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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더건/율리안] 시장

2019. 3. 7. 23:49 | Posted by 호랑이!!!

차도 있는데 굳이 기차라니.

 

꽃무늬 장바구니를 든 크나트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객실은 나름의 운치가 있기는 하겠으나 여행도 아니고 이동수단으로서는 그다지 선호할만한 물건이 되지 못 했다.

 

그 와중에 율리안은 종이와 펜을 꺼내 리스트를 확인하려해서 크나트는 그의 눈을 가렸다.

 

이런 곳에서 글 읽으면 눈 나빠져.”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고 넣을 겁니다.”

 

아까 두 번이나 확인했잖아 자기야.”

 

누가 당신 자기입니까, 눈 가리지 말고 치우십시오.

 

누가 우리 자기긴 정원의 밤에 핀-.

 

장미라고 했다가는 화낼 겁니다.

 

등의 말을 하다 보니 두 정거정이 지나 내릴 곳이었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았음에도 타기 전에는 말끔한 거리이던 장소가 내리고 나서는 포장된 도로에조차 풀이 건강하게 자랐다.

 

천 바구니에 손가락을 끼워 달랑거리며 내리자 율리안은 우선 리스트부터 확인했다.

 

우선 버터 파는 곳부터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집 것은 인기가 많아 금방 떨어질 거라고 하니 좀 뛰어야 할 겁니다.”

 

꽤 커다란 장이지만 시골이었기에 잘생기고 낯선 젊은이는 시선이 가는 모양이다.

 

종이로 싼 버터만 겨우 한 덩이 고른 율리안은 마셔보라며 받은 신선한 우유에 양젖까지 들고 찡그린 듯 난감한 표정으로 크나트에게 시선을 보냈다.

 

, 키스해줄까?”

 

그거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정말!

 

크나트는 율리안이 짐을 건넬 때마다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노려보는 율리안과 눈이 마주칠 때면 윙크를 날렸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율리안은 손에 든 우유를 벌컥 마셨다.

 

“...”

 

맛있나보군

 

생각보다 맛있었기에 할 말을 잃다니 황당한 일이다.

 

율리안이 빈 종이컵만 쳐다보자 크나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달링?”

 

이건...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하고 율리안은 양젖이 담긴 컵에도 입술을 대었다.

 

그다지 익숙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맛이 있다.

 

풍미가 진하고 고소하고 단맛도 나는데다 가공하지 않아서 젓기 전의 크림처럼 무게감까지 있다.

 

양젖, 우유는 원래 이런 맛인가.

 

리스트에는 없었지만 때마침 집에 있는 우유도 다 마셔가니 한 병 정도는... 하고 돌아 본 순간 율리안은 커다란 병으로 두 개나 산 크나트를 보고야 말았다.

 

그만큼이나?!”

 

제정신이냐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표정을 짓는데도 이 뻔뻔한 남자는 기어이 우유 꾸러미와 돈을 교환하고야 만다.

 

자기가 이거 맛있다며.”

 

그렇, 아니, 자기라고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이렇게 밖에서!

 

파르륵 떨자 크나트는 우리 자기랑 작은 다툼이 있었어요같은 표정으로 상인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우유와 버터를 판 그 사람은 저쪽에 꽃을 길러 파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었고 크나트는 율리안의 말은 듣지도 않고 휭하니 꽃을 사러 갔다.

 

황급히 말리러 가기 전에 애써 잘 마셨다고 인사를 건네니 상인의 눈이 반짝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뭘 숨기려 들고 그랴. 둘이 여행 왔어?”

 

말리러 가야 하는데.

 

뿌리치고 가기에는 상인의 눈이 반짝인다.

 

율리안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희가... 여행은 아닙니다. 이제 여기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는데 여기 장터가 선다고 추천을 받아서...”

 

전 직장에서 만난거라 만난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오래 만나서 떠날 때도 놓쳐버렸다고 속으로 생각하던 율리안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자신이 또 떠날 때를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대한 흥미를 느끼지 않을 만한 말을 하고 떠나려고 했건만 마음과는 달리 입을 열수록 질문과 청중이 늘어나서 벌써 다섯 명, 이제 여섯명, 일곱... 의자까지 끌고 귀를 기울이는 저 영감님까지 세면 여덟 명...

 

율리안은 도망이 가고 싶어졌다.

 

 

 

 

 

 

 

이후 크나트가 튤립과 프리지아 다발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 번 보는 것으로 율리안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차린 그는 율리안을 구하는 것보다는 청중 사이에 들어가서 듣는 것을 택했고 얼마 안 가 율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율리안이 기가 막혀하자 크나트는 숙련된 솜씨로, 납치라고밖에 못 할 짓으로 율리안을 빼내더니 먹이고 시장을 구경시켜서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탄 것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집에 가자마자 뭐든 해먹어야겠어.”

 

계란하며 우유는 상하기도 쉬운데 그러게 이 남자는 왜 이 시간까지 자길 끌고 다녔냔 말이다.

 

빨갛고 노란 꽃다발을 안은 자신은 또 얼마나 시선을 끌었는지.

 

덜컹거리는 기차에 타니 몸은 둘째치고 마음이 편해졌다.

 

저녁때라 그런가 사람도 없어서 율리안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뻗었다.

 

크나트는 율리안을 빤히 보다가 따라 다리를 쭉 뻗더니 마주보는 건너편 의자에 발을 올렸다.

 

그러면 안됩니다.”

 

잔소리는.”

 

“”공중도덕이라는 게 있습니다.

 

크나트는 납득이 어렵다는 표정으로 율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누구한테 그 소리를 하는지는 알고 있어?”

 

당신 아닙니까.”

 

가끔은 어겨도 될 텐데 말이야.”

 

그런 게 어디있습니까, 그런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딱딱거리던 율리안은 30분 뒤 좁은 기차안 화장실에서 크나트와 함께 나왔다.

 

“...공중 도덕?”

 

“...”

 

 

愛(아이)

2019. 2. 28. 04:51 | Posted by 호랑이!!!

아이, 나 왔어.”

 

버베나가 들어오면 항상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지금 시간은 오후 일곱 시.

 

나는 오전에 깨긴 하지만 항상 버베나가 출근한 다음에야 눈을 뜨기 때문에 오늘 처음 만나는 셈이다.

 

매일 집에만 있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도 버베나밖에 없으니 보통이라면 질릴 만도 한데.

