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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8

2019. 5. 17. 12:45 | Posted by 호랑이!!!

 

몰래 빠져나갈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보호자들에게는 다행히도, 침대에 누워나 볼까 했던 하랑은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저녁시간을 지나고 아침도 거르고 토스트와 주스를 가져다 준 마틴이 아침에 놓고 간 음식이 그대로인 것에 비명을 지를 때까지나 말이다.

 

다시 잠들려고 했던 하랑을 마틴이 깨워 앉히고 티엔은 주방을 빌려 죽을 끓였다.

 

입에 넣다가도 잠들어 버려 마틴이 능력을 이용해 깨워야만 했지만 결국 한 그릇을 비운 하랑은 식사하느라 잠이 깼다며 눈을 비볐다.

 

네가 체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졸린 거다.”

 

마틴은 티엔의 옆구리를 콱 찔렀다.

 

잠이 조금 남아있던 눈꼬리는 홱 올라가고 하랑은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뭐냐.”

 

이 잔소리꾼.”

 

입가에 흐른 죽이나 닦아라.”

 

마틴은 냅킨을 들어 하랑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정티엔 바보멍청이.”

 

사부라고 불러야지.”

 

마틴은 투덜거리는 하랑을 내려다보았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악 뭐야 형, 나 애 같다고 생각한 거지!”

 

. 가서 약 먹고 사탕 하나 먹고 양치질 하세요.”

 

약 먹으면 졸립단 말야!”

 

그럼 좀 자요. 재단에는 형이 말해둘게요.”

 

싫다고 칭얼거리는 하랑을 어르고 달래 마틴은 약과 물을 손에 쥐여주었다.

 

하랑은 약을 꿀꺽 삼키고 마틴이 가져다준 초콜릿을 하나 물고는 꿍얼거리면서 마틴의 가슴에 머리를 툭 기댔고 동시에 티엔의 눈썹 한 쪽이 불만스럽게 올라갔다.

 

이하랑, 나랑 마틴은 먼저 재단으로 갈테니까 너는 몸을 좀 추스르고-”

 

뭐어? 정티엔 지금 제정신입니까?”

 

!? !?”

 

성인 알파가 둘이나 붙어 수발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베타가 직원인 호텔에 와 있으니 여기 맡겨두고 우리는 돌아가야지.”

 

당신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하랑의 보호자 아닙니까, 책임지고 괜찮아질 때까지 돌볼 의무가 있어요.”

 

티엔의 눈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가까이 갔다가 한순간의 충동으로 어그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 있는 것 같나.”

 

하랑은 휙 티엔에게 시선을 옮겼다.

 

티엔은 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마틴을 보는 것도 아니고, 하랑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분노하고 있다.

 

“...우웩....”

 

정티엔 냄새나요.”

 

마틴은 입을 뻐끔거려서 하랑에게는 들리지 않게 무어라고 말했고 티엔은 푹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랑의 붉은 개가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고 환기가 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티엔에게서 흘러나온 페로몬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하랑은 입에 문 초콜릿을 마저 씹어 삼켰다.

 

이전이라고 알파의 냄새를 안 맡아본 것은 아니었고, 재단 내에서도 알파 냄새 같은 건 벽에 배길 정도로 많이 나지만 티엔이 감정상의 실수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페로몬(이라고 부르는)을 내보낸 적이 없었기에 낯설다.

 

냄새 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하지만 저 티엔이 저런 반응이라.

 

충동으로 뭘 어그러뜨리는데?”

 

티엔이 딱 잘라 말했다.

 

넌 알 거 없다.”

 

참 다정하기도 하지.

 

하랑은 마틴을 돌아보았지만 마틴도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몰라요.”

 

알았으면?”

 

말했겠죠.”

 

티엔이 돌아보았지만 마틴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랑이 무서워하잖아요. 뭐든 말했을 걸요.”

 

“...”

 

뭐 든, 하고 마틴이 입을 벙긋거렸다.

 

 

아라벨라 10

2019. 5. 10. 21:33 | Posted by 호랑이!!!

 

그 풀숲에서 튀어나온 것은 기묘한 사람이었다.

 

저렇게 천 몇 장으로 몸을 느슨하게 감싸는 옷은 유행이 백 년은 지났을 터.

 

신발도 옛날 양식이다.

 

그러나 머리도 피부도 잘 손질되어서 비록 구불거리며 물결치는 그 머리도 피부도 검은 빛이라고 하나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띈다.

 

이질적이라고 할 만큼 어딘가 다르고, 강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어떤 것도 가늠할 수 없다.

 

가치관도, 나이도, 성별도, 어떤 사람인지도.

 

그 사람은 아라벨라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낙트, 우리 아가, 나의 낙트, 작은 아가, 어디에 갔던 겁니까. 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습니다. 이 숲이 술렁이고 나의 분노와 나의 슬픔에 우리의 일족이-.”

 

저기요.”

 

아라벨라는 그 사람에게서 한 걸음 뒤로 떨어졌다.

 

아름답고 위압감이 있고 어디에서일지 모를 미지에 대한 공포가 일어나는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낙트?”

 

죄송하지만 누구신가요.”

 

주위에서 푸른 바람이 우르르 휘몰아쳤다가 일순간에 훅 가라앉는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솟구쳤다.

 

이 강풍 속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아라벨라에게 다가갔다.

 

아라벨라는 반사적으로 양 손을 올렸지만 그 사람은 거기에 개의치 않고 손에 얼굴을 가져갔는데 아라벨라는 물어 뜯긴다는 생각에 손을 움츠렸지만 그 사람은 이를 드러내기는커녕 킁킁 소리를 내며 냄새를 맡았다.

 

손에서 손목으로, 팔로, 품에 고개를 가까이 하는가 싶더니 목덜미로 코를 가져가자 목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뒷걸음질을 쳐도 팔로 밀어내도 고개를 뒤로 빼어도 그 사람은 따라붙었는데 금방이라도 물어뜯길 것처럼 상대는 위협적이었지만 아라벨라는 이런 상황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몇 시간처럼 느껴졌던 그 이상한 과정은 끝나고 그 사람은 사납게 눈을 치떴다.

 

새까만 눈이 마수처럼 번뜩였다.

 

너는 누구지.”

 

저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입니다. 렐리악 백작 가문의 적자이고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눈에서 힘이 풀렸다.

 

“...렐리악의 아이였군. 그래, 그러니까 이해가 되는군요. 방금의 행위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근에 아이 중 막내가 사라져서 찾으러 다니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작은 렐리악 당신에게서 아이의 냄새가 났습니다.”

 

그 사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대하기가 편해져서 아라벨라 역시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렐리악 가문을 아십니까?”

 

이 질문은 이상하다.

 

렐리악은 백작이며 역사만은 어느 공작가나 왕가에도 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렐리악의 본가가 다스리는 이 곳이라면 부모님 이름만큼이나 렐리악이라는 이름이 친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상대는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에 아라벨라는 더 당황했다.

 

이 산에 사는 이들은 모두 렐리악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맹이고, 친구이고, 가족이니까. 아바트가... 아니지, 최근에 본 그 아이 이름이 뭐였더라... 루하트? 아냐... , 바실리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까? 실례지만 당신의 나이는? 성년은 넘겼습니까?”

 

, 성년을 넘겼습니다.”

