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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6

2018. 6. 27. 04:21 | Posted by 호랑이!!!

 

그렇게 시작된 첫째 날.

 

가위바위보에 이긴 줄리아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초록이를 데리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운전수도 없이 가고 있었는데 풍선이 잔뜩 달린 의자에 앉은 사람이 손을 들자 멈추어서 문을 열었다.

 

후다닥 뛰어 그 뒤에 줄을 서자 버스는 그 셋이 다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내부는 평범한 버스처럼 보였는데 예란이가 따로, 줄리아나와 초록이가 같이 앉았다.

 

지금 어디 가?”

 

우리 집.”

 

우리 집에는 커다란 온실이 있고 정원이 있고 그리고 또, 하고 이야기하던 줄리아나는 초록이가 바깥으로 눈을 힐끔힐끔 돌리자 웃었다.

 

바깥이 재미있어어?”

 

!”

 

바깥에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광고도 막-

 

[이번 정류장은 사거리 은행건물 앞, 은행건물 앞, 다음은...]

 

그렇구나, 신기하구나아.”

 

손이 뻗어오는가 싶더니 초록이는 예란이에게 맞은 팔뚝을 문질렀다.

 

, 너 그거 꼭 통과해야 한다고!”

 

못 하면 어떻게 되는데?”

 

줄리아나는 그 말에 여느 때처럼 우아하게 웃었다.

 

별 일은 안 생겨.”

 

정말?”

 

그냥 네 기억을 다시 지우고, 수정하고, 마법사는 못 되고, 예란이는 카드를 잃게 되고오.”

 

그리고 또, 라는 말에 초록이는 뭐가 또 있냐는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헤어지는 거야, 영원히이.”

 

영원히?”

 

기억을 지울 때 우리 기억도 지우는 거지이.”

 

어때, 별 일은 아니지?

 

“...줄리아나네 집에 커다란 온실이 있다고?”

 

초록이는 가방을 뒤졌다.

 

핸드폰과 지갑 외에 있는 것은 충전기와 보조 배터리와 수첩.

 

수첩을 급히 펴들고 펜을 찾아 가방을 뒤지자 한 마디가 날아온다.

 

너는 요즘 같은 시대에 핸드폰 메모장을 안 쓰고 수첩에 펜이냐.”

 

그 쪽이 편하단 말이야.”

 

집에 가면 펜 몇 자루는 있을 테니까아, 하나 줄게.”

 

하나만 빌려주십시오.”

 

[이번 정류장은...]

 

버스는 한참을 달렸다.

 

처음에는 열심히 듣고 적던 초록이도 나중에는 지겨워지고 열심히 이야기하던 예란이도 줄리아나도 대화 주제가 다른 쪽으로 새는 것을 막지 않아서 버스에서 내릴 때는 어느샌가 주제가 최근에 본 영화로 옮겨가 있었다.

 

자아, 이쪽.”

 

줄리아나가 다가가자 철문 옆에 서 있던 경비가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계시나요?”

 

아까 본관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에 가면 펜 몇 자루는 있다, 고 했던 줄리아나를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유리 돔들이다.

 

반짝이는 유리 안으로 잎이 넓은 열대의 식물이 가득 자란 것이 보이고 광장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뜰에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잔디와 꽃이 그득했다.

 

초록이는 줄리아나를 따라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기념품이라고 적힌 문패를 읽었다.

 

아가씨 오셨어요.”

 

다녀왔습니다아. 이쪽은 예란이랑 초록이라는 친구예요.”

 

아아, 이야기는 들었어요.”

 

볼펜 하나 가져가려고 하니까 적어 두세요.”

 

그러겠습니다.”

 

예란이는 줄리아나와 점원이 뭐라고 이야기하든 초록이를 펜이 놓인 진열대 앞으로 끌고 갔다.

 

나 저기 인형 좀 보면 안 돼?”

 

놀러온 거 아니잖아.”

 

그치만 저거- 엄청 폭신폭신해 보이고, 엄청 진짜 같고, 엄청 호기심이 들어-.”

 

안돼.”

 

초록이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3초도 못 가 펜에 정신이 팔렸지만.

 

나뭇결이 살아 있는 나무 볼펜(아래에는 가시에 찔리지 않는다는 문장이 붙어 있다), 향기가 나는 것, 진짜 나비가 앉아 얇은 날개를 팔락이는 것, 꽃이나 열매가 있는 것, 휘어지기도 하는 덩굴 모양, 이끼와 물이 담긴 유리공이 달린 등등.

 

다양하고 화려한 것들에 초록이는 진열대 앞으로 뛰어왔다.

 

이게 그거야? 이끼랑 물이랑 벌레를 넣어서 순환하는 완전한 생태계를 만든 거?”

 

유가암, 그거 사실 녹화 영상이야. 이끼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어어.”

 

가끔 벌레 영상도 나오니까, 라고 줄리아나가 덧붙이자 초록이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나비는 어때?”

 

“...나 나비도 싫어.”

 

펜을 들여다보다 초록이는 손을 멈췄다.

 

“..., , 그냥 펜이면 되거든. 이거... 굳이, , 그냥... 괜찮으니까? 그냥 펜이 좋으니까.”

 

모처럼이니까 기념품이라고 생각해.”

 

이것 봐, 라며 줄리아나는 꽃이 핀 볼펜을 들었다.

 

주기적으로 물과 햇빛을 주면 계속 잉크가 나오는 펜이야아. 벌레가 꼬이지 않게 처리했어.”

 

그건 엄마가 개발한 거고 그 옆에 통나무 볼펜은 내가 만든 거, 라고 줄리아나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무에 물이랑 햇빛을 주면 언젠가는 꽃과 잎이 필거야.”

 

나도 그렇게까지 자란 건 한 번밖에 못 봤지만- 무엇보다 그거 시간이 지나면 자라서 길어지니까 불편하려나아.

 

그걸 들어서 수첩에 긋자 보통 사용하는 볼펜보다는 묽은 듯한 잉크가 나왔다.

 

필기감은 어때?”

 

괜찮은... 것 같아.”

 

그립감도 괜찮고, 무슨 종류인지는 모르겠지만 폭신폭신해서 손목에도 좋은 듯하다.

 

그렇게 감상을 말하자 줄리아나는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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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9

2018. 6. 15. 01:29 | Posted by 호랑이!!!

 

플로라는 비명이 들리자 달려서 가까이 오는 사슴의 목을 잡고 올라탔다. 사슴은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달렸는데 그 뒤로도 사슴 두 마리가 뛰어와 각자 헨리와 다니엘을 태워서 숲의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로즈, , 괜찮나!”

로잘린과 판달루치아의 옆에는 대리석 같은 팔을 가진 기사와 마력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사냥개가 있다. 이름을 불렀지만 그들은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둘이 대치하는 것이 플로라의 쪽을 보았다. 거미와 개, 코끼리를 뒤섞어 놓은 듯한 거대한 마물은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괴성을 질렀고 단은 검을 뽑았다.

헨리, 위험하니까 내 뒤에 있어!”

어째서 이 정도의 마물이 여기에!?”

헨리의 비명소리와 함께 플로라는 손을 들었고 동시에 나무뿌리와 덩굴 같은 것이 땅에서 솟아났다.

당황하지 말아라.”

그들을 태우고 온 사슴들은 들이받을 것처럼 머리를 낮추고 앞을 노려보았고 땅에서는 뿌리가 돋아났지만 어느 쪽도 움직이지 않았고 마물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서로를 재어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얀이 뛰었다. 동시에 마물은 날이 달린 것처럼 날카로운 앞발을 들었으나 땅에서 솟아난 것은 마물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었고, 그 사이에 단은 로즈와 판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기사와 사냥개는 거대한 마물을 처리했고 마물은 단단한 뼈와 약간의 가죽만을 남기고 자연의 마력으로 변해 흩어졌다. 그 사이에 얀은 숲의 가장자리, 가장 끝에 도달했다.

해조차 들기 어려울 정도로 울창한 플로라의 숲. 풀은 무성하게 자라나고 인간에게 호의적인 그 숲. 그 너머.

“....사막....?”

황야, 쪽이 맞겠군.”

아직 모래로 변하지 않은 붉은 빛 바위가 어디까지나 깔려 있었고 한때는 자랐던 것 같은 나무가 검고 마르게 돋아 있었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처럼 변해 깎여나갔다. 흙먼지 바람이 불었지만 땅은 뜨거워 보였고 내리쬐는 해에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는 화산이 솟아 먼 곳에서도 무언가가 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얀은 귀에 손을 대고 자세한 소리를 듣는 듯했다가 뒤로 돌았다.

“...공주님이 저를 부르셨군요.”

알아차렸구나, 장하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며, 플로라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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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슬슬 찬바람이 부는 때가 되었다.

 

예란이도 줄리도 돌아올 때는 보온 마법이 걸린 커피를 하나씩 사 들고 들어오는 것이 습관이 되고 향이도 나갈 때는 초록이가 만든 목도리를 가지고 나간다.

 

그러다 간만에 h가 놀러왔다가 며칠째 집 안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내는 초록이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한가해 보인다?”

 

, ?”

 

이제 상자를 만들어두는 때잖아. 지금 주문이 안 들어온다고 방심하면 안 돼.”

 

뭔데?”

 

이 곳에서 하는 장난 중 하나인 것 같다.

 

h가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이맘때부터는 적당한 상자를 준비한다고 한다.

 

그러다 처음으로 눈이 오면 눈을 담아 사람들에게 보내는데 눈 상자인 것을 알고 돌려보내면 받은 사람이 승리, 모르고 열어버렸다면 보낸 사람의 승리.

 

“...별걸 다...”

 

커플들 사이에서는 엄청 인기거든, 여는 순간 벌칙이 나오는 쪽지도 있는데 볼래? 재미있어.”

 

이럴 줄 알았다며 h는 상자를 우르르 쏟아놓았는데 상자는 재질도 크기도 모양도 장식도 가지각색이라 화려했다.

 

초록이는 가장 가까이 있는 상자를 열었다.

 

“...멸치 액젓 먹기, 앉았다 일어났다 열 개, 노래 부르기... 뭐 평범하네.”

 

분홍색 상자는 커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뽀뽀하기, 손잡고 걷기, 일일 데이트권, 소원 1회권 같은 뻔한 것을 보다가 초록이는 뚜껑을 덮었다.

 

단번에 흥미가 떨어진 것 같은 초록이를 위해 h가 빨간색 상자를 내밀었다.

 

여기 빨간 색은 성인용이야.”

 

그러자 초록이는 잽싸게 상자를 받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빨간색 상자를 흔들었지만 안에서는 이렇다 할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럼 눈 넣은 게 들키지 않아?”

 

성인용이니까 상대의 동의가 먼저라고.”

 

어디 보자. ...이 옷을 입어줘?”

 

상자가 열리자 안에서는 의상이 손에 잡기 편하도록 튀어나왔다.

 

“......?”

 

천이 어디 있는데...?”

