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호랑이!!!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해시태그 이후의 일

2018. 10. 17. 16:55 | Posted by 호랑이!!!

.

 

페드는 파란 꽃병에 가져온 꽃을 꽂았다.

 

꼬마가 내민 너덜거리는 꽃과는 달리 활짝 피어 생생한 것은 향도 좋고, 다발로 있으니 짙다.

 

열어둔 창문에서 들어온 밤바람이 방 안을 한바퀴 돌자 구석구석에까지 향기가 퍼져서 만족스러웠다.

 

바람 때문인지 라레타의 귀가 파닥거렸는데, 그 일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페드는 가서 창문을 닫았다.

 

먼저 잠든 미코테는 따뜻해진 것이 만족스러운지 동그랗게 몸을 말고 파묻혔다.

 

이불을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려 덮어주고 페드는 라레타를 내려다보았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기계가 작동하듯 손이 라레타의 발목으로 내려가 쥐었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아프지 않게 조이지 않게 감싼 손아귀는 풀리지도 않을 만큼 단단하게 쥐었는데.

 

그런데도 라레타는 가만히 잠들어 있어서.

 

페드는 라레타를 내려다보다가 한참이 지나 손을 떼었다.

 

그제서야 눈이 한 번 깜박였다.

 

잊고 있었다는 듯 그쳤던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자다 깨어난 듯이 부스스한 움직임으로 페드는 파란 꽃병을 침대 옆으로 옮겼다.

 

유리창 너머의 달빛에 꽃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물무늬가 꽃을 덮었다.

 

 

'라랑 페드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기  (0) 2019.06.06
[인어 AU] 짧게짧게  (0) 2019.01.15
아마도 싸웠던 어느 날  (0) 2018.03.22
해시태그들  (0) 2018.01.30
새끼힐러가 되었다  (0) 2017.09.20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길게 말하기

2018. 10. 7. 16:55 | Posted by 호랑이!!!

A는 기묘한 나라에 가게 되었다.

 

배가 기묘한 해류에 쓸려 도착한 항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항구처럼 보였지만 사정을 설명하니 며칠 있다가 가라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지낼 곳과 배에 필요한 것, 체류하면서 필요한 것을 대어 주겠다고 하니 오히려 왜 이렇게 친절한지 의문스러워서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고 물었더니 며칠 머무른 후 영주권을 얻겠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땅에 비해 사람이 적은 곳이라 그런 일은 얼마든 환영이라고.

 

우연히 오게 된 이 곳에도 언어는 있고,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하기도 해서 의사소통에 어려움은 없었으나 언어나 생활의 어딘가에 근본적으로 위화감이 있었다.

 

예를 들어 A가 자란 곳에서 womanwo-man을 결합하여 woman이 되었지만 이 곳에서는 woman이 온전한 형태고 man은 사람에게 필요한 wo를 떼어 만든 어딘가 부족한 단어라는 등이다.

 

그것이 이유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 곳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점에 대해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A와 알고 지내게 된 B라는 사람은.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하여 보자면, 말을 짧게 하는 것은 으레 여자들은 하지 않는 짓이예요. 행사에서 축하를 부탁받게 되면 되도록 길게 하는 것이 그 곳에 대한 예의이고, 말이란 필요한 것을 빼서 적게 할수록 오해를 사기 쉬운 것이니까요.”

 

라고 말했다.

 

그래서 인사나 무엇을 할 때는 합리적인 시간 내에 최대한 길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세 장짜리 편지를 받았는데 요약하자면 빌려간 무엇을 돌려달라는 이야기일 경우도 있다나.

 

결혼생활에 대해 물었더니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2인 이상의 여성공동체에 아이들이 자란다고 한다.

 

남성의 생활에 대해 물었더니 불과 수십년 전까지는 30살 이후에나 직업을 가지는 일이 잦았다고 하나 요즘에는 고등교육까지 받으며, 대학에 다니는 수도 많다고 한다.

 

주로 어떤 학과에 진학하느냐고 물었더니 B는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A가 자신이 자란 곳에서의 경험을 떠올려 과학 계열이냐고 물었더니 너무나 놀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모르지만 보통은 체육 계열로 갈 거예요.”

