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호랑이!!!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오리지널'에 해당되는 글 91

  1. 2019.09.01 아라벨라 29
  2. 2019.08.30 아라벨라 28
  3. 2019.08.17 아라벨라 27
  4. 2019.08.13 아라벨라 26
  5. 2019.08.07 아라벨라 25
  6. 2019.07.29 아라벨라 24
  7. 2019.07.23 아라벨라 23
  8. 2019.07.19 아라벨라 22
  9. 2019.07.14 아라벨라 21
  10. 2019.07.12 아라벨라 20
  11. 2019.07.07 아라벨라 19
  12. 2019.07.03 아라벨라 18
  13. 2019.06.27 아라벨라 17
  14. 2019.06.22 아라벨라 16
  15. 2019.06.18 아라벨라 15
  16. 2019.06.14 아라벨라 14
  17. 2019.06.07 아라벨라 13
  18. 2019.06.03 아라벨라 12
  19. 2019.05.29 아라벨라 11
  20. 2019.05.10 아라벨라 10

아라벨라 29

2019. 9. 1. 15:32 | Posted by 호랑이!!!

 

용모 준수, 성격 양호, 미래도 창창하고 승마 경기에서 2등을 할 만큼 운동도 잘 하고 젊음의 패기, 순수하고 솔직한!

 

!

 

비욘 자작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요즘 수도의 젊은이들은 수염을 밀어버리는 것이 유행이라고 했지만 영 익숙하질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것도 괜찮군.

 

사람이 너무 잘생기면 매력없다고 하니 자신 정도면 오히려 매력적이고 좋지 않은가!

 

그러니 그 분도 자신을 제일 아끼는 거겠지.

 

그래서 자신한테 중책도 주셨다.

 

렐리악 영애와 결혼하라고!

 

사실 렐리악 영애같이 사납고 안 웃는 여자는 별로 자기 취향이 아니지만 연애 때나 언제 자줄까 하고 여자 목줄에 매여 다니지, 결혼하면 어차피 남편 말을 들어야 할 테니 계속 웃고 있으라고 하면 된다.

 

아니면 여자를 더 만나거나.

 

시골에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기 힘들지만 수도까지 왔으니 어리고 예쁜 애들이야 넘쳐나지.

 

나 같은 사람을 세상이 가만두질 않으니 뭐 어쩌겠어.

 

백작위까지 달면 끝내주겠지?

 

..., 그러고 보니 마굿간에서 공주님도 나한테 마음 있는 거 같던데.

 

백작 달고 공주님 애인해도 괜찮을 거 같고...

 

자나미님 하시는 말씀이 사나기 공주는 외국으로 시집보내거나 변방 귀족에게 준다고 했는데 결혼 전까지 노는거면 나쁘지 않지, 돈도 잘 쓸거 같고.

 

아라벨라는 생긴 건 그럭저럭 괜찮은데 너무 딱딱해.

 

그런 애들이 침대에서는 좋다고들 하지만 침대까지 가다가 도망칠 거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뭐 그래도 한 번 해버리면 이후는 쉽겠지.

 

비욘 자작은 편지지와 향수를 들었다.

 

 

 

 

 

 

 

 

사나기 공주는 아라벨라에게 제 방 하나 아래층의 방을 주었다.

 

마르틴은 아라벨라와 함께 있고 싶어 했으나 자나미 왕자가 데려갔다.

 

누가 애 옆에 있어 줘.”

 

아라벨라는 자나미 왕자를 힐끗 보고는 인상을 썼다.

 

저 왕자의 영역에 자신의 순진무구한 동생이 간다고 생각하니 얼음 언 강가에 어린애를 놓아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내가 갈까?”

 

아니, 저기...”

 

마르틴이 우물거리다가 프루던스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저기,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같이 갈래?”

 

그래도 될까요, 아라벨라 아가씨?”

 

마르틴을 잘 부탁해.”

 

뭐야, 여기 아가씨가 안 가고?”

 

자나미 왕자는 아쉬운 듯 슈체른을 훑어보았다.

 

야성적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타이즈를 입은 다리에 시선이 멈추었지만 사나기가 헛기침을 하자 자나미는 마르틴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데리고 나갔다.

 

미친 거 아냐

 

저런 것도 왕족이라고.”

 

사나기가 툭 내뱉었다.

 

“...하하...”

 

웃기 싫으면 웃지 말게. 그런 걸로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사나기 공주님은 시대에 걸맞지 않는 분입니다.”

 

아라벨라의 말에 사나기는 짧게 코웃음쳤다.

 

그러니 다음 시대는 내 손으로 열어야지.”

 

그렇습니까.”

 

, 영애도 여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여자 왕이 그렇게 보편적인 이미지는 아니지요.”

 

누가 들었다면 당장 지하감옥에 갇힐 말을 하며 사나기 공주가 슈체른을 가리켰다.

 

그럼 저 자는. 영애의 시녀인가?”

 

호위입니다.”

 

여자인데?”

 

여자입니다.”

 

호신술을 익힌 시녀가 아니고?”

 

호위입니다.”

 

여자가 무슨 호위를 해?”

 

아라벨라는 무언가 이야기하려다 고개를 숙였다.

 

영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듣던 슈체른은 두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난 여자도 남자도 아닌데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화장품 요정의 엔딩  (0) 2020.01.10
아라벨라 30  (0) 2019.10.13
아라벨라 28  (0) 2019.08.30
아라벨라 27  (0) 2019.08.17
아라벨라 26  (0) 2019.08.13

아라벨라 28

2019. 8. 30. 00:40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괜찮니?”

 

왕자가 아라벨라를 넘어뜨린 뒤 그대로 돌아 나가자 일시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오늘의 주인공인 공작 부부가 무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첫 춤을 추고 인사를 나눈 뒤 떠나버렸다.

 

섣불리 누군가 다가가지도 않았지만 저 뒤에서 다가오는 사나기 공주와 아라벨라의 눈이 마주쳤는데.

 

다정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기억 속의 짙푸른 눈이 보인다.

 

아라벨라는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굳이 나타낼 필요가 없겠지.

 

“...어머니?”

 

그래, 아라벨라.”

 

하지만 아라벨라는 혼자 일어났다.

 

다시 음악이 연주되고 마르틴이 아라벨라에게 달려왔다.

 

마르틴, 잘 있었니?”

 

-”

 

마르틴이 걸음을 멈췄다.

 

눈이 등잔만큼이나 커져서 굳었다.

 

어머니의 재혼 이후 오년 만의 재회이니 달려가 안길만도 하건만.

 

마르틴은 머뭇거리더니 배운 대로 사피야의 앞에 섰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머니.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마르틴. 나도 보고 싶었단다.”

 

사피야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마르틴의 손을 꼭 쥐었다.

 

장장 5년 만의 만남이니 끌어안을 만도 하건만 이 만남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라서-”

 

아무리 그래도 어미가 되었으면-”

 

“-빨리 시집이나 보내고 싶겠지-”

 

들은 것일까 사피야의 손이 떨리더니 웃는 낯으로 아라벨라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니 가족끼리 담소라도 나누지 않겠니. 네 아버지도 저기에 계신단다.”

 

아라벨라는 사피야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셰필라, 그의 아버지 주위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아라벨라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려고 안달내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다음.”

 

바실리는 마련된 침대에 누워 업무를 보았다.

 

마악 서명이 끝난 서류는 날아가 다른 쪽에 쌓이고 새 서류가 날아와 바실리의 손에 잡혔다.

 

옆에는 찻잔과 식물 줄기로 만든 대롱이 있고 손에 묻어나지 않게 마법으로 처리한 다과가 수북하게 쌓여 바실리만을 기다린다.

 

찻주전자는 저절로 움직여 찻잔이 비기가 무섭게 채워주었고 언제 마셔도 좋을 따뜻한 온도로 유지되었다.

 

조명도 적절한 각도로 맞추어져 눈이 부시지도 어둡지도 않게 유지되고 공기도 적절히 서늘한 정도로 맞추어져 바실리는 편안하게 서류에 명령을 적었다.

 

꽤나 쾌적한 환경이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재잘거림만 아니라면.

 

어쩜, 이 침대 자그마한 것 봐. 너무 귀엽다.”

 

오필리어는 이런 걸 잘 하니까 말일세. 이걸 발톱으로 깎았다고 하네만 알고들 있었나?”

 

여기 침대보도 베개도 내가 만든 것이야. 베개 안에는 향초를 잘 씻고 말려서 가득 채웠지. 향이 좋지 않은가, 아가?”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버린 그들의 아가 바실리는 손으로 그렇다는 신호를 보냈다.

 

에멜라 주려고 또 만들었는데 좀 가져다주지 않겠나?”

 

바스락, 소리를 내며 서류가 접혔다.

 

“...슈체른이 이야기하지 않던가?”

 

? 무슨 일 있었어?”

 

바실리는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가 부스스하게 흘러내렸다.

 

에멜라가 죽었어.”

 

? ?”

 

편지에는 사고라고 적혀 있었다.”

 

오필리어라고 불린 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카롭게 빛을 발하는 하얀 눈동자에 분노를 담고.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나는 에멜라가 행복하도록, 후회 없이 살도록 어떤 독도 에멜라를 삼킬 수 없게 축복했다. 어떤 불운한 자연재해도 에멜라를 덮칠 수 없도록 마법을 걸었어! 어떤 우연도 에멜라를 다치게 할 수 없게... 에멜라가, 에멜라...!”

 

그러더니 오필리어는 바깥으로, 발을 구르며 나갔다.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 문 안의 용들은 눈을 감았다.

 

일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실리는 자신을 둘러싸고 엎드리거나 누운 용들을 보다 서류를 뒤집었다.

 

에멜라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면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을 것인데. 가던 중에 습격을 당했어.”

 

이런 것을 보았다며 바실리는 그림을 그렸다.

 

날개 없는 용.

 

머리는 아래를 향하고 몸이 위를 향하는 그림.

 

추락하는 용이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30  (0) 2019.10.13
아라벨라 29  (0) 2019.09.01
아라벨라 27  (0) 2019.08.17
아라벨라 26  (0) 2019.08.13
아라벨라 25  (0) 2019.08.07

아라벨라 27

2019. 8. 17. 11:59 | Posted by 호랑이!!!

 

그리고 공부도 못 하고, 뭐 하나 뛰어난 것도 없고, 하는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중에 아라벨라는 사나기 공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몇 사람 사이에 꼭 들 인물에게로.

 

사나기 공주는 화려하고 무겁기 그지없는 옷을 입고, 춤을 추지 않았지만 그를 위해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여전히 아무 소리나 떠들면서 자나미가 웃었다.

 

원래 사나기에게는 제 어미 이름과 외가의 이름, 그리고 여러 세력의 이름이 있었으나 고친다고 하기에 내 이름하고 비슷한 것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다 성별이 바뀐 이름들이니, 사실상 사나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

 

일로냐 공작은 있지만 일로리오라는 여자 공작은 없으니 말이야.

 

자나미 왕자님은.”

 

아라벨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 안의 자나미의 손이 꼼짝달싹 할 수 없이 잡히며 자나미 왕자는 끄으윽, 소리를 냈다.

 

잔인한 사람이군요.”

 

왕의 자리를 약속받은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면도 필요하지. 그렇잖은가.”

 

꼴에 혓바닥은 잘 놀리는군.

 

그런 생각을 하고 아라벨라는 자신이 불경한 생각을 하였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할머니 아래서 자라다보니 이렇게 된 건가? 아니면 용 때문에?

 

아니오. 자나미 왕자님께서 하신 일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고 기준 이상의 일이었습니다.”

 

아라벨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멍청한 소리를. 지금 이 나라의 왕자인 나에게 하는 것인가?”

 

자나미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낮아졌다.

 

아라벨라는 진한 금색 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저 낮아진 목소리는 그러는 것이 위협이 될 것이라고 알기 때문에 나온 목소리다.

 

그런 것에 아라벨라는 겁먹지 않았다.

 

그리고 짐작했다.

 

나는 원래부터 이런 인간이었구나.

 

사람에 맞는 말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나미가 몸을 홱 틀자 그 리드에 몸을 맡겼던 아라벨라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넘어졌다.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자나미의 표정이 더욱 거만해졌다.

 

멍청하기가 그지없구나 렐리악의 영애.”

 

 

 

 

 

 

 

자나미 블랙스캣 비 아메론!”

 

쿠트 왕비의 목소리가 쨍하게 높았다.

 

자나미는 성의없는 태도로 힐끗 쿠트 왕비를 쳐다보았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못난 놈. 렐리악의 영식 또한 제 누이를 의지하고 따르던데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아라벨라 렐리악을 넘어뜨려!”

 

이 못난, 못난 놈!

 

자나미 왕자는 고개를 양 옆으로 까딱까딱 움직였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나이 차이가 좀 있다 보니 영식이 영애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는 하더군요. 그래서 영식이 영애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처리할지도 말해주었구요. 영식이 영애를 우습게 알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집니다. 게다가 내일 친구들을 만나니 거기에 데려갈까 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듯, 자나미 왕자의 친구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집안에서 경쟁할 형제가 없는 자들은 오냐오냐 떠받들어져 거만하게 자랐고, 형제가 있는 자들은 그 형제에게 이상한 열등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쥐톨만한 권력이라도 얻어먹겠다고 몰려들어 아부하고 아첨하며 소란을 피우니 저잣거리에서는 이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가게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고 사람을 때리며 행패를 부리니 왕비는 자신이 가진 권력과 인맥으로 어르고 달래며 협박하여 없는 일로 만들려 노력하였으나 왕자는 반성하지 않았고 매일같이 소란스럽고 천박하게 굴었다.

 

술과 사람을 파는 가게에 출입을 하며 행실이 어떠하다 라는 것을 알았을 때 왕비는 현기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하였으니 왕비는 왕자의 친구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사실, 싫어했지만- 이런 때 왕자의 왈패 친구들은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아직 렐리악 영식은 미성년자이니 술은 안 돼.”

 

네에, 네에.”

 

렐리악에서 항의가 들어온다면 자나미 네 앞으로 들어가는 예산을 없앨 것이다.”

 

네에 네.”

 

쿠트 왕비는 목끝까지 차오르는 울화를 꾹 눌러 참았다.

 

그럼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자는 대답도 듣지 않고 떠나갔고, 쿠트 왕비는 문이 닫히자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이 코르셋이라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왕자까지 낳아서 왜 이런 고민들을 해야 하는지.

 

쿠트 왕비가 손짓하자 하녀가 다가와 왕비의 코르셋을 더 강하게 조였다.

 

왕비는 이를 악물었다.

 

렐리악만 없었다면.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9  (0) 2019.09.01
아라벨라 28  (0) 2019.08.30
아라벨라 26  (0) 2019.08.13
아라벨라 25  (0) 2019.08.07
아라벨라 24  (0) 2019.07.29

아라벨라 26

2019. 8. 13. 17:38 | Posted by 호랑이!!!

 

해가 지고 진행된 결혼식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새하얀 드레스에 새까만 정장에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리고 페데사 공작이 속삭이는 사랑의 말 전부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과 마르틴 뿐인지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는 극의 결말을 보듯 눈을 크게 뜨고 몸을 기울였다.

 

식의 맨 마지막에 귀족들이 다같이 나비는 잠들면 어쩌구저쩌구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참 놀라웠지만 그뿐이었고...

