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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갈리엔/데임] 음문

2023. 2. 8.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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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실내 수영장에서 일어난 일

2023. 1. 13. 22:56 | Posted by 호랑이!!!

A는 눈을 떴다.

 

희부연 유리창 너머로 밤하늘이 보였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나뭇잎이 일렁였다.

 

물을 살균하는 것인지 멀리서 기계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하얀 플라스틱 썬베드에서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자 어두운 수영장에 물결만이 반짝였다.

 

여기도 관리인이 있을 텐데 왜 사람을 두고 간 거지?

 

A는 널찍한 수영장을 한 바퀴 돌았다.

 

온수풀은 중단되었고, 미끄럼틀에서 나오는 물도 멈췄고, 파도풀도 멈췄고, 저번에 보았던 마감 직전 모습이랑 똑같은데?

 

A는 여기에 아주 자주 왔었다.

 

눈 감고도 수영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어린 아이 때부터 이제 성인이 된 지금까지 방학마다 주말마다 쉬는 날이면 날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할 것 없이.

 

직원이 기계를 끄는 모습을 보는 것이나 수영반 선생님이 이제 나가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 것도 한 해에 두 번씩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처럼 사람도 없겠다 이런 수영장을 독차지하게 되다니?

 

바로 물로 뛰어들려던 그 때 수면 아래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A는 난데없는 위화감에 물 가까이로 갔다.

 

창 가까운 곳은 물결이 빛으로 부서졌으나 위화감이 드는 곳은 조금 더 먼 곳이다.

 

빛이 들지 않아 검은 물이 한없이 깊고 무거워 보였다.

 

별 감정이 다 드네.’

 

이 곳의 물은 자신의 가슴팍 조금 아래까지 찬다.

 

어릴 때에는 바닥에 발이 안 닿을 정도로 깊었으나 이제는 얕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이 곳은 눈 감고도 걸어다닐 만큼 익숙한 곳이고 좋아하는 곳이다.

 

자신이 밤새 수영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릴 때 자신은 엄청나게 질투했겠지.

 

이런 곳에서 공포심을 느낀 것에 어이없어하며 A는 조금 더 몸을 기울여 그대로 물에 빠졌다.

 

익숙하게 미지근한 물이 몸을 감쌌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물이 부드럽게 갈라지고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요란하게 물이 튄다.

 

눈을 감은 채 레일을 따라 수영했다가, 레일을 피하며 가로로 수영했다가, 대각선으로도 헤엄쳤다.

 

다시 첫 번째 레일로 돌아와 숨을 고르는데 멀찍이 튜브 거치대가 눈에 띄었다.

 

튜브가 있었지!

 

여기 물에 튜브를 띄워놓고 거기 기대있으면 기분 좋겠다!

 

사람이 있을 때는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지금은 나 혼자니까!

 

A는 2인용 튜브를 몇 개 헤치고 커다란 1인용 튜브를 잡았다.

 

물 위로 휙 던져놓고 따라 걸어가는데 기대했던 탈팍 소리가 나지 않는다.

 

철벅, 하는 지나치게 큰 물소리가 났다.

 

작은 비명소리도 같이.

 

A는 후다닥 물로 뛰어갔다.

 

누구 있어요? 맞았어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튜브 거치대에서 물까지는 겨우 다섯 걸음 남짓이었다.

 

분명히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항의하는 소리도 없고 물에서 나오는 소리도 없고 자리를 피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저기요?”

 

물 가까운 데까지 왔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다시 위화감이 있었다.

 

그늘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위화감이.

 

다시 물 앞에서 몸을 기울였다.

 

저 멀리에서 일렁임이 있었고, A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인영이 움찔 놀라는 것이 보였다.

 

, 너 누구야! 왜 숨어!”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는 하나 A는 뭍에서 더 빨랐다.

 

A는 달렸고, 수영하느라 튄 물로 흠뻑 젖은 바닥에 쭐떡 미끄러져 버렸다.

 

땅까지 울릴 정도로 요란하게.

 

으으...”

 

A는 까끌까끌한 바닥에 쓸린 다리를 쓰다듬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금속성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피가 제법 나는 모양이다.

 

...”

 

옆에서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파라... 아니, 너 누구야?”

 

수면에서 스르륵 인영이 일어났다.

 

수영모 없이 긴 머리카락과 자그마한 체구에 묘한 짠내가 났다.

 

, 여기 머리도 안 묶고 들어오면 어떡해?”

 

그러자 저 쪽 인영의 입이 벌어지더니 놀랄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뭐 임마?! 언제 봤다고 야, ? 야는!”

 

그러자 A도 울컥해서 배에 힘을 주었다.

 

누구 있냐고 물어봤을 때는 왜 안 나왔는데! 너 뭐야!?”

 

뭠마! 내가 그런 것도 대답 다 해줘야 하냐!?”

 

안 할 이유가 뭔데! 이런 데 숨어가지고!”

 

숨어? 숨어어? 난 계속 여기 있었거든! 네가 몰래 살금살금 들어온 거겠지!”

 

몰래라고!!! 야 너 여기 나와봐라 가만안둬!”

 

저 멀리, 대각선 끝 즈음에서 험악하게 첨벙 소리가 났다.

 

“...뭐야, 또 누가 있어?”

 

“...”

 

가운데 라인에서 무언가가 부표를 스치는 소리가 났다.

 

“...뭐지? 어떻게 아까 수영하면서 하나도 모를 수가 있었지...?”

 

너 눈 감고 수영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잠깐,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 애는 라인 가장자리로 다가와 사다리를 꼭 쥐었다.

 

그리고 불쑥, 물 위로 두 번째 인영이 일어났다.

