡았지만 결국은 아르카디아까지 세 명의 학생이 되어 책을 펼쳐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이들이 뭘 하고 있나 확인하러 온 사마낙은 세 명의 아이들이 설명을 듣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다가 황금 새장 속 로엘과 눈이 마주쳤다.

 

“...”

 

“...”

 

“..........”

 

“..........”

 

“....이거라도 받게....”

 

로엘은 사마낙이 내민 초콜릿 상자를 받았다.

 

어째서인지 짠맛이 났다.

 

 

제기랄, 죽겠네 정말!”

 

라는 용기사의 외침이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 이름은 사마낙.

 

신의 부름을 받고 스키르헤임에서의 생활 후 용의 기사로서 미드가르드에 강림한 자다.

 

혼란과 질병, 죽음이 가득한 세계를 용과 함께 도끼날로 정복하여 제국을 세우고 나라를 정비하여 인간의 생활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린 공신으로서 최대 천 년의 수명을 약속받은 자.

 

그는 성격에 걸맞지 않게도 고민을 삼십 분이나 하고 있었다.

 

장군님, 역시 저희가 하는 것이...”

 

안 한다니까, 저리 나가!”

 

말 한마디면 안고 안길 미인이 네다섯이나 되고 곤란한 일이라도 떠맡길 시종은 십수명이나 되며 착하고 성실하게 자란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다 일 년에 몇 번이고 내려오는 각종 비단, 귀한 물건들이 있고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이 사는 그는.

 

현재 금욕 중이다.

 

 

 

 

 

 

 

 

바야흐로 일의 시작은 아이들이 슬슬 저희끼리 놀러다니고 사마낙은 슬슬 황제의 서류까지 본격적으로 손을 대던 일주일 전.

 

오늘은 누굴 불러서 무슨 짓을 할까 하던 나른한 오후다.

 

서류를 서른 장 째 결재를 내리고 쓸데없는 말을 하던 상소문들은 물항아리에 잘 담가 깨끗하게 씻고 나니 참 그에게 보람찬 하루였다.

 

그러다가 아주 잠깐.

 

서류를 삼백 장 째 결재를 내린 에셀리온, 다시 말해 사마낙이 없는 충심으로 모시는 황제가 이걸 좀 보라며 사마낙에게 건넸다.

 

그 쪽을 보지도 않고 건방지게 한 손으로 받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손은 서류를 건네는데 성공하였지만.

 

사마낙은 서류를 받은 다음에야 화들짝 놀라 에셀리온을 쳐다보았다.

 

떨어뜨렸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하지만 사마낙은 서류를 펼치고 나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스쳤는지도 모를 만큼 아주 잠깐이었고, 아주 가벼운 접촉이었는데.

 

그 별 것 아닌 것이 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계속 생각이 나 손목 안쪽을 손톱으로 긁어 보다가 문득 희안한 것을 보는 듯한 에셀리온과 눈이 마주쳐서 일은 여기까지 하겠다며 뒤도 안 보고 화장실로 도망을 쳤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며칠 있었으니.

 

하루에 다섯 명과도 몸을 섞는 사람이 겨우 손목이 스치거나 목덜미를 간지럽히거나 귓가를 건드리는 정도로 수음을 하면 아무래도 이상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대 제국의 노련한 용기사로서 사마낙은 며칠이나 깊은 고민을 하다 훌륭히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너무 자신이 방탕하게 산 결과라고.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도 이어진 기름진 음식과 향기로운 술, 나체의 미인들을 일시에 끊는 것은 쉽지 않았고 그러기에 겨우 일주일 된 오늘 이렇게 고민을 하게 되었다.

 

너무 많이 해서 죽으면 복상사랬는데 너무 안해서 죽으면 뭐라고 부를까, 까지도.

 

지금 딱 한 번이라도 하고 싶어 입 안이 바짝 말랐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었다.

 

자고로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이렇게 괴로운 것은 다 미래의 자신을 위한 것이니!

 

으아아!”

 

문을 거칠게 닫고 나무로 깎은 각좆을 상자 안으로 던지면 잘 깎여서 진주까지 우둘투둘하게 박힌 것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날은 아직 밝았으나 잠이나 든다면 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좋을 터.

 

사마낙은 머리를 틀어올린 비녀와 묶은 천을 뽑아 아무렇게나 탁자에 내려놓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발소리도 없이 그림자가 숨어들었다.

 

그림자는 기척도 없이 가만히 침대 곁으로 다가왔고, 흉터 가득한 손을 쥐어 손목 안쪽을 간질이듯이 쓰다듬었다.

 

창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온 빛이 그 얼굴을 밝혔다.

 

녹색 머리카락에 노란 눈.