 

면사포를 쓴 미티우 페데사 공작부인은 분명 아름답기는 했지만 부러질 듯 졸라맨 허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라벨라만의 생각인지 수도 가까이에 산다는 미혼 여성 귀족과 기혼 여성 귀족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허리를 졸라매고 있었다.

 

심지어는 졸라맨 코르셋을 밖으로 드러내 장식을 단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한 마디씩 정숙하다느니, 조신해 보인다느니 하는 칭찬을 한다.

 

좀 의무적으로.

 

누군가 다가와 벽에 기대기에 보았더니 사나기 공주였다.

 

끔찍하지 않나.”

 

오셨습니까 공주님.”

 

불과 50년 전에 건강을 이유로 폐지당한 옷이건만 다시 유행한다는 것이.”

 

“50년 전이요?”

 

나도 그 때 일을 보지는 못했으나 듣기로는 아주 훌륭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하기는 공주의 나이가 아라벨라보다도 세 살이 어렸다.

 

그래, 그대가 물어보는 것은 어떠한가, 라고 다시 사나기 공주가 입을 열었다.

 

당시 코르셋을 폐지했던 데에는 자네 할머니가 공이 컸다고 하네.”

 

할머니가? 궁궐에 출입하던 사람이라고?

 

아라벨라의 의아한 표정에 사나기 공주가 무어라 덧붙이려는 순간 사람들이 우르르 물러나 길을 만들었다.

 

그 이상한 움직임에 고개를 틀자 자나미 왕자와 왕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레이디-”

 

자나미가 손을 들자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 연회를 알리기 위해 왕실 가족이 춤을 추어야 하지만 자나미 왕자에게는 약혼자도 연인도 없었다.

 

심지어 누구와 춤을 출 지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진다.

 

자나미의 손이 아라벨라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아라벨라. 나와 춤을 출 것을 명한다.”

 

꺄악, 하고 환호와 비명이 들렸다.

 

어쩜 귀엽기도 하시지.”

 

아직 서투신 거야.”

 

명령이라고 했어.”

 

재잘거리는 소리는 퍽 사랑스럽게 느껴졌을 터다.

 

저 멍청한 명을 받은 게 자신만 아니라면!

 

쿠트 왕비가 자나미의 앞을 팔로 가로막았다.

 

렐리악의 영애, 미안하기도 하지. 아직 왕자가 여자에게는 서툰 터라 무례하게 행동했구나. 아직 영애가 서툰 남자에게 귀여움을 느낄만한 나이는 아니니, 부디 저 명령이라는 말을 부탁으로 바꿔 들어주지 않겠나.”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마마.”

 

아라벨라는 드레스 대신 입은 긴 기장의 겉옷자락을 들며 무릎을 굽혔다.

 

쿠트 왕비가 부채로 건드리자 자나미 왕자는 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아라벨라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쿠트 왕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며 자나미 왕자의 등을 부채로 세게 찔렀다.

 

영애에게 잘 하는 것이 좋을 거다, 왕자.”

 

, 어머니.”

 

아라벨라와 자나미 왕자는 홀 중앙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쿠트 왕비는 왕에게 몸을 기울였다.

 

전하. 이번 대의 렐리악은 왕가에 호감이 있는 모양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그러한가. 그렇게 보이는군요.”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사들은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고 자나미는 아라벨라의 손을 홱 잡아당겨 기대게 했다.

 

왜 저한테 춤을 신청하신 거지요?”

 

그러자 자나미가 고개를 숙였다.

 

자네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서.”

 

꽤 그럴싸하게 낮춘 목소리다.

 

하지만 아라벨라는 부족한 눈치로도 자나미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 수 있었기에, 떠 보기로 했다.

 

사실 제가 아니라 사나기 공주님께 신청하려던 것은 아닙니까?”

 

사나기? , 그런 멍청이 따위.”

 

이 왕자는 생각을 대장으로 하나?

 

공주님은 고귀한 피에 걸맞는 분처럼 보입니다만. 사나기 공주님께 그런 말을-”

 

자나미의 눈이 아라벨라에게 멈췄다.

 

금빛 눈은 짐승의 것마냥 이질적이다.

 

그러고 보니, 영애는 소문에 무지하지.”

 

어쩔 수 없으니 말해주마고 자나미가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사나기의 어미는 사나기가 눈을 뜨기도 전에 죽었는데, 나의 어마마마를 보고 어마마마, 하고 쫓아다닌다. 밀어내고 부정해도 어찌나 고집이 센지.”

 

네에?”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사나기는 자나미보다 어렸고 사나기 공주의 어머니는 왕비였다.

 

전 왕비며, 적통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주를 후궁 소생 왕자가 저렇게 부르다니.

 

아라벨라는 당황스러움에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이름을 시키는대로 바꾸면 우리 가족에 넣어준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바꾸셨나요?”

 

자나미가 웃었다.

 

! 바꿨다, 그 멍청이는.”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8  (0) 2019.08.30
아라벨라 27  (0) 2019.08.17
아라벨라 25  (0) 2019.08.07
아라벨라 24  (0) 2019.07.29
아라벨라 23  (0) 2019.07.23

아라벨라 25

2019. 8. 7. 03:46 | Posted by 호랑이!!!

 

비욘 자작이 아라벨라의 가슴팍을 힐끗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여자들은 말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요. 원래 백마가 더 까다롭습니다.”

 

아라벨라가 그 손을 보지도 않고 일어나자 비욘 자작은 이를 꽉 다물었다가 다시 히죽 웃으며 아라벨라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제가 털어드리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지만 차마 때릴 수 없었다.

 

바이언드 백작이 이 쪽을 빤히 보고 있었기에.

 

그러자 신이 난 비욘 자작은 아라벨라의 허리를 잡고 엉덩이로 손을 가져가 밀어올리려고 했다.

 

그만.”

 

저는 아라벨라 아가씨를 도와주려는 것뿐입니다.”

 

미티우 영애가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나?”

 

, 저 백마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까다로운 말 보다는 성질 순한 밤색 말이 좋지 않겠습니까. 말 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백마가 갈색보다 성질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 아가씨가 지금 넘어지기도 했겠다, 백마 고삐를 이리 주십시오.”

 

저 아가씨라고?

 

아라벨라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자신의 신발 자국이 비욘 자작의 발등에 찍힌 것을 보았다.

 

말 정도는 탈 줄 압니다.”

 

지금 궁 안에 사람도 많은데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히죽히죽 웃는 얼굴에 자연스럽게 허리로 손이 갔지만 오늘 아라벨라는 검도 총도 무엇도 가져오지 않았기에 다시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백마가 성질이 좋지 못하다는 건 처음 알았군요.”

 

아 뭐 말 안 타는 사람들이야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자들은 책에 나오는 기사들이 하얀 말을 타고 있으니까 다 하얀 말을 보는 모양이지만 자고로 가장 순한 말은 대개 밤색이고 눈을 보면 눈도 둥글둥글 순한데 조용하고 사람을 보면...”

 

기르는 사람이 잘못 길러 놓고 말을 탓하다니.”

 

렐리악 영애. 모르면 잘 들어야 할 거 아닙니까.”

 

아라벨라는 비욘 자작을 힐끗 보다가 백마의 등에 손을 얹고 훌쩍 가볍게 올라탔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배를 차며 고삐를 들자 좁은 곳에서 백마는 번쩍 앞다리를 들어올렸다.

 

말발굽이 올라갔고.

 

비욘 자작은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아아악! 아아아아악!!! !! 아아악!!!!”

 

“...푸핫.”

 

사나기 공주는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비욘 자작은 악악 비명을 지르다 바이언드 백작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고 여전히 머리보다 높은 곳에 말발굽이 있자 움찔 움츠렸다.

 

이리로, 뒷걸음질로 나오거라.”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라벨라는 하얀 말이 두 발로 서 있게 하다가 폴짝 뛰어 방향을 틀게 했고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사나기 공주님, 시간이 지체되어 죄송합니다.”

 

재미있는 것을 보아 즐거웠네. 어서 갈까.”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에 비욘 자작이 귀까지 빨개졌다.

 

“...너는 페데사 공작님의 소풍에 오지 말거라.”

 

바이언드 백작은 혀를 찼다.

 

왜요!”

 

사납게 돌아보는 조카는 나이가 저만큼이나 먹었는데도 아직 멍청했다.

 

그리고 아라벨라한테 잘 하고.”

 

내가 뭘. 여자란 자고로 웃는 얼굴로 예, , 하면 되지요.”

 

그분이 너한테 그 아가씨 마음을 얻어 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칵 퉤.

 

비욘 자작은 땅에 대고 침을 뱉었다.

 

말 걸어주지, 처음 봤을 때 산책도 가자고 해 줬지, 자기한테 맞고 나서 때리지도 않았지.

 

이만하면 상냥하고 다정하고 착한데.

 

게다가 잘생겼고, 허벅지도 탄탄하지.

 

비욘 자작은 제 허벅지를 툭 쳤다.

 

비싼 척 하는 거예요.”

 

바이언드 백작은 조카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가 등을 툭툭 두드렸다.

 

나중에 돈이랑 공연 티켓을 줄테니 노력 좀 해라. 여자란 자고로 오냐오냐 떠받들어주면 다 넘어오게 돼 있어. 칭찬도 좀 해 주고.”

 

, 비욘 자작이 다시 침을 뱉었다.

 

그러죠 뭐.”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7  (0) 2019.08.17
아라벨라 26  (0) 2019.08.13
아라벨라 24  (0) 2019.07.29
아라벨라 23  (0) 2019.07.23
아라벨라 22  (0) 2019.07.19

아라벨라 24

2019. 7. 29. 21:09 | Posted by 호랑이!!!

 

사나기는 마굿간으로 갔다.

 

마구간지기가 의자 위에서 하품을 하다 벌떡 일어났다.

 

이를 어쩌지요, 지금 두 분께서 타실 말이 없습니다.”

 

없다고?”

 

델라 미티우 영애와 기드온 공작과 그 시중인들이 말을 먼저 빌려서요.”

 

그럼 저 말은?”

 

아라벨라가 갈기를 땋은 말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 말은 안 돼. 얼마 전에 그림자 숲에서 사로잡아 온 야생마인데 사납기 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는 여기 있어야겠구나.”

 

그나마 나의 말은 있건만, 하고 사나기 공주가 손을 뻗자 연한 금색을 띠는 말이 다가와 코를 비빈다.

 

저 말이 다섯 마리는 되건만 미티우 영애나 기드온 공작이 오면 한 마리만 양보해 달라고 해야겠구나.”

 

아라벨라는 공주를 돌아보았다.

 

공주 정도 되면 신분을 내세워 말을 가져가도 될 텐데.

 

어쩌면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나미 왕자를 보았을 때는 이 나라의 미래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둠 속에서 발광해파리라도 한 마리 본 기분이다.

 

희미한 녀석이지만.

 

그 때 문이 열리고 남자가 둘 들어왔다.

 

하나는 아라벨라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아라벨라를 보자 눈가를 씰룩이더니 우스꽝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준우승남.

 

사나기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아라벨라는 기억을 살렸다.

 

비욘 자작에게는 바이 뭐뭐라는 숙부가 있다고 들은 거 같기도 하고.

 

나이차도 있어 보이는데다 미묘하게 닮았으니 아마 그 사람 같다.

 

바이언드 백작이군.”

 

바이언드였구나.

 

렐리악 영애도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신 것 같군요.”

 

아라벨라가 대꾸하자 비욘 자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우스운 표정을 지었다.

 

만남의 회포는 길게 풀고 싶지만 지금 좀 바빠서요. 기드온 임펄 루 페데사 공작님이 말을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바이언드 백작은 비욘 자작을 돌아보았지만 비욘 자작은 여전히 히죽이죽 웃고 있었다.

 

지금 공주님 앞에서 공작을 높여 부른 것입니까?”

 

아 뭐, 그렇게 되었네요. 마음 상하셨습니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나기 공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다가 쯔쯔 혀를 찼다.

 

이 나라 왕권이 바람 앞 촛불과도 같구나. 한낱 촌의 자작이 왕의 딸을 우습게 보다니.”

 

네에? 저는 그럴 의도가 아니옵고..!”

 

자네 의도는 상관없어. 자네는 지금 나의 아바마마를 모욕하였네.”

 

아닙니다! 어쩌면 그렇게 곡해해서 듣습니까?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 것인가?”

 

아니 저는! 하고 자작이 입을 다물었다.

 

바이언드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제 조카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벽지에서 말이나 타다 보니 예의에 무지합니다.”

 

그럼 왕궁에는 뭐하러 데리고 온 건가? 일곱 살 정도 되었나?”

 

“...사실은, 올해로 서른 셋이 된답니다.”

 

바이언드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아라벨라는 백작의 구두가 앞으로 나서려고 하는 자작의 발등을 밟는 것을 보았다.

 

용서를 내려 주지. 대신 이 말은 한 필 가져가겠다.”

 

사나기 공주는 금빛 말 위에 올라타고 새하얗게 반짝이는 백마의 고삐를 아라벨라에게 넘겼다.

 

아라벨라가 올라타려는 순간.

 

으악!”

 

아이구 저런, 괜찮습니까.”

 

분명 뭐가 걸렸는데!?

 

아라벨라는 흙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6  (0) 2019.08.13
아라벨라 25  (0) 2019.08.07
아라벨라 23  (0) 2019.07.23
아라벨라 22  (0) 2019.07.19
아라벨라 21  (0) 2019.07.14

아라벨라 23

2019. 7. 23. 18:19 | Posted by 호랑이!!!

 

어마마마를 뵙습니다.”

 

마마를 뵙습니다.”

 

방금 인상 쓴 거 같은데

 

아라벨라는 사나기 공주를 힐긋 눈짓하면서 왕비에게 무릎을 굽혔다.

 

올해로 마흔 되는 왕비는 살짝 희끗해진 갈색 머리를 길게 땋아 틀어 올리고 허리를 졸라맨 디자인의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가냘프고 우아해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허리가 얇지?

 

옆은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사랑하는 공주.”

 

보이진 않았지만 공주가 인상을 더 깊게 썼다.

 

그러나 고개를 들 때 공주는 가면처럼 완벽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셰필라 렐리악의 딸, 아라벨라 렐리악입니다, 어머니.”

 

혼자 왕궁으로 온 것이더냐?”

 

아라벨라도 명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동생과 함께 왔습니다.”

 

이 몸은 쿠트 카 아메론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서로 어울릴 생각은 않고 여자 따로 남자 따로 행동을 한다지. 그런 행실은 결국 화합을 이루지 못해.”

 

그러하옵니다 마마, 하고 둘이 떨떠름하게 대답을 하자 왕비가 아무것도 끼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렐리악 영애는 언제까지 수도에 있을 생각이지? 괜찮다면 내일이나 모레 나의 초대를 받아주겠나?”

 

어마마마, 렐리악 영애는 저와 내일 영애들의 모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있는 건 아니잖니.”

 

하루 종일 있을 것입니다.”

 

쿠트 왕비의 손에서 부채가 촤악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그럼 모레를 내가 약속해야겠구나. 모레 점심 즈음 나에게 오거라. 그리고, 지낼 곳이 지금 좁다고 들었는데 황궁의 손님방이라도 좋다면 내어주겠다.”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하지만 저희의 분수에 맞지 않으니 부디-”

 

오게. 사나기, 방을 안내해주도록 하거라. 자나미 녀석을 시키고 싶다만 이 애는 또 어디선가 놀고만 있겠지.”