 

아니, 저건 인영이 아닌데.

 

거대하고 둥근 것이 솟아났다.

 

그 위쪽에는 반투명하고 너풀너풀한 것이 달려 둔탁하게 빛을 여과시켰다.

 

그 두 번째 그림자는 서서히 가운데부터 벌어지더니 물 속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A는 입을 벌렸다.

 

너 인어야?”

 

뭐 그렇지.”

 

A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너풀거리는 지느러미까지 물에 잠기는 것을 지켜보자 인어는 어딘가 우쭐한 듯 보였다.

 

우와아아!? 인어!? 거대 인어? 진짜로!? 쩔어! 엄청나다! 이거 꿈 아냐? ! ...아니구나, 아 진짜 근데 우와아아아아아... ! 아 진짜로 아니구나... 스으읍... 나 만져도 돼? 만져봐도 돼? 우와 얼마나 길어? 불 켜고 싶다! 불 아 핸드폰 플래시라도 으아 핸드폰 거기 탈의실에 있어...”

 

한참이나 퍼덕거리던 A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아까 튜브에 맞은 건 괜찮아?”

 

“...참내... 괜찮아.”

 

역광이라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이없어 하는 게 보이는 인어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 너 다리 줘봐.”

 

어어...”

 

무언가가 따끔하더니 다리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가셨다.

 

이어 물이 몇 번 끼얹어지고, 여전히 어느 부위는 따끔거렸지만 이내 익숙해지고 A는 방금까지 상처가 있던 곳을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

 

놀라긴.”

 

그러나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우쭐함이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 윤곽을 감지했다.

 

A는 그것을 보다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 만져봐도 돼? 화상 입어?”

 

넌 겁도 없냐!”

 

그러고보니 왜 여기 있었어? 어떻게 있었어? 낮엔 사람들 많이 오는데! 너 뭍으로 나올 수 있어?”

 

하이고...”

 

인어는 A의 손을 잡았다.

 

내가 뜨라고 할 때까지 절대로 눈을 뜨면 안 돼.”

 

?”

 

좀 하라면 해.”

 

?’라고 하면 그게 뭐든간에 안 해주겠지.

 

A는 눈을 깜박이다가 천천히 감았다.

 

인어는 A가 숨을 들이쉬게 하고는 천천히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물이 깊었다.

 

물이 차갑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몸은 부유하려 하는데 잡힌 손이 아래로 아래로 끌고 내려간다.

 

지금 무언가 환상적인 현장일 텐데.

 

A는 작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숨 막혀? 조금만 더 가면 돼.”

 

비늘과 머리카락이 스치는 소리일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이따끔씩 들렸다.

 

조금만 눈을 뜨면 안 될까?

 

실눈이라던가?

 

어차피 인어만 갈 수 있는 길이라면 내가 조금 본다고 해도 따라서 갈 수는 없을텐데.

 

A는 마음 속 유혹을 들었다.

 

아주 조금만이라면.

 

아주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A는 살짝 눈을 떴다.

 

 

 

-13일의 금요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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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인영이 흔들렸다.

 

그들은 생각보다도 가까웠다.

 

문득 A는 알아차렸다.

 

비늘이 물을 가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들의 웃음소리였다.

 

그들은 A가 언제 숨이 다할지, 인어의 손에서 빙빙 도는 것을 즐겁게 보고 있었다.

 

A가 작게 소리를 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거의 다 왔어.”

 

고개는 들지 않았지만 A는 인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A는 물갈퀴 돋은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고, 다음 순간에는, 발끝까지 젖은 채 하얀 썬베드 위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원래 계획했던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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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던 손이 사라졌다.

 

A를 끌고가던 힘 역시도.

 

빠른 속도로 A를 스쳐지나가던 물살은 부드러운 벽처럼 A를 붙들었다.

 

검고 광활했던 주위는 마치 벌레를 가두는 풀처럼 A를 향해 우그러들었다.

 

새파란 타일과 하얀 시멘트.

 

낯익은 수영장 바닥이었다.

 

수영장은 언제 손님이 둘이나 있었냐는 듯 고요했고, 수면 아래에서 비치던 위화감은 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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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갈리엔] 히에미스네에 놀러갔어요

2023. 1. 4. 01:27 | Posted by 호랑이!!!

안 돼요.”

 

“...어째서...?”

 

흰 머리 청년은 지독할 정도로 알콜 냄새가 나는 술병을 등 뒤로 감춘 뒤, 단호하게 창 밖을 가리켰다.

 

우리 줄여 보기로 했잖아요!”

 

그 때는 안 마신다는 얘기였지 줄인다는 얘기는...”

 

히스!”

 

그리고 창 밖의 사람들은 움찔하며 사사삭 벽 뒤로 숨었다가 다시 사사삭 창문에 붙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게 뭐야...?”

 

지금 술 뺏긴 거야...?”

 

가족인가 봐.”

 

가뜩이나 큰 덩치에 털이 북슬북슬한 가죽옷을 입어 곰 만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누군가는 가운데에 마른 장작 토막과 지푸라기를 넣어 급히 모닥불을 피우고 눈을 넣은 솥을 걸었다.

 

회색곰 털옷을 입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내가 조카라는 애하고 말할 일이 있었는데, 그 애는 그렇게 격 없이 굴지 않았거든?”

 

눈 밑으로 굵은 흉터가 있는 사람이 턱을 매만졌다.

 

황궁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그랬지? 이번 지원자.”

 

젊은 축인 사람이 진지하게 끼어들었다.

 

아들인가봐요.”

 

아들? 아들이면 저렇게 친할 수 있나?”