 

에셀리온이었다.

 

 

 

아라벨라 29

2019. 9. 1. 15:32 | Posted by 호랑이!!!

 

용모 준수, 성격 양호, 미래도 창창하고 승마 경기에서 2등을 할 만큼 운동도 잘 하고 젊음의 패기, 순수하고 솔직한!

 

!

 

비욘 자작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요즘 수도의 젊은이들은 수염을 밀어버리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지만 영 익숙하질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것도 괜찮군.

 

사람이 너무 잘생기면 매력없다고 하니 자신 정도면 오히려 매력적이고 좋지 않은가!

 

그러니 그 분도 자신을 제일 아끼는 거겠지.

 

그래서 자신한테 중책도 주셨다.

 

렐리악 영애와 결혼하라고!

 

사실 렐리악 영애같이 사납고 안 웃는 여자는 별로 자기 취향이 아니지만 연애 때나 언제 자줄까 하고 여자 목줄에 매여 다니지, 결혼하면 어차피 남편 말을 들어야 할 테니 계속 웃고 있으라고 하면 된다.

 

아니면 여자를 더 만나거나.

 

시골에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기 힘들지만 수도까지 왔으니 어리고 예쁜 애들이야 넘쳐나지.

 

나 같은 사람을 세상이 가만두질 않으니 뭐 어쩌겠어.

 

백작위까지 달면 끝내주겠지?

 

..., 그러고 보니 마굿간에서 공주님도 나한테 마음 있는 거 같던데.

 

백작 달고 공주님 애인해도 괜찮을 거 같고...

 

자나미님 하시는 말씀이 사나기 공주는 외국으로 시집보내거나 변방 귀족에게 준다고 했는데 결혼 전까지 노는거면 나쁘지 않지, 돈도 잘 쓸거 같고.

 

아라벨라는 생긴 건 그럭저럭 괜찮은데 너무 딱딱해.

 

그런 애들이 침대에서는 좋다고들 하지만 침대까지 가다가 도망칠 거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뭐 그래도 한 번 해버리면 이후는 쉽겠지.

 

비욘 자작은 편지지와 향수를 들었다.

 

 

 

 

 

 

 

 

사나기 공주는 아라벨라에게 제 방 하나 아래층의 방을 주었다.

 

마르틴은 아라벨라와 함께 있고 싶어 했으나 자나미 왕자가 데려갔다.

 

누가 애 옆에 있어 줘.”

 

아라벨라는 자나미 왕자를 힐끗 보고는 인상을 썼다.

 

저 왕자의 영역에 자신의 순진무구한 동생이 간다고 생각하니 얼음 언 강가에 어린애를 놓아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내가 갈까?”

 

아니, 저기...”

 

마르틴이 우물거리다가 프루던스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저기,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같이 갈래?”

 

그래도 될까요, 아라벨라 아가씨?”

 

마르틴을 잘 부탁해.”

 

뭐야, 여기 아가씨가 안 가고?”

 

자나미 왕자는 아쉬운 듯 슈체른을 훑어보았다.

 

야성적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타이즈를 입은 다리에 시선이 멈추었지만 사나기가 헛기침을 하자 자나미는 마르틴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데리고 나갔다.

 

미친 거 아냐

 

저런 것도 왕족이라고.”

 

사나기가 툭 내뱉었다.

 

“...하하...”

 

웃기 싫으면 웃지 말게. 그런 걸로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사나기 공주님은 시대에 걸맞지 않는 분입니다.”

 

아라벨라의 말에 사나기는 짧게 코웃음쳤다.

 

그러니 다음 시대는 내 손으로 열어야지.”

 

그렇습니까.”

 

, 영애도 여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여자 왕이 그렇게 보편적인 이미지는 아니지요.”

 

누가 들었다면 당장 지하감옥에 갇힐 말을 하며 사나기 공주가 슈체른을 가리켰다.

 

그럼 저 자는. 영애의 시녀인가?”

 

호위입니다.”

 

여자인데?”

 

여자입니다.”

 

호신술을 익힌 시녀가 아니고?”

 

호위입니다.”

 

여자가 무슨 호위를 해?”

 

아라벨라는 무언가 이야기하려다 고개를 숙였다.

 

영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듣던 슈체른은 두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난 여자도 남자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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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11

2019. 8. 31. 10:27 | Posted by 호랑이!!!

 

얼마 안 있어 셋은 재단으로 돌아왔다.

 

마틴과 티엔은 각기 예정보다 길어진 출장에 대한 보고를 하러 갔다.

 

눈만 마주치면 티격태격하는 사이지만 짐을 내려놓을 새도 없다보니 복도 안에는 무거운 두 발걸음만 울려 퍼졌고 세 명분의 짐을 떠안은 하랑은 계단을 올랐다.

