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호랑이!!!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여우산] To. 뉸님 : 지감이 어릴 적에

2016. 2. 23. 23:36 | Posted by 호랑이!!!

여우가 있다 하여 여우산.

 

산 속 어느 작은 계곡에.

 

이팔청춘이 조금 못 되는 나이의 지감이 있었다.

 

짙은 자색 저고리에 같은 색 댕기를 빈틈없이 드리우고서.

 

장정도 밤에는 고개를 넘지 못 하고 사람이 열둘이나 되어도 깊은 곳으로는 가지 못한다는 이 산 속은 기껏해야 나무하는 아이들이 사람 다니는 길 근처에나 다니지만 지감은 이 사람 다니지 않는 산을 누볐다.

 

용감하게 다니다가 우연히 알게 된 계곡은 맑은 물도 흐르겠다, 저 놀기 딱이라.

 

오늘도 글공부하다 빠져나와 멱 감고 널찍한 바위에서 몸을 말리는데 인기척이 났다.

 

여우냐?”

 

그렇게 말하는 상대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저보다 한두어살 많을 것 같지만 키는 저보다 조금 더 작은.

 

얼마 전 수도에서 요양차 왔다는 그 도령이었다.

 

서울 도령이군요. 안녕하십니까.”

 

어린애가 여길 돌아다니는 줄은 몰랐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랑 나이 차도 나지 않으면서.

 

그러는 도령도 어린애잖습니까.”

 

그러자 대답 대신 웃어 보인다.

 

사냥꾼들이랑 같이 왔었거든요.”

 

하면서 겉에 입은 옷자락을 들추니 사냥꾼들이 산에 다닐 때 쓰는 단도 한 자루와 던지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짧은 칼이 몇 자루 보였다.

 

이것 보시지요.”

 

손목을 까딱, 하자 저만치의 나무에 짧은 칼이 박혀 있었다.

 

해보시겠습니까?”

 

그에 혹하여 받아서 던지다 보니 시간은 훅 갔다.

 

가뜩이나 산 속이라 더 일찍 지는 해가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고, 둘은 던졌던 칼을 주워 모았다.

 

지감은 바로 집으로, 서울 도령은 사냥꾼들과 같이 간다고 하여서 길의 중간까지만 같이 가기로 했다.

 

아까, 여우냐, 라고 했잖아요? 진짜 여우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어쩌긴 뭘 어쩝니까. 잡아야죠.”

 

그 말에 지감이 웃었다.

 

이 도령은 생긴 것은 무뚝뚝한 장군감인데 참 다정하신 분입니다.”

 

그러는 서울 도령도 생긴 것과 따로 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자 서울 도령이 웃었다.

 

갈림길에 서서, 서울 도령이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봅시다.”

 

땅거미 내리는 산길에서 도령이 사라지고, 지감은 불 켜지는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루드라이화클] 서커스의 숙소에서

2016. 2. 22. 00:28 | Posted by 호랑이!!!

짝짝! 와 대단해요!”

 

공을 돌리면 실패해서 아래로 떨어지고 외발자전거를 타더라도 넘어지고 구르고.

 

웃으면 안 되는 어릿광대이지만 목소리는 발랄하고 밀짚색의 머리카락과 크게 뜬 푸른 눈은 반짝여서 꼬마 광대가 까르르 웃을 때면 요란한 음악과 어우러진 빛이 부서진다.

 

천막의 사람들은 꼬마 광대가 넘어지거나, 실수를 하거나, 물을 뒤집어쓸 때마다 목소리의 높아짐과 낮아짐, 표정의 변화, 손가락 끝까지의 움직임에 집중하여 와아 소리내어 웃거나 꺄악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귀여운 광대가 몸을 늘리는 능력을 보여주는 이 인기있는 쇼는, 단장이 그 화이트 클라프라는 것에 힘입어 연일 상승세를 탔다.

 

마지막으로 팔을 쭉 늘려 인사하자 위에서 관중들이 던지는 꽃이 쏟아졌다.

 

고마워요!”

 

꽃 한 다발을 들고 휙휙 휘두르고 퇴장하자 뒤에서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꼬마 광대.

 

라이샌더는 천막 문을 나섰다.

 

조명 아래에서 어두운 복도로 나가면서 반짝이는 푸른 눈은 가라앉고 활짝 웃음 짓던 발그레한 뺨도, 입술도 서서히 하얗게 질리며 표정을 지워갔다.

