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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비엘/판타지] 반짝이는 사람 4화

2017. 6. 23. 23:06 | Posted by 호랑이!!!

 

하늘도 땅도 기숙사에 돌아오는 학생들로 빼곡했다. 날개 없는 학생들은 걸어서 짐을 옮겼고 날개가 있는 학생들은 날아서 옮겼으며 어떤 학생들은 날개가 있음에도 날개 없는 친구와 함께 가기 위해 걷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걷는 유밀(세인트 외의 수인을 총칭)이 둘.

 

이봐요 왕자님, 알고 계시죠?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어제 학생이 보여주셨던 태도는 부적절했다는 거! 들어가자마자 그럴싸한 변명이라도 하면서 사과하지 않으면 자칫 교한테 불만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일 거라구요? 아니면 영 교수님한테나.”

 

나도 알고 있다!”

 

녹스는 소리를 질렀다가 아차하며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페드는 후욱 부풀었던 깃털을 부풀 때만큼이나 빠르게 가라앉혔다.

 

“...소리 질러서 미안합니다, 조교님.”

 

알면 됐어요, 녹스 학생.”

 

페드는 시무룩하게 꼬리를 늘어뜨린 녹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분의 차는 꽤나 있지만, 어쨌든 돌봐주어야 하는 후배 중 하나니까.

 

갑자기 배가 아팠다고 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주전자를 불에 올려두고 나왔다던가...”

 

둘은 나란히 날개를 펼쳤다. 학교 안에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날개를 맡기고 몇 번 날갯짓하면 몇 층 위에 있는 베란다에 발이 닿는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밟은 탓에 둥글고 반질반질해진 대리석을 넘어서 계단을 총총 올라가다보니 어쩐지 발걸음이 급해졌다. 어제 그 일은 역시 넥투르 인이 짜증나서 그랬다. 그 약냄새 날 것 같은 새파란 머리며,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그 기분 나쁜 말투라던가... 교수님한테 꼭 사과하고, 수업 준비를 도와 드리겠다고 말해야지. 페드를 뒤에 남겨두고 녹스가 뛰었다.

 

계단이 앞으로 여덟 칸.

 

앞으로 여섯 칸.

 

다섯, , .

 

마지막 세 칸은 날개를 퍼득여 단번에 올라가고.

 

녹스는 문을 열었다.

 

교수님! 어제는 제가 배를 주전자에...!”

 

녹스는 말을 멈추었다. 뒤에서 페드가 건물 안에서 날개를 펴는 건 교칙 위반이예요!’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페드가 간신히 계단 위로 뛰어올라오자 보인 것은, 낯익은 녹색이 있었다.

 

어서 와아, 페드~”

 

교 네가 왜 여기 있어?”

 

어째서긴~”

 

페드는 문을 잡고 있는 녹스의 팔을 들어 치웠다.

 

어제 저 왕자님이 가고~ 너도 연구자료 본다고 가고~ 교수님이 할 일이 많으시다고 하시길래 말이야아~”

 

도와드리겠다고 했지 뭐어! 라면서 방긋 웃는다.

 

오 저런.

 

페드는 옆을 힐끗 보았다. 녹스는 놀랄 만큼이나 새하얗게 굳은 얼굴로 간신히 동공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더니 영 교수와 교의 손에 들린 서류를 오가고 있었다.

 

교수님.”

 

?”

 

가여운 왕자님을 나라도 도와야지 어쩌겠어. 저 교 놈은 자기가 알아서 잘 살아남을 놈이니까 내버려두고. 아니 애초에 교 저 놈은 왜 온 거야? 이런 일 절대 안 하는 놈인데. , 성적이 위태하기라도 한가?

 

녹스 학생도 도와드린대요.”

 

, 그래요? 그러면 고맙긴-”

 

야호!

 

죽어있던 녹스의 눈이 순식간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덩달아 페드의 귀도 쫑긋하게 섰다.

 

“-한데-”

 

더더욱 녹스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어라라, 어딘가 불안해서 페드의 귀가 더더욱 뾰족하게 일어섰다.

 

“-지금 교 학생이 너무 잘 도와주고 있어서-”

 

교수님!”

 

페드가 녹스를 떠밀었다. 녹스는 균형을 잃을 뻔 해서 날개를 퍼덕였다. 가까스로 날개를 접고 서자 페드가 방긋 웃었다.

 

일손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거야 그렇지만요.”

 

저 갑자기 고대 석판 해석이 갑자기! 잘 되어서요, 저 대신 여기 왕자님이 도와주신대요! 갑자기 바빠진 저 대신!”

 

그 갑자기는 대체 왜 세 번이나 튀어나오는 걸까. 영 교수는 날개까지 부풀리는 페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과 별개로 실내에서 날개를 폈다는 이유로 벌점은 주었지만.

 

 

 

 

 

 

 

그런 나날 속에 첫 수업이 다가왔다. 여러 곳에서 온 학생들은 수업이 시작하기 몇 분 전에 기대하는 마음을 안고 교실에 미리 와 앉아있다가 교실의 문이 열리자 일제히 시선을 그 쪽으로 돌렸다. 먼저 들어온 것은 영 교수였는데 영 교수는 나름대로 좋은 옷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입고 들어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유행이 3년쯤 전에 지난 옷이었다. 학생들은 천을 달아 늘어뜨린 모자를 쓴 영 교수를 보고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뒤로 자료와 책을 한아름 안고 들어오는 페드를 보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드는 왜 신입생들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펴다보다가 신입생들이 허리를 숙이려고 하자 그제야 알았다는 듯 평소보다 힘차게 인사했다.

 

영 필로이픈 교수님! 여기! 책 가져왔습니다!”

 

교수라는 단어 때문인지 여기저기에서 웅성임이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페드와 영 교수가 미덥지 못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앉았다. 페드는 깃털 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휘둘러 영 교수의 책상에 약차를 내려놓으며 흘긋 시선을 돌렸다. 영 교수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줄마다 앉은 학생의 수를 헤아려 인쇄물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병이랑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차라리 웅성이는 학생들의 태도 평가에 낙제점이라도 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저렇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까만 날개, , 까만 머리. 녹스 왕자님인가.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네 말은 틀렸다! 하이어스에서는 노예제가 폐지된 지 벌써 30년은 되었어!”