 

마틴의 방 앞에 하나, 티엔의 방 앞에 하나.

 

마지막 하나는 하랑의 침대 위에 쏟아졌다.

 

사탕 캔, 못생긴 모형, 단어장, 그 사이에서 하얀 곰인형을 집어든 하랑은 후다닥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인형을 품에 꽈악 안았다.

 

며칠만에 냄새가 배었는지 호텔에서 나던 것과 비슷한 마른 종이와 꽃 향이 잔뜩 뿜어져 나왔다.

 

하랑은 거기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손에는 누런 부적 종이가 한 주먹 쥐여 있었다.

 

 

 

 

 

 

항구에는 사람들이 많다.

 

떠나는 사람, 떠나보내는 사람, 도착한 사람들과 맞아주는 사람들까지.

 

얼마 전에는 하랑도 저 중 한 자리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떠나거나 마중을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에게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뒷골목으로 들어서며 하랑은 부적 하나를 빼들었고 그것은 손 안에서 화르륵 불타 사라졌다.

 

찾아라.”

 

우우우우 소리를 내며 붉은 개들이 뒤엉키고 움틀대며 골목 골목으로 사라졌다.

 

서생원은 잽싸게 인간이 다니지 못하는 길로 사라지고 하랑은 그들이 모든 골목과 모든 사람들을 훑고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섰다.

 

기괴하게 일렁이는 붉은 빛은 실체가 있는 것처럼 흘러넘쳐 하랑의 옷가지며 머리카락을 밀어올리고 들추어진 머리카락 아래에서 눈동자도 붉게 빛을 냈다.

 

바람이 불었다.

 

바다, 파도에 밀려나온 해초와 무엇인지 모를 비린내가 훅 끼쳤다.

 

항구의 여기에서 저기까지 기운이 술렁이고 하랑의 개들이 사람을 엮어왔다.

 

전부 익숙한 낯짝들이다.

 

그들이 사이퍼일지는 몰라도 귀신에는 면역이 없는지 가여울만큼 떨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

 

하랑은 나무 상자에 걸터앉았다.

 

일꾼들은 눈치를 보다 귓가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넘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

 

하랑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너넨 뭐냐?”

 

그러자 사람들이 고개를 든다.

 

우리, 아니, 저희는. 그냥 여기서 일하는-.”

 

하랑은 그 사람 앞에 다가갔다.

 

시선이 마주칠 듯 가까워지자 그 사람은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하랑은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 나 알지?”

 

, , , 무슨 소리이신지 저는 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일렁이는 머리카락은 다분히 이질적이다.

 

그저 머리카락이 흩날릴 뿐인데 그 움직임은 마치 악마가 지내는 번제의 절과도 같아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랑은 기겁하는 그의 고개를 잡아 저를 보도록 강제로 돌렸다.

 

상대가 오메가인지 베타인지 알파인지는 히트 당시가 아니면 알 수 없다고 마틴 형이 보증해 주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저를 보자마자 오메가라고 달려들었지.

 

누가 시켰어?”

 

아라벨라 28

2019. 8. 30. 00:40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괜찮니?”

 

왕자가 아라벨라를 넘어뜨린 뒤 그대로 돌아 나가자 일시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오늘의 주인공인 공작 부부가 무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첫 춤을 추고 인사를 나눈 뒤 떠나버렸다.

 

섣불리 누군가 다가가지도 않았지만 저 뒤에서 다가오는 사나기 공주와 아라벨라의 눈이 마주쳤는데.

 

다정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기억 속의 짙푸른 눈이 보인다.

 

아라벨라는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굳이 나타낼 필요가 없겠지.

 

“...어머니?”

 

그래, 아라벨라.”

 

하지만 아라벨라는 혼자 일어났다.

 

다시 음악이 연주되고 마르틴이 아라벨라에게 달려왔다.

 

마르틴, 잘 있었니?”

 

-”

 

마르틴이 걸음을 멈췄다.

 

눈이 등잔만큼이나 커져서 굳었다.

 

어머니의 재혼 이후 오년 만의 재회이니 달려가 안길만도 하건만.

 

마르틴은 머뭇거리더니 배운 대로 사피야의 앞에 섰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머니.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마르틴. 나도 보고 싶었단다.”

 

사피야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마르틴의 손을 꼭 쥐었다.

 

장장 5년 만의 만남이니 끌어안을 만도 하건만 이 만남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라서-”

 

아무리 그래도 어미가 되었으면-”

 

“-빨리 시집이나 보내고 싶겠지-”

 

들은 것일까 사피야의 손이 떨리더니 웃는 낯으로 아라벨라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니 가족끼리 담소라도 나누지 않겠니. 네 아버지도 저기에 계신단다.”

