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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6(편지)] 까미유

2016. 9. 18.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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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유니언의 홀든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

 

무슨 일인데, 대디?’

 

그냥... 그냥 골치가 아파

 

그런 대화를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은 빅터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라도 유니언의 홀든을 만나면,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말고 도망쳐

 

...라고.

 

그리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빅터는 생각했다.

 

 

 

 

 

 

 

 

불과 일주일 전, 빅터는 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집이라고 해 봐야 부엌, 화장실, 거실이 딸려있는 아주 작은 아파트지만.

 

집안은 호화스럽지 않다, 로는 모자랄 만큼 초라했다.

 

있는 거라고는 침대(베개 하나. 얇은 이불 하나. 작음)에 식탁조차 없고 소파는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파란색 천을 씌운 소파가 있고 무언가 커다란 쿠션이 있다.

 

가전제품이야 으레 있을 텔레비전(, 이건 좀 컸다), 그 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고.

 

굳이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더럽다. 매우. 굉장히. -.

 

어질러진 정도라면 말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이며 바닥이나 소파에 어질러진 옷에는 머리카락에, 먼지에, 동물이라도 있었던 건지 뭔가 하얀 털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마신 음료수병에, 과자 봉지에, 그런 것들이 구겨지거나 접혀서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방에 대한 이야기는 둘째치더라도, 이 집의 주인이라는 이글 홀든은 빅터에게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머리가 좋다는 사람이 내 몸에 수갑 하나도 안 채우냐

 

빅터가 배달 당한날 이글은 이 어질러진 집에서 소파 등받이와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시간은 마악 오후가 된 참인데 창문의 커튼이라는 커튼은 다 치고.

 

적대 조직에 잡혀서 납치된 몸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빅터의 긴장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솔직하게 빅터의 첫 감상을 말해 보자.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폐인인가

 

...였다.

 

익숙한 일인지 빅터를 데려온 그 사람은 이글을 깨워서 네가 좀 맡으라고 이야기를 했었고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애첩이라는 말에 빅터를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싫어, 차라리 토미나 다른 녀석들한테 보내

 

바쁘다

 

아 싫다고

 

라면서 이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어린애가 있으면 야동을 볼 수 없단 말이야

 

하마터면 난 다 컸다고!’라고 말할 뻔 했었다.

 

문은 바깥에서 잠겼고 이글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빅터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빅터도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나보고 지금 어린애를 돌보라는 거야?’라고 했던 사람들.

 

그래서 빅터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으레 했던 짓을 하였다.

 

누워있는 위에 올라타는 것.

 

굳이 웃지 않아도 색기어린 표정은 흉내 낼 수 있었고 상대가 그럴 기분이 아니더라도 벗겨놓으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익숙한 일이었다.

 

익숙해진 일이었고.

 

빅터는 이 일에 대해 꽤나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가 좋다 어떻다 하는 사람들이더라도 잠자리를 하면 그만큼 보상을 주기도 했었으니.

 

그게 가장자리가 탄 빵조각 하나라던가, 공책이나 펜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글은 빅터가 올라타서 셔츠 단추에 손을 대기도 전에 달랑 들더니, 이불과 베개만 놓여있는 침대에다 내려놓았다.

 

애는 그거 써.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애 아니거든!이라는 말이 또 나올 뻔 했다.

 

하지만 빅터는 정말 그 말을 입에서 내기보다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침대 더러워! 냄새 나!”

 

어쩔 수 없어, 다른 이불들은 다 버렸거든.”

 

이글은 하품을 하고 다시 소파 위에서 기지개를 켰다.

 

빅터는 그걸 기가 막힌 듯 보다가 침대 위의 먼지를 전부 털고, 쳐내고, 쓸었다.

 

그리고 그 이후 화장실에 갈 때와 씻을 때 외에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

 

빅터는 이글이 준 동화책을 들었다.

 

왜 하필 동화책이야! 싶었으나 저쪽이 이쪽을 만만하게 보면 볼수록 자기한테 유리하다...는 말을 애써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동화책을 펼쳐 고개를 푹 파묻고, 빅터는 생각에 빠졌다.

 

저쪽을 무력화한 다음에 도망칠까?

 

빅터는 책을 내리고 창문을 보았다.

 

오늘도 커튼이 쳐져 있긴 하지만 여기는 꽤 높았다.

 

청소할 때 보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적어도 5층 이상의 건물이겠지.

 

높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만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여지껏 숨겨두었던 능력에 대한 일이다.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장의 수라고 생각하고 숨겨두었는데...

 

...도망치지 말까?

 

기껏해야 자신은 대디의 밤 시중 상대 같은 것이고, 그렇게만 알고 있을 터이니까.

 

어쩌면 별 거 아닌 정보로 자신을 놓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은 대디랑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대디는 구하러 올까?’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쩌면

 

아주 만약에, 라는 확률 만큼이지만.

 

그래도 아는 것이 있으니까, 구하러 오지 않을까.

 

빅터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글자 못 읽어?”

 

그거 때문에 한숨 쉰 거 아니거든.”

 

빅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대디가 구하러 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방구석을 조금이라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바꾸어 보자!

 

 

 

 

 

 

 

 

 

이글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그 날 저녁이었다.

 

방청소를 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낮잠도 좀 자고 눈을 떴더니 이글이 중국 음식을 배달시켰다며 깨웠다.

 

중국 음식이라니.

 

그야 무난한 음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야 하지만.

 

빅터는 소파 앞에 이글이 음식을 늘어놓은 앞으로 왔다.

 

같이 먹자며 부르긴 했으나 빅터가 음식 앞에 앉을 즈음 이글은 이미 이것저것 음식 통을 열어놓고 익숙하게 젓가락을 써서 먹고 있었다.