 

그렇지, 이어진 전쟁과 업무의 전문화로 인해 법적으로 폐지되었지. 잘 기억하고 있군요... 라고, 영 교수는 때에 맞지 않는 감탄을 했다가 이어 보이는 모습에 경악해야 했다.

 

영 교수에 대해 노예 운운하던 학생을 붙들은 녹스 라이비는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찌르는 건가, 증거를 어떻게 인멸해야 하는지, 로 페드가 고민하는데 그 단검은 (페드, 혹은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학생의 가슴이 아니라 녹스의 머리로 향했고, 윤기나고 아름답던 머리카락은 한순간에 헝클어진 실더미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영 교수의 모자를 두고 그랬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웅성임과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 선두에 선 것은 페드의 외침이었다.

 

이 망할 왕자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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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2017. 6. 21.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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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비엘/판타지] 반짝이는 사람 3화

2017. 6. 6. 22:40 | Posted by 호랑이!!!

 

두 분 다 제정신이세요?”

 

학교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페드였다. 흉흉하게 노란 눈을 번뜩이는 페드의 뒤로는 갈색 날개가 위협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어쩐지 야단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 둘은 페드의 책상 앞에 얌전히 가서 섰다.

 

학생이! 교수님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 한다고 해도! 교수님이! 안된다고 하셨어야죠! 누구랑 세게 부딪히기라도 했으면 교수님은 다쳐요! 박살난다고!”

 

교수님은 지금 툭 치면 파스스 날아가는 상태!라는 주제의 잔소리를 한참이나 퍼붓는 페드에게 조심스럽게 녹스가 손을 들었다.

 

“...저기, 제가 싫어하는 분을 납치한...”

 

그래도 왕자님인데 제가 왕자님한테 잔소리를 하겠어요!? 왕자님은 거기에서 듣고 계세요!”

 

아니, 그렇지만...”

 

입 다물고 조용히 앉아있어욧!”

 

왕자에게 소리를 빽 지른 페드는 이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장 선생님이 교수님한테 가끔은 밖으로 나가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 은 학교 뜰이나 도서관이라구요. 그나마도 안 나가던 분이 어쩌자고! 어쩌다가!”

 

“...잘못했어요.”

 

똑똑,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교실의 주인은 영 교수임에도, 페드의 머리가 180도 돌아갔다.

 

들어오세요!”

 

페드의 외침에 영은 모자를 손으로 더듬어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소위 엘프라고 부르는 넥투르 인이었는데 흔히 넥투르인이 그렇듯 큰 키에 몸은 버드나무처럼 우아하게 유연하고 금색 귀걸이가 여러개나 귀는 뾰족하다. 피부는 어린 나무 같은 연초록에 길게 길러 땋은 머리카락은. 염색으로 새파랗다.

 

아안녕하세요-?”

 

늘어지는 목소리에는 짧은 휘파람 같은 넥투르인 특유의 억양이 묻어났다. 그는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와서는 페드와 영, 녹스를 번갈아가며 재미있다는 눈길로 보더니 천을 파는 상인처럼 손가락 끝으로만 가지고 온 목록을 집어 영에게 살랑살랑 흔들며 내밀었다.

 

! 루 란 교! 이 미친 녀석, 머리를 물들였어!”

 

안녕 페드, 오늘도 예쁘네.”

 

너네 어머니한테 다 이를거야! 머리를 온통 시퍼렇게 물들였다고!”

 

예쁘지?”

 

검은 머리를 파랗게 물들이려면 탈색도 했어야 했을 텐데, 너 머리카락 다 상했겠다!”

 

페드의 친구인가보다. 영은 교에게서 목록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록에는 다음 학기 수업을 들을 학생들의 이름과 국적이 적혀 있었다. 하이어스, 라이비, 넥투르, 세인트... 역시나 비율은 하이어스가 제일 높다. 그럼 커리큘럼은 기존에 하던 것과 같이 하면 되고... 그러는데 손이 잡혔다. 녹스 쪽을 돌아보았지만 녹스는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영 교수님 안녕하세요오! 듣던 만큼 예쁘시네-.”

 

고개를 돌렸다가 영은 새까맣게 반짝이는 교의 눈과 마주쳤다. 교는 영의 손을 꼬옥 잡고 입술을 꾹 눌렀다.

 

하이어스에서는 이렇게 인사한다면서요?”

 

교수님, 교 말 듣지 마세요, 쟤 엄청 유명하니까요.”

 

페드는 얘가 바로 기숙사에 넥투르 식 주사위놀이를 유행시킨 장본인이라니, 밤중에 학생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러 나간다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학교 연못에 마수를 풀어놓은 일도 말해야지.”

 

뭐어? 네가 했었냐!?”

 

영은 둘이 티격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안경을 고쳐 썼다.

 

둘이 친구는 맞죠?”

 

아뇨!”

 

맞는 것 같다. 씩씩거리던 페드는 잠시 후 진정하고는 소개를 해 주었다.

 

, 이 분은 영 필로이픈 교수님. 그리고 저 분은 녹스 라이비 왕자님. 교수님, 왕자님, 얘는 아까 들으셨다시피, 온갖 말썽과 사고를 다 일으키고 다니는 루 부족의 아들 교입니다.”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반가워- 요오,”

 

인사를 마치고 교는 영이 든 목록을 가리켰다.

 

교장 선생님이 3일 후에 개교인데 준비는 다 되었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3일 후라니.”

 

세월 참 빠르죠?”

 

당장 3일 후가 개교면 어떻게 해! 지금 수업준비가 아무리 커리큘럼을 그대로 쓴다고 해도 자료라던가 얼마나 해야 할 게 많은데! 영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본체만체하고 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수업 말이예요, 아 교수님 손이 참 고우시네, 저는 장갑에 싸인 손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래의 미를 읽어낼 수... 수업 내용 중에 석판이 필요하다면 가져다 주시겠다고 교장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어쩌면, 눈도 참 맑은 색이시네... 최근에 영역을 다니시다가 우연히 몇 천년 전에 만들어진 것 같은 동굴을 하나 찾으셨대요. ...안경 때문인가 부드럽고 가냘파서 교수님이 마치 아기새의 솜털 같네요, 머리카락 색을 보고 싶은데 혹시.

