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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9

2019. 5. 3. 23:32 | Posted by 호랑이!!!

 

날이 밝자마자 아라벨라는 슬리퍼를 신었다.

 

벗겨지지 않게 끈으로 질끈 묶고 잠옷 차림으로 마구간으로 달려가자 근육질의 백마가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일찌감치 말에게 여물을 주러 나온 마구간지기는 아라벨라가 사납기 그지없는 말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외쳤지만 아라벨라는 데일라가 든 칸의 문을 활짝 열었고 아라벨라의 백마는 훌쩍 뛰어나왔다.

 

오랫동안 달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인지 애교스럽게 부비는 머리에는 힘이 실려서 때로 아라벨라의 몸이 들썩 들리기까지 한다.

 

승마용 옷도 입지 않았고, 말은 사납고, 제 손으로 말이나 몰아보았을까 싶은 귀족 아가씨.

 

그러나 아라벨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며 날렵하게 말 위에 올랐다.

 

데일라는 한동안이나 달리지 못한 반동인지 처음 달리는 길인데도 거칠게 달려갔고 마악 저택에 채소를 가져다준 마을의 농부는 얼어붙었다가 아라벨라가 달려오자 문을 열어 그 뒤로 후다닥 숨었다.

 

백마와 아라벨라의 뒷모습은 며칠 동안 아라벨라를 지켜보았던 이들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아가씨가... 말을 타네...?”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목을 두드렸다.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와 뛰다보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아라벨라는 길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렐리악 영지에는 평야와 숲밖에 없었으므로 산을 보는 것은 처음.

 

세상의 초기에 신성한 용이 이 거대한 대륙에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 용이 발로 판 곳에는 물이 고여 연못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고 흙을 밀어낸 곳은 낮은 지대, 흙이 밀린 곳은 언덕이 되고.

 

먼 훗날 그 용이 대륙에 몸을 뉘이고 죽음을 받아들일 때 등뼈를 따라 산맥이 생기고 뼈는 보석이, 마지막 숨결은 이 세상의 마나가, 몸은 거대한 산이 되었다.

 

아라벨라는 숨을 들이쉬었다.

 

신성한 용의 몸

 

장소에 깃든 마력은 청량하고 공기는 시원하다.

 

얼핏 아라벨라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어진 듯 보였다.

 

데일라가 불안한 듯 투레질을 하자 아라벨라는 손을 내려 부드럽게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며 나지막하게 기도를 올렸다.

 

할머니를 찾게 도와주세요

 

가자, 데일라.”

 

데일라는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금방 산에도 적응하여 길을 올랐다.

 

처음 얼마간은 가팔랐던 길은 어느 정도 산을 오르니 완만한 길로 변했고 데일라의 발도 느려졌다.

 

아라벨라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에 물이 솟는 작은 샘이 있어서 백마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끌고 갔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물은 깨끗했기에 데일라에게도 먹이고 아라벨라도 좀 떠 마셨다.

 

할머니가 이 길로 갔겠지.

 

할머니하고는 도통 좋은 기억이 없지만 저 저택에 주인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할머니에게도 저택에도 렐리악 가문에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태까지 외길이었다는 것과 산을 아무리 둘러봐도 늑대나 곰, 위험한 마수의 흔적이 없다는 것.

 

이 산보다 사람 발이 많이 닿는 아라벨라의 집 근처 평지에도 오소리나 늑대, 마수 같은 게 한 무더기는 있다는 걸 떠올려보면 꽤 안전한 곳이다.

 

이런 곳에서 왜 할머니는 못 돌아오는 걸까.

 

아라벨라는 해가 지도록 말을 달렸다.

 

데일라는 힘차게 달렸고, 빠른 걸음으로 구릉을 지나 언덕을 넘고 장애물을 뛰어넘었고, 해가 질 즈음에는 연못가에 뻗어버렸다.

 

“...데일라.”

 

푸르르.

 

해가 지고 있어.”

 

푸르르르.

 

집에 안 가?”

 

푸힝.

 

사과 줄게. 빵도.”

 

푸힝 푸르르르륵.

 

투레질을 거칠게 하는 모습에 아라벨라는 데일라의 몸에 기대 다리를 쭉 뻗었다.

 

너무 달렸나.

 

해도 지고 배도 고프고, 이제 어떻게 돌아간다.

 

이렇게 오래 달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좀 가지고 나오는 건데 정신을 차려보니 해 뜰 때 나와서 해 질 때에야 멈췄다.

 

돈도 없고 옷은 다 더러워지고 해어지고야 말이다.

 

길이 어렵지는 않았으니 가려 한다면 혼자서도 잘 가겠지만 아라벨라는 데일라를 여기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데일라아.”

 

그러나 데일라는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라벨라는 나무에 기댔다.

 

할머니의 저택으로 올 적에야 노숙을 했지만 그건 마차 안이었지.

 

창문으로 살짝 내다보면 스파크와 몇몇 기사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고 잠들기 전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끼어들 수도 없었으니 몰래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오늘 길은 어땠고, 오는 길의 호수가 예쁘고, 아까 보았던 나무가 어떻고 저떻고, 내일은 마을에서 쉴 수 있겠다던가, 저기 흘러가는 구름이 생긴 게 동물 같다던가, 바람이 좋다던가, 무슨 향이 난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매일 반복되기도 했고, 같은 주제인데도 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별이 있었지

 

별이랑 달이랑.

 

아라벨라가 고개를 들자 어두워진 하늘에 하나둘씩 떠오르는 하얀 별과 노란 달이 보였다.

 

멀리서 바람이 불자 숲과 나무는 살랑살랑 흔들리고 나무껍질과 이끼와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냄새가 나고 아라벨라는 아직은 날이 춥다는 생각을 했다.

 

데일라.”

 

푸르륵.

 

할머니는 대체 어디에 가신 걸까.”

 

푸르륵.

 

적어도 마르틴과 아라벨라가 할머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계시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아라벨라는 잠옷 자락을 끌어내려 발을 가렸다.

 

숄이라도 하나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잠옷이 이미 흙먼지로 엉망이 된 것은 둘째 치고, 바람에 날리던 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진 것도 다음으로 미루고... , 엉망이군.

 

하늘을 보면 여전히 달이 비친다.

 

별이 반짝이고, 나뭇잎이 팔랑이고,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잠깐, 저거 바람?

 

아라벨라가 벌떡 일어서자 데일라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굴려 쳐다보았지만 데일라가 어떤 반응을 하던 아라벨라는 홀린 듯 한 곳에 눈을 두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푸른 바람.

 

바람이 보인다.

 

어두워서 잘못 본 건가?

 

아라벨라는 나뭇가지를 타고 올랐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어렵지 않게 올라서 흔들리는 나뭇잎에 손을 내밀자 푸른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간다.

 

무슨 가루 같은 것인지, 아라벨라는 손을 눈 바로 앞으로 끌어당겼으나 어떤 염료 같은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높은 나무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하얗게 달빛이 내리쬐는 아래 온 숲이 검게 술렁이고, 그 안을 잘 보면 나뭇잎이 은빛으로 빛을 반사하는 사이로, 사이사이로, 녹색에 가까운 푸른 바람이 온 산을 감싸고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어느 곳은 빠르게 내리꽂히고 어떤 곳은 나지막하고 연하게 흘러가고, 어떤 곳에서는 휘몰아치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이라니.

 

그 장관에 넋을 놓았던 아라벨라를 현실로 끌고 온 것은 발에서 올라오는 통증이다.

 

땅으로 내려와 발에 묶었던 끈을 풀고 슬리퍼를 벗자 그렇잖아도 낡았던 슬리퍼는 꽤 못 볼 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발도 못 볼 꼴이 되어 있었다.

 

몰랐을 때는 신경조차 안 쓰였는데! 신발을 벗고 엉망진창인 발을 봤더니 갑자기 오만 상처가 다 아프다... 아야야...

 

꼼짝도 못하겠다며 신발을 주머니에 푹 쑤셔 넣는데 갑자기 옆의 풀숲이 부스럭부스럭 흔들렸고 방금 전까지 꼼짝 못 한다던 아라벨라와 데일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낙트!”

 

누군가가 외쳤다.

 

 

 

========================================

전 편에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어 조금 수정했습니다.

 

집사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한 문장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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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8

2019. 4. 28. 22:31 | Posted by 호랑이!!!

 

 

방에 도착하여 아라벨라의 천가방을 열면 반들거리는 비늘이 불빛에 드러난다.

 

한 번도 깬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벌써 며칠이나 되었는데 어째 이 비늘은 갈수록 반짝이고 상처도 쌩쌩하게 낫는다.

 

“...자고 있나아.”

 

마르틴, 너무 가까이 가면 위험-”

 

파드득.

 

꼬리가 떨리자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긴장한 두 쌍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꼬리를 보았다.

 

꼬리는 퍼득퍼득 움직이고, 또 가만히 있기도 하고, 또 파다닥 움직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 사이에서 빼꼼, 조그만 머리가 튀어나왔다.

 

?”

 

머리는 이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듯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등 뒤에 둔 채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만져볼래.”

 

안돼, 마르틴!”

 

그러나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팔 아래로 몸을 숙였다가 앞으로 뛰쳐나갔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팔을 잡으려고 했으나 겨우 손 끝만 스쳤다.

 

몸이 따뜻하네!라며 감탄하는 마르틴의 손 앞에 납작하고 길쭉한 뱀 같은 주둥이가 입을 벌렸다.

 

두 줄 촘촘하게 돋아난 이빨들은 하얗고 뾰족했고, 이 뱀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거기에 또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자 그 안에 길쭉한 송곳니가 드러났는데 동물 대백과를 읽은 아라벨라의 눈 앞에 송곳니는 독액을 먹잇감 안에 삽입할 때 쓴다는 문장이 스쳐지나갔다.

 

.”

 

급박하게 손을 뻗은 아라벨라의 눈 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당연히 마르틴의 손을 깨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뱀은 오히려 비늘 돋힌 뺨을 마르틴의 손등에 기댔다.

 

마르틴이 활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뱀의 턱 아래를 간질이자 뱀은 웃는 것처럼 주둥이를 짝 벌리더니 눈을 깜박였다.

 

이상하네, 뱀한테도 눈꺼풀이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다 아라벨라는 그 뱀이 날개를 퍼득이면서까지 마르틴의 몸에 찰싹 달라붙자 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튼 다행히도 저 뱀이 마르틴을 해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이후로 아라벨라는 마르틴과 함께 날고기를 뱀한테 먹여 보고 씻기기도 하고 (마르틴의 고집으로)핸드백 안에 쿠션과 솜, 천 조각 같은 것을 담아 뱀의 침대도 만들었다.

 

둥지가 생기는 것이 기쁜 뱀은 삐 삐 울다가 아라벨라의 침대에서 마르틴과 함께 놀다 지쳐 잠들었다.

 

처음에는 저 뱀 같은 것이 언제 돌변해서 마르틴을 물거나 감아서 죽일지 몰라 아라벨라는 뜬눈으로 둘을 지켜보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나흘이 지나는 동안 둘이 사이좋은 모습을 보았더니 이제는 둘만 놔두어도 될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마르틴은 아라벨라의 방에서 잠들었고 아라벨라는 유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집사 프루던스는 밤중에 집안에서 움직일 때는 사람을 붙여서 다니라고 했었지만 이 시간에 사람을 깨우기에는 미안하다.

 

푹신한 슬리퍼가 발소리를 가라앉혀 주자 새삼스러운 신기함에 조심조심 발을 옮기니 발 소리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들리지 않는다.

 

아라벨라는 촛대를 들고 발을 위로 옮겼다.

 

이전에 집사와 마주쳐 쫓겨난 3.

 

지금이라면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

 

계단에서는 조금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고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3층으로 올라온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다만.

 

1, 2층과는 공기부터 달랐는데 더 차갑고, 더 공허한 느낌이 났다.

 

복도조차 다른 층보다 넓어서 아라벨라는 계단을 올라와서는 한 바퀴 빙글 돌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밟힌 티가 덜 나는 창백한 푸른빛의 카펫은 아라벨라의 발 아래 고개를 숙이고 벽에 걸린 그림은 아라벨라의 촛불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라벨라는 그림에 촛대를 가져갔다.

 

그림 안에서는 갑주를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제각기 호수나 숲을 배경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기법에 따라 묘사되었다.

 

3층 방은 문이 잠겨있지 않아서 하나씩 열어볼 수 있었다.

 

작은 방 하나는 커다란 책상과 커다란 의자가 있는 개인 서재였고, 벽을 따라 늘어선 책꽂이에는 책보다 종이나 얇은 천이 더 많다.

 

방 하나는 갑옷이나 무기,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것들이 전시처럼 늘어서 있다.

 

말 등에 얹는 것 치고는 납작하게 생긴 안장을 건드렸더니 보기보다 더 단단했다.

 

언제든 쓸 수 있게 손질해두는 것인지 가죽끈을 꼬아 만드는 줄도 몇 개나 옆에 놓여 있고 둥근 링 같은 것도 있는데 아라벨라는 말이나 소 같은, 흔한 짐승의 것이 아닌 다른 냄새를 맡고는 가죽끈을 들어올렸다가, 바깥에서 갑자기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나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 했다.

 

끈을 내려놓고, 아라벨라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소리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서 들려왔다.

 

후 불어 촛불을 끄고 살금살금 다가가니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붉은 머리에 노란 눈의 젊은 집사가 무릎을 꿇고 무어라고 말한다.

 

바실리, 바실리... 제발, 바실리. 빨리... 왜 산에 가서-”

 

바실리라면 할머니 이름인데.

 

아라벨라는 문에 가까이 다가왔다.

 

차갑고, 빤히 쳐다보고, 조용하고, 뻔뻔한 구석도 있는, 파충류 같은 그 집사가.