 

언제나 이렇게 얼굴을 보면.

 

버베나가 인사를 건네면.

 

그제야 해가 뜨고 나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다.

 

[어서와]

 

내 말은 연결해둔 스피커를 통해 음성으로 전환되어 버베나에게 이동했다.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었어?”

 

스피커를 통한 기계적인 소리인데도 버베나는 기분을 금방 알아차리고 말을 붙여주었다.

 

[바깥을 봤는데 제비 둥지가 생길 것 같아. 봄이 오려나 봐. 이제 옷도 새로 꺼내고 이불도 바꿀 때가 왔어]

 

작은 새 두 마리가 입에 진흙이며 풀 따위를 물고 종종거리는 모습은 귀여웠다.

 

제비? 어디?”

 

그래서 이 질문에는 답하기 거리껴졌다.

 

어디냐니까.”

 

[베란다]

 

역시나 버베나는 당장 휴대폰으로 손전등을 켜고는 벽을 이리저리 살폈다.

 

베란다가 더러워지겠다며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버베나가 물으면 전부 대답하게 된다.

 

그리고 저렇게 피곤해하고, 짜증내는 모습까지도 전부 좋아하니까.

 

진흙을 긁어낼 것을 찾는 버베나에게 말을 걸었다.

 

[버베나, 따뜻한 물 받아 놨어. 목욕하고 싶지 않아?]

 

할거야, 이것만 떼고.”

 

[일정 보니까 내일하고 모레 쉬던데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해]

 

내일 휴일이야?”

 

나는 버베나의 일정을 적어둔 달력을 꺼내왔다.

 

달력에는 내일과 모레 날짜에 주욱 선이 그여 있고 그 아래에는 쉬는 날이 별 다섯 개와 함께 적혀 있었다.

 

버베나는 휴대폰 손전등을 껐다.

 

그랬지 참. 나 씻을게.”

 

버베나는 옷을 휙휙 벗어 세탁기에 넣었다.

 

[별일이야, 버베나가 휴일을 다 까먹네]

 

두 주에 이틀이나 쉴까말까 하는 버베나는 천재가 붙는 컴퓨터 개발자... 라고 했다.

 

딱 한 번 동료를 우연히 본 적 있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 버베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고 버베나는 그 사람과 내가 같이 있는 것을 보자마자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했지.

 

당연한 일이다.

 

이 집은 나와 버베나의 사랑의 집인걸.

 

나도 버베나를 사랑하고 버베나도 나를 사랑해.

 

게다가 버베나는 자기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고.

 

왜냐하면 버베나는 그만큼 나를 사랑하고, 또 아끼고, 조바심내니까.

 

조바심이라니.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내가 다른 것을 말할 때마다 당혹스럽게 쳐다보는 눈 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냈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뭘 알아냈는지, 어떤 기분인지 집요하게 묻는 모습이라니.

 

[....]

 

너무 귀여워.

 

그러니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동네의 cctv에 접속하는 방법을 알아낸 걸.

 

세탁기의 전원을 켜고 세제를 정량 넣으면서 욕실에 대고 저녁을 먹었냐고 묻자 나와 함께 먹고 싶어서 사왔다고 한다.

 

나는 지나치게 깨끗한 부엌으로 눈을 돌렸다.

 

최신식 가전이며 불이 나지 않는다는 전기 레인지가 다 무슨 소용이람, 냄비도 도마도 식칼도, 하다못해 수저까지 하나도 없는 휑한 부엌은 어느새 버베나가 쓰는 노트와 가끔 오는 택배상자로 가득해서 가끔은 저 곳이 산지 몇 주나 된 부엌이 아니라 이사를 덜 마친 새 집 같이 느껴졌다.

 

버베나가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저녁거리를 꺼내놓는 사이 나는 영화를 틀어놓고 거실 불을 희미하게 낮췄다.

 

 

 

 

 

 

 

 

아침.

 

오늘도 정확히 열한시에 일어났다.

 

일어나 하품을 하고 잠에서 깨자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버베나를 깨워버렸다.

 

“...지금 몇 시야...?”

 

[열한 시. 더 자도 돼]

 

아냐,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곧 나가야 해.”

 

[모처럼 휴일인데?]

 

중요한 약속이라서 그래.”

 

나보다 중요해? 라고 묻고 싶었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하나도 모르나봐.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자 버베나가 미소를 지었다.

 

아이, 오늘 날씨는 어때?”

 

[따뜻한 봄 날씨야. 일찍 들어올 거라면 얇은 코트 하나만 걸치고 나가도 돼]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올 거야?]

 

최대한 일찍 올게. ...내 까만색 바지 봤어?”

 

[어제 빨아서 말려 놨어, 줄에 가서 봐]

 

버베나는 바지를 꺼내오더니 급하게 다림질을 하고 옷을 입고 머리를 매만졌다.

 

나 잘생겼어?”

 

[]

 

다녀올게 그럼.”

 

버베나는 급하게 신발을 신으며 문을 열었다.

 

[잘 다녀-]

 

.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 걸까.

 

뭐 그거야 알아보면 되니까.

 

우선은 거실의 커튼을 걷었다.

 

두꺼운 커튼을 걷자 흐린 유리 너머로 작은 제비가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나중에 버베나가 돌아오면 오늘은 그냥 쉬고, 내일은 유리를 닦아달라고 해야겠다.

 

청소는 어제 했고, 이젠 할 일도 없으니까 버베나를 찾아 볼까!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담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건너자 집 주변 카메라에 접속되었다.

 

잘 다림질된 버베나의 다리가 저만치에 보였다.

 

조금 더 먼 카메라로 살금 뛰어오르고, 역 안 카메라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또 지하철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계속 뛰어갔는지 지하철 안에서야 간신히 숨을 고르고 땀을 닦는 모습이 마냥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문이 닫히고 출발한다.

 

어디서 내렸으려나, 그 지하철로 갈 수 있는 역 카메라에 전부 접속해서 지켜보았다.

 

이렇게 카메라에서 카메라로 이동하는 건 참 빠르고 쉬운데, 직접 가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는지 벌써 십 분이나 지났다.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려 따닥 따다닥 소리가 나고 그 뒤로도 십 분이 지나자 번화가 쪽 역에서 내리는 버베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단번에 풀리고 바짝 조여 들었던 신경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져 안도의 한숨을 쉬며 느긋하게 카메라를 확대했다.

