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무스 도련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오늘은 꽃이었다.
인근의 장미란 장미는 다 긁어모은 것인지 한아름도 넘는 꽃다발이 제 품에 안겼고, 방이 장미 화원이라도 된 마냥 장미로 가득차 온통 붉었다.
공사다망한 큰형은 종종 며칠씩 집을 비우곤 했는데 최근 들어 그런 날이면 이런 ‘선물’을 보내곤 하였다.
처음에는 새 옷(을 지을 재단사), 그 다음에는 최신 유행의 모자와 신발, 그 다음에는 은시계와 백금 시곗줄(아니, 크리스마스의 선물도 아니고 대체 왜?), 이오니아 산의 금빛나는 오렌지와 향긋한 포도주.
그리고 오늘은 장미라.
이글은 메이드가 나가자 품에 안았던 장미 꽃다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툭 찼다.
한껏 보기좋게 벌어진 연한 분홍색과 붉은색의 꽃잎이 바닥에 흩어졌다.
막상 집에 붙어있을 때는 담소는 고사하고 저녁식사 외에는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주제에 출장만 갔다 하면 특별히 가족애라도 생기는 건가, 웃기지도 않아서.
이글은 특별히 싱싱하고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골라 들고 한나에게 갔다.
“한나.”
“이글 도련님.”
“선물이야.”
가시를 쳐내고 잎을 잘라 다듬은 장미송이를 내밀고 한나가 앉으라는 얘기를 하기도 전에 테이블 옆에 의자를 끌어당겨 털석 앉았다.
“형이 이상해.”
“다이무스 도련님이요?”
“응-”
작은형은 항상 이상했으니까 새삼 이상한짓 한 대도 이상하지 않다구.
이글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곤 최근 받았던 선물에 대해 줄줄이 말하곤 짤막한 의견까지 덧붙였다.
“꼭- 남자가 여자 환심을 사려고 하는 멍청한 짓 같잖아. 조만간 직접 쓴 사랑시와 함께 반지라도 배달되면 딱이겠어.”
“또 가볍게 생각하는 거죠? 만약 진짜면 어쩌려구요.”
“뭐 어때~ 형 성격에 사귀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테고, 사랑하는 걸로 만족한다면 그러라고 하지 뭐. 내 용돈으로 살 수 없는 물건도 들어오는데.”
물론 내 용돈을 올려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이라며 시큰둥하게 앞주머니의 은시계를 꺼내 흔들었다.
진짜일 리가, 어디서든 인기 폭발하시는 그 다이무스 홀든이 이런 서툴러 빠진 짓을 할 리가 있나.
“조만간 비둘기 깃펜으로 쓴 사랑시가 도착하길 바랄게요.”
“뭐어-? 농담도!”
우웩, 기분 나빠.
이글은 킬킬 웃으며 다른 얘기를 꺼내려다 들리는 노크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노크 소리부터 절제된 인간은 자신이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나, 들어오라고 했더니 익숙한 얼굴, 다이무스 홀든이 들어왔다.
“이글, 네가 여기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유모.”
“어어- 나 여기 있어- ...?”
다이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엇을 봤는데?
시선을 따라가 보았더니 유모의 손에 들린, 자신이 준 장미.
아 설마.
아닐거야.
별거 아니잖아.
그 커다란 장미 다발과 방을 가득 메운 장미의 물결 속에서 딱 한 송이라고.
게다가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릴 적부터 키워준 유모인데!
아- 설마, 설마, 설마!!!
“저녁식사 시간이다. 이 내가 손수 널 찾아다녀야겠느냐.”
“나가, 나간다고.”
문을 닫고, 다이무스의 뒤를 따라가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화났다는 건 알겠다.
“...이글.”
“어, 어엉?”
“...장미 말이다, 싫던가?”
“에에, 그건 아닌데-.”
다이무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너를 생각해서 고른 선물이 함부로 다루어진다니 썩 기쁘지는 않더구나.”
함부로~?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까 장미 다발을 떨어뜨린 것도 있겠다, 찬 것도 있겠다, 거기에 보모에게 장미 준 것도 들켰고.
지금 한창 열받은 인간에게 변명을 해 봤자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밖에 안 되겠지.
아까 돌아볼 때 보니까 눈빛이 흉흉하던데 저기서 더 긁었다간 최소한 오늘 저녁은 다 먹었다.
다이무스는 팔에 달라붙는 이글의 팔에 힐끗 내려다보았다.
“형아야~”
다이무스는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가 들어가 착 달라붙는 것 같은 이 목소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 좋아해?”
농담의 껍질을 뒤집어쓴 속에는 이쪽을 바로 바라보는 시린 눈동자가 있었다.
심지어 떠 보는 것도 아닐 터, 의뭉을 떠는 것이다.