 

빅터는 이글의 먼 쪽에 앉아 면을 야채와 볶은 요리가 담긴 네모난 종이 박스를 하나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힐끗 이글을 보았는데,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빅터가 모르는 영화로-아니,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이따끔 어두운 방 안에서 번쩍 번쩍하는 빛이 얼굴에 닿아 눈이 부시게 했다.

 

우적우적 면만 젓가락에 감아 먹는데 이글이 먼저 말을 붙여 왔다.

 

젓가락질 잘 하네? 포크 줄까 했는데.”

 

“...예전에,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 해서.”

 

네가?”

 

그건 또 무슨 의미야? 하고 눈을 팩 치켜뜨려 했는데, 그 대신 빅터는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왜 아무것도 안 해?”

 

, 덮치는 거?”

 

그런 거 말고!”

 

,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빅터는 면이 담긴 종이 상자를 꽉 잡았다.

 

“...수갑을 채운다던가, ... 때린다던가, 알고 있는 걸 불어! 같은... .”

 

.”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나를 왜 맡았어?”

 

이글은 만둣국이 담긴 플라스틱 통을 가져갔다.

 

커다란 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에 넣고는 몇 번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젓가락으로 빅터를 가리켰다.

 

난 딱히 너 맡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왕 온 거, 며칠 맡으면 돈을 많이 준다기에 그냥 그러겠다고 했지 뭐.

 

그렇게 말하고 이글은 씨익 웃었다.

 

기가 막혀.

 

빅터는 이글이 내밀어준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따 안에 든 것을 마셨다.

 

 

 

 

 

 

 

 

 

다음날 오후, 빅터는 책을 전부 읽었다.

 

부엌을 청소했고 싱크대며 냉장고 안까지 전부 구석구석 치웠다.

 

나온 쓰레기는 귀찮아하면서도 이글이 버렸고 빅터는 뒤에서 감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빅터는 책을 두 번째로 다 읽었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벌써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졌다.

 

평소에는 뭘 했더라.

 

평소에는 읽을 책이 잔뜩 있었고 심심하면 자신의 집이지만 구경했었지.

 

때로는 대디의 취향에 맞게 영화를 보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도 했었고 가끔은 커다란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다.

 

아주 가끔은, 읽는 법이나 쓰는 법, 숫자에 대해 혼자 공부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여기는 무엇이든 풍족하던 빅터의 집이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좁고 삭막한 방 한 칸과 어린이용 동화책 한 권, 그리고 텔레비전 뿐.

 

, 그리고 저기 저 남자 하나도.

 

빅터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글이 이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배고파?”

 

심심해.”

 

그래?”

 

이글은 소파 앞에 앉아 있었다.

 

빅터는 도무지 그가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평소에는 허리가 부러진 마냥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서 앉으면 밥 먹을 거라고 그 앞 깔개에 앉아있던가 텔레비전하고 연결해서 하는 게임을 하는 때이다.

 

지금처럼.

 

너도 이거 하자.”

 

게임?”

 

애들은 게임 좋아하잖아.”

 

아무튼 한 마디가 많다.

 

이글은 빅터가 저만치에 앉은 것을 질질 끌어다가 자기 옆에 두었다.

 

이건 게임 패드라는 거야.”

 

알아.”

 

어린애 같을까봐 사달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 수많은 물건 중의 하나다.

 

이글이 넘겨준 패드를 받고 화면을 보니 조그만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작법은 간단했고, 빅터는 금세 게임에 빠져들었다.

 

이글은 다른 게임패드를 꺼냈고 한동안 둘 사이에서는 거기서 왼쪽, 오른쪽, 아이템 가져가, 그런 이야기만 오갔다.

 

 

 

 

 

 

 

 

 

 

 

정말이지 나태한 나날이다.

 

자고, 먹고, 게임을 하고.

 

그 후로 며칠 안 가서 빅터는 시끄러운 통화 소리에 느지막하게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이 멍청아,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이글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기에서 귀를 떼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쳤다.

 

깼어?’

 

이글이 입을 벙긋거렸다.

 

잠깐만, 이라고 손가락을 하나 들고는 이글이 씩 웃고 다시 통화로 돌아갔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그 기다려 달라는 말을 지금 며칠째 하고 있는지 알아!]

 

메찔째 하고 있눈지 아라~ 이글은 입술을 비쭉 내밀고 흉내를 냈다.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그래서 빅터는 고개를 돌리고 동화책을 펼쳐 책을 읽는 척 했다.

 

갑자기 통화 소리가 작아졌다.

 

한동안 전화를 받더니, 이글은 또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동안 이글이 빅터에게 건넨 말은 딱 한마디였다.

 

샌드위치 좋아해?”

 

냉장고 안에는 오래 둔 것 같은 감자와 당근, 계란, 치즈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걸 냉장고에 넣어두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빅터는 놀랍다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고 이글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사둔 건 아니고, 우리 형 취미가 날 먹이는 거거든.”

 

? 무슨 형?”

 

큰형.”

 

보스?”

 

아니, 진짜 형.”

 

그러니까, 진짜 친형 말이야?”

 

그래, 진짜 친형.”

 

형이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하던데...

 

이글은 감자를 씻어 껍질을 자르고 냄비에 물을 받아 끓는 안에 집어넣었다.

 

도마 위에서 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빅터였다.

 

가족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을 하지?”

 

그건 비밀.”

 

너도 엄마가 버리고 갔어?”

 

아니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감자는 삶아서 샐러드로 만든 다음 빵 사이에 소스나 다른 것들과 함께 끼웠다.

 

빅터는 욕심을 내어 햄을 두 장 끼웠고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대디는 너한테 얼마나 자주 와?”

 

이제 심문하는 거야?”

 

수갑이라도 채워주고 시작할까?”

 

밥 먹으면서 해도 돼?”

 

아마도 되지 않을까?”

 

이글은 반으로 접은 샌드위치 한 쪽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자주 와. 일주일에 세 번, 많으면 네 번도.”

 

자주 온다고 생각해?”

 

자주 온다고 생각해.”