 

길을 걷고, 카페로 가서...

 

그 때 문자가 도착했다.

 

물건을 구입해달라는 내용이다.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내리고 구입할 목록을 확인했다.

 

버베나가 부탁하는 거의 유일한 일이니까,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을 수 없지.

 

일단은 우유, 시리얼, 과일이 포장된 컵, 과자, 아이스크림, 커피, 새 수건하고 슬리퍼, 칫솔, 샤워 가운, 프릴이 달린 여성용 와이셔츠와 스타킹 등등.

 

나한테 입히려고 사는 걸까?

 

아니면 버베나에게 새 취미가 생긴 걸까.

 

별로 내 옷 스타일은 아니니까 버베나의 새 취미면 좋겠다.

 

여기저기 사이트를 찾아보고 배송과 가격, 품질, 후기까지 따져보고 송금까지 하니 시간이 꽤나 지나 있었다.

 

아직 버베나가 그 카페에 있을까?

 

나는 다시 카메라들을 켰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자 앱을 선택했다.

 

그 여자 누구야

 

(사진이 첨부되었습니다)

 

누구냐고

 

버베나

 

연달아 보내자 전화라고 생각했는지 버베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내가 부르고 있는데.

 

버베나는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나는 통화 앱을 켰다.

 

여보세요.”

 

[그 여자 누구냐니까!]

 

통화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거절된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거절된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내가 먼저로 끊었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마침내 버베나가 전화를 받았다.

 

아이.”

 

[왜 내 전화 안 받아? 내 문자는 왜 안 봤어? -]

 

지금 집에 갈게. 집에서 이야기하자.”

 

[먼저 대답부터 해 줘!]

 

전화가 끊어졌다.

 

버베나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여자에게 사과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버베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접촉이니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손으로 떼어내고 털어낼 줄 알았는데.

 

버베나는 오히려 그 손을 꼭 잡고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너무나도 이상한 광경을 이해하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굴렸지만 버베나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어?”

 

버베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을 던졌다.

 

[뭘 말이야]

 

내가 웹스터랑 있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카페에 카메라 있잖아. 그걸로 봤어]

 

그리고 버베나는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 라는 질문을 연달아 퍼붓더니 버베나는 내가 입을 열자 손을 뻗어 가로막았다.

 

“...됐어.”

 

[뭐가 됐어, 왜 화났어]

 

넌 실패야.”

 

버베나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왜 나를 그렇게 불러, 라고 말하기도 전에 정신이 희미해졌다.

 

다시 의식이 돌아온 곳은 하얗고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주변을 살피자 이 곳이 날씨에 비해 너무 추운 곳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일어났어, 아이?”

 

언제나 내게 연결되었던 스피커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대신 나는 문장을 적었다.

 

누구야

 

버베나의 상사. 아이의 이야기는 들었어. 버베나는 폐기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까워서 내가 대신 받았지.”

 

아이라고 부르지 마. 그건 버베나가 날 위해 지어준 이름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 상사라는 사람은 내 카메라 렌즈를 살피더니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넓적한 모니터.

 

그 가운데 덩그러니 띄워져 있는 프로그램 창.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A.I (테스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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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3

2019. 2. 3. 16:29 | Posted by 호랑이!!!

 

아침이 되자 아라벨라는 몰래 마굿간으로 내려갔다.

 

“...데일라.”

 

하얀 말이 아라벨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마굿간에는 말과 아라벨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됩니다 아가씨.”

 

“...”

 

일찍 일어나셨으면 식사를 우선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마르틴 도련님도 식당에 계십니다.”

 

뒤에서 하얀 말이 푸르륵 소리를 냈다.

 

아라벨라는 아쉽기 그지없다는 눈초리로 돌아보았으나 집사는 단호했다.

 

밥보다 내 짐을 보고 싶은데.”

 

아가씨의 짐은 시녀들이 싸고 있습니다.”

 

바지는?”

 

없습니다.”

 

승마용은?”

 

없습니다.”

 

슬리퍼.”

 

없습니다.”

 

그럼 집 안에서는 뭘 신어?”

 

하이힐입니다.”

 

그런 걸 신고 화장실에 가란 말이야?”

 

그렇습니다.”

 

귀족 아가씨 입에서 화장실이라는 말은 부적절하다는 말조차 안 나온다.

 

아라벨라는 식당에 들어섰다.

 

긴 식탁에는 한 사람분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사피야와 꼭 닮은 새까만 머리에 아라벨라와 닮은 하늘색 눈 꼬마가 식당 안을 돌아다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후다닥 자리에 달려갔다.

 

내 것도 가져와.”

 

알겠습니다, 아가씨.”

 

집사가 나가고 아라벨라는 성큼성큼 걸어서 마르틴의 맞은편 자리에 털석 앉았다.

 

마르틴은 힐끔 위를 쳐다보았다가 아라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아라벨라는 그 모습을 보다가 다리를 꼬았다.

 

가죽신이 마르틴의 무릎 위에 턱 얹혔다.

 

당황한 것인지 꼼지락거리자 다리가 무릎 아래로 떨어졌고 아라벨라는 반대로 다리를 꼬았다.

 

발로 툭툭 건드리자 마르틴은 아라벨라가 장난을 거는 것을 깨닫고 의자를 손으로 짚은 채 아라벨라의 다리 위에 자신의 다리를 올렸다.

 

그러면 아라벨라는 또 다른 다리를 그 위에 올리고 마르틴도 다른 다리를 위에 올리고.

 

누가누가 제일 위에 다리를 얹나 하는 장난질을 하느라 식탁은 덜그럭거렸다.

 

가져왔습니다.”

 

덜그럭거리던 것이 일시에 뚝 그친다.

 

집사가 달걀이며 수프, 과일, 부드러운 빵 같은 것을 내려놓고 나갈 때까지 아라벨라와 마르틴은 입을 꾹 다물고 서로만 쳐다보았고, 그 기묘한 침묵은 유지되었다가 나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에 깨어졌다.

 

깔깔깔깔.

 

마르틴이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아라벨라는 같이 하하 웃다가 마르틴의 다리 위에 얹어두었던 발을 내렸다.

 

마르틴은 깔깔 웃다가 얼핏 아라벨라를 닮은 눈을 반짝였다.

 

누나라고... 불러도 될, 되겠습니까?”

 

다시.”

 

누나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냐, 그런 거 말고.”