 

다른 거 열어 볼게. ...이걸 사용해서 오늘.... ....‘이거가 뭔데?”

 

뭔진 몰라도 썼나 보다...”

 

투 머치 인포메이션.

 

그렇지만 이런 걸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부럽다.

 

초록이는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일단 평범한 상자들하고, 분홍색 상자들하고, 그리고 빨간색 상자 수량은 얼마나 만들어야 하나.

 

h는 초록이가 메모하는 것을 보다가 어깨를 툭툭 쳤다.

 

넌 허가 안 받았으니까 성인용 물품은 제작 못 해.”

 

뭐어!”

 

초록이의 흥미가 다시 식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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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 14:34 | Posted by 호랑이!!!

 

이게 뭐예요? 아니 그 이전에 이걸 왜 상대해야 하나요?”

 

영상은 복사본을 줄 테니 일주일 후에 시험을 치르도록 하지.”

 

자세한 것은... 향씨가 설명해 주리라고 믿어요.”

 

그동안은 이 도시 어디에 가도 괜찮단다.”

 

그런 대답을 듣고 초록이는 밖으로 쫓겨났다.

 

향이 초록이를 데리고 간 곳은 카페로, 방음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방 여럿으로 나뉘어있다.

 

그 중 하나에 들어갔더니 지친 표정을 한 줄리아나와 미간을 좁힌 예란이가 있었는데 초록이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초록!”

 

별 일 없었어?”

 

일반 사람에게 마법을 보여준 것이나 무허가로 기억을 지운 댓가로 황예란은 카드 및 도구에 마물을 소환하여 빙의시키는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자 예란이는 시무룩하게 카드를 내려놓았다.

 

“...다만 마법에 대해 알게 된 이초록이 마법사가 되기를 희망한 점, 마력을 일깨운 점 등으로 초록이 제대로 마법사가 되어 마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초록이 만든 카드에 한해 허가함.”

 

뭐야아, 괜찮네.”

 

그리고 홍 줄리아나는 방조한 죄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

 

“....”

 

다만 예란이랑 같은 이유로 완화되어서 초록이가 시험을 합격하도록 도와야 해.”

 

시험은 뭔데? 17살 때 치르는 그거랑 같은 거?”

 

그래. 대신에 얘 대상은 키메라야.”

 

그제야 제대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마법사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존에 책에서 보던 것이나 역사 속의 마녀와 별다르지 않았으나 현대에 와서는 마법사와 다른 사람의 기준이 보이는 사람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나.

 

보이는 것이나 마력 같은 것은 유전이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고.

 

이제 마법사들은 공무원이라고 한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마법사는 예술가나 연구원의 면모가 더 강했어. 그런데 그 연구원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실수로 만들어버리고 바깥에 방생해버린 키메라나 호문쿨루스나 골렘 같은 것들이 사고를 쳐 버리거든~”

 

사람들한테 보이지 않는 생물들이 치는 사고도 만만찮거든~”

 

그 외에 뭔가 필요하거나 한 일이 있으면 차출되고오...”

 

하는 일은 많지만 요즈음은 특히나 실수로 만들어진 무언가와 생물의 처리가 더 많은 모양이라 최소한의 실력으로 요구받는 것 같다.

 

아까 자료 주었던 그 사람이나 1층에서 서류 처리하던 사람이나, 하다못해 저기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사람도 전부 키메라 정도는 잡을 걸.”

 

물론 영 적성이 아닌 사람들은 서류 처리를 한다던가, 아니면 연구나 제작으로 간다던가... 뭐든 할 일은 많아아.”

 

만약에 마법사로 태어났는데 락 가수가 되고 싶다던가,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던가 하면?”

 

마법사들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을 해도 되고?”

 

낮에는 락 가수, 밤에는 마법사로 일할 수도 있고. 본인 체력이 된다면.”

 

밤에는 락 가수, 낮에는 마법사 아냐?”

 

몰라.”

 

아무튼, 이라며 줄리아나는 빈 파르페 그릇을 밀었다.

 

일주일이나 시간은 있으니까! 오늘은 약초밭 가알래?”

 

약초밭이라니, 얘는 약초랑은 인연이 없을 거라고!”

 

약초는 모든 마법사와 마녀들의 가장 친한 친구야! 아무리 갓 마법사가 되었어도 기본적인 약초학은 알아야지!”

 

무슨 소리, 당연히 소환술이지 소환술! 요즘에는 마물이나 마물의 마력을 써서 강화시키는 게 트렌드거든? 전에 텔레비전 나온 사람 못 봤어? 누구에게나 친근한 것은 있기 때문에 소환술이 더 쉽고 효과가 좋다고!”

 

그것도 다 약초가 필요한 일이잖아! 자기랑 어떤 약초가 맞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야!”

 

자기랑 풀이 맞는지 아닌지부터 알아야지! 약초 안 쓰는 소환술도 얼마든지 있거든?”

 

너 지금 풀이라고 했냐!라고 또 큰 소리가 나는 동안 신 향은 예란이의 탄산 에이드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나중에 우리 집으로 와서 자. 방은 많으니까, 저 두 명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면 데려와.”

 

고마워.”

 

그럼 일이 많아서, 이따 보자.”

 

그렇게 향이 떠나고, 예란이와 줄리아나는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결론이 나지 않았는지 초록이에게 바싹 다가왔다.

 

소환술부터 할 거지! 거긴 그냥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만 검사해보면 되니까!”

 

그 검사 다 하는데 일주일은 넘게 걸릴 걸! 차라리 약초를 배워서 약 만드는 걸 연습해보면 훨씬 유용할거야. 무엇보다 그건 방법을 따라하면 실패하지는 않으니까!”

 

둘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마치.

 

자신에게 새로운 게임이나 만화를 같이 하자고 권하는 것처럼.

 

그것도 광적으로.

 

초록이는 서비스로 나왔다는 쿠키를 들어 끝을 깨물었다.

 

다른 건 뭐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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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4

2018. 5. 30. 14:14 | Posted by 호랑이!!!

어느 정도의 마력이 생기기는 했군요.”

 

도시는 그럭저럭 평범해 보였다.

 

빌딩도 몇 개 있고, 체육관 같은 것도 있고, 연구소 같은 것도 있고, 가게도 있다.

 

비둘기도 있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도 있고, 동물병원도 있고.

 

다른 것이 있다면 허공을 날아다니는 동물이나, 동물 아닌 것들이나, 가끔은 사람 정도.

 

향은 초록이를 데리고 낡은 건물로 갔다.

 

시청처럼 생긴 건물이었는데 1층에서는 창구와 사람들이 앉아있고 23층도 비슷해 보인다.

 

그러다 위층에는 사무실, 사무실, 사무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올라가면서 초록이는 안내판을 읽을 수 있었다.

 

맨 아래부터 민원 접수, 조정과, 변호사실, 제작 및 수리 접수과, 우편, 이사 관련, 그리고 맨 위는 제 1사무실 겸 회의실.

 

이사 관련은 뭐...예요?”

 

여기서 살던 사람들은 다른 도시에서 살 때 마법이나 관련된 것을 드러내지 않도록 교육받습니다. 그리고 살 집을 알아봐주거나 근처 인간을 알아봐주거나.”

 

무슨 기준인데요?”

 

마법이 얼마나 잘 먹히나, 혹은 마력양.”

 

엘리베이터는 3층에서 열렸다.

 

[이사를 위한 이사 층입니다. 당신의 새 이웃에 대해 궁금하거나 새로 이사간 곳에서 뭘 해야 할 지 궁금할 때 찾아주세요]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초록이는 고개를 들어 마치 그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스피커 쪽을 봤다.

 

이초록 자료!”

 

종이 몇 장을 든 사람이 뛰어왔다.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향은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발짝을 움직여 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그 사람이 자료를 건네자 향은 종이를 넘기며 안의 글을 읽었다.

 

초록이도 힐끔 넘겨다보았는데 그 시선을 느끼자 향은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덮었다.

 

얼마쯤 올라가자 다시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자료를 건네주었던 사람은 다른 자료도 같이 가져가겠다며 내렸다.

 

마침내 둘이 남게 되자 초록이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 수 있었다.

 

향 씨.”

 

?”

 

저 싫으세요?”

 

그러자 신 향은 입술을 꽉 깨물면서 숨을 들이쉬었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

 

“...?”

 

“...안녕, 난 신 향이야. 황예란이 친구고 땅 위의신이라는 가문의 가주야.”

 

초록이가 갑자기 내밀어진 향의 손을 잡자 향은 위아래로 흔들고 손을 놓는다.

 

땅 위의 신...!”

 

신은 그냥 성이야. ‘땅 위의가 우리 가문에 붙는 별명.”

 

그렇구나. 안녕, 나는 이 초록이야. 예란이랑 줄리 친구.”

 

너만 아니었으면 예란이가 이 도시로 돌아올 리 없다는 생각을 했어, 미안해. 사실은 네 탓이 아닌데.”

 

이 도시에 돌아오는 게 문제가 있어?”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향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넌 이제부터 가주와 세 명의 원로가 있는 회의에 부쳐질 거야. 넌 어차피 마법사가 아니니까 별 일 없을 테니 잘 듣고 무조건 예란이에게 유리하게 말해.”

 

뭐가 유리한 소리인데?”

 

뭐든 하겠냐고 물으면 한다고 말해.”

 

그거면 되냐고 다시 물으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상아색 바닥이 깔린 것이 보였다.

 

[2 회의실입니다, 1 회의실에 가지 않는 가주 및 동행자 분들은 여기에서 내려 주십시오]

 

옆은 계단식으로 아래가 잘 보이도록 빙 두르듯이 책상과 의자가 자리했고 거기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파일과 모니터에 코를 묻고 있다가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들 짜증이 가득하거나 피로한 얼굴로, 주위를 날아다니는 조그만 것들이 커피나 주스 같은 것을 잔에 채워주면 홀짝이다가 내려놓았다.

 

신 향입니다. 이 초록씨를 데려왔습니다.”

 

그제야 초록이는 가장 큰 책상에 앉은 사람을 보았다.

 

다른 책상에 비해 세 배는 더 큰 책상에는 새하얗게 센 머리를 틀어 올리거나 묶거나 아예 짧게 잘라버린 할머니가 세 분 앉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책상에 종이가 한두 장 있을 뿐 모니터나 키보드 같은 것은 없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요, 뭐라도 좀 마시겠어요? 차라던가, 커피, 주스?”

 

그 전에 앉혀야지.”

 

한 사람이 손을 흔들자 공중에서 안락의자가 쿵 떨어졌다.

 

흔들의자나 바퀴 달린 의자가 좋니?”

 

뭐든 마실 거면 테이블도 있어야 하고.”

 

조금 바랜 빛은 있지만 안락의자는 푹신하고 햇볕에 말린 냄새가 난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떨어진 테이블에는 하얀 테이블보가 펼쳐지고 조그만 머그컵이 향과 초록이 앞에 하나씩 놓였다.