 

아라벨라는 사피야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셰필라, 그의 아버지 주위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아라벨라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려고 안달내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다음.”

 

바실리는 마련된 침대에 누워 업무를 보았다.

 

마악 서명이 끝난 서류는 날아가 다른 쪽에 쌓이고 새 서류가 날아와 바실리의 손에 잡혔다.

 

옆에는 찻잔과 식물 줄기로 만든 대롱이 있고 손에 묻어나지 않게 마법으로 처리한 다과가 수북하게 쌓여 바실리만을 기다린다.

 

찻주전자는 저절로 움직여 찻잔이 비기가 무섭게 채워주었고 언제 마셔도 좋을 따뜻한 온도로 유지되었다.

 

조명도 적절한 각도로 맞추어져 눈이 부시지도 어둡지도 않게 유지되고 공기도 적절히 서늘한 정도로 맞추어져 바실리는 편안하게 서류에 명령을 적었다.

 

꽤나 쾌적한 환경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재잘거림만 아니라면.

 

어쩜, 이 침대 자그마한 것 봐. 너무 귀엽다.”

 

오필리어는 이런 걸 잘 하니까 말일세. 이걸 발톱으로 깎았다고 하네만 알고들 있었나?”

 

여기 침대보도 베개도 내가 만든 것이야. 베개 안에는 향초를 잘 씻고 말려서 가득 채웠지. 향이 좋지 않은가, 아가?”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버린 그들의 아가 바실리는 손으로 그렇다는 신호를 보냈다.

 

에멜라 주려고 또 만들었는데 좀 가져다주지 않겠나?”

 

바스락, 소리를 내며 서류가 접혔다.

 

“...슈체른이 이야기하지 않던가?”

 

? 무슨 일 있었어?”

 

바실리는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가 부스스하게 흘러내렸다.

 

에멜라가 죽었어.”

 

? ?”

 

편지에는 사고라고 적혀 있었다.”

 

오필리어라고 불린 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카롭게 빛을 발하는 하얀 눈동자에 분노를 담고.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나는 에멜라가 행복하도록, 후회 없이 살도록 어떤 독도 에멜라를 삼킬 수 없게 축복했다. 어떤 불운한 자연재해도 에멜라를 덮칠 수 없도록 마법을 걸었어! 어떤 우연도 에멜라를 다치게 할 수 없게... 에멜라가, 에멜라...!”

 

그러더니 오필리어는 바깥으로, 발을 구르며 나갔다.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 문 안의 용들은 눈을 감았다.

 

일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실리는 자신을 둘러싸고 엎드리거나 누운 용들을 보다 서류를 뒤집었다.

 

에멜라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면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을 것인데. 가던 중에 습격을 당했어.”

 

이런 것을 보았다며 바실리는 그림을 그렸다.

 

날개 없는 용.

 

머리는 아래를 향하고 몸이 위를 향하는 그림.

 

추락하는 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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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10

2019. 8. 28. 14:28 | Posted by 호랑이!!!

 

바다. 바다. 바다!

 

하랑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따뜻한 바다는 하얗게 부서지며 하랑을 맞았고 손을 힘차게 뻗거나 발장구를 치면 또 첨벙첨벙 요란하게 소리가 났다.

 

물을 좋아하는 붉은 개는 하랑이 물에 들어가기도 전에 뛰어들었고 이어 청사가 물 속으로 스르르 헤엄쳐 사라진다.

 

파도가 거친지 서생원은 밀려온 바다 거품에 조그만 발을 담가보고는 만족했고 덩치 큰 신호는 답지 않게 앞발을 파도 속에 첨벙 넣었다가 뒤로 물러서더니 두두두 달려와 힘차게 뛰어들었는데 옆에 있던 마틴은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았다.

 

조용히 해욧!”

 

나 아직 암말도- 어풉...!”

 

그래, 챌피. 아직 하랑은 아무- ...”

 

! 하라악...! 능려.. 푸푸푸....!”

 

두고보자며 마틴은 회중시계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수영복 차림이었고 무방비하게 하랑이 뿌리는 물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틴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었다며 웃다 서생원과 눈이 마주쳐 어색한 시간을 보낼 뻔 한 하랑은 그걸 수습해 보겠답시고 티엔에게 물을 쏟았다가 티엔이 이끌어낸 쌍룡에 의해 정말로 물에 빠져버렸다.

 

진짜로 기술을 쓰는 게 어디있어!”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 것 뿐이다.”

 

거러온 싸우물 피하쥐 안눈 거 뿌뉘다.”