 

그럼 어째서 바실리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지? 알비노라서?”

 

뒷말은 아주 작게 들렸다.

 

할머니를 아시나요?”

 

알다마다. 며칠 전에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 쪽을 둘러보고 온다고-”

 

죄송하지만 어느 쪽인지 가르쳐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라벨라는 그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저 쪽인데 혼자서 갈 수 있겠습니까?”

 

아라벨라는 잠시 망설였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 곳은 초행이고 길을 잘 모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놀랐다.

 

과연...”

 

그렇게 놀라면서 뭐가 과연이라는 걸까.

 

그 때 반대쪽 풀숲이 부스럭거리더니 붉은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프루던스!?”

 

이런 곳에 계셨군요.”

 

붉은 머리의 집사는 검은 사람을 보더니 평소의 부루퉁한 표정 그대로 움찔했다.

 

“...슈체른...?”

 

프루던스.”

 

슈체른은 프루던스를 보더니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렐리악의 어린 용이여, 내일은 단단히 준비를 해서 산으로 오십시오. 그 말은 두고. ...참 맛있어 보이거든.”

 

그 사람, 슈체른은 몸을 돌렸다.

 

검은 인영이 걸음에 따라 일렁이다가 스르륵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위에 올라타 고삐를 프루던스에게 넘겼다.

 

어떻게 산을 뚫고 왔는지 모를 집사는 옷이 찢어지기는커녕 머리카락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아서 눈길이 갔다.

 

아라벨라는 프루던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저 사람은 누구인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당신은 내 어머니나 할머니와 무슨 관계인지.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프루던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

 

주인님께서 아직 아가씨께 말해도 좋다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온 길에 비해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저택이 보인다.

 

정원에도 지붕에도 환하게 불을 켜 둔 저택이.

 

저택의 지붕에 걸린 커다란 깃발이 보인다.

 

날개를 활짝 편 용의 실루엣을 그린 깃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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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9

2019. 5. 3. 23:32 | Posted by 호랑이!!!

 

날이 밝자마자 아라벨라는 슬리퍼를 신었다.

 

벗겨지지 않게 끈으로 질끈 묶고 잠옷 차림으로 마구간으로 달려가자 근육질의 백마가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일찌감치 말에게 여물을 주러 나온 마구간지기는 아라벨라가 사납기 그지없는 말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외쳤지만 아라벨라는 데일라가 든 칸의 문을 활짝 열었고 아라벨라의 백마는 훌쩍 뛰어나왔다.

 

오랫동안 달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인지 애교스럽게 부비는 머리에는 힘이 실려서 때로 아라벨라의 몸이 들썩 들리기까지 한다.

 

승마용 옷도 입지 않았고, 말은 사납고, 제 손으로 말이나 몰아보았을까 싶은 귀족 아가씨.

 

그러나 아라벨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며 날렵하게 말 위에 올랐다.

 

데일라는 한동안이나 달리지 못한 반동인지 처음 달리는 길인데도 거칠게 달려갔고 마악 저택에 채소를 가져다준 마을의 농부는 얼어붙었다가 아라벨라가 달려오자 문을 열어 그 뒤로 후다닥 숨었다.

 

백마와 아라벨라의 뒷모습은 며칠 동안 아라벨라를 지켜보았던 이들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아가씨가... 말을 타네...?”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목을 두드렸다.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와 뛰다보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아라벨라는 길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렐리악 영지에는 평야와 숲밖에 없었으므로 산을 보는 것은 처음.

 

세상의 초기에 신성한 용이 이 거대한 대륙에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 용이 발로 판 곳에는 물이 고여 연못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고 흙을 밀어낸 곳은 낮은 지대, 흙이 밀린 곳은 언덕이 되고.

 

먼 훗날 그 용이 대륙에 몸을 뉘이고 죽음을 받아들일 때 등뼈를 따라 산맥이 생기고 뼈는 보석이, 마지막 숨결은 이 세상의 마나가, 몸은 거대한 산이 되었다.

 

아라벨라는 숨을 들이쉬었다.

 

신성한 용의 몸

 

장소에 깃든 마력은 청량하고 공기는 시원하다.

 

얼핏 아라벨라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어진 듯 보였다.

 

데일라가 불안한 듯 투레질을 하자 아라벨라는 손을 내려 부드럽게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며 나지막하게 기도를 올렸다.

 

할머니를 찾게 도와주세요

 

가자, 데일라.”

 

데일라는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금방 산에도 적응하여 길을 올랐다.

 

처음 얼마간은 가팔랐던 길은 어느 정도 산을 오르니 완만한 길로 변했고 데일라의 발도 느려졌다.

 

아라벨라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에 물이 솟는 작은 샘이 있어서 백마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끌고 갔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물은 깨끗했기에 데일라에게도 먹이고 아라벨라도 좀 떠 마셨다.

 

할머니가 이 길로 갔겠지.

 

할머니하고는 도통 좋은 기억이 없지만 저 저택에 주인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할머니에게도 저택에도 렐리악 가문에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태까지 외길이었다는 것과 산을 아무리 둘러봐도 늑대나 곰, 위험한 마수의 흔적이 없다는 것.

 

이 산보다 사람 발이 많이 닿는 아라벨라의 집 근처 평지에도 오소리나 늑대, 마수 같은 게 한 무더기는 있다는 걸 떠올려보면 꽤 안전한 곳이다.

 

이런 곳에서 왜 할머니는 못 돌아오는 걸까.

 

아라벨라는 해가 지도록 말을 달렸다.

 

데일라는 힘차게 달렸고, 빠른 걸음으로 구릉을 지나 언덕을 넘고 장애물을 뛰어넘었고, 해가 질 즈음에는 연못가에 뻗어버렸다.

 

“...데일라.”

 

푸르르.

 

해가 지고 있어.”

 

푸르르르.

 

집에 안 가?”

 

푸힝.

 

사과 줄게. 빵도.”

 

푸힝 푸르르르륵.

 

투레질을 거칠게 하는 모습에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몸에 기대 다리를 쭉 뻗었다.

 

너무 달렸나.

 

해도 지고 배도 고프고, 이제 어떻게 돌아간다.

 

이렇게 오래 달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좀 가지고 나오는 건데 정신을 차려보니 해 뜰 때 나와서 해 질 때에야 멈췄다.

 

돈도 없고 옷은 다 더러워지고 해어지고야 말이다.

 

길이 어렵지는 않았으니 가려 한다면 혼자서도 잘 가겠지만 아라벨라는 데일라를 여기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데일라아.”

 

그러나 데일라는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라벨라는 나무에 기댔다.

 

할머니의 저택으로 올 적에야 노숙을 했지만 그건 마차 안이었지.

 

창문으로 살짝 내다보면 스파크와 몇몇 기사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고 잠들기 전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끼어들 수도 없었으니 몰래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오늘 길은 어땠고, 오는 길의 호수가 예쁘고, 아까 보았던 나무가 어떻고 저떻고, 내일은 마을에서 쉴 수 있겠다던가, 저기 흘러가는 구름이 생긴 게 동물 같다던가, 바람이 좋다던가, 무슨 향이 난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매일 반복되기도 했고, 같은 주제인데도 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별이 있었지

 

별이랑 달이랑.