 

빅터는 컵에 담긴 우유를 마셨다.

 

가장 최근에 준 선물은 뭐야?”

 

깃털 달린 레오파드 무늬 코트.”

 

마음에 들었어?”

 

.”

 

?”

 

다소 망설였지만, 빅터는 답을 주었다.

 

그걸 입으면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이거 정말 심문 맞아?”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하는 게임이랑 놋쇠 기병.”

 

만약에, 내가 지금 당장 나랑 떠나자고 한다면 나랑 같이 갈래?”

 

빅터는 다시 베어물려던 샌드위치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글은 심지어 이 쪽을 보지도 않고 다른 식빵에다 양상추를 한 장, 두 장 얹고 있었다.

 

떠보는 거야?”

 

.”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폭음에 빅터는 고개를 들었지만 이글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빵 위에 양상추를 쌓았다.

 

“...조금 늦었네.”

 

바깥에서 걸어 잠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빅터, 대디가 왔단다!”

 

이상하게도, 빅터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글은 한 손에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

 

이 좁은 방안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건가? 우습군! 빅터, 조금만 기다려라.”

 

.

 

방 안에서 폭음이 울렸다.

 

빅터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어 나야 할 비릿한 피 냄새나 둔탁하게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빨리 온 건 예상 외였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당당하게, 혹은 의기양양하게 들려야 할 말은 어쩐지 약이 올라 보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더니, 이글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대디가 총을 잘못 쏜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대디가 총을 쏘았다.

 

빅터는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를 쥔 이글의 손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아마도.

 

사실 빅터가 본 것은 번쩍 빛을 반사한 검날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저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대디와 이글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 틈을 타 빅터가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나부꼈다.

 

밖은 아직 밝았다.

 

하늘의 가장자리에 약간의 붉은 기가 돌 뿐.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 정도로.

 

대디.”

 

빅터는 이글을 잡았다.

 

지금까지 길러준 거, 잊지 않을게.”

 

바람이라는 능력을 꺼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늘을 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무거워...”

 

아까 떠날거냐고 물었을 때는 싫다더니.”

 

시끄러워.”

 

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어?

 

왜 너는 나를 데리고 뛰어내렸어?

 

왜 나에게 동화책을 줬어?

 

왜 너는 나한테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어?

 

왜 너는.

 

왜 나에게.

 

답 없는 질문을 수십 개나 던지다, 이글은 고개를 돌려 집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매달려서 이 쪽을 허망하게, 놀랍게 바라보고 있었고 꽤나 요란스러움에도 저 아래의 사람들은 이쪽을 보지 않아서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도망치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그런 상상은 이내 끝났다.

 

빅터가 아래로 뚝 떨어질 뻔 한 것이다.

 

놀랐어?”

 

당연히 놀라지! 나 죽거든?”

 

어느 정도 떨어진, 걸어오려면 꽤나 걸리는 높은 건물이 보였다.

 

진짜 무겁다.”

 

당연하지, 나 너보다 키가 이만큼이나 크다고.”

 

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만약에.”

 

?”

 

네가 일주일에 세 번, 네 번 찾아온다면.”

 

이글의 머리 위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떨어지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갑자기 첫날에 못 한 그거 생각난다.”

 

네가 올라탔던 그거, 막지 말 걸.

 

이글의 발이 난간에 올라섰다.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찾아온다면 말이야.”

 

이글은 쉽게 난간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자주, 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손가락은 닿지 않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글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아래로 향했다.

 

어느샌가 날은 어두워지고,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불과 몇 분 지났을 뿐인데.

 

총성으로 요란하던 주위는 간 데 없고 높다란 빌딩의 고층 건물에는 침묵만이 쌓인다.

 

 

홀든의 사람들은 나이가 차면 검을 받는다.

 

그 검은 지금까지 썼던 목검이나 가검, 혹은 날을 무디게 만든 예식용 검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홀든의 이름 아래에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글 홀든이 검을 받을 때 반대했다.

 

이글은 아직 사람의 목숨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이글은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한 젊은이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위의 두 형의 반응은 판이하게 갈라졌다.

 

다이무스는,

 

네가 그만한 무게를 보여주지 않아서다. 어른스럽게 굴어라

 

벨져는,

 

남들이 널 판단하게 하지 말고 네 손으로 선택해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글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벨져의 의견을 수용해서 한참 이글에게 검을 주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분분한 안으로 들어가서 대뜸 가장 무겁고 긴 검을 채어 나왔다.

 

왜 하필 가장 길고 무거운 검이었나.”

 

이글은 남들이 말하는 종류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신경써본 적 없었지만, 다이무스가 묻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너답군.”

 

그래서 다이무스가 짧게 뱉은 마지막 말에는 상처받았었나 보다.

 

아니, 상처 같은 거창한 것 말고, 그냥 한 대 맞은 정도

 

...라고 이글은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글이 방에 들어가서 본 것은 수많은 검이었다.

 

전부 홀든을 위해 만들어지는 고급품의 것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과 특기에 맞게 홈이 더 패어있다던가, 모양이 다르거나, 날이 셋 달리는 등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다.

 

가장 이글의 눈을 끈 것은 검집에 날개가 음각되어 가죽끈과 깃으로 장식된 화려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눈을 끈 것은 검신이 두텁고 무게감이 강한 짧은 검.

 

어쩌면 그것이 이글에게 더 잘 맞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글은 그 중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것을 집었다.

 

그는 절대로 벨져처럼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살 수 없었으니까.

 

그에게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빨리 어른이 되어 한 몫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옆에 나란히 서거나, 혹은 그 이상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길고 무거운 검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 검을 쉽게 잘 다룬다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처음에는 검이었던 것은 계속 바뀌었다.

 

형을 따라 영국으로 간다면, 다른 세력에서 나 자신을 증명한다면, 나 혼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처음에는 그저 잘 보이고 싶은, 이었다.

