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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군/톰맥스]MAX

2015. 6. 1. 07:15 | Posted by 호랑이!!!

맥스는 칼을 들고, 거울을, 그 너머를 겨누었다.

 

 

불공평한 계집애, 나한테 모든 나쁜 것을 밀어넣고 자기 혼자 잠에 빠져 있어.

 

그 애가 힘든 건 힘든게 아닐 거야.

 

혹시 모르지? 나쁜 용이 지키는 성에 갇힌 공주님 놀이라도 혼자 하고 있을지?

 

 

칼 끝은 거울에 닿고 거슬리기 그지없는 마찰 소리를 낸다.

 

끼이익, 쨍그랑, 끼이익, 쨍그랑.

 

칼은 거울을 긋고 후려친다.

 

그 조각은 맥스의 얼굴에 튀어 잔금을 남겼지만, 맥스의 춤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춤을 출 때 내 손에 잡힌 것이 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이었으면 좋겠어.

 

누군가를 해치고, 겁을 주고, 미워하기보다 한 마디 상냥한 말을 먼저 할 수 있기를 바라.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해서 그게 좋은 것인 걸 모를 리 없잖아.

 

 

거울의 유리는 박살나서 바닥에 파편이 흘러 넘쳤고 이제 그 유리를 받치고 있던 연한 색의 나무판조차 계속되는 칼질에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맥스의 칼질은 거세어지고, 그 호흡도 거칠어졌다.

 

 

나에게 미움을 준 네가 미워.

 

너를 미워하게 만든 네가 미워.

 

 

나쁜 계집애!”

 

 

나무판 중앙에 칼이 깊숙이 꽂혔다.

 

맥스는 숨을 몰아쉬며 거울을 노려보다가, 주먹을 들었다.

 

맥스, 나그네 형이 오래.”

 

치려는 순간, 손이 누군가의 손에 잡혔다.

 

“...”

 

, 가자.”

 

톰은 맥스의 방에 깔린 유리조각이나 깨진 거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 파편을 밟고 지나왔다.

 

맥스는 숨을 마저 고르고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휙 넘기며 방에서 빠져나왔다.

 

 

마야 이 못된 계집애.

 

네가 나에게 남겨준 아주 쬐-끄만 좋은 마음은 말야.

 

활활 불태워 버릴거야.

 

하나도 남김없이 이 애한테 줘버릴 거라고.

 

그러니 너는 네게 남은 아주 약간의 미움을 불태우고 있으렴!

 

하하!

 

 

[Ss어필] 엘커와 발레리안의 놀이동산 간 이야기

2015. 5. 26. 19:29 | Posted by 호랑이!!!

“엘커! 놀이동산이예요!”

 

쨍쨍한 태양, 후끈한 열기.

 

그리고, 넘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엘커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꽃집에서 입곤 했던 검은 티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발레리안은 넓은 지도를 펼쳐들고는 꼬리를 마구 휘두르며 볼펜으로 놀이기구 그림에 체크를 해 댔다.

 

“일단 시작은 바이킹- 그리고 그 다음은 롤러코스터랑-”

 

엘커는 왠지 발레리안이 좋아할 것 같은 음료수와 솜사탕을 파는 가판대를 힐끗 보고는 뭔가를 중얼거리는 발레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럼, 타러 갈까요?”

 

“넵!”

 

사람은 많았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사람은 많았다.

 

덕분에 장장 30분을 기다리고 바이킹에 오를 수 있었다.

 

올랐는데, 엘커는 맨 끝자리로 가려는 발레리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엘커, 저기 두 자리가 비었...”

 

그러나 엘커가 발레리안을 잡아당기는 동안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들이 앉아 버렸다.

 

끝의 자리는 거의 다 찼는데 다만 가장 가운데에는 몇 자리가 비어 있어서 발레리안과 엘커는 결국 그 자리에 앉았다.

 

안전바가 내려오고 바이킹은 위 아래 위위 아래로 흔들려서 마칠 즈음에는 끝에 앉기를 기대했던 발레리안도 축 쳐진 꼬리를 다시 힘차게 흔들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높이높이 올라갈 때마다 손도 번쩍번쩍 들었고, 재미있었고.