 

아라벨라가 고개를 들자 어두워진 하늘에 하나둘씩 떠오르는 하얀 별과 노란 달이 보였다.

 

멀리서 바람이 불자 숲과 나무는 살랑살랑 흔들리고 나무껍질과 이끼와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냄새가 나고 아라벨라는 아직은 날이 춥다는 생각을 했다.

 

데일라.”

 

푸르륵.

 

할머니는 대체 어디에 가신 걸까.”

 

푸르륵.

 

적어도 마르틴과 아라벨라가 할머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계시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아라벨라는 잠옷 자락을 끌어내려 발을 가렸다.

 

숄이라도 하나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잠옷이 이미 흙먼지로 엉망이 된 것은 둘째 치고, 바람에 날리던 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진 것도 다음으로 미루고... , 엉망이군.

 

하늘을 보면 여전히 달이 비친다.

 

별이 반짝이고, 나뭇잎이 팔랑이고,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잠깐, 저거 바람?

 

아라벨라가 벌떡 일어서자 데일라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굴려 쳐다보았지만 데일라가 어떤 반응을 하던 아라벨라는 홀린 듯 한 곳에 눈을 두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푸른 바람.

 

바람이 보인다.

 

어두워서 잘못 본 건가?

 

아라벨라는 나뭇가지를 타고 올랐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어렵지 않게 올라서 흔들리는 나뭇잎에 손을 내밀자 푸른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간다.

 

무슨 가루 같은 것인지, 아라벨라는 손을 눈 바로 앞으로 끌어당겼으나 어떤 염료 같은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높은 나무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하얗게 달빛이 내리쬐는 아래 온 숲이 검게 술렁이고, 그 안을 잘 보면 나뭇잎이 은빛으로 빛을 반사하는 사이로, 사이사이로, 녹색에 가까운 푸른 바람이 온 산을 감싸고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어느 곳은 빠르게 내리꽂히고 어떤 곳은 나지막하고 연하게 흘러가고, 어떤 곳에서는 휘몰아치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이라니.

 

그 장관에 넋을 놓았던 아라벨라를 현실로 끌고 온 것은 발에서 올라오는 통증이다.

 

땅으로 내려와 발에 묶었던 끈을 풀고 슬리퍼를 벗자 그렇잖아도 낡았던 슬리퍼는 꽤 못 볼 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발도 못 볼 꼴이 되어 있었다.

 

몰랐을 때는 신경조차 안 쓰였는데! 신발을 벗고 엉망진창인 발을 봤더니 갑자기 오만 상처가 다 아프다... 아야야...

 

꼼짝도 못하겠다며 신발을 주머니에 푹 쑤셔 넣는데 갑자기 옆의 풀숲이 부스럭부스럭 흔들렸고 방금 전까지 꼼짝 못 한다던 아라벨라와 데일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낙트!”

 

누군가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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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편에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어 조금 수정했습니다.

 

집사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한 문장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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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론을 위한 괴담

2019. 4. 29. 23:24 | Posted by 호랑이!!!

‘또 왔군.’

 

탈론은 나뭇잎 밟는 소리에 인상을 썼다.

 

후배 중 뛰어나 후기지수에 몸 담은 길은 암살이니 경공이야 미약하더라도 원한다면 기척 정도는 지울 만한 인물임에도 굳이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를 낸다.

 

저것이 예의인지 놀림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정을 생각해보면 후자가 가까우리라.

 

같은 문파가 아니면 어느 밤 조용히 명줄을 끊었어도 진작 끊었을 것인데.

 

어지간한 일로는 후회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저 어린 후생이 자신에게 들러붙는 이유가 첫 만남 때 닿는 손길을 피해 뒤로 굴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좀 참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문파장인 주제에 무인보다는 상인이라고 했으면 더 믿음이 갔을 이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을 때를 떠올리면....

 

녹색 비단도포에 빨간 머리통으로 반질반질 웃는 낯을 생각했더니 머리에 열이 오른다.

 

“대협! 여기서 뭐 해요? 일 해요? 왜 기척을 숨기고 있어요?”

 

“저리 가.”

 

그나마 한 가지 좋은 점을 짚으라면 처음에는 오라버니! 했다가 대협이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꼬박꼬박 부른다는 점이다.

 

그나마 한 가지 꼽으라면 말이다.

 

“헉, 정말 일하고 있어요? 왜? 탈론 대협 일 중독이예요?”

 

“저리 가.”

 

“문파장 오라버니가 준 일이에요? 아니면 개인적인 일? 왜 항상 볼 때마다 일하고 있어요? 새암이가 도와줄까요?”

 

“저리 가.”

 

심지어 노란빛에 꽃빛에 화려한 옷이다.

 

어느 제정신 아닌 암살자가 저런 걸 입나.

 

심지어 머리에는 꽃까지 꽂았군.

 

쟤네 문파는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쫓아 보내려고 해도 소용 없어요! 다른 분들은 다 바빠서 탈론 대협을 쫓아다니기로 했거든요.”

 

기세가 자못 당당하다.

 

저게 문파에 오고 몇 명이랑 인사를 나눴더라? 흑막이랑 인사를 했더라고 문파장이 그랬지.

 

빨간 머리 린족이랑은 인사를 했나? 비슷한 연배이니 말도 통하련만 혹시 둘이 친구가 되면 날 그만 쫓아다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탈론은 바삐 발을 움직였다.

 

노골적인 기척을 내며 끈덕지게 쫓아오는 것에 걸음은 점점 더 빨라진다.

 

그러고 보니 저 꼬마는 경공이 달리지.

 

탈론은 뿌듯한 마음으로 여간해서는 오르기 힘들 나무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 흐뭇함은 어린 암살자가 쫓아오기 전까지 탈론의 마음을 만족으로 채웠으나 커다란 나무기둥을 착착 오르는 발소리가 들리기 전까지였다.

 

“대협은 높이까지도 잘 올라가네요!”

 

그리고 들리는 높은 목소리에 탈론은 미간을 찌푸리고 사납게 말했다.

 

“저리 가!”

 

그리고.

 

탈론은 또 후회했다.

 

자신이 뒤로 몸을 날렸을 때처럼 반짝 빛이 나는 새빨간 눈이.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라벨라 8

2019. 4. 28. 22:31 | Posted by 호랑이!!!

 

 

방에 도착하여 아라벨라의 천가방을 열면 반들거리는 비늘이 불빛에 드러난다.

 

한 번도 깬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벌써 며칠이나 되었는데 어째 이 비늘은 갈수록 반짝이고 상처도 쌩쌩하게 낫는다.

 

“...자고 있나아.”

 

마르틴, 너무 가까이 가면 위험-”

 

파드득.

 

꼬리가 떨리자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긴장한 두 쌍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꼬리를 보았다.

 

꼬리는 퍼득퍼득 움직이고, 또 가만히 있기도 하고, 또 파다닥 움직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 사이에서 빼꼼, 조그만 머리가 튀어나왔다.

 

?”

 

머리는 이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듯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등 뒤에 둔 채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만져볼래.”

 

안돼, 마르틴!”

 

그러나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팔 아래로 몸을 숙였다가 앞으로 뛰쳐나갔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팔을 잡으려고 했으나 겨우 손 끝만 스쳤다.