 

다시금 그들은 바삐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놓았다.

 

손주인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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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임은 빼앗은 술병을 들고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이 시간쯤 오면 다른 부대원들과도 마주칠 것 같았는데 어째 보이지가 않았다.

 

, 그러니까 조금은 괜찮겠지.

 

병뚜껑을 자연스럽게 따고 한 모금, 두 모금 자연스럽게 마시고 캬 소리를 내며 입을 문지르는 것도 자연스럽다.

 

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든 데임은 우르르 몰려 있는 부대원들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멈췄다가.

 

술병을 등 뒤로 감췄다.

 

“...저는 평소에 잘 안 마시니까 괜찮아요.”

 

[레갈리엔] 히에미스가 놀러왔어요

2022. 12. 27. 01:16 | Posted by 호랑이!!!

 

아니이, 이거 진짜 해요?”

 

그렇습니다, 덤비시지요.”

 

데임은 조금 울고 싶었다.

 

자신이 든 것은 봉이고 그가 든 것도 나무로 만든 봉이었지만 쥐는 자세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어릴 때야 무기를 배운다며 훈련하고 대련해본 적도 있지만 사람을 상대로 무기를 드는 것이 지나치게 오랜만이라 거부감까지 든다.

 

히에미스가 다치면 어떻게 해요?”

 

히에미스는 세상에 다시는 없을 소리를 들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당신에게는 무른 편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매우, 헛소립니다.

 

혹시... 그는... 전투광 같은... 걸까...?

 

데임은 봉을 꽉 쥐었다가 다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살려주시면 안될까요?”

 

“...그럴 거였으면 아까 좀 돕지 그랬습니까.”

 

히에미스는 너무 오래 한 자세로 있었던 나머지 굳어버린 손을 꽉 쥐었다.

 

분명히 털장갑을 꼈을 뿐인데, 까득 소리가 났다.

 

그치만 어린애들 때문에 엄청 곤란해하는 모습이 재미이으아아악!!!”

 

안 오면 먼저 갑니다!”

 

==

 

오늘은 히에미스가 지원 겸 놀러오기로 한 날이었다.

 

부대원에게는 황궁에서 알게 된 옆 부대의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데임의 대단한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 부대원들은 데임을 지나치게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평소대로 늘어져 술을 마시거나 나무토막을 깎거나 잠을 잤고 심지어는 난로 앞에서 구멍 난 양말 째 발에 불을 쪼이다가 노크 소리가 나자 데임을 불렀다.

 

어이, 꼬마! 대단한 애기 왔다!”

 

그야말로 망나니들 같은 모습이었다.

 

이따가 정찰 때 이모랑 삼촌들이 같이 나갈 거니까 둘이는 먼저 밥 먹고 놀고 있어.”

 

친구 온대서 토시를 하나 준비했는데 맞을까 모르겠네. 여기가 좀 춥잖아.”

 

아니 북부가 춥지 그러면.”

 

친구는 남부 출신이라던데? 바다에도 들어가 봤대.”

 

뭐어? 나암부우? 아이고 얼어 죽겠네.”

 

문 가까이 있던 부대원 하나가 문을 열었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는 발로 문을 차 다시 닫아버리려 했으나 그 문이 닫기지 않도록 불쑥, 하얀 머리통이 들어왔다.

 

제길, 치사하게 노크를 하다니!”

 

애들, 애들은 다 있어?”

 

문 닫아! 무기 꺼내!”

 

말하지 않아도 제각기 칼이며 도끼며 하는 것을 꺼내들고 그들은 언제 드러누워 있었냐는 듯 문을 노려보았다.

 

염병할 문짝! 닫기질 않어!”

 

들어온 것은 거대한 회색 늑대의 머리였다.

 

노란 눈은 흉흉하고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벌어진 입에서는 피거품이 살벌하게 흘러나오는.

 

데임은 총총 다가가 그 머리를 이리저리 눌러보더니 반가운 얼굴을 했다.

 

잘 찾아오셨네요!”

 

잘 찾아오다니?

 

부대원들은 갑주는커녕 셔츠도 신지 않은 모습으로 제각기 무기를... 어라, 셔츠가 신는 거던가?

 

, 문 닫아!”

 

대단한 인간이 아니잖아!”

 

못 들어오게 해!”

 

“...저를 이르심입니까?”

 

그러나 회색 늑대에게서 들리는 것은 멀쩡한 인간의 목소리였다.

 

데임이 길을 비켜주자 회색 늑대가 툭 떨어지면서 늑대만큼이나 거칠고 커 보이는 인간이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아주... 편히 쉬고 있으셨군.”

 

늑대의 노란 눈과 같은 호박색 눈이 좌중을 훑어보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든 무기를 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헷갈리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호박색 눈과 회색 머리카락에 특징적인 흉터까지.

 

눈 사이를 떼지어 누비는 회색 늑대는 물론 무섭지만 단신으로 회색 늑대 한 마리를 잡아 온 저 사람은... 그들의 짐작이 맞다면, 악몽이지 않은가.

 

, 이거 멋지네요!”

 

오다... 잡았습니다.”

 

그럼 그걸 잡았겠지!

 

혼자서!?

 

왜 그렇게 오다가 덫 하나 수거해 온 양 말합니까!?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지 못한 히에미스는 주춤주춤 무기를 내린 어느 부대원이 내준 푹신한 방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로 바로 곁이라 일렁이는 불꽃이 그의 황금색 눈가를 훑었다.

 

저기, 혹시 히에미스...입니까?”

 

그러합니다.”

 

혹시 단신으로 독수리형 괴물을 잡았다는... ...?”