 

하랑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마틴은 허허 웃으며 수건을 가져다주었는데 하랑은 익숙하게 마틴 앞에 앉아서 머리를 툭 기댔다.

 

그리고 동시에 옆에서 들려오는 음습한 마음의 소리에 마틴이 고개를 돌렸더니 거기에는 티엔이 이 쪽을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뭐예요.”

 

이 하랑. 지금 뭐 하는 거냐.”

 

아무것도...? 안 하는데...?”

 

마틴은 수건으로 하랑의 머리를 탈탈 털어주다가 팔을 둘러 꽉 끌어안았다.

 

남자의 질투는 보기 흉해요.”

 

누가 질투한다는 거냐.”

 

방금 제가 마음을 들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 씨가 아닐까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틴은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예의가 뭔지 아는 영국 남자다.

 

비록 저 인간은 예의도 없고 싸가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하랑의 마음도 없지만!

 

하랑의 마음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 마틴은 기분이 좋아져서 활짝 웃었고 티엔은 이를 꽉 다물었다.

 

하랑이 옷을 가지러 가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티엔은 일부러 앉아있는 마틴의 앞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무슨 꿍꿍이냐.”

 

꿍꿍이라니 듣기 섭섭하군요. 제가 자주 하랑의 머리를 말려주는 걸 몰랐나요?”

 

자주?”

 

누군가가 힘들 때마다 옆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겨우 옆에 있는 것 말인가...?”

 

물론 혼자서완벽하려고 노력한 당신은 모르겠지.

 

더운 날에 주스를 준다던가, 불안할 첫날에 사탕과 함께 힘내라는 말을 해준다던가.”

 

마틴은 손가락을 꼽았다.

 

그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당신은 모르니까.”

 

누가 모른다고 그러나.”

 

티엔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하랑이 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하랑.”

 

얼마간 걷자 하랑이 겉옷을 들고 오는 것과 마주쳤다.

 

“...뭐요?”

 

, 조가비... 그걸로는 안 되나?”

 

뭔 조가비? 저번에 준 그 흉... 모형?”

 

그래.”

 

그게 뭔데? 그거 무슨 주술 도구였나? 하랑은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그 흉물한테 무슨 기운이 느껴졌던가? 자신은 잘 모르겠는데, 더군다나 받은 후로는 계속 잠만 자서 어디 쓸 수 있나 시도도 안 했었다.

 

“..., 또 뭐라고 하게?”

 

공손하게 말해라, 하랑.”

 

아파서 잠만 잤다고 하면 또 수련이 부족하다 하려고 그러시옵니까? -.”

 

티엔의 인상이 구겨졌다.

[크더건/율리안] 주말

2019. 8. 18. 00:02 | Posted by 호랑이!!!

“-하는 일이 있었어. 거기 바다가 꽤 괜찮던데 휴가나 갈까?”

 

이제 슬슬 휴가철이잖아, 라고 하는 것에 율리안은 마악 입에 밀어 넣었던 피자를 꼭꼭 씹어 삼켰다.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아서 안 됩니다.”

 

그럼 주말은?”

 

율리안이 잔을 들자 크나트가 병을 기울였다.

 

이 남자는 술도 안 하는 주제에 꽤 괜찮은 술을 골라온단 말이야.

 

언제든 저장고에서 좋아하는 것을 고르라는 말을 들었지만 굳이 자신이 고르지 않아도 그 날의 식사에는 제법 어울리는 술이 따라오고는 했다.

 

한 모금 마셔 입 안을 가신 다음에야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선약이 있습니다.”

 

선약?”

 

이 안에 베리류를 담그면 맛이 더 좋아지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하는데 문득 거슬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느샌가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짓는 남자가 와인병에 뚜껑을 닫는다.

 

누구랑?”

 

저 사람 목소리가 원래 이랬던가.

 

유달리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딘가 귀에 거슬렸다.

 

학생이 잠시 만나자고 해서요. 토요일 오후 즈음 나가서 과제랑 수업 이야기를 하고 저녁까지 먹고 올 예정입니다.”

 

교수가 수업시간 외에 학생을 만나도 되나?”

 

남자니까 괜찮습니다. 그리고 교수도 아니고.”

 

불만스러운 시선이 율리안에게 닿았으나 율리안이 고개를 드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 주말이 되기까지 크나트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어쩌면 혼란인지도 몰랐지만 크나트도 율리안도 표정에 그렇게 세심한 편이 아니었다.

 

좀 알아차릴 것 같은 사람들은 일부 조직에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는데 그나마도 크나트의 너클에 실린 힘으로 가늠이나 할 정도일까.

 

“...아 찜찜하네.”

 

한바탕 육체노동을 마치고 크나트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뭐가 말입니까?”

