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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마] 아쿠아리움

2015. 10. 19. 01:39 | Posted by 호랑이!!!

온 몸을 아쿠아리움의 유리벽에 붙이고 귀를 가져다대면 맞은편 유리에서 몸을 붙인 챌피의 가슴에서 째깍, 째깍 시곗소리가 났었다.

 

고개를 돌려 이마를 붙이고 보면 마치 물 속에 내가 들어간 것처럼 물 속이 생생하게 보이고, 저 멀리 금발이 푸른 빛을 받아 금속빛으로 빛났었다.

 

그래 그 옛날에는.

 

릭은 유리벽에 기대 감았던 눈을 떴다.

 

푸른 물 속에서 금색 은색으로 반짝이는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친다.

 

저 깊은 바닷속으로 게이트를 열어 들어가면 있을법한 물고기가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마냥.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이라도 연다면 공기방울이 부그르르 나올 것 같고 무언가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면 무거운 물 때문에 몸이 묶일 것 같은.

 

그런 어두운 아쿠아리움 안은 조용하고, 폐장시간이 넘은 때라 릭은 혼자였다.

 

“..., 분명 여행 외에는 쓰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사람이란 절망에 빠지면 꽤나 자포자기하게 되는군.

 

릭은 쓰게 웃으며 물 너머를 보았다.

 

일렁이는 물과, 해초와, 떼지어 헤엄치는 물고기들 너머로 반짝이는 금발이 보일랑 말랑.

 

갈색 옷과 주근깨.

 

친근한 웃음.

 

눈을 감고, 이번에는 귀를 대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퍼지고, 귀를 기울이면 시곗소리가 유리벽에 부딪혀 째깍거리며 들려온다.

 

마치 블론디의 심장에서 시작된 것 같은 두 가지 소리.

 

여기에 이마를 바싹 붙이고 눈을 뜨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날 제 옆에서 마틴은 한참이나 숨을 참더니 머리를 유리벽에서 떼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여기서 익사할 것 같아요, 라고 했었지.

 

그 때는 웃어넘겼지만 오늘은 절절하게 가슴 속으로 그의 말이 박혀왔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더니 가슴이 메어와 숨을 쉴 수 없었다.

 

물에 빠져서 죽을 것 같소.”

 

일렁이는 물 너머의 어두운 유리벽에 그의 모습이 반짝인다.

 

귀를 기울이면 그의 가슴에서 째깍거리던 회중시계의 소리가 들려온다.

 

, 따뜻한 바다가 어울리는 사람.

 

익사하여도 좋으니 다시 내게 밀려와 주시오.

 

익사하게 해 주시오, 나의 블론디.

 

 

[홀든] 말 안듣는 동생

2015. 10. 18. 04:28 | Posted by 호랑이!!!

다이무스씨, 전화 왔습니다.”

 

휴식시간, 다이무스는 눈을 감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사무직원 중 하나가 손짓을 했다.

 

어디에서 온 전화지.”

 

기사단입니다.”

 

벨져의 기사단인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다이무스는 전화를 받으러 걸어가는 동안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보니 어제 저녁에 벨져가 음식을 남기는 것에 대해, 오늘 아침은 머리를 묶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짧게 잔소리를 했지.

 

그 때문에 지금 벨져의 상태는 아마.

 

1. 여기저기 성질을 부린다.

 

...라던가.

 

2. 기사단 앞으로 비싼 물건을 주문해 놓아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라던가.

 

다이무스 홀든입니다.”

 

왜 다들 벨져를 어려워하는지 모르겠군.

 

까탈스럽고 까다로운 아이이긴 하지만 어려워 할 아이는 아닌데.

 

[벨져 홀든 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3. 가출.

 

다이무스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전언 철회, 성질 더러운 동생이다.

 

벨져 이 녀석은 일전의 긴 가출 동안 자신이 사라지면 형이 찾는다는 것을 깨달아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툭하면 가출해대기 시작했다.

 

어차피 찾으면 자신의 집 침실에서 누워 있거나 서재로 쓰는 방 구석에 있겠지.

 

어찌나 가출을 해대는지, 이젠 저 기사단도 자신에게 찾아달라고 전화를 한다.

 

바빠서 못 찾을 것 같군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쪽이 뭐라고 하건 간에 수화기를 놓았다.

 

휴식시간은 아직 얼마간 더 남았으나, 빨리 종이와 펜을 손에 쥐고 서류를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땡땡 종이 치고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종이 쳐서 퇴근 시간임을 알릴 즈음에도 계속 손을 바삐 움직였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고 옆으로 손을 더듬어 아까 타서 옆에 둔 홍차를 찾았으나, 없다.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벨져가 한 손에는 홍차 잔을 손에 쥐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냐, 벨져.”

 

형아는 나 걱정도 안 되는가?”

 

전혀.

 

무슨 불의의 사고에 휘말렸대도 사고를 친 쪽이 불쌍하지 휘말리는 벨져는 안 불쌍하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건만, 이 동생들은 다이무스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 너무나도 능숙해서.

 

벨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손목을 휙 뒤집어 다이무스가 보던 서류에 찻물을 확 끼얹어 버리더니 문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벨져.”

 

찻물이 서류에 번져 글을 읽을 수가 없군.

 

벨져의 발소리는 멀어져만 갔다.

 

벨져 홀든!”

 

, 이 말 안 듣는 녀석.

 

다이무스는 미간을 문질렀다.

 

오늘 저녁에는 무릎 위에다 엎어놓고 빨갛게 자국이 나도록 때려 주지.

 

 

[다이글?/연령반전] 망나니가 되오리다

2015. 10. 17. 02:07 | Posted by 호랑이!!!

접니다 형님.”

 

어서와 다이무스.”

 

노크를 하고 들어서면 난롯가의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이글, 형이 보인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어 창문에 부딪힌 비가 흘러내리고 있지만 이 방 안만은 다른 세상인 양 따뜻하고 건조하다.

 

타닥타닥 난롯가의 불은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제가 끓여 들고 온 홍차는 좋은 향기를 주위로 퍼뜨렸다.

 

이번에 학교를 졸업했다지? 회사로 올 거야?”

 

“...아뇨, 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글 홀든, 차기 가주는 읽던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기사단? 벨져처럼?”

 

아니오.”

 

설마하니 연합으로 가겠다던가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

 

비록 이글의 눈은 책에 박혀있다지만 그 너머로 자신 역시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검을 놓을 것입니다.”

 

.

 

책이 덮였다.

 

다이무스?”

 

이글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다이무스 홀든, 자신의 막내동생이 어떤 이던가.

 

무뚝뚝하고 고결하여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고귀한 기사 같던 게 유일하게 승부욕을 보이고 즐거워하던 것이 검 뿐인 녀석이.

 

검을 놓는다니.”

 

놓을 것입니다.”

 

검을 놓는다고? 이글은 다시 다이무스가 한 말을 되뇌어 보았다.

 

상상이 안 가는데? 정말로? 지금 저 녀석이 내가 알아듣는 언어로 얘기한 게 맞나?

 

형님.”

 

다이무스는 진지한 얼굴로 이글을 불렀다.

 

아주 진지한 결심을 말하면서.

 

저는 망나니가 되겠습니다.”

 

이글은 입을 떡 벌렸다.

 

팽팽하게 잘 돌아간다고 자부하던 머리가 지금만은 굳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이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할나위없이 절도있고 격식을 차린 자세로 뚜벅뚜벅 걸어나가서는, 심지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오 세상에.

 

이글 홀든, 유서깊은 홀든 가의 차기 가주이자 유달리 출중하다는 평을 듣는 삼형제 중 첫째, 다시 말해서 장남은.

 

올해로 스물넷 먹은 제 동생의 때늦은 반항기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랬던 것이 불과 며칠 전, 이글은 집으로 연락이 와서 어딘가의 변두리에 있다는 술집으로 갔다.

 

저보다 커다란 동생이라 간신히 어깨에 팔을 걸치게 해 부축하면서 이글은 한숨을 쉬었다.

 

확인해볼 것도 없이, 동생의 지갑은 벌써 다 털렸을 것이고.

 

중간에 싸움까지 했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는 길게 상처까지 났다.

 

망나니짓을 한다 해도 밤이면 돌아오고 아침에야 나가곤 하는데 분명 오늘 아침에는 얼굴에 저런거 없었단 말이지.

 

“...요령없는 놈.”

 

“...... ...니다...”

 

입을 열자 알콜 냄새가 훅 풍겨온다.

 

쯔쯔 혀를 차며 이글은 계속 걸음을 걸었다.

 

조용하고 사람 없는 좁은 거리 위로 새까만 하늘에 구름이 끼어 달빛조차 흐린 곳을.

 

작정하고 반항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열 몇 살 때 하던 짓보다 못하니, 넌 아무래도 반항아는 못될 것 같네~”

 

어둡고, 사람 없고, 집까지 가는 길은 멀다.

 

적막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조용하고 무뚝뚝한 막내는 술에 취했으니, 이글은 이 때가 좋으리라 싶어 딱 조용함에 어울릴 정도의 목소리를 조근조근하게 입에 올렸다.

 

“...그래서, 왜 뜬금없이 반항을 하는 거야.”

 

다이무스는 멈칫, 하더니 다시 걸음을 비틀거렸다.

 

“...저는 강해져봤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문의 분란의 씨가 되고 싶지 않다.

 

괜히 여기저기 이용되다가 누군가의 짐이나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

 

작은형은 결국 원하는 곳으로 떠나 가문에서 벗어났으나 자신은 쓸데없이 미련이 많아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겠지.

 

이글은 두어번 더 채근했으나 다이무스는 입을 꽉 다물었다.

 

별 것 아닌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가치 없는 사람으로 보여서, 형님 옆에 남아서.

 

온전히 가문을 받치는 작은 돌멩이이고 싶다.

 

기둥 따위, 주춧돌이 아니어도, 한 장 유리가 되어 창을 메우거나 한 겹 얇은 천이 되어 집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어디 보람차지 않을까.

 

이글은 그런 다이무스를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령없는 놈.”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에 이것과 반대라 자신이 막내였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도 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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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X빅터] 고양이 -10 (완)

2015. 10. 16. 00:18 | Posted by 호랑이!!!

 

하루 더, 라고 말했지만.

 

그 하루는 이틀이 되었고 그 이틀은 사흘이 되었고.

 

처음의 목적은 분명히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좋은 것을 주고 좋은 자리에서 재우는 것이었지만 어느샌가 그 말도 무의미해지도록 자연스럽게 빅터는 이글의 집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밤.

 

이글은 빅터의 학교까지 손수 마중을 가서 집으로 데려왔다.

 

거실에는 방을 밝고 따뜻한 빛으로 물들이는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고 있었고 그 앞 깔개에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할짝이는 빅토르가 앉아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맞았다.

 

“...따뜻하네.”

 

원체가 크지 않은 집이라 그런지 방 모든 곳에 따뜻한 불빛이 닿아서 마치 집이 따뜻한 불꽃으로 가득찬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우유 데워올게~”

 

“...초콜릿도.”

 

이글이 집안일을 돕도록 내버려 둔 뒤로, 빅터는 조금씩 말이 늘었다.

 

방금처럼 요구가 생기기도 했고, 어떤 때는 당근은 먹기 싫어같이 까다롭게 굴기도 했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바닐라빈 향을 두어방울 떨어뜨리고 설탕도 조금, 초콜릿을 타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미 한밤중인데 무슨 일인지.

 

빅터, 대신 열어줘-”

 

대답은 없었지만, 얼마 안 있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은 집 가장 안쪽에 있어서 이글은 나름대로 귀기울임에도 별 소리는 듣지 못했다.

 

다만 별 일 아니겠거니 하며 태평하게 우유를 가지고 나올 즈음에, 어떤 남자가 빅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당기는 것을 보아서.

 

옆에 세워두었던 검을 검집째 들어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막아서며 쳐다보는 빅터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뽑아 휘두를 것을 간신히 멈추고.

 

습관적으로, 다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이거 처음보는 사람인데 여기에 왜 왔을까~?”

 

능력자들이란! 하여간 양아치같은 놈들 뿐이라니까!”

 

그 사람이 입을 열고 빅터의 뺨에 맞은듯한 자욱이 도드라질수록 언제쯤 베어버릴까 하는 기대감에 눈은 깜박임을 잊고, 입꼬리가 스멀스멀 위로 기어올라갔다.

 

빅터만 저리 가면, 잠깐 눈이라도 감으면...

 

, 빅터는 공성전에 참가하잖아? 그럼 이 정도야 익숙하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아, 냉큼 검 손잡이를 잡아 한 뼘쯤 뽑았는데 빅터가 제 손 위에 손을 얹어 눌렀다.