 

울고 있다.

 

우는 남자를 구경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돌아서려다 아라벨라는 다음 들리는 말에 몸을 홱 틀었다.

 

에멜라도 죽고...”

 

어머니가 왜?

 

비록 아라벨라의 집에서는 셰필라가 고른 사람이 집사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프루던스의 집은 대대로 렐리악 가문의 집사라고 했다.

 

삼류 로맨스 같은 소리지만, 후계자의 약혼녀인 어머니와 본 적 있다고 해도.

 

그래서 셰필라가 프루던스 대신 새 집사를 데려왔다고 해도.

 

할머니는 왜?

 

조용히 뒷걸음질 치다 아라벨라의 슬리퍼 한 쪽이 벗겨졌다.

 

동시에 프루던스의 고개가 문 쪽으로 확 틀어졌고 놀랄만한 속도로 문에 다가섰다.

 

프루던스의 눈에 도는 기묘한 빛이며,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쳐다보았기에 아라벨라는 숨이 막혔다.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겁니까.”

 

“...프루던스.”

 

밤에 집 안을 돌아다닐 때에는 고용인과 함께해 달라고 말을 했었습니다.”

 

문을 금방이라도 닫아 버리려는 낌새에 아라벨라가 문을 잡았다.

 

할머님은 이 집에 계시지 않는 거야?”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거칠게 손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문이 쾅 닫혔다.

 

아라벨라는 닫힌 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가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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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7

2019. 4. 15. 23:52 | Posted by 호랑이!!!

 

우아하게 넓은 챙에 초록색 이국의 새에게서 얻은 길고 넓은 깃털을 꽂고 진한 녹색 리본이며 레이스, 프릴을 달아 화려한 그 모자는 진짜 꽃까지 얹은 것도 모자라 옆과 뒤에 커다란 꽃다발을 수놓은 주름천을 층층히 달았는데.

 

둘둘 말아 천으로 된 몽둥이마냥 들었더니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레이디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아라벨라는 손을 들어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을 못하는 그 자작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악!”

 

비욘 자작은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두 대.

 

, , 다섯, 여섯 번 휘두를 때마다 모자에 달아둔 꽃이 조각나 하늘에 흩어졌다.

 

주름을 잡아 단 천은 뜯어져 펄럭이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구슬은 끈이 끊어지고 달아두었던 깃털은 주인을 찾아가겠다는 듯 떠올랐다가 불어온 미풍에 힘없이 날려갔다.

 

모자가 작살이 난 것에 비하면 비욘 자작은 타격이 없어 보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눈 한 쪽에 멍이라도 들었다면 좀 좋으련만 머리나 좀 흐트러지고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것이 전부.

 

정신계 공격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라벨라는 우그러진 모자를 우아하게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가기 꺼려진다는 말을 그렇게나 알아듣지 못하시다니 저야말로 곤란합니다."

 

"......."

 

비욘 자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나에게 창피를 주다니!"

 

"제정신입니까? 지금까지 싫다고 한 건 뭐라고 알아듣고?"

 

그러다 비욘 자작은 하,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런다고 당신이 가시 달린 장미처럼 보일 것 같습니까?"

 

"꽃 같은 건 되었습니다."

 

아라벨라는 궁금했다며 말을 꺼냈다.

 

"얼굴도 그냥 그렇고, 고매한 정신 같은 것도 없고, 당신과 하는 대화가 재미있지도 않고, 방금의 행동으로 어떤 사람인지 바닥도 본 것 같은데.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꽃으로 보이고 싶겠습니까?"

 

"아니, 그럼 여자 취급 말고 사람 취급을 해 달라는 말입니까?"

 

그 말에는 어이가 없어진다.

 

"왜 당신은 여자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까?"

 

"레이디 퍼스트니 하면서 남자가 문 열어 주는 건 그렇게나 좋아할 거면서...!"

 

지금까지 아라벨라를 빤히 보던 집사 프루던스가 비욘 자작과 아라벨라 사이에 섰다.

 

"흥분하셨습니다."

 

"비켜!"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까지 하자 아라벨라의 교육을 맡은 부인들은 아라벨라를 자신들의 가장 뒤로 밀고 눈을 가려 주었다.

 

프루던스는 어떻게든 그 자작을 조용히 시켜서 데리고 나갔고, 다른 고용인들이 다가와 어질러진 티 테이블을 치우고 새 차와 과자를 꺼냈다.

 

"레이디 아라벨라는..."

 

부인이 입을 열자 아라벨라는 마음이 찔려 레몬을 띄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통찰력이 있군요."

 

"거절을 했다손 쳐도 저렇게 거친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예요."

 

아라벨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자세를 교정해주는 부인은 부채를 접어 아라벨라의 고개를 살짝 내려주었다.

 

잠시 눈치를 보다 아라벨라가 입을 열었다.

 

모자를 망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먼저 말렸어야 했는데.”

 

사과를 건네는 모습에 평소라면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라고 했을 부인도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마르틴은 아라벨라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아라벨라가 내려다보자 마르틴은 시무룩하기가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못해서 미안해, 누나.”

 

네가 뭐가 미안해.”

 

아라벨라는 깜짝 놀랐다.

 

백작님이 나보고 누나를 잘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잠깐 마음속으로만 말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거 신경쓰지 마. 내가 너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아! 지켜도 내가 지켜줘야지.”

 

그러나 마르틴은 그 말을 듣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리더니 싫다는 말을 더듬더듬 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라벨라는 귀여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부인들에게 잠시 실례하겠다며 마르틴을 안아들고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비욘 자작은 더 이상 이 저택에 오지 못할 겁니다.”

 

집사 프루던스는 아라벨라와 마르틴의 접시에 잘 구운 사슴고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넓은 테이블에 아라벨라와 마르틴 뿐인데도 접시 위에는 꽤 많은 고기가 있었다.

 

그리고 아라벨라 아가씨의 예의범절과 자세를 가르쳐주시던 남작 부인께서도 앞으로는 오지 않으실 겁니다.”

 

이 말에 아라벨라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어 접시 위의 고깃덩어리를 나이프로 푹 찔렀다.

 

, 두 분께 마을의 의상실에서 주문한 슬리퍼가 도착하였습니다.”

 

프루던스의 말에 고용인이 황금색 리본으로 묶은 납작한 상자를 두 개 가져다주었고 아라벨라는 끈 한 쪽을 잡아당겨 상자를 열었다.

 

눈이 퉁퉁 부은 마르틴에게도 상자가 두어 개 배달되었다.

 

마르틴 도련님의 승마 교사를 어서 구하겠습니다.”

 

마르틴이 내켜하지 않는 표정으로 눈만 굴려서 집사를 쳐다보았고 붉은 머리의 집사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둘의 접시에 푹 쪄서 소스를 얹은 채소들을 덜었다.

 

왜 그래, 마르틴?”

 

어어? 아니, 아아니.... 아무것도....”

 

아가씨께도 새 선생님을 구해드려야겠군요. 당분간은 일정이 없으니 편히 쉬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말 타도 되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에 마르틴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집사를 불렀다.

 

저어기, 할머니는... 한 번도 못 뵈었는데요.... 저기, 그러니까...”

 

주인님께서는 바쁘십니다.”

 

프루던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마르틴의 접시에 고기를 두 조각 더 올렸다.

 

도련님께서는 조금 더 영양을 섭취하셔야겠습니다.”

 

시무룩하게 마르틴은 칼로 고기를 잘랐다.

 

이제는 귀족이 된 지 며칠이나 되었는데도 사람을 부르거나 부리는 일에는 영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자세만은 손댈 데 없었으니, 저건 사피야의 작품이겠지.

 

사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은 마르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르틴. 이따 내 방에 잠깐 와.”

 

어브...”

 

마르틴은 뭔가 말하려다가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도련님, 입에 음식을 물고 말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미안해요...”

 

프루던스는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마르틴의 접시에 고기를 세지도 않고 덥썩덥썩 집어 올렸다.

 

저에게 사과하시면 아니됩니다. 저는 한낱 집사이고 도련님께서는 백작 집안의 분이십니다. 도련님께서도 사람을 부리는 일에 익숙해지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렐리악 가의 이름이... 겨우 이런 걸로는 더럽혀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른 못된 사람들이 도련님을 우습게 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집사 인상이 나빠서 그래.”

 

제가요?”

 

프루던스는 아라벨라 쪽을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낯뜨겁습니다만, 이래봬도 목재도령 대회의 3연 우승을 할 만큼은-”

 

목재도령은 또 뭔데?”

 

이 근처의 특산품은 튼튼한 목재라 홍보차 미남미녀 대회를 여는데 미남은 도령, 미녀는 아가씨라고 합니다.”

 

그런 소릴 자기 입으로 하고 있지만 별로 부끄러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잘생긴 건 별개로 인상이 나빠.”

 

삐쭉 올라간 노란 눈이며 굳이 웃지 않으면 아래로 처진 채인 입꼬리는 일주일 내내 웃지도 않았다.

 

웃어 봐.”

 

그러자 방긋 웃기는 하지만 올라간 눈꼬리는 별로 완화되지 않는다.

 

별로네.”

 

, 지만 미남인걸...”

 

미남이랑은 별개로 인상이 사나워. 너도 덜덜 떨고 있잖아.”

 

아안, 떨었어! 아니거든!”

 

바실리스크인지 뭔지 모를 물건이 든 가방은 잘도 옮겼으면서.

 

마르틴은 비쭉 입을 내밀었다.

 

요리사가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디저트까지 먹고 난 후에 아라벨라와 마르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가 자리를 치우는 모습을 힐끗 보고 마르틴은 조심스럽게 아라벨라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그렇게 신경쓰여?”

 

쪼오끔...”

 

왜일까? 마르틴이 평민으로 자라서? 하지만 셰필라 렐리악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던데.

 

게다가 무섭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자꾸만 집사가 있는 쪽을 힐끗힐끗 본다.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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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6

2019. 4. 12. 11:22 | Posted by 호랑이!!!

 

몸을 씻겨 주겠다고 하면 곤란하므로, 아라벨라는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거기에 카트까지 세워두었다.

 

박을 말려 칠을 한 그릇에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어 미지근해지자 핸드백을 열었다.

 

닫아두었던 곳에서 피 냄새가 물씬 풍겼고 조심스럽게 비늘 달린 몸체를 들어 그릇에 담그자 까맣던 몸에서 조금씩 마른 피가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담가 두고 기다렸더니 비늘 사이에 엉긴 피나 이파리 같은 것들이 조금씩 불어서 당기거나 손톱으로 살짝 긁는 것만으로도 씻긴다.

 

바실리스크가 아닌 것 같은데...?”

 

바실리스크의 특징인 깃털이 없고, 날개의 모양이나 크기도 책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흔한 동물인 뱀이나 박쥐도 아닌 것 같으니.

 

잘 씻겨놓고 수건으로 감싸놓자 다시 몸을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깨지는 않는다.

 

아라벨라는 뱀을 돌돌 말아 다시 핸드백에 담아두고 자신도 씻기로 했다.

 

보송보송하고 따끈해져서 욕실에서 나오자 맨발에 따뜻하게 카펫이 느껴졌다.

 

그나마 마차 안에 있을 때는 힐도 벗어두었는데 발바닥으로 카펫을 밟고 마룻바닥을 느끼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으로 느껴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침대 옆에 무언가가 비친다.

 

노란색 천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조그만 슬리퍼였다.

 

작은 등불로도 그 슬리퍼가 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아라벨라는 슬리퍼를 신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무어라고 하는 대신 핸드백을 침대 위에 올리고 자신도 그 옆에 올라가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아라벨라의 일과는 눈에 띄게 바빠졌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으로 과일이나 좀 집어먹고 나면 외출복에 가까운 실내복으로 갈아입혀졌고 초청한 가정교사에게 역사나 음악이나 작문에 자수 같은 것을 쉴 새 없이 교육받은 다음에는 자세를 교정하는 기괴한 철통을 몸에 감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서 있거나 지시하는 움직임을 해야 했다.

 

썩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던가, 이미 배운 내용을 또 배워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래도 항상 해 왔던 일이니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지만.

 

언제고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는 붉은 머리의 집사가 서 있었다.

 

게다가 할머님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언제 한 번은 3층으로 몰래 올라갔지만 집사에게 들켜 2층으로 쫓겨났다.

 

프루덴스.”

 

아라벨라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빨간 머리의 젊은 남자는 아라벨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3층의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할머니께서는. 마르틴은 만나셨나?”

 

아닙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는 지금 그저 일이 있으셔서 짬을 내지 못하시는 것뿐입니다.”

 

아라벨라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지 내의 승마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는 사실에 지나친 자부심을 느끼는 어느 남작이 마르틴에게 마구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우리 수업도 할머니께서 짜신 건가?”

 

선생님을 초청한 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

 

수업이 시작하고 거의 매일, 둘은 바빴고, 수업시간 사이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언젠가는 아라벨라가 마르틴의 방을 찾아갔더니 한참 이른 시간인데도 지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천사처럼 자고 있었지.

 

사피야는 아름다운 사람이고 마르틴은 그 어머니의 유전자를 아낌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귀여운 동생이 누나누나 하면서 오니까, 새삼 자신이 연장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러니까 연장자로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잘 크게 할 책임감도 느끼게 되었는데 말이다.

 

챙겨주고 조언해주고 도와주기 위해서는 일단 만날 시간이 나야 할 거 아닌가.

 

식사시간 외에 티타임이 있기는 했지만 티타임이 쉬는 시간이 아니라 수업의 일환으로서 진행되는 것이 문제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

 

얹힐 것 같은 기분으로 꽃을 넣은 차를 마시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는 남자들이 우르르 보였다.