 

몸이 따뜻하네!라며 감탄하는 마르틴의 손 앞에 납작하고 길쭉한 뱀 같은 주둥이가 입을 벌렸다.

 

두 줄 촘촘하게 돋아난 이빨들은 하얗고 뾰족했고, 이 뱀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거기에 또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자 그 안에 길쭉한 송곳니가 드러났는데 동물 대백과를 읽은 아라벨라의 눈 앞에 송곳니는 독액을 먹잇감 안에 삽입할 때 쓴다는 문장이 스쳐지나갔다.

 

.”

 

급박하게 손을 뻗은 아라벨라의 눈 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당연히 마르틴의 손을 깨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뱀은 오히려 비늘 돋힌 뺨을 마르틴의 손등에 기댔다.

 

마르틴이 활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뱀의 턱 아래를 간질이자 뱀은 웃는 것처럼 주둥이를 짝 벌리더니 눈을 깜박였다.

 

이상하네, 뱀한테도 눈꺼풀이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다 아라벨라는 그 뱀이 날개를 퍼득이면서까지 마르틴의 몸에 찰싹 달라붙자 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튼 다행히도 저 뱀이 마르틴을 해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이후로 아라벨라는 마르틴과 함께 날고기를 뱀한테 먹여 보고 씻기기도 하고 (마르틴의 고집으로)핸드백 안에 쿠션과 솜, 천 조각 같은 것을 담아 뱀의 침대도 만들었다.

 

둥지가 생기는 것이 기쁜 뱀은 삐 삐 울다가 아라벨라의 침대에서 마르틴과 함께 놀다 지쳐 잠들었다.

 

처음에는 저 뱀 같은 것이 언제 돌변해서 마르틴을 물거나 감아서 죽일지 몰라 아라벨라는 뜬눈으로 둘을 지켜보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나흘이 지나는 동안 둘이 사이좋은 모습을 보았더니 이제는 둘만 놔두어도 될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방에서 잠들었고 아라벨라는 유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집사 프루던스는 밤중에 집안에서 움직일 때는 사람을 붙여서 다니라고 했었지만 이 시간에 사람을 깨우기에는 미안하다.

 

푹신한 슬리퍼가 발소리를 가라앉혀 주자 새삼스러운 신기함에 조심조심 발을 옮기니 발 소리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들리지 않는다.

 

아라벨라는 촛대를 들고 발을 위로 옮겼다.

 

이전에 집사와 마주쳐 쫓겨난 3.

 

지금이라면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

 

계단에서는 조금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고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3층으로 올라온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다만.

 

1, 2층과는 공기부터 달랐는데 더 차갑고, 더 공허한 느낌이 났다.

 

복도조차 다른 층보다 넓어서 아라벨라는 계단을 올라와서는 한 바퀴 빙글 돌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밟힌 티가 덜 나는 창백한 푸른빛의 카펫은 아라벨라의 발 아래 고개를 숙이고 벽에 걸린 그림은 아라벨라의 촛불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라벨라는 그림에 촛대를 가져갔다.

 

그림 안에서는 갑주를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제각기 호수나 숲을 배경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기법에 따라 묘사되었다.

 

3층 방은 문이 잠겨있지 않아서 하나씩 열어볼 수 있었다.

 

작은 방 하나는 커다란 책상과 커다란 의자가 있는 개인 서재였고, 벽을 따라 늘어선 책꽂이에는 책보다 종이나 얇은 천이 더 많다.

 

방 하나는 갑옷이나 무기,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것들이 전시처럼 늘어서 있다.

 

말 등에 얹는 것 치고는 납작하게 생긴 안장을 건드렸더니 보기보다 더 단단했다.

 

언제든 쓸 수 있게 손질해두는 것인지 가죽끈을 꼬아 만드는 줄도 몇 개나 옆에 놓여 있고 둥근 링 같은 것도 있는데 아라벨라는 말이나 소 같은, 흔한 짐승의 것이 아닌 다른 냄새를 맡고는 가죽끈을 들어올렸다가, 바깥에서 갑자기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나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 했다.

 

끈을 내려놓고, 아라벨라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소리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서 들려왔다.

 

후 불어 촛불을 끄고 살금살금 다가가니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붉은 머리에 노란 눈의 젊은 집사가 무릎을 꿇고 무어라고 말한다.

 

바실리, 바실리... 제발, 바실리. 빨리... 왜 산에 가서-”

 

바실리라면 할머니 이름인데.

 

아라벨라는 문에 가까이 다가왔다.

 

차갑고, 빤히 쳐다보고, 조용하고, 뻔뻔한 구석도 있는, 파충류 같은 그 집사가.

 

울고 있다.

 

우는 남자를 구경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돌아서려다 아라벨라는 다음 들리는 말에 몸을 홱 틀었다.

 

에멜라도 죽고...”

 

어머니가 왜?

 

비록 아라벨라의 집에서는 셰필라가 고른 사람이 집사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프루던스의 집은 대대로 렐리악 가문의 집사라고 했다.

 

삼류 로맨스 같은 소리지만, 후계자의 약혼녀인 어머니와 본 적 있다고 해도.

 

그래서 셰필라가 프루던스 대신 새 집사를 데려왔다고 해도.

 

할머니는 왜?

 

조용히 뒷걸음질 치다 아라벨라의 슬리퍼 한 쪽이 벗겨졌다.

 

동시에 프루던스의 고개가 문 쪽으로 확 틀어졌고 놀랄만한 속도로 문에 다가섰다.

 

프루던스의 눈에 도는 기묘한 빛이며,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쳐다보았기에 아라벨라는 숨이 막혔다.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겁니까.”

 

“...프루던스.”

 

밤에 집 안을 돌아다닐 때에는 고용인과 함께해 달라고 말을 했었습니다.”

 

문을 금방이라도 닫아 버리려는 낌새에 아라벨라가 문을 잡았다.

 

할머님은 이 집에 계시지 않는 거야?”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거칠게 손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문이 쾅 닫혔다.

 

아라벨라는 닫힌 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가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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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7

2019. 4. 15. 23:52 | Posted by 호랑이!!!

 

우아하게 넓은 챙에 초록색 이국의 새에게서 얻은 길고 넓은 깃털을 꽂고 진한 녹색 리본이며 레이스, 프릴을 달아 화려한 그 모자는 진짜 꽃까지 얹은 것도 모자라 옆과 뒤에 커다란 꽃다발을 수놓은 주름천을 층층히 달았는데.

 

둘둘 말아 천으로 된 몽둥이마냥 들었더니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레이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아라벨라는 손을 들어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을 못하는 그 자작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악!”

 

비욘 자작은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두 대.

 

, , 다섯, 여섯 번 휘두를 때마다 모자에 달아둔 꽃이 조각나 하늘에 흩어졌다.

 

주름을 잡아 단 천은 뜯어져 펄럭이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구슬은 끈이 끊어지고 달아두었던 깃털은 주인을 찾아가겠다는 듯 떠올랐다가 불어온 미풍에 힘없이 날려갔다.

 

모자가 작살이 난 것에 비하면 비욘 자작은 타격이 없어 보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눈 한 쪽에 멍이라도 들었다면 좀 좋으련만 머리나 좀 흐트러지고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것이 전부.

 

정신계 공격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라벨라는 우그러진 모자를 우아하게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가기 꺼려진다는 말을 그렇게나 알아듣지 못하시다니 저야말로 곤란합니다."