 

“...... 돌봐주는 친척이예요.”

 

돌봐주는?

 

이글의 흥분감이 한 김 식었다.

 

대신 그 속에서 더 기분 나쁜 것, 흔히 노여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글부글 기포를 터뜨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돌봐준다는 것은 적어도,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플 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낮동안 학교에 보내는 대신 공장에 보내는 것도 아니었고.

 

우유에 설탕을 타 달라던가,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와 보낸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빅터는 싫다던가 좋다던가 하는 말이 늘었고, 굳은 표정이 풀어졌고, 어떤 때는 일부러 눈을 흘기기도 하고, 싫은 일에는 버둥거리며 반항도 할 줄 알게 되었는데.

 

이 친척이라는 작자를 만난 지 겨우 몇 분, 몇 초만에!

 

다시 바싹 얼어서는.

 

고양이를 주워 데려왔던 비오는 날 밤처럼, 얼어서, 긴장해서, 주눅들어서, 눈치보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침묵이 늘고, 표정이 굳고, 참는 것이 당연하다는 모습으로.

 

얘기는 우리끼리 다 했수. 그동안 신세 많았는데, 앞으로는 올 일 없을 거요.”

 

이글은 그 얘기에 눈을 굴려 빅터를 내려다보았다.

 

그 친척이라는 자가 멋대로 내린 결정인지, 빅터의 굳은 무표정 뒤로 겁먹은 표정이 번져갔다.

 

옷 갈아입고, 짐 챙겨서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멋대로 들어와 소파에 앉으려고 하기에, 이글은 검을 뽑아서 그의 목에 대었다.

 

“...내 집에 들어오려고~?”

 

, 친척을 밖에 세워두고 문을 세게 닫았다.

 

그러고보니 빅터가 입던 옷은 아침에인가 빨아서 아직 축축할텐데.

 

그런 생각에 고개를 돌렸더니 젖은 옷을 입은 빅터가 빈손으로 서 있었다.

 

젖은거 말고 아까까지 입던 거 입어.”

 

대답이 없다.

 

다만 고개가 좌우로 딱 한 번 흔들렸다.

 

마치 이글의 집에 처음 왔던 그 날처럼.

 

갈거야?”

 

빅터는 입을 열었다가 한 마디 말 없이 닫았고, 대신 야간학교에서 사용한다는 질 나쁜 공책에 연필을 대었다.

 

[]

 

, 말해보라고. 갈거야? ? 지금까지 잘 있었잖아?”

 

꼭 지금 가지 않아도 되잖아, 지금까지처럼 요리하고 청소하고, 낮에 일 가고 밤에 공부하더라도 같이 살면 재미있고, 편하고, 좋잖아.

 

이글은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빅터에게 말했다.

 

집에 마련해둔 사탕, 초콜릿, 달콤한 과자들.

 

같이 가려고 계획하던 주말의 외출, 공원, 축제, 박람회.

 

따뜻한 벽난로, 빅토르, 그리고 많은 것들.

 

하지만 매번, 빅터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이글은 빅터가 좋아할 만한 것을 더 많이 입에 올렸다.

 

얼마 안 있어 빅터가 그만해, 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글은 입을 닫았고, 이번에는 빅터가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길게 이어진 침묵으로 다시 쉬어들기 시작하는 목소리를 가다듬지도 않고.

 

익숙해질 것 같아서 더는 못 버티겠어.”

 

그 친척이 무서워서, 혹은 그 말을 들어야 하니까 간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심심하다는 이유로 길들여놓지 마.”

 

축축하게 젖은 파란 옷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이글은 뒤에 남겨져서, 닫히지 않고 덜걱거리는 문을 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따끔하게 아팠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분노 때문이겠거니, 그 열린 문만 쳐다보며 옷을 콱 쥐었다.

 

 

 

 

 

 

 

 

 

다음날부터 빅터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이면 공장으로 갔고 무거운 짐을 옮기면 힘들었고 빵에 물로 식사를 해결했다.

 

공장이 끝나면 지쳤고 학교를 마쳐 집으로 돌아오면 딱딱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껴입어도 추위가 이불새로 들어와서 잠을 깰 때에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배가 고프면 억지로 물을 마셨고, 못 견딜 때에는 끓였다.

 

설탕을 넣은 따뜻한 우유라던가 난롯불은 그렇게 잊을 수 있었다.

 

배고픔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편하게, 일도 않고 지냈던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이 들어 고마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때로 새벽에 잠에서 흐릿하게 깰 때가 있었다.

 

돌아누워서 손을 뻗으면, 그 아래 있어야 할 다른 사람의 몸이 없었다.

 

잠결에 돌아누웠을 때 팔을 뻗으면 위에 얹혔던 다른 사람의 몸은.

 



 

[이글X빅터] 고양이 -09

2015. 10. 15. 00:46 | Posted by 호랑이!!!

 

빅터가 공장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저녁때였고, 언제나 이글이 집에 있었다.

 

창 밖까지 퍼지는 냄새를 맡아보면-

 

오늘은 톡 쏘는 토마토 소스가 맡아진다.

 

초인종을 누르면 누른지 얼마 안 되어서 이글이 문을 열어주었고 빅터는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쳐두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온다.

 

특별히 이걸 입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빅터가 벗어두었던 옷을 찾으러 연 문 앞에는 이글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하얀 와이셔츠와 파란색 반바지가 있었다.

 

바지야 그렇다 쳐도 셔츠는 좀 커서 소매를 접어서 입고 나오자 이글은 그제서야 젓고 있던 소스 냄비에서 눈을 떼고 인사한다.

 

왔어?”

 

.”

 

라디오라도 틀어줄까? 지금쯤 팝이라도 나올 텐데.”

 

빅터는 그가 소스 젓는 것을 빤히 보며 뭔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이글 옆에 서서 그가 들고 있던 국자를 빼앗았다.

 

“...”

 

너 지금까지 일하고 왔잖아. 쉬어.”

 

그러나 빅터는 이쪽을 노려봤고, 이글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순순히 옆으로 물러나 파스타면을 삶기 시작했다.

 

파스타 좋아해?”

 

.”

 

이글은 옆을 흘끗 보았다.

 

양이 적어서 작은 냄비를 꺼낸 덕분에 빅터는 발돋움도 않고, 쉽게 소스를 젓고 있었다.

 

다음번에 대량으로 만들면- 그때도 도와줄래?”

 

“....”

 

이글이 자신에게 일을 맡기는 모습에 빅터는 다소 안심한 것 같았지만.

 

좋아하지 말아, 꼬마야.

 

나는 너를 곯리고 싶을 뿐이니까.

 

높이가 두 피트(60cm 정도)는 되는 커다란 냄비가 있으면 네가 발돋움하는 정도로는, 바람으로 몸을 띄우는 정도로는 젓기 힘들 테지.

 

이글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익은 면을 휙 건져내 뜨끈뜨끈한 김이 오르는 것을 파스타 보울에 담았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금요일 밤인데, 외식하는 편이 나았을까?”

 

“...됐어.”

 

 

 

 

 

 

 

그리고 일요일의 밤, 이글은 보기 드물게 품으로 파고드는 빅토르 때문에 설핏 잠에서 깨었다.

 

원래도 밤이나 아침에는 사람 옆으로 오는 녀석이지만 이렇게 맨살에 솜털이 닿아 간질거리도록 품으로 파고드는 건 또 처음이랄까.

 

옷 속으로 파고드는 녀석을 잡아다 끌어내서는 턱 아래를 긁어주는데 밖에서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빅토르를 안고 침실 밖으로 나가자 자신이 빌려준 와이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빅터가 서 있었다.

 

품에는 청소기를 안다시피 하고.

 

청소 중?”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다.

 

청소기가 있길래 써 보고 있어.”

 

이글이 사용하는 청소기는 흡입기에 먼지통이 붙은 것이 아니라 좀 구식인, 먼지통과 흡입기가 분리된 것이었다.

 

청소기는 성인이 사용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만들어서인지 흡입기가 그저 길쭉한 봉 모양이라 하더라도 길고 무거워서 빅터는 끙끙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무거울텐데~”

 

괜찮아.”

 

괜찮긴?

 

이글은 빅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키다가 장식용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빅토르는 후닥닥 뛰어 집안 어디의 구석으로 뛰어 사라졌다.

 

잠시간 벽에 기대 서서 빅터가 청소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결국 무게를 못이기고 휘두르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이글은 빅터가 잡은 청소기의 뒷부분을 잡았다.

 

, 천천히 다시 밀어봐.”

 

이글이 부드럽게 힘을 주자 아까보다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청소기를 들어 방향을 고치는 것도, 한 손으로 힘을 주어 누르자 손쉽게 들어올려졌다.

 

“...불필요한 도움이야.”

 

혼자서 할 수 있다, 며 눈을 흘기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 그러셔?”

 

이글은 빅터가 단단히 막대를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앞으로 숙여서 흡입기의 뒤를 잡지 않은 손으로 빅터가 잡은 부분보다 조금 앞을 잡았다.

 

덕분에 몸이 바싹 밀착했고, 이글은 제 뺨에 닿는 색 연한 머리카락에 대고 입김을 훅 불었다.

 

뭐 하는-!”

 

글쎄~”

 

영차 힘을 주어 청소기를 들었다가 내려서 밀자 막대에 매달린 몸이 달랑 들려 흔들린다.

 

야아~ 혼자서도 잘~ 하네~?”

 

말하는 한 마디 박자에 맞춰서 청소기를 앞으로 밀었다가, 뒤로 당겼다가, 다시 밀었고.

 

거기 맞춰서 빅터의 발이 땅에 닿았다가, 달랑 들렸다가 다시 땅에 닿았고.

 

여지껏 검을 배우거나 하며 몸을 단련한 것을, 이글은 감사했다.

 

열다섯 먹은 소년이 매달려 바둥거리는데도 이렇게 간단히 놀릴 수 있다니.

 

속으로만 웃으려는 것이 조금씩 밖으로 기어나와서 입 밖으로, 작은 기침같은 소리에서 시작해서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나왔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빅터의 바둥거림도 심해져서 결국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 삐졌어? ?”

 

이쪽을 보지는 않는데.

 

이봐, 목덜미가 발긋하잖아.

 

손을 뻗어 따끈한 목을 잡았더니 홱 빠져나간다.

 

~ 이봐, 빅터~”

 

이름을 부르는 건 또 간만인가.

 

빅토르처럼 어디 구석을 찾아 뛰어가는 모습에 청소기의 전원도 내리지 않고 이글이 뒤를 쫓아 뛰었다.

 

이상도 하지.

 

분명 처음에는 화가 날 정도로 불쾌했던, 그에게서 보였던 어린 날 자신의 모습이 싫지 않다니.

 

아니, 오히려.

 

오히려.

 


[이글X빅터] 고양이 -08

2015. 10. 14. 02:09 | Posted by 호랑이!!!

새벽에 가까운 아침.

 

이글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일어났어...?”

 

“....”

 

이글의 고집으로 결국 침대에서 자서인지 여름용으로 둔 베개가 눌려 있었다.

 

“...공장 가지 말고 더 자.”

 

“그러면 잘려.”

 

이제야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다 쉬어서 골골거리는 녀석이 무슨.

 

이글은 눈앞에 보이는 파란 소매를 잡아당겼다.

 

너같이 어린애가 무슨 공장일이야.”

 

나보다 어린애들도 다 공장에서 일해.”

 

시계를 보니 해는 떴나 싶은 시각이었다.

 

이글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씻고 나와.”

 

빅터가 순순히 욕실로 들어가자 찬장을 열어보았다.

 

도시락통으로 쓸 만한 것이 없잖아.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유리병이나, 저 정도인가.

 

이글은 냉장고에서 어제 만들었던 수프와 그 전에 만들어서 보관해둔 빵 몇 쪽과 버터, 우유, 과일을 꺼냈다.

 

그리고 빅터는 이글이 도시락이랍시고 흰 보가 덮인 커다란 바구니를 내밀었을 때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결국 유리병에 수프를 담는 정도로 타협하고 나가려는데 이글이 빅터를 다시 불렀다.

 

아침 먹고 가.”

 

늦었어.”

 

그럼 가면서 이거라도 먹어.”

 

이글이 계란과 감자를 삶아 으깬 것을 빵에 넣은 샌드위치를 주었다.

 

어제 저녁도 아파서 제대로 못 먹었지.

 

가져가라니까.”

 

이글이 두세번 더 권하자 그제야 빅터는 정말 받고 싶지 않지만 권하니까 받아준다는 듯 샌드위치를 받아 입에 물었다.