 

하지만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한 목표가 바뀔수록 마음 역시 바뀌어갔다.

 

 

 

 

 

 

어느 날 이글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본가로 가자.”

 

“...얼씨구, 그 말을 왜-애 벨져 형이 할까나...?”

 

벨져는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망나니 혼자 사는 것 치고는 말끔한 집이군.

 

덧붙여 집 안에서 셔츠는 고사하고 속옷이나 걸칠까 싶던 녀석은 의외로 당장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은 차림이었다.

 

집에서 네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축하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축하? 무슨 축하? 아버지... 하암, 승진이라도 하셨어? 아니면 어머니? 아니면 삼촌들이나 뭐 문하생이 어디 나가서 훈장이라도 따 왔대...?”

 

태평한 척 하품을 하는 저 머릿속에서는 아마 최근 신문이나 벨져 자신, 혹은 다이무스 형의 태도에서 본가와 관련된 무언가가 없나 팽팽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이무스 형인가? 그 형 요즘 외출하고 출장이 잦더라니.”

 

그래.”

 

, 축하는 축하고. 어차피 트와일라잇으로 돌아올 거 아냐. 난 됐어.”

 

벨져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글에게 어떤 말을 해야 데려갈 수 있을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훈장이라던가, 어디에서 공적을 세우거나 하는 시시한 일이 아니다.”

 

! 하하하하, 형이 그런 말을 하니 되게 웃기네!”

 

이 웃음은 꽤나 진심이다.

 

이글은 폭소를 터뜨리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탁탁 털었다.

 

그럼 뭔데?”

 

결혼이다.”

 

벨져는 자신의 말 한 마디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잘 못 들었는데 말이야, ?”

 

상대는 아버지 아는 분의 막내딸이다. 정치적으로 보아도 양질의 결합인데 그 상대가 형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더군.”

 

“...5분 기다려, 옷 입고 나올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바깥에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이글이 들어가고, 안쪽에서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딴에는 제 귀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저 안쪽에서 성질을 부리는 모양이지.

 

정확히 4분하고 45초가 지나고 이글이 뛰어나왔다.

 

벨져와 이글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조용하군.”

 

뭐가?”

 

그런 여자랑 형은 어울리지 않아, 못해도 3일이면 형에게 질려서 결혼을 후회할 걸, 형에게 결혼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왜 하필 다이무스 형이랑 결혼하는 거야.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만.”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형은 성실하니 마음이 없더라도 가정에 충실할 것이다, 그렇다고 집안을 떠난 너나 기사단에 뼈를 묻을 나와 결혼할 수는 없잖느냐. ...라고 할 거잖아.”

 

벨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다들 이글의 등장에 대해 놀라워하고 우려를 표했기에 이글은 축하만 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이야기를 하고, 행사를 하고, 연회를 즐기고, 그 모든 일이 끝나 쉴 즈음은 밤이었다.

 

이글은 방을 나섰다.

 

갑주도 없고, 장갑도 없고, 익숙하지 않은 맨손으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구나.”

 

문을 열자 포도주 향이 물씬 풍겼다.

 

탄야의 독만큼이나 어둡고 무거운 것이 열린 문으로 흘러넘쳐서 이글은 잠시지만 익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물속으로 들어가듯이 다이무스의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형의 일인데, 와야지.”

 

다이무스는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간혹 도자기 찻잔이 놓이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 서류나 편지가 쌓이는 모습을 보았지만 술병이 놓인 것은 처음 본 것 같다.

 

잔은 없고, 술병이 몇 개 굴러다녔다.

 

잔은?”

 

마시다보니 필요 없어져서 씻으라고 내놓았다.”

 

이글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결혼.”

 

방이 어둡다.

 

이글은 방이 어두운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해.”

 

“...”

 

선물은 없어. 그야~ 나 형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도 오늘 처음 들었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구도 나한테 집 얘기는 해주지도 않고~”

 

네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잖느냐.”

 

아하하, 그랬나?”

 

방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다.

 

이글이 웃을 때마다, 다이무스가 입을 열 때마다 청소한지 오래된 물건을 건드리듯 무거움이 피어올랐다가 풀썩 가라앉았다.

 

있잖아, .”

 

뭐냐.”

 

사람이 결혼하면, 어른스러움이 늘어나는 걸까.”

 

다이무스는 그 말에 고통스러운 듯한 소리로 웃었다.

 

나도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데, 그럴 리 없겠지.”

 

형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고?”

 

나는?이라고 이글은 묻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읽은 것인지, 다이무스가 이어 말했다.

 

너는... 그렇게나 다 큰 것 같은데.”

 

“...내가, 어른 같아?”

 

가장 무겁고 긴 검을 휘두르고,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내고 있으니.”

 

다이무스는 이글 쪽으로 새 병을 내밀었다.

 

마실 테냐.”

 

이글은 그 병을 받았다.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마시다가.

 

...아니, 사실은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대화를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글이 입을 열었다.

 

몇 년이나 망설인 말이었다.

 

알고 있었지?”

 

내가, 형을.

 

다이무스는 마시려고 들었던 병을 천천히 내렸다.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만약에 내가 형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뭔가 바뀌었을까?”

 

만약에 네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더라면.

 

다이무스는 몇 가지 가능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일을 꺼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영국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이무스가 말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서기 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무거운 향에 익사하고 싶었다.

 

이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글의 발은 움직였고, 사용하는 방으로 돌아갔다.

 

열린 창문에서 맑은 바람이 꽃과 풀의 향기와 탄산수에 넣는 레몬의 향을 싣고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공기다.

 

차라리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낸다는 내가 형에게 묶여서 말조차 하지 못해.”

 

차라리 어리다고 해줘.

 

결혼하지 말라고 울면서 떼쓰게 해줘.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의 무거운 공기가 사라진다.

 

이글은 코와 입을 눌러 숨을 참았다.