 

저건 일단 마르틴이고, 시중 들어주는 고용인이 두어 명 있고, 옆에서 외국어로 된 시를 읽어주는 교사가 한 명, 그리고 옆에 있는 건 승마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그 사람은 차를 마시려다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으악 눈 마주쳤어.

 

왜 저렇게 웃는거지?

 

기분 나빠라.

 

어머나 비욘 자작에게 관심이 있나요?”

 

아니오.”

 

왜 이 상황을 보고 제가 관심이 있다고 받아들이시는지 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웃은 건 제가 아니라 저 준우승남이고 제 무표정과 저 기분 나쁜 웃음 사이에서 뭘 보시고 관심이라는 많은 의미를 포함한 단어를 떠올리셨는지.

 

라는 말을 간신히 목 뒤로 쑤셔넣으며 아라벨라가 뻣뻣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단지 마르틴이 적응을 잘 하고 있는지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나쁜 일이 아니랍니다. 비욘 자작은 젊은 나이에 벌써 자작위를 손에 넣었고 바이언드 백작의 조카이니 백작이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요.”

 

그러면서 이어지는 호기심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아라벨라는 머리를 감싸쥐고 싶어졌다.

 

이 사람, 이미 내가 저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전제로 말하고 있구나.

 

아라벨라가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 없다는 것을 말하자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자수 교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싱숭생숭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이 뭔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다 사랑이 된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적에 시집을 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해댔다.

 

교사만 아니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 아까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쳤던 비욘 자작이라는 사람이 여성들 테이블로 다가왔다.

 

자기들끼리 쑥덕이더니, 남성 테이블의 사람들이 이 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본다.

 

무슨 내기에 넘어가는지 넘어가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은 불쾌함에 아라벨라는 찻잔을 꽉 쥐었다.

 

평소라면 레이디의 교양과 몸가짐에 대해 가르치는 교사가 한 마디쯤 할 법했으나 그 사람도 아라벨라가 남자 앞이라 긴장한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레이디 아라벨라, 마르틴 도련님과 산책을 하려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또 왜 이러는지.

 

아라벨라는 당신이 빠져 준다면 기꺼이 가겠다고 말할 뻔했으나 일말의 선량한 마음이 입을 다물게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다음에 수업이 있습니다.”

 

아무리 같은 귀족이라고는 하나 저 사람은 한낱 자작이고 아라벨라는 백작의 딸이다.

 

마르틴만 아니라면 다음 백작위는 아라벨라의 것이었고 지금도 백작의 후계자이니 준백작이나 다름없는데도 다가오다니.

 

이 사람은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한 사람이라고 아라벨라가 생각했다.

 

"날씨가 더워서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양산을 들어 드리지요. 정원 안쪽으로 산책을 해 보셨습니까? 어제 걸어 보았는데 잘 꾸며진 연못이 있더군요."

 

이 집은 제 할머니 댁인데 산속에서 연못을 발견했다~ 투로 이야기해봤자...

 

"이 이후에 수업이 있기에 곤란합니다."

 

"잠깐이라면 봐 주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그 사람은 기어이 모자와 양산을 가져오라 이르더니 남작 부인이 내민 모자를 들어다 아라벨라의 머리 위에 푹 눌러 씌웠다.

 

마르틴은 무슨 일인지 몰라하다가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여기서 아라벨라나 마르틴을 도와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자를 쓰셨고 이제 양산을 가져오니 이제 가로막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자꾸 내빼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아라벨라는 머리에 쓴 모자를 고쳐 쓰다가 그 말에 벗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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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5

2019. 4. 1. 22:48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아가씨! 도련님!”

 

스파크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외국의 단장 아래에서 스파크라고 불리면서 구르기가 벌써 몇 년,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수행하는 일이 생겼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도적떼가 아니라 나뭇가지더라도 아가씨 몸에 생채기라도 내면 용서할 수 없다!

 

스파크.”

 

꺾인 나무는 마차 천장을 뚫고 바닥까지 잔가지가 흩어져 있었다.

 

스파크의 눈은 아라벨라에게로 곧장 향했다가 아라벨라의 품에 안긴 마르틴에게로 이동했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마차 안에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난 괜찮아. 마르틴은?”

 

저도 괜찮아요.”

 

마르틴은 아라벨라가 끌어안은 팔을 두어 번 두드려 벗어날 수 있었다.

 

저 나무 더미를 치워야 하니 잠시 멈추어야겠습니다.”

 

렐리악 전 백작의 집사가 다가오더니 아라벨라의 허락을 기다렸다.

 

이미 시간이 늦었고 때마침 저택도 근처이니 큰 나무만 빼고 나머지는 내일 하도록.”

 

가시는 동안 불편할 수 있으니 조금 지체되더라도 여기서 치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라벨라는 바닥에 늘어진 치마를 움켜쥐고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편하고자 다른 사람들을 더 고생시킬 수는 없지.”

 

그렇습니까.”

 

집사는 스파크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이더니 실례한다며 나무를 당겼다.

 

스파크와 집사 두 사람만으로 나무는 뽑혀 나왔고 구멍이 뚫린 자리로 희미하게 별이 뜨는 하늘이 보인다.

 

이제는 걸음을 서두르겠다며 집사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아라벨라는 나무 잔해를 덮은 치마를 확 걷어 올렸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숨을 내쉬는 가느다란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두운 달빛 아래 뱀같은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형상이었으나 내쉬는 숨이 뜨거웠다.

 

어둡네. 마나 등은 고장났고, 안 보이는데...”

 

나 그거 있어.”

 

마르틴은 가지고 탄 가방을 뒤적였다.

 

얼마간 뒤지다가 손에 잡혔는지 작게 위잉 소리가 나며 희미한 푸른 빛 불이 켜졌다.

 

푸른색 빛 아래에서 꺼멓게 보이는 끈적끈적한 것은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뱀처럼 생긴 그것은 눈을 감은 채라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마르틴, 가방에 자리 있어?”

 

.”

 

아라벨라는 자신이 가지고 탄 핸드백을 열어 뒤집었다.

 

구취제와 물감과 거울을 마르틴의 가방에 쑤셔 넣자 마르틴은 손수건도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지만 아라벨라는 손을 저었다.

 

상처가 있어? 거기에 감을 거야?”

 

아니. ...불 잘 들고 있어.”

 

마르틴이 손을 높이 들었다.

 

아라벨라의 어머니, 에멜라가 살아 있을 때 아라벨라는 자주 사냥에 참가할 수 있었다.

 

사냥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동물을 길들이는 것은 좋아했었지.

 

뱀은 아닌 것 같았고, 오히려 처치 곤란한 마물에 가까워 보이지만....

 

마르틴은 뱀 같은 것의 등에 붙어있는 날개를 슬쩍 건드렸다.

 

이거 무슨 바실리스크나 그런 걸까?”

 

마르틴이 소곤거리고는 아라벨라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릴 수 있게 도와주었는데, 한참이나 안절부절 못하다가 마차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리자 재빠르게 아라벨라에게 속삭였다.

 

내가 들어도 돼? 누나? 아라벨라 누나? 쪼끔만 가방 열어주면 안돼? 꼬리나 날개 만져볼래.”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상태를 보고.”

 

그럼 내가 가지고 갈래, ? ? 안 흔들고 얌전히 가져다줄게.”

 

너 이거 진짜 바실리스크면 위험하다는 거 알지?”

 

하지만 가방 안에 있으니까 괜찮잖아. 그치?”

 

바실리스크에게 제일 위험한 건 눈이긴 한데, 그래도 이빨이...

 

하고 망설이던 아라벨라는 스파크가 문을 열어주자 가방을 마르틴에게 넘겨주었다.

 

손잡이만 잡고, 흔들지 말고.”

 

걱정 마.”

 

소곤소곤 이야기하자 스파크가 무슨 일이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아라벨라는 시침을 뚝 떼고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장갑은 남성용인지 스파크에게는 조금 커서 장갑이 내려가자 스파크는 손을 더 올려 아라벨라에게 맞춰주었다.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지만 정원의 가로등과 저택 안의 불빛은 아주 환해서 걸음을 옮기거나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까맣게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선 저택은 렐리악 백작들이 후계자에게 백작위를 물려주고 조용히 은퇴하여 사는 곳이라고 들었건만, 이 저택은 은퇴한 귀족 부부가 살기에는 지나치게 커 보였다.

 

심지어는 도시나 왕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마력 등불도 있었는데 온 마당을 낮처럼 환하게 밝혀주어서 마당에 뭐가 있는지, 발에 뭐가 밟히는지 까지도 보인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두 분은 이만 쉬십시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풀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저택에 당도하자 문이 끼익 열린다.

 

색색의 돌을 다듬어서 무늬를 낸 호화로운 바닥은 장미 같은 진분홍이 메인 컬러이고, 무거운 빛의 녹색 벽에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거나 화병 받침대 같은 것들이 쭉 늘어서서 작은 조각품, 화분, 뚜껑이 덮인 과일 그릇이 장식되었다.

 

몇 명의 고용인들은 아라벨라의 짐을 내린다 마르틴의 물건을 옮긴다며 분주했고 마르틴은 그 모습에 자신도 도와야 하는 것인지 머뭇거렸지만 아라벨라가 손을 잡아주자 집사를 따라갔다.

 

두 분께서 머무르실 방은 2층에 있습니다. 3층은 주인님께서 조용히 있고 싶으시다고 하셨으니 당분간은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집사는 창문 하나 없는 긴 복도를 따라 그들을 데려갔다.

 

가장 끝이 아라벨라의 방.

 

그 옆은 청소 용구를 넣어두는 작은 방이고 그 다음이 마르틴이 받은 방.

 

방음 하나는 잘 되겠군, 이라고 생각하며 걷다 아라벨라는 발을 삐끗했다.

 

익숙해지지 못한 하이힐이 투두둑 뭔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카펫을 긁었고 스파크가 급히 아라벨라의 허리를 받쳐 주었다.

 

가죽 장갑 너머의 든든한 팔을 힘을 주어 잡고 몸을 일으키자 붉은 머리의 이 집사는 방 문을 열었다.

 

이 집에서는 실내에서 슬리퍼나 실내화를 신습니다. 짐에 굽 있는 구두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슬리퍼나 실내화를 신지 않으신다면...”

 

아니, 신어! 그냥 짐 쌀 때 힐을 빼놓고 와서 그래.”

 

슬리퍼를 신게 해준다고? 아버지의 연락을 받지 못 했나?

 

다시는 슬리퍼를 신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신게 되다니 아라벨라의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커졌다가 숙녀답지 못한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작아졌다.

 

집사의 노란 눈이 아라벨라를 향했다가 다시 방 안으로 향했다.

 

욕실은 방마다 딸려 있습니다. 목욕물을 받아두었으니 두 분이 먼저 여독을 푸시면 그 사이에 시종들이 방에 두 분의 물건을 놓아드릴 겁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침대 곁의 종을 울려 주십시오.”

 

마르틴은 집사와 스파크의 눈치를 살피다가 살금살금 다가와 아라벨라의 손에 핸드백 손잡이를 쥐어 주었다.

 

아라벨라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꿈틀거리는 핸드백을 꼭 쥐고 방 안으로 서둘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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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4

2019. 3. 16. 01:34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아가씨.”

 

아라벨라는 높이가 한 뼘이나 되는 힐 위에 서서 인상을 찡그렸다.

 

시녀들이 급하게 마르틴의 짐을 쌌지만 작은 가방 하나는 꼭 자기가 들겠다고 우겨 아주 작은 가방을 손에 쥔 모습에 겨우 인상이 펴질 뻔 했지만 집사가 내민 보석 박힌 손가방에 다시 우그러졌다.

 

뭐야. 됐어.”

 

숙녀라면 마땅히 드셔야 합니다.”

 

됐어, 저기 짐마차에 같이 넣어둬.”

 

이것은 들고 가셔야 합니다. 안에 꼭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그 말에 아라벨라는 가방을 받았다.

 

씹기만 하면 입안 청소를 해준다는 무슨 구취제가 한 병 들어 있고 가장자리에 레이스 장식과 자수가 놓인 하얀 손수건이 있고, 입술 위에 덧바를 수 있는 분홍색 물감이랑 은칠한 장미 장식 거울이 또 하나.

 

“...이게 무슨 꼭 필요한 물건인데?”

 

무릇 숙녀라면 부끄러운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 때를 대비해서 드리는 물건입니다.”

 

양파나 마늘을 먹고 나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입술 위에 칠한 물감이 옅어질 때가 있다고 말을 시작한 집사는 이후로 아가씨가 사용하는 손수건에 관한 이야기와 사용법을 서른 가지나 말하려고 했다.

 

날 십 년이 넘게 보았으면 알 텐데, 그거 안 쓸 거라는 걸.”

 

아가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실 겁니다. 우아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가씨의 의무이며, 물감을 칠하고 손수건을 건네는 것은 아가씨의 권리라는 것을요.”

 

짜증나.”

 

숙녀는 그런 언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마차에 타라며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이 손을 내밀었다.

 

짜증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으로 쳐다보다가, 아라벨라는 그 손을 잡는 대신 치렁치렁한 드레스 밑단을 쥐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바깥에서는 셰필라 백작의 말이 들렸다.

 

아직 성년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차할 때는 네가 누나를 지켜 줘야 한다. 알겠지? 네가 누나 보호자가 되는 거야.”

 

풀 사박이는 소리가 나더니 사피야가 가벼운 남색 드레스에 은회색 천을 어깨에 두르고 나타났다.

 

은장식이 달린 신발이 이슬이 맺힌 풀 위를 밟자 향긋한 향기가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준비는 다 되었니?”

 

아라벨라는 코 끝을 찡그렸다.

 

마르틴이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나고 마차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잘 다녀오렴, 아라벨라.”

 

다녀올게요 엄마!”