 

이렇게 오게 되어서 많이 놀랐을 거 알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초록씨에게 나쁜 짓을 하거나 아프게 하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에요.”

 

그냥 일이 어떻게 되었나 해서 부른 것뿐이니까, 겁먹지 말고.”

 

쿠키도 좀 줄까?”

 

쿠키캔이나 주스병, 주전자를 든 조그마한 인형들이 주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주스..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러자 의기양양한 표정이 된 주스병 인형이 다가와서 컵에 넘치도록 주스를 따라 주었다.

 

쿠키캔 인형도 조그마한 접시에 쿠키를 담아 올려주었고, 초록이는 어딘가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에도 몇 가지 검사결과가 모니터에 올라갔고 향은 열심히 변호를 했고 몇 가지 질문을 한 뒤에는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한다.

 

기분이 이상한걸.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기분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향이 제대로 조사를 했니 안했니, 자료가 어떠니 화를 냈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줄리아나도 예란이도 엄청나게 긴장을 한 것 같았는데 좀 예상과는 다른 전개라.

 

그러다 세 원로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초록씨.”

 

?”

 

너는 마법사가 될 수 있단다. 기억을 지우고 평범한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처럼 이렇게 마력도 생겼으니 마법사가 되지 않겠니?”

 

좀 더 가까이 오라고 손을 까딱이자 의자가 초록이를 앉힌 채로 찌익 끌려갔다.

 

우리나라의 마법사들은 가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니 아마 네 가문을 만들어야 할 거야.”

 

알아보았더니 10대쯤 전까지는 너희 할머니에게 가문이 있었어요, 그 가문이 가지고 있던 금액이라던가 그런 것은 시에 기증되었으니 당신이 하겠다고 하면 예산이나 집, 기구 등은 전부 내주겠어요.”

 

알고 보았더니 갈수록 마법사는 적어지는 추세라고 했다.

 

남자가 적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냐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건 그냥 마법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어머나, 겁을 줄 수도 있으니 그런 말은 안 돼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라면 겁을 먹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에 안심할 거야.”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벌을 받는단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잖아?”

 

마법사 뿐 아니라 일반적인 법에 대해서도, 라면서 오른쪽에 앉은 원로가 종이를 가리켰다.

 

당신에게 사기를 치려고 하는 사람들, 강도, 악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 혹은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구 등에서 안전할 수 있어요.”

 

왼쪽에 앉은 원로도 종이를 내밀었다.

 

거주지나 작업실, 연구실을 포함한 이런 집을 지어줄 수 있단다. 태어난 아이가 마법사 적성이 있다고 하면 원래 이 정도 금액을 주는데 연구비를 포함하고 집을 짓는 비용을 빼서 이 정도를 매월 줄 수 있거든.”

 

옆을 힐끗 보았더니 향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러면.”

 

가운데 앉은 원로는 그 앞에 있는 모니터를 돌려 초록이가 볼 수 있게 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형태에 개구리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털이 부분부분 나 있는 무언가가 찍혀 있었다.

 

이걸 상대해 줘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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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3

2018. 5. 29. 18:05 | Posted by 호랑이!!!

초록이는 눈을 떴다.

 

아침의 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아서,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어슴푸레한 바깥임에도 오후나 된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서는 줄리아나와 만두가 자고 있었는데 만두의 뜨뜻함이 싫은지 저리가... 라는 잠꼬대를 하고 있음에도 만두는 더 줄리아나에게 파고들었다.

 

인났나.”

 

그리고 예란이는 오프라인으로 게임을 한다.

 

또 제대로 자지 않았는지 책상 위에는 탄산 캔이 나뒹굴고 있었고 가운데는 자주색 천을 펼쳐 카드를 늘어놓았다.

 

이 카드는 초록이도 자주 본 것으로 투박한 그림이 특징일 뿐인 평범한 카드였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은은한 빛이 나고 있어서 쳐다보고 있자니, 예란이가 말을 걸었다.

 

한 장 골라 볼래?”

 

아무거나?”

 

그래.”

 

초록이는 별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예란이가 매일 하는 평범한 오늘의 운 점치기겠지.

 

그런데 손을 대는 순간 카드에서는 팍 불꽃이 튀더니, 따끔함에 놀라 손을 잡는 순간 은은한 빛이 꺼져 버렸다.

 

?”

 

아아?”

 

“....뭐야!!!! 이거!!!!!!”

 

무슨 일이옹!”

 

만두는 불빛이 사라진 카드를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냐아아앙!!!!”

 

초록이는 안절부절 못 하다가 옆에서 머리를 감싸쥔 예란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뭔데... 미안해.”

 

아니... 이게 니 잘못은 아닌데...”

 

초록씨, 혹시 평소랑 다른 점은 없었옹?”

 

그러고 보니, 카드에서 약하게 빛이 반짝반짝 했는뎅.”

 

예란이는 카드를 모아 정리하다가 그 말을 듣고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뭐야, 큰 일이야?”

 

난 씻고 올 테니까 줄리 좀 깨워줘.”

 

응야.”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고 초록이는 줄리아나를 흔들었다.

 

줄리, 일어나.”

 

으엉..... 몇 시야....?”

 

“6. 그런데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란이 카드 때문에 그래.”

 

카드으...?”

 

줄리아나는 눈을 뜨더니 머리맡을 더듬어 안경을 찾았다.

 

네모난 안경을 끼고 몸을 일으킨 줄리아나는 책상 위에 놓인 카드 뭉치를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아하...”

 

이거 귀찮게 됐네. 줄리아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옷장을 열어 불편해 보이는 외출복을 꺼냈다.

 

이제 무슨 일이 생기는 거야?”

 

우리 다 같이 마법계로 가는 거야아. ...가기 싫다, 정말.”

 

사실은 마법계 같은 건 아니고, 그냥 마법사들이 사는 도시지만 마법계라고 말하는 쪽이 이해하기 쉬우려나아? 라며 줄리아나가 웃었다.

 

셋이 준비를 마치고 예란이 만두에게 연락을 하라고 말했다.

 

높은 옷장 위로 올라갈 때처럼 몸을 웅크렸다가 쭉 펴는 순간 만두는 사라졌고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초록이의 눈이 빛났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카드 때문이야?”

 

그런 것도 있고.”

 

카드에서 나오던 그거 마력이거든, 내가 빙의시킨 마물에서 나오는 빛. 그런데 네가 그게 보였잖아.”

 

보이면 안 돼?”

 

그걸 볼 수 있는 건 마법사들 뿐이니까.”

 

정정.”

 

갑자기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초록이가 고개를 들자, 이 쪽을 엄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또래의 사람이 있었다.

 

!”

 

오랜만이야.”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향이라는 사람은 창문 너머에 있었고,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쟤는 마법사라고 할 수는 없지. 그냥 마력이 마법사 수준으로 생긴 것 뿐이니까.”

 

창 밖을 내다보았더니 커다란 가마가 있었고, 향이 문을 열듯이 벽을 열어 예란이와 줄리아나, 초록이가 타도록 했다.

 

가마 안쪽은 푹신한 쿠션이 있고 어색하게 자리에 앉자 벽면에서 주스와 과자가 담긴 선반이 튀어나왔다.

 

이것 좀 먹어, 다들 아침 안 먹었지.”

 

고마워.”

 

주스를 컵에 따르는데 향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래 이 사람은 마법사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야.”

 

왠지 내가 얘 기억을 없앤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아.”

 

이번에 가게 되면 너 회의에 부쳐져.”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 전에. 저 사람을 좀 조사해야겠어.”

 

얼마 안 있어 가마 문이 열렸다.

 

그러니까 너희 둘은 집에 인사드리고 와.”

 

향은 예란이와 줄리아나를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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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8

2018. 5. 19. 00:20 | Posted by 호랑이!!!

 

헨리 제임스 헤일로, 통칭 얀은 서재로 돌아와 가장자리에 금박이 들어가 화려한 편지지를 찾았다. 옆에는 짙푸른 봉투를 하나 놓고 황금색 초와 용이 새겨진 도장을 꺼내놓고 펜을 들었는데 다니엘이 잠시 짐을 챙기러 간 잠깐 사이에 쓰려는 기색이 만연했다.

“...그래서 저희는 세이렌의 설득을 실패했습니다. 이 일은 여기서 그만...”

오빠!”

문이 쾅 열렸다. 그 너머에 있던 것은 로잘린 레이첼 헤일로, 자신이 만들어낸 듯한 켄타우로스의 등에 타고 있었다.

로즈, 집 안에서는...”

켄타우로스를 만들지 않는다, 알지만!”

그리고 숙녀는...”

오빠 또 나만 두고 가려고!”

얀은 방금까지 쓰던 편지를 손으로 덮었다. 켄타우로스는 로즈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고 로즈는 얀에게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다니엘 오빠가 말해줘쪄! 플로라 공주님한테 갈 거라고!”

만약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일단 귀찮음에서 해방되고, 로즈한테도 널 놓고 가려는 게 아니고 그냥 안 가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지. 여행 안 가도 되고, 그 끔찍한 마차도 안 타도 되고. 그렇지만 나중에 또 여왕님이 어떻게든 가라고 보낼 수도 있고, 공주님도 점검차 한 번은 보러 가야 하기는 하고. ... 하면서 머리를 굴리는데 듀크 단이 돌아왔다.

준비 다 됐다.”

아니, 그게.”

!”

로즈의 손에 분필이 들려 있다.

“...다 같이 가자.”

켄타우로스는 희미한 유황 냄새를 내더니 익숙한 얼굴로 돌아왔다. 판달루치아를 보던 얀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둘이 친해졌군.”

아니야!”

그렇지?”

헬렌은 갔나?”

그 인간은 몇 시간 전에 갔다.”

크게 한숨을 쉬더니 얀은 금박이 있는 편지지를 물에 담갔다. 책상 서랍을 열어 꺼내놓았던 짙푸른 편지봉투를 정리하고 새로 골라서 꺼내면 아까 꺼내두었던 것 못잖게 진한 청록색 봉투와 은박이 들어간 편지지가 책상 위에 오른다. 시험 삼아 펜을 몇 번 긋고 얀은 글을 써내려갔다.

플로라 폰 우드 공주님께. 헨리 제임스 헤일로 자작이 인사드립니다. 연락을 몇 주 전에 드리는 것이 예의임을 알고 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급박하게 서신을 보내오니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로 몇 가지 인삿말을 더하고 잘 접어 봉투에 넣은 뒤 인장을 눌러 찍은 뒤 고개를 들자 얀은 방 안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야호! 플로라 공주님한테 간다!”

드디어 할 마음이 들었나보군!”

또 무언가 기뻐하려는 판달루치아를 툭툭 건드리고 얀은 편지를 내밀었다.

뭐야?”

이걸 플로라 공주님한테 배달. 위치는 그린 영지. 까만 눈에 녹색 머리카락인 사람이니 찾기는 쉬울 거다.”