 

잘 만든 인형이래도 믿을 모습으로 눈조차 깜박이지 않으며.

 

너 숙소를 단장님이랑 같은 건물로 쓴다고? 좋겠다~’

 

역시 인기인은 다르다니까

 

...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던 소리도 있었지.

 

라이샌더는 어두침침한 복도를 걸어갔다.

 

자신의 방은 1.

 

안으로 들어가서.

 

품에 안았던 꽃다발을 책상 위에 던지고는 몸을 씻었다.

 

머리를 말리고 하얀 셔츠에 연한 갈색 반바지를 찾아 입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화이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방 입을게요.”

 

익숙한 일이라는 듯, 라이샌더는 맨몸에 셔츠와 바지만을 걸치고는 뒤로 돌았다.

 

루드빅은 뒤로 내민 그 양 손을 하얀 천으로 묶고 같은 천으로 눈을 가려 묶었다.

 

물이 뚝, 떨어졌다.

 

루드빅은 라이샌더가 던져놓은 수건을 집어다가 그의 머리에 대고 물기를 털었다.

 

아무리 머리가 짧아서 금방 마른다지만,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감기 걸립니다?”

 

재갈을 물리지는 않았지만 라이샌더는 대답이 없었다.

 

그를 안아들던 루드빅은 책상 위의 꽃다발을 보았다.

 

공단 천으로 묶은 그 끝에는 T.P가 새겨져 있었지만-

 

아마 이 꼬마는 보지 못하겠지.

 

화이트 클라프의 방은 3층의 맨 구석이었다.

 

그 방 앞에 맨발의 소년을 내려놓고 루드빅은 문을 열었다.

 

라이샌더는 그의 손에 끌려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화이트 클라프의 발 아래 내던져졌고 화이트 클라프는 그의 외알 안경을 떼어 조끼에 문지르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소근거리면 라이샌더는 무릎으로 기어와서 화이트 클라프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세뇌를 쓰시는 겁니까.”

 

교육이 덜 되어서 말이지.”

 

화이트 클라프는 점잔을 빼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한참이나 갈 길이 멀어.”

 

큭큭 웃음을 참는 소리였다.

 

루드빅은 예의 그 웃음으로 답하고는 문에 기대섰다.

 

라이샌더는 이제 화이트 클라프의 무릎 위에 앉고 있었다.

 

자기인형 같던 하얀 피부가 연한 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는데 눈을 가린 천이 희어서 더욱 붉은 빛이 눈에 띄었다.

 

이봐, 자네.”

 

부르셨습니까?”

 

흥미가 있다면 자네에게도 알려주지. 키워드.”

 

화이트 클라프는 그에게 손짓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나 선량하고 존경받는 이가 이런 취미가 있다니 세상 일은 참 알 수 없지.

 

루드빅은 다가가 귀를 가까이했다.

 

- 착하게 굴면, 친구들을 돌려주지

 

 

[데샹바레] 히카르도 안나오는 쌍충

2016. 1. 29. 02:20 | Posted by 호랑이!!!

미아, 뭐 해?”

 

오빠한테 보내는 편지 쓰고 있어! 마침 잘 왔다, 나 제대로 썼는지 봐줄래?”

 

, 나도 철자법은 잘... , 데샹! 이것 좀 봐줄 수 있어?”

 

미쉘은 지나치려던 데샹의 가운을 잡았다.

 

나 바빠.”

 

잠깐이면 돼.”

 

까미유는 미쉘을 내려다보다가 미아가 쓰는 편지를 받아 철자를 고쳐 주었다.

 

여기서 ai가 아니고 y, 여기도... 여기는...”

 

그 때 문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바빠, 너 바빠, 서로 바쁜 사람인데 불러놓고 한가하게 굴기는.”

 

잠깐이면 돼.”

 

내가 너한테 내줄 수 있는 시간은 30분까지야.”

 

문가 그늘에 몸을 숨긴 채 탄야는 마치 유치원 선생님 같다고 킥킥 웃었다.

 

낮고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분명 기분이 좋아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까미유는 마저 여기, 여기라고 급하게 짚어준 뒤 저만치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웃기지, 그 애는 더 이상 편지를 받아 볼 상태가 아닌데 여동생이 열심히 편지를 쓰고 있다니까.”

 

까미유는 책상 너머에서 서랍을 열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일 얘기나 할까?”