 

"......."

 

비욘 자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나에게 창피를 주다니!"

 

"제정신입니까? 지금까지 싫다고 한 건 뭐라고 알아듣고?"

 

그러다 비욘 자작은 하,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런다고 당신이 가시 달린 장미처럼 보일 것 같습니까?"

 

"꽃 같은 건 되었습니다."

 

아라벨라는 궁금했다며 말을 꺼냈다.

 

"얼굴도 그냥 그렇고, 고매한 정신 같은 것도 없고, 당신과 하는 대화가 재미있지도 않고, 방금의 행동으로 어떤 사람인지 바닥도 본 것 같은데.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꽃으로 보이고 싶겠습니까?"

 

"아니, 그럼 여자 취급 말고 사람 취급을 해 달라는 말입니까?"

 

그 말에는 어이가 없어진다.

 

"왜 당신은 여자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까?"

 

"레이디 퍼스트니 하면서 남자가 문 열어 주는 건 그렇게나 좋아할 거면서...!"

 

지금까지 아라벨라를 빤히 보던 집사 프루던스가 비욘 자작과 아라벨라 사이에 섰다.

 

"흥분하셨습니다."

 

"비켜!"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까지 하자 아라벨라의 교육을 맡은 부인들은 아라벨라를 자신들의 가장 뒤로 밀고 눈을 가려 주었다.

 

프루던스는 어떻게든 그 자작을 조용히 시켜서 데리고 나갔고, 다른 고용인들이 다가와 어질러진 티 테이블을 치우고 새 차와 과자를 꺼냈다.

 

"레이디 아라벨라는..."

 

부인이 입을 열자 아라벨라는 마음이 찔려 레몬을 띄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통찰력이 있군요."

 

"거절을 했다손 쳐도 저렇게 거친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예요."

 

아라벨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자세를 교정해주는 부인은 부채를 접어 아라벨라의 고개를 살짝 내려주었다.

 

잠시 눈치를 보다 아라벨라가 입을 열었다.

 

모자를 망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먼저 말렸어야 했는데.”

 

사과를 건네는 모습에 평소라면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라고 했을 부인도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마르틴은 아라벨라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아라벨라가 내려다보자 마르틴은 시무룩하기가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못해서 미안해, 누나.”

 

네가 뭐가 미안해.”

 

아라벨라는 깜짝 놀랐다.

 

백작님이 나보고 누나를 잘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잠깐 마음속으로만 말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거 신경쓰지 마. 내가 너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아! 지켜도 내가 지켜줘야지.”

 

그러나 마르틴은 그 말을 듣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리더니 싫다는 말을 더듬더듬 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라벨라는 귀여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부인들에게 잠시 실례하겠다며 마르틴을 안아들고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비욘 자작은 더 이상 이 저택에 오지 못할 겁니다.”

 

집사 프루던스는 아라벨라와 마르틴의 접시에 잘 구운 사슴고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넓은 테이블에 아라벨라와 마르틴 뿐인데도 접시 위에는 꽤 많은 고기가 있었다.

 

그리고 아라벨라 아가씨의 예의범절과 자세를 가르쳐주시던 남작 부인께서도 앞으로는 오지 않으실 겁니다.”

 

이 말에 아라벨라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어 접시 위의 고깃덩어리를 나이프로 푹 찔렀다.

 

, 두 분께 마을의 의상실에서 주문한 슬리퍼가 도착하였습니다.”

 

프루던스의 말에 고용인이 황금색 리본으로 묶은 납작한 상자를 두 개 가져다주었고 아라벨라는 끈 한 쪽을 잡아당겨 상자를 열었다.

 

눈이 퉁퉁 부은 마르틴에게도 상자가 두어 개 배달되었다.

 

마르틴 도련님의 승마 교사를 어서 구하겠습니다.”

 

마르틴이 내켜하지 않는 표정으로 눈만 굴려서 집사를 쳐다보았고 붉은 머리의 집사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둘의 접시에 푹 쪄서 소스를 얹은 채소들을 덜었다.

 

왜 그래, 마르틴?”

 

어어? 아니, 아아니.... 아무것도....”

 

아가씨께도 새 선생님을 구해드려야겠군요. 당분간은 일정이 없으니 편히 쉬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말 타도 되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에 마르틴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집사를 불렀다.

 

저어기, 할머니는... 한 번도 못 뵈었는데요.... 저기, 그러니까...”

 

주인님께서는 바쁘십니다.”

 

프루던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마르틴의 접시에 고기를 두 조각 더 올렸다.

 

도련님께서는 조금 더 영양을 섭취하셔야겠습니다.”

 

시무룩하게 마르틴은 칼로 고기를 잘랐다.

 

이제는 귀족이 된 지 며칠이나 되었는데도 사람을 부르거나 부리는 일에는 영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자세만은 손댈 데 없었으니, 저건 사피야의 작품이겠지.

 

사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은 마르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르틴. 이따 내 방에 잠깐 와.”

 

어브...”

 

마르틴은 뭔가 말하려다가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도련님, 입에 음식을 물고 말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미안해요...”

 

프루던스는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마르틴의 접시에 고기를 세지도 않고 덥썩덥썩 집어 올렸다.

 

저에게 사과하시면 아니됩니다. 저는 한낱 집사이고 도련님께서는 백작 집안의 분이십니다. 도련님께서도 사람을 부리는 일에 익숙해지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렐리악 가의 이름이... 겨우 이런 걸로는 더럽혀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른 못된 사람들이 도련님을 우습게 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집사 인상이 나빠서 그래.”

 

제가요?”

 

프루던스는 아라벨라 쪽을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낯뜨겁습니다만, 이래봬도 목재도령 대회의 3연 우승을 할 만큼은-”

 

목재도령은 또 뭔데?”

 

이 근처의 특산품은 튼튼한 목재라 홍보차 미남미녀 대회를 여는데 미남은 도령, 미녀는 아가씨라고 합니다.”

 

그런 소릴 자기 입으로 하고 있지만 별로 부끄러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잘생긴 건 별개로 인상이 나빠.”

 

삐쭉 올라간 노란 눈이며 굳이 웃지 않으면 아래로 처진 채인 입꼬리는 일주일 내내 웃지도 않았다.

 

웃어 봐.”

 

그러자 방긋 웃기는 하지만 올라간 눈꼬리는 별로 완화되지 않는다.

 

별로네.”

 

, 지만 미남인걸...”

 

미남이랑은 별개로 인상이 사나워. 너도 덜덜 떨고 있잖아.”

 

아안, 떨었어! 아니거든!”

 

바실리스크인지 뭔지 모를 물건이 든 가방은 잘도 옮겼으면서.

 

마르틴은 비쭉 입을 내밀었다.

 

요리사가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디저트까지 먹고 난 후에 아라벨라와 마르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가 자리를 치우는 모습을 힐끗 보고 마르틴은 조심스럽게 아라벨라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그렇게 신경쓰여?”

 

쪼오끔...”

 

왜일까? 마르틴이 평민으로 자라서? 하지만 셰필라 렐리악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던데.

 

게다가 무섭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자꾸만 집사가 있는 쪽을 힐끗힐끗 본다.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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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6

2019. 4. 12. 11:22 | Posted by 호랑이!!!