 

아무리 나라도 단신으로 잡기는 어려우니 과장된 면이 있군요.”

 

아 역시 그런가.

 

인간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다소 안도했다.

 

그럼 같이 오신 분들은 어디 계신지? 나머지 늑대를 정리하고 있나요?”

 

혼자 왔습니다.”

 

다시 조용해졌다.

 

우리 이제 나가?”

 

데임은 늑대를 정리하러 가버렸고, 정적을 깬 것은 아이들이었다.

 

잿빛 귀며 짧은 꼬리가 자란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였는데 어른들은 죄다 정적처럼 굳어서 단신으로 늑대를 잡았다는 사람 곁에 다가가려는 아이들을 말릴 수 없었다.

 

아저씨가 히에미스예요?”

 

그렇습니다.”

 

갈색 머리인 아이가 곁에 털썩 앉자 히에미스는 움찔했다.

 

엄청 커. 왜 이렇게 커요?”

 

“...가족력인 것 같습니다.”

 

가종녁이 머예요?”

 

가족력은...”

 

채소 안 먹으면 우리 잡아 먹어요?”

 

일찍 안 자도 잡아먹어요?”

 

왜 그렇게 애들을 많이 먹어요?”

 

아이 하나가 그의 종아리를 베고 눕자 히에미스는 다시 움찔했다.

 

내 조카도 나를 무서워하는데,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그가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두고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위해를 끼칠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더 가까이 다가왔고, 히에미스의 마음만은 그 두 배로 뒷걸음질했지만 늑대 가죽 정리를 마친 데임이 돌아왔을 때에는 가지런히 모아 내민 히에미스의 양손 위에 한쪽 팔과 머리를 얹고 잠들어버린 아이까지 있었다.

 

“......”

 

투박한 외모, 덩치는 크고, 일견 곰 같기도 한 모습에 표정은 오래 된 나뭇등걸처럼 거칠다.

 

그 위의 눈은 마치 한겨울 사시나무처럼 데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소리가 있다면 아마도 딸그락딸그락 하는 것이었겠지.

 

마치 지옥에 떨어진 거미줄을 보는 눈빛이 저러할까.

 

데임은 그 눈빛을 마주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급히 손을 내밀었다.

 

삼촌. 팔 토시 어딨어?”

 

데임?!”

 

내 방 서랍장 속에. 지금 가져오게?”

 

데임은 더욱 강렬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으나 역시는 역시.

 

.”

 

거미줄은 거미줄.

 

툭 끊어진 거미줄의 뒷모습을 배신감에 찬 히에미스가 황망한 눈으로 보았다.

 

 

[티엔+하랑+마틴/오메가버스] Mine 12

2022. 11. 20. 22:49 | Posted by 호랑이!!!

 

마틴은 보고를 마쳤다.

 

복도를 따라 난 유리창 너머로 온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온 복도도 물건도 모두 붉은 색으로 변한 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기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마틴은 그게 사람인 것도 몰랐을 것 같았다.

 

티엔 사부... 아니, 정 티엔 어디있어?”

 

마틴은 하랑에게 귀를 기울였다.

 

마치 여러 사람이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가 하랑을 휘감고 몰아치고 있었다.

 

정 티엔-’

 

죽여!’

 

대화를 먼저

 

처음부터 수상했어

 

뭔가 오해가

 

하랑이 고개를 마틴 쪽으로 들었고 동시에 마틴은 누군가 밀친 것처럼 브루스의 방 문에 부딪쳤다.

 

듣지 마!’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고 마틴은 비틀거렸지만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랑, 지금 과하게 분노했어요. 냉정을 되찾으세요!”

 

나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

 

으레 티엔이 하던 소리라서인지 역효과가 났다.

 

하랑이 화를 잠재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마틴은 다시 소리에 귀 기울였다.

 

누구인지, 인간인지도 모를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지나면 개가 경계하여 짖는 소리, 뱀의 쉿쉿거림, 독이 오른 쥐가 긁는 소리, 그리고.

 

분노한 범.

 

개와 쥐가 경계하는 것은 이전에도 들었다.

 

뱀이 위협하는 소리는 적지만 간혹 있었고.

 

그러나 호랑이라니?

 

단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던 호랑이의 으르렁거림이라니.

 

하랑은 마틴에게 시선을 두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짓누르는 것 같은 힘이 천천히 마틴에게서 떨어졌다.

 

순식간에 하랑의 몸은 계단 위를 뛰어오르고 마틴은 손을 뻗었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바로했다.

 

무슨 일인가.”

 

문이 열리더니 거대한 덩치가 복도를 메우듯이 열린 틈에서 빠져나왔다.

 

하랑입니다.”

 

무슨 일로?”

 

모릅니다.”

 

모른다고?”

 

자네가? 라고 묻는 듯한 눈에 마틴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가 없는 것은 자기 책임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마틴은 모자를 꾹 눌러 썼다.

 

하랑에게 가보겠습니다.”

 

자리를 떠도 좋다는 허락을 듣기도 전에 마틴은 발을 옮겼다.

 

빠르지 않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면 티엔의 방이 가까워진다.

 

겨우 몇 초 늦게 출발했을 뿐인데 복도는 이미 여기저기 부서졌고 때마침 근처에 있었던 일부 능력자들도 부상을 입은 채 티엔의 방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비용으로 둔 출장 가방이 사라진, 주인이 없는 그 빈 방을.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이면 하랑은 일찍 일어나 수련을 시작했고, 영어나 다른 외국어도 틈틈이 배웠다.

 

역사서를 읽었고, 신문을 읽었고, 수많은 책을 읽었으며 브루스의 뒤에서 회의나 회담에도 참가했다.

