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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X빅터] 고양이 -05

2015. 10. 11. 01:28 | Posted by 호랑이!!!

 

잘 교육받은 귀족집 도련님 답게, 이글은 깨끗한 발음으로 둘을 구분했다.

 

빅터, 그리고 빅토르.

 

빅터도 몇 번쯤 그 발음을 흉내내 보았지만 이글이 만드는 그 낮게 울리는 음은 나오지 않았다.

 

빅터가 빅토르라고 말하는 것은 꼭 빅톨처럼 들렸는데, 어쨌거나 그래도 이글은 알아들었고 잘 한다며 가끔은 빅터의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아직도 계절은 겨울 한가운데라 빅터는 벽난로 앞 안락의자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바닥에 앉아 멍하니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이글이 자신을 빅토르라고 하는 상상을 하며.

 

빅터의 상상 속에서 이글은 빅터를 보고 빅토르라고 불렀고, 끝의 발음을 길게 늘어뜨렸다.

 

회색 줄무늬가 있는 하얀 고양이 대신, 이글은 굳은살이 박힌 묵은 흉터투성이 손으로 웅크린 빅터를 몇 번이고 머리부터 등허리까지 쓰다듬었다.

 

그 때 이글의 표정은-

 

.”

 

퍼뜩, 빅터는 정신이 들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벽난로 앞에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으면 어떡해? , 열 올라서 얼굴이 빨갛잖아.”

 

이글의 손이 빅터의 뺨을 잡았다.

 

정말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자고 가. 이 날씨에 밖을 돌아다니면 더 심해지니까.”

 

그 말에 빅터는 벌떡 일어났다.

 

빅토르가 무릎에서 굴러 떨어져 약하게 항의하는 소리를 냈다.

 

몇 시지?

 

벌써 열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간다.”

 

?”

 

이글은 못마땅함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내 침대 넓어, 베개도 이불도 있고 옷도 좀 크지만 여분이 있고.”

 

아니, .”

 

공장 직원, 더부살이, 야간학교.

 

빅터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학교 가.”

 

상대는 개인 교사를 붙여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저보다 얼마 나이가 많지 않은데 어른이고 집도 있는데다 가족들도 더할 나위없이 상류층인 사람이다.

 

잊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에게 말하려니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아직까지 제 발을 공격하는 새끼 고양이를 번쩍 들어다 의자 위에 내려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마 학교가 끝나면 한밤중일 테고 딱딱한 침대에 누워서 얇은 이불로 몸을 말고 웅크리면 따뜻한 난롯불 생각이 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글이 빅토르하고 부를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그래도.

 

그래도 차가운 침대 쪽이 낫지 않겠냐고.




[커플x] 불면증

2015. 9. 21. 23:33 | Posted by 호랑이!!!

잔이 깨졌다.

 

꾸벅꾸벅 졸던 마틴은 그 소리에 잠을 깨었다.

 

흰색 머그컵은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마틴의 손가락에 걸려있던 것이다.

 

미안해요 릭, 잔을 깼네요.”

 

다치진 않았소?”

 

괜찮아요.”

 

괜찮긴, 차가 뜨거운데.

 

릭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틴의 손을 잡았다.

 

잠이 모자라오?”

 

그런 건 아니고, 요즘 잠들기가 힘들어서.”

 

마틴은 말을 하며 길게 하품했다.

 

얼핏 그의 눈 아래에 그늘이 진 것 같았다.

 

“...그래서 며칠 밤을 샜더니... 흐아암.”

 

며칠이나?”

 

어디보자...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쫙 펴졌던 마틴의 손가락이 하나 둘 굽혀진다.

 

셋 넷으로 넘어가자 릭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못 자는 동안 뭐 했소?”

 

책도 읽고... 밤새서 일도 해 보고요... , 여자랑 잤어요. 섹스가 불면증에 좋다길래.”

 

문득 릭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간 것 같았지만 마틴이 돌아봤을 때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랑플람에서 쉬고 오라고 한 거군.”

 

그렇죠. 덧붙이자면 그 티엔 정이 저를 손수 문 밖으로 밀어냈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싫네요.

 

마틴이 찻물 묻은 손가락을 손수건에 닦으며 투덜거렸다.

 

그래서 나한테 왔고.”

 

이 근처에서 바로 찾아가도 될 만한 사람이 릭밖에 없었거든요. 사실 반신반의 했어요, 일하는 시간이라던가 여행 중이면 어쩌지 하고.”

 

있어서 다행이오.”

 

마틴은 식탁 위에 멋없이 놓인 컵을 정리했다.

 

릭은 마틴이 입을만한 편한 티셔츠와 바지를 찾아 주고 여분의 베개를 찾아두었다.

 

그럼 자러 가볼까.”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자려구요?”

 

나는 원래 이 시간에 자.”

 

한 침대에서?”

 

혹시 모르지, 사람의 온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있을지.”

 

불을 끄고, 릭이 먼저 누웠다.

 

마틴은 불신하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릭의 옆에 누워서 익숙하지 않은 베개 아래에 한쪽 손을 넣어 잘 준비를 했다.

 

안아줄까? 뜨끈뜨끈할텐데.”

 

됐어요, 답답하니까.”

 

마틴은 픽 웃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못 자면 어떡하지.

 

피곤하고,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는다니 머리도 어지럽고 아프고 힘든데.

 

걱정스러운 마음은 불안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 다른 잡생각으로 이어진다.

 

마틴은 몇 번 뒤척이다 마침내 눈을 떴다.

 

자고 가라며 신경써준 릭한테는 미안하지만 저쪽에서 작은 전등이라도 켜고 책이라도 읽어야겠어.

 

그렇게 눈을 뜨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릭을 찾았다.

 

자면서도 웃고 있네, 평화로운 표정으로.

 

, 저 표정은 쿼카 닮았다.

 

잠꼬대도 없고, 고른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와서.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커피와 과자 향내가 밴 손끝의 향과 그의 체취가 갑자기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마틴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P.S : 릭 컵은 머그컵인데 차가 있는 이유는 미국인이라 찻잔은 없지만 마틴이 차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덧붙여 티테이블이 없어서 식탁에서 마신다)



[홈캠/파] 어린 파의 하루

2015. 9. 18. 20:01 | Posted by 호랑이!!!

어느 뱀 가는 아예 사시사철 따뜻한 대륙에서 산다고들 한다.