 

녹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녹스는 누가 무어라 할 틈도 주지 않고 걸어나갔다. 남은 세 사람은 쾅 닫힌 문을 보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만 으쓱했다.

 

용사랑 연금술사가 나오는 이야기

2017. 6. 3. 00:36 | Posted by 호랑이!!!

A는 작은 판매대 뒤에서 감기약이 든 병을 찾아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동전 몇 개만 내려놓고는 후다닥 달려갔다. 아이가 나가고도 문이 닫히지 않는다 싶더라니, B가 서 있었다.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나가 있는 것도 아닌 채, 안쪽을 흘긋거리다가 A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시선을 피한다.

 

오셨어요.”

 

“...안녕... 세요...”

 

B는 흔히들 용사라고 부른다. 마을을 괴롭히는 악덕 영주를 물리치고 괴물 멧돼지를 잡고 나쁜 용 따위를 토벌하며 음유시인들은 그의 무용담을 노래하는, 이 시대에서 용사라는 단어를 고유명사로 사용하는 용사. B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A가 본 B는 말수 적고 수줍음 많은 동네 청년 같았다. 검보다는 마른 풀과 갈퀴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워낙 말수가 적고 목소리가 작다보니 들었다기에는 좀 그렇고 이해했다에 가까운 것을 따져보면 B는 그냥 동네에서 검을 잘 쓰기로 이름난 정도의 청년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용사라고 불리고 있었다는 것 같다.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라고 말하기에는 벌인 일의 스케일이 크기는 하지만.

 

A는 장부에 감기약을 기입하며 선반 뒤의 B를 넘겨다보았다. 20분 전에는 상처약을 보고 있었고 15분 전에는 자잘한 마물을 쫓는 약을 보고 있더니 지금은 그저 라벤더 향이 나는 화장수를 보고 있다. 그것도 10분 째. 병에 붙은 설명은 물론이고 성분까지 외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A는 작게 키득 웃었다.

 

마법사분 드릴 선물을 고르시나요?”

 

“........”

 

아마도 긍정 같다.

 

AB와 함께 다니는 마법사를 떠올렸다. 머리가 길고, 안경을 낀 성격 좋은 사람. 머리카락이 기니까 관리를 도와주는 용품은 어떨까, 주문을 외워야 하니까 목에 좋은 약도 나쁘지 않겠지. A는 프리지아 한 송이를 장식한 비누를 꺼냈다.

 

이건 어때요?”

 

“..괜찮아......”

 

박하가 든 차는?”

 

.. .것도...”

 

B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데 정신을 더 팔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B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덥석 꺼내 내밀었다.

 

“...! ... 포크스 마을... 바실리스크 잡았을 때...!”

 

B가 내민 것은 커다란 송곳니였다.

 

“...구하기 어려운... 약재라고 들어서...”

 

저 주는 거예요?”

 

A는 송곳니를 받았다. 동시에 B의 얼굴이, 여전히 무표정이기는 했지만, 화악 밝아졌다.

 

귀엽다니까. 이 이를 갈아서 약이라도 만들어 주어야겠다.

 

그 때, 손 위에 무언가가 턱, 턱 얹혔다.

 

, 는 길에 꽃이 예쁘게 피었길래...!”

 

무슨 갑옷을 때렸더니 마석이...”

 

과일가게에서 하나 더 받았는데....”

 

이건 사탕가게에서... 신작...!”

 

...등등등.

 

A의 손이 무거워졌다. 물건이 너무 많았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B가 무언가를 또, 라며 내려놓자 와르르 물건이 쏟아졌다. AB는 허둥지둥 주저앉아 물건을 주웠다.

 

이것은 꽃, 이것은 장난감, 저것은 사탕, 보석.

 

마침내 두 명의 손이 뱀의 송곳니에 닿자 B는 화들짝 놀랐다.

 

어울리지 않게 단단하게 굳은살이 배긴 손을 빼지 못하게 잡고, A는 새빨개진 B의 얼굴에 웃음을 터뜨렸다.

 

용사... 아니, B.”

 

약초를 말려둔 창가에서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다.

 

좋은 차가 있는데, 한 잔 하고 가시겠어요?”

 

 

[고어 소재 있음] 사람 먹는 괴물

2017. 5. 7. 03:08 | Posted by 호랑이!!!


[1차 비엘/판타지] 반짝이는 사람 2화

2017. 4. 15. 02:12 | Posted by 호랑이!!!

 

씻고, 안경도 닦고, 모자에 외출복까지 입고, 영은 외출 준비를 마쳤다.

 

늦어요, 교수님.”

 

미안해요. 백년만에 외출한다고 생각했더니 좀 힘이 들어가서.”

 

백년이요?”

 

“‘은 많다는 뜻이예요. 오랜만에 외출한다는 의미죠.”

 

앞으로 제 수업을 듣는다면 문서에서 자주 보게 될 표현이니까 미리 외워두는 게 좋아요, 라고 영이 말했다. 확대경을 끼고 고문서를 보는 페드를 조용히 지나치고 복도와 계단을 내려가서 3층 반. ‘교수님이 저를 보는데도 씻지 않다니 충격적이예요라고 투덜거리는 학생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다시 복도와 계단을 걸어 내려가서 3. 또 쉬었다가 내려가서... 녹스는 화려한 창문을 확 열어젖히더니 영을 덥석 잡았다.

 

갑니다, 교수님!”

 

으아아아아아!!!”

 

 

 

 

 

 

 

 

영은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거리를 걸었다. 발 아래에 닿는 돌로 만든 거리,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지나가고 여기저기에서 구운 빵이나 설탕 향기가 난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아이들이 지팡이에 달아 장난하는 용도의 빛나는 작은 고리나 비눗방울이 뿜어져 나오는 기계, 던지면 일정 거리를 날아서 되돌아오는 새 인형에... 화려한 천막 아래의 가판대에서는 최근 유행한다는 찻잎과 과자와 음료수와...

 

저 과일 얼음 주스 하나 주세요.”

 

교수님?”

 

, 하나 더요. , 녹스 학생. 한 잔 받아요.”