 

이제 첫 히트도 지났고,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마틴은 브루스에게 하랑과 회의에 참가하라는 말을 들었다.

 

, 여기 자리 있어?”

 

한 일원으로 참가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비서진 사이에서 참가하는 것뿐인데다, 브루스 외에 자신 옆에서 일을 배우는 건 재단 일 치고도 꽤나 안전한 일이긴 하지만.

 

자리, 있냐니까, !”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자신이 조금 더 철저하게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틴은 자료를 넘겼

 

마틴 형!!!!!!!”

 

으아아악!!! !!? !!! 앉아요 앉아, ...... ....?”

 

하랑은, 열일곱 되는 아이다.

 

어휴, 어디에 정신을 판 거야?”

 

깨끗하게 씻고 땋아 드리운 댕기머리.

 

그의 아버지가 구해다 주었다는 파란 셔츠와 조끼.

 

언제나 명랑하고 착하고 솔직한...

 

오늘은 나랑 형이랑 가는 거 알아? 내가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 정말.”

 

거기 꽤 멀던데, 그래도 1시쯤 나가면 시간이 충분할 거야.”

 

나 그 설탕 좀. 아까 저기서 오늘 건 설탕 듬뿍 넣으면 맛있을 거라고 하더라?”

 

그러나 건네어진 설탕그릇은 뚜껑을 달각거릴 뿐이었다.

 

평소처럼 하얀 산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 앞에 현관에 나와야 해.”

 

하랑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틴은 벌떡 일어나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음식을 쓰레기통에 부어버리고 재단 안을 달렸다.

 

계단을 뛰어오르고 복도를 달려나가고 유달리 사람이 많아 번거로운 곳에서.

 

욕설과 함께 공용 전화기 사용 신청서를 쓰는 손길은 거칠었고 담당하는 직원은 웬일로 험한 모습을 보이는 마틴에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티엔 정은 아직 배 위일 테니 전보 쪽이 빠를 겁니다. 뭐라고 보내드릴까요?”

 

나중에 전해져도 상관없으니 전화 쪽으로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자신이 자연스럽게 티엔 정을 떠올린 것.

 

그리고 그가 거의 오자마자 출장을 다시 나간 것.

 

마틴은 그 안에서 티엔의 부속물처럼 여겨지던 하랑이 요즈음 재단 일을 다양하게 하던 것과의 연관성을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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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더건/율리안] 비슷한 사람

2022. 10. 30. 23:48 | Posted by 호랑이!!!

여어.”

 

율리안은 보조가방 가득 책을 담아서 걷다가 집주인과 마주쳤다. 바깥에서 마주쳐서 좋을 것 없는 인간이지만 인사를 받은 이상 무시할 배짱은 없었기에 가볍게 목례 했다.

 

어디 가시나요?”

 

마악 온 거야.”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이 사람은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대신 그대로 가 버렸다. 또 무언가 질척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율리안은 저 사람도 바쁜 일이 있겠거니 하며 일과를 보내고 밤에 다시 크나트와 마주쳤다.

 

일은 잘 끝났습니까?”

 

무슨 일?”

 

아까 바쁘게 갔잖습니까.”

 

“...?”

 

크나트는 드물게 멍청한 얼굴을 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 얼굴이 둘은 아닐 텐데. 헷갈릴 만한 얼굴도 아니고...”

 

“?”

 

오늘 우리는 계속 건물 안에서 대기였거든. 점심도 누가 사온 맛대가리 없는 도넛으로 때웠어.”

 

이상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율리안은 크나트가 자발적으로 사 먹을 리 없는 음식을 역겨워하면서 즐겁게 먹는 것도 보았고 어제 샀던 넥타이를 같은 상점에서 사서 나오는 것도 보았다. 심지어 오늘은-

 

스호르 씨, 만난 김에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스호르... ? 저 양반이 성으로 부르는 것만도 놀랄 일인데 라고?

 

어디 아픈 거 아닙니까?”

 

평소에 이렇게 안 불렀나.”

 

언제 그렇게 불렀습니까? 또 이런 것으로 저를 놀릴 셈이라면-”

 

평소에 뭐라고 불렀는데? 불러줘, 뭐 그런 식으로 놀릴 셈이었겠지. 이런 개방적인 장소가 뭐 어떠하냐면서. 율리안의 눈이 세모꼴로 날카로워지자 크나트는 아무래도 좋지 않냐며 어물쩍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당신이 바깥에서의 체면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러자 뭐가 좋은지 또 웃어젖힌다.

 

이 쪽이 좋구나.”

 

당연합니다.”

 

설마 당신, 지금까지 계속 거부했는데도 바깥에서 달링이니 자기니 하고 불러댔던 건 제가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하고 다시 입을 딱 다물자 그럴 리가 있냐며 손을 내젓는다.

 

아무튼 스호르씨는 내가 좋다는 거지? 그래 그래, 그럼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게 또 왜 그렇게 연결된다는 말입니까! 하고 왈칵 성을 내면서도 율리안은 멋진 호텔 레스토랑으로 끌려갔다.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고 미리 예약해둔 듯한 음식이 차례로 나온다. 심지어 디저트까지 끝내고 나니 직원이 한아름이나 되는 꽃다발을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감사, 합니다...?”

 

이 사람이 이런 거 좋아하긴 하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하지는 않았는데. 이제 당연한 수순으로 이 위에 딸린 호텔방을 예약했다는 말을 하겠지. 율리안은 품에 안은 책을 추슬렀다.

 

차 몰고 나왔지요? 트렁크에 책을 먼저 뒀으면 합니다.”