 

그래, 여기까지는.

 

그러나 바이킹에서 내려오고서는.

 

“엘커! 저기 봐요, 헬륨 풍선! 풍선 망치랑 철퇴예요!”

 

“그거 지금 들고다니면 다 짐이예요 짐.”

 

이라던가.

 

“...발레리안, 저 사실 저렇게 흉악한 건 못 타요.”

 

“저거 그냥 평범한 공중그네인데요!”

 

“안돼 안돼, 그거 재미없고 흉악해요.”

 

라는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발레리안은 잔뜩 동그라미를 치고 계획했던 동선을 전면 취소했고, 겨우 롤러코스터 하나를 더 타고 나서는 둘 다 땡볕에 지쳐 놀이공원 내의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주로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메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도시락을 싸온다는 선택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둘은 결국 피자를 선택했다.

 

작은 피자 하나와 탄산음료를 주문해서 앉아있자 열린 창문으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와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식혀 주었고 옆의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자 별로 든 것도 없음에도 어깨가 시원해진다.

 

“후우...”

 

“저 이거 뭔지 알아요, 소박함에서 오는 행복이예요.”

 

맛있는 피자와 시원한 음료수와 그늘과... 아아, 다시 한숨이 나온다.

 

기가 죽어있던 발레리안은 다시 지도를 펼쳐들었다.

 

“엘커, 어떤 놀이기구는 탈 수 있어요?”

 

“그럼 이것부터...”

 

회전목마 세 번, 바이킹은 중간자리로 한번 더.

 

범퍼카는 탔지만 벽을 들이받고 더는 움직이지 못했고.

 

가판대에서 구입한 츄러스와, 슬러쉬 두 개와 음료수와 물과 솜사탕과- 여러 가지들.

 

끈적해진 손을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니 밖은 이제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엘커, 마지막으로 관람차 타러 갈래요?”

 

“좋아요!”

 

관람차에 올라서, 천천히 노을이 지는 밖의 경치가 예쁘니 어쩌니 얘기하고.

 

나중에 나가서 밥을 먹고 오락실에라도 가자는 얘기를 하다가, 발레리안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되게 데이트 코스 같네요, 이상한 기분이야.”

 

그러자 엘커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통은 남자 둘이서 놀이공원에 오려고 하지도 않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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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찰리x에그시] 핸드폰

2015. 5. 13. 01:55 | Posted by 호랑이!!!

[야]

 

찰리는 아주 짧게 들리는 목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전화를 할 때는 ‘저는 누구의 무엇인 누구라고 합니다, 누구 있나요?’라고 해야지.”

 

[뻔히 넌 줄 알고 전화한건데 뭐]

 

게다가 너도 난 줄 알았을 거 아냐.

 

그 덧붙인 말에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 없음에도 대답으로서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뭐 어때, 쟤도 내가 알았다는 걸 알 텐데.

 

[바빠?]

 

“바빠.”

 

[잘됐네]

 

잘되긴 뭐가 잘돼.

 

그렇게 투덜거렸더니 저쪽에서도 또 성의없는 목소리로 주절거린다.

 

[이리 와]

 

“바쁘다니까.”

 

[내가 새로 핸드폰을 샀는데 말이야, 양아버지네 똘마니가 자기 전화번호를 단축번호 1번으로 넣으라고 하지 뭐야]

 

“...”

 

이건 별로 자극이 되지 못하는가,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해리한테 새로 핸드폰을 샀다고 했더니 나중에 직접 번호를 찍어주러 오겠대]

 

“왜 해리가 찾아가는데?”

 

그러자 잠시 수화기 너머에서 머뭇거리는 소리가 난다.

 

[스마트폰 써보는게 처음이라 어떻게 써야할지 잘 모르겠어]

 

가르쳐주러 오라고 하려 했는데, 바쁘다면 어쩔 수 없고.

 

“커피 사라.”