 

녹스는 영이 건네는 음료수를 받았다. 아까 과자가 한 봉지, 어포가 한 봉지, 납작하게 구운 빵이 또 한 봉지에 아까는 설탕을 넣은-비록 꿀을 넣었다고 홍보하고 있었지만- 우유 음료수, 방금은 과일을 여럿 넣었다는 주스와 꽃을 이용한... 여하간 보이는 족족 다 사고 있으니. 마치 어린애에게 돈을 쥐어준다면 이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녹스는 영이 또 사탕을 두 봉지 사려는 것을 말렸다.

 

교수님, 저는 이만하면 괜찮습니다.”

 

길에 이런 거 있으면 먹고 싶잖아요? 괜찮아, 이 교수님은 돈 많... 앗 저것 봐요! 저 사탕은 물고기 모양이예요.”

 

안 돼요, 교수님.”

 

색과 모양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 사탕 가판대로 달려가려는 교수를, 라이비의 왕자인 녹스가 잡았다.

 

녹스 학생도 저거 신기하지 않아요? 굳이 먹지 않더라도 갖고 싶죠? 그렇죠?”

 

사탕 장인을 불러서 용 모양도 만들게 할 수 있는 녹스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교수님. 사 올 목록에 있는 물건부터, 다른 물건은 그 다음에! 소비는 계획적으로!”

 

소비는 계획적으로! 녹스는 쌓여있는 메모지에서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집었다.

 

보세요, 여기 스콘도 사러 간다고 적혀 있잖아요? 이제 과자도 장난감도 그만입니다.”

 

저거 하나만 더...!”

 

지금 손에 들린 사탕이랑 과자 많지 않습니까? 그거 다 먹기 전에는 안됩니다.”

 

그럼 저 구슬 다발이라도! 저거 방 창문에 걸어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안 됩니다.”

 

끌려가다시피 해서 영은 거리를 다시 걸었다. 바작바작 납작한 빵을 깨물면서 기억을 더듬고 거리를 걸어 모퉁이를 돌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꽃집 앞에서.

 

“...이상하다...?”

 

여기가 아르시호 입니까? 스콘을 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러게, 내가 알던 아르시호는 차 향기가 은은하게 나오는... , 실례합니다! 혹시 아르시호가 여기 있지 않았나요?”

 

아르시호? 그 가게 주인이 3년 전에 고향으로 간다고 하던데?”

 

말을 하면서 그 사람은 영의 모자를 흘끔 보았다. 녹스는 3년이라는 말에 그 꽃집과 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체 얼마 만에 나오신 거예요?”

 

“...3... 하고 반...?”

 

지팡이를 들어 아르시호/스콘이라고 적힌 쪽지를 톡톡 두드리자 쪽지는 재도 남기지 않고 불타 사라졌다. 비슷한 일이 찻잎을 파는 가게, 일용품점에서도 있었고 결국 영 교수가 들고 있던 종이 다발은 전부 불타 없어졌다. 녹스는 수첩과 지팡이를 들었다.

 

“...아까 필요한 게 뭐 뭐 있었죠?”

 

끝났어.... 틀렸어요... 아무것도 없이 갈 거야... 장난감이랑 사탕이랑 음료수만 들고...”

 

찻잎 있었죠? 라투스 찻잎.”

 

... 있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애용하던 고급 찻집은 없어졌어요...”

 

“3년 반 동안 오지 않은 곳은 애용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찻잎, 다기 세트, 새 옷, 깔개, 접시 등을 메모한 녹스는 이 쪽이라며 앞장섰다.

 

어디로 가는 거죠?”

 

왕실 납품점에 갑니다.”

 

3시간이나 거리를 걸어다닌 영과 녹스는 길거리 과자와 장난감을 들고 왕실 납품점으로 들어갔고, 30분 만에 나올 때는 필요했던 물품 외에도 푸딩을 한 상자 받았다.

[1차 비엘/판타지] 반짝이는 사람 프롤+1화

2017. 4. 8. 11:15 | Posted by 호랑이!!!

대부분의 유행은 권력에서 나온다. 현재 인간계를 통틀어 가장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하이어스 왕국이 만든 유행은 긴 머리가 고귀하다이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긴 머리를 결 좋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아무리 낮은 계급이더라도 머리를 기르는 것이 당연, 머리로 보일 수 있는 가장 반항적인 모습은 열을 가해 굽슬거리게 만들거나 약품을 써서 염색을 하는 일이다.

하이어스 왕국이 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 이유는 첫 번째로 모든 왕국이 가담한 대전 때 평화 조약을 맺게 하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모든 나라의 학생들을 받는 평화의 탑이라는 학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 교수가 사는 곳은 교실과 연결된 작은 탑이다. 생활하는 공간은 그 탑에서 교실 앞 연단까지. 낡은 나무 의자를 끌어다가 바깥을 내다보면 학교에서 봄을 맞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다니고 있다. 어쨌거나 봄과 가을은 농번기이기 때문에 학생들을 돌려보내고는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이나 농사를 짓지 않는 집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방학을 맞고는 했는데, 영 교수가 바깥을 내다보면 키가 큰 수렵민족인 소위 엘프나 등에 날개가 달린 세인트 사람 등이 활짝 핀 꽃나무 가지 위에서 놀고 있었다.

좋을 때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틀을 툭 툭 치자 달각달각 소리가 났다. 그 학생들과 몇 살 차이나지 않으면서도 영 교수는 마치 한참이나 젊은 사람들을 대하듯 생각했다. 그를 상념에서 끌어낸 것은 밝은 목소리였다.

 

교수님! 저 왔어요!”

 

어서와요 페드.”

 

라이비 출신 유밀(세인트 외의 수인을 총칭)인 페드는 영 교수 아래에서 연구하는 학생으로, 노란 눈에 갈색 털과 부엉이의 깃털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다량의 연구자료와 간식인 사탕을 한 병... 영 교수의 눈이 페드를 이어 들어오는 검은 머리 유밀에게 멎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학생인데 이제 2학년인가요?”

 

자료와 간식을 다 정리한 페드가 폴짝 앞으로 뛰어나왔다.