 

만인의 자상한 의사 선생님, 까미유 데샹이 감동받아 손수 편지를 봐줄 만큼.”

 

네가 의뢰한 건 이미 했어. 그 애 오빠를 죽지 못하게, 그러나 살지도 않게. 그러니까 네가 맡은 일을 할 차례잖아?”

 

까미유가 아무렇지 않게 평소의 매끄러운 목소리로 점잔을 빼며 탄야 앞으로 종이를 내밀자 탄야는 후후 웃더니 갑자기 힘을 주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책상이 덜컹였고 탄야의 주위에서는 눈에 보일 정도의 어두운 보라색 독기가 물결을 이루어 위협적으로 물씬 피어올랐다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까불지 마, 긴 경고는 필요없겠지.”

 

흐름을 바꿀 힘을 찾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비용에 대비해서 결과 산출이 나쁠까봐 쓰지 않는 방법일 뿐이지.”

 

그래, 네가 너의 그 작은 친구를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까미유의 입매가 불쾌하다는 듯 끝이 내려갔다.

 

네 충직한 친구가 날 찾아왔었지, 불과 며칠 전에 말이야.”

 

그건 그냥 내 불량품 중 하나에 불과해.”

 

나한테 딱 한 마디 하더군. ‘물러서라고.”

 

내 알 바 아냐.”

 

탄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내가 기른 어둠의 능력자 군대를 써서 널 괴롭히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야.”

 

저 말은 협박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었다.

 

그것은 까미유의 눈에 꽤나 명백했다.

 

그리고 능력자들이 괴롭힐 대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탄야는 까미유가 내민 종이를 받아서는 부채라도 되는 것처럼 제 입가에 대고 웃었다.

 

난 항상 그렇게 충직한 도베르만이 갖고 싶었어. 어린것들보다야 물들이는 것이 힘들겠지만... 여유를 갖고 천천히, 느긋하게 한다면... 후후후.”

 

“...할 일부터 빨리 하는게 어떨까, 시뇨라?”

 

그래, 이만 가볼게.”

 

탄야는 소리없이 문을 열고는 한 발을 밖으로 뺐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애를 잘 보살펴 두라고. 이래봬도 꽤나 아끼고 있거든.”

 

흘끗, 시선이 밖에서 편지에 꽃이며 나비를 그려넣는 소녀에게 닿았다.

 

그리고 네 강아지 말인데, 교육을 좀 시켜놓는게 쓰기 편할거야.”

 

히카르도를 사용할 일은 없어.”

 

어떨까.”

 

디딘 곳마다 검게 반짝이는 보라색 액체가 머물렀다가 이내 수증기로 변하여 사라졌다.

 

까미유는 눈가에 걸친 색유리 너머로 여유롭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빅터이글] 그 사람을 떠올리는

2016. 1. 26. 02:35 | Posted by 호랑이!!!

빅터의 키가 컸다.

 

처음에 보았을 때보다 적어도 몇 피트는 더 커서 이젠 이글이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였다.

 

머리는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듯 짧게 잘라 뒤로 넘기고 공성전의 상처가 뺨에 남아서 마치 누군가를 연상케 한다.

 

빅터는 러닝셔츠에 겉옷 하나만 걸친 그 큰 몸을 카페테리아의 야외 테이블의 작은 의자에 구겨앉아서는 어릴 적에는 써서 싫다는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글은 새삼 어릴 적의 얼굴을 그의 위에 겹쳐 보다가 가느다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식사는 하고 다녀? 좀 마른 것 같은데.”

 

그러는 형은 담배까지 피면서. 몇 파운드는 빠진 것 같아.”

 

피자라도 시켜 줄까?”

 

됐어.”

 

이글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는 길게 연기를 뱉었다.

 

빅터는 그 연기들이 제 가까이로 오지 못하게 하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

 

눈동자를 굴려 이글의 혓바닥이 사탕 막대라도 물듯 가는 막대를 감싸 입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콜록, 콜록!”

 

보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리다가 사례가 들리자 이글이 깔깔 웃었다.

 

그래, 이럴 때 난 네가 귀엽더라고.”

 

이글은 빅터의 손에서 빈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귀여운 거겠지.”

 

내가 연상시키는 누군가.

 

빅터가 노려보자, 이글은 배실배실 웃음을 띄웠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래, 그 표정도야.”