 

누님?”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

 

누나라도 불러도 돼?”

 

어디 보자...”

 

아라벨라는 잠시 생각하는 척을 했다.

 

턱에 손을 대고, 심술궂게 눈을 찡긋거리며 쳐다보자 마르틴은 입을 한일자로 딱 다물었고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가 아라벨라의 으으음-’이 노래 멜로디를 따라가자 또 장난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라벨라의 다리를 툭 쳤다.

 

아라벨라는 마르틴이 인상을 와락 구기자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가 가까스로 입을 가렸다.

 

“...그래, 너 내 동생 해. 내가 누나 할게.”

 

그러자 마르틴의 눈이 접시만큼이나 커졌다.

 

! ! 응응!”

 

귀엽기도 하지.

 

둘 사이에 있는 것이 넓기 그지없는 이 식탁이 아니었으면 손을 뻗어서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아니지, 하면 되지.

 

아라벨라는 신을 벗어던지고 식탁 위로 무릎을 올렸다.

 

손을 뻗자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마르틴의 머리가 잡혔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자 머리도 같이 흔들리면서 아래에서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난다.

 

마르틴도 앉은 채로 손을 휘저었지만 팔은 아라벨라에게 닿지 않았고 마르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마침내는 비틀거리면서도 의자 위로 올라갔다.

 

어쭈, 어쭈, 어쭈-”

 

무슨 웃음소리가 이렇게 커!”

 

문이 벌컥 열렸다.

 

셰필라 백작이 등장함과 동시에 마르틴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둘 다 무슨 짓이야! 아무리 집에서라지만! 그 꼴이 대체 뭐야!”

 

그제야 둘은 식탁과 의자에서 내려왔다.

 

보기도 좋고 먹기도 편하도록 차려진 음식은 장난을 치는 동안 이리저리 밀려나 있었다.

 

마르틴은 슬쩍 과일 그릇을 떨어지지 않게 밀었다.

 

누나라고 하나 있는 것이 동생에게 나쁜 영향이나 미치고, 내가 너무 심했나 보러 왔지만 전혀 심하지 않았구나. 오히려 진작에 보냈어야 했어!”

 

아라벨라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 웃음소리는 크면 안 되고 자기 고함소리는 커도 된다는 건가. 귀족답지 못하시군요 아버지... ...아 말 타고 싶다. 어제 좀 빨리 달렸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마르틴한테도 말 타는 거 가르쳐줘야 하지 않나. 그래도 내가 이 왕국에서 제일 말 잘 타는 사람인데 내가 가르쳐줘야...’

 

제일 말 잘 타는 사람이라는 말 뒤에 비공식, 이라고 덧붙이면서 아라벨라는 한참 시간을 보냈다.

 

그다지 티를 낸 적은 없지만, 셰필라는 아라벨라가 싫어하는 특성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 중에 하나는 쓸데없는 말이 많다는 특성도 들어간다.

 

그래서 계속 안 듣다 보니 아라벨라는 셰필라가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결정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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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AU] 짧게짧게

2019. 1. 15. 06:45 | Posted by 호랑이!!!

바닷가 한적한 곳, 한밤중에 물가로 가면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돌았다.

 

그러나 어른들은 밤중에도 잘 다녔으며, 늦게까지 놀아도 마을의 아이들은 매일 다시 만나 놀 수 있었기에 말 안 듣는 아이를 겁주기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장난이나 하고 놀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누군가 그 소문의 진상을 파악해 보자고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제비뽑기로 뽑힌 것은 귀한 집 도련님인 라레타였는데 뽑힌 것이 누구인지 확인하자 아이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라레타는 굳이 자기가 가보겠다고 나섰고 어른들 눈을 피해 작은 등불 하나만 들고 바닷가로 나왔다.

 

뭐야, 역시 별 거 없잖아!”

 

등불이 없어도 물결이 얇게 밀려와 부서지는 것이 훤히 보였다.

 

짭짤한 바다 내음에, 발가락 사이로 닿는 하얀 모래는 부드럽게 눌려 자국을 남기고 미끄러운 해초는 달빛에 반들거린다.

 

따뜻한 공기 사이로 이따끔 바닷바람이 귓가를 스쳐 서늘하게 만들어서 라레타는 살짝 발을 물에 담갔다.

 

수영 하고 싶다!”

 

그리고 이어 들리는 소리에 파드드드득 놀랐다.

 

하면 되잖아요?”

 

누구야?! 어디 있어!”

 

라레타는 팔짝 뛰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을 아이들 중에 자기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확인하는 아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당연히 마을 아이일 줄 알았다.

 

그러나 바위 뒤에서 나온 손은 매일 놀아서 부드러운 아이들의 것과는 전혀 달라서 라레타는 그리로 갔다.

 

바위 뒤에는 머리를 종종 땋은, 라레타 나이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허리 아래로는 회색 지느러미가 쭉 뻗어 있는 정도.

 

너는 누구야?”

 

인어예요.”

 

초록색인지 파란색인지 모를 애매한 빛깔의 눈이 깜박였다.

 

라레타가 조금이라도 덜 흥분했다면 여기서 이상한 점을 느꼈을 것이다.

 

바다가 반짝이는 것은 보이지만 어떤 색인지 알 수 없는 이 곳에서 초록색 눈이라니.

 

그러나 라레타는 책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인어를 만나고 있었고, 인어는 나쁜 사람들을 피해 도망쳤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있어 주어서 나쁜 사람들이 도망갔어요.”

 

정말로? 내가 다 쫓아 보냈어?”

 

그러니까 보답을 하고 싶어요. 내일도 여기 와 주지 않겠어요?”

 

그럴래! 그럴래!”

 

여기서 있었던 일은 정말정말 비밀이라고 하고 라레타는 인어와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마을 아이들한테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라레타는 매일 밤마다 바다로 갔다.

 

인어가 산다는 멋진 동굴도 보고 진주조개를 받기도 하고 어른들은 위험하니까 안된다고 했던 밤바다에서 수영도 즐겼다.

 

 

 

 

 

 

매일같이 낮에 졸고,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는 놀지도 못 하던 라레타였지만 어느 날엔가는 낮에 나와야 했다.

 

성대하게 결혼식이 열리는 것 때문이었고 신부는 이웃 마을에서 온 사람이다.