 

그러나 교사 가(蛟蛇 家)는 그 몸이 튼튼하고 강인한 것을 자랑으로 하였기에, 부러 혹독한 겨울이 존재하는 곳에 그대로 남았다.

 

구렁이라고는 하나 용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도 아니고, 본성이 음습하고 뒤틀린 자들이 다수였다.

 

그래서 교사 파, 아명 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

 

가문의 아이는 사촌이 아닌 형제로서 공동으로 길러진다.

 

실제로는 삼촌의 아이, 고모의 아이인 사촌으로서 인식하면서도 누이, 형제로 부르며 함께 숙식하고 한데 뒤엉켜 자란다.

 

악만은 예외로.

 

누이 무엇하오?”

 

현을 탄다.”

 

아이들 중 가장 윗사람인 영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에 새까만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비녀나 구슬끈으로 틀어올려 묶지만 겨울에 풀어내린 모습을 보면 그 머리는 찬란하게 흘러내리는 폭포수 같았다.

 

그 머리를 볼 때면 파는 하얗고 부슬거리는 제 짧은 머리를 만져보곤 했다.

 

고양이같은 눈으로 악기를 연주하다 그녀는 악이 들어오자 손을 멈추었다.

 

저도 악기를-”

 

그러다 손 다치면 안되잖니? 너는 우리보다 몸이 약하니까.”

 

저 말은 선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악은 영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양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다가 나갈까 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악아.”

 

영은 연주를 멈추고 악을 불렀다.

 

이것 먹으렴.”

 

손에 들린 것은 악이 싫어하는 향이 나는 사탕이다.

 

그것을 입에 넣으니 뻔히 그것을 싫어하는 줄 아는 영의 입매가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정원으로 나서면, 저 멀리 마당에서 형제들이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이 보인다.

 

형제라고는 하나 악보다 한두 자는 더 큰 사람이 대다수에 노는 것은 거칠어서 낄 수도 없지만 꼭 자기가 근처에 있으면 부러 평소보다 더 험하게 몸을 움직인다.

 

저번에는 그래서 한참이나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자기들끼리 더 열이 올라 누군가의 다리가 부러졌다던가.

 

그러고는 한 자리가 비었으니 보고 있던 네가 들어와라 하면서 반시진이나 뛰게 했다.

 

그땐 정말 죽을 뻔 했지.

 

악은 계속 걸음을 옮겨서 아기들 방으로 갔다.

 

교사의 아이들은 하루에 한 뼘씩 자란다고 하지만(헛소문이다) 걸음마를 하고 혼인 전의 누이들이 돌보게 되기까지는 한두해가 걸린다.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낮잠 시간인지 벌써 많이 자란 아이들은 해 아래에서 뒹굴거리며 자고 있었다.

 

아기 냄새나.

 

아이가 울 것 같으면 얼러서 달래고, 기저귀 때문에 울 것 같으면 잽싸게 갈아 주고.

 

악은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해가 반쯤 드는 구석에 누웠다.

 

이따끔 아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나고, 종이 바른 문 너머로 들어오는 해는 따뜻하고.

 

꼬박꼬박 졸다가 저만치서 전해지는 발걸음의 진동에 고개를 들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이미 해는 산 너머로 많이 넘어갔고 마당에 가득하던 아이들 기척도 사라져 있었다.

 

다시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사는 별채의 창호지 너머로 아이들 노는 것이 보인다.

 

그림자놀이, 술래잡기, 나무인형 가지고 노는 모습, 그림 그리는 모습.

 

이야기책 읽는 소리, 잡담하는 소리, 말놀이 하는 소리, 그리고 타닥타닥 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

 

악은 정원 사이로 계속 걸었다.

 

하얀 돌로 만든 길 위로 계속 걷다 보면 작은 별당이 보인다.

 

작고 깔끔하고 춥지는 않은.

 

그리고 따뜻하지 않은.

 

신을 벗고 들어서면 나무 담긴 항아리의 불부터 확인한다.

 

다 젖었다.

 

또 아이들이 와서 장난질을 치는 모양이다.

 

담긴 재와 남은 나무토막을 버리고 새로 흙을 담고 그 위에 장작 남은 것을 구해와 넣은 뒤 불쏘시개를 담는다.

 

아기들 방에 가면 누군가 있을테니 불 좀 빌려달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오늘 밤도 책과 신문으로 지새야지.

 

악은 이불 가득한 위에 책상을 꺼내놓고 그 위에 어른들이 보고 던져놓은 신문과 실로 엮은 책을 꺼내 올려두었다.

 

매일같이 사용하느라 먼지 앉을 틈도 없는 작은 단지를 들고 온 길을 되돌아가니 셋째 고모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회요요 고모님.”

 

불이 없나 보구나.”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뱀이 불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 너는 한여름에 자다가 동사할지도 모른다는 잔소리를 한바탕 듣고 나서야 마침내 작은 불을 담을 수 있었다.

 

악은 그것을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이미 밖은 어두워져서 하늘에는 별과 달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저 달이 해처럼 따뜻하면 밤에도 춥지 않을 텐데.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항아리에 불을 담자 얼마 안 있어 따뜻하게 타올랐다.

 

악은 기름등잔에 불을 붙이고 신문을 펼쳤다.

 

세상 어딘가에는 피가 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세상 어딘가에는 동물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는 소매가 좁은 옷을 입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는 하루 세 끼를 먹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는 꼬리달린 사람들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는.

 

세상 어딘가에는.

 

그리고 언젠가는,


세상 어딘가에서 나도 부부의 연을 맺어 내 아이를 품에 안아보겠지.

 

 


이글은 연합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맨발에는 쇠 양동이가 걸려 이따끔 발을 흔들 때마다 휭 돌았고 늘 올려 묶던 머리는 풀어져 몸이며 소파 위에 흘러내렸다.

 

발치에는 양동이와 같이 쓰는 빗자루나 대걸레가 같이 놓여서 소파에 기대고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발가락에 걸어 몇 번 더 양동이를 흔들던 이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비비꼬며 전화기의 번호판을 손가락 끝으로 돌렸다.

 

차르륵 차르륵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이어 얼마간 기계음이 나고, 수화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다]

 

잘 있었어?”

 

[별 용건이 없다면 이만 끊으마]

 

매몰차긴, 우리 형.

 

이글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번에 동양계 능력자들이 대거 참전했는데 말이야~ 그 중 둘이 그랑플람이거든?”