 

몸을 씻겨 주겠다고 하면 곤란하므로, 아라벨라는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거기에 카트까지 세워두었다.

 

박을 말려 칠을 한 그릇에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어 미지근해지자 핸드백을 열었다.

 

닫아두었던 곳에서 피 냄새가 물씬 풍겼고 조심스럽게 비늘 달린 몸체를 들어 그릇에 담그자 까맣던 몸에서 조금씩 마른 피가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담가 두고 기다렸더니 비늘 사이에 엉긴 피나 이파리 같은 것들이 조금씩 불어서 당기거나 손톱으로 살짝 긁는 것만으로도 씻긴다.

 

바실리스크가 아닌 것 같은데...?”

 

바실리스크의 특징인 깃털이 없고, 날개의 모양이나 크기도 책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흔한 동물인 뱀이나 박쥐도 아닌 것 같으니.

 

잘 씻겨놓고 수건으로 감싸놓자 다시 몸을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깨지는 않는다.

 

아라벨라는 뱀을 돌돌 말아 다시 핸드백에 담아두고 자신도 씻기로 했다.

 

보송보송하고 따끈해져서 욕실에서 나오자 맨발에 따뜻하게 카펫이 느껴졌다.

 

그나마 마차 안에 있을 때는 힐도 벗어두었는데 발바닥으로 카펫을 밟고 마룻바닥을 느끼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으로 느껴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침대 옆에 무언가가 비친다.

 

노란색 천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조그만 슬리퍼였다.

 

작은 등불로도 그 슬리퍼가 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아라벨라는 슬리퍼를 신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무어라고 하는 대신 핸드백을 침대 위에 올리고 자신도 그 옆에 올라가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아라벨라의 일과는 눈에 띄게 바빠졌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으로 과일이나 좀 집어먹고 나면 외출복에 가까운 실내복으로 갈아입혀졌고 초청한 가정교사에게 역사나 음악이나 작문에 자수 같은 것을 쉴 새 없이 교육받은 다음에는 자세를 교정하는 기괴한 철통을 몸에 감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서 있거나 지시하는 움직임을 해야 했다.

 

썩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던가, 이미 배운 내용을 또 배워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래도 항상 해 왔던 일이니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지만.

 

언제고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는 붉은 머리의 집사가 서 있었다.

 

게다가 할머님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언제 한 번은 3층으로 몰래 올라갔지만 집사에게 들켜 2층으로 쫓겨났다.

 

프루덴스.”

 

아라벨라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빨간 머리의 젊은 남자는 아라벨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3층의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할머니께서는. 마르틴은 만나셨나?”

 

아닙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는 지금 그저 일이 있으셔서 짬을 내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아라벨라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지 내의 승마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는 사실에 지나친 자부심을 느끼는 어느 남작이 마르틴에게 마구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우리 수업도 할머니께서 짜신 건가?”

 

선생님을 초청한 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

 

수업이 시작하고 거의 매일, 둘은 바빴고, 수업시간 사이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언젠가는 아라벨라가 마르틴의 방을 찾아갔더니 한참 이른 시간인데도 지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천사처럼 자고 있었지.

 

사피야는 아름다운 사람이고 마르틴은 그 어머니의 유전자를 아낌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귀여운 동생이 누나누나 하면서 오니까, 새삼 자신이 연장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러니까 연장자로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잘 크게 할 책임감도 느끼게 되었는데 말이다.

 

챙겨주고 조언해주고 도와주기 위해서는 일단 만날 시간이 나야 할 거 아닌가.

 

식사시간 외에 티타임이 있기는 했지만 티타임이 쉬는 시간이 아니라 수업의 일환으로서 진행되는 것이 문제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

 

얹힐 것 같은 기분으로 꽃을 넣은 차를 마시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는 남자들이 우르르 보였다.

 

저건 일단 마르틴이고, 시중 들어주는 고용인이 두어 명 있고, 옆에서 외국어로 된 시를 읽어주는 교사가 한 명, 그리고 옆에 있는 건 승마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그 사람은 차를 마시려다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으악 눈 마주쳤어.

 

왜 저렇게 웃는거지?

 

기분 나빠라.

 

어머나 비욘 자작에게 관심이 있나요?”

 

아니오.”

 

왜 이 상황을 보고 제가 관심이 있다고 받아들이시는지 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웃은 건 제가 아니라 저 준우승남이고 제 무표정과 저 기분 나쁜 웃음 사이에서 뭘 보시고 관심이라는 많은 의미를 포함한 단어를 떠올리셨는지.

 

라는 말을 간신히 목 뒤로 쑤셔넣으며 아라벨라가 뻣뻣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단지 마르틴이 적응을 잘 하고 있는지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나쁜 일이 아니랍니다. 비욘 자작은 젊은 나이에 벌써 자작위를 손에 넣었고 바이언드 백작의 조카이니 백작이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요.”

 

그러면서 이어지는 호기심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아라벨라는 머리를 감싸쥐고 싶어졌다.

 

이 사람, 이미 내가 저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전제로 말하고 있구나.

 

아라벨라가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 없다는 것을 말하자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자수 교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싱숭생숭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이 뭔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다 사랑이 된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적에 시집을 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해댔다.

 

교사만 아니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 아까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쳤던 비욘 자작이라는 사람이 여성들 테이블로 다가왔다.

 

자기들끼리 쑥덕이더니, 남성 테이블의 사람들이 이 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본다.

 

무슨 내기에 넘어가는지 넘어가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은 불쾌함에 아라벨라는 찻잔을 꽉 쥐었다.

 

평소라면 레이디의 교양과 몸가짐에 대해 가르치는 교사가 한 마디쯤 할 법했으나 그 사람도 아라벨라가 남자 앞이라 긴장한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레이디 아라벨라, 마르틴 도련님과 산책을 하려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또 왜 이러는지.

 

아라벨라는 당신이 빠져 준다면 기꺼이 가겠다고 말할 뻔했으나 일말의 선량한 마음이 입을 다물게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다음에 수업이 있습니다.”

 

아무리 같은 귀족이라고는 하나 저 사람은 한낱 자작이고 아라벨라는 백작의 딸이다.

 

마르틴만 아니라면 다음 백작위는 아라벨라의 것이었고 지금도 백작의 후계자이니 준백작이나 다름없는데도 다가오다니.

 

이 사람은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한 사람이라고 아라벨라가 생각했다.

 

"날씨가 더워서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양산을 들어 드리지요. 정원 안쪽으로 산책을 해 보셨습니까? 어제 걸어 보았는데 잘 꾸며진 연못이 있더군요."

 

이 집은 제 할머니 댁인데 산속에서 연못을 발견했다~ 투로 이야기해봤자...

 

"이 이후에 수업이 있기에 곤란합니다."

 

"잠깐이라면 봐 주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그 사람은 기어이 모자와 양산을 가져오라 이르더니 남작 부인이 내민 모자를 들어다 아라벨라의 머리 위에 푹 눌러 씌웠다.

 

마르틴은 무슨 일인지 몰라하다가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여기서 아라벨라나 마르틴을 도와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자를 쓰셨고 이제 양산을 가져오니 이제 가로막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자꾸 내빼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아라벨라는 머리에 쓴 모자를 고쳐 쓰다가 그 말에 벗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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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5

2019. 4. 1. 22:48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아가씨! 도련님!”