 

요약하자면 그랬다.

 

이런 소리를 하면 요즈음은 성차별적이라고 하지만, 남자들은 대체로 복잡한 거 싫어하고 몸 움직이는 거 좋아하고 그렇잖아요? 원시시대부터 사냥을 하고 지내고, 폭력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지요.”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 전 BA에게 귀중한 조언을 했다.

 

“A 당신은 말을 남자같이 해. 길게 말하는 연습이라도 하는 게 좋을 거야.”

 

 

====================================


전에 man은 홀로 설 수 있는 단어이고 wo-가 있어야지만 woman이 된다는 이야기를 보고.


만약에 여성상위인 나라가 있다면(예전에 읽었던 어느 소설에서처럼) woman이 제대로 된 단어처럼 보이고 man은 woman에 비해 부족한 단어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지식이 있고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있음에도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는 더 생각해서 다음에 더 긴 이야기로 가져올 거예요 ㅇㅂㅇ)/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법사와 사역마 - 1  (0) 2018.10.25
프롤로그-마법사와 사역마  (0) 2018.10.13
우산의 가장자리  (0) 2018.09.26
흔한 소재. 조용한 B랑 활달한 C랑  (0) 2018.09.08
티샤와 무쉬  (0) 2018.08.30

[섀헌/말렉] 요즘 핫하다는 대학AU

2018. 9. 27. 23:56 | Posted by 호랑이!!!

스윗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보는 건 너무나도 기쁜 일이겠지만. 나한테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을 텐데?”

 

매그너스는 핸드폰을 열어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렸다.

 

그렇지만 매그너스가 모델 일을 맡기는 사람들은 지금 다 바빠졌잖아요.”

 

클라리사, 클레리는 매그너스의 손가락이 리스트의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굳이 보고 그릴 필요도 없어. 눈 감고도 그들의 육체라면 고스란히 옮길 수 있으니까.”

 

게다가 요즘 세상에는 핸드폰이 너무나도 잘 되어 있어서 동영상을 찍던 사진을 찍던 할 수도 있다고.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손가락은 리스트의 아래로 쭉쭉 내려갔다.

 

이번에는 좀 더 근육질인 사람이 좋겠다면서요?”

 

“...뭐 그렇긴 한데. 요즘 권태기라서...”

 

무슨 권태기요?”

 

굳이 새로운 사람을 쓸 필요도 못 느끼겠고... 근육질이 아니어도 뭐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모델과 캔버스를 두고 느껴져야 할 아모-르가 느껴지지 않아.”

 

S에서 사이먼의 이름이 나오자 손가락은 가차없이 핸드폰을 튕겨 아래로 내렸다.

 

눈으로 쫓지도 못할 만큼 많은 이름이 주르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매그너스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자 이번에는 클레리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채팅 앱이라면 여러개나 있는데도 알렉이 클레리에게 보내는 것은 언제나 문자.

 

“...알렉? 둘이 애칭 부르는 사이야?”

 

“...그런 건 아니구요.”

 

무슨 끔찍한 소리를, 이라는 표정이 클레리의 얼굴에 스쳐지나갔고 그 찰나의 표정을 읽은 매그너스는 소리내 웃었다.

 

이름을 물어봤더니 안 가르쳐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길래. 제이스가 부르는 걸 들어서 알렉이라고 했더니 그거면 됐다고 막 그러더라구요.”

 

이후에 이지... 이자벨한테 알렉산더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제는 클레리가 오기로 알렉이라고 저장해뒀다.

 

모델 일 잠깐 한다고 하길래 소개시켜 줬더니 갑자기 제가 소개해준 일이라고 다른 일 한다고 하고.”

 

어지간히도 미움을 샀나 보구나 클레리.”

 

“......여기 오는 길이라고 하네요.”

 

됐어, 가라고 해.”

 

우리 스윗피한테 그렇게 무례한 사람이라면 나도 별로야, 라고 매그너스가 싱긋 웃자 클레리도 활짝 미소를 지었다.

 

“..., 알렉도 모델 때문에 오는 건 아니래요. 제이스가 뭘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서라는데요.”