 

 

 

[루드빅X탄야] 연구소(선비님 썰 기반)

2016. 8. 21. 23:30 | Posted by 호랑이!!!

연구소장 탄야는 처음부터 루드빅이 싫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프로일라인.”

 

루드빅이 자신의 손을 끌어 입술 앞으로 가져가려고 하자 탄야는 냉랭하게 내려다보며 손을 빼었다.

 

저런 경박함이라니 어이없어서 눈물이 날 것 같군. 이런 연구실보다는 어디 무대 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탄야의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찰나, 다른 연구원이 와서 그녀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어디 유명한 대학 교수의 추천을 받았음, 성적 우수, 수재, 등등.

 

이 파일은 루드비히 와일드에 대해 추천받았을 때에도 읽었던 것이다.

 

글을 읽으며 수식어만 놓고 보았을 때, 탄야가 기대했던 것은 백의가 잘 어울리며 단정한 차림에 수수한 인상의 남자였다.

 

약간의 취향을 곁들이자면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준수한 용모... 정도.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어떤가?

 

겉에 걸친 저것은 아무리 봐도 가죽옷이다.

 

그나마도 맨가슴이 훤히 드러난.

 

단정? 가슴이 드러났다니까!

 

심지어 몸에 저게 뭐야, 문신? 목에는 초커?

 

아무리 그런 것을 요새 젊은 애들(루드비히가 자신보다 나이 많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유행이라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눈두덩에 저건 노란 섀도우다.

 

자신도 진한 화장에 노출이 있는 옷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았지만...

 

탄야의 눈이 위에서 아래로 루드빅을 훑어보았다.

 

아래로... 아래로...

 

세상에, 지금 속옷도 안 입은 거야!?

 

 

 

 

 

 

 

 

 

어떻습니까?”

 

뭐가 어때.”

 

안경을 써 봤거든요. 이런 것이 취향이라고 하길래.”

 

탄야는 루드빅이 검은색 반-무테 안경을 치켜올리자 지나가던 라이샌더를 끌어당겼다.

 

이쪽이 내 취향이거든?”

 

탄야 선생님?”

 

사랑스럽게 구불거리는 금발, 동글동글 귀여운 파란 눈, 그리고 그 위에 걸친 것은 빨간색 뿔테 안경.

 

말랑말랑한 볼을 주물거리는 탄야에게 그만해달라고 말하려던 라이샌더는 그 커다란 신입 연구원이 일부러 허리를 숙여 자기에게 눈높이를 맞추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흐으으응...”

 

턱을 잡고 이쪽, 저쪽, 머리를 숙이게 했다가 들게 했다가...

 

루드빅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라이샌더는 탄야가 서류를 받아주자마자 인사도 없이 도망쳤다.

 

같은 금발에, 눈 색이야 뭐 그렇다 치고... 다른 거라면 이것밖에 없군요.”

 

루드빅은 라이샌더가 쓰고 있던 빨간 뿔테안경을 들어올렸다.

 

그건 또 언제 낚아챈거야?”

 

아까?”

 

루드빅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빨간 뿔테 안경을 코에 걸쳐 보았다.

 

아까 그 애도 그렇게 시력이 나쁘지는 않군요.”

 

유리에 흐릿하게 비치는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루드빅은 어떠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탄야를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역시 본판이 괜찮으니 뭘 써도 그럴싸...”

 

당장 돌려줘.”

 

루드빅은 어깨를 으쓱했다.

 

탄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한테, 서류 주고. 가서, 안경 돌려주고.”

 

네 네, 여기 실험 보고서입니다.”

 

탄야는 보고서를 받자마자 표지부터 넘겨 보았다.

 

일부러 까다로운 실험을 넘겨주었는데, 과연 수재라는 말만은 진짜인지 실험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쓰인 보고서가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때, 합격점입니까?”

 

탄야가 흘긋 쳐다보자, 루드빅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보고서군.”

 

그러면...”

 

루드빅은 탄야의 손을 잡았다.

 

손이 천천히 입가로 가다가 멈추었다.

 

상은?”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댔다가는 해고당할 줄 알아.”

 

꼭 돈일 필요는 없는데.”

 

루드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탄야는 손을 홱 비틀어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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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라이화클] 서커스의 숙소에서 2

2016. 7. 26. 03:59 | Posted by 호랑이!!!

라이샌더는 안고 있던 꽃다발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오늘도 땀과 화장을 씻고 하얀 와이셔츠, 갈색 반바지를 입을 즈음이면 문이 열리고 

루드빅이 들어왔다.


제대로 머리를 말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루드빅이 마른 수건을 가져다가 라이샌더의 머리에 대고 탈탈 털자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와이셔츠에 점점이 자국을 남겼다.


앞의 거울을 통해서 흘긋 보았지만 라이샌더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이고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그렇게 활짝 웃던 아이가.


그렇다고 가엾게 여길 수는 없지만


루드빅은 여느 때처럼 라이샌더를 화이트 클라프의 방에 데려다 놓고 혹시나 누가 문을 열거나, 방해하는 일을 막기 위해 문간에 기대섰다.


5분 정도.


갑자기 화이트 클라프가 루드빅을 손짓하여 불렀다.


뭡니까.”


자네도 끼지 않겠나?”


저 말입니까?”


내가 왜 자네에게 그 키워드를 알려줬다고 생각하지?”


루드빅은 화이트 클라프를 쳐다보았다가 그의 무릎에 앉아서 헐떡이는 라이샌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가리개를 하고, 입었던 갈색 반바지는 진즉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처음부터 크다 싶었던 하얀 와이셔츠는 어깨가 드러나도록 흘러내릴 것을 손으로 쥐어 막고 있었다.


어차피 화이트가 손을 놓으라고 하면 바로 놓아 버릴 것이면서.


저것은 오기라고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부끄러움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일까.


루드빅은 그들이 있는 침대 위로 가 앉으며 생각했다.


라이샌더, 그대로 허리를 숙여라.”