 

마르틴이 고개를 반짝 내밀었다.

 

난생 처음으로 아들과 떨어지는 사피야 렐리악은 의연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그 뺨을 쓸어 주었다.

 

누나 말 잘 듣고,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잘 다녀오렴.”

 

!”

 

마차는 최소한의 사람에게서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다.

 

사람들이 밟아 단단해진 길 위에서 마차는 부드럽게 달그락거렸지만 쿠션을 잔뜩 댄 마차 안은 약간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창틀에 턱을 괴고 바깥을 내다보자 대장장이 일을 하는 크룰탄과 눈이 마주쳐 웃는 낯으로 손은 흔들었지만, 아라벨라의 머릿속은 할머니에 대한 일로 가득차 있었다.

 

아라벨라는 할머니를 네 살 때 딱 한 번 만났다.

 

할머니는 녹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카락을 빈틈없이 틀어 올려서 얇고 번들거리는 하얀 가죽 같은 것으로 고정했고, 시선을 받은 사람이 움찔할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 비치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으로 아라벨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홱 돌아서서 새까만 말 위로 날아올랐지.

 

그 장면만큼은 아직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 장면을 떠올렸더니 왠지 몸이 근질거려서 창밖으로 몸을 빼었다.

 

아가씨, 위험합니다.”

 

얼룩무늬 말을 탄 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젠장.”

 

저는 스파크입니다.”

 

푸른 망토를 두른 그 사람은 아라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깥으로 몸을 내밀면 위험하니 부디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데일라도 혹시 여기 있어?”

 

데일라라는 이름의 사람은 없습니다.”

 

말이야 말, 하얀색이고 갈기는 짧아. 마구를 구름 무늬로 장식했어.”

 

아라벨라는 스파크가 내민 손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스파크는 잠시 앞뒤로 다녀오더니 데일라가 앞에서 마차를 끌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고 아라벨라는 다시금 말을 타고 싶어져서 끙끙거렸다.

 

할머니가 살고 있다는 곳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로, 왕국과 왕국을 나누는 거대한 산맥의 끝에 자리하는데 거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도 닷새나 걸렸고 그나마도 아가씨를 노숙하게 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에 며칠은 밤을 새서 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이 아라벨라를 잠시 밖에 나오게 해줄 리가 만무했고, 마을에 도착하더라도 구경할 시간 역시 주지 않았다.

 

한 번은 창문으로 몰래 나갈까 했지만 금세 스파크에게 들켰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이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아라벨라는 엿새째의 저녁에 마차 안에 쿠션을 깔고 그 위를 구르는 것으로 힘을 발산했다.

 

마르틴 도련님, 아라벨라 아가씨.”

 

노크 소리가 났다.

 

이번 여행에서 총 책임을 맡은 기사와 렐리악 가문의 상징인 용 문양이 새겨진 장식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희는 스파크만 남겨두고 렐리악 전 백작님의 집사에게 이 마차를 인계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아래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기사는 마르틴에게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다른 병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오시느라 피곤하시지요. 목욕물을 준비하도록 일렀습니다. 목욕으로 피로를 푸시는 동안 식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둑한 해에 역광으로 새까만 잎사귀를 바람이 흔들었다.

 

길을 따라 마차를 몰면 마을은 점점 더 작아지고 멀어졌고 장난치다 지쳐 잠든 마르틴의 발이 마차의 움직임을 따라 달랑거렸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서는 낯선 냄새가 났고 벌써 이틀이나 신은 힐은 걷지도 않았는데 발을 아프게 했다.

 

지나치게 평화롭고 불안한 마음으로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는데 위쪽에서 소리가 났다.

 

나뭇잎과 가지가 요란하게 부딪히고 꺾이면서 나는 소리가.

 

마차 천장을 쳐다보는데 불쑥 무언가가 나무 천장을 뚫었다.

 

나무가 거꾸로 자라나듯 천장에서 솟아나고 아라벨라는 마르틴을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도련님,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마르틴 도련님!”

 

아라벨라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지는 해에 안이 더 똑똑히 보였다.

 

부러지고 꺾어진 나무.

 

진액을 뚝뚝 흘리고 풋내가 진동하는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피 냄새 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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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아이)

2019. 2. 28. 04:51 | Posted by 호랑이!!!

아이, 나 왔어.”

 

버베나가 들어오면 항상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지금 시간은 오후 일곱 시.

 

나는 오전에 깨긴 하지만 항상 버베나가 출근한 다음에야 눈을 뜨기 때문에 오늘 처음 만나는 셈이다.

 

매일 집에만 있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도 버베나밖에 없으니 보통이라면 질릴 만도 한데.

 

언제나 이렇게 얼굴을 보면.

 

버베나가 인사를 건네면.

 

그제야 해가 뜨고 나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다.

 

[어서와]

 

내 말은 연결해둔 스피커를 통해 음성으로 전환되어 버베나에게 이동했다.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었어?”

 

스피커를 통한 기계적인 소리인데도 버베나는 기분을 금방 알아차리고 말을 붙여주었다.

 

[바깥을 봤는데 제비 둥지가 생길 것 같아. 봄이 오려나 봐. 이제 옷도 새로 꺼내고 이불도 바꿀 때가 왔어]

 

작은 새 두 마리가 입에 진흙이며 풀 따위를 물고 종종거리는 모습은 귀여웠다.

 

제비? 어디?”

 

그래서 이 질문에는 답하기 거리껴졌다.

 

어디냐니까.”

 

[베란다]

 

역시나 버베나는 당장 휴대폰으로 손전등을 켜고는 벽을 이리저리 살폈다.

 

베란다가 더러워지겠다며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버베나가 물으면 전부 대답하게 된다.

 

그리고 저렇게 피곤해하고, 짜증내는 모습까지도 전부 좋아하니까.

 

진흙을 긁어낼 것을 찾는 버베나에게 말을 걸었다.

 

[버베나, 따뜻한 물 받아 놨어. 목욕하고 싶지 않아?]

 

할거야, 이것만 떼고.”

 

[일정 보니까 내일하고 모레 쉬던데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해]

 

내일 휴일이야?”

 

나는 버베나의 일정을 적어둔 달력을 꺼내왔다.

 

달력에는 내일과 모레 날짜에 주욱 선이 그여 있고 그 아래에는 쉬는 날이 별 다섯 개와 함께 적혀 있었다.

 

버베나는 휴대폰 손전등을 껐다.

 

그랬지 참. 나 씻을게.”

 

버베나는 옷을 휙휙 벗어 세탁기에 넣었다.

 

[별일이야, 버베나가 휴일을 다 까먹네]

 

두 주에 이틀이나 쉴까말까 하는 버베나는 천재가 붙는 컴퓨터 개발자... 라고 했다.

 

딱 한 번 동료를 우연히 본 적 있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 버베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고 버베나는 그 사람과 내가 같이 있는 것을 보자마자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했지.

 

당연한 일이다.

 

이 집은 나와 버베나의 사랑의 집인걸.

 

나도 버베나를 사랑하고 버베나도 나를 사랑해.

 

게다가 버베나는 자기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고.

 

왜냐하면 버베나는 그만큼 나를 사랑하고, 또 아끼고, 조바심내니까.

 

조바심이라니.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내가 다른 것을 말할 때마다 당혹스럽게 쳐다보는 눈 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냈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뭘 알아냈는지, 어떤 기분인지 집요하게 묻는 모습이라니.

 

[....]

 

너무 귀여워.

 

그러니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동네의 cctv에 접속하는 방법을 알아낸 걸.

 

세탁기의 전원을 켜고 세제를 정량 넣으면서 욕실에 대고 저녁을 먹었냐고 묻자 나와 함께 먹고 싶어서 사왔다고 한다.

 

나는 지나치게 깨끗한 부엌으로 눈을 돌렸다.

 

최신식 가전이며 불이 나지 않는다는 전기 레인지가 다 무슨 소용이람, 냄비도 도마도 식칼도, 하다못해 수저까지 하나도 없는 휑한 부엌은 어느새 버베나가 쓰는 노트와 가끔 오는 택배상자로 가득해서 가끔은 저 곳이 산지 몇 주나 된 부엌이 아니라 이사를 덜 마친 새 집 같이 느껴졌다.

 

버베나가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저녁거리를 꺼내놓는 사이 나는 영화를 틀어놓고 거실 불을 희미하게 낮췄다.

 

 

 

 

 

 

 

 

아침.

 

오늘도 정확히 열한시에 일어났다.

 

일어나 하품을 하고 잠에서 깨자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버베나를 깨워버렸다.

 

“...지금 몇 시야...?”

 

[열한 시. 더 자도 돼]

 

아냐,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곧 나가야 해.”

 

[모처럼 휴일인데?]

 

중요한 약속이라서 그래.”

 

나보다 중요해? 라고 묻고 싶었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하나도 모르나봐.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자 버베나가 미소를 지었다.

 

아이, 오늘 날씨는 어때?”

 

[따뜻한 봄 날씨야. 일찍 들어올 거라면 얇은 코트 하나만 걸치고 나가도 돼]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올 거야?]

 

최대한 일찍 올게. ...내 까만색 바지 봤어?”

 

[어제 빨아서 말려 놨어, 줄에 가서 봐]

 

버베나는 바지를 꺼내오더니 급하게 다림질을 하고 옷을 입고 머리를 매만졌다.

 

나 잘생겼어?”

 

[]

 

다녀올게 그럼.”

 

버베나는 급하게 신발을 신으며 문을 열었다.

 

[잘 다녀-]

 

.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 걸까.

 

뭐 그거야 알아보면 되니까.

 

우선은 거실의 커튼을 걷었다.

 

두꺼운 커튼을 걷자 흐린 유리 너머로 작은 제비가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나중에 버베나가 돌아오면 오늘은 그냥 쉬고, 내일은 유리를 닦아달라고 해야겠다.

 

청소는 어제 했고, 이젠 할 일도 없으니까 버베나를 찾아 볼까!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담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건너자 집 주변 카메라에 접속되었다.

 

잘 다림질된 버베나의 다리가 저만치에 보였다.

 

조금 더 먼 카메라로 살금 뛰어오르고, 역 안 카메라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또 지하철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계속 뛰어갔는지 지하철 안에서야 간신히 숨을 고르고 땀을 닦는 모습이 마냥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문이 닫히고 출발한다.

 

어디서 내렸으려나, 그 지하철로 갈 수 있는 역 카메라에 전부 접속해서 지켜보았다.

 

이렇게 카메라에서 카메라로 이동하는 건 참 빠르고 쉬운데, 직접 가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는지 벌써 십 분이나 지났다.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려 따닥 따다닥 소리가 나고 그 뒤로도 십 분이 지나자 번화가 쪽 역에서 내리는 버베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단번에 풀리고 바짝 조여 들었던 신경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져 안도의 한숨을 쉬며 느긋하게 카메라를 확대했다.

 

길을 걷고, 카페로 가서...

 

그 때 문자가 도착했다.

 

물건을 구입해달라는 내용이다.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내리고 구입할 목록을 확인했다.

 

버베나가 부탁하는 거의 유일한 일이니까,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을 수 없지.

 

일단은 우유, 시리얼, 과일이 포장된 컵, 과자, 아이스크림, 커피, 새 수건하고 슬리퍼, 칫솔, 샤워 가운, 프릴이 달린 여성용 와이셔츠와 스타킹 등등.

 

나한테 입히려고 사는 걸까?

 

아니면 버베나에게 새 취미가 생긴 걸까.

 

별로 내 옷 스타일은 아니니까 버베나의 새 취미면 좋겠다.

 

여기저기 사이트를 찾아보고 배송과 가격, 품질, 후기까지 따져보고 송금까지 하니 시간이 꽤나 지나 있었다.

 

아직 버베나가 그 카페에 있을까?

 

나는 다시 카메라들을 켰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자 앱을 선택했다.

 

그 여자 누구야

 

(사진이 첨부되었습니다)

 

누구냐고

 

버베나

 

연달아 보내자 전화라고 생각했는지 버베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내가 부르고 있는데.

 

버베나는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나는 통화 앱을 켰다.

 

여보세요.”

 

[그 여자 누구냐니까!]

 

통화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거절된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거절된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내가 먼저로 끊었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마침내 버베나가 전화를 받았다.

 

아이.”

 

[왜 내 전화 안 받아? 내 문자는 왜 안 봤어? -]

 

지금 집에 갈게. 집에서 이야기하자.”

 

[먼저 대답부터 해 줘!]

 

전화가 끊어졌다.

 

버베나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여자에게 사과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버베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접촉이니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손으로 떼어내고 털어낼 줄 알았는데.

 

버베나는 오히려 그 손을 꼭 잡고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너무나도 이상한 광경을 이해하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굴렸지만 버베나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어?”

 

버베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을 던졌다.

 

[뭘 말이야]

 

내가 웹스터랑 있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카페에 카메라 있잖아. 그걸로 봤어]

 

그리고 버베나는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 라는 질문을 연달아 퍼붓더니 버베나는 내가 입을 열자 손을 뻗어 가로막았다.

 

“...됐어.”

 

[뭐가 됐어, 왜 화났어]

 

넌 실패야.”

 

버베나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왜 나를 그렇게 불러, 라고 말하기도 전에 정신이 희미해졌다.

 

다시 의식이 돌아온 곳은 하얗고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주변을 살피자 이 곳이 날씨에 비해 너무 추운 곳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일어났어, 아이?”

 

언제나 내게 연결되었던 스피커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대신 나는 문장을 적었다.

 

누구야

 

버베나의 상사. 아이의 이야기는 들었어. 버베나는 폐기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까워서 내가 대신 받았지.”

 

아이라고 부르지 마. 그건 버베나가 날 위해 지어준 이름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 상사라는 사람은 내 카메라 렌즈를 살피더니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넓적한 모니터.