 

어제 저녁에 머리를 비울 거라며 잔뜩 구웠던 쿠키 바구니를 내밀면서도 크나트는 부루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모르겠어.”

 

뭐 이런 게 다 있담, 하는 눈빛을 받으면서도 크나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째깍, 째깍, 시계가 움직이고 한참이나 지나서 다시 입이 열렸다.

 

“...저녁 먹으러 갈래?”

 

사주는 겁니까?”

 

“...아냐 안 갈래.”

 

“...”

 

!니지 갈까!”

 

“...제가 살까요.”

 

아아아냐 안 가. 안 가.”

 

미친 영감.

 

어느 조직원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결국 크나트는 저녁때가 될 때까지 사무실 소파에서 엎어져 있었다.

 

다른 조직원들이 배달시킨 중국 음식을 깨작거리면서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일이 더 없을 거 같은데 먼저 집에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까?”

 

고개가 번쩍 들렸다.

 

무슨 일 있어도 연락 안 드리겠습니다.”

 

그럴까.”

 

몸을 일으키는 것에서 그래, 내일 보자!며 문을 박차고 나갈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어린 조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애용하는 검은 차를 타고 크나트는 어느 식당 앞까지 갔다.

 

식당 앞에는 주차할 곳이 없었으므로 한참 빙글빙글 돌다가 문간에 보이는 사람에 차는 갓길에 멈추었다.

 

익숙한 검은 머리카락은 익숙하지 않은 흰 셔츠 차림을 하고 멀끔한 얼굴로 종이를 보며 이야기한다.

 

자연히 시선은 맞은편에 닿았다.

 

반짝이는 금발은 멋을 부려 넘기고 저런 식당에 가는 것 치고는 옷도 제법 번쩍거린다.

 

맘에 안 들어.

 

크나트의 손에 들린 쿠키가 우득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마악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인지 둘은 자전거를 묶어놓은 곳으로 향했고 크나트는 창문을 내렸다.

 

- 아니, 스호르.”

 

또 보는군요.”

 

마침 지나가는 길이었거든. 타겠어?”

 

금발은 검게 선팅된 검은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학생이지? 학생도 태워줄까?”

 

...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교수님!”

 

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뒷모습에 크나트는 자그마치 닷새 만에 흥, 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율리안은 크나트의 차 시트며 옷에 과자 부스러기가 쏟아진 것을 보고 경악했고 청소를 돕겠노라며 크나트를 쫓아냈다.

 

시키는 대로 청소기를 가지고 나온 크나트는 운전석에 고개를 숙인 율리안 쪽으로 걸었다.

 

발걸음 소리는 죽이고, 인기척도 없애고.

 

바로 뒤까지 와서도 조용히 등을 내려다보다가.

 

그러다 손이 다가갔다.

 

목을 조를 듯 벌어진 손에 눈은 깜박임도 없이 멈췄다.

 

이대로.

 

쥐기만 해도.

 

이제야 만들어진 안온한 이 관계는 깨어지겠지.

 

하지만 그것이 미워하는 것이라고 해도.

 

언제나 머릿속을 차지하는 첫 번째가 나라면.

 

생각하는 것이 나라면-.

 

쿠키를 부스러뜨릴 때처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목을 잡아챌 것 같았던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주먹을 간신히 움직여 유리에 닿으면 노크처럼 그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

 

나 왔어.”

 

깔개는 털어 두었습니다. 여기에 과자 부스러기가 남아서-”

 

.”

 

뭡니까?”

 

크나트는 웃었다.

 

내가 좋아, 아까 그 학생이 좋아?”

 

율리안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청소기나 주십시오.”

 

내가 더 좋다고 하면 주지.”

 

또 이런다.

 

당신이 더 좋습니다. 됐습니까? 빨리 청소기나 내놓으십시오.”

 

율리안은 킬킬거리고 웃는 크나트의 손에서 청소기를 잡아채듯 빼앗고는 바로 스위치를 켰다.

 

하여간 이 사람은, 진지해지는 때가 없다고 율리안이 생각했다.

 

 

아라벨라 27

2019. 8. 17. 11:59 | Posted by 호랑이!!!

 

그리고 공부도 못 하고, 뭐 하나 뛰어난 것도 없고, 하는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중에 아라벨라는 사나기 공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몇 사람 사이에 꼭 들 인물에게로.

 

사나기 공주는 화려하고 무겁기 그지없는 옷을 입고, 춤을 추지 않았지만 그를 위해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여전히 아무 소리나 떠들면서 자나미가 웃었다.

 

원래 사나기에게는 제 어미 이름과 외가의 이름, 그리고 여러 세력의 이름이 있었으나 고친다고 하기에 내 이름하고 비슷한 것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다 성별이 바뀐 이름들이니, 사실상 사나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

 

일로냐 공작은 있지만 일로리오라는 여자 공작은 없으니 말이야.