 

잘 다녀와.”

 

“...”

 

문이 닫혔다.

 

이글은 침대로 돌아가 풀썩 누웠다.

 

다른 누군가와 침대를 같이 쓰는 것은 아주 어릴 때 이후 처음이라.

 

자신이 눕지 않은 쪽을 만져보니 작은 열이 느껴진다.

 

눈이 감겨왔다.

 

 

 

 

 

 

 

 

 

빅터는 길을 걸으며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신선한 양배추와 계란과 감자와 토마토와...

 

속으로 재료를 하나씩 대던 빅터는 이내 그만두고 샌드위치를 한 입 가득 베어물었다.

 

‘...맛있어...’

 

그리고 그 날 하루는 이상함의 연속이었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고 나서도 그렇게 지치지 않았고, 점심시간 직전에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단순노동을 하는 것뿐인데도 공장 일이 재미있었고 맛없고 퍼석한 빵이라도 유리병의 수프와 먹었더니 꽤나 먹을만했다.

 

좋은 잠자리에서 잘 자서 그런가, 맛난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하루가 편하고 힘들지 않아.

 

그리고 빅터는 문득 몰려오는 불안감에 손을 더 재게 놀려 작업을 빨리했다.

 

여기서 더 기분이 좋아진다면, 평소에 힘들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힘든 일이 아니야.

 

그래서도 안돼.

 

왜냐하면 앞으로도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살 거니까.

 

빅터는 돌아오는 길에 붉은 벽돌로 만든 건물을 보았다.

 

딱딱하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집.

 

그 집 벽에다 대고, 이글이 수프를 담아준 유리병을 세게 던져 깼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나고.

 

빅터는 휙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이글의 집으로 돌아왔다.

 

유리병은?”

 

잃어버렸어.”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신경쓰는 것 같지도 않다.

 

빅터는 감기가 나을 때까지라며, 하루 더 자고 가라는 이글의 말에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티엔하랑마틴?/알파오메가] Mine

2015. 10. 13. 03:41 | Posted by 호랑이!!!

하랑이 영국으로 와서 가장 놀란 것은 알파와 오메가로 나뉘는 신분제였다.

 

조선은 이미 양반이다 상놈이다 하는 신분제가 있었고 페로몬을 흘리는 오메가보다 그 페로몬에 자제를 못하고 달려드는 알파를 더 낮게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비록 저가 오메가라도 이따끔 약이나 먹으면 불편함 없이 살 수 있었다.

 

허나 이 영국이라는 곳은, 더더군다나 세계를 구하겠다고 모인 양반들이 말이야.

 

자기들 자제력 따윈 생각하지 않고 오메가를 겁탈하고도 오메가 잘못이라고 한다고?

 

알파와 오메가에 따라 신분이 나뉜다니, 상놈 자식이 양반되고 양반 자식이 상놈이 된다니 이 무슨 근본 흐릿한 양반네들이냐는 말이다.

 

문화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군.”

 

좀 받았어.”

 

내키지 않으면 돌아가도 좋다.”

 

됐수다.”

 

하랑은 손을 내저었다.

 

자신은 힘을 원했고, 이들은 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니까.

 

어차피 난 무당 자식이라 상놈이야. 여기서도 내 신분이 상놈이라도 상관없어.”

 

그렇군.”

 

새삼스레.

 

배에서 내려, 티엔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역시 지구 반대편이라 그런가 바다 냄새부터 다르구만.

 

무어라 떠들어대는 것도 귀기울이지 않으면 모르겠고.

 

그래도 알아들을 수는 있지~

 

얼씨구, 저 사람 오늘 저녁에 아가씨랑 약속이 있구만?

 

하랑은 스스로가 대견해 흥흥 웃으며 길을 걸었는데.

 

누군가가 대뜸 손목을 잡아챘다.

 

양반집 아가씨도 아니고 이 정도에 뭐 놀랄까.

 

뭐야?”

 

이거 동양인이잖아? 동양인 오메가!”

 

오메가가 이런 거리를 혼자 다니다니 겁이 없-”

 

빠악.

 

이하랑은 넘어진 그 앞에 서서 손목을 살살 흔들어 보였다.

 

정티엔이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랍시고 열심히 훈련시키더니 이거 꽤 괜찮잖아?

 

부두 노동자였는지, 저 뒤쪽에서부터 덩치 큰 색목인 무리들이 하나둘씩 보인다.

 

입술이 벌어진 틈으로 휘파람이 흘러나오고.

 

즐겁다는 듯 눈꼬리가 올라간다.

 

판을-”

 

벌려볼까!를 외치기 전.

 

자신의 어깨에 익숙한 손이 얹혔다.

 

철없는 녀석. 힘을 써 보고 싶어 벌써부터 안달이라니.”

 

시비 건 쪽은 저쪽이거든!”

 

주먹을 내지를 때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자기보다 작은 동양인 오메가에게 맞아 분한지 넘어졌던 사람이 덤벼들었다.

 

하랑은 팔을 뻗어 제쳐두고 티엔이 자세를 잡고 서서, 뒤로 뻗었던 팔을 앞으로 묵직하게 휘둘렀다.

 

이 정도면 괜찮군.”

 

괜찮~? 괜찮구운~? 이봐 정- 아니, 사부. 저기 사람 최소한 뼈 두세대는 나갔을걸!”

 

글쎄 어떨까.

 

티엔은 조금 흐트러진 겉옷의 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한 팔로 하랑을 끌어당겨 안고 검은 물이 든 손을 올려 하랑의 뺨을 감쌌다.

 

“Mine.”

 

딱 한 마디였으나 어쩐지 그들은 수긍했고, 곧 사라졌다.

 

뭐야? 방금 뭐야? 방금 ‘Mine’이라고 했지? 광산? 지뢰? 건드리면 폭파시켜 버린다?”

 

“...내가 네 보호자라고 했다.”

 

아 뭐야, 협박거리가 안 되잖아.”

 

얼마간 걸어서 번듯한 거리가 나오자 하랑은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바빴고, 티엔은 하랑이 잠시라도 솜사탕, 유리 너머로 진열된 것, 거리에서의 공연에 시선이 팔리면 잡아오기 바빠서.

 

결국에는 손을 잡고 걸었다.

 

“...이거 부끄럽지 않수? 내가 일고여덟 먹은 애라도 부끄러울 짓인데.”

 

이제 딴데 안 보고 잘 따라갈게, ? 놔주라~

 

티엔은 쫑알거리는 하랑을 힐끗, 고개만 돌려 내려다보다가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어 끌고 갔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끌고 다닐거다.”

 

뭐어~? ... 싸부! 사부~ 사부님~?”

 

결국 놔주지 않았고, 하랑은 입을 삐죽 내밀고서도 그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번듯한 거리에서 조금 더 항구 쪽으로 들어가는 곳에 그랑플람이 위치해 있었다.

 

오늘은 네가 꼭 알아야 할 사람들만 소개시켜 주마.”

 

가장 먼저 만난 것은 풍채 좋은 할아버지였다.

 

오오, 그 뭐시냐.

 

서부 활동사진에 나오는 사람이랑 똑같이 생겼구만.

 

브루스 보이틀러씨다. 재단의 후원자이며 재단 소속의... 큰어른이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빠르겠군.”

 

, 이해했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는데 옆에서 갈색머리에 눈 푸른 사람이 나타났다.

 

“...이 사람은?”

 

재단 소속은 아니지만 우리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릭 톰슨이다.”

 

, 손목에 시계가 하나... .. 무지 많네? 유행하는 패션이야?”

 

하하, 이건 어디까지나 실용적인 목적이오, 동양 소년.”

 

그리고 대뜸 안겨서, 하랑은 깜짝 놀랐고 티엔은 거의 반사적으로 하랑의 뒷덜미를 당겨 빼냈다.

 

인사야 인사. 좋은 향이 나는군.”

 

그래?”

 

서양인들은 개방적이구만.

 

하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 다음에 또 만나게 할 사람이 있어서 이만 실례.”

 

티엔은 문을 열어 하랑이 먼저 나가게 했다.

 

티엔 정.”

 

아까부터 우물쭈물하던 릭은 하랑이 나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리지 않소? 열일곱이라더니 직접 보니 훨씬 어려보이는데.”

 

걱정은 감사한다만.”

 

티엔은 어깨를 으쓱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자네보다도 각오가 돼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다.”

 

하랑은 먼저 나가서 복도에 있는 의자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색목인의 머리털은 색이 다양하다더니. 진짜로 연한 금 같은 색이야.’

 

양털 빗어놓은거랑 비슷해 보이는데, 만져보고 싶네.

 

너무 빤히 보고 있었을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 , 안녕!”

 

만져볼래요? 머리카락.”

 

그래도 돼?”

 

납작한 모자를 벗자 햇살을 받아 머리가 더 반짝였다.

 

마악 손을 뻗으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사부 나왔어? 나 잠깐만-”

 

특별히 갈 필요는 없겠구나.”

 

하랑은 뻗던 손을 멈칫했다.

 

정티엔 표정이 바뀌었어.

 

뭔가 아주- 싫어하는 걸 보는 듯한.

 

그런데 그 싫다는게 그냥 싫다는 건 아니고... 으음, 이거 뭐라고 부르지? 으으 모르겠다!

 

그 사람이 내가 오늘 소개해 주려고 했던 마지막 사람이다. 이름은 마틴 챌피, 한 때 기울어져가던 재단을 지금 위치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이지.”

 

- 대단한 사람이네?”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군.”

 

저거 왜 저렇게 날을 세우지?

 

하랑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마틴 쪽을 봤는데.

 

어라, 이 사람.

 

웃고는 있는데 이 사람도 싫다는 표정이...

 

둘 사이의 분위기에 당황하던 하랑은 우물쭈물하다가 덥석 마틴 쪽으로 뛰어 안았다.

 

반가워~ 조선 출신 이하랑이올시다!”

 

“..., 격하네요 하랑.”

 

아까 릭 톰슨이라는 사람을 봤는데 이게 인사라고 했거든.”

 

하하, 그 사람다운 말이네요.”

 

다시, 티엔의 손이 이하랑의 목덜미를 잡아채 끌고 갔다.

 

낯 익혔으니 되었지 않나. 어서 방으로 가 짐정리부터 끝내도록.”

 

어 그치만-”

 

가라.”

 

아쉬움에 뒤를 흘끗 돌아보았더니 마틴은 여전히 햇살을 받고 있었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다음에 만지게 해 줄게요.”

 

다음에 봐 형씨!”

 

꽤나 경쾌한 발소리가 타박타박 멀어지자 티엔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아직 멀었군, 마음을 읽히고.”

 

꽤나 순진- 아니지, 순수한. 좋은 아이더군요.”

 

“...남의 제자에 눈독 들이지 마라.”

 

“‘제자’? 솔직해지지 그래요.”

 

마틴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 흥 소리를 내자 티엔이 마침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복도는 조용했고, 영국의 하늘은 다시 구름이 끼려는지 어둑해졌다.

 

티엔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진중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선고하듯 말했다.

 

내 것이다.”

 

아직이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한참이나 날 선 목소리가 비웃듯이 떨어졌다.

 

곧이다.”

 

물건만 전해주러 온 것이었는지 브루스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릭이 나왔다.

 

간단한 눈짓으로 인사를 마친 마틴은 서류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겠지요.”

 


, 나랑 외식하자.”

 

이글은 여느때처럼 높게 묶은 머리를 살랑거리면서 다이무스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이무스의 눈빛이 탐탁찮다는 듯 바뀌자 이글은 허둥허둥 거기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쏘는거야! 형 지갑 스틸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거 빌미로 뭐 해달라는것도 아니고 일부러 비싼거 시켜놓고 어라, 지갑이 없네에~’하려는 것도 아냐!”

 

그러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은 가시질 않는다.

 

이글.”

 

약간의 침묵이 있었고 마침내 다이무스가 입을 열었다.

 

“‘쏜다는 말은 어디서 배운 거냐. 내가 분명 어린 나이니 연합에 간다는 철없는 선택을 할 수는 있을거라고 했지만-”

 

“...책임을 지라고, 네에 네에.”

 

이글은 건성건성 대꾸하다가 다이무스의 눈매가 사나워짐을 느끼자 헛기침을 하고 짐짓 예절바른 모습으로 팔을 움직였다.

 

금일, 홀든 다이무스님의 탄신일을 맞이하야 기쁜 마음으로 데이트를 신청하고 싶습니다만 저녁식사라도 함께 어떠십니까.”

 

다이무스는 무어라 한 마디 야단이나 잔소리라도 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옷은 뭘 입고 가지? 평상복?”