 

삼일 내내 불편한 옷을 입고 다니라고? 게다가 가져온 옷이 두 세 벌 밖에 없는데?

 

하지만 아라벨라는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만족한 표정으로 왕비가 떠나자 사나기 공주가 혀를 찼다.

 

“...아무튼 내일 영애끼리 모임이 있으니 참가하게.”

 

, 공주마마.”

 

그놈의 마마 소리는 되었어. 사나기 공주님이 좋겠노라.”

 

사나기 공주는 왕궁 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너른 정원이나 도서실이 있고 집무실이 있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쨍그랑쨍그랑 소리와 무언가 부서지고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한 방도 몇 개 있었다.

 

어린 왕족을 위한 놀이방이나 갑옷 따위를 전시해둔 방도 있고 어디를 가나 하늘과 천국을 테마로 꾸며진 방은 보석이나 금, 은으로 장식되었다.

 

사나기 공주는 자신의 별채로 데려가겠다며 마차를 불렀다가 지금은 결혼식 준비로 마차와 말을 꺼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민들에게도 공개되는 결혼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설치된 마도구 때문이라나.

 

많이 멀다면 말을 타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사나기가 홱 돌아보았다.

 

말을... 좋아, 그러도록 하지.”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5  (0) 2019.08.07
아라벨라 24  (0) 2019.07.29
아라벨라 22  (0) 2019.07.19
아라벨라 21  (0) 2019.07.14
아라벨라 20  (0) 2019.07.12

아라벨라 22

2019. 7. 19. 01:53 | Posted by 호랑이!!!

 

이어진 티타임은 서로를 살펴보는 시간에 가까웠다.

 

비록 자나미 왕자는 마르틴에게만 관심을 가졌지만.

 

왕자가 아라벨라에게 보이는 예의와 관심은 왕자가 먼 영지의 아가씨에게 보이는 무난한 것일 뿐.

 

얼굴은 잘생겼지만, 저 정도 잘생긴 건 렐리악 백작령에도 하나 있었다.

 

아라벨라는 고개를 돌리다 사나기 공주와 눈이 마주쳤다.

 

이 쪽은 너무 과해

 

이 사람에게 발광 마법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빤히 쳐다본다.

 

사람이 6초간 눈을 깜박이지 않고 보면 뭐랬는데.

 

아라벨라는 원래 다른 것을 보려고 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왕자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공주는 자신에게 관심이 너무한가.

 

중간이 없다, 살려주세요 할머니.

 

아라벨라는 마음속으로 바실리를 찾고는 공주에게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돌렸다.

 

, 공주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 지금 묻히는 중이라네.”

 

? 뭘요?”

 

내 사랑.”

 

그리고 윙크.

 

아라벨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 감사합니다...”를 입에 올릴 수 있었다.

 

비록 마지막의 는 질문처럼 끝이 한없이 올랐지만.

 

그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는 절도 있었으나 꽤나 다급했고 요란해서 허락이 떨어지니 문이 홱 열렸다.

 

시종장이다.

 

자나미 왕자님, 사나기 공주님. 지금 결혼식장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왕족들은 편히 있으라며 아라벨라와 마르틴의 잔에 음료를 채워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방안에는 마르틴과 아라벨라만 남겨졌고 마르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동그란 이마에 손을 붙이고 이리저리 멀리를 살펴보더니 쪼르륵, 마르틴은 자리로 돌아왔다.

 

마르틴이 알았다면 나 이제 애 아니거든!’이라고 했을 수많은 수식어를 붙이며 아라벨라가 미소를 지었다.

 

여긴 참 예쁘지? 뭔가 마음에 들어?”

 

마르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의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조금 이상해.”

 

뭐가?”

 

그동안 역사서나 왕실 건물에 대한 용도를 읽어 보았는데,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건 다음 대 후계자나 왕밖에 없어. 후계자가 아닌 왕족도 예외는 아니잖아.”

 

아라벨라는 마르틴이 본제를 꺼낼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이상하고, 그걸 왕자랑 공주가 손수 처리하는 게 더 이상해. 여태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아무리 델라? 그 사람과 공작의 결혼이라고 해도.”

 

공작의 전적이 좀 많잖아. 왕이 아끼는 게 아닐까?”

 

벨라 누나. 우리 나라에 공작은 둘 뿐이야. 하나는 현재 임금님의 동생이고 다른 하나는 남작가 출신임에도 한 일이 많아 공작위에 올려준 페데사 공작이지.”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나미 왕자는 이렇다 할 업적이 없어. 페데사 공작을 이런 때 왕궁에서 결혼시키면 다음 후계자로 페데사 공작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려.”

 

마르틴은 머리가 좋다.

 

아라벨라는 별 생각 없이 굴었던 것을 반성하며 마르틴의 귀에 속삭였다.

 

그런데 자나미 왕자가 한 게 없어?”

 

방 밖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며 사나기 공주와 자나미 왕자가 들어왔고 마르틴과 아라벨라는 뒤에서 이야기하다 찔린 사람들처럼 과하게 웃는 얼굴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급한 일이 생겨 둘을 놔두어 버렸군.”

 

저희는 괜찮습니다. 덕분에 왕궁을 볼 수도 있었지요.”

 

아라벨라가 말하자 사나기가 손을 내밀었다.

 

왕궁이 비싼 돌들로 만들어지기는 했지. 좀 더 자세하게 구경하겠나?”

 

아라벨라가 거절할 틈도 없이 사나기 공주는 아라벨라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마르틴은 저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클 자나미를 올려다보았다.

 

자나미는 폭풍처럼 뛰쳐나가 채 닫히지도 않은 문을 보며 웃었다.

 

마르틴의 눈에 그것은 비웃음이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반짝이는 것엔 사족을 못 써.”

 

그리고 마르틴은 굳었다.

 

할머니가 돌아온 후 그 백작저에서는 누구든 누구에게든 저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못 들었는데.

 

저 말에 악의가 있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자나미가 아라벨라를 낮잡아보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기에 마르틴은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옷을 꽉 잡았다.

 

누나는.. 아라벨라 누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하지만 자나미 왕자는 마르틴의 침묵을 다른 것으로 해석했는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등을 툭 쳤다.

 

누나가 어릴 적에 겁을 많이 준 모양이지? 너무 무서워하지 말게. 어차피 이제 힘도 자네가 더 세졌을 거고, 여차하면 한미한 집에 시집보낸다고 하면 덜덜 떨면서 자네 말을 들을 거야.”

 

한미한 집에... 시집이요...?”

 

그래. 지참금도 없이 보낸다고 하면 더 효과가 있겠지. 아직 자넨 어리니 여자 다루는 걸 모르겠어? 내가 나이도 좀 있으니 알려줘야겠는걸?”

 

자나미가 마르틴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아직 마르틴은 잘 몰랐지만, 느낀 것은 혐오였고.

 

당장 팔을 털어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4  (0) 2019.07.29
아라벨라 23  (0) 2019.07.23
아라벨라 21  (0) 2019.07.14
아라벨라 20  (0) 2019.07.12
아라벨라 19  (0) 2019.07.07

아라벨라 21

2019. 7. 14. 12:41 | Posted by 호랑이!!!

 

금과 은을 녹여 테두리를 만들고 은은한 푸른빛과 섞인 구름과 천사들이 천장에 그려져 있다.

 

붉은 색으로 칠한 벽지에 뜬 것은 금색 해이고, 푸른 색으로 칠한 벽지에 뜬 것은 은색 달이고.

 

창문에는 다채로운 색유리를 짜맞추고 등은 요정이나 해, 천사 모양이다.

 

마르틴은 벽에 박힌 금과 보석가루를 살짝 쓸어보다가 아라벨라가 툭 치자 손을 멈추었다.

 

렐리악의 두 분이 오셨습니다.”

 

안내하던 시종장이 문을 두드리며 방문을 알리고 문이 활짝 열렸다.

 

듭시랍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두 명의 사람이 넓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붉은 색으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아래의 진한 금색 눈과 더불어 빛났고 머리며 몸에 감은 보석들은 사람을 돋보이게 했다.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의 장녀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입니다.”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의 장남 마르틴 셰필라 렐리악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묘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와 망토를 입은 쪽이 먼저였다.

 

자나미 블랙스캣 일로냐 알퀼레오 말리우 비 아메론.”

 

사나기 라즈켓 일로리오 알퀼레나 멜리테 수 아메론.”

 

일로리오 대공작이며 말리우 후계이며...”

 

다들 날 사나기 공주라고 부르네.”

 

그러자 자나미가 사나기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아!”

 

네 얘기는 재미 없어. 어디어디 대공작이고 후계자고 무슨 무슨 직위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의 주인이고 하는 얘기만 한참이잖아. 어차피 잔이라고 불러달라고 할 거면서.”

 

맞아! 하지만 말을 끊다니 사나기는 바보야.”

 

자나미는 멍청이야.”

 

마르틴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라벨라보다 한두어살 많아 보이는 공주와 왕자는 마르틴과 아라벨라 사이에서도 안 하는 격의 없는(최대한 예의바르게 표현했을 때) 말과 행동을 보였다.

 

이 일에 익숙한지 시종장은 아라벨라와 마르틴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마실 것을 내오겠습니다.”

 

... , .....”

 

.”

 

시종장이 당겨주는 의자에 앉고 널찍한 방 안에 넷만 남자 공주와 왕자의 고개가 다시 이 쪽으로 돌아왔다.

 

아라벨라가 봤을 때는 공주가 이긴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사나기, 저 쪽은 잔. 공주나 왕자를 뒤에 붙여도 되네.”

 

아라벨라는 손가락을 살짝 들어 아직도 벌어진 마르틴의 턱을 닫아 주었다.

 

마르틴 셰필라 렐리악...입니다...”

 

들었네.”

 

음료와 과자가 나왔다.

 

레몬은 좋아하는가? 이번에 들어온 것이 향이 너무나 좋기에 주방장이 말리고 절여 놓았지.”

 

향신료 향이 나는 유리 저그는 얼음으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아래를 보니 보글거리는 탄산이 바닥에서 표면까지 연이어 상승한다.

 

송글송글 맺히는 물방울은 주르르 떨어져서 하얀 레이스를 적셨다.

 

네에, 좋아합니다.”

 

아라벨라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자나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영애 건 내가 따라주지. 파티에서도 차 모임에서도 어디서도 본 적이 없으니 궁금해 죽겠어.”

 

변방의 영지에서 지내느라 수도의 분들과는 연이 없었는데 이렇게 두 분을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은테를 두른 잔에 레모네이드가 찼다.

 

일어선 김에 자나미가 레모네이드를 나머지 잔에도 채웠다.

 

놀랍군요. 저는 왕자님이 따라주실 줄은 몰랐네요.”

 

영애한테 내가 다정하다는 것을 좀 어필하고 싶었어.”

 

자나미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둘은 지금 바실리 전 렐리악 백작령에 있었다고 들었네. 거기 산이 아주 멋지다지.”

 

사나기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러합니다.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온갖 식물이 자라며 푸른 바람이 불지요.”

 

그러자 자나미 왕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른 바람이라니! 아주 시적이야. 렐리악 부인이 말하기를 영애는 활달하다고 하더니 역시 남의 말만으로는 알 수 없어.”

 

렐리악 부인이라면 사피야를 말함인가.

 

마르틴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활달하다는 말은 보통 여성 앞에는 안 붙이니까...

 

그러니까 어머니가 저 요란한 왕자한테 누나 뒷담을 했다는 이야기야?

 

어머니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힐끗 올려다본 아라벨라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 있었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3  (0) 2019.07.23
아라벨라 22  (0) 2019.07.19
아라벨라 20  (0) 2019.07.12
아라벨라 19  (0) 2019.07.07
아라벨라 18  (0) 2019.07.03

아라벨라 20

2019. 7. 12. 00:15 | Posted by 호랑이!!!

 

말 다섯 마리가 수도를 향해 떠났다.

 

이전에도 호위 임무를 맡은 적 있던 스파크는 이번에도 밤색과 하얀색의 얼룩말을 타고 맨 뒤에서 달렸고 맨 앞에는 새까만 흑마를 탄 슈체른, 그 다음은 구름처럼 하얀 데일라와 아라벨라가, 그 뒤에 마르틴과 프루던스가 달렸다.

 

황실에서 온 편지는 우선 렐리악 백작 저택으로 갔다가 렐리악 전 백작 저택으로 왔기에 거기에 씌인 날짜는 마차로 가기에는 지나치게 빠듯했다.

 

슈체른이 그 이야기를 듣고 수도 근처의 적당한 곳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사양하는 바람에 며칠이나 우직하게 말을 타게 되었다.

 

그 중에 신난 것은 삐(혹은 낙트) 뿐으로.

 

마르틴의 가방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풍경이 지나가는 것을 삑삑 즐거워했다.

 

그나마 야숙은 하지 않았지만 마차 여행에서 걸리는 시간의 절반으로 시간을 단축한 다섯은 마침내 수도로 들어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곧장 왕실에서 지방의 귀족들에게 제공하는 저택에 들어섰다.

 

저택은 거대한 담장 안에 총 다섯 개 건물로 나뉘어져 있는데 대개는 한 가족이 한 건물을 사용하지만 신년회나 망년회, 그 외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건물에 비해 사람이 많아 한 건물에도 네다섯 가족은 들어간다고 한다.

 

아라벨라도 어릴 때에는 한두 번 와 보았지만 신년회에 왔다가 감기를 심하게 앓은 뒤에는 셰필라(아버지)가 수도행을 금지시켰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은 것은 못 보았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아라벨라와 마르틴 일행에게 겨우 문 하나로 작은 방과 이어진 방만 하나 제공되었다.

 

무슨 행사라도 있나요?”

 

제공하는 식사 표에서 과일 항목에 동그라미를 치며 마르틴이 묻자 저택의 고용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세기의 로맨스가 결실을 맺으려고 하고 있답니다! 델라 아드무엘 미티우 아가씨와 기드온 임펄 루 페데사 공작님의 결혼식이 모레 황궁에서 이루어진답니다.”

 

미티우?”

 

아가씨와 도련님은 못 들으셨을 겁니다. 조그만 동네의 자작 집안이거든요. 수도에도 거의 못 왔고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페데사라면 알고 있다.

 

특유의 수완과 비상한 머리, 천재적인 검술 실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시국을 읽는 눈까지 있다고 하는 유명한 사람.

 

남작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한 것이 여섯 살, 남작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 일곱 살, 자기만의 사업을 벌였는데 대성공 한 것이 열 살, 그것을 바탕으로 많은 일들을 해냈으며 왕이 위험했을 때 구해냈고 이루어낸 업적들을 바탕으로 페데사를 공작 지위로 올린 것이 겨우 그의 나이 스물의 일이다.

 

델라 아가씨와 기드온 공작님의 사랑 이야기와 각자의 이야기는 지금 수도 어디를 가든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델라 아가씨는 노래도 잘 부르고 만들어낸 노래도 몇 가지나 되는데 그 노래도 어디서든 들을 수 있지요. 오르골로도 팔고 있으니 구입하시면 되겠습니다.”