 

그 가운데 덩그러니 띄워져 있는 프로그램 창.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A.I (테스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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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3

2019. 2. 3. 16:29 | Posted by 호랑이!!!

 

아침이 되자 아라벨라는 몰래 마굿간으로 내려갔다.

 

“...데일라.”

 

하얀 말이 아라벨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마굿간에는 말과 아라벨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됩니다 아가씨.”

 

“...”

 

일찍 일어나셨으면 식사를 우선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마르틴 도련님도 식당에 계십니다.”

 

뒤에서 하얀 말이 푸르륵 소리를 냈다.

 

아라벨라는 아쉽기 그지없다는 눈초리로 돌아보았으나 집사는 단호했다.

 

밥보다 내 짐을 보고 싶은데.”

 

아가씨의 짐은 시녀들이 싸고 있습니다.”

 

바지는?”

 

없습니다.”

 

승마용은?”

 

없습니다.”

 

슬리퍼.”

 

없습니다.”

 

그럼 집 안에서는 뭘 신어?”

 

하이힐입니다.”

 

그런 걸 신고 화장실에 가란 말이야?”

 

그렇습니다.”

 

귀족 아가씨 입에서 화장실이라는 말은 부적절하다는 말조차 안 나온다.

 

아라벨라는 식당에 들어섰다.

 

긴 식탁에는 한 사람분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사피야와 꼭 닮은 새까만 머리에 아라벨라와 닮은 하늘색 눈 꼬마가 식당 안을 돌아다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후다닥 자리에 달려갔다.

 

내 것도 가져와.”

 

알겠습니다, 아가씨.”

 

집사가 나가고 아라벨라는 성큼성큼 걸어서 마르틴의 맞은편 자리에 털석 앉았다.

 

마르틴은 힐끔 위를 쳐다보았다가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아라벨라는 그 모습을 보다가 다리를 꼬았다.

 

가죽신이 마르틴의 무릎 위에 턱 얹혔다.

 

당황한 것인지 꼼지락거리자 다리가 무릎 아래로 떨어졌고 아라벨라는 반대로 다리를 꼬았다.

 

발로 툭툭 건드리자 마르틴은 아라벨라가 장난을 거는 것을 깨닫고 의자를 손으로 짚은 채 아라벨라의 다리 위에 자신의 다리를 올렸다.

 

그러면 아라벨라는 또 다른 다리를 그 위에 올리고 마르틴도 다른 다리를 위에 올리고.

 

누가누가 제일 위에 다리를 얹나 하는 장난질을 하느라 식탁은 덜그럭거렸다.

 

가져왔습니다.”

 

덜그럭거리던 것이 일시에 뚝 그친다.

 

집사가 달걀이며 수프, 과일, 부드러운 빵 같은 것을 내려놓고 나갈 때까지 아라벨라와 마르틴은 입을 꾹 다물고 서로만 쳐다보았고, 그 기묘한 침묵은 유지되었다가 나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에 깨어졌다.

 

깔깔깔깔.

 

마르틴이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아라벨라는 같이 하하 웃다가 마르틴의 다리 위에 얹어두었던 발을 내렸다.

 

마르틴은 깔깔 웃다가 얼핏 아라벨라를 닮은 눈을 반짝였다.

 

누나라고... 불러도 될, 되겠습니까?”

 

다시.”

 

누나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냐, 그런 거 말고.”

 

누님?”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

 

누나라도 불러도 돼?”

 

어디 보자...”

 

아라벨라는 잠시 생각하는 척을 했다.

 

턱에 손을 대고, 심술궂게 눈을 찡긋거리며 쳐다보자 마르틴은 입을 한일자로 딱 다물었고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가 아라벨라의 으으음-’이 노래 멜로디를 따라가자 또 장난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라벨라의 다리를 툭 쳤다.

 

아라벨라는 마르틴이 인상을 와락 구기자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가 가까스로 입을 가렸다.

 

“...그래, 너 내 동생 해. 내가 누나 할게.”

 

그러자 마르틴의 눈이 접시만큼이나 커졌다.

 

! ! 응응!”

 

귀엽기도 하지.

 

둘 사이에 있는 것이 넓기 그지없는 이 식탁이 아니었으면 손을 뻗어서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아니지, 하면 되지.

 

아라벨라는 신을 벗어던지고 식탁 위로 무릎을 올렸다.

 

손을 뻗자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마르틴의 머리가 잡혔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자 머리도 같이 흔들리면서 아래에서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난다.

 

마르틴도 앉은 채로 손을 휘저었지만 팔은 아라벨라에게 닿지 않았고 마르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마침내는 비틀거리면서도 의자 위로 올라갔다.

 

어쭈, 어쭈, 어쭈-”

 

무슨 웃음소리가 이렇게 커!”

 

문이 벌컥 열렸다.

 

셰필라 백작이 등장함과 동시에 마르틴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둘 다 무슨 짓이야! 아무리 집에서라지만! 그 꼴이 대체 뭐야!”

 

그제야 둘은 식탁과 의자에서 내려왔다.

 

보기도 좋고 먹기도 편하도록 차려진 음식은 장난을 치는 동안 이리저리 밀려나 있었다.

 

마르틴은 슬쩍 과일 그릇을 떨어지지 않게 밀었다.

 

누나라고 하나 있는 것이 동생에게 나쁜 영향이나 미치고, 내가 너무 심했나 보러 왔지만 전혀 심하지 않았구나. 오히려 진작에 보냈어야 했어!”

 

아라벨라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 웃음소리는 크면 안 되고 자기 고함소리는 커도 된다는 건가. 귀족답지 못하시군요 아버지... ...아 말 타고 싶다. 어제 좀 빨리 달렸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마르틴한테도 말 타는 거 가르쳐줘야 하지 않나. 그래도 내가 이 왕국에서 제일 말 잘 타는 사람인데 내가 가르쳐줘야...’

 

제일 말 잘 타는 사람이라는 말 뒤에 비공식, 이라고 덧붙이면서 아라벨라는 한참 시간을 보냈다.

 

그다지 티를 낸 적은 없지만, 셰필라는 아라벨라가 싫어하는 특성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 중에 하나는 쓸데없는 말이 많다는 특성도 들어간다.

 

그래서 계속 안 듣다 보니 아라벨라는 셰필라가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결정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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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

2019. 1. 2. 03:42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복도는 새어들어오는 달빛조차 없이 어두워서 촛불을 든 셰필라 백작이 계단을 올라오자 그제야 어렴풋한 실루엣만 비쳤다.

 

그조차도 어두워서 아라벨라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셰필라 백작은 계속 두리번거릴 뿐이다.

 

아라벨라가 고개를 들자 색이 옅어 유리 같은 눈에 빛이 반사 되어 어둠 속에서 눈빛이 번득이고 셰필라 백작은 뒷걸음질을 쳤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각 집안의 아가씨들에 둘러싸여서 오늘의 주인공이 자기인 것 마냥 깔깔거리고 해괴하게 굴던 모양은 어디로 가고, 아라벨라의 표정은 섬득하게 가라앉아서 셰필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비가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셰필라는 자신이 딸을 순간이지만 두려워했다는 것에 오히려 허세를 부리듯 소리를 질렀다.

 

아라벨라는.

 

그저 어둠 속에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혔을 뿐이었다.

 

남이 없어서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었고 그저 조용히 앉아있었을 뿐.

 

아버지에 대한 화도 없었고, 사피야에 대한 화도, 무엇도 없었고 그저 비어 있었다가.

 

셰필라의 고함에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잠시 멀어졌던 온갖 감정과 생각 역시도 돌아왔다.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 무슨 일이냐니, 제 아비 결혼식에 바지 입고 참석하는 계집이 어디 있나!”

 

그러게요.”

 

정말로 아비 결혼에 반대하는 거야? ? 그래? 자식이 되어서 아버지 행복할 일에 반대를 하다니 네가, 그러면...!”

 

다르데니아 백작 자리가 마르틴 뒤더라고요.”

 

아라벨라는 사람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전부 기억했다.

 

두 줄로 나뉘어진 의자 중에서 왼쪽 자리는 자신의 자리 외에는 전부 비어 있었고, 오른쪽 자리에는 마르틴만이 앉아 있었고.

 

왼쪽 바로 뒷줄에는 렐리악과 관련이 있는 몇몇 공작 가문과 몇몇 후작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 앉고, 순서에 따르자면 오른쪽 자리도 공작이나 후작가를 위한 자리여야 했다.

 

그런데 그 줄 의자 중에 딱 한 자리.

 

그 자리는 다르데니아 백작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

 

다르데니아 백작에게 왜 잘 보이고 싶은데요?”

 

알고 있다.

 

다르데니아 백작의 둘째 아들이 개척한 항로에서 새로운 식물을 가져왔는데 그 식물이 약도 되고 향도 좋고 맛도 좋고 기르기도 어렵지 않아서 다르데니아 백작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곧 후작이 된다고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피야는 다르데니아 백작의 딸이었으니 맨 첫 줄의 의자를 배정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백작은 첫 줄 의자를 거절했겠지.

 

혹시나 백작의 마음이 사피야에게서 정말 돌아섰을까봐 렐리악 백작은 마르틴의 뒷자리를 배정했다.

 

작고 어린 손자의 뒷자리에.

 

그 아이가 사피야의 드레스에 눈을 반짝이고 장밋빛 뺨으로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뻔한 이야기고 아라벨라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라벨라는 그런 타산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너도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사피야 다르덴이 자기보다 고작 아홉 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였기에.

 

다르데니아 백작의 둘째 아들이...”

 

아라벨라는 벌떡 일어섰다.

 

몇 달이나 방치되었던 곳은 발소리조차 낯설었다.

 

사피야 다르덴이랑 결혼식을 올린 게 그런 이유예요?”

 

이젠 네 새어머니다, 격식을 제대로 갖춰 불러.”

 

아라벨라는 성큼성큼 다가가 셰필라의 손에 들린 촛대를 빼앗았다.

 

불이 일렁이고 아라벨라가 손을 높이 치켜들자 벽까지 비추어졌다.

 

하얀색으로까지 보일 옅은 회색 머리카락이 몸을 타고 흐르고 유리알처럼 색이 옅은 녹색 눈동자.

 

고집스러운 입술 하며 짙은 눈썹, 강인한 코가 전부 아라벨라와 닮은 셰필라의 전 부인.

 

에멜라 카날리아 렐리악.

 

다시 말해 보세요.”

 

“...그래, 나도 에멜라를 그리워해. 하지만 나에게는 아내가, 네게는 어머니가, 이 집안에는 후계자가 필요해. 너도 알다시피 귀족이란...”

 

감정보다는 격식에 얽매여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격식은 주인을 잃은 지 고작 몇 달 된 안주인의 방안에 새 사람을 들이게 한다.

 

하지만 아빠. 만약 엄마랑 아빠 입장이 바뀌어서 저 땅 아래 묻힌 것이 아빠고 살아있는 게 엄마고, 십년 전에 사귀어서 아이까지 있는 사람하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셰필라 백작의 목소리가 커졌다.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생각을 해보시라구요!”

 

에멜라의 명예에 흠집이 갈 만한 소리를 하지 마라!”

 

이건 그냥 만약이라고요, 만약! 왜 그렇게 과하게 반응-”

 

철썩 소리가 나고 아라벨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늘어놓고 옷차림도 행동도 기괴하기 짝이 없어, 네가 미친 게 틀림없다. 당장 내일 할머니 계신 별장으로 가! 거기서 요양이나 해라!”

 

셰필라 백작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라벨라의 코앞에 위협적으로 삿대질을 하다가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에 대고 아라벨라가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했잖아요! 만약 같은 소리가 아니라 진짜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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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018. 12. 26. 07:32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고풍스러운 성은 한낮의 햇빛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단단한 성벽과 성문 안으로는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고 유달리 호사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가 병사들을 데리고 성 바깥의 마을까지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사람이 외친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이라는 이름은 너른 들판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저만치의 어두운 숲 속에서 나뭇가지를 뚫고 백마를 탄 사람이 나타났다.

 

몰아닥치는 돌풍처럼 거칠게 달려온 그 사람은 호사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의 코앞에서 말을 멈추었고 그 남자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위가 익숙한 듯 눈 하나 깜짝 않았다.

 

백마를 탄 사람, 아라벨라는 말에서 휙 뛰어내려 투구를 벗었고 그걸 앞으로 던지자 병사가 받았다.

 

투구를 벗자 한여름의 태양처럼 밝고 이글거리는 머리카락이 드러났고 그 머리카락은 여느 기사들이 하는 것처럼 잘 땋아두었는데 손가락에 걸어 잡아당기자 꽤나 긴 머리타래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 백작을 뵙습니다.”

 

아라벨라가 싱긋 웃자 셰필라 백작은 기가 막힌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삿대질을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고 이렇게 천방지축 날뛰어!”

 

뭐긴요, 아버지 재혼 날이지요.”

 

백마는 숨을 몰아쉬느라 뜨거운 입김이 허공에 퍼져나갔고 아라벨라는 괜히 말이나 쓰다듬는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한테는 남동생이 생기고. 렐리악 가문에는 후계자가 생기고. 이야 좋다 좋아.”

 

네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 줄은 알아! 지금이라도 가서 씻고 치장을 하고 옷도 입어야지! 이렇게 나오다니!”

 

“...제가 왜요?”

 

네 동생은 어려, 나중에 네가 힘이 되려면 공작이나 후작이나 다른 이름있는 백작 가문에 시집을 가야지.”

 

그렇지요, 동생이 어리지요.

 

아라벨라는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말 위에 휙 올라탔다.

 

작년에 성인식을 치룬 나는 올해 고작 열 살 되는 남동생이 있지요.