 

[단축번호 1번은 비워두겠지만 바쁘면 안와도 돼]

 

찰리는 손에 든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책상에 던져두었던 지갑과 달걀 모양의 열쇠고리가 달린 자동차 열쇠를 집어 주머니에 쑤셔박았다.

 

그리고 그 시각, 새 핸드폰을 손에 든 에그시는 웃으면서, 카페의 자리에 앉아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커피 두 잔, 15분 후에 가져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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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마] 연인의 심장 소리

2015. 5. 8. 19:31 | Posted by 호랑이!!!

째 깍 째 깍

 

마틴의 회중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의 심장이 분당 몇 번을 뛰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계랑 비슷하지 않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적어도 릭에게는 그럴 것이다.

 

사람에게 어떠한 소리가 있다면 릭에게서 나는 소리는 갓 베어낸 풀향기를 실은 남풍이 부는 소리와 바로 이,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일 테니.

 

그렇지 않고서야 그에게 안겼을 때 들리는 시곗소리에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 리 없으니까.

 

마틴은 릭에게 안길때면 귓가에서 들렸던 톱니바퀴가 맞물려 나는 시계의 합창을 기억했다.

 

빨리 업무가 끝났으면 좋겠다.

 

“지금 몇 시예요?”

 

“형씨 시계 있잖아?”

 

마틴은 그 물음에 웃음으로 답한다.

 

 

 

 

릭은 트와일라잇에 있을 때와는 달리 와이셔츠의 소매를 내렸다.

 

소매 너머로 찬 손목시계들이 울퉁불퉁하게 보였지만 얼핏 옷 주름으로 보이기도 했기에 누구도 릭에게 왜 그렇게 많은 시계를 차고 다니느냐 묻지 않는다.

 

릭은 그 중 소매 밖으로 나온 하나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빨리 점심시간이 되어서 커피라도 같이 마시고 싶네.

 

이미 하얀 머그컵에는 포트로 끓여낸 향 좋은 커피가 가득 담겨 있었지만 릭은 마틴이 타주는 맛없는 커피를 생각했다.

 

“데이트라도 있어?”

 

“티 납니까?”

 

“계속 시계만 들여다보니까 그렇지, 그런다고 시간이 빨리 가지는 않아~”

 

릭의 회사 동료인 그는 몸을 기울여서 데이트 시간이 시계에 표시되기라도 한 것 마냥 릭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어라? 시계가 고장났나? 시간이 안 맞잖아, 시계 고치는 곳에 가 봐.”

 

“고장났을 리가 없는데.”

 

“봐, 지금은 6시가 아니라 10시라고.”

 

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떠나고, 릭은 마틴이 있는 런던의 시간으로 맞춰진 시계를 손목에서 풀어내었다.

 

시계를 귓가에 가져다대면 째깍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귀에 댄 것은 아까까지 손목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지만 릭이 떠올리는 것은 놋쇠 빛깔의 둥근 회중시계다.

 

마틴의 심장 가까이 매달린 그것은 어쩌면 마틴을 닮았을 것이다.

 

째깍 째깍.

 

마치 연인의 심장소리를 듣는 기분.

 

릭은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 점심시간까지 못 참겠네, 커피 마시러 간다고 하고 몰래 찾아갈까.

 

이 시간에 찾아가면 놀라겠지?

 

릭은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연인의 푸른 눈이 놀라 동그랗게 커진 것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Ss어필] 발레리안/레오의 휴가 이야기

2015. 4. 17. 05:43 | Posted by 호랑이!!!

발레리안이 휴가를 받은 어느 날.

 

레오폴드는 자신이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 하나 살기에 충분한 크기의 원룸식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부엌이 있고 오른편에는 텔레비전과 소파, 테이블이 있고 소파 뒤로는 침대가 있다.

 

그리고 그는 소파에 앉아서 그 앞 테이블에 놓인 과자 그릇에 가득 담긴 갓 구워진 쿠키를 들고 있었다.

 

‘...벌써 몇 개나 먹었더라?’

 

그릇 옆에는 먹다 남은 치킨이 든 상자와 빈 피자박스, 빈 맥주캔이 여러개나 있었다.