 

스파크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외국의 단장 아래에서 스파크라고 불리면서 구르기가 벌써 몇 년,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수행하는 일이 생겼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도적떼가 아니라 나뭇가지더라도 아가씨 몸에 생채기라도 내면 용서할 수 없다!

 

스파크.”

 

꺾인 나무는 마차 천장을 뚫고 바닥까지 잔가지가 흩어져 있었다.

 

스파크의 눈은 아라벨라에게로 곧장 향했다가 아라벨라의 품에 안긴 마르틴에게로 이동했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마차 안에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난 괜찮아. 마르틴은?”

 

저도 괜찮아요.”

 

마르틴은 아라벨라가 끌어안은 팔을 두어 번 두드려 벗어날 수 있었다.

 

저 나무 더미를 치워야 하니 잠시 멈추어야겠습니다.”

 

렐리악 전 백작의 집사가 다가오더니 아라벨라의 허락을 기다렸다.

 

이미 시간이 늦었고 때마침 저택도 근처이니 큰 나무만 빼고 나머지는 내일 하도록.”

 

가시는 동안 불편할 수 있으니 조금 지체되더라도 여기서 치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라벨라는 바닥에 늘어진 치마를 움켜쥐고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편하고자 다른 사람들을 더 고생시킬 수는 없지.”

 

그렇습니까.”

 

집사는 스파크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이더니 실례한다며 나무를 당겼다.

 

스파크와 집사 두 사람만으로 나무는 뽑혀 나왔고 구멍이 뚫린 자리로 희미하게 별이 뜨는 하늘이 보인다.

 

이제는 걸음을 서두르겠다며 집사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아라벨라는 나무 잔해를 덮은 치마를 확 걷어 올렸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숨을 내쉬는 가느다란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두운 달빛 아래 뱀같은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형상이었으나 내쉬는 숨이 뜨거웠다.

 

어둡네. 마나 등은 고장났고, 안 보이는데...”

 

나 그거 있어.”

 

마르틴은 가지고 탄 가방을 뒤적였다.

 

얼마간 뒤지다가 손에 잡혔는지 작게 위잉 소리가 나며 희미한 푸른 빛 불이 켜졌다.

 

푸른색 빛 아래에서 꺼멓게 보이는 끈적끈적한 것은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뱀처럼 생긴 그것은 눈을 감은 채라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마르틴, 가방에 자리 있어?”

 

.”

 

아라벨라는 자신이 가지고 탄 핸드백을 열어 뒤집었다.

 

구취제와 물감과 거울을 마르틴의 가방에 쑤셔 넣자 마르틴은 손수건도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지만 아라벨라는 손을 저었다.

 

상처가 있어? 거기에 감을 거야?”

 

아니. ...불 잘 들고 있어.”

 

마르틴이 손을 높이 들었다.

 

아라벨라의 어머니, 에멜라가 살아 있을 때 아라벨라는 자주 사냥에 참가할 수 있었다.

 

사냥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동물을 길들이는 것은 좋아했었지.

 

뱀은 아닌 것 같았고, 오히려 처치 곤란한 마물에 가까워 보이지만....

 

마르틴은 뱀 같은 것의 등에 붙어있는 날개를 슬쩍 건드렸다.

 

이거 무슨 바실리스크나 그런 걸까?”

 

마르틴이 소곤거리고는 아라벨라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릴 수 있게 도와주었는데, 한참이나 안절부절 못하다가 마차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리자 재빠르게 아라벨라에게 속삭였다.

 

내가 들어도 돼? 누나? 아라벨라 누나? 쪼끔만 가방 열어주면 안돼? 꼬리나 날개 만져볼래.”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상태를 보고.”

 

그럼 내가 가지고 갈래, ? ? 안 흔들고 얌전히 가져다줄게.”

 

너 이거 진짜 바실리스크면 위험하다는 거 알지?”

 

하지만 가방 안에 있으니까 괜찮잖아. 그치?”

 

바실리스크에게 제일 위험한 건 눈이긴 한데, 그래도 이빨이...

 

하고 망설이던 아라벨라는 스파크가 문을 열어주자 가방을 마르틴에게 넘겨주었다.

 

손잡이만 잡고, 흔들지 말고.”

 

걱정 마.”

 

소곤소곤 이야기하자 스파크가 무슨 일이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아라벨라는 시침을 뚝 떼고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장갑은 남성용인지 스파크에게는 조금 커서 장갑이 내려가자 스파크는 손을 더 올려 아라벨라에게 맞춰주었다.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지만 정원의 가로등과 저택 안의 불빛은 아주 환해서 걸음을 옮기거나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까맣게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선 저택은 렐리악 백작들이 후계자에게 백작위를 물려주고 조용히 은퇴하여 사는 곳이라고 들었건만, 이 저택은 은퇴한 귀족 부부가 살기에는 지나치게 커 보였다.

 

심지어는 도시나 왕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마력 등불도 있었는데 온 마당을 낮처럼 환하게 밝혀주어서 마당에 뭐가 있는지, 발에 뭐가 밟히는지 까지도 보인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두 분은 이만 쉬십시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풀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저택에 당도하자 문이 끼익 열린다.

 

색색의 돌을 다듬어서 무늬를 낸 호화로운 바닥은 장미 같은 진분홍이 메인 컬러이고, 무거운 빛의 녹색 벽에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거나 화병 받침대 같은 것들이 쭉 늘어서서 작은 조각품, 화분, 뚜껑이 덮인 과일 그릇이 장식되었다.

 

몇 명의 고용인들은 아라벨라의 짐을 내린다 마르틴의 물건을 옮긴다며 분주했고 마르틴은 그 모습에 자신도 도와야 하는 것인지 머뭇거렸지만 아라벨라가 손을 잡아주자 집사를 따라갔다.

 

두 분께서 머무르실 방은 2층에 있습니다. 3층은 주인님께서 조용히 있고 싶으시다고 하셨으니 당분간은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집사는 창문 하나 없는 긴 복도를 따라 그들을 데려갔다.

 

가장 끝이 아라벨라의 방.

 

그 옆은 청소 용구를 넣어두는 작은 방이고 그 다음이 마르틴이 받은 방.

 

방음 하나는 잘 되겠군, 이라고 생각하며 걷다 아라벨라는 발을 삐끗했다.

 

익숙해지지 못한 하이힐이 투두둑 뭔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카펫을 긁었고 스파크가 급히 아라벨라의 허리를 받쳐 주었다.

 

가죽 장갑 너머의 든든한 팔을 힘을 주어 잡고 몸을 일으키자 붉은 머리의 이 집사는 방 문을 열었다.

 

이 집에서는 실내에서 슬리퍼나 실내화를 신습니다. 짐에 굽 있는 구두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슬리퍼나 실내화를 신지 않으신다면...”

 

아니, 신어! 그냥 짐 쌀 때 힐을 빼놓고 와서 그래.”

 

슬리퍼를 신게 해준다고? 아버지의 연락을 받지 못 했나?

 

다시는 슬리퍼를 신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신게 되다니 아라벨라의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커졌다가 숙녀답지 못한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작아졌다.

 

집사의 노란 눈이 아라벨라를 향했다가 다시 방 안으로 향했다.