거기에 저 좋냐는 물음은 형제로서 갖는 당연스러운 호감을 묻는 것도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자신이 이것을 안다는 것을 이글도 안다는 것.
슬쩍 흘려버리는 일 따윈 불가능했다.
“...오늘 저녁은 다진 오리로 속을 채워 구운 송아지와 무화과를 넣은 케이크다.”
“형, 다이무스 형.”
이글이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내었지만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 질문을 무시하겠다고?”
“그렇다.”
이글은 다이무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째려보듯 날카로워진 눈이지만, 자신은 알고 있다.
다이무스 홀든, 저 천하의 냉혈한이 지금 자신의 질문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 아, 이거 정말 재밌는데.
놀리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
다만 형이 자신이 놀렸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만은 저도 모르니까.
제가 원하는 대로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면 좋겠지만 상처 입은 짐승마냥 달려들어 공격이라도 하면 저는 끝이다.
“형아~.”
“...”
“혀엉아아~”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처해하는 것이 다 보인다.
회피하지 않고 무엇에도 당당하게 맞서는 그 다이무스 홀든이 한낱 망나니 동생의 질문에 쩔쩔매다니, 이거 꽤 기분 좋지 않은가!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던 이글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밝은 식당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딱 다물었다.
시치미를 떼고 제 자리에 앉아 소스에 적신 송아지 요리를 덜어내는데 사용인 중 하나가 다이무스에게 무어라 전했다.
“뭐야, 형?”
“크리스티네가 물건을 전하러 왔다.”
헹, 퍽이나.
크리스가 진짜로 전하고 싶은 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겠지.
형이 그걸 모를까봐서- 아니, 모를지도.
모를거야 저 둔한 인간은.
이글은 속으로 히죽거리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크리스가 어떤 치마를 입고 왔을지도 궁금하지만 형아를 좀 더 놀려줄 것 없나 하여.
다이무스의 방문을 열었다.
빛깔 좋은 오크목의 책상이 깊은 색을 내며 자리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묵직한 펜이 있었고 양피지도 펼쳐져 있었다.
서류- 라기엔 빛깔이 좀 다른걸.
아니, 양피지도 아니잖아.
그냥 종이다.
그것도 빨간 하트와 리본 그림이 있는.
한창 아가씨들과 연인들에게 인기 좋다는 그거다.
“우와, 징그러.”
입 밖으로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그 냉혈한, 목석인 큰 형이 아기자기한 가게에 가서 이런걸 고르고 있다고?
“기분 나빠.”
뭔가 더러운 것이라도 집듯 손끝으로 편지지를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는데 뒤에서 뻗어나온 손이 그것을 잡아채 찢었다.
“이글.”
그 목소리에 이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형-...”
“식사중에 자리를 뜨는 것은 예의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아니, 형, 이건 말이야...”
“주인 없는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도 그렇지.”
다이무스의 표정은 얼음장 같았다.
읽어낼 수 없는데 냉기가 흘러나왔다.
다이무스는 손에 들린 상자를 내려다보더니 이글을 문 밖으로 떼밀었다.
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고 안에서는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이글은 그답잖게 일찍 일어나 식사 자리로 갔다.
여느 날처럼 다이무스는 셔츠와 조끼를 입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형!”
다이무스는 어제 같은 무표정으로 이글을 바라보았다.
“그... 있지... 잘 잤어?”
쭈삣쭈삣 인사를 건네며 맞은편에 앉았더니 대답 대신 신문을 거칠게 펴 든다.
“있지이, 내가 어제 기분 나쁘다고 한 건 말야...”
“되었다.”
“...형이 그런 편지지를...”
“되었다니까.”
신문이 파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쓸 줄은...”
파각.
신문이 반으로 접혔다.
“별로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형! 미안하다고! 내가 뭘 잘못했던!”
다이무스는 마시던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네 사과를 받아줄 기분이 아니다. 먼저 일어나마.”
다이무스는 자신의 방으로 가는 대신 서재로 갔고, 이글은 다이무스의 방으로 갔다.
아직 메이드가 청소하기 전인 방은 평소보다 어수선했고 바닥에는 나무판 조각이 널려 있었다.
이글은 벽난로를 보았다.
타다 만 종잇조각에는 빨간 하트와 리본이 그려져 있었다.
타다만 나무 위에는 어그러지고 녹은 은 목걸이가 있었다.
이 근처에서는 구하기 힘든 모양으로, 이글의 눈과 같은 색의 보석이 펜던트로 매달려 있었다.
형이 몹시 멀게 느껴졌다.
자신이 편안히 기대 응석을 부리던 관계가 마치 이 목걸이처럼, 자신의 손 안에서 우그러진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