 

미티우 영애에 대해서 아는 거 있나?”

 

그러자 그 고용인은 눈을 반짝이며 델라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무언가)을 늘어놓았다.

 

귀족이지만 아래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늘 베풀고 힘들었던 때를 잊지 않으며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두 딸을 데려온 계모가 델라를 못살게 굴었고 괴롭히고 노예처럼 대했는데 항상 밝은 미소를 지으며 꿋꿋하게 노력했고 어떻고, 그러다 기드온 공작을 만났는데 둘이 첫눈에 반했으나 델라는 스스로의 모습에 부끄러워 도망을 쳤고, 기드온 공작은 델라 영애가 신고 있던 마법의 금 신발을 주워... 지금은 예비 공작부인이라 기드온의 성에서 있었는데 못된 시녀들이 괴롭히고 지체 높은 영애들이 박대하고 산적을 만나고 하는 어마무시한 일들이 있었으나 정조를 지키며 현명하게 행동하여 기드온 공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일들이다.

 

많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늘 자신을 꾸미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상냥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요즈음 수도의 아가씨들은 다 델라 아가씨를 본받으려고 한답니다. 얼마나 멋진지 몰라요.”

 

그러다 하인은 무언가 떠오른 듯 헛기침을 했다.

 

내일이 결혼식 날이라 지금 수도는 시끌벅적합니다. 다른 영지에서도 결혼식을 구경하러 많이들 왔거든요. 여기 묵으시는 다른 분들도 저녁에는 수도를 구경하러 가거나 외식을 즐긴다고 하시는데 혹 두 분도 그럴 계획이십니까?”

 

어쩔래?”

 

마르틴은 눈을 반짝였다.

 

갈래!”

 

그렇다는군. 우리 식사는 괜찮아.”

 

스파크와 슈체른, 프루던스도 함께 가겠다고 했으므로 우선 그들은 긴 여행에 지친 몸을 씻고 휴식을 취한 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을 즈음에야 적당한 외출복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하인들이 마차를 꺼내주어서 그들은 적당한 것을 타고 거리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들리는 악기 소리는 꽤 다양했는데 바이올린이나 아코디언 같은 소리도 있었고 하프나 피아노 같은 무거운 악기까지도 들렸다.

 

마르틴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까지 수백은 될 악기는 어느 순간부터 한 가지 소리로 노래했고 다채로운 가락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술에 취한 남자가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마차 옆을 지나갔다.

 

나비는! 잠들면! 꽃이 되고오오옥!!!”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동전 한 닢으로 팁을 주자 마부는 모자를 들어 인사했고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개선 장군을 위한 것처럼 집집마다 색종이나 색색 천을 이은 깃발을 화려하게 장식했고 집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줄, 빨랫줄, 어디든 작은 방울이나 장식 같은 게 매달렸다.

 

마력으로 불을 켠 장식용 전구는 조그맣고 흐릿한 것인데도 다양한 것들이 여기저기 매달려 온 도시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힌다.

 

횃불을 켜 묘기부리는 사람이 있고 장사꾼들은 노란색을 칠한 구두며 책이며 오르골, 장난감, 모형까지 늘어놓고 소리를 질렀고 악기 연주하는 사람들은 춤추는 사람들을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은 또 춤을 춘다.

 

기묘하게도 여자는 여자끼리.

 

왜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춤을 추는 거지?”

 

몸을 밀어내는 것 같은 거대한 악기 소리 옆에서 거의 악쓰다시피 묻자 지나가는 사람이 대답했다.

 

이제 여자들은 정조를 위해 자기들끼리 춤을 춘다!”

 

얼마나 아름다워! 멋진 일이야!”

 

저 아가씨들은 훌륭한 부인이 될 거야!”

 

이 수도에 온 이후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아라벨라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마르틴은 알아차리지 못했고 스파크는 질린 표정이고 슈체른과 프루던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슈체른이 큰 소리로 말했다.

 

부인 말고는 뭐가 되는데!?”

 

하지만 그 말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

이거 10편 내외로 끝내고 싶었는데 어느새 20이 되었습니다

왜 끝이 안나지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2  (0) 2019.07.19
아라벨라 21  (0) 2019.07.14
아라벨라 19  (0) 2019.07.07
아라벨라 18  (0) 2019.07.03
아라벨라 17  (0) 2019.06.27

아라벨라 19

2019. 7. 7. 16:20 | Posted by 호랑이!!!

 

첫 번째로 바실리는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힐 것을 명령했다.

 

다행히 아라벨라는 말을 타고는 했기에 또래의 아가씨들보다는 근육이 있었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성격에 맞았다.

 

창술, 검술, 사격.

 

바실리는 거기에 활까지 추가하고 싶어 했지만 아라벨라가 유리창을 다섯 개쯤 깨자 활은 되었다며 빼 주었다.

 

사격은 마탄을 이용한 총으로 하는 것인데 이 총이라는 물건은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왕의 허가 없이는 한 영지에 셋 이상 얻을 수도 없었다.

 

하나는 내 거고, 다른 하나는 네 거다. 원래 에멜라에게 주려고 했지만 네게 주게 되는구나.”

 

아라벨라는 바실리가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고는 손을 쭉 뻗고 방아쇠를 당겼다.

 

길쭉한 몸체의 것은 시위를 세게 당기지도 않았는데 작은 방아쇠를 누르는 것만으로 멀리 있는 허수아비를 맞혔다.

 

이건 그래도 활보단 낫군.”

 

바실리는 며칠간 계속 갈아댔던 유리창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저쪽으로 조준을 했는데 어떻게 위로 갔는지 원...”

 

이건 못 들은 척 하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마르틴은 자신이 배우고 싶어하는 몇 가지를 제외하면 수업이 적어졌고 아라벨라는 몇 가지 늘어났다.

 

듣기로는 셰필라가 마르틴도 경제나 경영 등의 수업을 듣게 해 달라고 사람을 보낸 모양이었지만 바실리는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많은 수업이 필요 없다며 딱 잘랐다나.

 

그 대신 마르틴은 사피야에게 편지를 받았다.

 

오가는데 며칠씩 걸리는 편지에는 며칠 전의 날씨와 중요한 일이 적혀 있었고 가끔은 지친 채 적은 것인지 꽤 사무적이었으나 일주일에 한 통이 꼬박꼬박 인편으로 전달되었고 아라벨라도 마르틴과 함께 편지를 받았다.

 

셰필라가 아니라 사피야의 편지였으나 언제나 맨 끝에는 네 아버지도 너를 많이 보고싶어 하신다는 문장이 있었다.

 

아라벨라는 한숨을 쉬었다.

 

사피야는 내가 아버지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편지를 물에 담가 씻는 아라벨라에게 프루던스가 종이를 가져왔다.

 

말린 꽃을 붙이시겠습니까?”

 

아니.”

 

향수는 어떻습니까?”

 

가는 동안 다 날아가겠지. 됐어.”

 

리본이나 인장은 어떤 것으로 할까요?”

 

“...리본은 됐어. 인장은 적당한 걸로.”

 

, 이건 도련님 것입니다.”

 

프루던스는 아직 작은 마르틴을 위해 허리를 숙여 종이를 내밀었다.

 

도련님께서는 어떤 것을 하시겠습니까? 리본이나 향수를 가져올까요?”

 

저는, 아니... 나는, 그거 다 할래요. ...할래!”

 

말린 꽃이 여럿 있는데 어떤 것으로 가져올까요?”

 

파란 거 있어?”

 

가서 좀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프루던스가 허리를 펴자 마르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갈래.”

 

그 때 현관에서 종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실례하겠습니다. 꽃을 말려둔 곳에는 이 아이가 안내해줄 것입니다.”

 

빨간머리 집사는 지나가던 고용인을 불러 지시를 내렸고 마르틴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하얀 에이프런 뒤를 따라갔다.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낯선 모습에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가 깃펜을 잉크에 푹 담갔다.

 

사피야님에게

 

거기까지 쓰고 더 무슨 말을 쓸지 잠시 생각하는데 옆에서 종이 뭉치가 펄럭였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아직 종이는 꽤 귀한데 아무렇게나 두다니.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종이 뭉치를 들어올렸다.

 

그 뭉치에는 마르틴이 배우는 지식이 적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맨 윗장은 역사 이야기다.

 

정권이 뒤바뀌면서 케이가 가문의 마크시툰 백작은(마크시툰 케이가가가) 루일라 공작과 손을 잡았고 둘은 화폐를 나라에서 제조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냈다

 

예전에 배웠었지.

 

눈으로 죽 읽다보면 마르틴의 메모도 군데군데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제조를 누가 하느냐를 두고 마크시툰 케이가 백작과 루일라 공작은(이름은?) 내분이 일어나게 되는데

 

갑자기 손이 공책을 덮었다.

 

보지 마아!”

 

왜애, 보면 안돼? ?”

 

안돼!”

 

마르틴이 공책을 홱 뺏어가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도련님, 편지가 왔습니다.”

 

마르틴과 아라벨라는 불과 어제 받은 사피야의 편지를 돌아보았다.

 

누구한테서 왔는데?”

 

금색 봉인이 찍힌 두루마리 한 장이 내밀어졌다.

 

왕실에서요.”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1  (0) 2019.07.14
아라벨라 20  (0) 2019.07.12
아라벨라 18  (0) 2019.07.03
아라벨라 17  (0) 2019.06.27
아라벨라 16  (0) 2019.06.22

아라벨라 18

2019. 7. 3. 16:41 | Posted by 호랑이!!!

 

바실리를 데려온 후 사흘째 되는 날 오후, 프루던스가 아라벨라를 찾아왔다.

 

아라벨라 아가씨, 바실리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라벨라는 품이 넉넉한 옷에 굽이 없는 슬리퍼 차림이었는데 프루던스의 말에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옷장으로 갔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 가운만 하나 걸치시고 와주십시오.”

 

프루던스는 금색 술이 달린 짙은 녹색 가운을 아라벨라의 어깨에 걸치고는 앞장섰다.

 

계단을 오르고, 프루던스는 언젠가 그가 무릎을 꿇고 있었던 방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도록 해.”

 

놀랄 만큼 명확한 발음에 깨끗한 목소리는 어릴 적 아라벨라가 들은 그대로였다.

 

딱 한번이었지만.’

 

아라벨라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환자를 위한 방이 되어서인지 방 안은 빈틈없이 하얀 카펫이 깔려 있었고 책상 가장자리에는 푹신한 천을 대 놓았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는 촛대가 있었고 사용하기 위해 꺼내놓은 초가 몇 개 나와서 책 옆을 뒹굴었다.

 

아라벨라는 한쪽 발을 뒤로 빼어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입니다.”

 

어릴 때 보고 처음 보는구나. 네가 나를 구했다지.”

 

고압적인 말투와 눈빛이 쏟아졌지만 아라벨라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할머님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더 일찍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바실리는 아라벨라 옆에 선 프루던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라벨라에게 의자를. 그리고 마실 것도.”

 

하얀 천을 댄 나무 의자를 밀어 주고 프루던스는 방에서 나갔다.

 

바실리는 베개를 등 뒤에 하나 더 넣어 꼿꼿한 자세로 아라벨라를 마주했다.

 

아라벨라, 영지는 어떻게 하고 온 것이냐.”

 

영지는 아버지께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 ...셰필라를 말하는 모양이군. 그 녀석은 영 변변찮아.”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에멜라가 죽었다지.”

 

아라벨라는 고개를 들어 바실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뒤로 시간이 좀 지났습니다.”

 

그렇더군. 듣기로는 셰필라가 새 부인을 들였다고 하더구나.”

 

그렇습니다.”

 

둘 사이에서 난 것이 그 까만머리 꼬마고. 내가 십 년쯤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농담도.

 

아라벨라는 재미있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 농담에 뚱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언장은 있었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이제 너는 서른 즈음 되었고?”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습니다만.”

 

뭐라고.”

 

바실리의 입 끝이 아래를 향한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허락이 떨어지면 프루던스가 차와 과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프루던스. 내가 사라진지 얼마나 되었지?”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한 달! 한 달이라니, 그럼 저 밖에 커다란 애는 누구 애냔 말이야!”

 

셰필라님과 새 부인 사피야님의 자식입니다.”

 

그 한 달 새 저만큼 커지지는 않았을 거고!”

 

아라벨라는 찻잔을 받았다.

 

오래 되었습니다. 장부에 빈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기적으로 후원한 것 같습니다.”

 

누가!”

 

“...아버지가요.”

 

망할 창부 같으니! 감언이설로 살살 꼬드겨서...!”

 

프루던스가 헛기침을 했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보고 계십니다.”

 

“......후우...”

 

바실리는 약차를 벌컥 마셨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에 이어 과자까지 입에 툭 던져 넣었다.

 

아라벨라.”

 

, 할머님.”

 

그동안 많이 배웠나?”

 

, 할머님. 그간 프루던스가 가정교사를 붙여 주어서 예법도 배웠고 자수도 놓고 외국어도...”

 

“....그럼 에멜라는 뭘 가르쳤지?”

 

승마술과 경제에 관한 것, 정치 과목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꽃꽂이나...”

 

리본 고르는 일 따위를 배웠다는 거군. 네게 필요한 건 하나도 안 가르쳤어.”

 

아라벨라의 시선에 힘이 실렸다.

 

바실리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고개를 들어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에멜라가 네 출생에 대해 특별히 한 이야기는 없더냐.”

 

렐리악은 오래 이어져 온 백작가였고 특별한 일이 있어도, 혹은 없어도 더 낮아지거나 더 높아지는 일 없이 이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지는 들었나.”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라벨라는 프루던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세 가지를 약속하면 너에게 모든 것을 말하여 주마.”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20  (0) 2019.07.12
아라벨라 19  (0) 2019.07.07
아라벨라 17  (0) 2019.06.27
아라벨라 16  (0) 2019.06.22
아라벨라 15  (0) 2019.06.18

아라벨라 17

2019. 6. 27. 17:35 | Posted by 호랑이!!!

 

그렇게 수색은 종료되었다.

 

슈체른이 마르틴과 아라벨라를 데려다 주었고 삐는 마르틴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렐리악 저택으로 돌아왔다.

 

옥상에 내려서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집사, 프루던스가 달려와서 아라벨라나 마르틴, 심지어 슈체른까지 본체만체하고 바실리를 안고 뛰어갔다.

 

저 녀석 하여간 침착하지 못하고.”

 

슈체른이 뒷머리를 벅벅 긁는데 마르틴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말씀을.”

 

어린 인간이 예의바르게 군다고 어색해하는 것이 여실하다.

 

아라벨라는 항상 느긋하게 굴던 슈체른이 말을 주저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슈체른.”

 

뭡니까.”

 

할머니 찾는데 도움도 주셨고 삐도 걱정될 텐데 며칠 여기 묵는 건 어때?”

 

무사한 거 봤으니까 됐...”

 

마르틴이 슈체른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주 기대어린 눈으로.

 

그러니까...”

 

머리에는 삐를 얹고.

 

“...호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마르틴의 표정이 화악 밝아지더니 슈체른의 손을 잡고 끌었다.

 

여기 아래쪽에 손님방이 있어요. 저택이 작다고 생각했는데 손님방이 네 개나 있더라구요.”

 

네 개나?”

 

슈체른이 손을 잡고 내려왔다.