 

누가 들었다고 하더라도 요즘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근황 정도로 들릴만한 정보들을 말하고 나자,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꼬는 것이 빨라졌고 어쩌다 실수로 양동이를 떨어뜨렸는데 조심스레 발끝을 뻗어 다시 걸었다.

 

있지- 이번에도 물어보는건데 말이야아-”

 

어딘가 머뭇거리고, 어딘가 말꼬리를 늘이고, 어딘가 수줍어하는 목소리.

 

마치 예닐곱살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길에서 꺾은 들꽃을 내밀기 직전의 목소리.

 

이글은 그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이스 때문에 영국으로 오지 않는거면- 내가 죽여줄까?”

 

뎅겅-.

 

이글의 발에 걸린 양동이는 한 바퀴 크게 돌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루이스를 죽이는데 그렇게 집착하는 거냐]

 

그치마안- 내가 여기서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그것밖에 없단 말야-”

 

맨발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이글은 해사하게 웃었다.

 

천진하고 밝은 웃음이라서 누군가 보았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통화한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죽이게 해줘- ?”

 

[네가 루이스를 죽여도 내가 그쪽으로 당장 가는 일은 없다]

 

네에-”

 

이글은 짐짓 토라진 목소리를 내어 대꾸하고는 허공으로 새끼손가락을 뻗었다.

 

그럼,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나 부를 거지?”

 

[...]

 

부를 거지?”

 

[...]

 

약속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이글은 끊어졌다는 요란한 소리가 나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서 소파 위에서 굴렀다.

 

, . 벨져 형.”

 

너무 좋아.

 

바르작거리다 떨어졌는지 쿵,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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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마/인어AU] 왜 웃지 않나요

2015. 9. 12. 04:28 | Posted by 호랑이!!!

인어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

 

그래서 마틴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어는 육지로 잡혀왔다.

 

조그마한 수조 안에 비늘로 덮인 하체를 담그고 상체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화려한 석제 침대 위에 뉘여서.

 

처음에는 맞았고, 그 다음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속삭이며 마음을 괴롭게 만들었다.

 

지상의 공기는 무거워서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에는 부족하니까 스스로는 바다로 갈 수 없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자그마한 수조 안이나 딱딱한 돌바닥에는 자신이 흘린 눈물로 만들어진 회백색 진주가 그득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따끔 마틴은 지상의 인간들보다 매끄러운 손가락 끝으로 눈물이 굳은 둥근 보석을 굴려보곤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눈물이니까, 원하는 만큼 울다 보면 돌려보내주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들이 원하는 만큼이라는 것은 마틴 혼자로는 채우지 못한다.

 

삼칠일을 울었다.

 

삼칠일을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포기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고, 자신의 눈물을 보고 웃던 사람들조차 발걸음을 드물게 하자 표정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필요 없는 인어는 굶겨 죽여라는 말이 들렸다.

 

그래서 마틴은 안도했다.

 

드디어 죽는구나.

 

그러나 몸에 힘이 빠져 누운 마틴의 입가에 무언가가 닿았다.

 

깨끗한 물과 과실.

 

눈을 떴더니, 밝은 갈색 머리의 소년이 거기 서 있었다.

 

누구세요?”

 

릭 톰슨. 널 가둔 사람의 아들이야.”

 

이상하게도 마틴은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이후로 릭이 가져오는 이야깃거리에 조금씩 웃기 시작했고, 때로는 울었다.

 

인간의 아이는 빠르게 자랐다.

 

밝은 갈색 머리는 짙게 변하고, 위아래의 길이가 마틴보다 길어지고 목소리가 낮게 깔리도록.

 

어릴 적에는 문으로 들어왔지만 좀 자라서는 갑자기 방 안으로 불쑥 떨어지거나 푸르게 빛나는 둥근 원 안에서 나오거나 하도록.

 

말투도 변했다.

 

어린아이의 직설적인 말투는 어느샌가 그대, 당신이 포함된 격식과 예의가 포함된 말이 되었다.

 

인간의 아이는 정말 빨리 크네요.”

 

마틴은 석제 침대에 기대어 릭을 올려다보았다.

 

요만한 아이가 와서 물을 먹여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마틴은 손으로 어림하여 표시하며 웃었다.

 

그에 비해 인어는 정말 늙지 않잖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는 참 변함이 없소.”

 

간이의자를 가져와 앉은 릭이 마주 웃었다.

 

어제는 높은 산, 그 전에는 사람 없는 전망대.

 

아주 옛날에는 이 마을 어느 집의 지붕 위.

 

릭은 마틴을 여러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예요?”

 

그대도 좋아할 만한 곳이지.”

 

릭은 눈을 찡긋했다.

 

어둡고 푸르게 빛나는 원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기다리면, 또 어딘가에 뚝 떨어진다.

 

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고.

 

코 끝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스쳤다.

 

비슷한 걸 맡아본 적 있어.

 

예전에, 릭이 가져다준 꽃이란 것에서 이런 향이 났어.

 

눈을 뜨자.

 

초록색이라고만 알고 있던 들판에는 온통 하얗고 노란 꽃들이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땅에서 밤하늘이 자라는 것 같아요.”

 

릭은 미리 펼쳐두었던 자리 위로 마틴을 옮겨주었다.

 

마틴은 예쁘게 핀 꽃을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꽃잎 끄트머리를 깨물어 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웃으며, 릭은 자리에 벌렁 누웠다.

 

깊은 하늘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제 고향에서는 가끔 차갑지 않은 눈이 내려요.”

 

마틴도 자리에 누웠다.

 

지느러미가 풍성한 꼬리가 때로 흔들리는 소리를 냈다.

 

녹지 않으니 치우기도 힘들고, 몸에서 떼어내는게 귀찮으니까, 눈이 오면 다들 집 안에 들어가 지내는데 저는 아예 수면까지 올라왔어요.”

 

하얗고 고운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저 하늘은 아주 깊고, 다양한 것들이 저 먼 수면 아래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보여서. 저는 언젠가 저 하늘에서 헤엄치고 싶었어요.”

 

지금은?”

 

마틴은 눈을 감았다.

 

예전에도 릭이 이런 질문을 했었다.

 

돌아가고 싶은 거지?’

 

릭이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입가를 올려 웃었다.

 

괜찮아요 저는.”