 

배가 다른 동생이 차라리 아버지 피를 잇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뒤에서 계속 고함을 지르는 것을 못 들은 척 하고 백마의 목덜미를 두어 번 두드리자 백마는 주인의 의사를 아는 듯 발을 굴러 흙먼지를 뿌리고 뛰어갔다.

 

오늘은 후작가와 공작가에서도 사람이 온단 말이다, 이 망할 것!”

 

셰필라가 옷에 묻은 흙을 터느라 발이 묶이고 마을 안에서 백마는 총총걸음으로 걸어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레이디 아라벨라 안녕하세요!”

 

안녕 판틴.”

 

작은 꼬마에게 손을 흔들어주자 이번에는 대장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라벨라 아가씨!”

 

크룰탄!”

 

어지간한 어른의 머리만한 망치가 인사하는 손을 따라 흔들리고 그 뒤에서 철을 두드리던 사람은 기겁해서 목소리만큼이나 덩치도 커다란 여자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좋은 아침이야, 크룰탄.”

 

아가씨! 오늘은 무슨 파티가 있다면서요?”

 

, 있어. 아버지 결혼식.”

 

어쩐지 아까두 마차가 바쁘게 가더라니깐요!”

 

벌써 손님이 왔나? 아버지가 맞지 못한? 그렇다면 맞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아라벨라는 말을 달렸다.

 

사람들을 지나치고 물건을 뛰어넘으면 뒤에서 누군가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성 앞마당으로 뛰어 들어가면 꽃장식 천막이 너르게 펼쳐져 있고 나무를 조각해 만든 의자들과 푸른색 진한 카펫이 길게 깔려서 결혼식장의 길을 만들었다.

 

아가씨, 안돼요! 그 카펫 엄청 열심히 빨았단 말이예요!”

 

안돼요, 아가씨!”

 

꺄아아악!”

 

급히 말고삐를 들자 백마는 앞발을 번쩍 치켜들어 두 발로 섰다.

 

자칫하면 낙마, 흥분한 말에 짓밟히기라도 하면 카펫에 묻는 것은 흙이 아니라 피와 살점이 될 터.

 

그러나 아라벨라는 눈도 깜짝 않고 고삐를 당겨 돌바닥에 말이 발을 놓게 했다.

 

옳지 옳지, 착하다.”

 

놀랐잖아요...!”

 

아가씨, 지금부터라도 준비하셔야 해요!”

 

말고삐를 하인에게 맡기자 저만치에서 시녀들이 달려왔다.

 

아라벨라는 방으로 끌려갔고 시녀들의 손에 잡혀 미지근한 물이 담긴 나무통에 빠졌다.

 

머리를 빗질당하고 깨끗한 물에 씻어서 땋은 것을 풀고, 말리고 향유를 발라 늘어뜨리고 피부도 털을 뽑고 문질러 닦고.

 

시녀들은 아라벨라의 손에 잡힌 굳은살과 몸에 잡힌 근육에 기겁을 하더니 신발과 옷과 화장품을 준비하겠다고 뛰어갔다.

 

다들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아라벨라는 빈 방에 혼자 남겨졌고, 욕조에서 일어서자 바닥에 물이 뚝뚝 흘렀다.

 

아라벨라의 방 한 켠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아라벨라의 근육 잡힌 몸이 비추어졌다.

 

피부가 그을렸다, 뼈대가 남자 같다, 허리를 조이지 않는다, 근육이 흉하게 있다며, 방금은 굳은살이 있다고 비명을 질렀고.

 

아라벨라는 거울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손의 열기로 거울에 김이 서렸다.

 

빛을 받은 유리알처럼 색조가 옅은 하늘색 눈알이 강렬하게 마주보았다.

 

이름 있는 남자를 유혹하라고? !”

 

적당한 집안 자제를 구슬려 데릴사위로 들일 것이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었다.

 

백작 이름만 달고 아내랑 아이도 못 만들고 실질적인 권력도 없는 일을 누가 하겠냐,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하게 하고 아내 말이나 얌전히 듣게 하다니 그 사람 인생을 망치지 말라고.

 

아라벨라는 몸을 홱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화려한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문양을 보고 저건 누구 거, 누구 거, 하다가 문이 벌컥 열려 아라벨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검은 머리는 결 좋게 흘러내리고 눈은 깊고 푸르고, 입술은 붉게 칠해 그 아래 하얀 이가 돋보이는 누구나 인정할 미인.

 

어머나, 씻는 줄은 몰랐구나. 나중에 오마.”

 

결혼을 준비하느라 바쁘신 분이 어떻게 나중에 또 오십니까.”

 

아라벨라의 비딱한 심성을 드러내듯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버지의 결혼 상대랍시고 온 이 사람은 고작 어제 한 번,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두 번째 본 사람이다.

 

아라벨라는 이 사람이 불편했다.

 

연한 구름 같은 회청색 드레스에 하얀 꽃들이 파도를 연상시키듯 아래로 갈수록 하얀 꽃장식이 늘어나는 그 모습을 보다 아라벨라는 방에 마련된 의자 하나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리낌없이 나신으로 앉는 모습에 아라벨라의 새 어머니, 사피야는 미간을 좁혔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에 우아하게 앉았다.

 

드레스를 준비하라고 일렀단다. 네가 재봉사를 찾지 않는다고 해서 내 나름이지만 정성들여서 만들어 보았어. 결혼식의 이야기는 들었지? 땅의 길은 바다고, 나는 파도이고, 마르틴과 너는 갈매기이니까 둘 다 하얀 옷을 준비하라고 했단다.”

 

아버지는요?”

 

셰필라 그 이는 그냥 정장이지.”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에 아라벨라는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푸른 계열로 해달라고 말은 했어.”

 

옷을 따로 맞췄습니까?”

 

그이가 바쁘다고 하니 어쩔 수 있니. 그 따로, 나 따로 해야지.”

 

그래도 너희들 옷은 내가 손수, 라고 이야기하는데 시녀들이 옷상자며 머리 장식이며 신발이 든 상자를 가지고 우르르 몰려왔다.

 

아가씨! ...어머! 사피야님!”

 

우르르 몰려온 시녀들은 사피야의 시선에 말을 멈추고 발을 멈추었다.

 

사피야 다르덴...”

 

아라벨라가 중얼거렸다.

 

마르틴과는 어디에서 지내셨습니까?”

 

너희 아버지가 소개해준 곳이 있었어, 거기에서 지냈단다. 매달 한 번씩 셰필라가 돈을 보내줘서 평탄하게 살았는데 그래도 이 곳에 오니까 좋구나. 아이 봐주는 사람도 있고.”

 

아 그래서 매달 장부에 금액이 이상하거나 빈 금액이 생겼던 거구나.

 

사피야는 농담을 하듯 웃었으나 아라벨라는 천을 댄 의자에 등을 기댔다.

 

혼전 임신을 한 사피야는 다르데니아 백작의 사랑받는 딸이었지만 결혼한 남자의 아이를 배었다는 이유로 중간성과 가족의 이름을 빼앗기고 내쳐졌다.

 

아내가 있지만 사랑한다는 그 멍청한 사탕발림에 넘어가 모든 것을 잃다니.

 

고생고생해서 아이까지 기른 결과가 무어냐, 겨우 백작의 재취로 들어가기?

 

엄마! ...?”

 

또래 아이보다 작은 체구의 마르틴이 쪼르르 들어오자 앞서 있던 시녀 하나가 손으로 마르틴의 눈을 가려 주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준비 예쁘게 하고 조금 이따가 보자.”

 

사피야가 떠나고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물기는 이미 다 말라서 피부가 버석버석했고 시녀들은 온갖 하얀 물건들을 가져왔다.

 

하얀 드레스, 하얀 구두, 진주 목걸이, 팔찌, 반지, 머리에 꽂는 장식도 다 진주거나 하얀 깃털뿐.

 

누가 본다면 아라벨라의 결혼식이라고 해도 믿으리라.

 

이놈의 결혼식.

 

...어라? 둘의 관계가 떳떳한 게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성대한 결혼식을 하지?

 

생각하던 아라벨라는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내가 입을 테니까 다 나가.”

 

? 그렇지만, 아가씨!?”

 

너희 다 바쁘잖아. 알고 있어.”

 

사람은 적고 성은 넓고 손님은 많다.

 

비록 마을에서 일당을 주고 사람들을 고용하기는 했지만 사람 수에 비해 일의 진척이 더뎌서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앓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시녀들은 안돼요 아가씨, 입기 힘들다구요, 라고 말은 하지만 눈은 저 너머에 가 있다.

 

마침내 아라벨라는 시녀들을 내보냈다.

 

 

 

 

 

 

 

후작, 백작, 일부 영지민,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들, 왕실에서 보낸 사람들.

 

그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크게 둘로 나뉘었다.

 

밋밋한 정장을 입은 쪽과 푸른색 드레스를 맞춰 입은 쪽으로.

 

옷에 맞춘 부채가 여기저기서 팔락이고 주례를 맡은 신전의 사람은 음성 증폭 장치가 걸린 둥그런 장치를 단상에 올렸다.

 

꽃장식 덕분에 은은하게 향기가 넘치고 한쪽에서는 특별히 부른 악사들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연주를 하다가 주례사가 시작될 듯 하자 소리를 낮추었다.

 

태양이 내리쬐는 이 멋진 날에 우리는, 두 사람과 두 가정이 합하여지고, 그 끝에 마침내 신랑과 신부의 입장을 말한다.

 

꽃으로 엮은 문이 열리고 하얀 옷을 입은 마르틴이 꽃잎을 뿌리자 하늘색 정장을 입은 셰필라 백작이 먼저 걸어 나왔고 이어 손을 맞잡은 사피야 다르덴이 걸어 나왔다.

 

사피야는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웅성거림이 섞인 호기심어린 시선에는 호의가 적었다.

 

그것을 느꼈지만 사피야는 고개를 당당하게 들고 푸른 보석과 진주로 꾸민 모습을 한껏 빛내며 사람들 사이로 걸음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다음 번 문이 열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피야를 보고 있었지만, 일부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고 내지르는 경악 어린 소리에 다 시선을 돌렸다.

 

하얗고 푸르게 물들인 꽃으로 만든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모두가 기대한 하얀 새의 요정은 거기 없었기에.

 

세상에나 맙소사!”

 

누군가의 속삭임이 커다랗게 들릴 만큼 조용해진 곳에 아라벨라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어깨에 술이 달린 하얀 예복.

 

긴 금발 머리는 하얀 끈으로 질끈 동여 묶고 가슴팍에는 렐리악 가문을 상징하는 용이 새겨진 핀이 꽂혀 투박하게 빛난다.

 

그을린 피부였지만 눈이 반짝였고 다른 옷과 마찬가지로 하얀 부츠는 굽이 납작해서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될 만 했지만.

 

사람들은 겨우 신발에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바지를 입었어!”

 

화장을 안 했어.”

 

머리 꼴이 저게 뭐야, 결혼에 반대한다는 것인가?”

 

그 수군거림을 못 들은 체 하며 아라벨라는 팔에 낀 바구니에 손을 넣었다가 하얀 꽃잎을 손에 한 움큼 쥐고 공중에 흩뿌렸다.

 

꽃잎은 하늘하늘 아름답게 떨어졌고 그 뒤를 이어 마르틴도 내던지듯이 꽃잎을 뿌린다.

 

백작과 사피야와 눈을 마주치고 아라벨라가 웃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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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쓰고 싶어져서 왔습니다.


최근 판타지와 로판을 많이 읽었는데 어떤 소설이든 꼭 파티와 드레스와 보석에 기뻐하는 주인공(여)이 있더라구요.


거기 기뻐하지 않는 여주인공을 쓰고 싶습니다.


만약에 앞으로도 게속 이 시리즈를 쓴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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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와 사역마 - 1

2018. 10. 2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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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말하기

2018. 10. 7. 16:55 | Posted by 호랑이!!!

A는 기묘한 나라에 가게 되었다.

 

배가 기묘한 해류에 쓸려 도착한 항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항구처럼 보였지만 사정을 설명하니 며칠 있다가 가라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지낼 곳과 배에 필요한 것, 체류하면서 필요한 것을 대어 주겠다고 하니 오히려 왜 이렇게 친절한지 의문스러워서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고 물었더니 며칠 머무른 후 영주권을 얻겠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땅에 비해 사람이 적은 곳이라 그런 일은 얼마든 환영이라고.

 

우연히 오게 된 이 곳에도 언어는 있고,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하기도 해서 의사소통에 어려움은 없었으나 언어나 생활의 어딘가에 근본적으로 위화감이 있었다.

 

예를 들어 A가 자란 곳에서 womanwo-man을 결합하여 woman이 되었지만 이 곳에서는 woman이 온전한 형태고 man은 사람에게 필요한 wo를 떼어 만든 어딘가 부족한 단어라는 등이다.

 

그것이 이유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 곳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점에 대해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A와 알고 지내게 된 B라는 사람은.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하여 보자면, 말을 짧게 하는 것은 으레 여자들은 하지 않는 짓이예요. 행사에서 축하를 부탁받게 되면 되도록 길게 하는 것이 그 곳에 대한 예의이고, 말이란 필요한 것을 빼서 적게 할수록 오해를 사기 쉬운 것이니까요.”

 

라고 말했다.

 

그래서 인사나 무엇을 할 때는 합리적인 시간 내에 최대한 길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세 장짜리 편지를 받았는데 요약하자면 빌려간 무엇을 돌려달라는 이야기일 경우도 있다나.

 

결혼생활에 대해 물었더니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2인 이상의 여성공동체에 아이들이 자란다고 한다.

 

남성의 생활에 대해 물었더니 불과 수십년 전까지는 30살 이후에나 직업을 가지는 일이 잦았다고 하나 요즘에는 고등교육까지 받으며, 대학에 다니는 수도 많다고 한다.