 

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오랫동안 방치한 텔레비전의 모니터는 까만 바탕에 초록색 글자로 <외부입력>이라는 글자가 깜박거렸다.

 

벌써 며칠이나 이런 생활을 한 거지?!

 

레오폴드는 과자를 입술로 물고 몇 번 우물거렸지만 머릿속이 혼돈의 도가니가 된 탓에 움직일 수 없었다.

 

운동도 하지 않고 이런거나 먹고, 야채도 과일도 피자에 토핑된 것 외에는 보지도 못하고.

 

아 세상에, 이런 폐인같은 생활이라니.

 

아무리 휴가의 진정한 재미가 불규칙한 생활이라지만 이건 건강에 안 좋잖아!

 

레오? 과자, 맛없어요?”

 

레오폴드 에반스는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 원흉을 짐짓 노려보았다.

 

이런 설탕 중독 같으니.

 

이렇게나 야채도 과일도 섭취하지 않는데 영양 불균형으로 죽기는커녕 살도 찌지 않는다.

 

아마 이것은 자신이 열심히 잔소리를 해서겠지.

 

....아니면 신의 편애거나.

 

레오, - 해봐요.”

 

멋모르고 입을 벌렸더니 물고있던 과자가 떨어졌다.

 

그걸 집어 다시 입으로 넣는데 발레리안 헌트는 아직 따끈한 과자를 여러개나 쥐더니 전부 레오, 그의 입으로 넣어 버리는 것이다.

 

아에이아-?!”

 

손을 더듬자 주스병이 만져진다.

 

컵에 따르지도 않고 벌컥벌컥 마시는데 옆에서는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는다.

 

레오폴드는 억지로 입에 든 것을 씹어 삼키더니 옆을 보고 한 마디 했다.

 

오늘 식사는 샐러드만 줄 거예요.”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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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XJ] 아무 날도 아닌 날

2015. 4. 12. 03:06 | Posted by 호랑이!!!




아무 날도 아닌 날이었다.

 

휴일도 생일도 기념일도 아닌 그런 날.

 

간만에 날씨는 좋고 따뜻해서 웨슬리는 외출할 때 으레 쓰곤 했던 중절모를 벗어 옆에 끼고 걸었다.

 

어제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둬서인지 겉옷의 소매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걸 매만져 펴면서 웨슬리는 어젯밤의 생각을 했다.

 

따뜻하게 데워진 방안의 공기와 음란하게 흔들리는 연인의 몸.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만인지도 모르겠다.

 

침대 옆에는 협탁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액자에조차 들어있지 않은 사진이 있었다.

 

앨범이라면 집의 책장에 꽂혀 있는데.

 

벌써 몇 년 전에 샀지만 아직 절반도 채우지 못한 앨범은 위에 먼지가 쌓일 정도였는데도.

 

그런데 청소도 하지 않는 협탁 위의 사진은 먼지가 쌓이기는커녕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젊은 날의 카인과 레나.

 

그리고 때마침 잡화점이 웨슬리의 눈에 띄었다.

 

...그래, 여태까지는 카인이 레나를 잊을 수 있게 노력했지.

 

그게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카인이 레나를 잊지 못하고 사랑한다고 해도 웨슬리는 그런 카인도 사랑할 수 있었다.

 

웨슬리는 잡화점으로 갔다.

 

 

 

 

 

간만에 날씨는 좋고 따뜻하니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날.

 

카인은 저녁부터 밤까지 웨슬리와 뒹굴었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으레 쓰던 도구가 든 협탁 위에는 흑백의 사진이 한 장, 액자도 없이 놓여 있었다.

 

카인은 그것을 쥐고 침대로 누웠다.

 

, 레나.

 

그대의 사진을 보며 웨슬리의 침대 위에 있어도, 이제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아.

 

어쩌면 지금껏 슬로언이 노력했던 것이 결실을 맺는지도 모르지.

 

슬로언은 벌써 몇 년이나 노력했으니까, 남자의 마음은 갈대라 이 말이야.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장 아래를 뒤져 벌써 옅게 먼지가 쌓인 앨범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는 앨범을 활짝 펼쳤다.