 

인어의 것보다 따뜻한 팔이 차가운 몸을 덮었다.

 

달콤한 공기는 혀 끝에 향긋하게 와 닿고 몸은 따뜻해지고 있었다.

 

눈을 뜨면 깊은 하늘에 별이 헤엄친다.

 

잠이 들고.

 

눈을 뜨면 다시 수조가 있는 그 방이었다.

 

몸에 따뜻한 느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서.

 

마틴은 칼을 훔쳤다.

 

늘 자신의 식사를 가져다주는 일꾼 중 하나가 주머니에 넣어둔 나이프에 대해 생각하고 있길래 그의 귓가에 속삭여 나이프를 내놓게 했다.

 

날이 잘 서 있었다.

 

뾰족하고, 칼집의 가죽은 매끈하고 차갑고.

 

그것을 품고 기다리면 여느 때처럼 밤이 왔다.

 

.”

 

블론디.”

 

여느 때와 다르게, 릭은 마틴을 안고 이동했다.

 

여느 때처럼 눈을 감았더니, 코 끝에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냄새가 감돌았다.

 

눈을 뜨자 끝없이 펼쳐진 깊은 하늘과 검게 빛나는 바다가 있었다.

 

“......”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마틴이 손짓했다.

 

저는 괜찮다고 했잖아요.”

 

울 것 같은 미소에 마틴은 달래듯이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잎 넓은 나무에 릭이 기대고, 거기에 마틴이 기대고.

 

그렇잖아도 마지막 선물을 주려고 했어요.”

 

지느러미가 곧게 펼쳐진 꼬리를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바닷물에 담그고 마틴은 품에서 칼을 꺼냈다.

 

밝다고는 하나 그래도 희미한 달빛 아래라 릭은 처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투명한 눈물은 회백색으로 굳어지고 붉은 피는 몽글몽글 투명한 색으로 엉겼다.

 

“...왜 그런 표정이예요?”

 

내 눈물을 보면 사람들은 웃었는데.

 

블론디, 마틴... 안돼, 안돼 블론디. 마틴!”

 

손가락으로 상처를 벌리면 보석이 쏟아진다.

 

릭의 손은 그 상처를 틀어막으려 했지만 그 손가락 사이에서는 바작바작 마르는 소리를 내며 붉은 보석이 굴러떨어진다.

 

왜 웃지 않아요?”

 

마틴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갈색 머리의 청년, 혹은 소년, 어쩌면 청년은 반짝이는 돌로 뒤덮인 인어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인어는 죽음이 목을 훑을 때까지 물었다.

 

왜 웃지 않아요?

 

 


[찰리에그시해리] 데이지의 연극 발표회날

2015. 9. 1. 01:00 | Posted by 호랑이!!!

에그시는 찰리의 괴롭힘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아이를 보는 마냥 가끔은 혀를 차거나 작은 목소리로 조언을 해주기도 했으니까.

 

사실, 에그시가 자라온 곳에서는 갓 일곱 살이 된 어린애조차 찰리보다는 그럴싸한 악의를 만들어내곤 했다.

 

자신이라면 얼마든 그것을 받아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찰리 그가 노선을 바꾸어 자신에게 접근한대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 에기.”

 

, 오늘도 역시나로군.

 

에그시는 제 앞에 내밀어진 시계에 눈알만을 굴려 찰리 쪽으로 향했다.

 

롤렉스?”

 

윈체스터 주유소의 맥도날드 알바생도 알 만한 것으로 사왔지.”

 

재력 과시라니.

 

자신은 하찮게 여기는 우민에게도 번쩍거리는 고급 시계를 줄 수 있다 이거냐.

 

킹스맨에 취직하기 전의 자신이라면 고깝더라도 받아는 두겠지만, 이제 어머니와 데이지를 부양할 만큼 벌고 있으니 (아깝더라도)사양할 수 있다 이거야.

 

유감스럽게도, 차야 하는 시계가 정해져 있어서.”

 

그러자 대번에 표정이 일그러진다.

 

혓바닥이라도 내밀면 더 일그러뜨리려나.

 

최근 매너 레슨을 가르치는 해리가 들었다간 한숨을 쉴 생각을 하며 에그시는 픽 웃었다.

 

신사는 어떻고, 매너는 어떻고, 그런 경박한 짓은 하면 되니 안되니.

 

그러면 에기-”

 

. . .

 

알림음이 울렸다.

 

해리는 능력도 좋지, 어떻게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를 알고 연락을 한 걸까.

 

해리가 불러서. 이만 간다?”

 

에그시는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찰리를 내버려두고 양복점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만찬장에 계십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자 그는 가벼운 고갯짓과 미소로 화답하며 위치를 말했다.

 

에그시는 그의 말대로 위로 올라가서는 일종의 회의실 겸으로 쓰는 만찬장으로 들어가며 그의 후견인의 이름을 불렀다.

 

~~”

 

노크부터 하라고 했잖니.”

 

안녕하십니까 갤러해드.”

 

안녕하세요 멀린.”

 

멀린은 영 탐탁찮다는 눈으로 해리를 보고 있었다.

 

아서의 기본적인 표정은 거만함이었고 전 란슬롯이 미소였다면 멀린은 확실히 어딘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이 기본이긴 한데.

 

저건 진짜 정말로 확실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다.

 

해리, 그런데 저는 왜 부르셨어요?”

 

갤러해드가 전 후보생이었던 찰리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 이것 때문이었나.

 

에그시는 멀린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그것 때문에만 부른 것은 아니란다. 자 여기를 보렴.”

 

새침하게 말한 해리는 멀린의 손에서 차트를 빼앗아 위의 손잡이를 돌렸다.

 

이번 주 토요일에 데이지가 학교에서 연극을 한다고 하지 않았니? 토요일에 시간을 내려면 오늘 미리 일해두는 것도 좋겠지.”

 

해리...”

 

에그시는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예전 V-day일도 해결한 너이니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테지만, 다녀오겠니?”

 

다녀오겠습니다!”

 

에그시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료를 받아 밖으로 뛰어나갔다.

 

신사는 뛰지 않는다니까.”

 

“...젊은이를 조련하는 짓은 좀 그만두십시오.”

 

애정이 아니라 조련으로 보다니, 서운하군.”

 

해리는 전혀 서운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는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 갤러해드가 뭔가를 두고 간 걸까요?”

 

에그시 발소리가 아닌데.”