 

“...”

 

이글은 커피자욱이 남은 빅터의 옷을 잡아당겼다.

 

내 집에 가서 세탁할까? 더러워졌는데.”

 

빅터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인상을 쓰자 이글은 샐쭉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껐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 쪽으로 걷다가 이글은 그를 툭 쳤다.

 

벌써 몇 년이나 되었는데 포기 못 했어?”

 

아직 몇 년밖에 안된거야.”

 

이글은 그 답에 다시 깔깔 웃으며 길쭉하고 가느다란 새 담배를 꺼내물었다.

 

 

사람의 마음에 음악이 있다면.

 

이미 마틴, 그에게는 사람의 마음이 들리지만.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멜로디가 울리고 나이를 먹고 경험이 짙어질수록 다채로운 소리가 들린다.

 

공성전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만난 안타리우스의 사람들은 무언가 음악이 흐르는 것 같긴 했지만 그들의 소리 위에는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위를 덮고 있었다.

 

그 다음 만난 것은 하얗고 검은 가면을 쓴 안타리우스의 사신이었는데 그는 말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면 뒤는 조화롭지 못한 소리로 시끄러웠다.

 

시끄러운 안타리우스라.

 

안녕하세요, 아이작.”

 

뭐냐, .”

 

재단의 마틴 챌피라고 해요.”

 

왜 건거지, 말을?”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니예요.”

 

특이하게도,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그가 선호하는 곳은 조용한 곳이었다.

 

잔디밭의 나무 그늘 아래, 개울의 옆, 운행 전후의 기차역 같은 곳.

 

처음 몇 번은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멀리 던져질 뻔 했지만 몇 번 마주치고 나니 포기가 빠른건지, 그는 더 이상 던지려고 들지 않았다.

 

오늘은 만나곤 하는 장소에 마틴이 먼저 와 있었다.

 

저녁볕이 따스하게 내리는 잔디의 커다란 나무에 등을 대고 앉으니 머리 위에서 나뭇잎이 천천히 흔들려 떨어지는 것이 보였고, 한가로운 마음에 손을 뻗어 잡는 즈음에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쨍그랑 수런수런 째깍째깍 찰칵찰칵 지잉지잉.

 

부서지는 소리, 사람 웅성이는 소리, 톱니바퀴 맞물리는 소리와 기계가 돌아가고 잘리고 무엇인가가 자라는 소리.

 

한 사람 안에서 들리는 것 치고는 두서없고 무질서하게 들려온다.

 

오셨어요?”

 

기분 나빠, 네녀석.”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이야, 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제게서 한 걸음쯤 떨어진 자리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중에 제일 가까운 자리다.

 

이것이 바로 길들인다는 느낌일까.

 

누군가의 호감을 사고 경계를 낮추는 일은 지금까지도 셀 수 없이 해온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상대가 상대라서일까, 각별했다.

 

그러고 보니 안타리우스의 제키엘씨도 별 문제 없이 마음의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제키엘씨는 사도이고 교주라고도 불리는 것 같던데 아이작씨도 사도나 교주나... 그런 급인가요?”

 

관심없어, 그런 건.”

 

안타리우스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아이작이 신경을 쓰는 것인지 그 이미지는 금세 검은색으로 덧칠되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지만 마틴은 거기에서 이것저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첫 번째, 확실한 것은 제키엘보다는 입지가 좁아도 한참이나 좁다는 것.

 

두 번째, 안타리우스가 시키는대로 일은 하지만 자유도가 높아서 어쩌면 껄끄럽게 여겨질 지도 모른다...는 건 추측이 많이 섞인 말이지만.

 

걱정된다고 말하면 마음을 읽는다고 기분 나빠 하겠지.

 

그쯤이야 능력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까, 생일이 언제라고 하셨죠?”

 

알려준 적 없어.”

 

그럼... 다음번에는 언제 쉬세요? 머리끈이 남는데 오늘은 가져오지 않아서요.”

 

재단의 긴머리 꼬맹이한테 주고 남은거냐.

 

“...몰라, 다음주면 시간이 날 지도.”

 

바쁘시네요.”

 

일할 게 있으니 돌아오라고 하더군.”

 

속으로 질색하는 것이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다음 목요일 즈음에, 공성 마치고 여기에서 볼까요.”

 

시간이 된다면 말이지.”

 

그의 가면 너머는 항상 소란스러웠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싶을 정도로.