귀찮은 녀석. 판달루치아는 입모양으로 투덜거리더니 편지를 쥐었다. 문을 열고, 나가서 닫았는데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문을 다시 열어보았더니 거기에는 유황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다들 분주하게 짐을 싼다 어쩐다 해서 다음날 아침 로즈는 잠을 못 잔 티가 나는 얼굴로 눈을 비비며 마차 앞에 섰다. 그리고 또 날아다니는 마차를 타는 끔찍한 시간을 보냈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자그마한 궁의 앞에 내리게 되었다.

여기에 공주님이 계신다고?”

단이 궁을 보자마자 한 첫 번째 말이다. 벽은 크림 같은 하얀색이고 물감이며 은을 녹인 것으로 기둥에 무늬도 넣은 데다 둥그스름한 지붕에도 장식을 한 것인지 가장 높을 때의 태양빛에 환하게 빛나고 있다. 온 벽과 물건에 새며 나무, 사슴들이 우아하게 양각되어 있고 사용한 재료도 전부 내외국을 따지지 않은 고급품들. 이 정도의 건물은 과연 공주라는 사람이 가질 만한 물건이기는 한데. 너무 작지 않나.

잘 왔다, 오랜만이구나 모두들.”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얀은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고 단도 후다닥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면 그 곳에 있는 사람은 짙은 녹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는 듯 흘러내린 순한 인상의 사람이다. 놀랍게도 장식은커녕 레이스 한 자락도 달리지 않은 간소한 옷차림인데다 발은 맨발이었지만 가장 눈을 끄는 것은 플로라를 태운 커다란 사슴이다. 사슴이 무릎을 굽히자 플로라는 미끄러지듯 땅에 내려섰고 몇 번 박수를 치자 너구리가 바구니를 들고 뒤뚱뒤뚱 걸어왔다.

원래라면 테이블에서 차를 마셔야겠으나 이 집에는 부릴 사람이 없으니 부디 이것으로 만족해다오.”

바구니 안에서 나온 것은 널찍한 천이었는데 새들이 귀퉁이를 물어 풀밭에 넓게 펼쳤고 깨끗해 보이는 접시와 찻잔이 그 위에 놓였다. 플로라는 손수 찻주전자를 잡았다가 파득 놀라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 뜨거워!”

괜찮아요?”

로즈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자 그 안에서는 녹색 동그라미가 있는 간호모를 쓴 간호사가 솟아났다. 간호사가 플로라의 손을 찬물로 식혀주는 동안 로즈의 메이드가 사람들에게 차를 따르고 간식을 꺼냈다. 얀은 플로라를 빤히 쳐다보다가 플로라의 곁에서 안절부절 못 하는 너구리며 저만치 떨어져서 지켜보는 대형 동물로 시선을 옮겼다가 생긋 웃었다.

좋아 보이는군요, 공주님.”

얀 오빠, 공주님은 지금 손가락을 다쳐, , 다구요!”

그 말에 플로라는 하얀 찻잔을 잡은 로즈를 내려다보았다.

로즈는 내 모습이 이상하지 않으냐?”

이상하다니, 어디가요?”

플로라가 얀에게로 시선을 보내자 얀은 미소띈 얼굴을 한 번 기울였다.

로즈는 어렸으니까요.”

로즈도 잘 컸군.”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성공을 축하하는 말과 격려를 건네려는 찰나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숨기려들지 않는 가죽 날개와 한 쌍의 뿔이 돋은 잘생긴 얼굴은 낯익은 것.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걸맞지 않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곤 하는 그 얼굴은, 로즈를 보자마자 활짝 밝아졌다. 아이답게.

어서와, 로즈!”

여긴 판의 집이 아니에요.”

로즈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쳤다. 플로라의 옆에 있던 너구리는 로즈가 내미는 비스킷을 찻물에 담가 씻고, 또 받아 씻고, 씻고 있었는데 플로라가 헛기침을 하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로즈, .”

?”

숲에 가면 꽃이랑 딸기가 많이 있으니까 가서 놀다가 오렴.”

플로라는 작은 바구니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메이드가 가지고 온 작은 바구니에 과자와 차 한 병을 담은 것을 내밀자 로즈와 판은 바구니를 들고 숲으로 갔다.

저 둘만 가기에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사라진 쪽을 보던 단이 묻자 마악 차 한 모금을 마신 플로라는 잔을 내렸다.

이 숲에 있는 한 괜찮아.”

나는 이 숲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 있느니라, 하고 말하는데 얀이 손을 들었다.

그럼 이제 온 이유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얀과 단은 설명했다. 세이렌의 부탁, 푸른 아이들, 여왕님의 명령이며 모든 것을. 그 이야기를 들은 플로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다.”

플로라 공주님.”

가기 싫다.”

왕족의 반열에 오르셨는데 한 번은 가셔야지요.”

사람은 싫다, 귀족은 더더욱 싫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단은 그들의 주위에 기척이 늘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유감스럽게도 그 기척은 호의적이지 않는데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아서 습관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려 하자 얀이 그 손을 눌렀다.

우드는 이미 나를 버렸다. 나는 이 곳에서 죽을 때까지만 사는 것이 소원일 뿐,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고 싶지 아니하다.”

우드의 사람들을 나쁘게 보는 것은 이해하지만 세이렌과 여왕님을 생각해주십사 합니다.”

나는 우드를 공작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으니. 더는 할 말 없다.”

원하신다면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조치를 하겠습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애당초 가족 때문에 괴로워본 적 없는 자가 가족 때문에 괴로워지는 마음을 어떻게 안다는 말이냐.”

다니엘은 공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 옆의 헨리는 케이크에 포크를 꽂아 넣을 뿐 조금도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렇기에 긴장하는 것은 오히려 다니엘 자신뿐인 것 같다.

우드 공작, 공작의 남편, 그들의 아들과 딸을 모두 치우면 됩니까?”

헨리,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면 안 돼.”

나는 진지하다니까. 공주님의 문제가 그걸로 해결된다면 나쁘지 않잖은가?”

안돼와 돼 뿐인 말을 하는데 플로라가 손을 저었다.

조용히 좀 해 보아라. 누구 하나는 살려두어야 하지 않겠나.”

어째서 살려두려고 하시는 겁니까?”

공작의 다른 귀찮은 일을 떠맡아야 하지 않으냐.”

그렇게 말하는 플로라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자 플로라는 오히려 안도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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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산과 왕자님

2018. 5. 5. 04:41 | Posted by 호랑이!!!

A는 푸른 색 봉투에 찍힌 은색 삼각형을 노려보았다.

 

이 나라의 국기는 신, 귀족, 백성을 뜻하는 삼원으로 되어 있고 자신의 소속에 따라 삼원의 부분을 그리는 것이 정석이다.

 

농사와 목축이 주된 일인 백성과 친한 농사의 여신이나 짐승의 신은 백성을 포함한 구역과 신을 그리고 귀족과 관련된 부분은 제외하며 귀족 중에서도 신전과 연이 있는 사람은 그 부분까지 온전하게 원을 그리는 것이 일례.

 

그러나 그 삼원의 가운데에 있는 삼각형은.

 

, 귀족, 백성,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왕가의 상징.

 

“...가기 싫어....”

 

왕실 직속 배달부가 직접 우편을 가져다주고 큰 소리로 임명장을 외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쏠렸지, 거부권이라는 건 없고, 거기에 더해서 이사까지 해야 할 테니까.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다가 A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이 탄 마차가 궁전을 빠져나갈 때 울면서 손을 뻗던 아주 작은 아이를.

 

그 때 스물이었던 자신이 벌써 마흔이 넘었으니 그 분도 이제 스물은 넘었겠군.

 

오빠.”

 

“B, 들어올 때는 노크 좀 해.”

 

뭐 어때, 오빠는 어차피 공부밖에 안 하잖아.”

 

올해 마흔 살이 되는 B는 어린 나이부터 백작 지위를 물려받아 훌륭하게 가문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B는 은색 삼각형이 찍힌 봉투를 마음대로 열더니 안에 든 임명장을 읽었다.

 

“...기술의 궁전에서 숙식하며 그 장으로서 일하고 공헌해주기를 바란다, 이거 나쁘지 않네.”

 

뭐가 나쁘지 않아? 정말 가기 싫어!”

 

아티산 직위잖아? 오빠는 그냥 자작이니까 백작 대우인 아티산은 파격적이도록 좋은 조건 아니야?”

 

사람 많은 곳은 싫어. 발표회는 어쩔 수 없다지만 무도회 같은 게 열리면 또 일해야 하고, 무슨 행사라도 생기면 거기서 일할 테고. 그러면 또....!”

 

안 갈 거야?”

 

가야지. 그 말을 하고 A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됐어. 필요한 것만 간소하게 가지고 올라가고 나머지는 거기서 사.”

 

깔끔하게 정리하고 BA를 마차로 올려 보냈다.

 

그것이 겨우 일주일 전.

 

왕궁 안에 있는 건물 중에 따로 떨어진 기술의 궁전이라고 불리는 별채는 여러 발표회와 왕손의 교육을 위해 호화롭게 지어져 있었다.

 

원래는 연금 부서, 마법 부서, 연마 등 각 부서의 고위직만도 스무명이 넘었고 아래 연구원이나 직원까지 합하면 백 명이 넘었지만.

 

A가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만둘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그만두어 연금 부서의 총 인원은 다섯 명, 대장장이 일을 하는 연마 부서는 열 명, 행정직 직원들도 반수 이상 그만둔데다 A 직속인 마법 부서는 겨우 세 명이다.

 

그런 주제에 잡무는 많고, 그래서 연구도 진척이 없고, 아티산인 자신은 이런저런 일에까지 불려나간다.

 

원래라면 60분으로 주어진 점심시간에서 30분을 서류에 쏟아 부은 오늘도 지쳐 A는 비척비척 바깥으로 나갔다.

 

왕실 정원사가 돌보아주는 정원은 보기 아름답고 쉬기에도 좋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이 없다.

 

누군가는 시간에 늦지 않게 자신을 깨워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A는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몸을 뉘였고 따뜻한 바람이 뺨을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없는지, 왜 잡무까지 기술의 궁전까지 넘어왔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또 그만둘까보냐...”

 

웅얼거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의식이 사라졌다.

 

이십분이 지나 본 궁전에서 A에게 일을 맡기러 왔지만, 그 사람들은 누군가의 손짓에 곤란해 하면서도 돌아갔다.

 

누군가는 높았던 해가 가라앉고 어두운 하늘에서 별이 뜰 때까지 옆에 앉아 있다가 누군가가 찾으러 오자 그제서야 어깨에서 망토를 풀어 A의 위에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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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니까 꽃

2018. 4. 4. 14:36 | Posted by 호랑이!!!

하얗게 먼지 낀 유리창으로 해질녘의 빛이 들어와 다락 안을 메웠다.