 

아니! ~쁘게 차려입고 나와.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문이 닫혔다.

 

문 너머로 이글이 은행 아가씨들에게 수작질하는 소리가 들려 다이무스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저번처럼 정장을 입고 갔더니 허름한 펍으로 데려가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군.

 

경쾌한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그래도 내 생일 챙겨주는 건 저 녀석밖에 없군.

 

 

 

 

 

 

 

저녁, 다이무스는 늦지 않게 약속장소에 갔다.

 

차림은 격식에 맞게.

 

그리고 약속시간을 조금 넘어서 나타난 이글을 본 다이무스는.

 

본디 표현이나 말이 적은 그였지만.

 

놀라움을 짧게나마 얼굴 가득히 띄웠다.

 

이글?”

 

짜잔~ 놀랐지~?”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경쾌한 웃음소리에, 거기까지는 자신이 알던 그대로고 예상했던 차림이지만.

 

나머지 부분이 평소와 엄청나게 다르다.

 

방해되지 않도록 대충 올려묶은 머리는 단정히 빗어 아래로 내려 묶었고(한때 벨져가 그랬던 것처럼) 보기만 해도 거슬리고 답답한 한가닥 앞머리는 넘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갑주 안에도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벨트도 왜 하는지 모를 정도로 헐겁게 늘어뜨리고 다니던 녀석이 단정한 아비 프락(연미복)에 크라바트라니.

 

놀랐나보네! 아하하!”

 

이대로 사진관에 데려가서 사진 한 장 박고 싶구나.”

 

그 말은 들은체만체하고, 이글은 다이무스의 손을 이끌어 제법 그럴싸한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이글 홀든으로 예약했습니다.”

 

이쪽입니다.”

 

자리에 앉자 전채로 훈제한 연어를 멜론에 싼 것이 나왔다.

 

웨이터가 물러가자 가장자리의 포크를 집으며 다이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상 밖이구나.”

 

아하하, 어떠셔? 이 몸이 할 때는 한다는 말이지~”

 

기왕이라면 내 생일 같은 날보다는 집안의 중요한 일이나 그런 때 해줬으면 좋겠다만.”

 

에엥~ 무슨 말씀? 이글 홀든 24년 인생에 집안 최대 행사는 큰형아 생일이거든?”

 

전채요리를 담은 접시가 비워지자 수프가 나왔다.

 

다이무스의 취향에 맞는 것으로, 이글과 종류가 다른 것을 보아 신경 써서 예약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후의 생선, 고기 테린, 메인, 샐러드에 곁들인 와인까지 전부 그가 특별한 날에 즐기는 것이라.

 

다이무스는 꽤나 감동받았다.

 

형아~ 어때~ 만족스럽지이~”

 

“...테이블에 팔을 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퉁명스레 얘기함에도 이글은 다 안다는 듯 씩 웃는다.

 

“.....동생을 키운 보람이 있다,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

 

아 웃기셔, 형이 키웠나? 한나가 키웠지.”

 

다음은 디저트 차례다.

 

달지 않고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게 좋겠지.

 

사실 어느 정도는 기대했다.

 

뻔히 마음에 차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한 마디 말이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칭찬을 받고 싶은지, 이글이 안절부절 못 하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디저트 있지, 다크 초콜릿이랑 과일을 써서 형이 좋아할만한 걸로 해 달라고 했다~?”

 

기대되는군.”

 

다이무스의 눈가가 누그러졌다.

 

이글은 그들의 테이블로 웨이터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초조하게 머리 끝을 손가락으로 감아대었다가 풀었다.

 

저 모습은 어릴적과 하나도 안 바뀌었지.

 

다이무스는 웨이터가 가져다주는 접시가 제 앞에 놓이자 코를 씰룩였다.

 

초콜릿과 과일을 듬뿍 얹은 케이크, 그리고 굳이 코를 가져다대지 않아도 느껴지는 단내.

 

이글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이 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다이무스는 이글 앞에 다른 접시가 놓이는 것을 보고는 작은 스푼을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이글은 제 앞에 놓인 디저트를 신나게 퍼먹었다.

 

제 형이 앞에서 보기만 해도 달아빠진 초콜릿 디저트를 덤덤하게 먹는 것은.

 

글쎄, 동생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겠다는 상으로서의 위엄 같은 걸까?

 

마침내 다이무스의 그릇이 비워지고 딸그랑 소리를 내며 숟가락이 떨어지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디저트 먹는 속도가 느리던데~”

 

배가 불러서 그랬던 거다.”

 

아까 형이 미간 찡그리는거 다 봤거든요!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자 이글은 숨죽여 킥킥 웃으면서 냅다 달려들어 다이무스의 팔짱을 꼈다.

 

~, 그럼 오늘은 특별히...”

 

사진 찍으러 가지.”

 

? , ? 형아? 다이무스 형?!”

 

아이고 큰형이 나 납치한다~며 이글이 웃었다.

 

장담하는데, 이건 디저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는 거다.

 

냉철한 은행원이고 회사의 에이스에 홀든을 이을 장남?

 

...근데, 동생인 내가 봐도 귀여운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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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X빅터] 고양이 -07

2015. 10. 12. 11:25 | Posted by 호랑이!!!

 

야간학교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것도 내 머리가 좋은 덕이지.

 

이글은 다소 자만하며 정문에 가 섰다.

 

어디, 이 꼬맹이가 감히 며칠이나 내 집에 오지 않았단 말이지?

 

정문 한가운데에 서 있으려니 얼마 안 있어 학교의 문 쪽에서 사람들이 떼지어 나왔다.

 

과연 야간학교라서 그런가 생각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다수.

 

빅터 같은 학생뻘 아이들은 오히려 적었다.

 

직업만 봐도 일용직 노동자들이 다수.

 

그리고 어린아이 한 무리가 나오고(그래도 빅터보다는 나이 들어 보인다).

 

어느 술집에 가서 맥주를 한 잔 하자는 소리를 하며 우우 몰려가는 무리 뒤로 익숙한 파란색이 보였다.

 

하얀 머리는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는 가방을- 아니, 가방조차 없이 옆구리에 책과 공책을 끼웠다.

 

고개를 들어 저를 볼 것 같지 않아, 이글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하얀 머리가 퍼뜩 들렸다.

 

놀란 것처럼.

 

그리고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이 벌어졌다가 다물린다.

 

이글은 빅터가 무릎을 구부려 날아오를 준비를 하자 냉큼 손목을 잡아챘다.

 

어딜 가?”

 

“...”

 

손을 흔들어 떼려고 하는 주제에 입은 조용하네.

 

이글은 어린애를 안아올리듯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더니 들어올려 어깨에 걸쳤다.

 

, 가만있네.

 

비록 등을 주먹으로 내리치긴 하지만 예상했던 발길질은 날아오지 않고, 주먹질도 이 정도면 안 아픈거지 뭐~

 

이글은 그대로 제 집으로 데려갔다.

 

발로 툭 걷어차 소파를 벽난로 쪽으로 밀어 거기 빅터를 내려놓자 조그만 고양이가 달려들어 올라탄다.

 

핫밀크에 초콜릿?”

 

이걸 거부한 적은 없으니까 물으면서도 우유 든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렸는데, 흘끗 돌아보니 고개를 젓고 있다?

 

이글은 성큼성큼 걸어서 빅터 앞에 서 고개를 얼굴 가까이로 들이밀었다.

 

--하는 숨소리가 들리고.

 

얼굴 빨간 것은 들쳐업느라 피가 몰려서라던가 벽난로 때문은 아니렷다.

 

“...말해보라고, .”

 

고개를 젓는데.

 

이봐, 난 그렇게 거칠게 굴고 싶지 않았다?

 

이글은 커다란 손으로 덥썩 빅터의 얼굴을 잡아 억지로 입을 벌렸다.

 

감기구만?”

 

말을 하지 않은, 못한 건 목이 부어서네.

 

이글은 눈살을 과장스럽게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마침 잘 됐네~ 며칠 여기 있으면서 내가 오븐으로 시험작 만드는 거나 좀 봐라?”

 

글쎄 어젠가 그제인가는 빵을 구워봤는데 글쎄 그게 까맣게 타서 훅 부니까 가루가 날아가지 뭐야~

 

빅터는 빅토르를 옆으로 내려놓고 잽싸게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빅터는 이글 바로 앞에 서서, 안겼다.

 

사영도~ , 이건 부지깽이지만!”

 

이글이 유려한 손놀림으로 장작 뒤집는 쇠막대를 마치 칼처럼 써서 빅터를 제 앞으로 끌어온 것이다.

 

그리고 덥썩 안고.

 

빅터가 고개를 들자 이글은 씩 웃다가 가늘게 눈을 떴다.

 

“...자고 갈 거지?”

 

빅터는 굳어서 부지깽이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간신히 대답 대신 고개를 푹 떨구자, 만족스럽다는 듯 이글은 빅터를 놓아주고 홱 뒤로 돌았다.

 

이글은 감기에는 닭 넣고 끓인 수프라며 부엌 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깔깔 웃었다.

 

안아줄 때 엄청 긴장하더라?”

 

빅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글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우유 탄다고 한 마디 쏘아줄 텐데.

 

빅터는 투덜거리며 소파에 몸을 더 깊이 묻었다.

 



[이글X빅터] 고양이 -06

2015. 10. 11. 18:48 | Posted by 호랑이!!!

 

그 다음날의 아침, 화장실의 먼지낀 거울 속 빅터의 얼굴은 열이 올라 새빨갰다.

 

감기, 그것도 열감기인가.

 

친척은 아랑곳않고 공장에 나가라고 할 테고, 학교는 나가야 하니까-

 

아무래도 이글의 집에 가는 것을 쉬어야겠다.

 

어차피 옮기면 안 되니까.

 

이 꼴을 보였다가는 억지로 자고 가라고 할지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 빅터는 머리를 털어내었다.

 

뭘 바란다는 듯이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여느 때처럼 파란 겉옷을 챙기고 거리로 나갔다.

 

아침안개의 냄새, 사람 없는 적막한 거리에 드문드문 보이는 것은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공장 노동자들.

 

작은 가판대 하나 열리지 않았고, 열렸다 하더라도 제 주머니에는 동전 하나도 없다.

 

공장에서 주는 맛없고 퍽퍽한 빵과 차가운 물 한 잔-

 

이 빵이 맛없다고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이글이 제게 스튜를 먹인 다음부터겠지.

 

 

 

 

 

 

 

이글은 낮까지 잤다.

 

점심때가 되면 일어나서 연합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저녁에 먹을 것을 생각하며 장을 봐 온다.

 

집에 있는 요리도구라고는 냄비, 작은 냄비밖에- , 큰 냄비도 있었군.

 

최근 빅터가 오면서 제대로 요리를 하게 되자 사 놓은 것이다.

 

오븐이 있었다면 좀 더 다채로운 요리를 하게 될 거고, 화덕이 있다면 이탈리안 요리도 할 수 있겠지?

 

...오븐이라도 살까- 고민하는데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쳤다.

 

요즘 펍에 안 가더라?”

 

돌아보니 레베카였다.

 

펍에 꼬박꼬박 들러 밤을 보낼 때 늘 합석하던 친구.

 

고양이를 주워서~ 그거 돌본다고 말이지.”

 

안어울리네- 맥주라도 사서 집에 찾아갈까?”

 

미안~ 안돼~”

 

레베카의 뒤를 보니 휴톤과 도일이 있었다.

 

오늘도 마시러 가나 보지.

 

손을 흔들어주고, 이글은 충동적으로 지갑을 열어 오븐을 샀다.

 

빵집에 들러 커다란 빵도 하나 사고.

 

설탕과 버터와 초콜릿을 아낌없이 쓴다면 좋아하겠지.

 

어디까지 단 것을 좋아하려나, 우유에 초콜릿도 타서 같이 먹일까.

 

이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 왔던 날부터 사흘, 빅터가 오지 않는다.

 

첫째 날, 이글은 오븐을 청소하면서 보냈다.

 

이튿날, 이글은 하얀 고양이 빅토르를 손바닥 위에 얹으며 놀았다.

 

셋째 날에 이글은 빅토르를 괴롭히다가 손가락을 물렸다.

 

이놈의 고양이.

 

이글은 빅토르의 우유에 설탕을 넣어 먹였다.

 

, 난 너 마음에 안 들어.”

 

고양이는 설탕 탄 우유를 작은 혀로 할짝할짝 핥았다.

 

듣고 있어? 맘에 안 든다고 꼬맹아.”

 

손가락으로 쿡 고양이의 뺨을 찌르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애앵 우는 소리를 낸다.