 

그러나 이번만은 자신이 능력이 없더라도 그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봐요.”

 

그리고 저, 한 번도 하랑한테 머리끈을 선물해준 적은 없어요.

 

그렇게 덧붙이자 가면을 쓴 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헤어졌고, 만나기로 한 다음 주 목요일에 다시 그 자리로 갔지만 아이작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하여 밖으로 나돌았지만 다시 만난 것은 그 다음번의 공성전에서였다.

 

아이작.”

 

그러자 앞을 보던 눈동자가 굴러 자신을 쳐다보았다.

 

반가움에 남들에게는 억지로 짓는 미소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마치고 저 좀 봐요.”

 

잔디밭, 나무 그늘 아래에서.

 

머리끈, 검은색 질 좋은 실로 엮은 것을 건네주고.

 

어쩌면 오늘은 바로 곁에 앉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면 같이 하자고 할지도 모르고.

 

가까이 오지 마.”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뭐라구요?”

 

그는 몸을 돌려서 저 앞의 상황을 살피러 갔다.

 

이상해.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점을 꼽으려 그의 등을 쳐다보다가 문득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다른 안타리우스들은 자신들이 내는 소리 위에 전파의 잡음이 강하게 덧씌워져 있었다.

 

제키엘과 아이작의 소리 위에는 그러한 잡음이 없었다.

 

없었는데.

 

아이작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침묵.

 

여태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의 침묵이 그의 마음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B-hunt 엔리코 다 라벨] 새 애완 인간

2016. 1. 24. 01:07 | Posted by 호랑이!!!

옴브레.”

 

엔리코는 제가 손수 만든 침대 위에 앉아있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침대는 다리를 반틈 잘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낮아서 무릎을 꿇어 앉으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 새로 잡아온 사람.

 

짧고 산뜻하게 자른 빨간 머리카락에 끝이 고양이의 것처럼 올라간 검은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 사납게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엔리코의 금갈색 머리카락은 태양 같고 파란색이 섞인 진한 초록색 눈은 끄트머리가 처져 순수하고 순한 모습처럼 보였다.

 

긴 머리를 묶어낸 엔리코는 그의 뺨을 만지다가 손톱을 세워 긁었다.

 

옴브레, 대답.”

 

“...”

 

이 인간을 잡아온 것은 벌써 한 달쯤 지났다.

 

지하실에 인간을 잡아와 기르는 것은 수십년째 반복되는 일이지만 최소한의 생필품 외에 물건이 더 들어온 것은 처음이다.

 

원래 있던 물건들은 옷, 신발, 책상 위에 놓인 동화책 몇 권, 한구석에 둔 게임기와 물주전자 정도였는데 어느샌가 이 지하실에 물건이 늘어나고 있었다.

 

저 방의 구석자리에는 목검이 생겼고 요리와 책만 놔두기에는 너무 넓었던 수제 식탁에는 체스판이 놓였다.

 

“...뭐 어때, 그보다 이것 봐. 오늘 널 위해 가져온 거야.”

 

엔리코가 꺼내든 것은 가장자리가 닳아 낡은 감이 있었지만 꽤나 소중하게 보관을 잘 한 검은 가죽 목걸이였다.

 

목걸이는 목에 딱 달라붙는 쵸커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작은 십자 오팔이 박혀 있었다.

 

걸어 줄게.”

 

그 사람은 슬슬 반항을 포기하게 되었고 엔리코는 뒤로 돌아가 다정스러운 손짓으로 그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조였다.

 

너무 조이지 않는 적당한 길이로 조이고는 앞으로 돌아와 감상이라도 하듯 위 아래로 훑어보고는 정말 기쁘다는 듯 활짝 웃었다.

 

좋아, 마음에 드네.”

 

 

스카이림 7회차 기록일기 리사 5

2016. 1. 22. 04:42 | Posted by 호랑이!!!