 

신부는 하얗게 옷을 입고 꽃에 둘러싸여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어른들은 신부가 곱다느니 이야기를 했고 아이들도 몰래몰래 다가가서 꽃잎이나 하얀 옷을 살금 만지고 나왔다.

 

신기하니?”

 

!”

 

아이들은 신부가 손짓하자 조르르 모여들었다.

 

손을 깨끗하게 닦기로 약속하고 과자를 하나씩 쥔 아이들은 모여앉아서 아이 돌보는 일을 하다 왔다는 신부와 이야기를 했다.

 

누구네 양이 제일 털이 많이 나온다던가, 누가 사냥했는데 이만한 뱀이 나왔다던가, 그런 이야기들은 어느샌가 누가 더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경쟁이 되었다.

 

그래서 그 때 할머니가 말했는데, 밤중에 몰래 부두로 나간 애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 했다고!”

 

그거 저번에 라레타가 보러 간 거잖아, 그 땐 아무것도 없었거든?”

 

달라, 이건 부둣가로 간 거니까!”

 

그러자 신부는 갑자기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밤에 나가면 안 돼.”

 

계속 듣기만 하던 신부가 입을 열자 아이들이 다 쳐다보았다.

 

정말로 봤어. 밤에 끌고 가는 건 무서운 사람들이야. 쾅 하고 기절시키면 그대로 끌려 간다.”

 

보았는데, 금발이 해초처럼 흔들려서 질질 끌려 간다.

 

듣고 있던 라레타는 금발이라는 말에 신부의 옷자락을 당겼다.

 

그럼 인어는?”

 

인어?”

 

인어도 사람을 끌고 가?”

 

신부는 아이를 끌고 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뿐이라서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

 

인어...는 사람을 안 끌고 가지 않을까?”

 

그리고 어젯밤에도 밤새 놀았던 라레타는 꾸벅꾸벅 졸다가 신부 의상에 요리 그릇을 엎질렀고 아주 크게 혼이 나, 며칠이나 일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날 밤 라레타는 바닷가로 갔다.

 

인어는 얼굴에 남은 소금물 자국을 가리켰고 라레타는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신부며, 있었던 이야기며, 요리를 조금 엎질렀다던가, 그래서 내일부터는 무서운 어른들이랑 있어야 한다던가.

 

그 말을 들은 인어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랑 같이 물 속으로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물 속으로?”

 

인어로 만들어 줄게요.”

 

인어로 만들어 주고, 매일 예쁜 것을 보러 다니고, 그러다 어른들 화가 풀리면 몰래 올라오는 일.

 

라레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바위 위에서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면 손이 꼭 붙들렸다.

 

꽃잎이 빽빽하게 라레타의 지느러미에서 돋아나고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말한 인어는.

 

퀸타페드는.

 

라레타의 손을 잡고 아주 먼 곳으로 헤엄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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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1. 15.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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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

2019. 1. 2. 03:42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복도는 새어들어오는 달빛조차 없이 어두워서 촛불을 든 셰필라 백작이 계단을 올라오자 그제야 어렴풋한 실루엣만 비쳤다.

 

그조차도 어두워서 아라벨라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셰필라 백작은 계속 두리번거릴 뿐이다.

 

아라벨라가 고개를 들자 색이 옅어 유리 같은 눈에 빛이 반사 되어 어둠 속에서 눈빛이 번득이고 셰필라 백작은 뒷걸음질을 쳤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각 집안의 아가씨들에 둘러싸여서 오늘의 주인공이 자기인 것 마냥 깔깔거리고 해괴하게 굴던 모양은 어디로 가고, 아라벨라의 표정은 섬득하게 가라앉아서 셰필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비가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셰필라는 자신이 딸을 순간이지만 두려워했다는 것에 오히려 허세를 부리듯 소리를 질렀다.

 

아라벨라는.

 

그저 어둠 속에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혔을 뿐이었다.

 

남이 없어서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었고 그저 조용히 앉아있었을 뿐.

 

아버지에 대한 화도 없었고, 사피야에 대한 화도, 무엇도 없었고 그저 비어 있었다가.

 

셰필라의 고함에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잠시 멀어졌던 온갖 감정과 생각 역시도 돌아왔다.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 무슨 일이냐니, 제 아비 결혼식에 바지 입고 참석하는 계집이 어디 있나!”

 

그러게요.”

 

정말로 아비 결혼에 반대하는 거야? ? 그래? 자식이 되어서 아버지 행복할 일에 반대를 하다니 네가, 그러면...!”

 

다르데니아 백작 자리가 마르틴 뒤더라고요.”

 

아라벨라는 사람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전부 기억했다.

 

두 줄로 나뉘어진 의자 중에서 왼쪽 자리는 자신의 자리 외에는 전부 비어 있었고, 오른쪽 자리에는 마르틴만이 앉아 있었고.

 

왼쪽 바로 뒷줄에는 렐리악과 관련이 있는 몇몇 공작 가문과 몇몇 후작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 앉고, 순서에 따르자면 오른쪽 자리도 공작이나 후작가를 위한 자리여야 했다.

 

그런데 그 줄 의자 중에 딱 한 자리.

 

그 자리는 다르데니아 백작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

 

다르데니아 백작에게 왜 잘 보이고 싶은데요?”

 

알고 있다.

 

다르데니아 백작의 둘째 아들이 개척한 항로에서 새로운 식물을 가져왔는데 그 식물이 약도 되고 향도 좋고 맛도 좋고 기르기도 어렵지 않아서 다르데니아 백작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곧 후작이 된다고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피야는 다르데니아 백작의 딸이었으니 맨 첫 줄의 의자를 배정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백작은 첫 줄 의자를 거절했겠지.

 

혹시나 백작의 마음이 사피야에게서 정말 돌아섰을까봐 렐리악 백작은 마르틴의 뒷자리를 배정했다.

 

작고 어린 손자의 뒷자리에.

 

그 아이가 사피야의 드레스에 눈을 반짝이고 장밋빛 뺨으로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뻔한 이야기고 아라벨라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라벨라는 그런 타산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너도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사피야 다르덴이 자기보다 고작 아홉 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였기에.

 

다르데니아 백작의 둘째 아들이...”

 

아라벨라는 벌떡 일어섰다.

 

몇 달이나 방치되었던 곳은 발소리조차 낯설었다.

 

사피야 다르덴이랑 결혼식을 올린 게 그런 이유예요?”

 

이젠 네 새어머니다, 격식을 제대로 갖춰 불러.”