 

자나미 왕자님은.”

 

아라벨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 안의 자나미의 손이 꼼짝달싹 할 수 없이 잡히며 자나미 왕자는 끄으윽, 소리를 냈다.

 

잔인한 사람이군요.”

 

왕의 자리를 약속받은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면도 필요하지. 그렇잖은가.”

 

꼴에 혓바닥은 잘 놀리는군.

 

그런 생각을 하고 아라벨라는 자신이 불경한 생각을 하였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할머니 아래서 자라다보니 이렇게 된 건가? 아니면 용 때문에?

 

아니오. 자나미 왕자님께서 하신 일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고 기준 이상의 일이었습니다.”

 

아라벨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멍청한 소리를. 지금 이 나라의 왕자인 나에게 하는 것인가?”

 

자나미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낮아졌다.

 

아라벨라는 진한 금색 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저 낮아진 목소리는 그러는 것이 위협이 될 것이라고 알기 때문에 나온 목소리다.

 

그런 것에 아라벨라는 겁먹지 않았다.

 

그리고 짐작했다.

 

나는 원래부터 이런 인간이었구나.

 

사람에 맞는 말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나미가 몸을 홱 틀자 그 리드에 몸을 맡겼던 아라벨라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넘어졌다.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자나미의 표정이 더욱 거만해졌다.

 

멍청하기가 그지없구나 렐리악의 영애.”

 

 

 

 

 

 

 

자나미 블랙스캣 비 아메론!”

 

쿠트 왕비의 목소리가 쨍하게 높았다.

 

자나미는 성의없는 태도로 힐끗 쿠트 왕비를 쳐다보았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못난 놈. 렐리악의 영식 또한 제 누이를 의지하고 따르던데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아라벨라 렐리악을 넘어뜨려!”

 

이 못난, 못난 놈!

 

자나미 왕자는 고개를 양 옆으로 까딱까딱 움직였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나이 차이가 좀 있다 보니 영식이 영애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는 하더군요. 그래서 영식이 영애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처리할지도 말해주었구요. 영식이 영애를 우습게 알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집니다. 게다가 내일 친구들을 만나니 거기에 데려갈까 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듯, 자나미 왕자의 친구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집안에서 경쟁할 형제가 없는 자들은 오냐오냐 떠받들어져 거만하게 자랐고, 형제가 있는 자들은 그 형제에게 이상한 열등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쥐톨만한 권력이라도 얻어먹겠다고 몰려들어 아부하고 아첨하며 소란을 피우니 저잣거리에서는 이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가게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고 사람을 때리며 행패를 부리니 왕비는 자신이 가진 권력과 인맥으로 어르고 달래며 협박하여 없는 일로 만들려 노력하였으나 왕자는 반성하지 않았고 매일같이 소란스럽고 천박하게 굴었다.

 

술과 사람을 파는 가게에 출입을 하며 행실이 어떠하다 라는 것을 알았을 때 왕비는 현기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하였으니 왕비는 왕자의 친구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사실, 싫어했지만- 이런 때 왕자의 왈패 친구들은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아직 렐리악 영식은 미성년자이니 술은 안 돼.”

 

네에, 네에.”

 

렐리악에서 항의가 들어온다면 자나미 네 앞으로 들어가는 예산을 없앨 것이다.”

 

네에 네.”

 

쿠트 왕비는 목끝까지 차오르는 울화를 꾹 눌러 참았다.

 

그럼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자는 대답도 듣지 않고 떠나갔고, 쿠트 왕비는 문이 닫히자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이 코르셋이라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왕자까지 낳아서 왜 이런 고민들을 해야 하는지.

 

쿠트 왕비가 손짓하자 하녀가 다가와 왕비의 코르셋을 더 강하게 조였다.

 

왕비는 이를 악물었다.

 

렐리악만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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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6

2019. 8. 13. 17:38 | Posted by 호랑이!!!

 

해가 지고 진행된 결혼식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새하얀 드레스에 새까만 정장에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리고 페데사 공작이 속삭이는 사랑의 말 전부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과 마르틴 뿐인지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는 극의 결말을 보듯 눈을 크게 뜨고 몸을 기울였다.

 

식의 맨 마지막에 귀족들이 다같이 나비는 잠들면 어쩌구저쩌구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참 놀라웠지만 그뿐이었고...

 

면사포를 쓴 미티우 페데사 공작부인은 분명 아름답기는 했지만 부러질 듯 졸라맨 허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라벨라만의 생각인지 수도 가까이에 산다는 미혼 여성 귀족과 기혼 여성 귀족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허리를 졸라매고 있었다.