 

잠깐, 저런 옷 괜찮은가?

 

현재 주로 입는 옷들은 풍성하거나 살갗을 최대한 많이 가리는 종류의 옷들이다.

 

그러나 슈체른의 옷은 팔다리가 거의 그대로 드러났고 색도 하얀색 한 가지 뿐인데다 헐렁하고 현재 기준으로는 수수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슈체른을 마당에서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널찍한 옥상에서 데려가는 건데 누구라고 말하지? 사용인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 손님이라고 해야 하나?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툭툭 쳤다.

 

누가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 으으음... 그냥... 할머니 찾는데 도움을 준 손님이라고 하면...”

 

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귀한 몸이기는 하니까 귀족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 그런데 마차도 없고 어떻게 왔다고 하지? 순간이동? 시종도 없이?

 

복잡해지는 머리에 아라벨라는 이마를 짚고 슈체른에게도 지혜를 좀 빌려달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마르틴이 벌컥 문을 열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 잠까-”

 

옥상 아래는 3층이고, 바실리의 방과 가까웠는데 평소라면 아무도 없었던 그 복도에 지금은 사람이 가득하다.

 

누군가는 뜨거운 물을 들고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깨끗한 수건을 몇 개나 쌓아서 전달하고 말을 전하러 뛰어내려가는 사람이나 약, , 꽃 같은 것들이 쉴새없이 날라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 이 쪽을 한 번씩 보고 지나갔다.

 

아라벨라는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게...”

 

다녀오셨어요 아라벨라 아가씨!”

 

“-마르틴 도련님!”

 

지금은 여기 들어오시면 안 돼요.”

 

주인님께 약과 여러 처치를 한 후-”

 

오랜만입니다 슈체른님.”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죄송한데 급해서요-”

 

차와 과자를-”

 

“-준비해 드릴까요?”

 

사람들이 기차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줄줄이 들어갔다 줄줄이 나오면서 한 마디씩을 한다.

 

마르틴은 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복도 가장자리로 걸어서 2층으로 빠져나갔다.

 

그 다음은 슈체른과 삐, 다음은 아라벨라.

 

겨우 한 층 차이인데 2층은 퍽 조용하다.

 

아라벨라는 자신의 방으로 슈체른을 질질 끌고 갔다.

 

이 집 사람들이랑 아는 사이였어?!”

 

가끔 바실리를 데려다줄 때 오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할대로 취해 걸음을 걷지 못한다던가.”

 

할머니가?”

 

5-60년 쯤 전에? 이후로도 자주 왔고...”

 

얼마 전 일처럼 이야기하더니 오륙십년 전이란다.

 

저 자주는 얼마나 자주일까,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자주는 아닐 것이다.

 

얼마나요?”

 

슈체른의 어깨에서 마르틴의 머리 위로 삐가 퍼덕퍼덕 내려앉았다.

 

열흘에 한 번?”

 

자주 왔네.”

 

셋은 아라벨라의 방 옆의 빈 방 문을 열었다.

 

이 방을 쓰면 되겠네. 빈 거니까.”

 

비었군요.”

 

슈체른은 방 문을 열더니 무언가 귀한 것을 본다는 듯 한 걸음 물러나 방안을 훑어보았다.

 

그래, 이젠 비었군요...”

 

슈체른은 마르틴의 손을 잡더니 방 안으로 이끌었다.

 

춤은 출 줄 압니까?”

 

, 니요!?”

 

잠깐 번쩍하는가 싶더니 슈체른은 마르틴과 비슷한 나잇대의 아이로 변했다.

 

마르틴의 발을 제 발 위에 얹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도는 것은 자세가 완벽한 왈츠다.

 

그 귀에 익은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아라벨라는 문에 등을 기댔다.

 

예전에, 바실리가 마르틴과 비슷한 키였을 때 자주 추고는 했었습니다. 아바트는 언제나 춤을 약속한 상대가 있었고 그게 나는 아니었으니... 대신 아바트의 아이나 손주들과는 자주 추었습니다.”

 

한 명이 지치면 다음 아이가 오고, 그 아이가 지치면 다시 다음 아이가 오고.

 

끝없이 춤을 추다 보면 마침내 아바트가 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리고 슈체른의 입이 다물렸다.

 

천천히 춤이 멈추자 마르틴이 뒷걸음질로 슈체른의 발 위에서 내려왔다.

 

“...역시 머물지는 못하겠습니다. 바실리가 깨어나는 모습을 보면 돌아가지요.”

 

슈체른은 몇 번이나 방 안을 돌아보면서도 결국 밖으로 발을 옮겼다.

 

마르틴이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차 드실래요? 삐는 뭘 먹이면 돼요? 그동안은 있지요, 소시지나 햄이나 달걀 같은 거 먹였는데 그러면 돼요?”

 

슈체른은 마르틴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걷어낸 듯 보다 밝아진 표정으로 과장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고요? 낙트가 그런 걸 먹었다고? 그런 걸 먹이다니, 이제 큰일이 났습니다!”

 

네에!? 큰일?!”

 

슈체른의 행동이나 목소리는 평소보다 과장된 면이 있었지만 마르틴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채소도 먹이고 과일도 가끔 먹였어요! 그리고... 그리고 사탕도 조금-”

 

뭐어어? 그거 정말 큰일입니다. 더 큰일이 났어요!”

 

어린 용들은 대개 신선한 날고기와 우유를 먹고 자란다.

 

요리가 아닌 그런 식재료를 먹이는 것은 어린 용들의 건강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음식을 구하기 어려워서도 아니다.

 

용들이 탐내는 유일한 사치품인(물론 금과 보석류나 기타 귀한 것들은 제외하고) 음식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달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이 농담같은 일의 선례를 계속 들어왔던 터라 아라벨라는 그들의 뒤에서 슈체른이 마르틴에게 겁을 주는 모습을 구경했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19  (0) 2019.07.07
아라벨라 18  (0) 2019.07.03
아라벨라 16  (0) 2019.06.22
아라벨라 15  (0) 2019.06.18
아라벨라 14  (0) 2019.06.14

아라벨라 16

2019. 6. 22. 00:28 | Posted by 호랑이!!!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누나 뭐 하나 궁금해서...”

 

여기까지는 어떻게-?”

 

슈체른은 마르틴에게 달려들어 머리에서 목덜미, , 몸 할 것 없이 냄새를 맡았다.

 

“...낙트?”

 

그러자 마르틴의 품에서 작게 삐익, 소리가 났다.

 

살짝 열린 가방 안에서 날개달린 작은 이 나와 가죽 날개를 퍼덕이면서 슈체른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을 감싸고 팔을 잡고 삑 삐익 우는 소리를 내서 자칫했다면 뱀이 슈체른을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슈체른은 기쁜 듯이 뱀을 안았고 뱀은 슈체른이 검은 나무라도 되는 것처럼 몸에 감겼다.

 

아아 우리 아가, 이다지도 우리를 가슴 졸이게 하다니 혼을 내야겠습니다.”

 

삐가 낙트예요?”

 

?”

 

그제야 슈체른은 마르틴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 이름은 낙트입니다. 이 산에 사는 용족 중 막내이고 불과 얼마 전에 성체가 된 어린 용의 첫째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이 애도 용이니 날러 가야지!’라며 바실리와 함께 날아가던 중에 불의의 사고로 사라져서 그만.”

 

슈체른은 한숨을 쉬었다.

 

아주 깊은 한숨이었다.

 

삐익

 

바실리스크가 아니었구나, 하며 아라벨라가 생각했다.

 

“...듣자하니 마르틴 당신이 우리 아가를 돌보아주었다고 하는군요. 이 일에 대하여서는 부디 보답하게 해 주십시오.”

 

별말씀을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슈체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아이가 마르틴은 라고 불러주어도 좋다고 합니다.”

 

삐익, 하고 삐가 울었다.

 

아라벨라는 잘 모르겠지만, 슈체른과 마르틴은 삐가 엄청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면서 잠시 난리가 났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삐는 슈체른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갔다가 어느 쪽을 쳐다보더니 푸드덕 아래로 내려섰다.

 

낙트가 이쪽이라고 합니다.”

 

조그만 뱀은... 아니, 낙트는 조그마한 발로 직접 땅에 내려가더니 토끼들이나 지나다닐 정도로 낮은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낙트, 그런 데 들어가면 안 보이니까 이리 오십시오.”

 

저어, 당신은 삐... 아니아니, 낙트와 어떤 관계 되시나요?”

 

애기 이모 됩니다.”

 

슈체른은 한 손에 소풍바구니를 들고 있었으므로 아라벨라는 낙트를 어깨 위에 올렸다.

 

낮은 수풀을 헤치고 슈체른이 제일 먼저, 그 다음이 아라벨라, 마지막으로 마르틴이 밟힌 풀 위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잠시만요, 이모라고요? 삐의?”

 

이 모습은 여러분과 활동하기 편하니까 임시로 변한 모습이고.”

 

무슨 당연한 것을 물어보고 있냐는 듯, 어린아이에게 빨간색과 노란색을 더하면 주황색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듯 슈체른이 마르틴을 돌아보며 말했다.

 

원래 모습은 크기나 모습 면에서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 쪽? 정말로?”

 

삐는 잎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굴 앞에 서더니 날개를 바쁘게 퍼덕였다.

 

태어난 지 두 달이라고 했던가, 제대로 날지는 못하지만 대신 빠르게 달릴 수 있어서 아차한 사이에 굴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풀을 치우자 드러난 굴은 사냥개라도 지나갈 수 있을 것처럼 커다랬지만 아무래도 사람이라면 체구가 작아도 드나들기 힘들 것 같았다.

 

저는 지나갈 수 있어요.”

 

눈치를 보다 마르틴이 손을 들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작은 마르틴이라면 어떻게든 지나갈 것 같기는 했지만 아라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안돼.”

 

저도 갈 수 있습니다.”

 

슈체른이 말하더니 다음 순간 슈체른이 있던 자리에는 윤기나는 검은 뱀 한 마리가 혀를 내민다.

 

그렇지만 아라벨라는 이번에도 고개를 젓더니 슈체른이 용 모습일 때 몸에 감는 길다란 검은 끈을 쥐었다.

 

무슨 일 있으면 두 번 잡아당길 테니까 당겨줘.”

 

아라벨라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는 굴 안으로 몸을 디밀었다.

 

조그마한 마도구로 앞을 밝히며 기어가다보니 삐가 퍼덕 퍼덕 날갯짓을 했다.

 

얼만큼을 더 기어갔더니 갑자기 땅이 아래로 훅 꺼져서 아라벨라는 머리를 감싸며 앞으로 굴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이라고 셀 수 없을 만큼 구르고 또 구르더니 마침내 푹신한 흙더미에 몸이 떨어졌다.

 

“...부러질 뻔 했네.”

 

아라벨라는 목을 주무르며 손에 꽉 쥔 마도구를 켰고 창백한 불빛이 굴 안을 비추며 빛에 약한 벌레들을 내쫓는다.

 

이리저리 손전등을 휘두르자 벽에서 사사삭 기어가는 것들에 약한 현기증이 느껴져서 아라벨라는 꾹 참고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것에 집중했지만 머리카락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머리를 빗는 손가락에 착 달라붙자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 무언가는 벽에 맞고도 툭 떨어져 바사삭 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아라벨라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아냈다.

 

!!! 이 망할! 기어가는 버러지만도 못한!”

 

못 참았다.

 

머리카락을 싹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만큼은 꽉 누르면서 아라벨라는 젖은 개처럼 머리를 푸르르르륵 털었다.

 

 

재촉하듯 삐 소리가 나서 빛을 아래로 향했더니 삐가 아라벨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더 가야해?”

 

삐익.

 

고개를 젓는다.

 

삐는 바위 위로 기어오르더니 조그만 앞발로 삭삭 긁는 시늉을 했다.

 

바위?

 

아라벨라는 조금 더 가까이로 다가갔다.

 

바위라고 생각했던 것은 더러운 천 뭉치였다.

 

손에 잡히는 부분을 당겼더니 풀어지더니 아라벨라 앞으로 굴러떨어지며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시체를 한여름에 일주일 묵혔다면 이런 냄새가 났을까 싶은 지독함에 아라벨라는 헛구역질을 하고 손수건을 코와 입 앞에 대었다.

 

정말 싫다

 

손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사람인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손이 움직인다니 아라벨라는 더더욱 기절할 것 같았다.

 

벌레나 두더지 같은 것이 시체를 건드리면 죽은 줄 알았던 시체의 몸이 들썩거리면서 움직인다는 글을 예전에 읽은 적 있었기에, 저 손을 건드렸다가 피부 아래까지 파먹은 벌레들이 얇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오는 상상이 저절로 되었다.

 

“..., 그으...”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아라벨라는 제발, 이라는 표정으로 삐를 보았지만 삐가 낸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 나가서 슈체른보고 여기 굴을 넓혀 달라고 할 수 있어?”

 

삐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 안 있어 검은 용 모양 슈체른이 굴을 넓히며 들어왔다.

 

들어올 때는 기어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걸어서 나올 수 있었고, 아직 해는 쨍쨍했다.

 

몸을 감싼 천뭉치는 누군가의 망토였다.

 

마르틴은 도시락 가방에서 바닥에 까는 용도로 쓰던 하얀 천을 꺼내고 아라벨라는 그 사람을 감싼 망토를 벗겼다.

 

펄럭펄럭 요란하게 천이 흩날렸다가 떨어지고.

 

아라벨라는 흰 천을 두르려다 그 사람의 얼굴로 잡아당겨진 듯 시선을 향했다.

 

할머니?!”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18  (0) 2019.07.03
아라벨라 17  (0) 2019.06.27
아라벨라 15  (0) 2019.06.18
아라벨라 14  (0) 2019.06.14
아라벨라 13  (0) 2019.06.07

아라벨라 15

2019. 6. 18. 20:18 | Posted by 호랑이!!!

 

물 위로 번뜩이는 빛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아라벨라가 놀라서 움직임을 멈추기를 바란 것 같았다.

 

사실은 꽤 효과적이어서 아라벨라는 뒤로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대신 물에 비친 모습을 보고 상체를 홱 기울였더니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예리한 날이 가죽옷 위를 긁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은 목숨이 위험하다.

 

저 사람은 적의에 가득차서 칼을 휘두르고 있다.

 

칼은 길고 날카롭고, 조그만 봉투 따는 칼도 베이면 아프지만.

 

이상하게도 아라벨라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손을 씻느라고 벗어두었던 장갑을 억지로 끼자 젖은 손은 가죽 안에 낑겨 힘겹게 들어갔다.

 

아라벨라가 비명도 지르지 않고 의외로 침착하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뒤로 물러서서 아라벨라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칼은커녕 무기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다시 달려들었으나 그 때는 아라벨라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날이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것이 똑똑히 들렸고 아라벨라는 장갑 낀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칼의 옆면을 쳐냈다.

 

가죽이 굉장히 튼튼한걸.

 

칼날을 그대로 맞아도 별로 다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아라벨라는 다시 날아드는 칼날을 쳐냈다.

 

.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당장이라도 달음박질을 하고 싶지만 이것은 공포가 아니다.

 

처음으로 말을 타고 넓은 벌판을 달렸을 때.

 

그 때와 닮은 감각.

 

카앙.