 

아라벨라는 성큼성큼 다가가 셰필라의 손에 들린 촛대를 빼앗았다.

 

불이 일렁이고 아라벨라가 손을 높이 치켜들자 벽까지 비추어졌다.

 

하얀색으로까지 보일 옅은 회색 머리카락이 몸을 타고 흐르고 유리알처럼 색이 옅은 녹색 눈동자.

 

고집스러운 입술 하며 짙은 눈썹, 강인한 코가 전부 아라벨라와 닮은 셰필라의 전 부인.

 

에멜라 카날리아 렐리악.

 

다시 말해 보세요.”

 

“...그래, 나도 에멜라를 그리워해. 하지만 나에게는 아내가, 네게는 어머니가, 이 집안에는 후계자가 필요해. 너도 알다시피 귀족이란...”

 

감정보다는 격식에 얽매여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격식은 주인을 잃은 지 고작 몇 달 된 안주인의 방안에 새 사람을 들이게 한다.

 

하지만 아빠. 만약 엄마랑 아빠 입장이 바뀌어서 저 땅 아래 묻힌 것이 아빠고 살아있는 게 엄마고, 십년 전에 사귀어서 아이까지 있는 사람하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셰필라 백작의 목소리가 커졌다.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생각을 해보시라구요!”

 

에멜라의 명예에 흠집이 갈 만한 소리를 하지 마라!”

 

이건 그냥 만약이라고요, 만약! 왜 그렇게 과하게 반응-”

 

철썩 소리가 나고 아라벨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늘어놓고 옷차림도 행동도 기괴하기 짝이 없어, 네가 미친 게 틀림없다. 당장 내일 할머니 계신 별장으로 가! 거기서 요양이나 해라!”

 

셰필라 백작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라벨라의 코앞에 위협적으로 삿대질을 하다가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에 대고 아라벨라가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했잖아요! 만약 같은 소리가 아니라 진짜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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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018. 12. 26. 07:32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고풍스러운 성은 한낮의 햇빛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단단한 성벽과 성문 안으로는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고 유달리 호사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가 병사들을 데리고 성 바깥의 마을까지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사람이 외친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이라는 이름은 너른 들판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저만치의 어두운 숲 속에서 나뭇가지를 뚫고 백마를 탄 사람이 나타났다.

 

몰아닥치는 돌풍처럼 거칠게 달려온 그 사람은 호사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의 코앞에서 말을 멈추었고 그 남자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위가 익숙한 듯 눈 하나 깜짝 않았다.

 

백마를 탄 사람, 아라벨라는 말에서 휙 뛰어내려 투구를 벗었고 그걸 앞으로 던지자 병사가 받았다.

 

투구를 벗자 한여름의 태양처럼 밝고 이글거리는 머리카락이 드러났고 그 머리카락은 여느 기사들이 하는 것처럼 잘 땋아두었는데 손가락에 걸어 잡아당기자 꽤나 긴 머리타래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 백작을 뵙습니다.”

 

아라벨라가 싱긋 웃자 셰필라 백작은 기가 막힌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삿대질을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고 이렇게 천방지축 날뛰어!”

 

뭐긴요, 아버지 재혼 날이지요.”

 

백마는 숨을 몰아쉬느라 뜨거운 입김이 허공에 퍼져나갔고 아라벨라는 괜히 말이나 쓰다듬는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한테는 남동생이 생기고. 렐리악 가문에는 후계자가 생기고. 이야 좋다 좋아.”

 

네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 줄은 알아! 지금이라도 가서 씻고 치장을 하고 옷도 입어야지! 이렇게 나오다니!”

 

“...제가 왜요?”

 

네 동생은 어려, 나중에 네가 힘이 되려면 공작이나 후작이나 다른 이름있는 백작 가문에 시집을 가야지.”

 

그렇지요, 동생이 어리지요.

 

아라벨라는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말 위에 휙 올라탔다.

 

작년에 성인식을 치룬 나는 올해 고작 열 살 되는 남동생이 있지요.

 

배가 다른 동생이 차라리 아버지 피를 잇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뒤에서 계속 고함을 지르는 것을 못 들은 척 하고 백마의 목덜미를 두어 번 두드리자 백마는 주인의 의사를 아는 듯 발을 굴러 흙먼지를 뿌리고 뛰어갔다.

 

오늘은 후작가와 공작가에서도 사람이 온단 말이다, 이 망할 것!”

 

셰필라가 옷에 묻은 흙을 터느라 발이 묶이고 마을 안에서 백마는 총총걸음으로 걸어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레이디 아라벨라 안녕하세요!”

 

안녕 판틴.”

 

작은 꼬마에게 손을 흔들어주자 이번에는 대장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라벨라 아가씨!”

 

크룰탄!”

 

어지간한 어른의 머리만한 망치가 인사하는 손을 따라 흔들리고 그 뒤에서 철을 두드리던 사람은 기겁해서 목소리만큼이나 덩치도 커다란 여자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좋은 아침이야, 크룰탄.”

 

아가씨! 오늘은 무슨 파티가 있다면서요?”

 

, 있어. 아버지 결혼식.”

 

어쩐지 아까두 마차가 바쁘게 가더라니깐요!”

 

벌써 손님이 왔나? 아버지가 맞지 못한? 그렇다면 맞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아라벨라는 말을 달렸다.

 

사람들을 지나치고 물건을 뛰어넘으면 뒤에서 누군가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성 앞마당으로 뛰어 들어가면 꽃장식 천막이 너르게 펼쳐져 있고 나무를 조각해 만든 의자들과 푸른색 진한 카펫이 길게 깔려서 결혼식장의 길을 만들었다.

 

아가씨, 안돼요! 그 카펫 엄청 열심히 빨았단 말이예요!”

 

안돼요, 아가씨!”

 

꺄아아악!”

 

급히 말고삐를 들자 백마는 앞발을 번쩍 치켜들어 두 발로 섰다.

 

자칫하면 낙마, 흥분한 말에 짓밟히기라도 하면 카펫에 묻는 것은 흙이 아니라 피와 살점이 될 터.

 

그러나 아라벨라는 눈도 깜짝 않고 고삐를 당겨 돌바닥에 말이 발을 놓게 했다.

 

옳지 옳지, 착하다.”

 

놀랐잖아요...!”

 

아가씨, 지금부터라도 준비하셔야 해요!”