 

- ..., 오늘은 안 가지고 왔어.”

 

율리안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크나트를 쳐다보았다.

 

뭐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무겁지 않으니까요. 잠깐 드는 정도라면-”

 

그래? 튼튼하네. 그럼 이따 집에서 봐.”

 

?”

 

율리안은 크나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랑 비슷한 웃는 얼굴인데... 뭔가 수상쩍게 다르다. 그러나 크나트는 율리안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다음 코스를 짜놨다던가, 방으로 가자던가, 사실 차를 가져왔다던가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랑 호텔까지 와서 이렇게 돌아간다고? 사실 어디 아프다던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크나트와 눈이 마주치자 크나트는 싱긋 웃었지만 그 눈에는 언뜻언뜻 비틀린 그늘 같은 것이 비쳤다.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율리안에게조차 숨길 수 없이 강렬했다. 말해달라고 해서 말해줄 사람도 아니고. 망설이다가 꽃다발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마음에 든다는 것을 어필해 보았다.

 

“...향이 좋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먼저 실례한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피했지만 뒤에서 자신을 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냐? 율리안은 어쩐지 걱정이 되어 얼른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나, 어떻게 티나지 않게 물어보나 이래저래 생각하다보니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에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운 건 책 때문만은 아니겠지. 발만큼이나 무거운 손으로 문을 열었다.

 

달링!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모처럼 옥수수 넣고 감자도 으깼는데 다 식었겠어.”

 

야식...? 입니까?”

 

무슨 소리야. 저녁이지. 세상에 이 무거운 걸 들고 이때까지 돌아다닌 거야? 가서 손부터 씻고 와. 마실 건 뭘로 할래? 레드? 화이트? 샴페인? 아니면 핫 초콜릿?”

 

물이면 충분합니다. 그보다 아까 저녁은 먹었잖습니까.”

 

누구랑?”

 

뭔가 말이 안 통하는데. 크나트는 식탁에 앉아 감자 샐러드를 듬뿍 떠 접시에 얹었다.

 

그보다 지금은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아 다행입니다.”

 

뭐가...?”

 

어쩐지 말이 안 맞는다고 느낀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인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열쇠를 꽂는 것까지도. 크나트는 조용히 식기를 내려놓고 손짓으로 집 안쪽을 가리켰다. 다른 손은 품속으로 조용히 들어갔는데 율리안은 그 안에 있을 권총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여어.”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바깥쪽에서 흘러나왔다. 안으로 피신하려던 율리안은 그 목소리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발을 멈추었고 문은 스르륵 열렸다.

 

또 만나네, 스호르 씨.”

 

크나트가 현관에 서 있었다. 집 안에 있던 크나트는 주저없이 소음기가 달린 총을 꺼내 두어 발 연달아 갈겼다. 현관의 크나트는 어디로 쏠지 알고 있었다는 듯 총알을 피했고 아슬아슬하게 스친 것이 정장을 그슬리고 사라졌다.

 

저런, 한 벌밖에 없는 건데.”

 

웬 놈이냐.”

 

현관의 크나트는 고개를 들었다. 실내의 불빛 아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얼굴이 아니었더라도 그 미묘한 습관이며 행동, 목소리, 체격, 자세, 그 외 무엇이라고 집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 둘이 동일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만 어딘가 인간 같지 않은 분위기가 옅게 덮였는데 마치 인간 아닌 것이 인간 흉내라도 내는 듯 했다. 집 안의 크나트는 한 걸음 옆으로 옮겨 율리안을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가렸고 현관의 크나트의 눈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

 

크나트 L. 율리케.”

 

그는 집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는 기묘하고 오싹한 느낌이 있었는데 더 밝은 곳으로 나오자 그런 느낌이 적어졌다.

 

이젠 내가 크나트 율리케야.”

 

과연 그럴까?”

 

이 쪽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자, 현관 쪽의 사람은 이를 드러냈다.

 

내 흉내를 내는 놈이 돌아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지. 마치 인간 흉내를 내는 게 처음이라는 듯이 다녔다고?”

 

“...내가 크나트 율리케야.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네 행동 도식을 가지고 있어.”

 

비웃는 표정으로 크나트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그러자 상대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잇새로 그르륵 소리를 냈다.

 

이제 널 없애면 내가 진짜가 되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감각을 느껴보는 거지.”

 

그 마지막 감각이 무엇입니까?”

 

율리안이 툭 질문하자 두 쌍의 청록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 . 있잖아. 둘이 맨날 하는...”

 

그거요?”

 

, 설마 이거?”

 

크나트가 난잡한 은유를 했다. 그러자 현관 쪽의 크나트가 쉭- 위협하는 소리를 내고는 율리안 쪽 크나트를 깔아뭉갰다가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아래에 깔린 크나트는 너클을 낀 손으로 희미하게 붉은 기가 비치는 팔을 문질렀다. 그 잠깐 사이에 소매가 찢어져 안쪽 피부가 보였다.

 

잠깐! 잠깐만요.”

 

나가떨어져 놓고서도 다시 달려들려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율리안은 큰 소리를 냈다.

 

, 감각이 목적이라면 굳이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누군가의 손톱이 서서히 줄어 평범한 수준으로 돌아갔다.

 

“...그럴지도 모르지.”

 

잠깐, 허니? 내가 설마 저 정체모를 이상한거랑 홀딱 벗긴 채로 단둘이 둘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뭐 셋이서 하기라도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무심코 말했던 율리안은 정말로 크나트의 침실로 끌려가자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섰다. 뒤통수로 익숙한 가슴근육을 느끼며 앞으로도 같은 것이 보이자 반항은 숫제 발버둥이 되었다.