 

심지어는 졸라맨 코르셋을 밖으로 드러내 장식을 단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한 마디씩 정숙하다느니, 조신해 보인다느니 하는 칭찬을 한다.

 

좀 의무적으로.

 

누군가 다가와 벽에 기대기에 보았더니 사나기 공주였다.

 

끔찍하지 않나.”

 

오셨습니까 공주님.”

 

불과 50년 전에 건강을 이유로 폐지당한 옷이건만 다시 유행한다는 것이.”

 

“50년 전이요?”

 

나도 그 때 일을 보지는 못했으나 듣기로는 아주 훌륭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하기는 공주의 나이가 아라벨라보다도 세 살이 어렸다.

 

그래, 그대가 물어보는 것은 어떠한가, 라고 다시 사나기 공주가 입을 열었다.

 

당시 코르셋을 폐지했던 데에는 자네 할머니가 공이 컸다고 하네.”

 

할머니가? 궁궐에 출입하던 사람이라고?

 

아라벨라의 의아한 표정에 사나기 공주가 무어라 덧붙이려는 순간 사람들이 우르르 물러나 길을 만들었다.

 

그 이상한 움직임에 고개를 틀자 자나미 왕자와 왕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레이디-”

 

자나미가 손을 들자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 연회를 알리기 위해 왕실 가족이 춤을 추어야 하지만 자나미 왕자에게는 약혼자도 연인도 없었다.

 

심지어 누구와 춤을 출 지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진다.

 

자나미의 손이 아라벨라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아라벨라. 나와 춤을 출 것을 명한다.”

 

꺄악, 하고 환호와 비명이 들렸다.

 

어쩜 귀엽기도 하시지.”

 

아직 서투신 거야.”

 

명령이라고 했어.”

 

재잘거리는 소리는 퍽 사랑스럽게 느껴졌을 터다.

 

저 멍청한 명을 받은 게 자신만 아니라면!

 

쿠트 왕비가 자나미의 앞을 팔로 가로막았다.

 

렐리악의 영애, 미안하기도 하지. 아직 왕자가 여자에게는 서툰 터라 무례하게 행동했구나. 아직 영애가 서툰 남자에게 귀여움을 느낄만한 나이는 아니니, 부디 저 명령이라는 말을 부탁으로 바꿔 들어주지 않겠나.”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마마.”

 

아라벨라는 드레스 대신 입은 긴 기장의 겉옷자락을 들며 무릎을 굽혔다.

 

쿠트 왕비가 부채로 건드리자 자나미 왕자는 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아라벨라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쿠트 왕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며 자나미 왕자의 등을 부채로 세게 찔렀다.

 

영애에게 잘 하는 것이 좋을 거다, 왕자.”

 

, 어머니.”

 

아라벨라와 자나미 왕자는 홀 중앙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쿠트 왕비는 왕에게 몸을 기울였다.

 

전하. 이번 대의 렐리악은 왕가에 호감이 있는 모양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그러한가. 그렇게 보이는군요.”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사들은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고 자나미는 아라벨라의 손을 홱 잡아당겨 기대게 했다.

 

왜 저한테 춤을 신청하신 거지요?”

 

그러자 자나미가 고개를 숙였다.

 

자네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서.”

 

꽤 그럴싸하게 낮춘 목소리다.

 

하지만 아라벨라는 부족한 눈치로도 자나미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 수 있었기에, 떠 보기로 했다.

 

사실 제가 아니라 사나기 공주님께 신청하려던 것은 아닙니까?”

 

사나기? , 그런 멍청이 따위.”

 

이 왕자는 생각을 대장으로 하나?

 

공주님은 고귀한 피에 걸맞는 분처럼 보입니다만. 사나기 공주님께 그런 말을-”

 

자나미의 눈이 아라벨라에게 멈췄다.

 

금빛 눈은 짐승의 것마냥 이질적이다.

 

그러고 보니, 영애는 소문에 무지하지.”

 

어쩔 수 없으니 말해주마고 자나미가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사나기의 어미는 사나기가 눈을 뜨기도 전에 죽었는데, 나의 어마마마를 보고 어마마마, 하고 쫓아다닌다. 밀어내고 부정해도 어찌나 고집이 센지.”

 

네에?”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사나기는 자나미보다 어렸고 사나기 공주의 어머니는 왕비였다.

 

전 왕비며, 적통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주를 후궁 소생 왕자가 저렇게 부르다니.

 

아라벨라는 당황스러움에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이름을 시키는대로 바꾸면 우리 가족에 넣어준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바꾸셨나요?”

 

자나미가 웃었다.

 

! 바꿨다, 그 멍청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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