 

소개합니다! 녹스 학생, 이 쪽은 역사학의 권위자인 영 필로이픈 교수님. 교수님, 이 쪽은 라이비의 왕자인 녹스 라이비님이예요. 중간성은 생략! 오는 길에 자료 들어줬어요.”

 

유밀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까지 악마 이미지에 들어맞는 사람은 또 처음 보았다. 머리는 검고 눈은 노랗고, 머리에는 염소의 뿔, 등에는 검은 박쥐 날개에... 혹시 저 뒤에 있는 건 꼬리인가? 영 교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녹스 역시 가슴에 손을 얹는 것으로 인사했지만, 그의 시선은 영 교수의 머리에 있었다.

 

손이, 참 크네.

 

갑작스레 다가오는 손에, 그렇게 생각했다가, 그의 손이 모자에 닿자 영 교수는 뒤로 확 물러났다. 손가락에 걸린 것인지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석영 조각이 우수수 흩어졌다, 영 교수는 선뜻해진 목덜미에 잠시 부르르 머리를 털었다.

 

무슨 짓이예요.”

 

죄송합니다. 모자에 벌이 붙어 있어서.”

 

영 교수는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서는 석영 조각을 털지도 않고 머리에 푹 눌러 썼다. 손가락을 들어 원래는 짙은 밀 색이었지만 어느샌가 끄트머리가 투명해진 머리카락에 대롱거리는 석영 조각을 툭 쳐서 떨어뜨렸다.

 

다음부터는 미리 말을 하세요. 벌 정도는 제가 떼어낼 수 있으니까.”

 

영 교수는 펜을 들어 양피지에 작은 진을 그렸고 진에서 튀어나온 마법이 바닥에 흩어진 석영을 한데 쓸어모아서 난로 속에 던졌다. 녹스는 다 쓴 진을 지우는 교수를 내려다보다가 그가 사용하는 책상에 한쪽 팔을 얹었다.

 

요정 같았어요. 교수님이.”

 

요정이요?”

 

반짝이는 가루가 떨어지고, 머리도 반짝이고, 피부도 반짝여서 날개만 달아주면 날 것 같았어요.”

 

그의 말에 교수는 아, 하더니 웃었다. 얇은 장갑을 벗자 손이 드러났는데, 손가락 끝부터 한 마디 반, 혹은 두 마디 정도가 투명한 수정으로 변해 있었다.

 

저는 결정병을 앓고 있거든요.”

 

몸의 끝부터 천천히 광물로 변하는 희귀병. 머리카락이나 작은 피부 조각 등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스러져 떨어진다. 간단한 설명을 듣고서야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교수는 목에 천으로 만든 보호대를 차고 있었구나. 목이 결정화되면 떨어질 테니까.

 

요정 같다는 말은 처음 들어봐요. 머리가 짧아서 안됐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려요. 교수님은.”

 

 

 

=====

 

 

 

참 별스런 아이라곤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도, 다음날도, 녹스는 페드와 함께 교수실을 찾았다.

 

또 왔네요.”

 

방학이라 할 게 없거든요.”

 

예습이라도 할래요?”

 

아뇨, 그건 됐고...”

 

뒤에서 풉,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페드가 있었지. 영 교수는 목을 가다듬었다.

 

페드, 잘 되어 가나요?”

 

네 교수님! 무지무지 잘 되고 있습니다!”

 

방해하면 안 되겠네, 영 교수가 웃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녹스에게 속삭였다.

 

차 한 잔 마실래요? 내 방에 맛있는 차가 있는데.”

 

영 교수의 작은 방에는 정말로 작은 난로와 1인용 테이블, 의자 하나, 또 흔들의자가 하나 있었다. 녹스는 난로에 불을 지피고 영 교수는 찬장에서 색이 다른 잔 두 개와 찻주전자를 꺼냈다. 찻잎 병을 꺼내고 영은 고개를 젓더니 옆에 놓인 종이에 찻잎, 을 썼다.

 

찻잎이 다 떨어졌네요. 코코아도 괜찮나요?”

 

녹스는 일어나 찬장 옆에 붙어있는 메모지를 보았다. 잉크가 바랜 것, 종이가 바래고 납작해진 더미 맨 위에 찻잎, 이라고 적혀있는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이건 다 뭐예요? 새 깔개, 찻잔 세트, 설탕, 소금, 새 옷, 카페 아르시호의 스콘, 면 요리...”

 

물건이 떨어지거나 할 때마다 적어 놓는 거예요. 시간이 좀 나면 나가서 사 오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전부 미뤄지고 있네요. 매번 페드에게 시킬 수도 없으니까요.”

 

교수님 한가하잖아요.”

 

한가하지는 않아요.”

 

매일 책도 읽고, 커리큘럼도 짜고, 페드 연구도 봐 주고, 논문도 쓰고, 해석이랑 연구도 하고... 녹스는 하나씩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는 것을 잘랐다.

 

제가 올 때마다 창 밖 구경만 하고, 저한테 시간도 매일 내 주시잖아요.”

 

하루에 다섯, 여섯 시간 정도. 회중시계로 시간을 가늠해보는 모습에 영의 시선이 변명할 거리가 어디 방 안에 쓰여 있기라도 한 듯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 건 그렇지만.”

 

그럼.”

 

결론은 났다는 듯 녹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러 갈까요!”

 

사다 주겠다고요?”

 

아뇨, 학생이 돈이 어디있어요?”

 

너 왕자라며!

 

녹스는 영의 모자를 고쳐 씌워주더니 은으로 도금한 지팡이를 까딱해서 탑의 문을 열었다.

 

, 나갈까요.”

 

아니, 무리야.

 

영은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제가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마치 2년 내에 죽을 것 같은 기분이예요.”

 

불치병을 앓고 있으니까 그렇죠. 걷는 게 힘드시다면 업어드릴 테니까 나갑시다 교수님.”

 

, 나가려면...!”

 

이것만은 정말 말하기 싫었는데, 라는 표정으로 영이 입을 열었다.

 

씻어야 한다구요!”

 

전혀 예상외의 말이라, 충격 받은 표정으로 녹스는 입을 닫았다.

 

“...교수님.”

 

!”

 

사람을 만날 때도 씻어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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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bl] 오빠랑 친구랑

2017. 3. 24. 14:48 | Posted by 호랑이!!!