 

욕실은 방마다 딸려 있습니다. 목욕물을 받아두었으니 두 분이 먼저 여독을 푸시면 그 사이에 시종들이 방에 두 분의 물건을 놓아드릴 겁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침대 곁의 종을 울려 주십시오.”

 

마르틴은 집사와 스파크의 눈치를 살피다가 살금살금 다가와 아라벨라의 손에 핸드백 손잡이를 쥐어 주었다.

 

아라벨라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꿈틀거리는 핸드백을 꼭 쥐고 방 안으로 서둘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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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4

2019. 3. 16. 01:34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아가씨.”

 

아라벨라는 높이가 한 뼘이나 되는 힐 위에 서서 인상을 찡그렸다.

 

시녀들이 급하게 마르틴의 짐을 쌌지만 작은 가방 하나는 꼭 자기가 들겠다고 우겨 아주 작은 가방을 손에 쥔 모습에 겨우 인상이 펴질 뻔 했지만 집사가 내민 보석 박힌 손가방에 다시 우그러졌다.

 

뭐야. 됐어.”

 

숙녀라면 마땅히 드셔야 합니다.”

 

됐어, 저기 짐마차에 같이 넣어둬.”

 

이것은 들고 가셔야 합니다. 안에 꼭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그 말에 아라벨라는 가방을 받았다.

 

씹기만 하면 입안 청소를 해준다는 무슨 구취제가 한 병 들어 있고 가장자리에 레이스 장식과 자수가 놓인 하얀 손수건이 있고, 입술 위에 덧바를 수 있는 분홍색 물감이랑 은칠한 장미 장식 거울이 또 하나.

 

“...이게 무슨 꼭 필요한 물건인데?”

 

무릇 숙녀라면 부끄러운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 때를 대비해서 드리는 물건입니다.”

 

양파나 마늘을 먹고 나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입술 위에 칠한 물감이 옅어질 때가 있다고 말을 시작한 집사는 이후로 아가씨가 사용하는 손수건에 관한 이야기와 사용법을 서른 가지나 말하려고 했다.

 

날 십 년이 넘게 보았으면 알 텐데, 그거 안 쓸 거라는 걸.”

 

아가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실 겁니다. 우아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가씨의 의무이며, 물감을 칠하고 손수건을 건네는 것은 아가씨의 권리라는 것을요.”

 

짜증나.”

 

숙녀는 그런 언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마차에 타라며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이 손을 내밀었다.

 

짜증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으로 쳐다보다가, 아라벨라는 그 손을 잡는 대신 치렁치렁한 드레스 밑단을 쥐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바깥에서는 셰필라 백작의 말이 들렸다.

 

아직 성년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차할 때는 네가 누나를 지켜 줘야 한다. 알겠지? 네가 누나 보호자가 되는 거야.”

 

풀 사박이는 소리가 나더니 사피야가 가벼운 남색 드레스에 은회색 천을 어깨에 두르고 나타났다.

 

은장식이 달린 신발이 이슬이 맺힌 풀 위를 밟자 향긋한 향기가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준비는 다 되었니?”

 

아라벨라는 코 끝을 찡그렸다.

 

마르틴이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나고 마차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잘 다녀오렴, 아라벨라.”

 

다녀올게요 엄마!”

 

마르틴이 고개를 반짝 내밀었다.

 

난생 처음으로 아들과 떨어지는 사피야 렐리악은 의연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그 뺨을 쓸어 주었다.

 

누나 말 잘 듣고,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잘 다녀오렴.”

 

!”

 

마차는 최소한의 사람에게서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다.

 

사람들이 밟아 단단해진 길 위에서 마차는 부드럽게 달그락거렸지만 쿠션을 잔뜩 댄 마차 안은 약간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창틀에 턱을 괴고 바깥을 내다보자 대장장이 일을 하는 크룰탄과 눈이 마주쳐 웃는 낯으로 손은 흔들었지만, 아라벨라의 머릿속은 할머니에 대한 일로 가득차 있었다.

 

아라벨라는 할머니를 네 살 때 딱 한 번 만났다.

 

할머니는 녹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카락을 빈틈없이 틀어 올려서 얇고 번들거리는 하얀 가죽 같은 것으로 고정했고, 시선을 받은 사람이 움찔할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 비치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으로 아라벨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홱 돌아서서 새까만 말 위로 날아올랐지.

 

그 장면만큼은 아직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 장면을 떠올렸더니 왠지 몸이 근질거려서 창밖으로 몸을 빼었다.

 

아가씨, 위험합니다.”

 

얼룩무늬 말을 탄 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젠장.”

 

저는 스파크입니다.”

 

푸른 망토를 두른 그 사람은 아라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깥으로 몸을 내밀면 위험하니 부디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데일라도 혹시 여기 있어?”

 

데일라라는 이름의 사람은 없습니다.”

 

말이야 말, 하얀색이고 갈기는 짧아. 마구를 구름 무늬로 장식했어.”

 

아라벨라는 스파크가 내민 손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스파크는 잠시 앞뒤로 다녀오더니 데일라가 앞에서 마차를 끌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고 아라벨라는 다시금 말을 타고 싶어져서 끙끙거렸다.

 

할머니가 살고 있다는 곳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로, 왕국과 왕국을 나누는 거대한 산맥의 끝에 자리하는데 거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도 닷새나 걸렸고 그나마도 아가씨를 노숙하게 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에 며칠은 밤을 새서 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이 아라벨라를 잠시 밖에 나오게 해줄 리가 만무했고, 마을에 도착하더라도 구경할 시간 역시 주지 않았다.

 

한 번은 창문으로 몰래 나갈까 했지만 금세 스파크에게 들켰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이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아라벨라는 엿새째의 저녁에 마차 안에 쿠션을 깔고 그 위를 구르는 것으로 힘을 발산했다.

 

마르틴 도련님, 아라벨라 아가씨.”

 

노크 소리가 났다.

 

이번 여행에서 총 책임을 맡은 기사와 렐리악 가문의 상징인 용 문양이 새겨진 장식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희는 스파크만 남겨두고 렐리악 전 백작님의 집사에게 이 마차를 인계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아래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기사는 마르틴에게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다른 병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오시느라 피곤하시지요. 목욕물을 준비하도록 일렀습니다. 목욕으로 피로를 푸시는 동안 식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둑한 해에 역광으로 새까만 잎사귀를 바람이 흔들었다.

 

길을 따라 마차를 몰면 마을은 점점 더 작아지고 멀어졌고 장난치다 지쳐 잠든 마르틴의 발이 마차의 움직임을 따라 달랑거렸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서는 낯선 냄새가 났고 벌써 이틀이나 신은 힐은 걷지도 않았는데 발을 아프게 했다.

 

지나치게 평화롭고 불안한 마음으로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는데 위쪽에서 소리가 났다.

 

나뭇잎과 가지가 요란하게 부딪히고 꺾이면서 나는 소리가.

 

마차 천장을 쳐다보는데 불쑥 무언가가 나무 천장을 뚫었다.

 

나무가 거꾸로 자라나듯 천장에서 솟아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도련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마르틴 도련님!”

 

아라벨라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지는 해에 안이 더 똑똑히 보였다.

 

부러지고 꺾어진 나무.

 

진액을 뚝뚝 흘리고 풋내가 진동하는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피 냄새 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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