 

앨범에는 웨슬리와 자신과,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새삼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겨가며 사진과 거기 붙은 두줄짜리 메모를 보며 추억에 젖던 카인은 그 중에서 한 장을 꺼내들었다.

 

웨슬리와 함께 살기 시작한 날 집 앞에서 찍은 것.

 

그리고 그 자리에는 레나의 사진을 내려놓고 다시 얇은 비닐을 덮었다.

 

다시 앨범을 꽂아놓는데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웨슬리가 들어왔다.

 

다녀왔네.”

 

웨슬리는 들어오자마자 카인의 손에 납작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어서오게.”

 

자신의 마음에 웨슬리가 들어왔다.

 

자신의 예상보다 크게.

 

그 사실을 인정해서인지 카인의 마음은 꽤나 들떠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꺼내든 사진을 웨슬리 앞에 내밀었다.

 

슬로언, 앞으로 침대 옆의 테이블에 놓을 사진은 이걸세.”

 

그러자 웨슬리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카인은 테이블에 사진을 올려두고는 웨슬리가 준 선물의 포장지를 풀어보았다.

 

웬 건가?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네만.”

 

“...그냥 자네 생각이 나서 사 봤네.”

 

레나의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테의 액자.

 

카인은 그것을 들고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좋지 않은 때 사온 모양이지?”

 

“...전혀, 그렇지 않네.”

 

카인은 그 뚜껑을 열어서는 그 안에 자신이 빼 두었던 사진을 집어넣었다.

 

사진이 조금 더 컸지만 끝을 조금 접으니 무리 없이 들어간다.

 

팔을 쭉 뻗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기다리겠지만 그대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

 

나의 밤은 뜨겁지 않지만 따뜻하고 온화해.

 

그대와 하던 식사만큼 재미있지는 않지만 나는 즐거워.

 

그대와 있던 날은 아름다웠고 지금의 나는 행복해.

 

카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는 작게 웃음지었다.

 

“Auch er tief in mir einfiel.”

 

그는 내 마음 속에 너무나도 깊이 들어와 버렸네.




[티엔하랑] 조각 케이크

2015. 3. 9. 00:13 | Posted by 호랑이!!!

시작은 늘 그렇듯, 자그마한 것이다.

 

하랑이 건네는 것을 받다가 손가락이 스쳤다.

 

어쩌면 다른 것이 시작일 수도 있겠지.

 

시선이 스쳤다던가,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섞였다던가.

 

하지만 티엔이 유달리 반응한 시작은 손가락이었다.

 

손가락이 스쳤다.

 

그것뿐이었는데 하루 종일 그 손가락에 신경이 쓰였다.

 

아직도 하랑의 손가락이 닿아 있는 것 같고 쥐여 있는 것 같아 종이 하나도 그 손으로 들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머리카락.

 

연합의 홀든이 하는 머리를 보더니 저도 해보겠노라고 머리를 풀었는데 그런 모양으로 묶어본 적이 없다고, 티엔 그더러 묶어달라 댕기를 내밀었다.

 

티엔은 내 머리도 묶지 않는데 네 머리를 묶을 수 있겠느냐며 타박하면서도 하랑이 내민 댕기 대신 주려고 마련해두었던 리본을 꺼내들었다.

 

하랑이 내민 참빗을 받아들고 앞에 앉혀 머리카락을 쥐었는데, 머리카락이 손 안에서 미끄러졌다.

 

사라락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마냥 하루 종일 귓가에서 맴돌았다.

 

겨우 손가락일 뿐이었는데.

 

겨우 머리카락 흘러내리는 소리였는데.

 

거울을 보고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에 쑥스러워하다 이내 풀어내리는 모습이.

 

손가락에 닿은 온기가.

 

머리카락이 손 안에서 미끄러지던 촉감이.

 

그것들이 하나하나 너무 달콤해서, 마치 시럽에 담가 재운 케이크 같았다.

 

손가락과 한 줌의 머리카락.

 

작은 케이크.

 

케이크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

 

입에 댈수록 더 당겨오는 향기로운.