※ 환상의 동물이 있습니다






오빠, 일어나.”

 

작은 손이 단잠을 자던 우진을 흔들었다.

 

우진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는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12, 아직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벌써 이 시간이라니.

 

집에 오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 과제할 시간을 빼앗긴 탓에 잠이 들었던 시각이 6시다.

 

6시간이나 잤는데도 아직 졸리다니, 우진은 하품을 했다.

 

... ....?”

 

배고파. 그리고 친구 왔어.”

 

친구... 누구?”

 

우연은 다시금 잠에 빠져들려 하는 오빠를 흔들었다.

 

홍영이 왔어, 일어나아.”

 

일어났어, 일어났어.”

 

눈을 비비고, 우진은 자기보다 한참이나 작은 동생의 어깨에 푹 기댔다.

 

“...뭐 먹고... , 흐아아암...”

 

쿠키하고, 전에 오빠가 만들어줬던 케이크하고, 점심으로 스파게티 해줘.”

 

-...”

 

우진은 다시 눈을 비비고 비척비척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홍영이랑 아직도 친하구나.

 

홍영이는 그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여동생 우연이의... 흔히 말하는 소꿉 친구다.

 

사귄 기간은 유치원 부터니까... 얼추 십 년쯤 되었나.

 

마지막으로 본 건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있었던 동생 생일파티에서였다.

 

중학생이었던 녀석은 쪼끄매서, 아직도 아기 티가 났었지.

 

우진은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부엌으로 갔다.

 

카운터에서 식탁까지 재료를 늘어놓고 달그락 달그락 준비를 하고 있자니 동생 방 안에서 재잘거리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다.

 

귀엽구먼.

 

저 나잇대의 나는 다 큰 것 같았는데, 애들 보면 아직도 아기 같다니까.

 

우진은 티라미수틀과 쿠키 반죽을 냉장고에 넣으며 내심 웃었다.

 

크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자 우진은 동생의 방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헤이, 나 들어간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와-”하는 웃음 섞인 소리가 난다.

 

문을 열자 상 위에 문제집을 펼쳐놓고 홍영이와 우연이가 키득거리고 있었다.

 

밥 다 됐어, 나와.”

 

-.” “-.”

 

나와서 수저 놓고.”

 

-.” “네에-.”

 

나란히 대답하는 모습이 병아리같다.

 

내 동생 귀여워, 둘 다 귀여워,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어라, 뭔가 달라졌다.

 

문 쪽에 우진이 서 있었던 탓에 그 쪽으로 홍영이 다가왔는데.

 

세상에.

 

홍영이 키 엄-청 컸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1미터는 더 큰 거 아냐?”

 

그만큼은... 아니예요.”

 

오오, 목소리도 이제 낮아졌네. 세상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요만-해서 우연이하고 아장아장 걸어다녔는데, 세상에.”

 

나 아장아장 걸은 적 없거든.”

 

할아버지 같다며 우연이 웃었다.

 

몇 번 스쳐지나가며 보았을 뿐인데 그때마다 부쩍부쩍 자라더니, 아이들은 참 빨리 큰다.

 

우진은 우연이와 홍영이의 그릇에 스파게티를 듬뿍 덜어서 예쁘게 반숙한 계란 프라이까지 하나씩 얹어 주었다.

 

그릇에 수북하게 쌓인 스파게티는 많나?’싶을 정도였지만 한창 자랄때인 두 아이는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맛있어?”

 

! 잘먹었습니다.” “잘먹었습니다.”

 

만들어준 걸 이렇게나 잘 먹으면 역시 뿌듯해진다.

 

우진은 활짝 웃었다.

 

역시 자랄 때라 그런가 잘 먹네. 냉장고에 케이크 만들어놨는데 먹을래?”

 

, 난 조금만. 너도 먹을 거지?”

 

,, ... !”

 

!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기분 탓인가 삐약삐약 소리가 같이 들리는 것 같다.

 

케이크 그릇과 포크를 가져다주고 주스를 조금씩 마시던 우진은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다음번에 보면 나보다 커져 있는 거 아냐, 홍영이 너?”

 

그럴 겁니다.”

 

이야아, 기대되네. 요만하던 애가 나보다 커진다니.”

 

홍영이의 손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잊어 주세요. 곧 민증도 나오고! 1년 쯤 있으면 성인이니까...!”

 

1년이 아니고 2년이겠지, 올해를 빼먹었잖아.

 

우진은 주스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조금만 더 잘래, 설거지 좀-.”

 

에엥 싫어, 요리하고 나면 설거지거리 많단 말이야.”

 

- 하고 대답한 것은 홍영이었다.

 

착하다 착해, 설거지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다 컸어.

 

우진은 홍영이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듯이 두드려주고는 방으로 갔다.

 

달밤의 붉은 꽃 02

2017. 1. 24. 23:10 | Posted by 호랑이!!!

 

한스 델러웨이는 별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 매달린 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자비롭다.

 

태양은 너무나 눈이 아파 볼 수 없으며 달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은 별밖에 없다.

 

오늘은 유달리 별이 많이 뜬 밤이라 감사하며 창틀에 턱을 괴고 별을 보는데 옆에 슬금슬금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사랑의 요정이니 뭐니 지껄였던 악마.

 

"...시온?"

 

"안녕하신가,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중인가?"

 

"그렇지. 너라는 악마는 이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지?"

 

그러자 시온은 그 앞, 허공에 떠서 하늘을 천천히 가리켰다.

 

"별로 짠 그물을 밤하늘에 펼쳐 고귀한 영혼을 거둘 생각을 하지."

 

"뱀의 혀로군."

 

창에서 새어나오는 난로의 불빛, 배경으로는 수많은 별들과 달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

 

그것들에 둘러싸인 시온을 보며, 한스는 문득 시온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생각에 놀라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채찍을 찾았다.

 

"...주여..."

 

잠시나마 사특한 혀에 마음을 빼앗길 뻔 했다.

 

철썩 소리가 나도록 스스로의 등을 내리치니 악마는 놀라 손에서 채찍을 앗는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Christo)!”

 

신의 이름에 몸을 움찔했지만 시온은 한스 델러웨이를 꼭 끌어안았다.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벗어나지지 않는다.