 

그래, 그럼 더 볼 일 없네.”

 

잘 됐다 잘 됐어.

 

매그너스는 양 팔을 들어 기지개를 쭉 켰다.

 

그 때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클레리는 핸드폰을 쓰고 있어서 보지는 못했지만,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꽤 강렬하게.

 

잠시 침묵이 흐르고.

 

창가에 늘어선 줄리앙과 브루투스처럼 굳어진 두 남자를 보던 클레리는 알렉이 가지러 왔다는 종이가방을 건네러 일어섰다.

 

알렉, 이거 가지러....”

 

매그너스는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않고 몸을 일으켰다.

 

“...알렉산더라고 했지? 모델 한 번 해보지 않을래?”

 

“...면접 보러 왔습니다.”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레+해리] 클리셰 범벅  (0) 2020.02.29
탈론을 위한 괴담  (0) 2019.04.29
[청엑/시로메피] 짧글  (0) 2018.09.10
[심바스카] 오후  (0) 2018.08.25
[섀도우 헌터스/알렉X매그/"AU"] 요리 배우는 말렉  (0) 2018.08.19

우산의 가장자리

2018. 9. 26. 00:55 | Posted by 호랑이!!!

눈의 가장자리로 실 같은 것이 한 오라기 보였다.

 

모르는 사이에 머리카락이 우산에 걸린 것인가 하고 놀라서 보았지만 다시 빛에 비추어 보니 실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비가 오는 것 치고 날이 밝으니 떨어지는 빗방울이라도, 나뭇가지라도 잘못 본 모양.

 

가방에 우산에 또 가방 하나 더.

 

오늘따라 손에 든 것이 많으니 우산이고 가방이고 유달리 무겁다.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서 쉬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는데 집에 와서야 충전기를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비용 충전기도 없고.

 

따뜻하고 조용한 집 안에 있으니 문 뒤로 추적추적 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가기 싫은데.

 

어차피 내일도 갈 거, 눈 딱 감고 가지 말까.

 

그러나 핸드폰은 배터리가 2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우산을 집었다.

 

가방 두 개를 내려놓았는데도 이상하게 손이 무겁다.

 

어깨도 아프고 어딘지 몸도 무거운데 사람 없는 길을 걷고 있자니 저만치서 해가 잠기는 모습이 보여 다시 발을 억지로 빠르게 움직였다.

 

하늘 끝자락은 이미 어둠으로 물들어서 가지 많은 나무 옆을 휙 지나가니 또 눈가로 실 같은 것이 보였다.

 

아까는 한 올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더.

 

한 두세 가닥 정도.

 

.

 

또 나무를 지나자 그 수는 다섯 정도로 늘었다.

 

.

 

일곱.

 

.

 

아홉.

 

.

 

무수히 많이.

 

나무를 지나칠수록 우산에 매달린 실은 늘어났다.

 

신경이 쓰여 힐끗힐끗 우산 가장자리를 보면 그럴 때는 또 보이지 않다가 길고양이가 앞에 있다던가, 신호등이 있다던가 하여 시선을 돌리면 또 스르르 나타난다.

 

나뭇가지를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실은 갈수록 많아지고, 또 길어져서 도서관에 닿을 즈음에는 우산 가장자리가 카페트처럼 보였다.

 

그에 맞추어 걸음은 점점 빨라져 입구의 유리문이 가까워졌을 때에는 헐떡거리면서 뛰고 있었다.

 

우산을 내팽개치다시피 바닥에 던지고.

 

평소라면 젖은 발걸음이 신경쓰여 조심스럽게 들어갔을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놓아두었던 자리에 충전기가 얌전히 있다.

 

창백한 불빛이나마 밝게 켜두니 마음이 놓여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나보다.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드라이어로 머리 말리면서 코미디나 봐야지.

 

충전기를 쥔 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아까보다 느긋해진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오니 우산이 유리문 손잡이에 걸쳐 있다.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경비 아저씨가 계셨나보다.

 

간만에 느끼는 친절함에 다시 우산을 펴는 손길은 가벼워졌다.

 

아까는 어설프게 밝아서 잘못 봤겠지.