 

벌써 시간은 한밤중이지만-

 

야간 학교는 곧 마칠 시간이지.’

 

위치가 어느 즈음이더라.

 

이글은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치며 문을 열고 나섰다.




[이글X빅터] 고양이 -05

2015. 10. 11. 01:28 | Posted by 호랑이!!!

 

잘 교육받은 귀족집 도련님 답게, 이글은 깨끗한 발음으로 둘을 구분했다.

 

빅터, 그리고 빅토르.

 

빅터도 몇 번쯤 그 발음을 흉내내 보았지만 이글이 만드는 그 낮게 울리는 음은 나오지 않았다.

 

빅터가 빅토르라고 말하는 것은 꼭 빅톨처럼 들렸는데, 어쨌거나 그래도 이글은 알아들었고 잘 한다며 가끔은 빅터의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아직도 계절은 겨울 한가운데라 빅터는 벽난로 앞 안락의자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바닥에 앉아 멍하니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이글이 자신을 빅토르라고 하는 상상을 하며.

 

빅터의 상상 속에서 이글은 빅터를 보고 빅토르라고 불렀고, 끝의 발음을 길게 늘어뜨렸다.

 

회색 줄무늬가 있는 하얀 고양이 대신, 이글은 굳은살이 박힌 묵은 흉터투성이 손으로 웅크린 빅터를 몇 번이고 머리부터 등허리까지 쓰다듬었다.

 

그 때 이글의 표정은-

 

.”

 

퍼뜩, 빅터는 정신이 들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벽난로 앞에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으면 어떡해? , 열 올라서 얼굴이 빨갛잖아.”

 

이글의 손이 빅터의 뺨을 잡았다.

 

정말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자고 가. 이 날씨에 밖을 돌아다니면 더 심해지니까.”

 

그 말에 빅터는 벌떡 일어났다.

 

빅토르가 무릎에서 굴러 떨어져 약하게 항의하는 소리를 냈다.

 

몇 시지?

 

벌써 열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간다.”

 

?”

 

이글은 못마땅함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내 침대 넓어, 베개도 이불도 있고 옷도 좀 크지만 여분이 있고.”

 

아니, .”

 

공장 직원, 더부살이, 야간학교.

 

빅터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학교 가.”

 

상대는 개인 교사를 붙여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저보다 얼마 나이가 많지 않은데 어른이고 집도 있는데다 가족들도 더할 나위없이 상류층인 사람이다.

 

잊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에게 말하려니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아직까지 제 발을 공격하는 새끼 고양이를 번쩍 들어다 의자 위에 내려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마 학교가 끝나면 한밤중일 테고 딱딱한 침대에 누워서 얇은 이불로 몸을 말고 웅크리면 따뜻한 난롯불 생각이 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글이 빅토르하고 부를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그래도.

 

그래도 차가운 침대 쪽이 낫지 않겠냐고.




[커플x] 불면증

2015. 9. 21. 23:33 | Posted by 호랑이!!!

잔이 깨졌다.

 

꾸벅꾸벅 졸던 마틴은 그 소리에 잠을 깨었다.

 

흰색 머그컵은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마틴의 손가락에 걸려있던 것이다.

 

미안해요 릭, 잔을 깼네요.”

 

다치진 않았소?”

 

괜찮아요.”

 

괜찮긴, 차가 뜨거운데.

 

릭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틴의 손을 잡았다.

 

잠이 모자라오?”

 

그런 건 아니고, 요즘 잠들기가 힘들어서.”

 

마틴은 말을 하며 길게 하품했다.

 

얼핏 그의 눈 아래에 그늘이 진 것 같았다.

 

“...그래서 며칠 밤을 샜더니... 흐아암.”

 

며칠이나?”

 

어디보자...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쫙 펴졌던 마틴의 손가락이 하나 둘 굽혀진다.

 

셋 넷으로 넘어가자 릭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못 자는 동안 뭐 했소?”

 

책도 읽고... 밤새서 일도 해 보고요... , 여자랑 잤어요. 섹스가 불면증에 좋다길래.”

 

문득 릭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간 것 같았지만 마틴이 돌아봤을 때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랑플람에서 쉬고 오라고 한 거군.”

 

그렇죠. 덧붙이자면 그 티엔 정이 저를 손수 문 밖으로 밀어냈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싫네요.

 

마틴이 찻물 묻은 손가락을 손수건에 닦으며 투덜거렸다.

 

그래서 나한테 왔고.”

 

이 근처에서 바로 찾아가도 될 만한 사람이 릭밖에 없었거든요. 사실 반신반의 했어요, 일하는 시간이라던가 여행 중이면 어쩌지 하고.”

 

있어서 다행이오.”

 

마틴은 식탁 위에 멋없이 놓인 컵을 정리했다.

 

릭은 마틴이 입을만한 편한 티셔츠와 바지를 찾아 주고 여분의 베개를 찾아두었다.

 

그럼 자러 가볼까.”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자려구요?”

 

나는 원래 이 시간에 자.”

 

한 침대에서?”

 

혹시 모르지, 사람의 온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있을지.”

 

불을 끄고, 릭이 먼저 누웠다.

 

마틴은 불신하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릭의 옆에 누워서 익숙하지 않은 베개 아래에 한쪽 손을 넣어 잘 준비를 했다.

 

안아줄까? 뜨끈뜨끈할텐데.”

 

됐어요, 답답하니까.”

 

마틴은 픽 웃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못 자면 어떡하지.

 

피곤하고,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는다니 머리도 어지럽고 아프고 힘든데.

 

걱정스러운 마음은 불안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 다른 잡생각으로 이어진다.

 

마틴은 몇 번 뒤척이다 마침내 눈을 떴다.

 

자고 가라며 신경써준 릭한테는 미안하지만 저쪽에서 작은 전등이라도 켜고 책이라도 읽어야겠어.

 

그렇게 눈을 뜨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릭을 찾았다.

 

자면서도 웃고 있네, 평화로운 표정으로.

 

, 저 표정은 쿼카 닮았다.

 

잠꼬대도 없고, 고른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와서.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커피와 과자 향내가 밴 손끝의 향과 그의 체취가 갑자기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마틴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P.S : 릭 컵은 머그컵인데 차가 있는 이유는 미국인이라 찻잔은 없지만 마틴이 차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덧붙여 티테이블이 없어서 식탁에서 마신다)



[홈캠/파] 어린 파의 하루

2015. 9. 18. 20:01 | Posted by 호랑이!!!

어느 뱀 가는 아예 사시사철 따뜻한 대륙에서 산다고들 한다.

 

그러나 교사 가(蛟蛇 家)는 그 몸이 튼튼하고 강인한 것을 자랑으로 하였기에, 부러 혹독한 겨울이 존재하는 곳에 그대로 남았다.

 

구렁이라고는 하나 용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도 아니고, 본성이 음습하고 뒤틀린 자들이 다수였다.

 

그래서 교사 파, 아명 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

 

가문의 아이는 사촌이 아닌 형제로서 공동으로 길러진다.

 

실제로는 삼촌의 아이, 고모의 아이인 사촌으로서 인식하면서도 누이, 형제로 부르며 함께 숙식하고 한데 뒤엉켜 자란다.

 

악만은 예외로.

 

누이 무엇하오?”

 

현을 탄다.”

 

아이들 중 가장 윗사람인 영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에 새까만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비녀나 구슬끈으로 틀어올려 묶지만 겨울에 풀어내린 모습을 보면 그 머리는 찬란하게 흘러내리는 폭포수 같았다.

 

그 머리를 볼 때면 파는 하얗고 부슬거리는 제 짧은 머리를 만져보곤 했다.

 

고양이같은 눈으로 악기를 연주하다 그녀는 악이 들어오자 손을 멈추었다.

 

저도 악기를-”

 

그러다 손 다치면 안되잖니? 너는 우리보다 몸이 약하니까.”

 

저 말은 선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악은 영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양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다가 나갈까 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악아.”

 

영은 연주를 멈추고 악을 불렀다.

 

이것 먹으렴.”

 

손에 들린 것은 악이 싫어하는 향이 나는 사탕이다.

 

그것을 입에 넣으니 뻔히 그것을 싫어하는 줄 아는 영의 입매가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정원으로 나서면, 저 멀리 마당에서 형제들이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이 보인다.

 

형제라고는 하나 악보다 한두 자는 더 큰 사람이 대다수에 노는 것은 거칠어서 낄 수도 없지만 꼭 자기가 근처에 있으면 부러 평소보다 더 험하게 몸을 움직인다.

 

저번에는 그래서 한참이나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자기들끼리 더 열이 올라 누군가의 다리가 부러졌다던가.

 

그러고는 한 자리가 비었으니 보고 있던 네가 들어와라 하면서 반시진이나 뛰게 했다.

 

그땐 정말 죽을 뻔 했지.

 

악은 계속 걸음을 옮겨서 아기들 방으로 갔다.

 

교사의 아이들은 하루에 한 뼘씩 자란다고 하지만(헛소문이다) 걸음마를 하고 혼인 전의 누이들이 돌보게 되기까지는 한두해가 걸린다.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낮잠 시간인지 벌써 많이 자란 아이들은 해 아래에서 뒹굴거리며 자고 있었다.

 

아기 냄새나.

 

아이가 울 것 같으면 얼러서 달래고, 기저귀 때문에 울 것 같으면 잽싸게 갈아 주고.

 

악은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해가 반쯤 드는 구석에 누웠다.

 

이따끔 아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나고, 종이 바른 문 너머로 들어오는 해는 따뜻하고.

 

꼬박꼬박 졸다가 저만치서 전해지는 발걸음의 진동에 고개를 들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이미 해는 산 너머로 많이 넘어갔고 마당에 가득하던 아이들 기척도 사라져 있었다.

 

다시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사는 별채의 창호지 너머로 아이들 노는 것이 보인다.

 

그림자놀이, 술래잡기, 나무인형 가지고 노는 모습, 그림 그리는 모습.

 

이야기책 읽는 소리, 잡담하는 소리, 말놀이 하는 소리, 그리고 타닥타닥 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

 

악은 정원 사이로 계속 걸었다.

 

하얀 돌로 만든 길 위로 계속 걷다 보면 작은 별당이 보인다.

 

작고 깔끔하고 춥지는 않은.

 

그리고 따뜻하지 않은.

 

신을 벗고 들어서면 나무 담긴 항아리의 불부터 확인한다.

 

다 젖었다.

 

또 아이들이 와서 장난질을 치는 모양이다.

 

담긴 재와 남은 나무토막을 버리고 새로 흙을 담고 그 위에 장작 남은 것을 구해와 넣은 뒤 불쏘시개를 담는다.

 

아기들 방에 가면 누군가 있을테니 불 좀 빌려달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오늘 밤도 책과 신문으로 지새야지.

 

악은 이불 가득한 위에 책상을 꺼내놓고 그 위에 어른들이 보고 던져놓은 신문과 실로 엮은 책을 꺼내 올려두었다.

 

매일같이 사용하느라 먼지 앉을 틈도 없는 작은 단지를 들고 온 길을 되돌아가니 셋째 고모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회요요 고모님.”

 

불이 없나 보구나.”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뱀이 불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 너는 한여름에 자다가 동사할지도 모른다는 잔소리를 한바탕 듣고 나서야 마침내 작은 불을 담을 수 있었다.

 

악은 그것을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이미 밖은 어두워져서 하늘에는 별과 달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저 달이 해처럼 따뜻하면 밤에도 춥지 않을 텐데.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항아리에 불을 담자 얼마 안 있어 따뜻하게 타올랐다.

 

악은 기름등잔에 불을 붙이고 신문을 펼쳤다.

 

세상 어딘가에는 피가 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세상 어딘가에는 동물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는 소매가 좁은 옷을 입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는 하루 세 끼를 먹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는 꼬리달린 사람들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는.

 

세상 어딘가에는.

 

그리고 언젠가는,


세상 어딘가에서 나도 부부의 연을 맺어 내 아이를 품에 안아보겠지.

 

 


이글은 연합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맨발에는 쇠 양동이가 걸려 이따끔 발을 흔들 때마다 휭 돌았고 늘 올려 묶던 머리는 풀어져 몸이며 소파 위에 흘러내렸다.

 

발치에는 양동이와 같이 쓰는 빗자루나 대걸레가 같이 놓여서 소파에 기대고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발가락에 걸어 몇 번 더 양동이를 흔들던 이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비비꼬며 전화기의 번호판을 손가락 끝으로 돌렸다.

 

차르륵 차르륵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이어 얼마간 기계음이 나고, 수화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다]

 

잘 있었어?”