 

그가 몸부림칠수록 시온의 안은 팔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자네 같은 악마와 이야기하면 내 영혼이 병들 것이야!”

 

“...그럼 이야기하지 말게나.”

 

뻔히 대화를 시켜 놓고는 이제 와서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한스 델려웨이는 악마의 손에 들린 채찍에 손을 뻗었다.

 

시온은 채찍을 더 뒤로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네.”

 

정결하지 못한 악마 따위가 내 몸에 손대지 말아!”

 

어쩔 수 없지.

 

시온의 손이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채찍은 시온의 손에 들려 있었고 한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

 

나는 지금 내 앞에서 자네가 사라진다면 차분해질 수 있을 것 같네.”

 

짧은 한숨이 시온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입술은 금세 모양 좋게 올라붙었고 시온의 손 안에서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채찍은 한 바퀴 춤을 추다 이내 사라졌다.

 

마을에 내려가 본 적 없는데. 함께 구경을 가지 않겠나?”

 

그런 데 쓸 시간은 없다.”

 

같이 가는 것이 좋을 걸세,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악마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쁜 짓을 할 테니까.”

 

만약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오지 않아도 좋아.

 

그런 말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여전히 강직한 표정으로 시온을 노려보고 있다.

 

시온은 품에서 은으로 만든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계 정도는 볼 수 있나?”

 

“...”

 

짧은 바늘이 I, 긴 바늘이 XII를 가리킬 때 광장에서 만나도록 하지.”

 

유리판을 한스가 볼 수 있도록 그의 손 위에 얹고, 시온은 손가락으로 짧은 바늘과 긴 바늘과 숫자판을 가리켰다.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네.”

 

하얗고, 가느다랗고, 길쭉한 시온의 손이 회중시계의 뚜껑에 얹혀 느리게 한스의 손을 향해 내려갔다.

 

마치 손깍지를 낀 것처럼 가까워진 그 찰나, 시온은 어딘가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한스 델러웨이의 손바닥 위에 얹힌 은시계만을 남기고.




달밤의 붉은 꽃

2017. 1. 19. 15:59 | Posted by 호랑이!!!

붉은 머리는 길러 묶고 얇은 테 안경 너머의 눈은 요사스러운 보랏빛으로 빛난다.

 

속설에 붉은 머리 사람은 죽어 뱀파이어로 깨어난다던가.

 

하지만 난 이제 뱀파이어도 아닌 악마인걸.

 

시온은 이제 기억도 희미한 옛날일에 머리를 저었다.

 

시온, 나이는 미상.

 

모든 악마들이 그러하듯 재미난 일에 집착하여 살기로 맹세한 그가 꼽은 재미난 일은 남녀 상열지사였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만나 이루어지는 가장 뻔한 이야기로, 둥글게 굽은 염소뿔을 숨기고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가 "나는 사랑의 요정이야"라며 그들의 사랑을 돕기도 한다.

 

그 정념을 눈치채지 못하게 빨아먹으며 여자와의 사랑을 이루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 중간에 변덕이 들거나 하면 그 짝사랑하는 가엾은 사람을 악마 특유의 화술로 살살 꼬드겨 사랑을 집착으로 바꿔 버리고 음침한 마음으로 포식한 뒤 내버려 둬 버린다.

 

그럼 조력자가 사라져 당황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에 눈 먼 이들은 사랑하던 이를 찾아가 법을 어기는 짓을 하기 일쑤였고 체포되면 옥살이를 하거나, 심한 경우 사형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시온은 숨겨두었던 염소뿔과 꼬리, 딱딱한 발굽을 꺼내어 손으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발굽으로는 따가닥닥 소리를 내며 춤을 추곤 했다.

 

아무튼 시온에 관한 대체적인 설명은 여기서 끝.

 

그 시온은 최근 포식과 재미와 미식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다.

 

발단은 안면을 익힌 다른 불순한 종족의 출신들과 얘기를 하며 일어난 일이다.

 

원래 각자 관심사가 다르다 보니 악마들은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는 이상 서로 대화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는데 우연히 미식에 관한 얘기가 나왔더란다.

 

최근 로맨스에도 시들해진 터라 잠자코 듣고 있으려니 제법 재미난 얘기가 나왔다.

 

'성직자가 악마에게 키스할 때 나오는 그것은 어떤 미식에도 뒤지지 않는다더라'

 

누군가에게선가 자신은 벌써 여덟이 넘는 성직자를 맛보았다는 자랑이 나왔고 하나둘 허세 섞인 자랑이 나오며 결국에는 싸움이 났다.

 

"나도 맛보고 싶어졌네, 성직자 말일세."

 

그 말이 떨어지자 아직도 먹어보질 못했냐는 얘기가 나오고 근처의 성당으로 가게 되었다.

 

"난 저기 검은 머리가 좋겠어."

 

"저는 저기 후드를 쓴 사람"

 

구미가 당기는 사람이 없어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내려다보다 누군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딱딱하고 진지한 표정, 금발과 푸른 눈의 성직자.

 

근엄한 표정이 성기사래도 믿으련만.

 

"난 저게 마음에 들어."

 

처음부터 너무 힘든 걸 고르는 거 아냐?”

 

힘든 게 맛도 있는 법이지.”

 

걱정은 입에 발릴 정도만, 그리고 다들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인사도 없이 흩어졌고 시온은 해가 지기를 기다려 그 방으로 찾아갔다.

 

"실례하오-"

 

"누구냐."

 

"내 이름은 시온, 사랑의 요정이지."

 

"요정? 사랑의 일은 천사의 소관이다."

 

예상했던 답이라 시온은 숨겨두었던 뿔과 발굽, 꼬리를 드러내었다.

 

그러자 대번에 성직자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악마!"

 

"반갑소 성직자 양반. , 뿔은 숨겨두도록 하지. 뿔이 있으면 모자를 쓸 수 없으니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새로 산 실크햇에 비단과 담비털이 들어갔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사람은 뭐가 그리도 급한지 왜 왔냐며 썩 꺼지라고 소리쳤다.

 

"사랑의 요정이라고 자처하는 내가 한눈에 반했을지도 몰라."

 

시온은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것도 신의 어린 양인 당신에게 말이야.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지 않소?"