 

티엔은 앞서 걸어가는 하랑을 보았다.

 

머리채 끝에는 하던 댕기 대신에 자신이 선물한 리본이 감겨 있었다.

 

양과의 조각이 맛 좋았으니, 다음은 커다란 것을 손에 넣을 것이다.

 

티엔은 생각을 갈무리하며 그 뒤를 조용히 걸었다.

 

 

[to.복익님] 베르베르

2015. 3. 4. 00:01 | Posted by 호랑이!!!

해가 질 시간이지긴 하지만 밖은 매우 밝았다.

 

그러나 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을 젖히면 밝은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울텐데도, 방의 주인은 고집스레 커튼을 닫아두었다.

 

어두운 색의 두꺼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은 방 안의 불보다 밝았다.

 

겨우 문 하나 차이인데, 만약 누군가가 복도에 서 있다 그 방으로 들어섰다면 오래간 묵은 공기에 숨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라고 불리는 사람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딘지 권태로운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잘 맞는 정장에 바닥에 부딪혀 뚜벅뚜벅 소리를 내는 구두와 지팡이 대신 앞을 짚는 검은 우산.

 

그는 방 안으로 들어서서 문에 기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 장갑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 이탈리아.”

 

히죽 웃으면서 뒤를 이탈리아어로 말한다.

 

밝고 아름다운 도시.”

 

그는 거리에서 보았던 작은 소녀를 떠올렸다.

 

하얀색 천을 덧댄 분홍색의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볕 잘 드는 곳에 앉아 입에는 사탕을 물고 손에는 동화책을 들고 있었다.

 

위로 하나나 둘 정도 형제가 있었는지 책은 살짝 바래 있었고 몇 페이지는 끝이 접혔던 흔적이 보였다.

 

별로 예쁜 꼬마도 아니었고, 눈길을 끌 만한 무엇도 없었기에 베르나르는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느 페이지에 이르자 그 여자아이는 울었고, 어느 페이지에서는 웃었다.

 

여자아이가 그 짧은 책을 오래오래 읽을 동안 베르나르는 그 자리에 못박혀 그 아이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목도 외웠다.

 

Il Blue Bird.

 

독일어로는 ‘Der blaue Vogel’.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서점에 들렀었다.

 

아까 그 꼬마아이가 읽고 있던 것과 같은 책을 찾으려고 해 봤지만 똑같은 책은 없었다.

 

똑같이 바래고 똑같이 접힌 책이 갖고 싶었는데.

 

결국에는 같은 제목의 다른 책을 손에 들었다.

 

꽤나 세밀하고 멋진 삽화가 실린 책.

 

표지에 그려진 덩굴이 전부 몇 번이나 꼬였는지, 잎사귀가 몇 개나 달리고 꽃은 몇 송이나 피고 파랑새는 몇 마리나 날고 있는지 외울 정도로 보았지만, 표지조차 넘기지 못했다.

 

또 그런 것을 보고 있구나, 르미엘.’

 

환청처럼, 어릴 때 듣곤 했던 목소리가 기억 속에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목소리만 떠올렸을 뿐인데도 서늘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어 숨조차 조심스레 쉬어야 했던 분위기와 어머니가 즐겨 입던 드레스의 빛깔이 되살아나고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한 시선이 다가왔다.

 

베르나르는 결국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거기까지 회상했을 때 발치에서 작은 고양이 소리가 들려 현실로 깨어났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어느샌가 딱딱하게 인상을 썼던 베르나르는 나쁜 꿈을 꾼 사람이 그러하듯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깜박였다.

 

핸드폰을 보니 어느 동료가 한 전화였다.

 

, 심장이 뛴다.

 

그 박동을 새삼스럽다는 듯 느끼며 그는 전화를 받았다.

 

, 베르나르입니다~”

 

밝고, 어머니가 들었다면 경박하다고 할 만한 말투로 그는 전화를 받았다.

 

외울 정도로 보았던 동화책도, 소녀도, 서점에서 떠올렸던 그 생각들도.

 

모두, 곧 잊혀질 것이다.