 

세 번이나 칼날을 쳐내고 그 사람이 머뭇거리자 아라벨라는 본능적으로 그가 약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자신이 그를 물어뜯을 차례.

 

손을 쓰는 게 훨씬 쉽지만, 아라벨라의 팔 힘은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칼을 휘두르느라 그가 벌린 거리만큼 앞으로 나서고.

 

아라벨라는 다리를 들어올렸고 무릎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다리 사이를 세차게 가격했다.

 

달걀이라도 있었다면 빠그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을만한 힘으로.

 

검은 형체가 아라벨라의 앞에 풀썩 무너지고 옆 수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자 아라벨라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심장은 겨우 한 대를 때리려고 이렇게 뛰지 않을 테지.

 

유효하게 들어간 공격은 아라벨라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렐리악의 해츨링.”

 

흥분한 머리로는 상대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에 아라벨라가 손을 든 순간 들린 목소리가 낯익은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 대는 때렸을 것이다.

 

“...나 그렇게 어리지 않은데.”

 

종류를 불문하고 그렇게 싸우는 걸 좋아하는 건 해츨링 뿐입니다.”

 

슈체른이 손을 들자 반짝반짝하게 닦인 거울이 나타났다.

 

하얀 얼굴에 뺨은 장밋빛으로 상기되었고 눈은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반짝이는데다 운동량에 비해 숨이 거칠다.

 

무엇보다도.

 

아라벨라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 해츨링 시절을 벗어나려면 앞으로 이백년은 더 지나야 할테니 멀기도 했고.”

 

이백년은 너무 멀어.”

 

괜찮습니다, 눈 깜짝하면 금방이니까.”

 

슈체른의 손짓에 거울이 사라지고 대신 아라벨라가 때려눕힌 검은 옷의 사람이 들어올려졌다.

 

살아있네?”

 

검은 혀가 슈체른의 입가를 핥았다.

 

인간 안 먹은지 오래 됐지...”

 

안돼.”

 

농담입니다.”

 

시원스럽게 잘생겼던 슈체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이런 걸 잔뜩 주웠습니다.”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뚝 뚝 떨어져 쌓였다.

 

하나, , , .

 

아라벨라가 잡은 사람까지 다섯.

 

죽었어?”

 

아직. 죽으려고 하고는 있지만요.”

 

보시겠습니까? 라면서 슈체른이 손을 움직이자 불길하게 뿌드득 소리가 나고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사람의 입에서 조그만 주머니가 나왔다.

 

점심 먹고 시작할까요, 먹기 전에 시작할까요?”

 

, 고문을?”

 

아니 무슨 험악한 소리를, 이라며 슈체른이 손사래를 쳤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정 싫지는 않아 보였지만.

 

기억을 읽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몸수색도. 고문이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고.”

 

그 전에, 잠깐 이야기 해봐도 돼?”

 

물론입니다.”

 

사람의 몸을 감싸던 마력이 내려가자 그 사람은 오래 숨을 참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아라벨라는 그 사람 앞에 섰다.

 

“...그렇다.”

 

나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이다. 렐리악 백작의 적자.”

 

그 사람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짓씹듯이 말했다.

 

안다.”

 

날 죽일 이유가 없잖아. 렐리악은 어떤 귀족 가문과도 척지지 않았고 특별히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지도 않은걸.”

 

인간에게는 그렇겠지.”

 

일단 말을 꺼내긴 했지만 정말 말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터라 아라벨라는 의아해졌다.

 

그럼 정령이나 엘프나 노움이나 드워프한테는?”

 

“...”

 

농담은 아닌데.”

 

그 사람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노려보았지만 아라벨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말 날 죽이러 온 거 맞아? ? 시킨 건 누구지?”

 

그런 것에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그 사람은 혀를 내밀었다.

 

깨문다!라고 생각한 순간 슈체른이 손을 뻗어 그 사람의 입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드득, 뼈가 씹히는 소리가 났지만 슈체른은 아파보이기는커녕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쩔까요?”

 

대화로 끝나면 좋을 텐데. 내가 정말 평화롭고 안온하게 살아와서 말이야.”

 

거짓말!이라고 검은 옷의 사람이 외칠 뻔 했다.

 

무슨 가문 아가씨가 발길질을 하냔 말야?! 너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때렸다던가, 그런 것도 아닌데?

 

손가락이 조금만 더 일찍 빠졌어도 입 밖으로 낼 뻔 했다.

 

하지만 슈체른은 시간을 들여 망설이다 손가락을 빼었고 아라벨라를 잠시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포섭을 해 보겠습니다. 거기 당신, 금은보화를 주고 외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 말하겠습니까?”

 

슈체른은 품에 손을 넣고 뒤적이더니 아이 주먹만한 에메랄드가 박힌 목걸이를 꺼냈다. 색 옅은 푸른 보석이 주르르 박힌 것이 세 줄이나 되고 갈래갈래 떨어져서 술처럼 보이는 줄에도 전부 보석이 박혀 있다.

 

눈이 목걸이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흔들리고 있군요.”

 

, 그런 것 따위! 우리 용묘간부들은 쉽게 가질 수...!”

 

“...용묘?”

 

그러자 그 사람은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별로 흔한 이름은 아닌걸. 정보 길드는 정통 보라매 사냥꾼 연합이잖아. 암살자 길드는 제일 큰 데가 암석 어쩌고였으니 저런 이름이면 더 눈에 띌 텐데.”

 

그 사람은 다시 혀를 깨물려고 했으나 슈체른이 저지했다.

 

젠장,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한 건지 알아!?”

 

그 사람이 빼액 소리를 질렀지만 슈체른도 아라벨라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알 게 뭡니까.”

 

알 게 뭐람.”

 

아라벨라는 슈체른이 그 사람을 잡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이 두른 로브를 확 펼쳐서 살펴보았다.

 

조그마한 암기가 떨어지기도 하고 아라벨라의 얼굴이 그려진 종잇조각도 하나 나오고 돈주머니도 나오고 아예 로브를 찢어버리자 안에 입은 옷이 드러난다.

 

튼튼한 천옷에 활동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졌고 그 천 옷의 등에 용이 그려진 것은 인상적이다.

 

렐리악의 용이 날개를 펼친 비룡이라면 이 사람의 옷은 날개는 없는 용이었는데 머리가 아래로 가고 몸통이 위로 향해서 잘못 붙이기라도 한 건가 했다.

 

이거 떼 줘.”

 

분부대로.”

 

슈체른은 손톱을 세우더니 다른 준비도 없이 문양을 옷에서 뜯어냈다.

 

그 사람은 파르르 떨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날 이렇게 모욕하다니!”

 

아까까지 죽으려고 했으면서 뭘 이 정도로 모욕이라는지.

 

“...귀족이지? 당신.”

 

사교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아라벨라이지만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잘 안다. 본질과 형식에서 형식을 중히 여기는 사람에다, 문장에다, 그 형식에 얼마나 멋을 부려놓았는지 자기네들 모임 이름을 용묘라고 해 놓았다.

 

왜 귀족이 암살자 흉내를 내고 있어?”

 

, , 흉내!?!?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 같으니!”

 

뻐억, 소리가 나고 그 사람은 끄윽... 하는 신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그대는 이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죄 없는 자의 목숨을 그대 욕심으로 노린 죄, 자기 방어를 쉽게 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노린 것하며 신체 말단부터 조각내 고통 속에 죽게 해도 그 입은 변명 한 마디 할 수 없어야 한다. 뻔뻔하게 주둥아리를 놀리다니 죄를 통감하게 해주마.”

 

슈체른의 눈은 동자가 뾰족하게 갈라져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저 눈빛 앞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알았지만 아라벨라는 차마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라벨라 뿐인지, 그 사람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

 

저 렐리악의 여자는 이미 인간의 성인식을 치렀다, 그리고 죄가 많아! 뻔뻔한 것은 그대들이며 겨우 고통 따위는 나를 꺾을 수 없다!”

 

그래?”

 

슈체른은 웃는 낯으로 아라벨라를 돌아보았다.

 

피가 튈지도 모르니 조금만 뒤로 가 계십시오. 시장하신다면 먼저 도시락이라도.”

 

아라벨라는 뒤로 물러나 연못가에 앉았다.

 

주먹과 발톱이 아주 잠시동안 난무하고 그 사람은 퉁퉁 부은 얼굴로 그들 앞에 무릎 꿇었다.

 

“...겨우 고통 따위로는 꺾을 수 없다고 말한 것 치고는 포기가 빠른걸.”

 

, 수만... 아가브....”

 

뼈는 안 부러진 거 같은데 이는 부러졌나보다.

 

누가 죽이라고 보냈어?”

 

나뉴... 그거.... 여기에...”

 

그 사람은 자기 품 속을 손짓발짓으로 가리켰고, 아까는 별 거 발견 못했는데 이상하다며 슈체른이 목을 죄는 마력을 풀어주자 스스로 품을 뒤적이더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면서 윽, 소리를 냈다.

 

사아... 으어어...! 사려...! 아파...! 흐어어 아퍼!”

 

급하게 옷을 들춰 보니 조그만 칼로 가슴을 찔렀다.

 

그야 칼로 찌르면 아프겠지.

 

자기 스스로 찔러 놓고도 살려달라고 웅얼거리던 그 사람은 일 분도 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추었고 이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때, 또다시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몸을 홱 틀었더니, 거기에서 나온 것은.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항복이라는 시늉을 하는 마르틴이었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17  (0) 2019.06.27
아라벨라 16  (0) 2019.06.22
아라벨라 14  (0) 2019.06.14
아라벨라 13  (0) 2019.06.07
아라벨라 12  (0) 2019.06.03

아라벨라 14

2019. 6. 14. 00:38 | Posted by 호랑이!!!

 

이제 물러가라.”

 

사피야 다르데니아는 한때 눈처럼 하얀 카펫 위에 가을 하늘같이 옅은 푸른색 침대를 두고 겨울가지처럼 꾸민 화장대와 책상, 사피야만을 위한 책꽂이에 가장 좋아하는 책과 장인들이 만든 인형, 장식품을 늘어놓았다.

 

각 벽마다 새가 앉은 모양의 가지를 꽂아 거기에 등불을 걸었던 네모난 방의 천장은 안쪽을 둥글게 깎고 금을 발라 테를 둘렀으며 가운데에는 진한 푸른색을 칠해 붉은색으로 물고기와 꽃을 그렸다.

 

창틀에 걸어둔 레이스 커튼이 풍성하게 흩날리면 파도치는 것처럼 보였던 천장의 연못은 사피야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 방에서 사피야는 천사였으며, 그 천사는 하늘이나 구름에 연못을 내려다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고 때로 그 자리에 사람 모양이나 동물 모양의 인형도 함께했었다.

 

자신만을 위한 방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 때는 몰랐지.

 

같은 백작이라고는 하나 다르데니아 저택은 렐리악의 세 배는 되었다.

 

사피야 렐리악은 개인 방이 없었고, 낮이면 시녀들과 지내는데다 밤이면 셰필라가 찾아왔기에 개인 시간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님, 천이 이제야 배달왔는데 직접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종들은 사피야가 한때 평민처럼 살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근본이 다르데니아 백작가라는 것을 알아 별 말 없이 지시를 따랐고, 일부 사피야를 좋게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지만 사피야는 어렵지 않게 복종시켰다.

 

어련히 잘 하였겠니. 무슨 일 있으면 돌려보낼 테니 잠깐 거기 두어라.”

 

결혼식을 올린 후 바쁘게 감사 편지를 쓰고 신전과 왕실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전부 사피야의 몫이었다.

 

그 후로는 저택의 재산에 관해 외워야 했고 그 다음에는 바꾸는 커튼, 이불, 불을 밝힐 기름이나 식재료나 장작에 관한 것들이 사피야에게 몰려왔다.

 

결혼하자마자 마르틴을 떼 놓은 것에 대하여 원망도 있었으나 이렇게 일이 몰리니 지금은 마르틴이 옆에 없는 게 다행이다.

 

그렇게 일하여 두 주만에 일 전반을 끝내고 사피야는 의자에 늘어졌다.

 

이 곳은 저택의 도서실.

 

다른 방하고 크기가 별로 다르지 않은데다 장서 수도 적다.

 

책꽂이로 가려지는 소파는 그나마 사피야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옷에 화장이 눌리지 않게 조심한 사피야는 책을 훑어보았다.

 

청소는 주기적으로 하지만 몇 번 펼쳐보지 않은 티가 난다.

 

“.....?”

 

역사서 한 질.

 

언어 책이 다섯 권.

 

종교에 관한 책 세 권.

 

음악에 관한 책이 세 권.

 

예의범절에 관한 책이 세 권.

 

마법과 마나에 관한 책이 두 권.

 

금전을 다루는 일에 관한 책 한 권.

 

왕국의 다양한 법에 관한 책이 한 권.

 

대륙의 다양한 일을 기록한 책이 또 한 권.

 

다 합해서 쉰 권이나 될까 하는 책은 너무나도 적다.

 

아무리 책이 사치품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지나치잖아.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지도 귀족의 품격에 관한 일이다.

 

렐리악의 역사를 생각하면 가죽이나 비단천에 글을 쓴 것도 몇 개는 있음직하건만.

 

어린 아이들이 읽기 연습을 할 만한 책이나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는 용도로 쓰는 얇은 책은커녕 성인의 흥미를 위한 잡기 책이나 소설책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사피야, 뭐 하고 있소.”

 

들리는 소리에 사피야는 책꽂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도 잘생겼지만 젊을 때는 그가 정말 천사같았지.

 

사피야가 웃자 셰필라는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책이 있나 구경을 하고 있었어요. 옛날에 셰필라 당신은 무슨 책을 읽었을까, 하고.”

 

그건 이 저택에 없어.”

 

어머나, 정말요?”

 

손이 잡혔다.

 

셰필라의 팔이 사피야의 허리에 감겼다.

 

이 저택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다음에 온 거라서. 게다가 서재를 한 번 정리했거든.”

 

그럼 아라벨라는요?”

 

그 애는 여기서 컸지만. 사피야, 계속 말 할건가?”

 

짙은 색 드레스 자락이 손짓에 올라갔다.

 

결혼한 날의 밤 셰필라는 그에게 감사하라고 했다.

 

평민이나 다름없던 그녀를 잊지 않고 구해 온 것이라고.

 

자신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아직도 그 더럽고 좁은 집에서 흙탕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사피야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사피야가 처음으로 마음과 몸을 허락한 상대였다.

 

게다가 잊지 않았고, 아직 미워하지도 않았으니.

 

자신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바실리 아비에스 렐리악을 찾으러 다닌지 일곱 날이 되었다.

 

“...이 넓은 데를 다 돌아다녔네...”

 

산 위를 날고, 물에서 헤엄을 치고, 땅 위를 달리면서 아라벨라와 슈체른은 꽤 친해졌다.

 

첫날에는 금방 지쳐하던 당신이 갈수록 오래 걸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저기, 일반적인 인간들은 세 시간 정도 걸으면 지친다고.”

 

당신 참 인간처럼 자랐나 봅니다.”

 

그야 인간이니까 그렇지.

 

저 사람 참.

 

아니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용이랬지.

 

아라벨라는 입 밖으로 말하는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해가 지면 데려다주고 해가 뜨면 데려갔으니 해 있는 동안, 적게 잡아도 12시간은 계속 걸은 셈이다.