 

황혼이라고 부르는 저 해는 방을 비출 뿐 아니라 A의 몸을 감싸고 흘러 손을 들면 황금빛을 떠올릴 수 있었고 깊게 숨을 들이쉬면 해의 냄새도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락방의 그림자진 구석구석에는 과거가 낡은 인형이나 쓰지 않는 흔들의자, 빛바랜 액자의 모습으로 둘러앉았고 이렇게 늘어진 햇빛이 간지럽혀 깨울 때면 쌓여가는 먼지조차도 추억의 길을 지나오느라 묻은 시간의 가루처럼 빛났다.

 

어디가 더라고 할 것 없이 다락방은 낡았는데 유독 한 군데만 말끔하고 마루판도 반질반질하다. 거기에 A는 빛바랜 깔개를 깔고 책을 펼쳤는데 아까보다 확연히 붉어진 빛이 종이에 퍼졌다.

 

그 빛은 더 탁한 붉은 빛이 되었다가 빛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만큼 약해졌다가 언제라고 말하지도 못할 찰나에 사그라들었다.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게 된 A가 창문을 열자 유리에서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빛 대신 바람이 A의 몸을 휘감았다. 옷깃에 남아있던 아주 작은 햇빛 조각도, 그 온기도 털어낸 대신 밤의 상쾌함으로 깊게 숨을 들이마신 A는 책을 덮었다.

 

달을 찾으러 간 책 속의 사람은 숲으로 갔을 것이다. 더 이상 차갑지 않은 밤바람이 그에게도 불었을 것이고 갓 돋은 싹이나 마악 깨어난 씨앗, 흐르기 시작한 샘물의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설로 전해지는 샘에 도달하면 찾을 수 있겠지. 샘에 비친 달을.

 

그 순간 무언가가 A의 뺨을 간질이며 떨어졌다. 바닥에서 주워들면 어두운 밤하늘이라도 비칠 만큼 엷은 꽃잎이 달빛에 반짝였다. 창밖으로는 푸른 하늘에 달이 떠오르고 있었고 빛을 받은 꽃잎 한 장, 한 장이 빛나 바람이 일 때마다 날아올랐다.

 

마치 달빛에 빛나는 커다란 샘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나무들은 A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끝없는 저 멀리에서부터 바람이 불면 수없이 많은 꽃잎들이 떠올라 작은 창문으로 쏟아졌다.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A는 팔을 활짝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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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7

2018. 3. 29. 16:23 | Posted by 호랑이!!!

저보고 붉은 여왕님의 초대를 거절하라구요...? 제가요...?”

레이디 세이렌은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까만색 나무와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칸막이 뒤에는 하얀 천을 씌운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있었고 안으로 들어오면서 흘긋 본 다른 칸막이 뒤에는 1인용 침대도 하나 있었다.

극장이 그녀의 대기실이 아니라 사는 집이라는 말은 정말인가, 세이렌은 다른 칸막이 뒤에서 차를 타오고 과자를 내 왔다.

어려운 이야기라는 건 아네.”

방금 전까지 얀에게 사랑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며 재잘거리던 세이렌은 단호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헨리, 추수제에 제가 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삼백년이나 마물도 외적도 침입하지 않게 된 이 나라는 부유하고 풍요로워서 문화며 건축 등을 발달시켰다.

오로지 유흥을 위해서 극장이라는 건물을 짓고 난 후에는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오페라며 연극, 무용 등이 본격적으로 꽃피었고 거기에 귀족이 참가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는 악기나 노래나 무용을 뽐내는 사람 중에 귀족이 적지 않게 되었다.

덧붙여 농민이 중심이어야 할 추수제의 무대에서도 귀족이 아니면 서지 않게 되었고.

처음에는 수도 근처의 농지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부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여러 문제가 있기도 해서 현대에는 완전히 귀족이 무대에 선다.

“...그 자리를 다시 평민 신분인 저에게 주신 거예요. 붉은 여왕님은 이번 추수제를 빌어 평민과 귀족 간의 거리를 다시 좁히려고 하고 계세요.”

내가 알바는 아니지.”

얀이 투덜거리듯 내뱉자 세이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헨리, 당신에게 우리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이런 일까지 양보할 수는 없답니다.”

여왕님의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그러자 세이렌은 입을 다물었다. 긍정이라고도, 부정이라고도 하지 않은 채. 방은 조용해졌고 단의 과자 깨무는 소리만 들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세이렌이었다.

당신은 나빠요.”

결국에는 다 너희를 위한 일이야... 라고 하면 좀 위로가 될까?”

안돼요.”

세이렌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가 좋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맞대었다.

하지만 헨리가 제가 바라는 말을 해 준다면 위로가 안 될 것도 없어요.”

그건 안된다는 걸 알지 않나.”

다시 세이렌의 얼굴에는 미소가 돌아와서, 마치 갓 이슬을 맞은 꽃처럼 생기가 넘쳤다.

헨리, 우리 앞에는 지금 두 가지 길이 있어요. 하나는 쉬운 길이고, 하나는 어려운 길이예요. 길을 선택하는 것은 헨리랍니다.”

어려운 길, 어려운 길로 할거네.”

이거 안 먹히네, 라고 투정부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세이렌은 웃었다.

그럼 그 어려운 길이 뭔데?”

플로라 공주님께 가 주세요.”

그 아가- ...플로라 공주님이 왜?”

습관적으로 아가씨, 라고 하려던 얀은 세이렌의 눈빛이 바뀌려고 하자 급히 말을 바꾸었다. 세이렌은 마치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라고 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공주님이 무서워하고 있으니까요.”

그 아가씨... 아니, 공주님은 항상 무엇이든 무서워하지 않나.”

헨리,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에요. 만약 공주님의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저도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요.”

세이렌은 찻주전자를 기울여 자신의 잔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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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6

2018. 3. 27. 05:01 | Posted by 호랑이!!!

헬렌 카투스는 여느 주말처럼 편지를 배달해왔다.

안녕 얀! 다니엘! 왜 둘 다 죽을 상이야?”

“...다니엘이 괴롭혔네.”

“...얀이 나빠.”

오늘의 간식은 연어알을 넣은 카나페였다.

편지가 가득 든 가방을 뒤집어 털어낸 헬렌은 여느 날과 달리 다니엘 폰 카이트(듀크 단)와 헨리 제임스 헤일로()가 축 처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싸우기라도 했어?”

얀이 여왕님에게서 명령을 받았는데 지나치게 느긋합니다.”

... 헬렌은 단박에 이해했다.

저 뼛속까지 충성심 넘치는 미래의 기사 나리는 여왕님의 명령이 최우선이니 그것부터 하라고 했을 것이고 우리들의 관리자는 무슨 꿍꿍이에서든 이때껏 미뤘겠지.

뭐야, 무슨 일인데?”

“...무도회의 가수로 레이디 세이렌을 데려오라는데.”

뭐어?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질질 끌고 있어?”

하필이면 그 날이 추수제일세.”

그게 뭐 어때서?하는 친우를 보고 얀은 한숨을 쉬었다.

푸른 여왕님은 뭘 맡고 계시지?”

군권.”

추수제는 누가 주도하지?”

붉은 여왕님?”

끝이 왜 온점(.)이 아니라 물음표인데?

얀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행사나 축제는 붉은 여왕님이 주도하시는 일일세, 레이디 세이렌은 지금 최고의 가수이고.”

당연히 붉은 여왕님이 초대하셨겠지.

그런데 지금 푸른 여왕님이 자신의 손님으로 초대해 달라고 하는 것일세.

다니엘 자네는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몰라.”

그 말에 단은 아, 하고 깨달았다.

붉은 여왕님이 하시는 일이면 붉은 여왕님이 하게 하면 되지, 왜 푸른 여왕님이 초대하시는 건가? 푸른 여왕님이 초대한다면 붉은 여왕님의 일을 뺏는 것처럼 보일 텐데.”

한 절반 정도.

자매끼리는 꽤나 다툴 거라 생각하네.”

그 말로 일축한 얀은 그대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하하, 그래도 여왕님의 명령인데 따라야지.”

헬렌은 소파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그들의 관리자 주위를 맴돌았다.

“...정신 사납대도.”

신경쓰지 마.”

헬렌은 폴짝 뛰어 날아서 소파를 넘어가더니 바닥의 쟁반에 놓인 카나페를 가져다 입에 넣었다.

바작바작 톡톡 튀는 식감을 만끽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데 단이 찡그리는 것이 보인다.

“...있지, ?”

“...”

듀크 단의 표정이 그닥 좋지가 않은데~”

공중에 둥둥 떠서는 귓가에 머리만 내밀어 속닥거리고 있지만 다 들린다.

단은 읽던 책마저 옆에다 내려놓고 얀을 노려보고 있었다.

헬렌, 자네까지 나한테 재촉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귀찮아서 원.”

방금 그 말은 그래도 헬렌한테 너무한 게 아닌가 하여 단이 한 마디 하려는데, 헬렌은 화내는 대신 방긋 웃었다.

그러나 헬렌은 소파에 늘어진 얀의 양 다리를 잡더니, 그대로 날아서 열린 테라스 밖으로 던져 버렸다!

헬렌!!! 카투스!!!”

난 로즈랑 놀거니까, 썩 가시지!”

단은 화닥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겉옷인 망토만 손에 들고 얀을 따라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렸다.

, 무사하냐!”

잘 다녀와~”

 

하여간 우리 애들은 너무 난폭해.”

얀은 다행스럽게도 푹신한 잔디 위에 떨어졌는데 그럼에도 아프다며 단이 뛰어내리는 그 때까지도 누워 있었다.

아주 깔끔한 자세로 잔디에 착지한 단은 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일으켜 주게.”

잡고 일어나.”

나는 청순가련하고 연약하네.”

헛소리, 라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음에도 얀은 그대로였고 단은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 등을 받쳐 일으켜 주었다.

고맙네.”

두 번은 없어.”

단은 너무 나한테만 차가워.”

얀은 망토 자락을 들고 눈가를 닦는 시늉을 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차갑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얀이 쫓아나가면 단은 마차를 잡고 문을 열어둔 채 기다리고 있다.

얀은 그 마차에 냉큼 올라탔다.

 

골든 공연장까지 부탁하네.”

마차 바퀴가 굴렀다.

문을 닫고, 얀은 쿠션에 몸을 기댔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거네만, 레이디 세이렌은 현재 최고의 가수라고 불리며 그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은 천국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하지.”

나도 레이디 세이렌이 누구인지는 알아. 몇 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공연을 본 적 있거든. 본 적은 그 때 한 번 뿐이지만 과연 아름답더라.”

얼굴이, 아니면 노래가?”

얀이 짓궂게 물었다.

가수가 여자라는 이유로 목소리 외의 것을 평가할 만큼 속물적이지 않아.”

단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 혹시 세이렌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가수?”

아니. 신화 속의 세이렌.”

모르는데.”

얀은 그럴 줄 알았다, 면서 설명했다.

세이렌은 용이 살아있을 때 멸종당한 유일한 마법 생물이네. 여자의 얼굴에 몸은 새고 바다의 돌섬에 사는데 목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해서 배가 바위에 부딪혀 난파되도록 만들지.”