 

어느샌가 그는 다시 권태롭기도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티엔은 제 몸이 묶인 것을 알아차렸다.

 

침상이 아닌 푹신한 침대에 몸이 묶이고 몸 위로 누가 올라타 있었다.

 

그 사람은 팔을 뻗어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고, 그제서야 하얗게 달빛이 쏟아들어왔다.

 

따뜻한 바람에 하얀 레이스 커튼이 나부끼고 티엔은 제 위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루시.

 

인생의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너머가 훤히 비치는 하얀 레이스로 된 원피스 같은 속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같은 색의 레이스로 만든 부채를 들고 웃고 있었다.

 

아 저 웃음.

 

아 저 야살스러운 웃음.

 

티엔은 미간을 찌푸렸다.

 

루시는 더 진하게 웃음을 피우며 펼쳐들고 가만히 부치던 부채를 접었다.

 

차르륵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루시는 그 위에서 몸을 앞으로 굽혔다.

 

몸을 앞으로 굽히자 가뜩이나 눈 둘 곳이 없어 곤란해하던 티엔은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반대로 돌렸지만 다시, 루시를 보게 된다.

 

하얀 레이스 부채가 턱을 간질이고 있었다.

 

고개를 이리 돌리면 부채는 제 뺨을 눌러 고개를 다시 저쪽으로 향하게 하고, 저리 돌리면 다시 루시를 보게 하고.

 

루시가 제아무리 능력자라지만 결국은 한낱 연약한 계집아이.

 

그런 계집아이가 부채로 농락하는 것에 제가 놀아나는 것인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턱 아래에 부채를 대는 것에 아예 눈을 감았더니 루시는 부채를 꽉 쥐었다가 제 뺨을 후려갈긴다.

 

, , , 부채가 제 얼굴을 때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결국 눈을 떴더니 루시는 부채를 활짝 펼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반투명하고 하얗게 반짝이는 부채 너머로는 빨간 입술이 어두운 방에 달빛만으로도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다.

 

티엔.”

 

꿈에도 잊은 적 없는 목소리는 제 이름을 부르고 루시는 제 뺨을 쓰다듬었다.

 

맞아서 트고 부은 뺨은 부드럽지 않은 손에 열을 식히고.

 

티엔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 그렇구나.

 

이 곳은 루시의 방이다.

 

티엔은 묶인 손과 발을 조금씩 당겨 보았다.

 

가위일까?

 

루시는 여전히 그 위에 올라앉아 이 모든 것이 재미있다는 듯 여전히 웃고 있었다.

 

티엔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루시도 제 뺨을 내리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이름을 부르면 깰지도 모른다.

 

손가락을 한 번 까딱하면 깰지도 모르고.

 

이대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면, 다시 눈을 뜨면, 목소리를 내면, 깰지도 모른다.

 

하지만 티엔은 그 중 무엇도 하지 않았다.

 



[윌라드렉] 기분을 알아차리는 것

2015. 3. 1. 03:34 | Posted by 호랑이!!!

런던 거리, 잘 닦인 도로 가장자리로는 가스등이 죽 늘어서있고 녹지 않은 눈은 도로 사이사이로 눌려 얼어붙어 있다.

 

메마른 눈이 광장 가득 떨어지고 있지만 눈을 뭉쳐 노는 어린아이들이나 뛰어다니는 귀여운 강아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중절모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차를 타거나 서로 지나칠 뿐.

 

얘깃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웃음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윌라드와 드렉슬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기차역에서 내려 마차에 올랐고 내리는 눈만큼이나 조용한 목소리로 윌라드가 목적지를 말한 이후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코트의 깃을 세우고 마차에 앉았다.

 

뚜껑이 없는 마차라 어깨며 모자 위로 눈이 떨어졌다.

 

우중충하고 칙칙한 런던.

 

눈조차도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

 

심지어 어느 곳에선가는 조금 녹은 눈이 질척한 웅덩이를 만들어 거리의 미관을 더욱 해쳤다.

 

드렉슬러는 힐끗 옆을 보았다.

 

원래도 잡담을 좋아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달리 말이 없다.