 

멀린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찰리가 들어오자 질린 눈으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에그-”

 

두리번두리번.

 

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에그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단 넥타이부터 단정하게 조인 뒤 멀린에게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멀린, 이건 집에서 보내는 겁니다.”

 

멀린은 몇 장의 종이와 편지가 들었음이 분명한 봉투 하나를 들었다.

 

나는 보이지 않나 보구나.”

 

, 안녕하십니까. 그러니까... 게리 하비?”

 

해리 하트, 전 갤러해드란다. 그리고 덧붙여서, 일부러 이름을 틀리게 하는 일은 아주 유치하고 뻔한 일 중의 하나라고 덧붙여 두지.”

 

그러는 그쪽도 별로 어른스럽지 않게 굴고 있잖습니까.

 

멀린은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에그시는 내가 보낸 임무 때문에 한동안은 바쁠 것 같구나.”

 

못된 영감.

 

찰리는 억지로 웃어는 보였으나 속으로는 냉큼 그렇게 생각했다.

 

저거 틀림없이 내가 에그시랑 가까이 붙어있는 게 고까워서 그럴 거야.

 

멀린은 드물게도 한숨을 쉬며 찰리와 해리가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시계를 보았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지금 복귀했습니다. -찰리?”

 

랜슬롯, 어서 오게.”

 

록산느는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을 보고 놀랐지만 잘 교육받은 귀족답게 티를 내지 않으며 보고서부터 멀린에게 넘겨주었다.

 

이번 보고서입니다.”

 

잘 썼군, 이건 차차 검토하겠네.”

 

멀린은 손으로 썼지만 깔끔하고 더할 나위 없이 읽기 편한 보고서를 슥 훑어 보았다.

 

그리고 오자마자 미안하네만, 한 가지 더 맡겨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멀린은 옆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처럼 만났으니 동기끼리 바라도 다녀오게.”

 

록산느, 록시는 옆을 보았다.

 

고급 정장에 말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광택이 나도록 닦은 구두, 잘 교육받은 유서 깊은 귀족, 킹스맨 혹은 그 후보생(이었던), 신경전을 벌이던 둘은 귀족의 품위고 뭣이고를 집어던지기 직전이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금요일 저녁, 에그시는 기분이 좋았다.

 

임무에서 입었던 가벼운 상처는 대강 다 나았고, 토요일 저녁 식사는 집에서 가족들과 해리, 그리고 친구 몇 명과 즐겁게 보낼 예정인데다.

 

멋대로 사진을 찍지 말라던 데이지도 내일 연극에 쓸 의상을 입은 모습을 미리 사진 찍어도 좋다고 허락해준 것이다.

 

찰칵 찰칵.

 

에그시는 기분 좋게 핸드폰 카메라를 썼다.

 

데이지 연극이 뭐라고 했지?”

 

뱃써... 백설공주.”

 

그래서 그렇게 왕관을 썼구나? 목걸이도 예쁘네~”

 

그런데.

 

데이지는 그 말을 듣자 놀란 표정을 짓더니 허둥지둥 목에 걸린 목걸이를 옷 속으로 숨기는 것이다.

 

데이지?”

 

?”

 

그 목걸이, 오빠가 봐도 될까?”

 

그러자 데이지는 의상의 목 쪽에 손을 얹더니 꾸욱 누르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자신의 방으로 화닥닥 뛰어가버렸다.

 

에그시는 침착하게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친구, 록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에그시?]

 

록시... 데이지가...”

 

[무슨 일인데?]

 

데이지가...!!!!!!!!!!”

 

[에그시?!]

 

그리고 록산느는 데이지가 오빠에게 비밀을 만들고 있어라는 주제로 세 시간,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주제로 세 시간, 기타등등의 주제까지 모두 여덟 시간을 에그시의 울음 섞인 한탄을 듣는데 사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데이지의 학교에서 눈이 부은 에그시를 만난 록산느는 한 마디 쏘아붙여주려다 그 퉁퉁 부은 눈 때문에 관두었다.

 

오셨네요 해리.”

 

좋은 아침이네.”

 

그 옆에서 멀린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이렇게 일찍 오는 모습을 보여주시죠.”

 

다음부터는 그러도록 하지.”

 

록산느는 커피를 사 와서 홀짝이며 의자에 앉았다.

 

... 록산느, 무슨 일이지?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누구누구네 오빠가 동생 때문에 서운하다고 여덟 시간이나 통화를 해서 말이죠. 정보국에서 봤다면 스파이라고 의심받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런, 에그시가?”

 

그러자 아직도 한스러운지 에그시는 멀린을 붙들고 떠들다가 체육관 밖으로 쫓겨났다.

 

멀린은 에그시의 핸드폰을 넘겨받더니 사진을 상비하는 간단한도구들로 확대하고 확인하기 시작했다.

 

백금이군, 보석은 유리구슬로 만든 가짜지만. 데이지에게 용돈을 많이 주나 보지?”

 

저 나이 때 적당할 정도만 쥐어주고 있어요.”

 

데이지가 돈을 버나?”

 

그럴 리가요.”

 

에그시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가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이 인간이... 설마 데이지를...”

 

침착하렴.”

 

전 이미 침착해요 멀린. 어쩌죠? 딘 그 인간이 데이지를 몰래 만난다던가, 그러면서 용돈을 쥐여준다던가, 선물 같은걸 하면 어쩌죠?”

 

“...”

 

그래도 아버지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멀린은 그렇게 생각만 했다.

 

벌겋게 퉁퉁 부은 얼굴로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아무래도 당분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노점을 찾으려 고개를 들었더니.

 

저만치 익숙한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에그시.”

 

?”

 

찰리가 오는구나.”

 

뭐라고요.

 

에그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의 보기만 해도 짜증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면상은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더니, 어딘가 살금살금 피하는 모습으로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저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날 것 같아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탕 먹는 거 잊지 말고.”

 

멀린은 에그시가 찰리의 뒤를 따라 체육관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에그시는 찰리의 뒤를 따라 들어가긴 했지만, 워낙에 사람이 많았던 터라 결국 잡지 못했고.

 

다시 얼굴을 마주한 것은 저녁의 홈파티에서였다.

 

“.........그래서, 찰리?”

 

에그시는 다시 마주한 그를 한껏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내 귀엽고 천사 같은 동생)데이지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건데?”

 

친구다.”

 

웃기지 마아아아!!!!”