화이트 클라프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던 라이샌더는 그의 말에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침대를 손으로 짚어 몸을 지탱해야 했으므로, 쥐고 있던 옷깃을 놓아 벌어진 사이로 발갛게 익은 몸이 보였다.

 

아무런 감흥 없이, 루드빅은 라이샌더를 내려다보았다.


지퍼를 열어드려라.”


라이샌더는 시키는 대로 바지의 벨트며 지퍼를 풀었다.


입에 물어.”


화이트 클라프가 명령하면 라이샌더는 실행한다.


꽤나 열심이지만 아직은 서투름에, 루드빅은 라이샌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손 아래에서, 작은 머리통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손으로 쥐고... 굳이 입에 다 넣을 필요는 없으니까.”


마침내 어느 정도 만족스러워졌을 때 루드빅은 라이샌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했습니다.”


쓰다듬어 준다고 해서 단박에 긴장이 풀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루드빅이 보지 못한 것을 화이트 클라프가 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도록 꽉 쥔 손이 조금 풀린 것을.


그 일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도구 외의 방면으로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아이는 내 것이고, 루드빅은 이 아이에게 아무런 감정을 품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 시간이 지난 뒤 라이샌더의 몸에는, 더 정확히 말해 화이트 클라프의 손이 닿은 허리와 손목과 허벅지에는 불그스름한 손자국이 남았다.

 

여태껏 남아본 적 없던 것이.

 

 

 

 

 

 

 

 

 

루드빅은 옷만 겨우 주워 입은 라이샌더를 안고 복도를 걸어갔다.

 

라이샌더를 방으로 옮긴 후 화이트 클라프의 방에 청소할 사람을 부르는 것도 루드빅이 할 일이었다.

 

저벅, 저벅.

 

품에 안겨서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라이샌더는 그 걸음소리가 오늘따라 느리게 난다고 생각했다.

 

라이샌더.”

 

이름이 불리자 라이샌더가 고개를 들었다.

 

화이트가 무섭습니까?”

 

방을 나온 뒤 풀어지려던 몸이 그 말에 다시금 굳어간다.

 

품 속에 안긴 것이 꼬물거리더니 손가락이 나와 눈을 가린 천을 당겨 벗었다.

 

왜요?”

 

그건 답이 될 수 없는데요.”

 

라이샌더는 입을 닫아버렸다.

 

루드빅은 라이샌더를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젖은 옷가지를 벗겨 주느라 새파란 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화이트가 무섭습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라이샌더는 잠시 쭈뼛거리면서 루드빅 쪽을 보다가 수건조차 가져가지 않고 욕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억지로 열지는 않겠지만, 문에 손을 대어 보니 묵직한 것이 걸렸다.

 

어린아이가 두려워할 때 그러는 것처럼 문 앞에 누군가 주저앉아 있는 것 같았다.

 

루드빅은 닫힌 문의 문고리를 쳐다보았다.

 

잠금쇠조차 없는 문이니까, 손을 대어 밀기만 하면 열린다.

 

하지만 고작 그런 질문에 그렇게 행동할 필요는 없겠지.

 

루드빅이 라이샌더의 옷을 가져가려고 할 때, 문 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몰라요.”

 

루드빅은 방에서 나가려다 멈추고 주머니를 뒤졌다.

 

별다른 것이...

 

, 있다.

 

꽃다발을 사고 남은 잔돈이 거슬렸었지.

 

루드빅은 작은 사탕을 꽃다발이 있는 책상 위에 놓고 방을 나서다가 문득 우스워졌다.

 

저 애한테 뭘 하고 싶은 거지? 친절이라도 베풀고 싶은 건가?

 

겨우 몸 한 번 섞었다고?

 

이것도 일종의 충동이겠거니 하며 루드빅은 세탁물 바구니에 옷가지를 던져 넣었다.

 

 

[샘이랑 딘 나옴] 담배, 향수, 침대

2016. 7. 22. 23:41 | Posted by 호랑이!!!

제대로 청소를 안 했나 봐. 담배 냄새가 나.”

 

샘은 모텔로 들어가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었다.

 

동네에 하나뿐이라는 이 모텔은 값만 비쌌지 안쪽은 좁고 불만을 제기할 곳이 수두룩했다.

 

딘은 쉬고 싶다며 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가 매트리스가 푹 꺼지는 바람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젠장, 이만큼 오래됐으면 좀 바꾸라고...”

 

간접흡연으로 죽을 지경이야.”

 

죽음의 원인이 악마도, 괴물도, 알 수 없는 사고사도 아니고 간접흡연이라니.”

 

딘은 낄낄거리면서 이불을 들고 몇 번 털었다.

 

잠자리에서 까다롭게 굴지 않고, 굴어본 적도 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오늘 이 곳은 좀 너무했다.

 

나갈까? 이런 곳에서 자느니 차라리 차에서 자는 게 더 낫겠어.”

 

씻을 곳은 필요하잖아. 침대랑, 텔레비전이랑, 전기 통하는 콘센트도.”

 

투덜거리는 모양에 고개를 젓다가 샘은 테이블에 놓인 화장품을 하나 들었다.

 

이것 봐, 남성용 스킨은 있어.”

 

남성용 향수겠지. 난 그런 거 안 발라.”

 

딘은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 까딱까딱 강조하는 표현을 하고는 팩 돌아섰다.

 

덧붙여서 그거, 향만 강한 싸구려야.”

 

손바닥에 스킨을 착 착 뿌려서 얼굴에 바르려던 샘 윈체스터는 딘의 말에 언제나처럼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쉬운 언어로 설명하려는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촤악.

 

노트북을 켜서 영화라도 보려고 했던 딘은 목덜미에 닿는 차갑고 향긋한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는 듯 머리를 푸르르 털고는 샘을 팩 노려보았다.

 

형도 좀 발라봐, 피부에 좋을걸.”