어머니께. 늑대인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께, 어느 날 화이트런으로 돌아오다가 망가진 마차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키 작은 노드를 보았습니다. 본인을 가리켜 시세로라고 불렀고 어머님을 모셔간다고 말하던데 이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윈드헬름으로 갔습니다. 조만간 제국군과 스톰클락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제가 윈드헬름으로 간 것은 말을 전하러 간 것인데 화이트런 영주가 전쟁 의사를 표명한 것을 전하러 갔습니다. 아무래도 노드들 골치아픈 일에 휘말린 것 같네요. 그리고 윈드헬름으로 간 김에 전에 부탁받은 일을 하러 갔습니다. 아벤투스 아레티노라는 아이에게 찾아가 봐 달라는 내용의 부탁이었는데, 그 아이의 사정이 딱합니다. 아이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가족 중에 혼자밖에 남지 않았는데 고아원으로 (끌려) 갔더니 그 곳 원장이란 사람이 아주 돼먹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망쳐 나와 집으로 돌아와서는 암살자 집단인 다크 브라더 후드 사람을 부르는 의식을 하는데... 제가 찾아간 밤에도 아이는 의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렐로드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더군요. 그렇게 부탁하고 아렌티노는 집 구석의 의자로 가 앉았는데 집의 마룻바닥은 꺼지고 벽난로에는 불이 켜지지 않고, 무너져가는 어두운 집 안에 아이가 혼자 앉아있는 것을 보았더니 짠합니다. 조만간 그렐로드를 죽이고 아이에게 즐거운 소식을 전해줄까 합니다.

 

유르겐 윈드콜러의 나팔을 찾았습니다. 델피네라는 아가씨가 용이 묻힌 곳으로 가자면서 데려갔는데, 거기에서 거대한 용이 다른 용을 부활시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전에 사형당할 뻔한 날의 얘기를 했었지요. 그 때 저의 사형을 방해한 용은 알두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알두인은 샬록니르라는 용의 무덤에 용언을 내려 용을 부활시켰습니다. 움푹하게 파인 둥근 곳에서 뼈만 남은 용이 어적어적 기어나오고 알두인의 용언에 서서히 살이 붙고 근육이 붙고 비늘이 생겨나 다시 살아났습니다. 도로 죽였지만요. 굉장히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어머니께 영상으로 보여 드리고 싶네요.

 

사랑하는, 리사

 




[하이큐/쿠로츠키] 성격 나쁨

2016. 1. 17. 23:45 | Posted by 호랑이!!!

“무슨 일이야?”

 

“매일같이 보러 오라고 문자 한 것은 그냥 해 본 소리였나요?”

 

오늘도 삐뚜름하네.

 

쿠로오가 웃었다.

 

오늘은 모처럼의 훈련 없는 주말이고 카라스노도 그 날 휴일이라고 들었다.

 

어쨌거나 문자라면 매일(일과를 마친 후 11:00~12:00) 하고 있으니까.

 

내가 찾아갈까 네가 찾아갈까 말은 자주 했었고 평소에는 쿠로오가 부활동이 없는 날 찾아가곤 했는데 츠키시마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츳키~가 와준 것은 처음이잖아. 기뻐서 그래.”

 

쿠로오는 히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웃음 기분 나빠요.”

 

츠키시마는 팩 고개를 돌렸고 쿠로오는 어딘가 열오른 그 뺨을 쿡 찔렀다.

 

“오는 길에 더웠지? 찬 거 먹으러 가자.”

 

“근처 명물이라도 맛보여주는 건가요?”

 

“그, 잠깐만.”

 

쿠로오는 냉큼 핸드폰을 켰다.

 

켄마? 나 쿠로인데 이 근처에 괜찮은 가게가-

 

라고 문자를 보내는데, 츠키시마가 그의 팔을 잡았다.

 

“맥도날드로도 충분해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멀리까지 와 줬는데.”

 

쿠로오는 이쪽이라며 앞장서 걸어갔다.

 

깨끗한 내부에 시원한 에어컨과 사람들이 북적여서 어쩔 수 없는 소란스러움.

 

가지각색 음식이 기재된 메뉴판과 저 멀리에 보이는 많은 음료수병.

 

“패밀리 레스토랑이잖아요.”

 

“쿠로오씨 매일 학교랑 부활이랑 집만 왔다갔다해서 맛있는 가게 하나도 모른답니다. 그러니까 봐줘.”

 

덩치도 큰 사람이 뺨을 테이블에 붙이고 귀여운 척 올려다 보는 것에, 츠키시마는 부러 인상을 찌푸렸다.

 

“귀여운 척은.”

 

“그래도 방금은 귀엽다고 생각했지?”

 

츠키시마는 인상을 팩 썼다.

 

“전혀요!”

 

솔직하지 못하긴, 다 보인다니까.

 

쿠로오는 히죽히죽 웃었다.