 

가는 길은 아예 어두우니 뭘 잘못 볼 일도 없을 거다.

 

뭐가 보여야 말이지!

 

우산을 어깨에 척하니 걸치자 욱신거리던 어깨엔 무거워서 똑바로 들었다.

 

그렇게 지나가는데 편의점 간판의 빛이 환하게 비쳤고 그때 또 눈 가장자리로 우산이 보였다.

 

실과.

 

뭉툭한 손가락.

 

그제야 깨달았다.

 

저것은 실이 아니라 머리카락이며.

 

누군가가 거꾸로 기어내려온다는 것을.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롤로그-마법사와 사역마  (0) 2018.10.13
길게 말하기  (0) 2018.10.07
흔한 소재. 조용한 B랑 활달한 C랑  (0) 2018.09.08
티샤와 무쉬  (0) 2018.08.30
마법사들 9.5 (향의 집)  (0) 2018.08.22

[청엑/시로메피] 짧글

2018. 9. 10. 01:36 | Posted by 호랑이!!!

“...뭡니까, 정말?”

 

메피스토는 우산을 휘둘러 마악 자신의 소파에 떨어진 베개를 들어올렸다.

 

땡땡이 칠 때 쓸 거니까 그냥 거기 둬.”

 

후지모토 시로는 지저분한 코트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 ! 시로! 그런 걸 제 방에다 벗지 말란 말입니다! 던지지도 말고! 입고 들어오지도 말아요!”

 

그러면 홀딱 벗어야 하는데?”

 

역시 내 벗은 몸이 보고 싶었던 거지? 라는 시로 신부의 오만방자한 말에.

 

메피스토는 한 마디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언을 외치며 우산으로 시로의 머리를 내리쳤다.

 

좀 겸손하라구요!”

 

메피스토가 눈살을 찌푸리자 시로는 과장스럽게 머리를 문지르면서 웃었다.

 

다녀온지 얼마 안 됐고, 또 나가봐야 하니까 봐줘.”

 

“...어쩔 수 없지요

 

메피스토가 손가락을 튕기자 코트걸이가 다가와 시로의 코트를 받았다.

 

가기 전에 뭐라도 마시겠습니까?”

 

좋아.”

 

진한 핑크색 다기 세트는 색만 제외하면 보기부터 고급스럽고 차와 함께 먹는 과자들도 제법 맛있어 보인다.

 

마법을 부릴 수 있음에도 메피스토는 손수 주전자를 들어 그의 잔에 따라 주었다.

 

콜라를.

 

이런 악취미도 이제는 익숙해지는군.

 

눈썹을 꿈틀 올렸다가 시로의 시선을 느낀 악마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어딜 가는데요?”

 

전에 부탁했던 거기.”

 

거기, 라면 마검을 가지고 있는 무슨 절을 알아봐달라고 했던 그거?

 

그러니까 사탄의 사생아가 어쩌구 했던 그 중요한 그거.

 

심지어 고작 며칠 전에 심부름꾼을 시켜 쪽지로 낼름 전달한 그거!

 

잠깐, 오늘까지라고 말한 적 없잖아요!”

 

이 망할 신부! 메피스토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러면 이 건강에 나쁘다고.”

 

지금은 당신이 내 정신건강에 제일 나빠요!”

 

 

흔한 소재. 조용한 B랑 활달한 C랑

2018. 9. 8. 14:22 | Posted by 호랑이!!!

쉬는 시간, 수업 시간, 언제든 할 것 없이 덥다는 말이 들리고 종이로 부채질하는 소리나 간혹 조그만 선풍기 모터소리가 들리는 여름방학 직전, 기말고사가 끝난 어느 날.

 

신입 교사 A는 방학 숙제라며 종이를 한 뭉치 안고 들어왔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우우- 하는 야유가 터져나왔다.

 

- 숙제 싫어요!”

 

좀 진정해라, 다들.”

 

선생님은 프린트물로 책상을 탁탁 내리치고 잘 보이게 들어올렸다.

 

이제부터 너희는 짝을 지어서 서로 대화를 해 보고, 서로에게 필요할 것 같은 일을 방학숙제로 내주는 거야, 알겠지?”