 

샘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빙그레 웃었고 딘은 피식 웃더니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너 지금 실수한거야.”

 

글쎄, 난 모르겠는데.”

 

딘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남성용 스킨을 집었다.

 

어라, 남성용?

 

어이, 너 나한테 뭐 뿌렸어?”

 

그러자 샘은 방긋방긋 웃는 표정으로 부렸던 스킨통을 들어 보였다.

 

여성용 토너.”

 

좋아, 네가 먼저 시작한거야.”

 

딘은 손에 남성용 화장수를 덜어 샘에게 확 뿌리듯이 손을 휘둘렀다.

 

샘도 손에다가 여성용 화장수를 덜어서 딘에게 뿌려댔다.

 

이 바보같은 짓은 장장 삼십분이 지나서야 멈추었는데, 그것도 딘의 손에 든 화장수 통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서였다.

 

, 머리 말린지도 얼마 안 됐는데 또 젖었어.”

 

형한테서 좋은 향이 나.”

 

너한테서는 냄새 나.”

 

딘은 입에까지 들어간 것 같다며 퉤퉤거렸다.

 

우리 방금 좀 애같이 놀았던 것 같아.”

 

좀이 아니고 많이.”

 

딘은 한 번 더 씻을 거라며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고 샘은 다음은 나! 라고 하고는 텔레비전을 틀며 침대에 누웠다.

 

샘의 침대도 몸을 누였더니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샘한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커미션 5] 나가

2016. 7. 2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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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워치/리퍼맥] 단어 파레트

2016. 7. 16. 05:32 | Posted by 호랑이!!!

캐붕 있을듯 세계관 오류 있을듯 기타등등


==


마실 때마다 하나씩 세워두는 탄피가 미끄러진 손에 부딪혀 구르다가 빈 병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내었다.

 

하나, , ... 일곱, 여덟... 열셋, 열넷...?

 

얼마나 마셔댄거야.

 

리퍼는 습관적으로 가면의 눈구멍을 더듬으려다가 자신이 지금은 가면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몽롱하다.

 

하늘에 뜬 달이 둥그런 모양이 아니라 한낱 반사되는 빛 무리로 보일 만큼... 취했군...”

 

아 그건 나이가 들어서...”

 

때렸다.

 

배은망덕한 놈.”

 

리퍼는 미간을 모으더니 자신이 세워두었던 탄피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탄피는 도미노처럼 하나가 쓰러지자 잇달아 우르르 무너져버렸다.

 

“66번 국도에서 널 줍는 게 아니었어.”

 

맥크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탄피를 쳐 우르르 넘어뜨렸다.

 

탄피는 누구 것이 누구 것인지 모르도록 섞여서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나무로 만든 좌식 탁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한동안 작은 잔 안에 술이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소리는 이어 병을 따서 마시는 소리로 바뀌었다.

 

병나발 부는 거냐.”

 

이것도 다-아 어디어디의 미스터 레예스에게 배운 거라고.”

 

리퍼는 눈을 흘겼다.

 

처음 술 마셨을 때는 마시던 거랑 맛이 다르다, 쓰다, 향이 강하니 뭐니 하면서 불평 불만에 작은 잔에만 따라 마셨었지. 그때는 좀 어린애다웠는데.”

 

그래서 더 굴린 거지? 귀엽다, 면서.”

 

“...내 학생이니까 그런 거였다.”

 

하지만 그 어린애는 어느샌가 성년의 날을 거치고 성인이 되어...

 

라고 이어 떠들던 맥크리는 말을 멈추었다.

 

취했으니까 하는 소리인데. 난 아직도 나의 레예스 씨가 좋아.”

 

취했으니까 하는 소리인데...”

 

마지막으로 의미 없는 말을 나누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리퍼는 마시던 도수 센 아일랜드 술병을 내려놓고는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 취했다. 내가 이겼어.”

 

야호! 라면서 휘파람까지 불어대는 모습을 보다가 맥크리는 눈을 감았다.

 

“...네가 날 따라올 줄 알았다.”

 

어느 즈음인지는 특별히 입에 올리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다.

 

의견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둘로 갈라졌을 때.

 

맥크리는 다음 술병의 뚜껑을 열어 입가에 대고 기울였다.

 

?”

 

리퍼는 괜스레 상을 더듬어 잡히는 안주를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몸을 확 일으켰다.

 

난 레예스 씨의 학생이니까?”

 

리퍼는.

 

리퍼라고 불리는 사람은 한쪽으로 무언가를 깨물고는 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러다 얼굴이 삐뚤어져라고 놀리곤 했던 버릇이다.

 

맥크리가 시가를 깨무는 것과 같은.

 

그 사람은 맥크리의 어깨를 잡았다.

 

가끔 하기 힘든 말을 억지로 할 때 나오던 버릇이다.

 

사람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던데 어쩌면 이렇게나 그대로인지.

 

맥크리는 고개를 비틀었다.

 

챙 넓은 모자가 리퍼의 이마에 부딪혔다.

 

네놈은........... 내 거였으니까.”

 

어린애는 언젠가 자라기 마련이야.”

 

맥크리는 하하 웃었다.

 

. 레예스 씨.”

 

네놈이 나이 들었다고 해서-”

 

맥크리는 리퍼의 입을 막았다.

 

아직 둘만 남아 있어야 하는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어.

 

어른끼리 하는 거 하지 않을래?”

 

[히로아카/오메가버스AU]

2016. 7. 12. 04:10 | Posted by 호랑이!!!

미도리야.”


어느 해 드는 날, 미도리야는 창문을 활짝 열고 토도로키의 고용인들과 함께 집을 청소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미도리야는 먼지를 털거나 물건을 닦아내는 일 중에서도 뭐든 손이 덜 가고 쉬운 일을 맡고 있었지만 자기가 맡은 일에 꽤나 열심이라 과외를 마친 토도로키 쇼토가 달려와 불렀을 즈음에는 잔뜩 집중했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고 미간까지 구긴 모습이었다.