상체가 여자, 하체가 새라는 하르퓌아랑 비슷하네. 뱃사람들이 죽지 않기 위해 세이렌을 전부 죽여버린 건가?”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귀족들이 호사한 취미를 누리기 위해 세이렌을 잡았다고 하더군.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날개의 깃털은 뽑아다 장식에 쓰고, 특별히 노랫소리가 아름다운 새가 낳은 알은 비싼 값에 매매되기도 했네.”

이게 역사든, 아니면 무슨 생물 수업이든 단에게 특별히 흥미진진한 수업은 아니었다.

사람이 멸종시켰나?”

그렇다고 해야 할까.”

얀은 잠시 말을 멈추어 단의 시선을 끌었다.

기록된 문서에 따르자면 어느 날 세이렌들이 특별한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군. 대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짝짓기를 하고 싶다, 식사를 하고 싶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등의 막연한 이미지를 담은 것이었는데 이 날은 전부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사람에게 다가갔다고 하네.”

어떤 이미지?”

고향에 가고 싶다.”

서서히 단의 눈에 흥미로움이 차는 것이 보였다.

같이 지낸지가 거진 십 년이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면 궁금해 할 지 정도는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지.

얀은 소리 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세이렌을 기르는 사람들도, 사람들의 하인들도, 전부 고향으로 가버렸다네. 고향에 닿자마자 왜 여기 있는지 깨닫고 서둘러 세이렌에게 돌아갔지만 그 때는 이미 세이렌들이 굶어죽은 뒤였지. 낭만주의자들은 이 일에 대고 스스로 멸종한 생물이라고 부르고 있다네.”

알이 남아있을 거 아니야?”

당시 사람들은 세이렌에 대해 공부하기도 전에 무작정 잡아들였네. 알은 모종의 이유로 깨어나지 않았고 결국 남은 것은 알 껍데기 뿐이었지.”

재미있네...”

마차가 멈추어 서고 마부가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착했습니다!”

얀은 마차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폼만은 좋았으나 착지에서 비틀거린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왜 오면서 세이렌 이야기를 했는지 알겠나?”

가수 세이렌을 만나러 가니까.”

자네가 세이렌에게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해서네.”

얀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극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아가씨 역시 우리 중 하나거든.”

세이렌이 얀의... 뭐라고 할까, 얀의 관리인? 관리 받는? 관리당하는? 일컬어 푸른 아이들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에 단은 로즈와 헬렌을 떠올렸다.

역시 그 실험인가 뭔가를 견뎌내고 계획적으로 길러진 아이들이라 그런지 어리건 여리건 당차고 강하고 그렇다.

그러면 세이렌도 그렇겠지?

세이렌은 멀리서 한 번 본 것이 전부였지만 몸에 주렁주렁 단 화려한 장신구며 그렇게 특색있는 오만한 목소리 하며.

개인적으로 만난 세이렌도 ‘~했냐?’같은 말투일지도 모른다.

바지를 입거나 푹신하다면 소파에라도 드러눕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단은 뭔가 빠뜨린 것 같다는 생각에 발을 멈추었다.

왜 그러나?”

뭔가 빠뜨린 것 같은... 느낌이... !”

단은 입구 쪽으로 서둘러 걸어가서는 바로 옆의 꽃집에서 커다란 꽃다발을 살폈다.

... 걸음이 빠른, 하아.. 빠르네, !”

헨리, 종종 하는 말이지만 너도 역시 운동을 좀 해야 해.”

칼 들고 뜀박질하고 그런 건 내 적성과 안 맞아. 후우... 그리고, 얀이라니까...”

얼마 안 되는 짧은 거리였음에도 얀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뭘 사가나? 웬 꽃? 설마 세이렌에게 주려고?”

그래야지.”

? 세이렌은 그냥 가수일 뿐인데. 자네한테는 평민이기도 하고.”

네가 더 이해가 안 가는데. 레이디를 만나러 가는데 선물 없이 어떻게 만나?”

얀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단을 쳐다보았다.

단은 튤립과 장미가 섞인 꽃다발을 집어서 주인에게 값을 치렀다.

지위가 남작이라 하더라도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푸른 여왕이 직속으로 그를 부리기 위해 명목상 부여한 것에 불과하니 예의가 어떻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하는 것은 책을 통해 배운다고 그랬던가.

넌 세이렌이나 악마나 좀브 같은 건 잘 알면서 이런 걸 잘 모르더라.”

왜 모르는지 이젠 알지 않나. 그리고 그거 좀비네.”

얀은 단이 든 꽃다발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여자를 만나러 갈 때는 꽃을 사서 들고 가는 것이라고 머릿속에 입력하는 중일 것이다.

극장 안, 붉은 벽지에 호화로운 그림이나 조각을 군데군데 두어 꾸민 복도를 따라 걸으니 이 앞이 대기실이라며 지키고 선 사람이 보였다.

얀이 손을 까딱하자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냈고 단도 가볍게 인사를 보내고 서둘러 얀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따라 걷자 안에서부터 은은하게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래 좋다.”

몇 걸음 더 걷자 노랫소리가 더 커졌다.

어린 공주의 책임과 소녀로서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 어딘가 찡하게 했다.

코 끝이 매워 오는 것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데 얀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가시밭길의 소녀로군.”

어찌나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표정이었는지, 눈물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믿지 못할 뻔 했다.

고전소설 어느 왕자에 대하여를 각색한 여왕의 길이라는 극의 아리아지.”

멋진 노래야... 조금 들었을 뿐인데도 울 것 같네.”

멋진 노래지. 부른 사람은 더 멋지고 말이네.”

노랫소리는 가장 안쪽 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얀과 단이 다가갈수록 노래는 조금씩 바뀌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다른 곡을 불렀다.

밝고... 신나는 노래군. 뛰고 싶어지는데?”

이번에는 뱃사람들 노래군. 세이렌이 가장 즐겨 부르는 것일세.”

세이렌이 뱃노래를 안다고?”

아리아만 부를 것 같은 가수가 남자들이나 부르는 뱃노래를 부른다니, 하지만 마물 세이렌을 생각하면 알아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하며 단은 앞장서 노크를 두어 번 했다.

세이렌 양, 계십니까?”

어머?”

나온 사람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길게 길러 진주장식 끈으로 정리한 하얀 머리카락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붉어져 머리카락에 색을 입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러면 대개 머릿결이 상함에도 어지간히 공을 들였는지 윤기나게 찰랑거렸다. 키는 가장 보기 좋다는 키에 몸은 늘씬하고 가벼운 레이스가 달린 실내복 한 장으로 감쌌을 뿐인데도 사랑스럽게 어여뻤다. 그리고 온순하게 아래로 끝이 내려간 눈은 속눈썹이 풍성하고...

이런 묘사를 구구절절 왜 하고 있느냐면.

세이렌의 목소리가 달콤했기 때문이다.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책을 읽으며 모든 남자들이 상상했을 맑고 부드러운, 마치 꽃잎이 다가와 사뿐히 피부에 닿는 듯 가녀린 목소리가 목소리와 어울리는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는 헨리가 온 줄... 헨리! 어서와요! 아아, 날 만나러 올 줄 알았어!”

세이렌임이 분명한 그 아가씨는 단을 쳐다보았다가 얀으로 시선이 가 멎자 활짝 웃으며 얀의 품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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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아이들 #5

2018. 3. 26. 15:49 | Posted by 호랑이!!!

밤을 샌 탓인지 다니엘은 여느 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로즈는 자신의 방에서 자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재에서 헨리는 아직도 가득하게 쌓인 편지를 읽고, 태우고, 버렸다.

어제 잠을 자지 못 했으니 평소보다 일찍 자도 괜찮겠지만 할 일이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어서.

이 지방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요정 이야기를 많이 해. 단순히 요정 이야기가 유행하는 걸까? 요정이 깨어났다면... 요정은 종에 따라서는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 생물이니까 나와도 괜찮겠지만. 만약 요정이 아니라 우리 중 하나가 만들어낸 것이라면?’

만들어내는 능력은 로즈 계통이지.

로즈를 필두로 한 서너명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중에서 둘은 죽었고...

요정은 약한 생물이니 아직 용이 깨어나기까지는 여유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테라스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안녕, .”

얀과 비슷한 나잇대의 사람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지?”

얀은 그를 보자마자 읽던 편지를 불 속에 던져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보는군.”

멋진 집이네. 우리가 살던 곳이랑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야.”

그 사람은 안으로 훌쩍 뛰어들어와서는 우아하게 양각된 벽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난롯불이 있고, 누구나 좋아할 디저트도 있고, 차도 있고, 책도 가득하군.”

그는 벽을 메운 책꽂이에서 하드커버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덕분에 아주 푹 잤어. 지겨울 정도로.”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다가 탁, 덮으니 책은 검게 물들어갔다.

얀은 책을 잡은 그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벌써 일어나서, 뭘 하려고?”

검게 물든 책이 손 안에서 흐늘거렸다.

내가 할 일이 있을 거 아냐. 전쟁... 파괴... 누군가를 없애는 일이라던가.”

그 사람의 시선이 얀에서 책상에 가득하게 쌓인 천과 종이조각으로 가 멎었다.

저건가.”

아니네.”

그 사람은 천천히 걸어 얀의 앞에 와 섰다.

얀은 평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서, 느긋해 보이는 그와는 대조적이었다.

정말 아니라면, 그렇게 긴장하면 안 되지.”

그 사람이 잽싸게 손을 뻗어 편지를 잡아챈 동시에 얀은 그 사람의 어깨를 잡았다.

!”

얀은 아예 그를 꽉 끌어안았다.

끌어안긴 쪽은 얀을 밀어내려는 듯 버둥거렸으나 서서히 움직임에서 힘이 빠졌고, 결국에는 얀에게 기대 정신을 잃었다.

철퍽 소리를 내며 검게 물든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얀은 그를 안은 팔에서 힘을 빼었다.

조금만 더 자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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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2

2018. 3. 17. 14:51 | Posted by 호랑이!!!

"...그래서, 이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어? 안 놀라?"

 

"... 나 마법사 나오는 이야기 좋아하고. X 포터 같은 거 좋아했고..."

 

"좋아하는거랑은 다르지!"

 

예란이가 책상을 탕 쳤다.

 

만두는 깜짝 놀라 꼬리를 펑 부풀렸다.

 

"나도 안데르센 좋아하지만 그 사람이 내 앞에 나오면 놀랄 거라고!"

 

"나도! 난 세종대왕!"

 

"그 양반들은 옛날 사람이잖아... 만난다면 좀비겠지."

 

그런 소리를 듣다가 만두는 테이블 위에 두 발로 서서는 인간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하옹, 초록씨. 이 소묘의 성은 만, 이름은 두울이라 하옹. 겉으로는 예란 아가씨의 애완 고양이이나 실상은 대대로 아가씨 가문을 모셔온 가문의 36대손이옹.”

 

...”

 

초록이는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가져온 고양이용 간식을 내밀었다.