 

앞에서 넘겨지는 종이를 받고 B는 체크리스트를 읽어 보았다.

 

어느 정도의 기준이 있는지 질문은 꼼꼼하게 작성되어 있다.

 

우리 다 같이 놀러가기 같은 거 적을래?”

 

“C한테 숙제 주면-”

 

C 주위는 너무 요란하다.

 

B는 서랍에 손을 넣어 아까까지 읽던 책을 꺼냈다.

 

몇 명씩 불려가서 몇 분 내로 돌아오다가 마침내 B의 이름이 불렸다.

 

예상과는 달리 빈 교사 휴게실로 갔고 BC와 한 조인 것 같았다.

 

안녕!”

 

안녕.”

 

난처하네.

 

B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C에 대해서는 이제 겨우 이름과 얼굴의 매치하는 정도인데 갑자기 대화라니 허들이 높다.

 

아까 뭐 읽고 있었어?”

 

“...중국 소설, 부채와 이야기.”

 

재미있어?”

 

고개를 끄덕인다.

 

C는 다른 친구에게 빌려온 노란색 볼펜으로 체크리스트를 긁었다.

 

이제 한 학기가 다 지나가는데 B랑 이야기하는 건 이제 두 번째, 어쩌면 세 번째인 것 같다.

 

이런 적이 없는데 참.

 

방학 때 뭐하고 싶어?”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책이나 읽고 싶다는 말이 B의 얼굴에 적혀있는 것 같다.

 

친구랑 놀기?”

 

그럼 그거 적는다.”

 

아냐, 다른 걸로 할래.”

 

뭐가 좋아?”

 

.... ?”

 

책이라는 말에 B의 시선이 종이에서 떨어져 C를 향한다.

 

얼굴 반 이상이 종이로 가려져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퍽 만족스러워서 C는 헤실 웃었다.

 

읽을 만한 거 추천해줄 수 있어?”

 

“...부채와 이야기 재미있으니까, 나중에 읽어봐.”

 

다 읽고 보여줘.”

 

도서관에 한 권 더 있어.”

 

그리고 이 책이랑, 이 책이랑, 하면서 다섯 권 정도 추천해주느라 시간은 금방 10분을 넘겼다.

 

너희 다 해가니?”

 

A 선생님이 문을 노크했다.

 

-.”

 

쪼끔만 기다려 주세요, !”

 

Bㅇㅇ에게 주고 싶은 나의 방학숙제는?’이라는 질문 옆에 검은 색 볼펜을 댔다.

 

책 다섯 권 읽기.

 

가급적이면 추천해준 책으로, 라고 적었다가 위에 두 줄을 긋는다.

 

 

 

 

 

 

방학식.

 

A 선생님은 학생들 개개인을 위한 프린트를 나누어주었다.

 

누군가는 영어공부를 할 것이 있고 누군가는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어오는 일이 있다.

 

그러고 보니 C가 뭘 줄지는 안 물어봤었지.

 

B는 프린트를 받자마자 숙제 부분을 찾았다.

 

[C와 함께 이틀 동안 놀 것]

 

“.........?”

 

B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저만치에서 C가 이 쪽을 바라보다가 눈을 마주치곤 손을 흔들었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게 말하기  (0) 2018.10.07
우산의 가장자리  (0) 2018.09.26
티샤와 무쉬  (0) 2018.08.30
마법사들 9.5 (향의 집)  (0) 2018.08.22
마법사들 9  (0) 2018.08.22

티샤와 무쉬

2018. 8. 30. 02:17 | Posted by 호랑이!!!

무쉬는 흐릿한 동전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축축하게 젖었다가 말라서 보잘것없이 뻣뻣한 털과 납작하게 눌린 앞발, 뜯어져서 뿌리밖에 남지 않은 수염.

 

원래는 그래도 그럭저럭 보드라운 털에 곧게 쭉 뻗은 수염이 있었지만 전부 베리를 만나고 30초도 되지 못해서 다 뜯겨나갔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털에 하얀 수염이 있는 베리는 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인데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에게 달려들고는 했다.

 

푸르르.

 

무쉬가 얼굴을 털자 젖었던 털이 오늘도 볼품없이 착 달라붙었다.