 

아까 기차 안에 나오던 히터 온도가 좀 높긴 했지, 겉옷을 벗었는데도 더워서 차장을 불러다 물어보니 고장났다고 했었고.

 

가다가 배가 고파져서 식당칸에서 식사를 주문했는데 시킨 샌드위치에선 벌레도 나왔고, 주문했던 음식이 전부 맛이 없어서 반도 안 먹고 나왔다.

 

결국 홍차와 커피를 마시고 고픈 배를 안고 자리로 돌아와 더운 바람이나 맞으며 왔는데... 원래가 금세 기분이 나빠지는 양반이니 뭐.

 

윌라드가 들었다면 남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할 만한 생각을 하며 드렉슬러는 묵묵히 앞만 보았다.

 

마차는 도착했습니다, 라는 말도 없이 목적지에 매끄럽게 멈춰 섰다.

 

삯을 지불하고 둘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드렉슬러는 품에서 물건의 이름을 적어둔 종이를 꺼내 점원에게 읽어주었다.

 

오늘 받기로 예약해둔 크루그먼입니다.”

 

하지만 크루그먼이라는 이름은 다음 주로 적혀 있는데요, 뭔가 실수가...”

 

드렉슬러는 뒤에서 윌라드 크루그먼 이사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대신에 이 술은 어떨까요? 예약하신 물건 못지않게 좋은 건데-”

 

드렉슬러는 되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뒤에서 윌라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거라도 주십시오.”

 

점원은 활짝 핀 얼굴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하면서 설명을 늘어놓았으나 윌라드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나 몇 번 끄덕일 뿐이었다.

 

딴 생각 하고 있구만, 저거저거.

 

드렉슬러는 또 저걸 어떻게 기분을 풀어주나, 했다가 뭔가를 깨달았다.

 

내가 왜 기분을 풀어줘야 해?

 

생각해보니 이거 또 화가 나네.

 

윌라드 저건 내 기분 따위 하나도 관심이 없을 텐데 난 뭐하러 삐지면 달래주고 비위 맞춰주고 있는 거지? 내가 언제부터 남의 기분을 신경썼다고!

 

드렉슬러는 뒤에 가만히 서 있다가 윌라드가 내미는 술 상자를 받아들고 다시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올랐다.

 

마차를 타고 협력 관계에 있는 회사로 가 안으로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런던에 오는 것은 또 오랜만이군요, 오는 길에 생각이 나 술을 한 병 샀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드렉슬러는 술 상자를 넘겼다.

 

나무 상자가 열리고 두터우며 고급스러운 보라색 천이 벗겨지자 안에서 호박색 빛을 내는 술이 든 병이 나왔다.

 

유리잔에 얼음이 딸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호박색 액체가 부어졌다.

 

건배.

 

드렉슬러는 한 모금 마시고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는 이 술이 마음에 든 모양이지만 제 입맛에 맞는 술은 아니었다.

 

딸그락.

 

평소보다 센 소리로 유리잔이 내려지길래 옆을 힐끗 보았더니 또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밖에 못 알아보는 것 같긴 하지만.

 

드렉슬러는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잔을 기울여 마저 비워냈다.

 

일을 끝내고 머물기로 한 호텔에 돌아와 잘 준비를 하는데 윌라드는 문득 적포도주 한 병을 꺼냈다.

 

한 잔 하시죠.”

 

됐어, 너나 마셔.”

 

“...안 마실 겁니까?”

 

드렉슬러는 잠깐 윌라드를 쳐다보았다가 빼앗듯이 잔을 낚아챘다.

 

일부러 취할 때까지 마시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우니 그 위로 체중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오.”

 

술 때문에 기분 좋은 열이 났고 차가운 시트가 닿는 것도, 스치면서 간질거리는 것도 전부 기분이 좋았다.

 

지그시 눈을 감는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어차피 자는 것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서인지 말소리가 들렸다.

 

오늘,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더군요.”

 

“...내가?”

 

그러자 익숙한 손이 닿아 왔다.

 

어차피 저밖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드렉슬러는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지나치게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