, ? ... 아니, 도련님.”


바빠?”


오늘은 여기 청소하는 거 도와주기로 했는데, 미도리야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식기를 닦던 사람이 웃으면서 대신 대답해 주었다.


미도리야는 거기 그 꽃병만 닦으면 놀아도 돼요.”


그렇대....”


미도리야가 배시시 웃자 토도로키는 미도리야가 꽃병을 닦는 옆에 앉았다.


기다릴게.”


빨리 할게요!”


다시 미도리야의 입술이 비쭉 내밀어졌다.


토도로키는 가지런한 자세로 앉아서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마도(거의 확실하게) 미도리야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지만, 옆에서 다른 일을 하던 사람들은 그것을 힐긋 보고는 웃는 표정으로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뽀득뽀득 소리가 나면서 하얀 도자기 꽃병이 닦이고 미도리야는 손등으로 스윽 이마를 문질렀다.


다했다아-”


그럼 가자.”


토도로키가 앞장서고 미도리야는 그 뒤를 따라갔다.


토도로키 쇼토가 커다란 냉장고의 문을 여는 동안 미도리야는 납작한 접시를 꺼냈고 쇼토가 과자를 찾는 동안 미도리야는 의자를 꺼내 높은 서랍에 보관하는 유리컵을 꺼냈다.


늘 가는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토도로키가 주스와 과자가 담긴 쟁반을 들었다.


쇼토가 쟁반을 들고 있는걸 보면 나 혼날지도 몰라.”


내가 안 혼나게 해줄게.”


, 손 잡아.


쇼토가 손을 내밀자 미도리야는 머뭇머뭇 하다가 손을 잡았다.


둘이 자주 만나곤 하는 정원의 한 구석은 집에서 잘 보이지도 않고, 키 큰 수풀이 많아 자리에 앉으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한창 꽃이 피고 잎이 자라는 때라 향긋함은 없었지만 싱그러움이 있었고 강한 햇볕에도 그늘이 시원했다.


미도리야, 센베 먹어.”


미도리야는 토도로키가 내민 센베를 입에 물었다.


오도독 오도독 소리가 나며 입 안에서 얇은 과자가 부러졌고 퍼지는 단맛에 미도리야가 배시시 웃음지었다.


맛있어.”


그렇지? 이번에 아버지가 어디 가서 받아온 선물인 것 같아.”


, 소리를 내며 미도리야는 손에 쥔 센베를 무릎에 떨어뜨렸다.


, 그런 걸 내가 먹어도 돼?”


, 아버지는 늘 아버지 멋대로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쇼토는 옆에 놓인 네모난 것을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얇은 포장지 한 겹을 반쯤 벗겨내자 붉은색과 갈색으로 층을 이룬 양갱이 나왔다.


와아...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갱이네.”


손에 묻지 않게 양갱을 들고 주스가 찬 유리잔을 보다가 토도로키는 시선을 미도리야에게로 옮겼다.


“...단 주스랑 먹기에는 좀 별로일까?”


난 괜찮아. 아니, 좋아.”


미도리야는 종이로 된 양갱 포장지는 처음 열어 본다고 했다.


서툴은 탓에 접혀있는 포장지는 반쯤 찢어지다시피 하여 젖혀졌고 쇼토는 자신이 말끔하게 깐 것을 미도리야의 손에 쥐어주었다.


토도로키 쇼토는 묘하게 고집이 세어서 자신이 잘못 벗긴 거니까 자신이 먹겠다고 해도 소용없을 터다.


그래서 미도리야는 잠자코 양갱을 한 입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것도 혹시...?”


맞아, 아버지가 받은 선물.”


들키면 혼나겠지.


무지무지 무섭게 혼날 거야.


미도리야는 자신을 데려온 엔데버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내가 두 개 먹었다고 해.”


그러면 쇼토가 혼나잖아.”


내가 뭘 어떻게 해도 아버지만큼 멋대로 구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한 토도로키 쇼토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너도 혹시 들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나 주려고 오메가까지 사 왔대.”


정말 질색이야, 라면서 쇼토는 눈앞에 엔데버나 그 오메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를 드러냈다.


절대로 싫어, 평생 안 볼 거야. 아버지가 멋대로 사온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예쁘든 얼마나 착하든, 뭐든지간에 쳐다도 안 봐.”


미도리야는 입 안에 든 양갱을 꿀꺽 삼켰다.


“...쇼토는 엔데버님이 많이 싫은가봐.”


토도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오메가라고 해도 싫어하겠네.”


토도로키는 센베를 와작와작 씹어서 주스와 함께 꿀꺽 삼켰다.


그럴지도 모르지.”


벌컥벌컥벌컥, 주스가 차 있던 컵은 어느샌가 바닥을 보였다.


하지만 미도리야는 그런 게 아니잖아.”


바람이 세게 불어서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미도리야는 잠자코 과자를 입 안에 넣었다.


, 나 오늘 뭐 배웠는지 알아? 오늘 되게 재미있는 걸 배웠는데...”


오늘 배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어제 저녁 뉴스에서 올마이트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나중에 그런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집 안에서 쇼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토도로키는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저녁에도 쇼토의 방으로 뉴스를 보러 가겠다고 약속하고 토도로키는 남은 과자를 미도리야의 주머니에 넣었다.


쟁반, 나한테 줘.”


아냐, 쇼토는 바쁘잖아. 어서 가 봐.”


미도리야가 손을 흔들자 토도로키는 머뭇거리다가도 훌쩍 뛰어갔다.


미도리야라도 그 오메가라면 싫어할 거야


토도로키는 방으로 뛰어가다가 조금 어깨를 으쓱했다.


아닐지도 모르고


미도리야는 쟁반을 들어 부엌에 내려놓고는 포장지는 쓰레기통에, 접시와 컵은 개수대에 내려놓았다.


나라도 그 오메가라면 싫어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