 

[별 용건이 없다면 이만 끊으마]

 

매몰차긴, 우리 형.

 

이글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번에 동양계 능력자들이 대거 참전했는데 말이야~ 그 중 둘이 그랑플람이거든?”

 

누가 들었다고 하더라도 요즘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근황 정도로 들릴만한 정보들을 말하고 나자,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꼬는 것이 빨라졌고 어쩌다 실수로 양동이를 떨어뜨렸는데 조심스레 발끝을 뻗어 다시 걸었다.

 

있지- 이번에도 물어보는건데 말이야아-”

 

어딘가 머뭇거리고, 어딘가 말꼬리를 늘이고, 어딘가 수줍어하는 목소리.

 

마치 예닐곱살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길에서 꺾은 들꽃을 내밀기 직전의 목소리.

 

이글은 그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이스 때문에 영국으로 오지 않는거면- 내가 죽여줄까?”

 

뎅겅-.

 

이글의 발에 걸린 양동이는 한 바퀴 크게 돌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루이스를 죽이는데 그렇게 집착하는 거냐]

 

그치마안- 내가 여기서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그것밖에 없단 말야-”

 

맨발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이글은 해사하게 웃었다.

 

천진하고 밝은 웃음이라서 누군가 보았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통화한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죽이게 해줘- ?”

 

[네가 루이스를 죽여도 내가 그쪽으로 당장 가는 일은 없다]

 

네에-”

 

이글은 짐짓 토라진 목소리를 내어 대꾸하고는 허공으로 새끼손가락을 뻗었다.

 

그럼,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나 부를 거지?”

 

[...]

 

부를 거지?”

 

[...]

 

약속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이글은 끊어졌다는 요란한 소리가 나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서 소파 위에서 굴렀다.

 

, . 벨져 형.”

 

너무 좋아.

 

바르작거리다 떨어졌는지 쿵,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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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마/인어AU] 왜 웃지 않나요

2015. 9. 12. 04:28 | Posted by 호랑이!!!

인어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

 

그래서 마틴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어는 육지로 잡혀왔다.

 

조그마한 수조 안에 비늘로 덮인 하체를 담그고 상체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화려한 석제 침대 위에 뉘여서.

 

처음에는 맞았고, 그 다음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속삭이며 마음을 괴롭게 만들었다.

 

지상의 공기는 무거워서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에는 부족하니까 스스로는 바다로 갈 수 없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자그마한 수조 안이나 딱딱한 돌바닥에는 자신이 흘린 눈물로 만들어진 회백색 진주가 그득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따끔 마틴은 지상의 인간들보다 매끄러운 손가락 끝으로 눈물이 굳은 둥근 보석을 굴려보곤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눈물이니까, 원하는 만큼 울다 보면 돌려보내주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들이 원하는 만큼이라는 것은 마틴 혼자로는 채우지 못한다.

 

삼칠일을 울었다.

 

삼칠일을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포기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고, 자신의 눈물을 보고 웃던 사람들조차 발걸음을 드물게 하자 표정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필요 없는 인어는 굶겨 죽여라는 말이 들렸다.

 

그래서 마틴은 안도했다.

 

드디어 죽는구나.

 

그러나 몸에 힘이 빠져 누운 마틴의 입가에 무언가가 닿았다.

 

깨끗한 물과 과실.

 

눈을 떴더니, 밝은 갈색 머리의 소년이 거기 서 있었다.

 

누구세요?”

 

릭 톰슨. 널 가둔 사람의 아들이야.”

 

이상하게도 마틴은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이후로 릭이 가져오는 이야깃거리에 조금씩 웃기 시작했고, 때로는 울었다.

 

인간의 아이는 빠르게 자랐다.

 

밝은 갈색 머리는 짙게 변하고, 위아래의 길이가 마틴보다 길어지고 목소리가 낮게 깔리도록.

 

어릴 적에는 문으로 들어왔지만 좀 자라서는 갑자기 방 안으로 불쑥 떨어지거나 푸르게 빛나는 둥근 원 안에서 나오거나 하도록.

 

말투도 변했다.

 

어린아이의 직설적인 말투는 어느샌가 그대, 당신이 포함된 격식과 예의가 포함된 말이 되었다.

 

인간의 아이는 정말 빨리 크네요.”

 

마틴은 석제 침대에 기대어 릭을 올려다보았다.

 

요만한 아이가 와서 물을 먹여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마틴은 손으로 어림하여 표시하며 웃었다.

 

그에 비해 인어는 정말 늙지 않잖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는 참 변함이 없소.”

 

간이의자를 가져와 앉은 릭이 마주 웃었다.

 

어제는 높은 산, 그 전에는 사람 없는 전망대.

 

아주 옛날에는 이 마을 어느 집의 지붕 위.

 

릭은 마틴을 여러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예요?”

 

그대도 좋아할 만한 곳이지.”

 

릭은 눈을 찡긋했다.

 

어둡고 푸르게 빛나는 원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기다리면, 또 어딘가에 뚝 떨어진다.

 

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고.

 

코 끝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스쳤다.

 

비슷한 걸 맡아본 적 있어.

 

예전에, 릭이 가져다준 꽃이란 것에서 이런 향이 났어.

 

눈을 뜨자.

 

초록색이라고만 알고 있던 들판에는 온통 하얗고 노란 꽃들이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땅에서 밤하늘이 자라는 것 같아요.”

 

릭은 미리 펼쳐두었던 자리 위로 마틴을 옮겨주었다.

 

마틴은 예쁘게 핀 꽃을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꽃잎 끄트머리를 깨물어 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웃으며, 릭은 자리에 벌렁 누웠다.

 

깊은 하늘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제 고향에서는 가끔 차갑지 않은 눈이 내려요.”

 

마틴도 자리에 누웠다.

 

지느러미가 풍성한 꼬리가 때로 흔들리는 소리를 냈다.

 

녹지 않으니 치우기도 힘들고, 몸에서 떼어내는게 귀찮으니까, 눈이 오면 다들 집 안에 들어가 지내는데 저는 아예 수면까지 올라왔어요.”

 

하얗고 고운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저 하늘은 아주 깊고, 다양한 것들이 저 먼 수면 아래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보여서. 저는 언젠가 저 하늘에서 헤엄치고 싶었어요.”

 

지금은?”

 

마틴은 눈을 감았다.

 

예전에도 릭이 이런 질문을 했었다.

 

돌아가고 싶은 거지?’

 

릭이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입가를 올려 웃었다.

 

괜찮아요 저는.”

 

인어의 것보다 따뜻한 팔이 차가운 몸을 덮었다.

 

달콤한 공기는 혀 끝에 향긋하게 와 닿고 몸은 따뜻해지고 있었다.

 

눈을 뜨면 깊은 하늘에 별이 헤엄친다.

 

잠이 들고.

 

눈을 뜨면 다시 수조가 있는 그 방이었다.

 

몸에 따뜻한 느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서.

 

마틴은 칼을 훔쳤다.

 

늘 자신의 식사를 가져다주는 일꾼 중 하나가 주머니에 넣어둔 나이프에 대해 생각하고 있길래 그의 귓가에 속삭여 나이프를 내놓게 했다.

 

날이 잘 서 있었다.

 

뾰족하고, 칼집의 가죽은 매끈하고 차갑고.

 

그것을 품고 기다리면 여느 때처럼 밤이 왔다.

 

.”

 

블론디.”

 

여느 때와 다르게, 릭은 마틴을 안고 이동했다.

 

여느 때처럼 눈을 감았더니, 코 끝에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냄새가 감돌았다.

 

눈을 뜨자 끝없이 펼쳐진 깊은 하늘과 검게 빛나는 바다가 있었다.

 

“......”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마틴이 손짓했다.

 

저는 괜찮다고 했잖아요.”

 

울 것 같은 미소에 마틴은 달래듯이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잎 넓은 나무에 릭이 기대고, 거기에 마틴이 기대고.

 

그렇잖아도 마지막 선물을 주려고 했어요.”

 

지느러미가 곧게 펼쳐진 꼬리를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바닷물에 담그고 마틴은 품에서 칼을 꺼냈다.

 

밝다고는 하나 그래도 희미한 달빛 아래라 릭은 처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투명한 눈물은 회백색으로 굳어지고 붉은 피는 몽글몽글 투명한 색으로 엉겼다.

 

“...왜 그런 표정이예요?”

 

내 눈물을 보면 사람들은 웃었는데.

 

블론디, 마틴... 안돼, 안돼 블론디. 마틴!”

 

손가락으로 상처를 벌리면 보석이 쏟아진다.

 

릭의 손은 그 상처를 틀어막으려 했지만 그 손가락 사이에서는 바작바작 마르는 소리를 내며 붉은 보석이 굴러떨어진다.

 

왜 웃지 않아요?”

 

마틴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갈색 머리의 청년, 혹은 소년, 어쩌면 청년은 반짝이는 돌로 뒤덮인 인어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인어는 죽음이 목을 훑을 때까지 물었다.

 

왜 웃지 않아요?

 

 


[찰리에그시해리] 데이지의 연극 발표회날

2015. 9. 1. 01:00 | Posted by 호랑이!!!

에그시는 찰리의 괴롭힘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아이를 보는 마냥 가끔은 혀를 차거나 작은 목소리로 조언을 해주기도 했으니까.

 

사실, 에그시가 자라온 곳에서는 갓 일곱 살이 된 어린애조차 찰리보다는 그럴싸한 악의를 만들어내곤 했다.

 

자신이라면 얼마든 그것을 받아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찰리 그가 노선을 바꾸어 자신에게 접근한대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 에기.”

 

, 오늘도 역시나로군.

 

에그시는 제 앞에 내밀어진 시계에 눈알만을 굴려 찰리 쪽으로 향했다.

 

롤렉스?”

 

윈체스터 주유소의 맥도날드 알바생도 알 만한 것으로 사왔지.”

 

재력 과시라니.

 

자신은 하찮게 여기는 우민에게도 번쩍거리는 고급 시계를 줄 수 있다 이거냐.

 

킹스맨에 취직하기 전의 자신이라면 고깝더라도 받아는 두겠지만, 이제 어머니와 데이지를 부양할 만큼 벌고 있으니 (아깝더라도)사양할 수 있다 이거야.

 

유감스럽게도, 차야 하는 시계가 정해져 있어서.”

 

그러자 대번에 표정이 일그러진다.

 

혓바닥이라도 내밀면 더 일그러뜨리려나.

 

최근 매너 레슨을 가르치는 해리가 들었다간 한숨을 쉴 생각을 하며 에그시는 픽 웃었다.

 

신사는 어떻고, 매너는 어떻고, 그런 경박한 짓은 하면 되니 안되니.

 

그러면 에기-”

 

. . .

 

알림음이 울렸다.

 

해리는 능력도 좋지, 어떻게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를 알고 연락을 한 걸까.

 

해리가 불러서. 이만 간다?”

 

에그시는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찰리를 내버려두고 양복점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만찬장에 계십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자 그는 가벼운 고갯짓과 미소로 화답하며 위치를 말했다.

 

에그시는 그의 말대로 위로 올라가서는 일종의 회의실 겸으로 쓰는 만찬장으로 들어가며 그의 후견인의 이름을 불렀다.

 

~~”

 

노크부터 하라고 했잖니.”

 

안녕하십니까 갤러해드.”

 

안녕하세요 멀린.”

 

멀린은 영 탐탁찮다는 눈으로 해리를 보고 있었다.

 

아서의 기본적인 표정은 거만함이었고 전 란슬롯이 미소였다면 멀린은 확실히 어딘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이 기본이긴 한데.

 

저건 진짜 정말로 확실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다.

 

해리, 그런데 저는 왜 부르셨어요?”

 

갤러해드가 전 후보생이었던 찰리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 이것 때문이었나.

 

에그시는 멀린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그것 때문에만 부른 것은 아니란다. 자 여기를 보렴.”

 

새침하게 말한 해리는 멀린의 손에서 차트를 빼앗아 위의 손잡이를 돌렸다.

 

이번 주 토요일에 데이지가 학교에서 연극을 한다고 하지 않았니? 토요일에 시간을 내려면 오늘 미리 일해두는 것도 좋겠지.”

 

해리...”

 

에그시는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예전 V-day일도 해결한 너이니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테지만, 다녀오겠니?”

 

다녀오겠습니다!”

 

에그시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료를 받아 밖으로 뛰어나갔다.

 

신사는 뛰지 않는다니까.”

 

“...젊은이를 조련하는 짓은 좀 그만두십시오.”

 

애정이 아니라 조련으로 보다니, 서운하군.”

 

해리는 전혀 서운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는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 갤러해드가 뭔가를 두고 간 걸까요?”