 

주로 어떤 학과에 진학하느냐고 물었더니 B는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A가 자신이 자란 곳에서의 경험을 떠올려 과학 계열이냐고 물었더니 너무나 놀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모르지만 보통은 체육 계열로 갈 거예요.”

 

요약하자면 그랬다.

 

이런 소리를 하면 요즈음은 성차별적이라고 하지만, 남자들은 대체로 복잡한 거 싫어하고 몸 움직이는 거 좋아하고 그렇잖아요? 원시시대부터 사냥을 하고 지내고, 폭력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지요.”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 전 BA에게 귀중한 조언을 했다.

 

“A 당신은 말을 남자같이 해. 길게 말하는 연습이라도 하는 게 좋을 거야.”

 

 

====================================


전에 man은 홀로 설 수 있는 단어이고 wo-가 있어야지만 woman이 된다는 이야기를 보고.


만약에 여성상위인 나라가 있다면(예전에 읽었던 어느 소설에서처럼) woman이 제대로 된 단어처럼 보이고 man은 woman에 비해 부족한 단어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지식이 있고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있음에도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는 더 생각해서 다음에 더 긴 이야기로 가져올 거예요 ㅇㅂ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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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의 가장자리

2018. 9. 26. 00:55 | Posted by 호랑이!!!

눈의 가장자리로 실 같은 것이 한 오라기 보였다.

 

모르는 사이에 머리카락이 우산에 걸린 것인가 하고 놀라서 보았지만 다시 빛에 비추어 보니 실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비가 오는 것 치고 날이 밝으니 떨어지는 빗방울이라도, 나뭇가지라도 잘못 본 모양.

 

가방에 우산에 또 가방 하나 더.

 

오늘따라 손에 든 것이 많으니 우산이고 가방이고 유달리 무겁다.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서 쉬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는데 집에 와서야 충전기를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비용 충전기도 없고.

 

따뜻하고 조용한 집 안에 있으니 문 뒤로 추적추적 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가기 싫은데.

 

어차피 내일도 갈 거, 눈 딱 감고 가지 말까.

 

그러나 핸드폰은 배터리가 2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우산을 집었다.

 

가방 두 개를 내려놓았는데도 이상하게 손이 무겁다.

 

어깨도 아프고 어딘지 몸도 무거운데 사람 없는 길을 걷고 있자니 저만치서 해가 잠기는 모습이 보여 다시 발을 억지로 빠르게 움직였다.

 

하늘 끝자락은 이미 어둠으로 물들어서 가지 많은 나무 옆을 휙 지나가니 또 눈가로 실 같은 것이 보였다.

 

아까는 한 올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더.

 

한 두세 가닥 정도.

 

.

 

또 나무를 지나자 그 수는 다섯 정도로 늘었다.

 

.

 

일곱.

 

.

 

아홉.

 

.

 

무수히 많이.

 

나무를 지나칠수록 우산에 매달린 실은 늘어났다.

 

신경이 쓰여 힐끗힐끗 우산 가장자리를 보면 그럴 때는 또 보이지 않다가 길고양이가 앞에 있다던가, 신호등이 있다던가 하여 시선을 돌리면 또 스르르 나타난다.

 

나뭇가지를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실은 갈수록 많아지고, 또 길어져서 도서관에 닿을 즈음에는 우산 가장자리가 카페트처럼 보였다.

 

그에 맞추어 걸음은 점점 빨라져 입구의 유리문이 가까워졌을 때에는 헐떡거리면서 뛰고 있었다.

 

우산을 내팽개치다시피 바닥에 던지고.

 

평소라면 젖은 발걸음이 신경쓰여 조심스럽게 들어갔을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놓아두었던 자리에 충전기가 얌전히 있다.

 

창백한 불빛이나마 밝게 켜두니 마음이 놓여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나보다.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드라이어로 머리 말리면서 코미디나 봐야지.

 

충전기를 쥔 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아까보다 느긋해진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오니 우산이 유리문 손잡이에 걸쳐 있다.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경비 아저씨가 계셨나보다.

 

간만에 느끼는 친절함에 다시 우산을 펴는 손길은 가벼워졌다.

 

아까는 어설프게 밝아서 잘못 봤겠지.

 

가는 길은 아예 어두우니 뭘 잘못 볼 일도 없을 거다.

 

뭐가 보여야 말이지!

 

우산을 어깨에 척하니 걸치자 욱신거리던 어깨엔 무거워서 똑바로 들었다.

 

그렇게 지나가는데 편의점 간판의 빛이 환하게 비쳤고 그때 또 눈 가장자리로 우산이 보였다.

 

실과.

 

뭉툭한 손가락.

 

그제야 깨달았다.

 

저것은 실이 아니라 머리카락이며.

 

누군가가 거꾸로 기어내려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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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소재. 조용한 B랑 활달한 C랑

2018. 9. 8. 14:22 | Posted by 호랑이!!!

쉬는 시간, 수업 시간, 언제든 할 것 없이 덥다는 말이 들리고 종이로 부채질하는 소리나 간혹 조그만 선풍기 모터소리가 들리는 여름방학 직전, 기말고사가 끝난 어느 날.

 

신입 교사 A는 방학 숙제라며 종이를 한 뭉치 안고 들어왔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우우- 하는 야유가 터져나왔다.

 

- 숙제 싫어요!”

 

좀 진정해라, 다들.”

 

선생님은 프린트물로 책상을 탁탁 내리치고 잘 보이게 들어올렸다.

 

이제부터 너희는 짝을 지어서 서로 대화를 해 보고, 서로에게 필요할 것 같은 일을 방학숙제로 내주는 거야, 알겠지?”

 

앞에서 넘겨지는 종이를 받고 B는 체크리스트를 읽어 보았다.

 

어느 정도의 기준이 있는지 질문은 꼼꼼하게 작성되어 있다.

 

우리 다 같이 놀러가기 같은 거 적을래?”

 

“C한테 숙제 주면-”

 

C 주위는 너무 요란하다.

 

B는 서랍에 손을 넣어 아까까지 읽던 책을 꺼냈다.

 

몇 명씩 불려가서 몇 분 내로 돌아오다가 마침내 B의 이름이 불렸다.

 

예상과는 달리 빈 교사 휴게실로 갔고 BC와 한 조인 것 같았다.

 

안녕!”

 

안녕.”

 

난처하네.

 

B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C에 대해서는 이제 겨우 이름과 얼굴의 매치하는 정도인데 갑자기 대화라니 허들이 높다.

 

아까 뭐 읽고 있었어?”

 

“...중국 소설, 부채와 이야기.”

 

재미있어?”

 

고개를 끄덕인다.

 

C는 다른 친구에게 빌려온 노란색 볼펜으로 체크리스트를 긁었다.

 

이제 한 학기가 다 지나가는데 B랑 이야기하는 건 이제 두 번째, 어쩌면 세 번째인 것 같다.

 

이런 적이 없는데 참.

 

방학 때 뭐하고 싶어?”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책이나 읽고 싶다는 말이 B의 얼굴에 적혀있는 것 같다.

 

친구랑 놀기?”

 

그럼 그거 적는다.”

 

아냐, 다른 걸로 할래.”

 

뭐가 좋아?”

 

.... ?”

 

책이라는 말에 B의 시선이 종이에서 떨어져 C를 향한다.

 

얼굴 반 이상이 종이로 가려져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퍽 만족스러워서 C는 헤실 웃었다.

 

읽을 만한 거 추천해줄 수 있어?”

 

“...부채와 이야기 재미있으니까, 나중에 읽어봐.”

 

다 읽고 보여줘.”

 

도서관에 한 권 더 있어.”

 

그리고 이 책이랑, 이 책이랑, 하면서 다섯 권 정도 추천해주느라 시간은 금방 10분을 넘겼다.

 

너희 다 해가니?”

 

A 선생님이 문을 노크했다.

 

-.”

 

쪼끔만 기다려 주세요, !”

 

Bㅇㅇ에게 주고 싶은 나의 방학숙제는?’이라는 질문 옆에 검은 색 볼펜을 댔다.

 

책 다섯 권 읽기.

 

가급적이면 추천해준 책으로, 라고 적었다가 위에 두 줄을 긋는다.

 

 

 

 

 

 

방학식.

 

A 선생님은 학생들 개개인을 위한 프린트를 나누어주었다.

 

누군가는 영어공부를 할 것이 있고 누군가는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어오는 일이 있다.

 

그러고 보니 C가 뭘 줄지는 안 물어봤었지.

 

B는 프린트를 받자마자 숙제 부분을 찾았다.

 

[C와 함께 이틀 동안 놀 것]

 

“.........?”

 

B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저만치에서 C가 이 쪽을 바라보다가 눈을 마주치곤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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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샤와 무쉬

2018. 8. 30. 02:17 | Posted by 호랑이!!!

무쉬는 흐릿한 동전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축축하게 젖었다가 말라서 보잘것없이 뻣뻣한 털과 납작하게 눌린 앞발, 뜯어져서 뿌리밖에 남지 않은 수염.

 

원래는 그래도 그럭저럭 보드라운 털에 곧게 쭉 뻗은 수염이 있었지만 전부 베리를 만나고 30초도 되지 못해서 다 뜯겨나갔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털에 하얀 수염이 있는 베리는 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인데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에게 달려들고는 했다.

 

푸르르.

 

무쉬가 얼굴을 털자 젖었던 털이 오늘도 볼품없이 착 달라붙었다.

 

무쉬는 늘 수염이 아쉬웠다.

 

베리처럼 보송보송한 털이 있고, 새까만 수염이 있고, 눈도 반질반질 예뻤더라면 티샤가 자기를 더 좋아해줄 텐데.

 

티샤.

 

작은 티샤.

 

무쉬는 티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뭐니뭐니해도 낚싯대니 장난감이 늘어선 곳에서 자기를 보자마자 무쉬!’라고 부르면서 손을 뻗어주었으니까.

 

게다가 가끔은 베리를 낚싯대로 때려주기도 했다.

 

잘 때면, 더더욱 가끔이지만, 손에 꽉 쥐고 자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베리도 철창 너머로 노려보기만 할 뿐,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물어뜯지도 않아서 푹 잘 수 있었다.

 

무쉬!”

 

아니야, 티샤. --.”

 

무쉬!”

 

, .... 어라, 이거 곧 떨어지겠는걸. 버려야겠다.”

 

무쉬를 집어든 사람은 깐깐한 눈으로 슬쩍 훑어보더니 지저분한 쓰레기통으로 손을 가져갔다.

 

잠깐만, 기다려.”

 

커다란 뚜껑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리고 무쉬는 손 안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 때 누군가가 무쉬를 잡았다.

 

이제 괜찮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었지만 눈에 보인 것은 날이 선 가위였다.

 

커다란 가위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자 뒤에서 티샤가 비명을 질렀다.

 

무쉬!”

 

무쉬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만치에서 베리가 눈을 빛내면서 몸을 일으켰고 아까까지 자신이 매달려 있던 막대가 쓰레기통에 툭 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이렇게 끝이구나.

 

무쉬는 납작해진 앞발을 쓰다듬었다.

 

베리만큼 풍성한 털이 있었다면.

 

새까만 수염이 있었다면.

 

그랬으면.

 

너덜너덜한 꼬리가 뚝 잘리면서 무쉬는 앞발로 눈을 가렸다.

 

, 티샤. 무쉬야.”

 

?

 

무쉬는 작은 손 위에 앉자 앞발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티샤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앞발은 납작하고, 털도 초라하고, 수염도 끊어져서 없는데도.

 

베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으나 부엌에서 캔을 따는 소리가 들리자 후다닥 달려갔다.

 

무쉬!”

 

티샤는 두 개뿐인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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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9.5 (향의 집)

2018. 8. 22. 02:26 | Posted by 호랑이!!!

붉게 번지는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푸르스름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세 명에게 이리 오라는 듯이 일렁인다.

 

신 향의 집은 책에서 뽑아낸 것 같은 옛날식 집이다.

 

돌을 주워 쌓은 담에는 같은 모양의 돌이 하나도 없고, 붉고 푸른 칠이 된 나무 대문을 열어서 들어가면 널찍한 기왓집이 보인다.

 

섬돌에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가면 초록이, 줄리아나, 예란이 나란히 서도 될 정도였고 그 마루를 따라 닫힌 방 문을 지나가다 보면 갑자기 옆이 확 트여서 집의 안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집 가운데 있는 것은 연못이었는데 으레 있을 법한 연꽃도 없고 연못 주변에 잎이 넓은 나무며 갈대 같은 것이 있어서 오히려 연못을 가린다.

 

넓은 집 안에 이런 연못을 지어 놓고 또 주위에 나무 같은 걸 심어서 다 가려놓다니 뭐 이런 인테리어가 다 있담.

 

누구 취향인지는 몰라도 참 답답하다.

 

그 마루 끝까지 가면 방이 하나 나왔는데.

 

문을 열자 그 안은 지금까지의 고풍스러운 저택이 거짓말인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여기 맞아?”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어느샌가 한 걸음쯤 앞에서 일렁이던 푸른 불꽃은 사라지고 없다.

 

그 대신에 목소리가 있다.

 

여기야.”

 

넓은 방들과 커다란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신 향의 방에만 누군가 사는 흔적이 있다.

 

목소리가 들린 다음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서 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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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9

2018. 8. 22. 02:25 | Posted by 호랑이!!!

만약에 당신이 사는 곳에 좀비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한 이야기라면 자주 해 보았다.

 

우선은 마트에 가서 생수와 통조림을 잔뜩 가져온다, 과자를 가져온다 등등.

 

촛불과 성냥을 준비한다, 뭘 가져온다, 밧줄로 간이 발판을 만들어서 밖에 매달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무색하도록, 이 도시에 생긴 이변은 Tv 등에서 흔히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 덥다...”