 

해리, 멀린, 록시는 안락의자에 앉아 와인과 감자튀김을 먹으며 느긋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얘랑 친구인게 뭐가 나빠!”

 

나빠! 대체 뭣 때문에 친해지려고 한 건데! 쟤 목걸이도 네가 줬지!”

 

아 친구끼리 선물 좀 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왜 데이지랑 네가 친구냐고?!”

 

그야 데이지는 미래의 내...!”

 

저놈이 내 밤잠을 앗아간 원인이었군.

 

록산느는 크림을 가득 넣은 커피잔을 들었다.

 

미래의~~~~? 아무리 우리 데이지가 예쁘다지만 미래의 아내 따위를 말했다간...”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말해보시지!”

 

미래의... 에잇, 말 안 해!!!”

 

멀린은 우유와 얼음을 담은 커피를 홀짝였다.

 

록산느는 데이지가 가져다준 파이 조각에 포크를 꽂아서 크림과 과일을 가득 떠 입에 물었다.

 

“...찰리는 언제쯤 제대로 말할까요.”

 

찰리가 에그시한테 고백하는게 빠를지, 에그시가 해리한테 고백하는게 빠를지 내기하겠나?”

 

찰리한테 백 파운드 걸지.”

 

해리는 지각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걸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만.”

 

그들은 아직도 아웅다웅 싸워대는 둘을 보더니, 각자 들고 있던 음식을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샤토 디캠에 트윙키가 먹고 싶군.”

 

저는 스노우볼 쪽이 취향입니다.”

 

데이지? 저기 두 남정네가 널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는데, 좀 말려주지 않을래?”

 

데이지는 아직도 연극 의상 그대로, 싸우는 둘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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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X빅터] 고양이 -04

2015. 7. 23. 19:08 | Posted by 호랑이!!!

 

“빅토르~?”

 

다음 날, 그 이름을 들은 빅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예상한 일이었지만) 눈을 치켜떴다.

 

“왜 눈을 그렇게 떠?”

 

어차피 한 마디 제대로 하지도 못할 거면서.

 

이글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소파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날은 여즉 쌀쌀해, 그 손에는 데운 우유잔이 들려 있었다.

 

초콜릿과 바닐라를 타서 달콤한 향이 나는 것.

 

이글은 단 것이라면 그닥 내키지 않았지만, 아침 즈음 장을 보러 갈 때 빅터의 생각이 나 사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초콜릿도 바닐라도 커다란 통이라 혼자서는 다 비우지 못할 텐데.

 

언제까지 저 꼬마가 올 줄 알고.

 

“,,,아냐.”

 

거 봐.

 

이글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빅터의 손목을 잡아챘다.

 

“따라해.”

 

“...”

 

뭘? 이라고 말하는 듯 입술이 살짝 벌려졌지만, 결국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잡힌 손목 때문인지 잔뜩 굳어서는 가까이 붙은 자신을 간신히 올려보니까.

 

“자, 따라해 봐- 싫어, 라고.”

 

그러나 굳어서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더 가까이 붙어서,

 

“싫다고 해보라니까?”

 

그러나 고개를 젓는다.

 

“말 해. 입 열어.”

 

대답하라고.

 

싫다고 말하라고.

 

“...비...”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안돼, 라던가 싫어, 같은 말은 아닐 것 같다.

 

심지어 그 목소리도 아주 작아.

 

“...비켜.”

 

“못 비켜.”

 

비키게 해봐.

 

네가 잘 하는 거 있잖아? 바람으로 밀쳐내기, 때리기, 찢기, 그런거.

 

휘이잉.

 

빅터의 손 안에서 바람이 작게 소용돌이쳤지만 그뿐, 금방 꺼질 듯 말듯하게 보였다.

 

잡은 손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

 

애옹-

 

아직 한참이나 어려 높은 소리로 앵앵 우는 고양이 소리에 이글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손을 놓았다.

 

“...아, 장난이야. 하하하.”

 




[쌍총] 모티브 : 쩨로 그림

2015. 7. 19. 02:19 | Posted by 호랑이!!!

[우리는 이 행성을 점거했다. 이 행성을 파괴하기 전에 기회를 주겠다]

 

주어진 것은 익숙하기 짝이 없는 무기였다.

 

[너희는 선택받았다. 이것은 이 행성의 신식 무기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네 옆의 사람을 죽여라]

 

한 사람과 행성을 저울에 올렸다.

 

신식이라더니, 웨슬리는 얼핏 낡아 보이는 총을 손에 쥐고, 내려다보았다.

 

이것으로 카인을 쏘면 세계 멸망을 막을 수 있다.

 

사람의 목숨 하나와 수십억, 혹은 그 이상의 목숨.

 

단순한 숫자로 계산한다면 더없이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있는데.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앞에 카인이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마도, 죽을 각오를 하고서.

 

그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총의 안전장치를 걸어 품에 넣었다.

 

못 하네.”

 

슬로언, 이건 답이 정해진 일이네!”

 

아니지, 아니야.

 

일순 망설인 내가 부끄러워졌네, 나는 아직 장군이라는 직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나봐.”

 

목숨 하나와 목숨 여럿을 비교하는 일은 전쟁 중으로 충분했는데.

 

조금은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지 않겠나.”

 

이제라도 늦지 않았을테니, 빨리...”

 

카인은 웨슬리의 품에서 총을 꺼내 손수 잠금장치를 풀어 손에 쥐어주기까지 했다.

 

웨슬리는 그 총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꼭 그래야겠나?”

 

총구는 카인의 머리를 향했다.

 

카인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 폭발음이 들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본 그 곳에는 총을 전해주러 왔던 로봇이 박살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정말로 세계는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원을 채취한다며 땅을 파고들었고 사람 몸에 든 성분을 조사한다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포획해 가거나, 공기가 너무 맑다며 알 수 없는 이물질 같은 연기를 뿌렸다.

 

다행히도 능력자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고, 그 중에서도 공성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51조로 파괴 임무가 떨어지곤 했다.

 

능력자들은.

 

공성전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카인과 웨슬리 역시 전장에 투입되었다.

 

단단하게 보강된 상자나 건물은 부서졌고, 그들은 상처를 입었다.

 

웨슬리의 구급함은 이미 다 써버린 상태인데다 카인도 웨슬리도 무시 못 할 상처를 입었다.

 

보급품은 얼마 후에 오지?