 

무쉬는 늘 수염이 아쉬웠다.

 

베리처럼 보송보송한 털이 있고, 새까만 수염이 있고, 눈도 반질반질 예뻤더라면 티샤가 자기를 더 좋아해줄 텐데.

 

티샤.

 

작은 티샤.

 

무쉬는 티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뭐니뭐니해도 낚싯대니 장난감이 늘어선 곳에서 자기를 보자마자 무쉬!’라고 부르면서 손을 뻗어주었으니까.

 

게다가 가끔은 베리를 낚싯대로 때려주기도 했다.

 

잘 때면, 더더욱 가끔이지만, 손에 꽉 쥐고 자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베리도 철창 너머로 노려보기만 할 뿐,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물어뜯지도 않아서 푹 잘 수 있었다.

 

무쉬!”

 

아니야, 티샤. --.”

 

무쉬!”

 

, .... 어라, 이거 곧 떨어지겠는걸. 버려야겠다.”

 

무쉬를 집어든 사람은 깐깐한 눈으로 슬쩍 훑어보더니 지저분한 쓰레기통으로 손을 가져갔다.

 

잠깐만, 기다려.”

 

커다란 뚜껑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리고 무쉬는 손 안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 때 누군가가 무쉬를 잡았다.

 

이제 괜찮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었지만 눈에 보인 것은 날이 선 가위였다.

 

커다란 가위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자 뒤에서 티샤가 비명을 질렀다.

 

무쉬!”

 

무쉬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만치에서 베리가 눈을 빛내면서 몸을 일으켰고 아까까지 자신이 매달려 있던 막대가 쓰레기통에 툭 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이렇게 끝이구나.

 

무쉬는 납작해진 앞발을 쓰다듬었다.

 

베리만큼 풍성한 털이 있었다면.

 

새까만 수염이 있었다면.

 

그랬으면.

 

너덜너덜한 꼬리가 뚝 잘리면서 무쉬는 앞발로 눈을 가렸다.

 

, 티샤. 무쉬야.”

 

?

 

무쉬는 작은 손 위에 앉자 앞발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티샤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앞발은 납작하고, 털도 초라하고, 수염도 끊어져서 없는데도.

 

베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으나 부엌에서 캔을 따는 소리가 들리자 후다닥 달려갔다.

 

무쉬!”

 

티샤는 두 개뿐인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산의 가장자리  (0) 2018.09.26
흔한 소재. 조용한 B랑 활달한 C랑  (0) 2018.09.08
마법사들 9.5 (향의 집)  (0) 2018.08.22
마법사들 9  (0) 2018.08.22
마법사들 8  (0) 2018.08.18

[심바스카] 오후

2018. 8. 25. 07:11 | Posted by 호랑이!!!

삼촌!”

 

유쾌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스카는 누군지 알겠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뭐냐.”

 

삼촌이! 보고 싶어서.”

 

삼촌이!라고 힘차게 대답해놓고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깐다.

 

스카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눈을 떴다.

 

아침에 보았잖니. 심바.”

 

오늘 나랑 저녁 먹으러 갈래?”

 

삼촌은 바빠요.”

 

스카는 보란 듯이 서류더미를 밀었다.

 

그래봐야 제일 한가한 직위에 일부러 앉았으면서.

 

게다가 방금 전까지 제일 해가 잘 드는 자리에 썬베드를 놓고 졸고 있었잖아.

 

심바는 부루퉁하게 스카의 서류를 뺏었다.

 

“...호랑이들과 함께하는 그거네?”

 

나름대로 중요한 자리란다.”

 

스카는 몇 번 눈을 감았지만 더 이상 자기 힘들 거라는 생각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고, 심바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스카에게 향했다.

 

기지개를 켜려고 팔을 들 때에는 단추 사이가 벌어지는데 미간이 찡그려지면 천이 팽팽하게 늘어나 당겨진다.

 

어라, 저 단추만 조금 헐렁하지 않은가.

 

저 단추가 조금 떨어질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저 단추 말이야.

 

삼촌. 거기 단추.”

 

어디, 이거?”

 

하품을 하느라 스카의 입이 벌어졌다.