 

그나마 저 용이 거추장스러운 짐에서부터 덥다고 벗은 겉옷까지 다 들어주니 망정이지 이러저러한 장비까지 아라벨라가 들어야 했다면 진작 포기하고 기사단이나 꾸려 보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점심을 먹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 나 배고팠어.”

 

연못에 손을 담그다 말고 아라벨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슈체른은 씨익 웃더니 점심 먹기 좋은 곳을 알아보겠다며 인간 모습에서 날개만 꺼내 날아올랐다.

 

빈 물병에 물을 채우고 정화해준다는 무슨 가루를 조금 넣고 마력을 불어넣자 물병이 손 안에서 흔들렸다.

 

가죽 물병인데도 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더니 얼마 안 있어 멈추었고 아라벨라는 물병을 허리에 찬 뒤 연못 위로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며칠의 외출 때문에 그을려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얼음처럼 색소가 옅었고 훨씬 반짝였다.

 

게다가 근육이 붙어서인지 더 단단해 보였고, 아라벨라는 가죽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면.

 

죽어라!!!”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16  (0) 2019.06.22
아라벨라 15  (0) 2019.06.18
아라벨라 13  (0) 2019.06.07
아라벨라 12  (0) 2019.06.03
아라벨라 11  (0) 2019.05.29

아라벨라 13

2019. 6. 7. 23:47 | Posted by 호랑이!!!

 

솟아오를 때는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며 잎사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정도의 속력이라고 한다면 데일라를 타면서 익숙해졌지만 몸을 아래가 아닌 뒤로 당기는 중력은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눈을 떠, 렐리악의 어린 용]

 

웃음기어린 목소리에 아라벨라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산이 아래로, 그리고 옆으로도 보였다.

 

바람에 깎인 거대한 절벽과 하늘높이 자란 나무들이 아래 보이고 그 사이로 사슴이 뛰어가거나 하늘에 새가 날아간다.

 

낮은 곳에 있을 때는 그저 흙 쌓인 언덕일 뿐 렐리악 백작주택이 있는 곳의 평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높이 올라와서 보니 높낮이가 있고 정말 산의 모양이 등뼈 같았다.

 

흐르는 녹색 바람은 기분 좋게 아라벨라를 감싸고 머리 위로는 태양만 있을 뿐이라.

 

이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오기라도 한 것 같다.

 

아라벨라는 감동적이기까지 한 경관에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어때?]

 

다시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그대로다.

 

바람에 눈이 말랐기 때문인지 눈가가 젖었고 눈물이 고였다가 눈꺼풀을 깜박이자 툭 떨어졌다.

 

손 아래에서 슈체른이 웃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몸 아래에서도.

 

으악!? 아니, 꺄악!? 탔어?!”

 

[그래, 탔단다. 렐리악의 어린 용아]

 

슈체른은 깔깔 웃으면서 날개를 쭉 폈다.

 

[떨어지기 싫으면 꽉 잡는 게 좋을 거야]

 

아까보다 더요?

 

아라벨라는 질린 얼굴로 끈을 꽉 쥐었고 슈체른이 날개를 세우자 속도가 정말로 빨라져서 얼굴에 바람이 마구 부딪혔다.

 

으아아아아아아...!”

 

 

 

 

 

 

 

 

마르틴은 어두운 방을 싫어한다.

 

사피야와 살았을 적의 집은 초 하나를 사기가 어려워서 해가 지기 무섭게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야 했다.

 

이삭을 줍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물을 떠 오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사피야는 단 한번도 허락해 준 적이 없었기에, 마르틴은 겨울에 천으로 틀어막아야 하는 창문 앞에서 나무껍질 책을 읽었다.

 

사피야는 마르틴이 태어나고 나서 집 밖으로 거의 외출하지 않았기에, 마르틴도 자연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자랄 기회가 없는 눈치로도 사피야가 자신을 내보내지 않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 신전에 가서 신관들에게 고대어를 물어보거나 더 가끔 만나는 외국인들에게 짧은 외국어로 관심을 끌어 몇 마디를 배우는 것을 빼면, 마르틴은 바깥에서 놀 수도 없었다.

 

마르틴은 사피야를 사랑하니까.

 

비록 마르틴이 아는 가족은 사피야와 자신 뿐이었으나 수없이 많은 책을 읽으면서 보았던 가족들의 행동과 사피야의 태도는 달랐기에.

 

마르틴은 사랑받고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벽 틈이나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서 책을 읽으면서도.

 

빛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머나먼 곳의 사막이나 끝없는 바다, 구름 위에 있다는 신들의 나라를 탐험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도.

 

얇은 벽 너머로 들려오는 거리의 웃음소리,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막대를 들고 칼싸움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비치는 해가 얼마나 찬란한지, 달이 얼마나 우아한지, 그 아래에서 뛰놀고 흙을 밟고 풀을 뜯고 나무에 기어오르고 개울에서 물장난을 치고 나뭇잎으로 배를 만들고 띄워보내면 얼마나 행복할지 생각하면서도.

 

사피야가 자신을 싫어할까봐 그런 상상을 하는 모든 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기다렸다.

 

사피야가 말해준 아버지는 먼 곳의 높은 사람인데 아버지가 자신들을 데려가면 봄날의 딸기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있고 몸도 아프지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자신이 행복할 거라고 했었으니까.

 

신전의 유리창에 그려진 천사처럼 잘생긴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던 셰필라를 보았을 때에는 기대만큼 실망했었지만, 대신 마르틴은 아라벨라를 만났다.

 

어머니가 말해주지 않았던 가족은 첫날에 어머니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왕자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키가 크고 늠름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화를 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도에 마르틴은 감탄했다.

 

너무 넓어서 식당이 아니라 마을 광장처럼 느껴지는 곳에 나와있는 자신을 보고서도 화내지 않았고.

 

그 사람은 심지어 자신에게 장난을 쳤다.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한 장난을!

 

이후로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동생이 되었다.

 

가방 속의 뱀에 대한 것을 공유하고 침대 위에서 뛰었고, 아라벨라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예절을 배우고 자세를 고치고 억지로 지식을 우겨넣었다.

 

그랬는데.

 

“...또 혼자 남겨졌어.”

 

작은 창문이 있을 뿐 다른 광원이 없는 복도는 검게 보일 만큼 어둡다.

 

순간 예전의 그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털다시피 내젓는다.

 

생각하지 마.

 

다른 생각을 해.

 

복도는 검게 보이는 그대로이고, 자신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덮어야 해.

 

잊어.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15  (0) 2019.06.18
아라벨라 14  (0) 2019.06.14
아라벨라 12  (0) 2019.06.03
아라벨라 11  (0) 2019.05.29
아라벨라 10  (0) 2019.05.10

아라벨라 12

2019. 6. 3. 21:17 | Posted by 호랑이!!!

 

산 어귀에 다다르면 언제 올지 알았다는 듯 슈체른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올라가지 않을 높은 바위 위에서 새까만 머리를 나부끼는 차림은 여전히 백 년 전쯤의 것이다.

 

슈체른은 휙 뛰어내려서 질색하는 아라벨라의 손에서 소풍 바구니를 앗았다.

 

보자 보자... , 이 계절에 야채까지 들었군요? 그리고 과일이랑, 햄도 좋습니다. 소시지도 먹고 싶었고... 프루던스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런담?”

 

그 사람은 도시락의 호화스러움에 한참이나 찬사를 보내다가 아라벨라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탐욕이 뚝뚝 떨어진다.

 

그 아이가 아직 어립니다. 비록 당신이 더 어리지만 주인의 가족이니 그 아이가 실수를 하더라도 후한 마음으로 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말하는 것은 탐욕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아라벨라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산으로 갈까요?”

 

좋습니다.”

 

산에 오르자 전날은 달밤이 되어야 보였던 푸른 바람이 벌써부터 보였다.

 

부드러운 푸른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고 그 흐름을 흐트러뜨리거나 빨리 밀어내다가 문득 슈체른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손을 내렸다.

 

뭘 하는지 알아차렸을까? 하며 옆으로 돌아보니 슈체른은 흐뭇하다는 듯한... 아니,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꽤나 호의적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 아라벨라가 산 바람을 처음 맞았는데 좋아한다던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거겠지.

 

바실리는 원래부터 잘 돌아다니잖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이 산의 모든 곳곳을 다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하룻밤을 보내는지, 어디에 바실리가 좋아하는 딸기가 있는지, 어디가 위험한지 등... 그런데 이번에는 바실리가 기척을 없애주는 그림자의 발걸음을 신고 실종이 되어서-”

 

저는 할머니에 대해 잘 몰라요.”

 

아라벨라는 툭 내뱉었다.

 

할머니를 왜 바실리라고 부르는 건가요?”

 

바실리를 바실리라고 부르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할머니는 왜 그림자의 발걸음을 신고 실종이 되었지요?”

 

이 산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그 침입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대답해줄 건가요?”

 

모른다고 대답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라벨라는 슈체른을 쳐다보았다.

 

아라벨라는 자신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슈체른은 아라벨라가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했다.

 

당신이 말하는 우리는 누구예요?”

 

앞서 걸어가던 슈체른은 걸음을 멈췄다.

 

뒤로 돌아보자 아라벨라는 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그 안에 든 것은 단도인 듯 했다.

 

“...좀 얌전한 줄 알았더니.”

 

렐리악 치고는, 하고 덧붙이는 슈체른은 말투와는 다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 뒤로 물러서십시오 렐리악의 어린 용.”

 

바실리가 아직 알려주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모르고 살게 두지는 않을 테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말하며 슈체른은 아라벨라에게 도시락 바구니를 떠넘겼다.

 

아라벨라는 무거운 바구니를 옆의 바위 위에 얹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라는 말은 지금까지 더러운 것이 묻으니 조심하십시오라던가 꼴도 보기 싫으니 저리 꺼져라라는 말과 동일했다.

 

가장 바람직한 행동은 뒤로 돌아 도망치는 것이었으나 이번만은 말 그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경계와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아내며 슈체른은 빙글빙글 웃는다.

 

눈을 감아주십시오. 이제부터 심오하고 우아한 마법의 증거가 당신 앞에 펼쳐질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 이 세상의 모든 지고지순한 정수!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자의 증거! 자아 여러분께-비록 아가씨 한 분 뿐이지만- 소개하노니!”

 

얌전히 눈을 감기는 했지만 말이 현란해질수록 아라벨라는 품 속의 단도를 꽉 쥐었다.

 

살짝 실눈을 떠 볼까, 하는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 눈을 더 질끈 감았고, 슈체른이 부디 눈을 떠 주십시오, 라고 과장된 어투로 이야기했을 때에는 바람이 가라앉았다.

 

아라벨라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 곳에는 마차 몇 대 만큼이나 커다란 검은 용이 비늘을 반짝이며 아라벨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비늘과 검은 눈동자의 용은 몸에 비해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날카로운 발을 가졌지만 그 발은 누군가를 해치기보다는 땅과 풀숲을 헤치는데 쓸 법한 모양이다.

 

모양을 보고는 있었지만 아라벨라는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슴, 때로 곰, 인간, , 고양이, 쥐 같은 동물과는 달라. 겨우 마차 몇 대 만큼의 크기였으나 그가 고개를 들면 거대하고 오래 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으나 상냥하고,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마치 거대한 바위, 깎아지른 벼랑들, 고대의 언어가 새겨진 거대한 돌 앞에 선 것 같았다.

 

푸른 빛을 띤 바람이 용의 몸을 타고 흐르고 갑주 같은 비늘이 덮인 코가 아라벨라를 건드리자 아라벨라는 정신을 차렸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

 

슈체른이 웃었다.

 

땅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것 같은 소리에 아라벨라는 다시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보는 것은 처음입니까? 정말로?]

 

그러다 아라벨라는 그 형태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3.. 그림에 있던... 호숫가의 그...?”

 

그림에는 거대한 바위처럼 나와 있었지만, 아라벨라는 이런 것에서는 틀려 본 적이 없었기에.

 

그리고 슈체른은 긍정하듯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바트와 그린 그 그림을 본 모양입니다]

 

당신과 많이 닮았지, 돌개바람 같은 아이였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검은 눈은 얼핏 깊어졌지만 아라벨라가 무어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림에 있던 사람들은 그럼... 용의 친구였나요?”

 

[우리는 동지에 더 가깝습니다]

 

동지?”

 

[그런 것은 나중에. 이제는 출발하지 않으면 곧 밤이 될 것입니다]

 

아라벨라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가시나요?”

 

길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크기로는 몇 걸음 걸으면 산이 다 무너질 것 같다.

 

꼬리까지 흔들리면 주위의 나무고 바위고 다 무너지겠지.

 

의아한 목소리로 올려다보니 다시 심연에서 울리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걸어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요?]

 

뛸 건가요?”

 

그리고 우렁차게 터져나온 웃음소리는 거대한 바람처럼 쏟아졌고 거기에 직격으로 맞은 아라벨라는 쓰러질 것 같았다.

 

슈체른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바구니에 거대한 발톱을 둘 넣더니 익숙하게 뒤적였고 그 안에서는 바구니에 다는 끈이라고 생각했던 길다랗고 검은 끈이 나왔다.

 

슈체른은 그 끈을 몸에 둘렀고 잘 맞게 조인 다음 아라벨라의 앞에 등을 내밀었다.

 

검고 탁하게 빛을 반사하는 비늘이 움직임에 따라 흘러가듯 움직이고 몸에 비하면 작다고는 하지만 아라벨라보다는 커다란 가죽 날개가 접혔다가 펴졌다.

 

책에서나 읽었던 거대하고 위대한, 신의 의지라고도 불리우는 몸.

 

자신이 발을 디디고 선 이 산도 신성한 용의 몸이라고 생각했더니 아라벨라는 발을 디디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거대한 검은 용은 입을 열었다.

 

[야 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꼬리가 등을 툭 밀자 아라벨라는 앞으로 휘청이다 검은 끈을 잡았다.

 

슈체른의 몸이 낮아졌고.

 

튕겨 오르듯이 구부린 발을 펴자 쏘아 올린 듯 빠르게 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아아아아악!?”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14  (0) 2019.06.14
아라벨라 13  (0) 2019.06.07
아라벨라 11  (0) 2019.05.29
아라벨라 10  (0) 2019.05.10
아라벨라 9  (0) 2019.05.03

아라벨라 11

2019. 5. 29. 14:28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등에서 잠들었고, 깨었더니 아침이었다.

 

뱃속이 쥐어짜이는 듯 아파와 배에 손을 얹었더니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하루종일 입에 댄 것이라고는 차가운 시냇물 몇 모금뿐이라는 것도.

 

아침식사 시간이었기에 1층으로 내려가자 이스트를 넣어 동그랗게 부풀린 빵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에 곁들일 꿀과 갓 만든 버터도.

 

그리고 베이컨이나 소시지.

 

과일도 달게 조린 것과 신선한 것 두 가지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껍질을 벗겨 먹기 좋게 손질한 과일은 이 계절이면 푹 익어서 달고 부드럽겠지.

 

자르는 것에는 이도 필요없다.

 

혀로 꾹 누르기만 해도 그 연약한 것은 으깨져 달콤한 물이 되리라.