 

만두는 철퍼덕 앉아서 양 앞발로 야무지게 간식을 잡아 뜯었다.

 

홍 줄리.”

 

인간이 뜯어주지 않아도 된다니 어쩜 똑똑한 고양이로다.

 

으응.”

 

줄리도 예란이처럼 동물 있어?”

 

아니이, 나는 테이머 쪽이랑은 인연이 없어서.”

 

줄리아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초록이는 둘을 보다 질문을 던졌다.

 

마녀야?”

 

요즘에는 그냥 다 마법사라고 불러.”

 

아니이, 마녀는 이제 안 쓰는 말이야.”

 

그렇구나. 마법사구나.

 

초록이는 이제 시선을 다시 만두에게 옮겼다.

 

그런데 만두는 왜 도망친거야?”

 

그것은 예란 아씨 때문이옹!”

 

뭐가 예란이 때문인데?라고 물어보려다 초록이는 보아 버렸다.

 

만두를 죽어라고 노려보는 예란이를.

 

하지만 아가씨, 이제는 숨기기엔 너무 늦어버렸다옹.”

 

그렇다고 구구절절 다 말해주자고? 안돼!”

 

초록씨는 아가씨의 동무 아니옹? 이제는 포기하고 말할 때라옹!”

 

그 꼴을 보던 초록이는 줄리 쪽을 보았고, 줄리아나는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예란이 쪽으로.

 

쟤가 너 기억을 지웠어.”

 

!”

 

그런데 실수도 했어.”

 

뭐어!”

 

그래서 밖에 사람들이 없어졌어.”

 

뭐어어!”

 

창을 힘차게 열어 제낀 초록이도 예란이 쪽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네 짓이라고!”

 

만두는 흉흉한 초록이와 줄리아나를 번갈아보다가 앞발을 들었다.

 

예란이 쪽으로.

 

그렇다옹. 예란 아가씨가 초록씨 앞에서 마법을 써버렸고, 그래서 기억을 지우게 되었는데 실수로 이렇게 되었다옹! 그래서 이 만 두울은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저 주인마님께 알려야 했는데 예란 아씨가 막으려고 했고, 그러다 바깥으로 내던져진 것이었옹!”

 

초록이는 예란이를 확 돌아보았다.

 

아니, 그게. 기억을, 지워야만, 했거든. 진짜로, 우리 쪽 법이 그렇거든.”

 

하지만 아가씨는 기억삭제 자격증 시험에 떨어졌잖옹.”

 

그래도 공부는 했으니까 어떻게 하는지는 알잖아!”

 

만두는 사람은커녕 쥐 한마리도 없는 바깥을 가리켰다.

 

초록이는 미간을 콱 찌푸렸다.

 

만두를 바깥에 던지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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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속의 인어

2018. 3. 1. 01:12 | Posted by 호랑이!!!

이 곳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나무의 향이 풍겼다.

 

A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바랜 녹색으로 뒤덮인 이 의자에는 두툼하고 넓은 팔걸이가 둘 있었는데, 한 쪽에는 과일이 얹힌 크림 케이크 조각이, 한 쪽에는 진한 색 차가 가득한 찻잔이 올라가 있다.

 

일렁이는 촛불은 책의 페이지를 부드러운 색으로 물들였고 특별히 불그스름한 색이 페이지에 덧씌워질 때마다 책 속의 세계는 한 겹 더 감성적이고 온화하게 변했다.

 

한참이나 책에 빠져 있는데 벽난로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A는 읽던 책을 덮고 커다란 장작을 꺼져가는 불 위에 얹었다.

 

그러면 얼마 안 가 다시 불은 환해졌고 배부른 불도마뱀은 비늘을 번들거리며 수북해진 재 속에 앞발을 담근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A는 화목한 가족이 커다란 푸딩을 먹는 대목에서 자기도 모르게 포크를 들었다가, 케이크 위를 장식한 체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요정과 눈이 마주쳤다.

 

절인 체리를 받아든 요정은 신이 나서 화분 쪽으로 달려갔고 마침내 A의 독서가 끝났다.

 

따뜻하고 포근한 여운에 허우적거리다가 이제는 다 식었을 찻잔을 집자 말소리가 들려왔다.

 

, 마실 거니?”

 

밤바다와 같은 빛 비늘이 있는 인어가 찻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너는 언제 여기 들어왔어?”

 

바다로 가는 길이었는데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이 차가 마음에 드니까 마시지 않으면 좋겠어.”

 

A는 찻잔을 책상 한구석에 두고 커다란 컵에 물을 부었다.

 

마시지 않을게. 난 물을 마시면 되니까.”

 

물을 마시고, A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언제나 소란스러운 길이 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차들은 스치기만 해도 다치게 할 것처럼 지나쳐가고, 사람들은 웃음은커녕 말마디 하나도 건네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쳐간다.

 

A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붉은 색, 하얀 색 줄무늬 보도블럭이 지느러미처럼 나 있었고 걸음을 뗄 때마다 붉은 벽돌에서는 붉은 물고기가 튀어나와 하얀 모래 같은 보도블럭 위에서 퍼덕이다 다시 붉은 벽돌 속으로 되돌아갔다.

 

파닥, 파닥.

 

펄떡이는 소리.

 

그러다 붉은 빛에 고개를 들면 무채색으로 자란 고층 건물을 물들이며 해가 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와아- 해가 진다.”

 

여기랑 저기랑 하늘 색이 달라.”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A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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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2018. 2. 12. 06:43 | Posted by 호랑이!!!

만약에 당신이 사는 곳에 좀비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한 이야기라면 자주 해 보았다.

 

우선은 마트에 가서 생수와 통조림을 잔뜩 가져온다, 과자를 가져온다 등등.

 

촛불과 성냥을 준비한다, 뭘 가져온다, 밧줄로 간이 발판을 만들어서 밖에 매달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무색하도록, 이 도시에 생긴 이변은 Tv 등에서 흔히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 춥다...”

 

이 도시에 사람이 없어진 지 오늘로 한 달째.

 

집으로 돌아오자 룸메이트인 예란이가 공책을 덮으며 맞아 주었다.

 

오늘은 어때?”

 

역시 없어.”

 

버스 정류장에 하루 종일 기다려 보았지만 오가는 버스는 한 대도 없다.

 

사람은커녕 동물이라면 길고양이 그림자도 보지 못 했고.

 

핸드폰이며 인터넷은 여전히 먹통이다.

 

영화 보고 싶어-”

 

컴퓨터에 있잖아.”

 

그런 거 말고! 새로 나온 거! ‘의사 뉘시게라던가 ‘LA의 악마라던가 초자연같은... 그리고 그리고.... SNS도 하고 인터넷으로 게임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나태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

 

초록이는 겉옷을 벗어던지고는 바닥에 깔아둔 이부자리에 파고들었다.

 

흐어으어 뜨십다...”

 

초록이 왔어?”

 

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한 손에는 장미꽃을 든 홍 줄리아나가 들어왔다.

 

장미는 또 어디서 났어?”

 

꽃집에서 가져왔어.”

 

꽃집?”

 

그 왜, 학교 안에 있는 작은 거.”

 

꽃집!”

 

마악 이불에 머리끝까지 파고들었던 초록이는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러고 보니 꽃집이 있었지, ? 용케도 안 시들었네.”

 

부엌과 방을 나눠둔 문을 닫으며 줄리아나가 들어왔다.

 

줄리아나의 손에는 작은 봉지가 들려 있었는데 나갈 때는 고양이 사료가 있던 봉지가 텅 비어 있었다.

 

밥 먹었어?!”

 

, 그릇 안에 있던 거 없어졌어.”

 

그제야 초록이는 아차하더니 일어나 앉아서는 예란이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괜찮아, 만두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릇이 비었잖아. 근처에 있는 거야.”

 

바깥에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 소리가 났다.

 

안 그래도 위태하게 보였던 나뭇가지에서 우둑우둑 소리가 나더니 이파리 없이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초록이는 베란다로 달려가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으아, 바깥에 엄청 바람이 부나보다. 일찍 들어오길 잘 했어.”

 

만두, 바깥에서 많이 춥겠지... 진짜, 누나 속이나 썩이고!”

 

걔는 똑똑하니까 어디 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줄리아나가 예란이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는데 초록이가 패딩을 들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 어디 가?”

 

나뭇가지 주우러!”

 

초록이가 홱 뛰어나가자 예란과 줄리아나는 서로를 마주보았다가 문 쪽을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춥다더니.”

 

나뭇가지 같은 건 왜 주우러 간 거지.”

 

이제 슬슬 해가 지고 있고, 배가 고팠지만 예란이와 줄리아나는 초록의 뒤를 따라갔다.

 

초록이는 나뭇가지와 상자를 줍고 있었다.

 

뭐 해?”

 

만두 잡게!”

 

밥그릇 근처에 상자를 세우고 이것저것을 세우더니 초록이는 예란이에게 손짓을 해서 만두의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

 

만두가 잘 쓰던 푹신한 담요를 상자 안에 넣고 바깥에 놓은 간이 밥그릇에 만두가 좋아하는 간식을 놓고 초록이는 손을 털었다.

 

끝이야.”

 

바깥에 만두 집 만든 것 같아.”

 

차라리 그럴 걸 그랬나.”

 

다시 바람이 훅 불자 초록이는 부르르 떨었다.

 

이제 밥이라도 가지러 갈래?”

 

줄리아나가 편의점을 가리키는데 예란이가 손을 저었다.

 

내가 아까 갖다놨어.”

 

인스턴트 밥 몇 개랑 컵라면 한두개랑 전자렌지에 데워먹는 미트볼 같은 거.

 

인스턴트 완전 만만세- 나 이제 슈퍼마켓 야채 코너는 보지도 않고 지나오잖아.”

 

넌 원래 야채 코너는 안 보잖아.”

 

야채 안 좋아하니까! 라고 줄리아나가 덧붙이자 초록이가 일부러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요즘은 아니거든!”

 

이렇다 저렇다 종알종알 떠들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아까 놓은 덫 쪽에서 털썩 소리가 났다.

 

초록이는 냅다 복도를 달려 창문을 열어젖혔다.

 

담요를 덮고 돌을 쌓아 여간해서는 움직일 수 없게 한 커다란 상자가 덜그럭 덜그럭 움직이고 있다.

 

만두인가봐!”

 

미친, 효과 개 좋네.”

 

, 빨리 가 봐! 데려와야지!”

 

셋은 다시 온 곳과는 반대로 뛰었다.

 

뛸수록 상자는 덜그럭거리는 것이 커졌고, 안에서 들이받는지 퍽 소리도 났다.

 

뭐라고 예란이가 달래려는 찰나, 상자가 찢어졌다.

 

발톱에 걸려 찢어진 정도가 아니고.

 

터지다시피.

 

돌멩이는 바닥을 구르고 회색 담요 조각은 상자 조각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상자 조각을 밟고 선 것은 커다랗고 검은 형체였다.