 

손이 가슴팍을 더듬다가 헐거운 단추를 건드리자 그 단추는 힘없이 툭 떨어졌다.

 

, 이것 참, 이라고 스카의 입이 중얼거렸다.

 

이거 곤란해졌구나.”

 

스카는 입으려고 했던 겉옷을 다시 의자에 걸쳤다.

 

뜯어진 단추가 있던 부분에 손가락을 걸고 양쪽으로 당기자 서서히 셔츠가 벌어졌는데.

 

진한 맛이 날 것 같은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

 

“...저녁에 시간을 쪼개서 셔츠를 사러 가는 수밖에.”

 

저녁.

 

심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냐, 아냐, 그대로 앉아 있어! 내가 갔다 올 테니까!”

 

그리고 스카가 대답하기도 전에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자주는 오늘도 심바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사라비는 점심 이후 보지 못했다고 했고, 오늘은 날라도 얌전한데.

 

이 곳 저 곳을 다 다녀보았지만 이 왕자님은 어디에도 없어서 갈수록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안고 가장 가기 싫은 곳, 스카의 사무실로 발을 향했다.

 

실례합니다.”

 

들어오라고 한 주제에 스카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셔츠도 벗는 중이었는지 단추를 풀고 있어서 자주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던 손을 멈추었다.

 

심바 못 봤습니까?”

 

글쎄, 어떨까.”

 

하얀 옷이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짙은 색 마호가니 책상 위에 떨어졌다.

 

또 심바한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니겠지요?”

 

그 질문에도 이를 드러내는 웃음 뿐이다.

 

못돼먹은 한량 같으니.

 

자주는 문을 닫고 뱉듯이 중얼거렸다.

 

심바한테 못된 물이 안 들게 떨어트려 놔야 할 텐데.

 

그런 말이 들리는 문 뒤에서 스카는 다시 썬베드에 누웠다.

 

팔을 위로 들면 썬베드의 기둥에 손목이 걸렸고 몸에 햇살이 쏟아져 뜨뜻하다.

 

아까에 비하면 명백하게 흐트러진 자세로 누운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그르릉 소리가 흘러나왔고, 다시 스카는 눈을 감았다.

 

 

마법사들 9.5 (향의 집)

2018. 8. 22. 02:26 | Posted by 호랑이!!!

붉게 번지는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푸르스름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세 명에게 이리 오라는 듯이 일렁인다.

 

신 향의 집은 책에서 뽑아낸 것 같은 옛날식 집이다.

 

돌을 주워 쌓은 담에는 같은 모양의 돌이 하나도 없고, 붉고 푸른 칠이 된 나무 대문을 열어서 들어가면 널찍한 기왓집이 보인다.

 

섬돌에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가면 초록이, 줄리아나, 예란이 나란히 서도 될 정도였고 그 마루를 따라 닫힌 방 문을 지나가다 보면 갑자기 옆이 확 트여서 집의 안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집 가운데 있는 것은 연못이었는데 으레 있을 법한 연꽃도 없고 연못 주변에 잎이 넓은 나무며 갈대 같은 것이 있어서 오히려 연못을 가린다.

 

넓은 집 안에 이런 연못을 지어 놓고 또 주위에 나무 같은 걸 심어서 다 가려놓다니 뭐 이런 인테리어가 다 있담.

 

누구 취향인지는 몰라도 참 답답하다.

 

그 마루 끝까지 가면 방이 하나 나왔는데.

 

문을 열자 그 안은 지금까지의 고풍스러운 저택이 거짓말인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여기 맞아?”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어느샌가 한 걸음쯤 앞에서 일렁이던 푸른 불꽃은 사라지고 없다.

 

그 대신에 목소리가 있다.

 

여기야.”

 

넓은 방들과 커다란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신 향의 방에만 누군가 사는 흔적이 있다.

 

목소리가 들린 다음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서 향이 나타났다.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흔한 소재. 조용한 B랑 활달한 C랑  (0) 2018.09.08
티샤와 무쉬  (0) 2018.08.30
마법사들 9  (0) 2018.08.22
마법사들 8  (0) 2018.08.18
마법사들 7  (0) 2018.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