 

변하지 않는 메뉴이건만 기대에 가득차서 아라벨라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무릎에 핸드백을 얹은 마르틴이 화들짝 놀랐다가 휴우 한숨을 쉬며 다시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조그맣고 반들거리는 머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아라벨라를 알아보았는지 머리를 쏙 내밀고 삐이, 울었다.

 

마르틴은 소시지 조각을 뱀(같은 것)에게 먹이고 있었다.

 

소금기 있는 걸 먹여도 되나?”

 

잘 먹고 있어. 물도. 있지, 삐가 물 마실 때 있잖아, 막 볼이 이렇게-”

 

? 삐라고?”

 

아라벨라는 마틴의 건너편에 앉으려다 귀를 의심했다.

 

삐 하고 우니까 삐.”

 

“...마틴, 너 말 한 마리 있지?”

 

.”

 

3살짜리, 까만색과 하얀색이 들어간 순한 암말.

 

이름을 뭐라고 지었어?”

 

까맣고 하야니까 체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단 말인가.

 

아라벨라는 자리에 앉아 동그란 빵을 비틀어 찢었다.

 

손안에서 껍질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하얀 속살을 드러냈고 고체라기보다는 액체처럼 보이는 버터는 나이프 위에서부터 가장자리가 흐물흐물 녹아 진득하게 빵 위에 듬뿍 얹힌다.

 

거기에 절인 베리류를 시럽째로 푹 떠서 얹고 한입 가득 깨물자 버터가 바깥으로 밀려나와 뺨에 묻었지만 맛이 환상적이었다.

 

접시에 소시지와 베이컨, 스크램블드 에그를 한 무더기나 가져와서 마르틴의 뱀은 접시 위의 마지막 소시지를 아라벨라가 자르는 순간 자그맣게 삐익... 소리를 냈다.

 

그리고 육즙을 뚝뚝 떨어뜨리는 그 기름진 소시지가 아라벨라의 포크에 꿰뚫려 입 안으로 사라질.... 뻔 했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뽑아 내밀자 마르틴의 뱀은 잽싸게 목을 뻗어 아라벨라의 손에서 소시지를 낚아챘다.

 

쳐든 입 사이로 머리만큼이나 굵은 소시지 조각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아라벨라는 물을 한 잔 가득 들이켰다.

 

그런 아라벨라의 기세에 마르틴은 겨우 설탕에 절인 나무딸기를 조금씩 먹을 뿐, 조금 덜어준 고기는 다 뱀 입으로 간다.

 

자기 배가 차고 나니 그런 게 보여 아라벨라는 부끄러워하며 계란을 듬뿍 떠서 마르틴의 접시에다 올려주었다.

 

“...나 혼자 다 먹다니 부끄럽네.”

 

누나는 어제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며. 얼마나 배고팠겠어.”

 

웃으면서 하는 말에 더 부끄러워졌다.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문이 열렸고 마르틴의 뱀은 후다닥 가방 속으로, 마르틴은 몸으로 가방을 가렸다가 조심스럽게 찰칵, 걸쇠를 닫아 테이블보 아래로 숨긴다.

 

들어온 사람은 프루던스였다.

 

아가씨, 언제쯤 나가려 하십니까?”

 

아침 먹었으니까 이제 곧.”

 

튼튼한 신발을 가져왔으니 발에 맞으신지 신겨드리겠습니다.”

 

프루던스가 가져온 것은 아라벨라가 3층에서 본 적 있는 가죽신이다.

 

3층에서 보았을 때는 철편이 붙어 있었지만 아라벨라가 걸을 것을 생각하여 떼놓은 모양으로 아라벨라의 발에 딱 맞았다.

 

잘 맞으시는군요. 이 사이즈로 갖바치에게 주문을 넣어두겠습니다. 장식이나 재질, 모양에 있어 주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가벼운 걸로.”

 

알겠습니다.”

 

프루던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올렸다.

 

,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무게가 좀 되는 것 같았다.

 

도시락을 조금 쌌습니다. 만약 늦어질 것 같으시면 안에 조그만 폭죽을 넣어두었으니 둥근 구멍을 위로 하고 마력을 조금 불어넣어 사용해주십시오.”

 

그런 게 여기에 있어?”

 

국경이나 변방에서 위급 시에나 사용한다는 물건은 듣기만 했지 보는 건 또 처음인데 집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종종 주인님께서도 사용하셨습니다.”

 

발을 뻗자 익숙하게 신발이 신겨진다.

 

누군가 신었다는 신발은 부드러워서 발목 부근을 끈으로 다시 조정해주자 아주 편했다.

 

누나, 어디 가?”

 

산에.”

 

아까까지는 뱃속이 조이도록 아팠는데 지금은 배가 불러터질 것 같다.

 

포만의 행복감에 우선하여 레이디답지 않은 행동과 먹어 불러진 배가 신경쓰여 아라벨라는 집사가 가져다준 바구니를 당겨 안았다.

 

묵직했다.

 

살짝 덮개를 열어보니 그 안은 절인 과일과 야채가 병째로 몇 개나 들어있고 둥근 치즈가 자르지도 않은 것이 통째로 하나, 빵도 몇 덩어리나 있다.

 

베이컨도 햄도 소시지도 줄줄이 들어서 나들이용 도시락이 아니라 사냥 나간 병사 한 부대를 먹이는 용도인 것 같다.

 

드실 만큼만 드시고 남은 것은 슈체른에게 주고 오십시오.”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마르틴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슈체른은 누구야?”

 

어제 만난 사람.”

 

이것은 답이 되지 못했나 보다.

 

이것밖에 모르는데도.

 

그러나 마르틴은 포기하지 않고, 지나쳐 가려는 아라벨라의 소매를 잡았다.

 

나도 갈래. 아니, 나도, 가면 안돼? ?”

 

아라벨라는 신성한 용의 몸을 떠올렸다.

 

평지와는 전혀 달랐지.

 

게다가 그 이세계 같이 어찔한 풍경은 자신도 겨우 적응할 정도였다.

 

다음에 가자.”

 

마르틴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언제?”

 

글쎄? 그건 보고.”

 

?”

 

그러니까 이 집안에 할머니가 안 계시는데, 좀 오래 안계신 것 같은데, 걱정은 안 되지만 일단 한 번 찾아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있잖아. 우리가 귀족이기는 하지만 이 집안 주인도 아니고, 이걸 얘기하면 고용인들이 다 떠나버릴까? 그리고 아버지가 일단은 렐리악 백작이라고는 하지만 전대에 비해서는 힘도 약하고. 위엄도 책임감도 우아함도 아무것도 없는데 할머니까지 없어지면 백작이 아니라 남작이나 자작까지도 떨어지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걸 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너한테 말해도 되는 걸까? 이미 바뀐 신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에게, 배울 게 많아서, 대우가 달라져서, 행복보다는 책임을 느끼고 나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피야가 아이를 잘못 키웠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너한테 말해도 될까? 이미 이 어깨에는 짐이 이만큼이나 많아 보이는데 내가 말해서 짐이 더 늘어나기만 하면 어떻게 하지?

 

“...다음에 말해 줄게.”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손을 떼어냈다.

 

몸에 걸칠 것이라고는 셰필라가 보내준 레이스 무더기밖에 없었기에 아라벨라는 3층으로 갔고, 이번에는 프루던스도 말리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리지는 않았지만 말리고 싶은 것인지 무슨 더 할 말이 있는지 애매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것을 뒤로하고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바지와 경갑 상의를 고르자 프루던스는 손수 내려주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무어라고 말하더라도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할 게 뻔하니 원.

 

프루던스.”

 

, 아가씨.”

 

할머니는 왜 날 싫어해?”

 

주인님께서는 아가씨를 싫어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을 다문다.

 

이 뒤로 왜 싫어하지 않는지 정도는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입이 무겁나.

 

마르틴은?”

 

주인님께서는 아직 마르틴 도련님을 만나보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싫어하시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라벨라가 잠옷을 휙 벗어던졌지만 프루던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중드는 것이 익숙하다고 한들 조금은 놀랐으면 했는데.

 

그래야 자기도 모를 말실수도 좀 할 테고.

 

아라벨라는 옷을 벗어던졌고 장식물 중 하나를 떨어뜨려 깨기도 했고 몰래 돌아선 집사 뒤에서 큰 소리를 내어 놀래키는 것은 생각만 해 보았으나 여전히 익숙하고 침착한 손길이 가죽 갑옷을 입혀줄 뿐이다.

 

있지, 프루던스.”

 

, 아가씨.”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자 잘 갖추어진 옷 덕분에 몸이 가볍다.

 

할머니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는 왜 비밀을 말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물어보면서도 또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번에 돌아온 답은 조금 달랐다.

 

셰필라님은 모르니까요.”

 

왜 몰라? 렐리악 백작인데?”

 

그야 셰필라님은... .”

 

프루던스가 입을 꽉 다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인 것 같다.

 

지금 백작이고 가주인데 어째서 모르지? 할머니만 알고 아빠는 몰라? ?

 

아라벨라는 본능적으로 이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할머니가 말하면 안된대? 아빠에 대해서?”

 

덥썩 어깨가 잡히고 프루던스는 난감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가감없이 나름대로의 표정으로 드러냈다.

 

아라벨라는 신이 나서 잡은 어깨를 흔들었으나 프루던스는 어지러워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은 주인님께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했는데 조금 더 말해줘도 좋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프루던스! 나 싫어하지!”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럼 나 좋아해?”

 

우아하고 당차고 모든 귀족의 귀감 같은 아가씨를 존경합니다.”

 

목소리에 진심이 한 점도 없다.

 

당황했을 때나 목소리에 조금 고저가 있었을 뿐이지 평이하고 지루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에 아라벨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더 캐보려고 했지만 집사는 다시 완전한 철가면을 되찾았고 어렵지 않게 아라벨라를 저택에서 내쫓았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13  (0) 2019.06.07
아라벨라 12  (0) 2019.06.03
아라벨라 10  (0) 2019.05.10
아라벨라 9  (0) 2019.05.03
아라벨라 8  (0) 2019.04.28

아라벨라 10

2019. 5. 10. 21:33 | Posted by 호랑이!!!

 

그 풀숲에서 튀어나온 것은 기묘한 사람이었다.

 

저렇게 천 몇 장으로 몸을 느슨하게 감싸는 옷은 유행이 백 년은 지났을 터.

 

신발도 옛날 양식이다.

 

그러나 머리도 피부도 잘 손질되어서 비록 구불거리며 물결치는 그 머리도 피부도 검은 빛이라고 하나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띈다.

 

이질적이라고 할 만큼 어딘가 다르고, 강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어떤 것도 가늠할 수 없다.

 

가치관도, 나이도, 성별도, 어떤 사람인지도.

 

그 사람은 아라벨라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낙트, 우리 아가, 나의 낙트, 작은 아가, 어디에 갔던 겁니까. 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습니다. 이 숲이 술렁이고 나의 분노와 나의 슬픔에 우리의 일족이-.”

 

저기요.”

 

아라벨라는 그 사람에게서 한 걸음 뒤로 떨어졌다.

 

아름답고 위압감이 있고 어디에서일지 모를 미지에 대한 공포가 일어나는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낙트?”

 

죄송하지만 누구신가요.”

 

주위에서 푸른 바람이 우르르 휘몰아쳤다가 일순간에 훅 가라앉는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솟구쳤다.

 

이 강풍 속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아라벨라에게 다가갔다.

 

아라벨라는 반사적으로 양 손을 올렸지만 그 사람은 거기에 개의치 않고 손에 얼굴을 가져갔는데 아라벨라는 물어 뜯긴다는 생각에 손을 움츠렸지만 그 사람은 이를 드러내기는커녕 킁킁 소리를 내며 냄새를 맡았다.

 

손에서 손목으로, 팔로, 품에 고개를 가까이 하는가 싶더니 목덜미로 코를 가져가자 목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뒷걸음질을 쳐도 팔로 밀어내도 고개를 뒤로 빼어도 그 사람은 따라붙었는데 금방이라도 물어뜯길 것처럼 상대는 위협적이었지만 아라벨라는 이런 상황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몇 시간처럼 느껴졌던 그 이상한 과정은 끝나고 그 사람은 사납게 눈을 치떴다.

 

새까만 눈이 마수처럼 번뜩였다.

 

너는 누구지.”

 

저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입니다. 렐리악 백작 가문의 적자이고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눈에서 힘이 풀렸다.

 

“...렐리악의 아이였군. 그래, 그러니까 이해가 되는군요. 방금의 행위는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근에 아이 중 막내가 사라져서 찾으러 다니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작은 렐리악 당신에게서 아이의 냄새가 났습니다.”

 

그 사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대하기가 편해져서 아라벨라 역시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렐리악 가문을 아십니까?”

 

이 질문은 이상하다.

 

렐리악은 백작이며 역사만은 어느 공작가나 왕가에도 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렐리악의 본가가 다스리는 이 곳이라면 부모님 이름만큼이나 렐리악이라는 이름이 친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상대는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에 아라벨라는 더 당황했다.

 

이 산에 사는 이들은 모두 렐리악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맹이고, 친구이고, 가족이니까. 아바트가... 아니지, 최근에 본 그 아이 이름이 뭐였더라... 루하트? 아냐... , 바실리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까? 실례지만 당신의 나이는? 성년은 넘겼습니까?”

 

, 성년을 넘겼습니다.”

 

그럼 어째서 바실리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지? 알비노라서?”

 

뒷말은 아주 작게 들렸다.

 

할머니를 아시나요?”

 

알다마다. 며칠 전에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 쪽을 둘러보고 온다고-”

 

죄송하지만 어느 쪽인지 가르쳐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라벨라는 그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저 쪽인데 혼자서 갈 수 있겠습니까?”

 

아라벨라는 잠시 망설였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 곳은 초행이고 길을 잘 모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놀랐다.

 

과연...”

 

그렇게 놀라면서 뭐가 과연이라는 걸까.

 

그 때 반대쪽 풀숲이 부스럭거리더니 붉은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프루던스!?”

 

이런 곳에 계셨군요.”

 

붉은 머리의 집사는 검은 사람을 보더니 평소의 부루퉁한 표정 그대로 움찔했다.

 

“...슈체른...?”

 

프루던스.”

 

슈체른은 프루던스를 보더니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렐리악의 어린 용이여, 내일은 단단히 준비를 해서 산으로 오십시오. 그 말은 두고. ...참 맛있어 보이거든.”

 

그 사람, 슈체른은 몸을 돌렸다.

 

검은 인영이 걸음에 따라 일렁이다가 스르륵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위에 올라타 고삐를 프루던스에게 넘겼다.

 

어떻게 산을 뚫고 왔는지 모를 집사는 옷이 찢어지기는커녕 머리카락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아서 눈길이 갔다.

 

아라벨라는 프루던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저 사람은 누구인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당신은 내 어머니나 할머니와 무슨 관계인지.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프루던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

 

주인님께서 아직 아가씨께 말해도 좋다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온 길에 비해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저택이 보인다.

 

정원에도 지붕에도 환하게 불을 켜 둔 저택이.

 

저택의 지붕에 걸린 커다란 깃발이 보인다.

 

날개를 활짝 편 용의 실루엣을 그린 깃발이.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벨라 12  (0) 2019.06.03
아라벨라 11  (0) 2019.05.29
아라벨라 9  (0) 2019.05.03
아라벨라 8  (0) 2019.04.28
아라벨라 7  (0) 2019.04.15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