 

, 무립니다. 두개씩이나 들어가지 않아요!”

 

당연하지, 이걸 어떻게 둘이나 넣어?”

 

음란하긴.”

 

율리안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옷이 벗겨지고 양 팔을 등 뒤 사람에게 잡힌 채 몸 위로 다른 쪽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번갈아서 그 눈들을 보다보니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볼 때마다 드러나는 기묘한 비틀림.

 

제 뒤의 사람을 볼 때면 분노라고 생각할 만큼 강한 것.

 

바다 같은 색 눈을 그늘지게 하는 감정.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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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_몰랐던_아름다운_계절

2022. 9. 12. 22:50 | Posted by 호랑이!!!

고개를 돌리고, 고개를 젓고, 눈을 감은 모든 계절들에게.

 

 

-겨울-

 

더보기

왜 세상은 이렇게 칙칙할까?”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을씨년스러운 길에는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늘어섰다.

 

그나마 색이 있다고 하면 어두운 색에 잎이 뾰족한 나무 뿐, 그나마도 몇 그루 보이지 않았다.

 

땅은 아무리 손을 써도 질척했다.

 

물은 딱딱하고 미끄러워서 멋모르는 누군가가 밟았다가 그대로 미끄러졌다.

 

공기는 차갑고 바람은 메말라서 사람들은 두꺼운 천으로 그들 몸을 가렸다.

 

좀 더 보드랍고, 따뜻하고, 색색이 아름다울 수 있을 텐데.”

 

남들은 새파랗다는 하늘조차 잿빛이다.

 

그는 도저히 이 계절을 사랑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었다.

 

노란색이고, 붉은 색이고, 그런 것들은 다 다른 이에게만 허용된 것 같아서.

 

저에게 주어진 것이란 말라비틀어진 것 뿐이라서.

 

좀 더 다정한 것을 가지고 싶어서.

 

겨울은 고개를 돌렸다.

 

길고 하얀 머리카락이 빛을 받을 때마다 별무리처럼 반짝였다.

 

아래에서 누군가는 나무에 붉고 노란 꼬마전구를 감았고 누군가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얼음 위에 흙을 뿌렸고 누군가는 손수 뜬 모자를 기증했다.

 

겨울은 그것을 보지 못 했다.

 

 

 

-봄-

 

더보기

왜 세상은 이렇게 변덕스러울까?”

 

그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추위를 경계하는 식물들은 앙상했으며 따스함을 믿었던 식물들은 그들의 믿음에 배반당해 시들어 떨어졌다.

 

덜 녹은 얼음은 위험했고 다 녹은 얼음은 길을 질척하게 만들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얼었다.

 

얇게 입은 사람들은 추워했고 두껍게 입은 사람들은 더워했다.

 

좀 더 일정하면 좋을 텐데.”

 

제비가 울었다.

 

진흙을 떠 둥우리를 지어야 하는데 밤을 지나며 얼어 있던 탓이다.

 

섞어 쌓을 짚도 짐승의 털도 구하기가 어렵다.

 

그는 도무지 이 계절을 사랑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안정적인 것이 저 여린 생물들이 대비하기 쉬울 터였다.

 

햇볕 한 줌에 자라난 새싹은 다음 날 얼어 죽을 테다.

 

사람들은 병에 걸려 고통받을 터.

 

봄은 고개를 저었다.

 

짧은 고수머리가 잘랑잘랑 흔들려 그의 눈을 가렸다.

 

그리하여 그는 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작은 싹이 흙을 밀어내고 고개를 드는 것을.

 

갓 태어난 짐승이 어미에게 보채고 어미는 다정하게 어르는 것을.

 

어른이 아이에게 옷을 겹쳐 입는 것을, 단추 여미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여름-

더보기

와씨 타죽겠네.”

 

여름은 티셔츠 목께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 옆의 사람들 역시 길을 걸으며 선풍기를 사용하거나 부채를 사용하거나 손에 잡히는 거라면 뭐든 얼굴 앞에 대고 흔들어 댔다.

 

저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차를 타든 건물에 들어가든 차가운 공기로 열을 식힐 것이고 물도 마실 테니까.

 

여름이 정말 염려하는 것은 어리거나 늙거나 여리고 힘 없는 것들이다.

 

그들은 겨우 나무그늘 밑에서 해를 피한다.

 

아스팔트조차 녹아내리는 이런 날에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그는 도무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었다.

 

더위는 끔찍하다.

 

때로는 마실 물조차 여의치 않다.

 

가장 약한 것들이 가장 먼저 나가떨어졌다.

 

해가 없는 밤조차도 열기는 식지 않고 사람들을 괴롭힌다.

 

여름은 눈을 감았다.

 

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가게에 피서하러 오세요라는 종이를 붙이는데도.

 

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길짐승을 위해 물을 따라놓는데도.

 

저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지구를 지키자고 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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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괏au

2022. 8. 10. 00:20 | Posted by 호랑이!!!

“오.”

후플푸프 학생은 사람들이 점점 모이길래 고개를 들었다가 그 학생들이 녹색이나 붉은 색 장식을 단 것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저놈들 또 시작이네.

불구경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는 것도 어디 한 두 번 이어야 말이지.

잠깐 설명을 좀 하자면-

볼드모트의 몰락 이후 슬리데린은 대개 기가 죽어있었다.

살아남은 소년의 부모 양쪽이 그리핀도르라는 것 때문에 그리핀도르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리핀도르는 그리핀도르대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신입생까지도 ‘살아남은 소년’이 이미 그리핀도르에 들어오기라도 한 양, 이미 같은 기숙사생인 것처럼도 얘기하곤 했다. 마는.