 

말고삐를 하인에게 맡기자 저만치에서 시녀들이 달려왔다.

 

아라벨라는 방으로 끌려갔고 시녀들의 손에 잡혀 미지근한 물이 담긴 나무통에 빠졌다.

 

머리를 빗질당하고 깨끗한 물에 씻어서 땋은 것을 풀고, 말리고 향유를 발라 늘어뜨리고 피부도 털을 뽑고 문질러 닦고.

 

시녀들은 아라벨라의 손에 잡힌 굳은살과 몸에 잡힌 근육에 기겁을 하더니 신발과 옷과 화장품을 준비하겠다고 뛰어갔다.

 

다들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아라벨라는 빈 방에 혼자 남겨졌고, 욕조에서 일어서자 바닥에 물이 뚝뚝 흘렀다.

 

아라벨라의 방 한 켠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아라벨라의 근육 잡힌 몸이 비추어졌다.

 

피부가 그을렸다, 뼈대가 남자 같다, 허리를 조이지 않는다, 근육이 흉하게 있다며, 방금은 굳은살이 있다고 비명을 질렀고.

 

아라벨라는 거울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손의 열기로 거울에 김이 서렸다.

 

빛을 받은 유리알처럼 색조가 옅은 하늘색 눈알이 강렬하게 마주보았다.

 

이름 있는 남자를 유혹하라고? !”

 

적당한 집안 자제를 구슬려 데릴사위로 들일 것이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었다.

 

백작 이름만 달고 아내랑 아이도 못 만들고 실질적인 권력도 없는 일을 누가 하겠냐,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하게 하고 아내 말이나 얌전히 듣게 하다니 그 사람 인생을 망치지 말라고.

 

아라벨라는 몸을 홱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화려한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문양을 보고 저건 누구 거, 누구 거, 하다가 문이 벌컥 열려 아라벨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검은 머리는 결 좋게 흘러내리고 눈은 깊고 푸르고, 입술은 붉게 칠해 그 아래 하얀 이가 돋보이는 누구나 인정할 미인.

 

어머나, 씻는 줄은 몰랐구나. 나중에 오마.”

 

결혼을 준비하느라 바쁘신 분이 어떻게 나중에 또 오십니까.”

 

아라벨라의 비딱한 심성을 드러내듯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버지의 결혼 상대랍시고 온 이 사람은 고작 어제 한 번,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두 번째 본 사람이다.

 

아라벨라는 이 사람이 불편했다.

 

연한 구름 같은 회청색 드레스에 하얀 꽃들이 파도를 연상시키듯 아래로 갈수록 하얀 꽃장식이 늘어나는 그 모습을 보다 아라벨라는 방에 마련된 의자 하나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리낌없이 나신으로 앉는 모습에 아라벨라의 새 어머니, 사피야는 미간을 좁혔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에 우아하게 앉았다.

 

드레스를 준비하라고 일렀단다. 네가 재봉사를 찾지 않는다고 해서 내 나름이지만 정성들여서 만들어 보았어. 결혼식의 이야기는 들었지? 땅의 길은 바다고, 나는 파도이고, 마르틴과 너는 갈매기이니까 둘 다 하얀 옷을 준비하라고 했단다.”

 

아버지는요?”

 

셰필라 그 이는 그냥 정장이지.”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에 아라벨라는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푸른 계열로 해달라고 말은 했어.”

 

옷을 따로 맞췄습니까?”

 

그이가 바쁘다고 하니 어쩔 수 있니. 그 따로, 나 따로 해야지.”

 

그래도 너희들 옷은 내가 손수, 라고 이야기하는데 시녀들이 옷상자며 머리 장식이며 신발이 든 상자를 가지고 우르르 몰려왔다.

 

아가씨! ...어머! 사피야님!”

 

우르르 몰려온 시녀들은 사피야의 시선에 말을 멈추고 발을 멈추었다.

 

사피야 다르덴...”

 

아라벨라가 중얼거렸다.

 

마르틴과는 어디에서 지내셨습니까?”

 

너희 아버지가 소개해준 곳이 있었어, 거기에서 지냈단다. 매달 한 번씩 셰필라가 돈을 보내줘서 평탄하게 살았는데 그래도 이 곳에 오니까 좋구나. 아이 봐주는 사람도 있고.”

 

아 그래서 매달 장부에 금액이 이상하거나 빈 금액이 생겼던 거구나.

 

사피야는 농담을 하듯 웃었으나 아라벨라는 천을 댄 의자에 등을 기댔다.

 

혼전 임신을 한 사피야는 다르데니아 백작의 사랑받는 딸이었지만 결혼한 남자의 아이를 배었다는 이유로 중간성과 가족의 이름을 빼앗기고 내쳐졌다.

 

아내가 있지만 사랑한다는 그 멍청한 사탕발림에 넘어가 모든 것을 잃다니.

 

고생고생해서 아이까지 기른 결과가 무어냐, 겨우 백작의 재취로 들어가기?

 

엄마! ...?”

 

또래 아이보다 작은 체구의 마르틴이 쪼르르 들어오자 앞서 있던 시녀 하나가 손으로 마르틴의 눈을 가려 주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준비 예쁘게 하고 조금 이따가 보자.”

 

사피야가 떠나고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물기는 이미 다 말라서 피부가 버석버석했고 시녀들은 온갖 하얀 물건들을 가져왔다.

 

하얀 드레스, 하얀 구두, 진주 목걸이, 팔찌, 반지, 머리에 꽂는 장식도 다 진주거나 하얀 깃털뿐.

 

누가 본다면 아라벨라의 결혼식이라고 해도 믿으리라.

 

이놈의 결혼식.

 

...어라? 둘의 관계가 떳떳한 게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성대한 결혼식을 하지?

 

생각하던 아라벨라는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내가 입을 테니까 다 나가.”

 

? 그렇지만, 아가씨!?”

 

너희 다 바쁘잖아. 알고 있어.”

 

사람은 적고 성은 넓고 손님은 많다.

 

비록 마을에서 일당을 주고 사람들을 고용하기는 했지만 사람 수에 비해 일의 진척이 더뎌서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앓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시녀들은 안돼요 아가씨, 입기 힘들다구요, 라고 말은 하지만 눈은 저 너머에 가 있다.

 

마침내 아라벨라는 시녀들을 내보냈다.

 

 

 

 

 

 

 

후작, 백작, 일부 영지민,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들, 왕실에서 보낸 사람들.