 

처음은 패밀리 레스토랑, 영화도 보고 길거리에 나온 노점상에서 가방에 매달 수 있는 스트랩도 샀다.

 

츠키시마가 남자 고등학생이 무슨 커플 스트랩이냐면서 툴툴대다가도 역시나 마음에 들었는지 하나 더 사서 주머니에 넣는 모습에 쿠로오는 웃음이 나왔다.

 

“자고 갈래?”

 

“사양할게요, 낼모레 쪽지 시험이 있어서.”

 

역으로 데려다 주겠다며, 쿠로오가 따라갔다.

 

평소라면 혼자 갈 수 있어요, 라면서 찡그렸을 테지만 왠지 오늘은 고마워요 하면서 허가해주기도 했고, 쿠로오의 기분은 꽤나 좋았다.

 

마지막 기차 시간에 맞춰서 역으로 가서 표를 끊고 벤치에 앉아있다가 츠키시마한테 헤실거린다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말로,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여기까지도 와 주고, 어울려도 주고.”

 

기쁘네~ 라고 했더니 쑥스러운 지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여서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짐을 챙기거나 하여 분주한 틈을 타 짧지만 꼭 끌어안기도 하고.

 

그러다 기차에 타기 직전, 츠키시마가 작게 속삭였다.

 

“...야마구치가, 찾아가라고 해서.”

 

“...뭐?”

 

츠키시마는 기차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고 쿠로오도 뒤따라 들어갔다.

 

“다른 남자가 나한테 가랬다고 지금까지 오지 않다가 바로 온 거야?”

 

“다른 남자라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잖아요.”

 

“말 돌리지 말고.”

 

“그보다 곧 문 닫길 텐데, 빨리 나가는 편이 좋잖아요?”

 

그 말에 쿠로오는 문 쪽을 보았다가 잠깐만요!를 외치며 서둘러 내려서는 창가 자리의 츠키시마가 보이는 곳 까지 달려갔다.

 

벌써부터 츠키시마의 핸드폰에는 메시지가 왔다며 불이 반짝반짝 쉴새없이 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츠키시마는 보란 듯이 헤드폰을 끼고 창 너머의 쿠로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야, 츳키!”

 

역이 멀어지면서 창문의 바깥은 어둑해졌다.

 

창 밖으로 쿠로오의 모습이 보이는 대신 츠키시마 그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놀랍게도, 웃고 있다.

 

‘야마구치가 들으면 성격 나쁘다고 또 한 마디 들을지도 모르지만’

 

쿠로오씨가 질투해 주는 것은 꽤나 기쁘네.

 

 

[벨루벨] 벨져 생일 축하해

2016. 1. 12. 02:45 | Posted by 호랑이!!!

좋아, 잘했어! 믿음직스럽군!”

 

그 말에 벨져는 루이스를 흘끗 돌아보았다.

 

공성을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벨져는 루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잘했다, 믿음직스럽다니.”

 

그게 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덕분에 살았어요같은 소리를 하던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새삼스러워서 그렇다.”

 

“...그게 얼마나 옛날 일인데.”

 

루이스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렇게 오래지도 않았다.”

 

그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다, 루이스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지?”

 

우리가 이런 말을 나눌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이 뒤에 시간 있어?”

 

왜인지 들어보고 결정하지.”

 

그러자 루이스는 잠시 어물거리다가 옷의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냈다.

 

일전에 받은 티켓인데-”

 

안 간다.”

 

“-네가 오늘 생일이라는 말을 들어서, 괜찮다면 써 줄래?”

 

벨져는 성가시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티켓을 쳐다보다가 티켓 대신 루이스의 팔을 잡았다.

 

앞장서라.”

 

?”

 

내 생일 때문이라고 말한 건 너잖나.”

 

, 그건 그렇지만.

 

우리 너무 진도 빨라...!”

 

그러나 그 말은 무시당했다.

 

새로 개업한 레스토랑의 내부 구조는 말끔했고 꽤나 현대적이었다.

 

벨져라면 좀 더 고풍스러운 쪽을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티켓을 제시하자 이어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요리들도 클래식과는 거리가 멀군.

 

루이스는 맛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맛이 어때?”

 

건넛자리의 벨져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말 그대로 우아한 모습으로 애피타이저를 맛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요즘 먹던 것보다는 월등히 좋군.”