이것은 무언가.

지금 슬리데린은 가을날 독 오른 독사처럼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무리 그리핀도르라고 하더라도, 우리 좀 그만 괴롭히지 그래!”

“...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나온 기숙사 주제에!”

어라? 그렇게 외치는 그리핀도르의 기세는 오히려 어딘가 꺾여있지 않은가.

후플푸프는 그 그리핀도르 녀석들 가장 앞에 훤칠하니 눈에 띄는 퀴디치 선수를 발견했다.

사람 괴롭히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역대 최고의 몰이꾼을.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저 못돼먹은 성격 때문에라도) 염문설이 끊이지 않았기에 후플푸프 학생은 대체 싸움박질하는 데 가장 앞장서기까지 하는 저 사람이 왜 인기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솔직히는, 졸업해서 뭐가 될까도 궁금했다.

그리고 반대로, 슬리데린 학생들이 그에게서 감추듯이 가장 뒤로 밀어낸 학생은 다소 신경질적인 표정이었지만 오히려 그 표정이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미남이었다.

그리핀도르 무리 중 가장 앞에 선 그 망나니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억울한데.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 뻔뻔한 자식아!”

“뭐 임마?”

너 다음 연습경기 때 두고보자고 하는 말에 어쩐지 슬리데린 선수의 기세가 꺾어졌다.

“아니, 졸업 학년이면 공부나 진로 고민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양아치!”

“적어도 죽음을 먹는 자들 무리에는 가입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돈을 주기는 하냐!”

“너희가 해줄 고민은 아니거든!”

왁왁거리며 쏟아내는 고함들을 기꺼이 누리며 크나트는 슬리데린들을 노골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칭찬 고오-맙다.”

마치 이래도 덤빌래? 라고 하듯.

무리를 거느리는 사자새끼같이.

“이봐, 거기 키티. 네 입으로 말해보지 그래. 내가 널 괴롭혔냐? 패기라도 했어?”

“그건...”

율리안은 망설였다.

저 얼굴만 멀끔한 선배가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손을 대기는 하지만, 가끔은 남이 있건 없건 아랑곳 않거나 목욕탕에도 따라들어오거나 하는데다 그 손이 자신을... 으음, 괴롭힌 적도 있기는 있었지만...

아무튼 때리거나 아프게 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건... 아닙니다만...”

슬리데린들은 머리를 감쌌다.

애당초 율리안에게 괴롭힘이라는 기준은 지나치게 높다고! 특히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아니이 근데 당사자가 저렇게 말해버리면 안되는 거 아냐! 특히나 이런 상황에선!

어물어물 부정해버리는 율리안을 한 번, 그리고 (저 자식이랑 율리안을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은데)크나트를 한 번 쳐다보고, 슬리데린은 조용히 해산했다.

그러면 그리핀도르들은 어깨에 힘 한 번 주고 대장 사자의 어깨를 툭 툭 치고는 또 시끌벅적하게 가버리는 것이다.

“우리도 갈까?”

“가기는 어딜 간다는 말입니까, 우리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럼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하고 싶단 말이야? 저렇게 사람도 많은데?”

“이- 입! 입입입! 입!”

차마 손을 대지는 못하고 손가락으로 필사적으로 입 누르는 시늉을 하자 심술궂은 표정으로 히죽 웃는다.

“누누가 뭘 할 거라고 그런- 그런-”

“혀 씹은 거 아파 보이는데, 내가 낫게 해 줄까-?”

율리안은 그 비상한 머리로 저 말이 곧 학생에게 부적절한 소리로 이어질 것임을 깨달았다.

“그먀, 만! ...하십시오. 학생은 그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왜 안 돼? 슬리데린 녀석들은 이런 소리 안 해? 아니던데?”

뭘?! 누가? 왜? 언제!?

아 왜는 왜야, 어차피 저 인간이 원인이고 범인이겠지!

“어차피 선배 때문일 거 아닙니까!!!”

원래부터 차가운 인상으로 노려보기까지 했더니 항복이라는 듯 양손을 든다.

“그래서 저를 부른 용건이 뭡니까?”

이 사람의 이미지가 있다 보니 부르기만 해도 슬리데린들이 지켜줄 거라고 우우 몰려들었기에, 겨우 이것을 묻는데만도 이만큼이나 시간이 걸린다.

“자, 이거.”

끝이 불그스름하게 물든 검은 장미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웬... 꽃입니까?”

가시가 없는 줄기를 받아들었다.

이 삭막한 곳에서 꽃이라니.

식물이야 스프라우트 교수의 온실에서 가지각색 자라고 할로윈이면 호박등, 크리스마스면 사냥터지기가 거대한 전나무를 가져와주지만 이런 꽃은 보기가 어렵다.

율리안이 묘한 감동을 느끼는 사이 크나트도 그 비슷한 생각을 했다.

꽃 같은 게 꽃을 들고 있네.

다발로 가져올 걸.

“변신술 수업에서 만든 거야. 줄게.”

“원래는 뭐였는데요?”

“저저번 주에는 튤립이었다가 이번 주에는 민들레.”

아 그래서 가시도 없고 잎도 없구나.

“이제 졸업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번 주말에 같이 호그스미드 갈래?”

“...다 좋지만, 그거 저저번주에도 한 얘기 아닙니까?”

크나트가 웃었다.

율리안은 한숨을 쉬고 장미를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시간이면 기숙사가 비어 있겠지.

그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크나트가 생각했다.

이 애는 내가 졸업하면 아쉽겠다고 생각해주지는 않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교수로 굳어진 자신의 진로를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