 

에그시 발소리가 아닌데.”

 

멀린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찰리가 들어오자 질린 눈으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에그-”

 

두리번두리번.

 

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에그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단 넥타이부터 단정하게 조인 뒤 멀린에게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멀린, 이건 집에서 보내는 겁니다.”

 

멀린은 몇 장의 종이와 편지가 들었음이 분명한 봉투 하나를 들었다.

 

나는 보이지 않나 보구나.”

 

, 안녕하십니까. 그러니까... 게리 하비?”

 

해리 하트, 전 갤러해드란다. 그리고 덧붙여서, 일부러 이름을 틀리게 하는 일은 아주 유치하고 뻔한 일 중의 하나라고 덧붙여 두지.”

 

그러는 그쪽도 별로 어른스럽지 않게 굴고 있잖습니까.

 

멀린은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에그시는 내가 보낸 임무 때문에 한동안은 바쁠 것 같구나.”

 

못된 영감.

 

찰리는 억지로 웃어는 보였으나 속으로는 냉큼 그렇게 생각했다.

 

저거 틀림없이 내가 에그시랑 가까이 붙어있는 게 고까워서 그럴 거야.

 

멀린은 드물게도 한숨을 쉬며 찰리와 해리가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시계를 보았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지금 복귀했습니다. -찰리?”

 

랜슬롯, 어서 오게.”

 

록산느는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을 보고 놀랐지만 잘 교육받은 귀족답게 티를 내지 않으며 보고서부터 멀린에게 넘겨주었다.

 

이번 보고서입니다.”

 

잘 썼군, 이건 차차 검토하겠네.”

 

멀린은 손으로 썼지만 깔끔하고 더할 나위 없이 읽기 편한 보고서를 슥 훑어 보았다.

 

그리고 오자마자 미안하네만, 한 가지 더 맡겨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멀린은 옆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처럼 만났으니 동기끼리 바라도 다녀오게.”

 

록산느, 록시는 옆을 보았다.

 

고급 정장에 말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광택이 나도록 닦은 구두, 잘 교육받은 유서 깊은 귀족, 킹스맨 혹은 그 후보생(이었던), 신경전을 벌이던 둘은 귀족의 품위고 뭣이고를 집어던지기 직전이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금요일 저녁, 에그시는 기분이 좋았다.

 

임무에서 입었던 가벼운 상처는 대강 다 나았고, 토요일 저녁 식사는 집에서 가족들과 해리, 그리고 친구 몇 명과 즐겁게 보낼 예정인데다.

 

멋대로 사진을 찍지 말라던 데이지도 내일 연극에 쓸 의상을 입은 모습을 미리 사진 찍어도 좋다고 허락해준 것이다.

 

찰칵 찰칵.

 

에그시는 기분 좋게 핸드폰 카메라를 썼다.

 

데이지 연극이 뭐라고 했지?”

 

뱃써... 백설공주.”

 

그래서 그렇게 왕관을 썼구나? 목걸이도 예쁘네~”

 

그런데.

 

데이지는 그 말을 듣자 놀란 표정을 짓더니 허둥지둥 목에 걸린 목걸이를 옷 속으로 숨기는 것이다.

 

데이지?”

 

?”

 

그 목걸이, 오빠가 봐도 될까?”

 

그러자 데이지는 의상의 목 쪽에 손을 얹더니 꾸욱 누르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자신의 방으로 화닥닥 뛰어가버렸다.

 

에그시는 침착하게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친구, 록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에그시?]

 

록시... 데이지가...”

 

[무슨 일인데?]

 

데이지가...!!!!!!!!!!”

 

[에그시?!]

 

그리고 록산느는 데이지가 오빠에게 비밀을 만들고 있어라는 주제로 세 시간,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주제로 세 시간, 기타등등의 주제까지 모두 여덟 시간을 에그시의 울음 섞인 한탄을 듣는데 사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데이지의 학교에서 눈이 부은 에그시를 만난 록산느는 한 마디 쏘아붙여주려다 그 퉁퉁 부은 눈 때문에 관두었다.

 

오셨네요 해리.”

 

좋은 아침이네.”

 

그 옆에서 멀린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이렇게 일찍 오는 모습을 보여주시죠.”

 

다음부터는 그러도록 하지.”

 

록산느는 커피를 사 와서 홀짝이며 의자에 앉았다.

 

... 록산느, 무슨 일이지?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누구누구네 오빠가 동생 때문에 서운하다고 여덟 시간이나 통화를 해서 말이죠. 정보국에서 봤다면 스파이라고 의심받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런, 에그시가?”

 

그러자 아직도 한스러운지 에그시는 멀린을 붙들고 떠들다가 체육관 밖으로 쫓겨났다.

 

멀린은 에그시의 핸드폰을 넘겨받더니 사진을 상비하는 간단한도구들로 확대하고 확인하기 시작했다.

 

백금이군, 보석은 유리구슬로 만든 가짜지만. 데이지에게 용돈을 많이 주나 보지?”

 

저 나이 때 적당할 정도만 쥐어주고 있어요.”

 

데이지가 돈을 버나?”

 

그럴 리가요.”

 

에그시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가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이 인간이... 설마 데이지를...”

 

침착하렴.”

 

전 이미 침착해요 멀린. 어쩌죠? 딘 그 인간이 데이지를 몰래 만난다던가, 그러면서 용돈을 쥐여준다던가, 선물 같은걸 하면 어쩌죠?”

 

“...”

 

그래도 아버지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멀린은 그렇게 생각만 했다.

 

벌겋게 퉁퉁 부은 얼굴로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아무래도 당분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노점을 찾으려 고개를 들었더니.

 

저만치 익숙한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에그시.”

 

?”

 

찰리가 오는구나.”

 

뭐라고요.

 

에그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의 보기만 해도 짜증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면상은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더니, 어딘가 살금살금 피하는 모습으로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저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날 것 같아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탕 먹는 거 잊지 말고.”

 

멀린은 에그시가 찰리의 뒤를 따라 체육관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에그시는 찰리의 뒤를 따라 들어가긴 했지만, 워낙에 사람이 많았던 터라 결국 잡지 못했고.

 

다시 얼굴을 마주한 것은 저녁의 홈파티에서였다.

 

“.........그래서, 찰리?”

 

에그시는 다시 마주한 그를 한껏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내 귀엽고 천사 같은 동생)데이지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건데?”

 

친구다.”

 

웃기지 마아아아!!!!”

 

해리, 멀린, 록시는 안락의자에 앉아 와인과 감자튀김을 먹으며 느긋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얘랑 친구인게 뭐가 나빠!”

 

나빠! 대체 뭣 때문에 친해지려고 한 건데! 쟤 목걸이도 네가 줬지!”

 

아 친구끼리 선물 좀 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왜 데이지랑 네가 친구냐고?!”

 

그야 데이지는 미래의 내...!”

 

저놈이 내 밤잠을 앗아간 원인이었군.

 

록산느는 크림을 가득 넣은 커피잔을 들었다.

 

미래의~~~~? 아무리 우리 데이지가 예쁘다지만 미래의 아내 따위를 말했다간...”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말해보시지!”

 

미래의... 에잇, 말 안 해!!!”

 

멀린은 우유와 얼음을 담은 커피를 홀짝였다.

 

록산느는 데이지가 가져다준 파이 조각에 포크를 꽂아서 크림과 과일을 가득 떠 입에 물었다.

 

“...찰리는 언제쯤 제대로 말할까요.”

 

찰리가 에그시한테 고백하는게 빠를지, 에그시가 해리한테 고백하는게 빠를지 내기하겠나?”

 

찰리한테 백 파운드 걸지.”

 

해리는 지각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걸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만.”

 

그들은 아직도 아웅다웅 싸워대는 둘을 보더니, 각자 들고 있던 음식을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샤토 디캠에 트윙키가 먹고 싶군.”

 

저는 스노우볼 쪽이 취향입니다.”

 

데이지? 저기 두 남정네가 널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는데, 좀 말려주지 않을래?”

 

데이지는 아직도 연극 의상 그대로, 싸우는 둘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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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X빅터] 고양이 -04

2015. 7. 23. 19:08 | Posted by 호랑이!!!

 

“빅토르~?”

 

다음 날, 그 이름을 들은 빅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예상한 일이었지만) 눈을 치켜떴다.

 

“왜 눈을 그렇게 떠?”

 

어차피 한 마디 제대로 하지도 못할 거면서.

 

이글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소파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날은 여즉 쌀쌀해, 그 손에는 데운 우유잔이 들려 있었다.

 

초콜릿과 바닐라를 타서 달콤한 향이 나는 것.

 

이글은 단 것이라면 그닥 내키지 않았지만, 아침 즈음 장을 보러 갈 때 빅터의 생각이 나 사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초콜릿도 바닐라도 커다란 통이라 혼자서는 다 비우지 못할 텐데.

 

언제까지 저 꼬마가 올 줄 알고.

 

“,,,아냐.”

 

거 봐.

 

이글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빅터의 손목을 잡아챘다.

 

“따라해.”

 

“...”

 

뭘? 이라고 말하는 듯 입술이 살짝 벌려졌지만, 결국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잡힌 손목 때문인지 잔뜩 굳어서는 가까이 붙은 자신을 간신히 올려보니까.

 

“자, 따라해 봐- 싫어, 라고.”

 

그러나 굳어서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더 가까이 붙어서,

 

“싫다고 해보라니까?”

 

그러나 고개를 젓는다.

 

“말 해. 입 열어.”

 

대답하라고.

 

싫다고 말하라고.

 

“...비...”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안돼, 라던가 싫어, 같은 말은 아닐 것 같다.

 

심지어 그 목소리도 아주 작아.

 

“...비켜.”

 

“못 비켜.”

 

비키게 해봐.

 

네가 잘 하는 거 있잖아? 바람으로 밀쳐내기, 때리기, 찢기, 그런거.

 

휘이잉.

 

빅터의 손 안에서 바람이 작게 소용돌이쳤지만 그뿐, 금방 꺼질 듯 말듯하게 보였다.

 

잡은 손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

 

애옹-

 

아직 한참이나 어려 높은 소리로 앵앵 우는 고양이 소리에 이글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손을 놓았다.

 

“...아, 장난이야. 하하하.”

 




[쌍총] 모티브 : 쩨로 그림

2015. 7. 19. 02:19 | Posted by 호랑이!!!

[우리는 이 행성을 점거했다. 이 행성을 파괴하기 전에 기회를 주겠다]

 

주어진 것은 익숙하기 짝이 없는 무기였다.

 

[너희는 선택받았다. 이것은 이 행성의 신식 무기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네 옆의 사람을 죽여라]

 

한 사람과 행성을 저울에 올렸다.

 

신식이라더니, 웨슬리는 얼핏 낡아 보이는 총을 손에 쥐고, 내려다보았다.

 

이것으로 카인을 쏘면 세계 멸망을 막을 수 있다.

 

사람의 목숨 하나와 수십억, 혹은 그 이상의 목숨.

 

단순한 숫자로 계산한다면 더없이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있는데.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앞에 카인이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마도, 죽을 각오를 하고서.

 

그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총의 안전장치를 걸어 품에 넣었다.

 

못 하네.”

 

슬로언, 이건 답이 정해진 일이네!”

 

아니지, 아니야.

 

일순 망설인 내가 부끄러워졌네, 나는 아직 장군이라는 직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나봐.”

 

목숨 하나와 목숨 여럿을 비교하는 일은 전쟁 중으로 충분했는데.

 

조금은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지 않겠나.”

 

이제라도 늦지 않았을테니, 빨리...”

 

카인은 웨슬리의 품에서 총을 꺼내 손수 잠금장치를 풀어 손에 쥐어주기까지 했다.

 

웨슬리는 그 총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꼭 그래야겠나?”

 

총구는 카인의 머리를 향했다.

 

카인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 폭발음이 들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본 그 곳에는 총을 전해주러 왔던 로봇이 박살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정말로 세계는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원을 채취한다며 땅을 파고들었고 사람 몸에 든 성분을 조사한다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포획해 가거나, 공기가 너무 맑다며 알 수 없는 이물질 같은 연기를 뿌렸다.

 

다행히도 능력자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고, 그 중에서도 공성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51조로 파괴 임무가 떨어지곤 했다.

 

능력자들은.

 

공성전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카인과 웨슬리 역시 전장에 투입되었다.

 

단단하게 보강된 상자나 건물은 부서졌고, 그들은 상처를 입었다.

 

웨슬리의 구급함은 이미 다 써버린 상태인데다 카인도 웨슬리도 무시 못 할 상처를 입었다.