 

땅거미가 내리는 어두운 길에 초록색 눈 두 개가 번뜩였다.

 

만두! !”

 

크르르르르르

 

만두라고?

 

자동차랑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은 그 검은 짐승이.

 

어제까지 사람 몸을 등반하려고 허우적거렸던 그 작은 아기고양이라고?

 

만두야, 초록이 앞에서 이렇게 변신하면 안 돼!”

 

줄리아나까지 외치고 있다.

 

초록이는 줄리아나, 예란이, 만두라고 불린 그 검은 짐승을 번갈아보다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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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물

2017. 12. 17. 13:40 | Posted by 호랑이!!!

“...언제 오셨습니까?”

 

종이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A는 붓으로 글을 적다가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방금.”

 

납신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내가 하지 말라 일렀다.”

 

A는 용포를 입은 B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려 글을 적기 시작했다.

 

왕이 올 때마다 일손을 멈췄다가는 할당된 양의 반도 시간 내에는 못 할 터이다.

 

이놈, 무례하다.”

 

저 바쁘거든요.”

 

짐이 더 바쁘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서 일을 하시지요.”

 

바깥으로 손짓하자 이제는 왕의 방문에도 익숙해진 시동이 차며 과자를 내어 왔다.

 

과자가 도착하자 A는 과일이 들어간 향 좋은 것부터 집었다.

 

오독오독 깨물면서 한 장을 다 쓰고 다음 것을 집어먹으면서 다음 장을 내놓는데 B의 손이 과자 접시로 가는 것을 발견했다.

 

안됩니다. 좀 기다리셔야지요.”

 

너 저번처럼 과자 한 접시를 다 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아 들켰나.

 

A는 쳇, 혀를 차면서 차를 후후 불어 마셨다.

 

처음 만났을 때는 참 귀여웠는데.”

 

B가 투덜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A의 심정으로는 남는 것이 후회밖에 없었다.

 

고관대작이었다는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날 즈음에 은퇴해서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지방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원래 출세에 뜻이 없었고, 한양에 가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한양이며 궁궐, 임금님에 대한 환상을 키워가면서 꾸역꾸역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를 했다! 행복해했고!

 

지나치게 행복하고 감격해서는, 임금님이 고개를 들어 보라하던 그 한마디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왕의 용안을 봐 버렸다.

 

그리고 왕은 그때부터 자기가 재미있다며 심심하면 찾아오게 되었다.

 

감동도 한두번이지, 이제와서는 왕이고 뭐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뿐.

 

처음 뵈었던 당시라면 제가 많이 순진했지요.”

 

지금은 순진하지 않다 말이냐.”

 

생각보다 아버지의 기질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냐, 거 안되었구나.”

 

다음 종이를 꺼내던 AB의 다음 말에 고개를 홱 들었다.

 

품계를 높여줄까 했는데.”

 

B는 동그랗게 커진 A의 눈에 웃음을 참느라 과자를 집어 깨물었다.

 

진짜입니까.”

 

왕은 함부로 농을 치지 않는다.”

 

AB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 B에게 따갑도록 꽂히고 있었다.

 

B는 상에 턱을 괴더니 A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니 아버지 말고 할아버지를 닮아서 오랫동안 내 옆에 있거라.”

 

동그랗게 눈을 뜬 A의 얼굴 앞으로 향긋한 차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B가 혹시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알아보려는 듯이,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빤히 본다.

 

한참이나 그러다가.

 

A가 입을 열었다.

 

저의 할아버지도 아십니까?”

 

“...아니 그게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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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도서관

2017. 9. 14. 17:20 | Posted by 호랑이!!!

책이 빼곡하게 채워진 도서실이지만 한켠에는 빈 책꽂이가 창고에서처럼 쌓여 있고 투박한 철문은 닫혀 있는 곳.

 

사람의 물건은 있지만 사람은 오지 않는 곳.

 

그 곳이 A가 사는 곳이다.

 

이상하게도, A는 둥둥 떠서 천장에 발을 디디고 설 수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두꺼운 책장도 없는 것처럼 통과할 수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이상하게도, 삐걱이는 저 철문만은 지나갈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해 뜨는 것을 보고 저녁이면 해 지는 것을 보고, 창가의 새며 벌레가 집 짓는 것을 구경하던 어느 날. 도서관에 사람이 왔다.

 

A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을 이용해 도서실의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날아가는 놀이를 하고 있다가 B가 들어오자 고개를 휙 돌렸다.

 

거의 몇 달만에 보는 새로운 사람은 밖이 많이 더운지 등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목덜미가 벌겋게 익어 있다.

 

그 모습을 보자 A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덥겠다!”

 

엄청나게 낯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 쪽으로 날아가던 A는 에어컨 쪽으로 다시 총총 뛰어가 버튼 쪽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온 김에 바람 좀 쐬고 가! 물론 내 에어컨은 아니지만, 이거 여름마다 매일 켜주는 거거든. 여긴 사람도 잘 오지 않으니까 이렇게 혼자서 마음꺼어엇! 날아간다아아아아니야아니야!!! 날아가는거 아니야아악!!!”

 

B는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는 책장 사이로 걸어가 책 한 권을 빼냈다.

 

Dangerous Places for traveler

 

가장 먼저 고른 것은 빼곡하게 글이 적힌 책.

 

AB의 어깨 너머에서 책을 보았다.

 

“Schoolboy French... I... I... 아이아이... 빨라, 나 다 못 읽었어! 조금만 천천히-... 더 천천히! 좋아, 그 정도는 되어야... 아아아아 다시 빨라지고 있잖아! 휘리릭 넘기지 마!”

 

...꽤나 부산스럽게.

 

물론 책을 읽지 않는다고 부산스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간만에 손님을 맞은 강아지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니까.

 

이것 봐! 여기 비둘기 둥지 있어! 여기 항상 알 낳는데, 새끼 까는 건 두어번 밖에 못 봤다? 그치만 알 엄청 작아서 만져보고 싶어. 손만 있으면 만져보고 싶은데 이상하게 나는 여기서 안 나가지더라?”

 

어라?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전자 수첩? 크고 납작하다! 편할 것 같아! 아아 이거 핸드폰 렌즈 같은 거 달려있는데, 나 혹시 찍히려나? 요즘 전자수첩에는 카메라도 달려 있나보다!”

 

B는 읽어야 하는 책 목록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목록에 있는 책 한 권, 없는 책 두 권을 골라 B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 뭐야, ? 너 가는거야? 벌써? 여기 시계는 없지만 엄청 금방인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또 놀러와!”

 

철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닫히다가, 갑자기 열렸다.

 

문 뒤에서 있는 힘껏 손을 흔들던 A는 다음 말에 놀라 멈추었다.

 

B는 인상을 찡그렸다.

 

,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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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21. 22:36 | Posted by 호랑이!!!

 

“...그래서 머리가 그 모양 그 꼴이야?”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었구나, ? 저녁식사 겸 스터디를 하러 모인 자리에서 루 란 교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아직까지 머리를 그런 쥐 파먹은 꼴로 두면 어떻게 해요.”

 

더 자를까요, 페드 조교님?”

 

헛소리 마세요, 왕자님.”

 

교는 지팡이를 움직여 으깬 감자를 각자의 접시에 덜어놓았다.

 

그으래애, 머리카락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외교 관계도 성립하는 요즘 같은 때에, 머리를 더 잘라야겠어어?”

 

“...머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 꼴을 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지금 왕자님을 향하는 눈길이 정말... 정말... 흥미롭더라고요.”

 

그러면 아예 이러면 되에지이.”

 

그래 그래, 차라리 가발을 하나 사면 모를까, 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영은 교의 말에 나눠주던 닭고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아예 염색을 하자!”

 

원래 머리는 까만색이었으니까 이번에는 하얀색으로 어때, 예쁠 거야!

 

꼬시지 마, 영 교수님도 뭐라고 한 마디 해주세요. 저러다 순진한 왕자님이 악에 물든다구요오.”

 

페드는 나이프로 닭을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너어, 아주 날 악의 축으로 몬다아-?”

 

맞잖아, 이 심연에서 기어나온 덩어리야.”

 

희귀한 욕을 쓰네요, 페드.”

 

그러자 교는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는 페드의 갈색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넥투르식 욕이랍니다아-. 페드는 어릴 때 우리 부족에서 살았거든요-.”

 

넥투르 사람들의 영역 안에는 중요한 유적이 많이 있죠. 더군다나 라이비 사람이 넥투르 연맹으로 갔다니, 페드가 어쩌다 역사에 빠졌는지도 알 것 같네요.”

 

화기애애하게 말하며 다들 빵을 찢거나 주스를 컵에 따랐다.

 

그래서 교수님. 녹스 학생의 염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오-?”

 

영 필로이픈 교수는 약차에 설탕을 한 조각 떨어뜨리고는 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별 생각 없이 말했다.

 

젊을 때나 그런 걸 하죠. 나쁘지 않네요.”

 

그 말을 들은 교는 킬킬거렸고, 녹스는 더더욱 염색을 하지 않을 마음이 들었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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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것

2017. 6. 24. 22:59 | Posted by 호랑이!!!

AB가 만난 것은 도서실에서였다.

 

AB를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유명한 사람이니까. B가 지나갈 적이면 모두가 돌아보았다. 돌아본 자리에는 수군거림과 손가락질, 웃음소리를 남기고.

 

AB가 마주친 도서실, B는 구석진 자리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A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AB는 남들 입에는 친구 관계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자주 했으나 A의 우려와는 달리 B는 언어를 이해했고 제법 대화다운 대화도 나눌 줄 알았다.

 

오히려 가끔은 B가 자신들을 답답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도 받았고.

 

“B, 뭐 봐?”

 

-.”

 

A도 창틀에 턱을 괴었다.

 

등굣길을 따라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구경하기에는 좋은 나날이지.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아름답지?”

 

. 나중에 치우느라 고생은 하겠지만.”

 

꽃 말고.”

 

꽃 말고?

 

A는 다시 바깥을 내다보았다.

 

B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시선을 따라갔지만 그 시선의 끝은 꽃나무에 박혀 있었다.

 

꽃이 아름답지 않아?”

 

아니, 전혀.”

 

사람이 예쁜가?”

 

사람?”

 

B는 그 말에 A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사람이 아름답냐고, 기가 막혀하는 눈빛이었다.

 

그럼 뭘 보고 있었느냐고 물으려는 찰나 수업종이 울렸다.

 

B는 창가에서 일어나더니 교실 뒷문으로 나갔다.

 

나중에 들어온 선생님이 B를 찾을 때 바깥을 내다보던 AB를 발견했다.

 

마치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한껏 옷자락을 휘날리며.

 

B의 눈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비록 BA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어느날엔가 A는 알게 되었다.

 

AB를 보았을 뿐, B는 단 한번도 A를 본 적 없었다는 것을.

 

그러나 아직껏 한 가지만은 알지 못했다.

 

달을 좋아하는 시인은 달에 뛰어들었다는데 B는 무엇에 뛰어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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