 

놀랍네. 항상 훨씬 좋은 걸 먹고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많아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 미국인처럼 빵 사이에 고기나 야채를 끼워 일을 하며 먹거나, 그조차 준비할 시간이 없으면 건량을 씹으면서 지냈지.”

 

오늘은?”

 

생일이라 억지로 쉬는 시간을 만들었지.”

 

의외로 대화는 부드럽게 풀려 나갔다.

 

메인을 돌려보내고 커피와 디저트가 나왔다.

 

과일을 얹은 달지 않은 케이크 조각을 잘라내다가 루이스는 아까부터 신경쓰이던 것을 물었다.

 

대화가 잘 되네.”

 

그런 말을 들을 줄도 몰랐군.”

 

난 네가 날 싫어할 줄 알았어.”

 

? 네가 날 이긴 전적이 있기 때문에?”

 

루이스는 슬그머니 눈길을 아래로 내렸고 벨져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루이스가 아무 말도 없자, 벨져는 짧게 웃었다.

 

그런 것을 신경쓰고 있었던 거냐.”

 

벨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믿음직스럽군!이라고 외치게 된 녀석이.”

 

그거 놀리는 거지?”

 

놀리는 거다.”

 

그러자 루이스가 부루퉁한 목소리를 내었다.

 

디저트 접시까지 비우고 일어날 차비를 하며 벨져는 툭 뱉듯 말했다.

 

축하 고맙다 루이스.”

 

“...별 말씀을.”

 

이 뒤의 찻집은 내가 내도록 하지.”

 

 

생일 축하한다 어린 신도여.”

 

어둑하게 빛이 새어들어오는 공간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희뿌옇게 안이 비치는 곳은 푸르스름한 색을 띄고 있었다.

 

첫 번째 사람은 마악 방으로 들어선 사람으로 검은 후드 아래로 보이는 입술은 머리카락과 같은 색, 얼핏 푸른색으로도 보이는 녹색이었다.

 

그는 한 손에 작은 케이크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은 뒤로 빼어 무언가 큰 것을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그의 말에도 대답 없이 바닥에 앉아있던 사람은 어딘가 눈에 초점이 없어 보였다.

 

연한 빛 아래에서도 결 좋은 머리카락은 후드 아래에서도 흰 색으로 빛을 반사하고 그의 입술에는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흰 색이 어딘가 금속빛을 내며 칠해져 있었다.

 

자아, 선물이다 벨져 홀든. 이 내가 손수 축하하는 것이니 감격해도 좋다!”

 

케이크가 그의 앞에 놓였으나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할 수 없겠지만! 크크크크큭.”

 

첫 번째 남자, 제키엘은 뒤로 빼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상처가 난 사람이 발목이 잡혀 거꾸로 들려 내밀어졌다.

 

어때, 이건 기억나나?”

 

“...나지 않는다.”

 

갈색 머리카락에 한쪽 팔을 덮을 정도로 가득한 손목시계.

 

코트와 청바지와 하얀 티셔츠.

 

아마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은 덧칠되기라도 한 듯 떠올리려고 애써도 검은 물 같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더 애써봐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가? 가령 어떤 말을 자주 했다던가, 표정이라던가, 특정 행동을 많이 했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웃음을 참는 것이 힘들어졌는지 말 중간중간에 웃음을 참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때로는 웃음 약간이 섞여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것에조차 아무런 감정의 표현을 보이지 않는 채, 벨져는 제 눈 앞에 거꾸로 매달려 흔들리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 흔히 말하는 순해 보인다는 인상일 것 같음.

 

만져 보려 손을 뻗었지만 제지당했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뿐이라 고개를 저었다.

 

...잠깐, 순간 검은 물 위로 기억 덩어리가 얼핏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어쩌면 초록색 눈일지도 모르겠다.

 

흔히 말하는 초록색이란 차가운 색 계열이지만 어쩌면 이 사람의 눈은 따뜻한 초록색일지도.

 

“...초록색.”

 

제키엘은 제 아래 앉은 그를 내려다보다가 쥐어든 발목을 놓았다.

 

철벅 소리를 내며 사람의 형상은 무너졌고 하얀색 크림으로 덮인 케이크 위로 체액이 튀어 자국을 남겼다.

 

아직 갈 길이 남았구나. 그러나 걱정마라, 그리 길지는 않을 테니.”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는 오싹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네가 완전히 다시 태어날 날도 멀지 않았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