 

카인은 잔해의 그늘에 숨어서 센트리 레이더를 설치했다.

 

붉은 빛이 깜박거리면서 시야를 흐릿하게 밝혔고, 카인은 웨슬리를 돌아보았다.

 

대전차지뢰는?”

 

묻어두었네.”

 

우선적으로 총기며 사용하는 장비를 점검하고, 탄창을 채우고, 아군에게 연락을 하거나 물을 마셔두는 등,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수통에 남은 미지근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카인은 웨슬리에게 말을 꺼냈다.

 

슬로언, 내 생각에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는데.”

 

그러나 슬로언은 묵묵히 건량을 씹을 뿐이었다.

 

레이더의 붉은 빛에 그림자가 졌다.

 

카인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 광택나는 쇳덩이에 우지를 갈겨 대었다.

 

이내 탄창은 비었지만 그 기계는 여전히 움직였고, 눈 역할을 하는 렌즈를 그들 쪽으로 돌렸다.

 

내가 가정을 좀 해 봤는데.”

 

카인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류탄을 꺼내 던졌다.

 

왜 그 기계는 너희라고 했을까?”

 

다음은 잡아서 내리누르고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에 한 발.

 

“‘선택받았다라는 건 어떤 기준일까.”

 

카인이 드라그노프를 꺼내려는 순간, 웨슬리는 그 손에 자신의 품에서 꺼낸 낡은 총 한 자루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카인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당기는 순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내 웨슬리의 몸은 무너졌고, 기계의 렌즈는 그 모습을 똑똑히 담았다.

 

미친-”

 

내가... 가정을 좀... 해 봤는데...”

 

슬로언, 웨슬리! 응급 키트는...! 눈 감지 말게, 나 보고 있어!”

 

“...비가 오는구먼...”

 

자네가 세계를 구할 만큼 대단한 자라면, 나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을만큼 대단한 자 아닌가.

 

기뻐하게, 이 세계는 지금 자네가 구했지 않나.

 

웨슬리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 손은 올라가, 카인의 눈가를,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따뜻한 비가 오는구먼...”

 

 

[Jail] 니키타/이화 - 형제라면

2015. 7. 16. 15:54 | Posted by 호랑이!!!

교도소에서 보내는 편지는 보내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니키타 네를린, 현재 복역 중인 죄수는 아주 오래 전에 알게 된 동생뻘 친구에게 하나, , 도합 여섯장의 편지를 적어 부쳤다.

 

그리고 그것이 장장 삼 개월 지나서.

 

이화는 편지를 받았다.

 

기억이 사라졌는데.

 

교도소에서 편지가 온다.

 

이 사람은 누굴까, 예전의 는 조직폭력단에라도 들어있었던 걸까.

 

니키타는 무슨 드라마 이름 같은 이름인데, 여자인가? 글씨체가 부드러운걸 봐서는 여자야.

 

이화는 편지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다.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한 번 놀러와

 

놀러오라니, 교도소로?

 

뭘 가져가지? 뭘 입어야 하지? 기억 잃었다고 얘기를 해야 할까?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이화는 한 손에 초콜릿이라던가, 여성들에게 인기 있다는 로맨스 소설까지 한 권 사서 들고 왔다.

 

저기... 오늘 면회 오겠다고 했던 이화인데요.”

 

그러자 무뚝뚝해 보이는 간수가 이쪽이라며 안내해주었다.

 

면회는 투명한 부스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감시를 위해서라며 그 간수는 안으로 들어와 구석의 의자에 앉았다.

 

편지를 교환했던 그 사람이 곧 온다니.

 

내용이랑 말투만 봐서는 키 크고 파마한 금발에 예쁜 누나일까.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는데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까만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 남자.

 

오오, 키 크다.

 

곱슬 머리? 파마 머리인가? 이제 거의 다 풀렸네.

 

밤색 머리고, 여기서 간수 하기에는 엄청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인데-

 

키는 크지만, 하고 덧붙이는데 뭔가 이상하다.

 

옷이, 옷이 주황색 죄수복이야.

 

이화!”

 

꽤 반가워 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금발 파란눈 170cm의 누나의 환상이 쨍그랑 쨍그랑 깨진다.

 

니키타... 네를린씨?”

 

왜 그렇게 어색해. 하하, 오랜만이야.”

 

니키타는 팔을 활짝 벌려 와락 끌어안았다.

 

잘 지냈어? 어때, 뭐하고 지냈어? 감옥 밖 얘기 좀 해줘.”

 

다행히도, 서로 좋지 못한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밖에서는 지내기가 이렇고, 저렇고, 얘기하다가 니키타가 예전 얘기를 할 것 같아, 이화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약을 잘못 먹어서 예전 기억이 없어요.”

 

니키타의 얼굴이 웃는 그대로 굳었다. 일순이지만.

 

그리고 의자를 뒤로 당기더니 털석 주저앉았다.

 

“...교도소에서 오라는 편지가 왔다고 냉큼 오면 어떡해.”

 

내가 마약왕이고 연쇄살인범이고... 연쇄살인범은 맞지만, 아무튼 그래서 너한테 몹쓸 짓을 시키거나 하려고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온 거야? 어디 중국이라던가 러시아에서 편지가 와도 무시하기 어렵지 않은데, 다른 곳도 아니고 교도소라고 교도소! 내가 뭐하는 사람일 줄 알고? 그냥 그대로 눈 딱 감고 편지를 태워버리고 그런 일 없다는 듯이 모른체하면 되었을 거 아냐? 예전부터 스스로를 좀 아끼라고 했더니 이거 하나도 안 변했어 아주.

 

니키타가 다다다 잔소리를 하자 이화는 양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하하.

 

니키타는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 돌아오면 찾아와, 아마 그때까지도 있을 것 같으니까.”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서요?”

 

이화를 한 번 보고, 니키타는 여느 때처럼의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교도소도 국가 시스템이라고, 내가 모르는 내 이야기도 있더라고.”

 

너랑 나, 라고 하는 듯이 손가락으로 이화 쪽을 가리켰다가 자신 쪽을 가리킨다.

 

형제.”

 

, 눈 동그랗게 변했다.

 

니키타는 조심조심 손으로 이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저씨... 아니, ...?”

 

아저씨.”

 

아저씨, 덧붙이고 니키타는 다시 이화의 머리를 헝클어뜨려 놓았다.