 

보급품은 얼마 후에 오지?

 

카인은 잔해의 그늘에 숨어서 센트리 레이더를 설치했다.

 

붉은 빛이 깜박거리면서 시야를 흐릿하게 밝혔고, 카인은 웨슬리를 돌아보았다.

 

대전차지뢰는?”

 

묻어두었네.”

 

우선적으로 총기며 사용하는 장비를 점검하고, 탄창을 채우고, 아군에게 연락을 하거나 물을 마셔두는 등,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수통에 남은 미지근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카인은 웨슬리에게 말을 꺼냈다.

 

슬로언, 내 생각에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는데.”

 

그러나 슬로언은 묵묵히 건량을 씹을 뿐이었다.

 

레이더의 붉은 빛에 그림자가 졌다.

 

카인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 광택나는 쇳덩이에 우지를 갈겨 대었다.

 

이내 탄창은 비었지만 그 기계는 여전히 움직였고, 눈 역할을 하는 렌즈를 그들 쪽으로 돌렸다.

 

내가 가정을 좀 해 봤는데.”

 

카인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류탄을 꺼내 던졌다.

 

왜 그 기계는 너희라고 했을까?”

 

다음은 잡아서 내리누르고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에 한 발.

 

“‘선택받았다라는 건 어떤 기준일까.”

 

카인이 드라그노프를 꺼내려는 순간, 웨슬리는 그 손에 자신의 품에서 꺼낸 낡은 총 한 자루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카인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당기는 순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내 웨슬리의 몸은 무너졌고, 기계의 렌즈는 그 모습을 똑똑히 담았다.

 

미친-”

 

내가... 가정을 좀... 해 봤는데...”

 

슬로언, 웨슬리! 응급 키트는...! 눈 감지 말게, 나 보고 있어!”

 

“...비가 오는구먼...”

 

자네가 세계를 구할 만큼 대단한 자라면, 나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을만큼 대단한 자 아닌가.

 

기뻐하게, 이 세계는 지금 자네가 구했지 않나.

 

웨슬리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 손은 올라가, 카인의 눈가를,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따뜻한 비가 오는구먼...”

 

 

[Jail] 니키타/이화 - 형제라면

2015. 7. 16. 15:54 | Posted by 호랑이!!!

교도소에서 보내는 편지는 보내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니키타 네를린, 현재 복역 중인 죄수는 아주 오래 전에 알게 된 동생뻘 친구에게 하나, , 도합 여섯장의 편지를 적어 부쳤다.

 

그리고 그것이 장장 삼 개월 지나서.

 

이화는 편지를 받았다.

 

기억이 사라졌는데.

 

교도소에서 편지가 온다.

 

이 사람은 누굴까, 예전의 는 조직폭력단에라도 들어있었던 걸까.

 

니키타는 무슨 드라마 이름 같은 이름인데, 여자인가? 글씨체가 부드러운걸 봐서는 여자야.

 

이화는 편지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다.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한 번 놀러와

 

놀러오라니, 교도소로?

 

뭘 가져가지? 뭘 입어야 하지? 기억 잃었다고 얘기를 해야 할까?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이화는 한 손에 초콜릿이라던가, 여성들에게 인기 있다는 로맨스 소설까지 한 권 사서 들고 왔다.

 

저기... 오늘 면회 오겠다고 했던 이화인데요.”

 

그러자 무뚝뚝해 보이는 간수가 이쪽이라며 안내해주었다.

 

면회는 투명한 부스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감시를 위해서라며 그 간수는 안으로 들어와 구석의 의자에 앉았다.

 

편지를 교환했던 그 사람이 곧 온다니.

 

내용이랑 말투만 봐서는 키 크고 파마한 금발에 예쁜 누나일까.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는데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까만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 남자.

 

오오, 키 크다.

 

곱슬 머리? 파마 머리인가? 이제 거의 다 풀렸네.

 

밤색 머리고, 여기서 간수 하기에는 엄청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인데-

 

키는 크지만, 하고 덧붙이는데 뭔가 이상하다.

 

옷이, 옷이 주황색 죄수복이야.

 

이화!”

 

꽤 반가워 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금발 파란눈 170cm의 누나의 환상이 쨍그랑 쨍그랑 깨진다.

 

니키타... 네를린씨?”

 

왜 그렇게 어색해. 하하, 오랜만이야.”

 

니키타는 팔을 활짝 벌려 와락 끌어안았다.

 

잘 지냈어? 어때, 뭐하고 지냈어? 감옥 밖 얘기 좀 해줘.”

 

다행히도, 서로 좋지 못한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밖에서는 지내기가 이렇고, 저렇고, 얘기하다가 니키타가 예전 얘기를 할 것 같아, 이화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약을 잘못 먹어서 예전 기억이 없어요.”

 

니키타의 얼굴이 웃는 그대로 굳었다. 일순이지만.

 

그리고 의자를 뒤로 당기더니 털석 주저앉았다.

 

“...교도소에서 오라는 편지가 왔다고 냉큼 오면 어떡해.”

 

내가 마약왕이고 연쇄살인범이고... 연쇄살인범은 맞지만, 아무튼 그래서 너한테 몹쓸 짓을 시키거나 하려고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온 거야? 어디 중국이라던가 러시아에서 편지가 와도 무시하기 어렵지 않은데, 다른 곳도 아니고 교도소라고 교도소! 내가 뭐하는 사람일 줄 알고? 그냥 그대로 눈 딱 감고 편지를 태워버리고 그런 일 없다는 듯이 모른체하면 되었을 거 아냐? 예전부터 스스로를 좀 아끼라고 했더니 이거 하나도 안 변했어 아주.

 

니키타가 다다다 잔소리를 하자 이화는 양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하하.

 

니키타는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 돌아오면 찾아와, 아마 그때까지도 있을 것 같으니까.”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서요?”

 

이화를 한 번 보고, 니키타는 여느 때처럼의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교도소도 국가 시스템이라고, 내가 모르는 내 이야기도 있더라고.”

 

너랑 나, 라고 하는 듯이 손가락으로 이화 쪽을 가리켰다가 자신 쪽을 가리킨다.

 

형제.”

 

, 눈 동그랗게 변했다.

 

니키타는 조심조심 손으로 이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저씨... 아니, ...?”

 

아저씨.”

 

아저씨, 덧붙이고 니키타는 다시 이화의 머리를 헝클어뜨려 놓았다.

 

 

[티엔하랑마틴] 어느 날의 꿈?

2015. 7. 15. 02:44 | Posted by 호랑이!!!

이것은 아주 어릴 적, 이하랑이 산신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어린 하랑은 그날도 아이들과 진탕 싸우고 돌아왔고 고단하여 일찍 잠이 들었더란다.

 

꿈속에서 온갖 개를 보는데 그 개들은 눈빛이 형형하고 살갗이 벗겨지거나 다리가 없거나 한 일도 왕왕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했었다.

 

개들은 그를 보니 반갑다며 꼬리를 치고 혹여 놀랄까 달려들지도 않고 의젓하게 옆에 서 만져달라며 가만 기다렸다.

 

영특하고 안타까우니 쓰다듬을 만도 하건만 하랑은 선뜻 그러질 못했다.

 

그 개들에게서는 이세상의 것이 아닌 기운이 풍겨 본능적인 거부감에 다가갈 수 없게 했으니.

 

앞에 서서 마침내 그 거부감을 누르고 머리며 귀를 만져주니 개들은 좋다고 다시 꼬리를 친다.

 

하지만 그뿐이라, 개들은 하랑이 몸이라도 더 쓰다듬거나 안아주기 위해 가까이 가려 할 때마다 몸을 뒤로 물려버리고.

 

그에 하랑이 가까이 가려 했더니 뒤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더란다.

 

고개를 돌렸더니 글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냥한 목소리의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라고 달랬고.

 

여기는 죽은 이들이 오는 곳이지요?”

 

그렇단다.”

 

왜 난 여기가 무서운 것이오?”

 

그러니 그 이가 말했다.

 

친구가 없어서 그렇지.”

 

어린 하랑은 양 팔을 벌렸다.

 

무서우니 안아주시오.”

 

그 이는 하랑이 안겨오자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등을 토닥이었다.

 

갈 때는 조심하거라, 누군가 맛난 것을 주어도 먹으면 아플 테니 입에 대지 말고, 누군가 이리 오라 손짓해도 믿지 말고.”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될 것이라.

 

그가 등을 떠미니 아까까지 없던 곳에 문이 생겼다.

 

“...나랑...”

 

나랑 친구가 되어주지 않겠소? 하고 묻고 싶었는데.

 

그 사람은 답 없이 문을 열어 그를 쫓아냈다.

 

길은 고르고 알록달록한 돌로 꾸민 예쁜 곳이었다.

 

길이 꼭 사탕과자 같고나 생각하는데 누군가 제 손에 아가 이거 먹어보렴 하고 하얀 것을 준다.

 

나중에서 안 거지만 그것은 과자에 얹은 아이스크림으로 보기에도 퍽 맛나 보여 한 입 물었더니 대번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팠다.

 

문득 먹지 말랬지!’하는 소리가 들리고 손을 찰싹 맞아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아까 일이 생각나서 화닥닥 길을 뛰었다.

 

뛰고, 뛰고, 뛰었고 한숨을 슥 돌리려는데 눈이 확 뜨였다.

 

꿈은 거기서 끝.

 

하랑은 개꿈이려니 생각하고 일어나 머리를 털었다.

 

단 하나 아쉬운 건 친구가 되어달라고 말할 것을, .

 

그리고 그 아쉬움도 령을 부리기 시작하며 사라졌다.

 

 

 

 

 

 

하랑, 얌전히 굴어야 한다.”

 

사부도 참,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걱정도 많소.”

 

처음 재단에 오는 날, 이색적인 능력이라 보고 싶어하는 이가 많다고 티엔은 그를 사람들 앞에 세웠었다.

 

이거 꼭 서당에 처음 간 날 같구만.

 

단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문득 하랑의 눈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다.

 

가로세로 하얗게 줄무늬가 들어간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 아래는 금색 머리카락.

 

오라 저게 금발이라는 거구만?

 

하는데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하랑은 지독한 기시감에 몸을 멈췄다.

 

? 예지몽 따위에서 본 사람인가?

 

아니, 최근에 꾼 예지몽에서는 저런 사람이 나오질 않았었는데.

 

소개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 도중에도 눈은 그 사람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마침내 서커스단 원숭이마냥 앞에 두는 일은 끝났고 티엔은 계속 집중하지 않는 하랑이 어딜 보는가 하여 그쪽을 보았다가 어깨를 잡아 시선을 돌리게 했다.

 

이하랑, 그 사람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

 

실례네요 티엔 정, 이제 한 식구잖아요?”

 

아까까지 저 멀리 있던 이는 고개를 돌리니 바로 앞에 있었다.

 

부드러운 표정과 선량한 인상에 목소리는 유난히 상냥하다.

 

저 목소리, 저 목소리를 분명 들은 적 있었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마냥 몸이 부르르 떨리고 온몸의 털이 바짝 섰다.

 

마틴 챌피예요, 이름이 마틴이고 패밀리 네임이 챌피, 이해했나요?”

 

대답도 못 하고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티엔이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무슨 수작이냐.”

 

수작이라니 너무하시네요, 그저 인사를 하려는 것뿐이랍니다.”

 

그 잔재주로 내 제자를 꼬드기기라도 했다간 끝이 좋지 못할 거다.”

 

그럴 생각은 없으니 비켜 주시죠, 오랜만에 인사를 하고 싶으니까.”

 

마틴은 티엔을 비켜나게 한 뒤 하랑을 꼭 껴안았다.

 

색목인들은 이게 인사야?”

 

그렇답니다, 반가워요 하랑 이.”

 

옆에서 지켜보던 티엔은 마틴의 입에서 이어 흘러나온 답잖은 말에 놀랐다.

 

저와 친구가 되지 않겠어요?”

 

 

 

 

 

 

 

 

 

친구가 되겠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로군.”

 

실례라니까요.”

 

하랑의 조선 신분은 박수라 높지도 않고, 능력이야 앞으로 자라겠지만 당장은 쓸 곳이 없는데 뭣 때문이냐?”

 

부드러운 빛의 스탠드 조명에 의지해 책을 읽던 마틴 챌피는 책을 탁 덮어버렸다.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을 사귀지는 않는답니다. 웬일로 제 방에 온다 싶더니 시비를 걸러 온 건가요?”

 

경고다.”

 

하랑은 내 제자다.

 

그렇게 말하고 사라지는 뒤에 대고 마틴이 웃었다.

 

하랑은 제 것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