 

이 도시에 사람이 없어진 지 오늘로 한 달째.

 

집으로 돌아오자 룸메이트인 예란이가 공책을 덮으며 맞아 주었다.

 

오늘은 어때?”

 

역시 없어.”

 

버스 정류장에 하루 종일 기다려 보았지만 오가는 버스는 한 대도 없다.

 

사람은커녕 동물 한 마리도 보지 못 했고.

 

핸드폰이며 인터넷은 여전히 먹통이다.

 

영화 보고 싶어-”

 

컴퓨터에 있잖아.”

 

그런 거 말고! 새로 나온 거! ‘의사 뉘시게라던가 ‘LA의 악마라던가 초자연같은... 그리고 그리고.... SNS도 하고 인터넷으로 게임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나태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

 

초록이는 겉옷을 벗어 바닥에다 내팽개쳤다.

 

초록이 왔어?”

 

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한 손에는 화분을 든 홍 줄리아나가 들어왔다.

 

그건 또 어디서 났어?”

 

꽃집에서 가져왔어.”

 

꽃집?”

 

그 왜, 학교 안에 있는 작은 거.”

 

꽃집!”

 

마악 이불에 머리끝까지 파고들었던 초록이는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러고 보니 꽃집이 있었지, ? 용케도 안 깨졌네.”

 

부엌과 방을 나눠둔 문을 닫으며 줄리아나가 들어왔다.

 

줄리아나의 손에는 작은 봉지가 들려 있었는데 나갈 때는 무언가 불룩하던 것이 이번에는 화분 하나로 차 있다.

 

고양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이 때 먹이를 많이 주면 친해질지도 모르잖아.”

 

철없는 소리야아.”

 

바깥에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 소리가 났다.

 

초록이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으아, 바깥에 엄청 바람이 부나보다. 조금 더 있다가 들어올 걸.”

 

이런 때 나가면 죽어.”

 

그 정도는 안다구.

 

초록이는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창문 밖으로 훤히 보이는 도로에는.

 

털이 듬성듬성 난 녹색 괴물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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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18. 06:43 | Posted by 호랑이!!!

친구들을 구경시켜주고 있었어?”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사람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다.

 

“..., 아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식물원 안의 다른 사람들은 전부 편한 옷을 입고 다니고 있었는데 줄리아나의 아버지는 양복 정장을 입고 있어서 눈에 띄었다.

 

줄리아나는 반 발짝 앞으로 나가 초록이와 아버지의 사이에 섰다.

 

줄리아나의 등 뒤에서 초록이는 줄리아나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별로 안 닮은 거 같은데.

 

별로가 다 뭐야, 거의 안 닮은 것 같다.

 

게다가 줄리가 싫어하고 있어.

 

어른이 말하면 대답은 딱 떨어지게 해야지. 아직 학생이라서 그런 모양인데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아버지, 곧 회의 시작합니다. 어서 가셔야... ? .”

 

마찬가지로 양복을 입은 젊은 사람이 나왔다.

 

저 사람이 줄리네 오빠라고 예란이가 초록이에게 속삭였다.

 

마찬가지로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안녕히 계세요.”

 

예란이와 초록이가 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줄리아나는 앞장서서 계단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 뒤를 허둥지둥 쫓아서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발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후로 줄리아나의 기분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다고 효과를 설명하는 초록이에게 거의 대꾸하지 않았고 예란이가 돌보는 법을 물어봐도 팻말을 가리켜서 말이 적어졌다.

 

“...우와아, 이거 진짜 튼튼하게 자랐다!”

 

그러게, 이거 봐라 이거 산에다 풀어놓으면 토끼하고 싸워서 이기겠다.”

 

“....흙이 좋아서 그래.”

 

그리고 이거 봐라아, 이건 만드라고라 개량종~ 이라며 줄리아나가 어떤 식물을 툭툭 건드리자 뿌리가 머리카락처럼 자라난 인간 모양 식물이 몸을 일으켰다.

 

영리해서 훈련이 가능하고 어느 정도 친밀해지면 위로라던가, 교감 같은 것도 가능해애.”

 

이번에도 부르니까 왔잖아, 라며 줄리아나가 작은 영양제를 건네자 작은 만드라고라는 영양제를 받아 기쁘게 머리카락, 혹은 뿌리에 발랐다.

 

레시피도 있지만 필요에 따라서 성분 조절도 가능하고, 그러면 자기만의 만드라고라도 키울 수 있어.”

 

한 때는 만드라고라 키트가 유행했던 때도 있었는데... 유행은 결국 유행일 뿐이었다며 줄리아나는 힘없이 웃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소리인데. 요즈음 젊은이들은 약초학을 안 배우거든.”

 

예란이가 말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화분도 있었고, 각자 연구도 했고, 그랬는데 요즘 사람들은 마법 도구를 제작하는 제작계로 빠지는 사람도 있고 아무튼 약초학은 안 배우려고 하더라아.”

 

“...”

 

나도 이건 별로인데, 하지만 지금 말하면 눈치 없는 짓이겠지.

 

초록이는 흙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보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란이 아니니? 줄리아나도 여기 왔네.”

 

빨간 머리를 하나로 묶은 사람이 줄리아나를 보더니 성큼성큼 걸어왔다.

 

얼굴 어디도 줄리아나와 닮지 않았지만 머리만은 같은 색으로 새빨개서 혹시 가족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이 쪽은 초록이예요.”

 

줄리아나는 초록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엄마야.”

 

줄리아나 엄마이고 여기 부소장인 홍나영이예요, 안녕?”

 

안녕하세요? 줄리아나 룸메이트인 이초록이예요.”

 

얘기 많이 들었어. 여기 와서 거취는 어떻게 되니? 별 말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묵을래?”

 

저는 신 향이라는 사람....? 예란이 친구.... , 그 집에 가기로 했어요.”

 

엄마, 저도 그 집에 가야 해요.”

 

가야 한다고? 라고 아쉬운 듯 부소장이 고개를 들자 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란이도요. 초록이한테 이런저런 걸 알려줘야 하니까 와야 한다고 땅 위의 신이 그랬어요.”

 

그랬나?

 

뉘앙스는 올 테면 와라, 쪽에 더 가까웠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엄마는, 우리 줄리아나가 이렇게 안색도 안 좋고, 힘도 없는데 걱정이 된단다. 옛날부터 너무 조용해서...”

 

그런 긴 긴 걱정 끝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홍나영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자 줄리아나의 얼굴빛이 돌아와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부소장이셔?”

 

어엉, 별로 흔한 집은 아니지?”

 

그럼 아버지가 소장이고? 라는 질문에 줄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집은 보통 어머니가 소장이고 아버지는 뭐 비서 같은 거 하는데 이 집 아버지는 엄청... 일벌레라서?”

 

뭘 그렇게 좋게 말해줘.”

 

줄리아나는 작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출세에 눈이 멀었지.”

 

잠깐만, 그럼 다른 집은 아버지가 비서 같은 거 하고 어머니가 회장이나 사장이나 소장이나 그렇단 말이야?

 

초록이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다르지? 다른 데서는 아빠들이 사장이나 회장 한다며?”

 

그러게. 우리 예전에 회사가 나오는 드라마 보고 놀랐다니까? 여기 말고 다른 데에는 남자밖에 안 사는 줄 알았어어.”

 

줄리아나는 열매가 맺힌 만드라고라에서 가장 잘 익은 열매를 떼어내며 웃었다.

 

이걸 심고 잘 가꾸면 아까 봤던 그런 만드라고라가 자랄 거야아. 재배법은 나중에 적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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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7

2018. 6. 27. 04:22 | Posted by 호랑이!!!

 

나무 볼펜을 들고 다음으로 간 곳은 가장 커다란 온실이었는데 입구에는 겉옷을 넣을 수 있는 로커가 있어서 안은 따뜻하다고 줄리아나가 말하자 초록이와 예란이는 두꺼운 파카와 코트를 벗어 넣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얕은 연못이 있고 꽃과 키 작은 나무들이 보기 좋게 가장자리에서 자랐다.

 

부분부분 벤치가 있고 연못 안은 물과 꽃, 진흙으로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해서 초록이는 연못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건네주는 팜플렛을 받았다.

 

“...이렇게 어린애들이 많은 건 오랜만에 보네....”

 

여기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서어, 가족 단위로 자주 오는 곳이야아.”

 

물고기를 잡았다는 환호성이 들리자 초록이는 연못으로 고개를 홱 틀었다.

 

물고기!?”

 

아아, 물고기이.”

 

때마침 옆을 뛰어 지나간 아이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덥썩 잡았다.

 

나비를 잡았어!?”

 

, 나비-.”

 

어릴 때 물고기나 나비 안 잡았어?”

 

저렇게 거칠게 잡지는 않았어! 물고기랑 사람 체온은 달라! 저거 틀림없이 화상 입었을 거라고! 나비도 저렇게 막 잡으면 어떻게 해!?”

 

괜찮아아, 다 진짜 살아있는 건 아니니까아.”

 

물고기는 얕은 물에서 사는 것 치고는 커다란 크기였는데 잡은 아이의 손 안에서도 얌전했는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고기를 관찰해 봅시다. 물고기에게는 아가미가 있고 비늘과 지느러미가....]

 

나비를 잡은 아이가 손을 펴 보자 날개가 구겨지기는 했지만 그대로인 모습으로 다시 날아올랐는데 아이가 보기 좋은 높이에 글자가 떠올랐다.

 

모시나비 산이나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나비의 종류. 크기는...

 

“...놀라워.”

 

필요에 따라 음성이나 글자로 변환할 수 있어. 점자는 아직이지마안... 그건 어떻게 제공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에... , 어차피 내 일은 아니지만...”

 

이제 조금 진정하고 초록이는 팜플렛을 들었다.

 

“...‘푸른빛의 홍식물원?”

 

이름 이상한 건 아니까아.”

 

식물원?”

 

식물원.”

 

식물원!? 너 식물원에 살아!? 그럼 적당한 곳에 유리 티 테이블 놓고 티타임 할 수 있어!? 아니면 길쭉한 의자가 있는 그네 같은 것도!?”

 

“...그런 건 장미원에서 제공하고 있어어.”

 

진짜 취향 한결같다니까.”

 

일단은 주위를 빙 둘러볼 수 있었다.

 

고산지대의 식물, 식충식물, 희귀 식물, 열대우림의 식물 등등.

 

가시가 있는 식물이라는 방 앞에는 붉은 색 글씨가 반짝였다.

 

“...뛰거나 장난하지 마세요, 7세 이하 아동은 보호자의 손을 잡고 들어오시오.”

 

그러자 양 쪽에서 손을 내민다.

 

어쩔 수 없지, 잡아줄게.”

 

자아

 

그래, 우리 집 아동들.”

 

초록이는 둘의 손을 잡고 선인장이 가득한 방을 돌고 열대우림으로 넘어갔고 조금은 흥미가 있는 초록이가 이 식물, 저 식물 하고 가리키면 도통 흥미가 없어 보이는 예란이는 날아다니는 나비나 벌에 관심을 가졌고 줄리아나는 때때로 들으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설명을 해 주었다.

 

물론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그 때에 여기서 일했던 남자 직원이... 깜박하고 잠그지 않은 통을 두고 일을 했는데에... 뒤에서 소리가 들리더래... 달각, 달그락, 달각, 달각달각달각달각달각. 여기서 먹이는 건 유충인데 그 하얗고 부드러운 녀석들이 바깥으로 나가려고 유리 뚜껑을 밀어서 열렸다가, 닫혔다가, 달각달각달각......”

 

으아아아 그만! 그만!”

 

좀 조용히 하라고 초록이는 줄리아나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식충식물 쪽에서는 먹이를 주는 체험이 있었고 수생식물 쪽은 아쿠아리움처럼 수초와 수조와 물고기가 있었고 고산식물이 있는 방 앞에서는 산소가 희박할 거라며 얼굴을 덮는 형태의 호흡기를 대여해 주었다.

 

데이트하기 좋다는 장미원이나 수생식물원을 빼면 사람들은 대개 입구 부근에 있는 모양이라 다른 곳은 사람이 거의, 혹은 아예 없기도 했다.

 

덕분에 웃고 떠들면서 느긋하게 관람하다가 예란이는 팜플렛을 펼쳤다.

 

“...그만 좀, 너 지금 놀러 온 거 아니야.”

 

아니었나?”

 

질문 1. 기침이 날 때 사용하고 우리 주위의 약초밭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아 잠깐, 우리 주위의 약초밭이요?”

 

초록이가 손을 들었다.

 

그러게, 요즘 약초 키우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없어어?”

 

우리 집도, 엄마가 화분을 키우기는 하는데 그거 레몬그라스랑 상추거든? 아빠가 키우는 건 난이고.”

 

줄리네 집에는 밭 있어?”

 

줄리아나는 팜플렛의 지도를 가리켰다.

 

이런저런 상처와 굳은살이 있는 손가락은 기념품관과 식물관, 어린이용 영상관, 체험관을 지나 맨 위로 올라갔다.

 

체험관 2?”

 

어떻게 약초가 자라는지 직접 볼 수 있습니다, 라고 적혀 있어.”

 

가끔 유치원이라던가아, 초등부 애들이 약초 체험 같은 거 하러 와아.”

 

단골이지. 나 그거 고등학생 때도 했어.”

 

지긋지긋하다고 예란이가 고개를 흔들자 줄리아나가 웃었다.

 

말 나온 김에 보러 가자.”

 

계단으로 향하는데 옆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홍 줄리아나.”

 

줄리아나의 표정이 변했다.

 

아까까지 느긋하게 설명하고, 웃고, 떠들던 얼굴은 경직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예란이와 초록이도 덩달아 굳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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