 

 

[티엔하랑마틴] 어느 날의 꿈?

2015. 7. 15. 02:44 | Posted by 호랑이!!!

이것은 아주 어릴 적, 이하랑이 산신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어린 하랑은 그날도 아이들과 진탕 싸우고 돌아왔고 고단하여 일찍 잠이 들었더란다.

 

꿈속에서 온갖 개를 보는데 그 개들은 눈빛이 형형하고 살갗이 벗겨지거나 다리가 없거나 한 일도 왕왕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했었다.

 

개들은 그를 보니 반갑다며 꼬리를 치고 혹여 놀랄까 달려들지도 않고 의젓하게 옆에 서 만져달라며 가만 기다렸다.

 

영특하고 안타까우니 쓰다듬을 만도 하건만 하랑은 선뜻 그러질 못했다.

 

그 개들에게서는 이세상의 것이 아닌 기운이 풍겨 본능적인 거부감에 다가갈 수 없게 했으니.

 

앞에 서서 마침내 그 거부감을 누르고 머리며 귀를 만져주니 개들은 좋다고 다시 꼬리를 친다.

 

하지만 그뿐이라, 개들은 하랑이 몸이라도 더 쓰다듬거나 안아주기 위해 가까이 가려 할 때마다 몸을 뒤로 물려버리고.

 

그에 하랑이 가까이 가려 했더니 뒤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더란다.

 

고개를 돌렸더니 글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냥한 목소리의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라고 달랬고.

 

여기는 죽은 이들이 오는 곳이지요?”

 

그렇단다.”

 

왜 난 여기가 무서운 것이오?”

 

그러니 그 이가 말했다.

 

친구가 없어서 그렇지.”

 

어린 하랑은 양 팔을 벌렸다.

 

무서우니 안아주시오.”

 

그 이는 하랑이 안겨오자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등을 토닥이었다.

 

갈 때는 조심하거라, 누군가 맛난 것을 주어도 먹으면 아플 테니 입에 대지 말고, 누군가 이리 오라 손짓해도 믿지 말고.”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될 것이라.

 

그가 등을 떠미니 아까까지 없던 곳에 문이 생겼다.

 

“...나랑...”

 

나랑 친구가 되어주지 않겠소? 하고 묻고 싶었는데.

 

그 사람은 답 없이 문을 열어 그를 쫓아냈다.

 

길은 고르고 알록달록한 돌로 꾸민 예쁜 곳이었다.

 

길이 꼭 사탕과자 같고나 생각하는데 누군가 제 손에 아가 이거 먹어보렴 하고 하얀 것을 준다.

 

나중에서 안 거지만 그것은 과자에 얹은 아이스크림으로 보기에도 퍽 맛나 보여 한 입 물었더니 대번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팠다.

 

문득 먹지 말랬지!’하는 소리가 들리고 손을 찰싹 맞아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아까 일이 생각나서 화닥닥 길을 뛰었다.

 

뛰고, 뛰고, 뛰었고 한숨을 슥 돌리려는데 눈이 확 뜨였다.

 

꿈은 거기서 끝.

 

하랑은 개꿈이려니 생각하고 일어나 머리를 털었다.

 

단 하나 아쉬운 건 친구가 되어달라고 말할 것을, .

 

그리고 그 아쉬움도 령을 부리기 시작하며 사라졌다.

 

 

 

 

 

 

하랑, 얌전히 굴어야 한다.”

 

사부도 참,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걱정도 많소.”

 

처음 재단에 오는 날, 이색적인 능력이라 보고 싶어하는 이가 많다고 티엔은 그를 사람들 앞에 세웠었다.

 

이거 꼭 서당에 처음 간 날 같구만.

 

단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문득 하랑의 눈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다.

 

가로세로 하얗게 줄무늬가 들어간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 아래는 금색 머리카락.

 

오라 저게 금발이라는 거구만?

 

하는데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하랑은 지독한 기시감에 몸을 멈췄다.

 

? 예지몽 따위에서 본 사람인가?

 

아니, 최근에 꾼 예지몽에서는 저런 사람이 나오질 않았었는데.

 

소개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 도중에도 눈은 그 사람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마침내 서커스단 원숭이마냥 앞에 두는 일은 끝났고 티엔은 계속 집중하지 않는 하랑이 어딜 보는가 하여 그쪽을 보았다가 어깨를 잡아 시선을 돌리게 했다.

 

이하랑, 그 사람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

 

실례네요 티엔 정, 이제 한 식구잖아요?”

 

아까까지 저 멀리 있던 이는 고개를 돌리니 바로 앞에 있었다.

 

부드러운 표정과 선량한 인상에 목소리는 유난히 상냥하다.

 

저 목소리, 저 목소리를 분명 들은 적 있었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마냥 몸이 부르르 떨리고 온몸의 털이 바짝 섰다.

 

마틴 챌피예요, 이름이 마틴이고 패밀리 네임이 챌피, 이해했나요?”

 

대답도 못 하고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티엔이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무슨 수작이냐.”

 

수작이라니 너무하시네요, 그저 인사를 하려는 것뿐이랍니다.”

 

그 잔재주로 내 제자를 꼬드기기라도 했다간 끝이 좋지 못할 거다.”

 

그럴 생각은 없으니 비켜 주시죠, 오랜만에 인사를 하고 싶으니까.”

 

마틴은 티엔을 비켜나게 한 뒤 하랑을 꼭 껴안았다.

 

색목인들은 이게 인사야?”

 

그렇답니다, 반가워요 하랑 이.”

 

옆에서 지켜보던 티엔은 마틴의 입에서 이어 흘러나온 답잖은 말에 놀랐다.

 

저와 친구가 되지 않겠어요?”

 

 

 

 

 

 

 

 

 

친구가 되겠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로군.”

 

실례라니까요.”

 

하랑의 조선 신분은 박수라 높지도 않고, 능력이야 앞으로 자라겠지만 당장은 쓸 곳이 없는데 뭣 때문이냐?”

 

부드러운 빛의 스탠드 조명에 의지해 책을 읽던 마틴 챌피는 책을 탁 덮어버렸다.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을 사귀지는 않는답니다. 웬일로 제 방에 온다 싶더니 시비를 걸러 온 건가요?”

 

경고다.”

 

하랑은 내 제자다.

 

그렇게 말하고 사라지는 뒤에 대고 마틴이 웃었다.

 

하랑은 제 것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