 

"헛소리 마라. 너희같은 타락한 영혼에게 사랑 같은 고귀한 감정이 들 리 없다."

 

하지만 말이야, 하고 시온이 입을 떼었다.

 

"방금 유쾌한 친구들과 얘기를 하는데 내 눈이 성직자 무리에 가 멎더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성직자를 보는 순간 내 미간은 찌푸려졌으니."

 

라며 미간을 팍 찌푸려 보이고는.

 

과장된 몸동작으로 마치 무대 배우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마치 찬양하듯 손을 성직자에게 뻗었다.

 

"그런데 당신을 보는 순간 내 눈이 멈추었어.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더군. 말을 붙여보고 싶고 어떤 사람인가 호기심이 일었지. 그리고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뿔도 꼬리도 숨겼지. , 나는 그대가 두려워할까 심지어 이름조차 묻지 않았잖아?"

 

그러니 말해보시오, 성직자 양반.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이오?"

 

성직자, 한스 델러웨이는 악마와 말을 섞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만 한 마디 붙여도 이단으로 사형당할 터인데 말마디도 아닌 이런 유혹이라니 절대로 안될 일이다.

 

게다가 상대는 표정과 연기에 능숙한 사기꾼으로, 저 말이 거짓이 아니더라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머리로만.

 

올해로 서른줄에 접어드는 한스 델러웨이는 당연하겠지만 악마를 만나본 적도 없었기에 그 간절한 눈을 보고 저도 모르게 대화를 이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없는 저녁때에 말 한두마디 붙이는 것 정도라면."

 

그러자 겉모습만으로는 스물이 될까 말까, 얼굴에 솜털까지 난 이 악마는 활짝 웃으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약조하지. 일곱 일의 밤을 지내고 그대 입에서 싫다는 소리가 나오면 나는 떠날 것이오."

 

그러곤 잔뜩 들떠선 그를 밀어 침대에 앉히곤 자신은 의자를 빼어 거꾸로 앉곤 반짝반짝 빛나는 기묘한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뭐가 좋아? 미래와 과거의 비밀? 사람들 마음속에 숨은 정열을 깨우는 법? 사랑의 묘약을 제조하는 방법? 뭐든 내가 아는 것이라면 가르쳐줄 수 있소."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니와, 참으로 상스러운 내용이군."

 

"악마에게서 기품을 찾는 일이 이상한 것이지, 우리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그럼 어떤 대화가 좋을까. 한때 유행했다던 토론은 어떨까? 바늘 한 개의 끝 위에는 몇 마리의 천사가 춤출 수 있게?"

 

"불경한 입으로 천사를 감히 동물처럼 칭하다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내자 악마의 보랏빛 눈은 동그랗게 변했다.

 

화나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느니 주섬주섬 변명을 집어삼키곤 뒷걸음질 친다.

 

"내가 흥미를 가질 주제네! 악마를 죽여버릴 방법을 가지고 오게! 물론 그 재료도 빼먹으면 안 되겠지!"

 

한 번 소리를 지르며 다가갈 때마다 그 보랏빛 눈동자는 덜덜 떨리고 급기야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해 열린 창문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애당초 악마 따위와 말을 섞는 게 아니었어.

 

한스 델러웨이는 성경을 집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울 것 같은 어린 젊은이의 보라색 눈동자가 남아 버렸다.

[단편] 월야밀회 (신윤복의 그림을 보고)

2015. 11. 19. 23:46 | Posted by 호랑이!!!

이것 참 난감하게도 되었구나.

 

명월이 그리 생각하였다.

 

그녀의 기명은 밝은 달이라는 명월인데, 오늘 밤은 그녀 이름처럼 달이 밝아 있었다.

 

지나치게, 밝아 있었다.

 

그녀 있는 기생관은 뒷문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뉘인지 모르도록 담 사이를 좁게 한 뒷길이 있었는데, 평소라면 이 길로 다녀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 누굴 마주치지도 않았고.

 

그래서 달 밝은 오늘밤도 색 진한 녹색 장옷을 뒤집어쓰고 나가려고 했는데 글쎄, 그녀 동기 기생인 애화가 웬 남정네 하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꼴을 보아하니 연회 열리는 곳에서 함께 빠져나온 모양.

 

두 연놈이 정분이라도 났나 그 좁은 길을 틀어막고 속살대는 꼴이 눈꼴시립다.

 

모자에 매달린 붉은 끈이 어떻다, 구슬 장식이 어떻다, 다음에 하나 사다 주마, 네 웃는 얼굴이 보기 좋기도 좋니.

 

네 웃는 상판이야 아무렴 어떻고 저 치의 장식이 좋으면 떼어가구, 그리도 좋으면 사람 다니는 길 말고 네 방에서나 그러란 말이다.

 

얼마인가 기다리니 다리가 아파와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야단하여 쫓아내려는데 둘이가 멀어지는 소리가 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리를 통통 두드리는데 또 이 길에서 발소리가 난다.

 

오늘은 왜 이렇게 길에 손이 많은고, 손에 내가 쥐인 것 같구나.

 

명월은 더는 아니되겠다 싶어 그냥 지나치리라 했다.

 

어디 자제나 다른 기생들인가 했더니 뜻밖에도 화통을 어깨에 맨 서생같은 이, 손에는 그림이 있다.

 

누구요?”

 

화공이요.”

 

이 명월관에서 화공을 부른 적은 없었을 텐데.”

 

지나가다가 소재를 발견해서, 그렸을 뿐이오.”

 

그림에는 애화와 남자와 자신이 그려져 있었다.

 

월야의 밀회라.”

 

당신도 밀회하러 가는 길이요?”

 

명월이는 장옷을 쓰고 매무새를 다듬었다.

 

무어라 제게 말 붙이려는 화공을 홱 노려보고 매몰차게 한 마디 남기고 쌩하니 지나쳐갔다.

 

왜 이리 귀치않게 굴어!”

 

길을 지나고 문을 지나고 다시 한참이나 사람 없는 길로 가니 이젠 아무도 근처에 없겠거니 하여 다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어디 보자, 오늘은 새 시체가 있겠거니.

 

명월의 섬섬옥수가 치맛자락을 들었다.

 

아래 털 풍성한 꼬리가 여럿이나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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