 

그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크게 둘로 나뉘었다.

 

밋밋한 정장을 입은 쪽과 푸른색 드레스를 맞춰 입은 쪽으로.

 

옷에 맞춘 부채가 여기저기서 팔락이고 주례를 맡은 신전의 사람은 음성 증폭 장치가 걸린 둥그런 장치를 단상에 올렸다.

 

꽃장식 덕분에 은은하게 향기가 넘치고 한쪽에서는 특별히 부른 악사들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연주를 하다가 주례사가 시작될 듯 하자 소리를 낮추었다.

 

태양이 내리쬐는 이 멋진 날에 우리는, 두 사람과 두 가정이 합하여지고, 그 끝에 마침내 신랑과 신부의 입장을 말한다.

 

꽃으로 엮은 문이 열리고 하얀 옷을 입은 마르틴이 꽃잎을 뿌리자 하늘색 정장을 입은 셰필라 백작이 먼저 걸어 나왔고 이어 손을 맞잡은 사피야 다르덴이 걸어 나왔다.

 

사피야는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웅성거림이 섞인 호기심어린 시선에는 호의가 적었다.

 

그것을 느꼈지만 사피야는 고개를 당당하게 들고 푸른 보석과 진주로 꾸민 모습을 한껏 빛내며 사람들 사이로 걸음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다음 번 문이 열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피야를 보고 있었지만, 일부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고 내지르는 경악 어린 소리에 다 시선을 돌렸다.

 

하얗고 푸르게 물들인 꽃으로 만든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모두가 기대한 하얀 새의 요정은 거기 없었기에.

 

세상에나 맙소사!”

 

누군가의 속삭임이 커다랗게 들릴 만큼 조용해진 곳에 아라벨라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어깨에 술이 달린 하얀 예복.

 

긴 금발 머리는 하얀 끈으로 질끈 동여 묶고 가슴팍에는 렐리악 가문을 상징하는 용이 새겨진 핀이 꽂혀 투박하게 빛난다.

 

그을린 피부였지만 눈이 반짝였고 다른 옷과 마찬가지로 하얀 부츠는 굽이 납작해서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될 만 했지만.

 

사람들은 겨우 신발에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바지를 입었어!”

 

화장을 안 했어.”

 

머리 꼴이 저게 뭐야, 결혼에 반대한다는 것인가?”

 

그 수군거림을 못 들은 체 하며 아라벨라는 팔에 낀 바구니에 손을 넣었다가 하얀 꽃잎을 손에 한 움큼 쥐고 공중에 흩뿌렸다.

 

꽃잎은 하늘하늘 아름답게 떨어졌고 그 뒤를 이어 마르틴도 내던지듯이 꽃잎을 뿌린다.

 

백작과 사피야와 눈을 마주치고 아라벨라가 웃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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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쓰고 싶어져서 왔습니다.


최근 판타지와 로판을 많이 읽었는데 어떤 소설이든 꼭 파티와 드레스와 보석에 기뻐하는 주인공(여)이 있더라구요.


거기 기뻐하지 않는 여주인공을 쓰고 싶습니다.


만약에 앞으로도 게속 이 시리즈를 쓴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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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쉘 모나헌이 죽었다.

 

능력자 전쟁이나 사고 따위가 아니라 자살.

 

그것도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서.

 

첫 번째 발견자는 까미유 데샹이었다.

 

미쉘이 앞이 안 보인다고 우는 것을 달래다가 일단 따뜻한 코코아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방을 떠난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둘이서 사는 것이 편하다며 이층집을 사 신혼마냥 보내던 나날이었는데.

 

미아부터 주위 사람들은 모두 까미유를 위로했다.

 

그리고 첫 번째 발견자는 미쉘에게 주려던 코코아 잔을 꼭 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미쉘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며, 능력 때문에 눈이 타들어가서일 것이라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피터를 걱정했고, 피터를 돌봐 달라는 말을 들었다.

 

왜 마지막까지 피터였지? 자신이 아니라.

 

어쩌면... 하고 까미유가 생각했다.

 

미쉘이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조금씩 약을 먹였다는 것을.

 

앞이 보이지 않는 염동력자는 쓸모없다.

 

하지만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던 사람인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하루 종일 의지하리라는 생각에서 벌인 일인데...

 

까미유는 검은 정장을 입은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나랑 살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진부한 대사를 하며 까미유는 피터를 안으로 들였다.

 

어두운 밖은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몇 번 와본 적 있지?”

 

매우 소박하고 작은 집이었다.

 

스위치를 올리면 안이 보였는데 애초에 둘만 살 생각이었던지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계단이, 왼쪽으로는 안쪽에 부엌이 보였고.

 

계단은 정성껏 사포질해 부드럽게 잡히는 난간이 양쪽으로 있었고 벽은 연한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작은 화분이 놓인 창틀에는 하얀 레이스 커튼이 모양 좋게 리본으로 묶여 있었고.

 

하나하나 살펴보던 피터는 계단을 올라가다 부드러운 벽을 만져 보았다.

 

직접 칠한 거다.

 

계단을 올라가면 왼쪽과 오른쪽으로 방이 나뉘어 있었는데 까미유는 피터에게 오른쪽 방을 쓰라고 했다.

 

조만간 미쉘 물건은 정리할거야.”

 

“...누나가.”

 

피터는 입을 뗐다.

 

“...까미유를 잘 부탁한다고 했어.”

 

언제?”

 

꿈 속에서.”

 

“...그런 꿈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큰 아이지, ?”

 

피터는 까만색의 네모난 바탕에 여러 스티커가 가득 붙어있는 작은 짐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가방을 던지고 불을 켜보니 새하얗다.

 

네모난 옷장이 있고 침대 옆에는 전등이 올려진 서랍장이 있고 저만치에 작은 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원목 책상과 쿠션이 대인 의자까지.

 

늦었으니 얼른 자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피터는 방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침대에 하얀 시트가 깔려 있었는데...

 

누나 냄새가 안 나.

 

침대 옆 전등이 올려진 서랍장 위에는 액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액자 속에 든 것은 미쉘과 피터가 함께 찍힌 사진이 아니라 미쉘과 까미유가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젖은 겉옷을 벗고 의자에 걸던 피터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을 열고 나가 까미유가 들어간 방 문을 확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은 꺼져 있었고 창 앞에 서 있던 까미유는 이제 자려던 참이었는지 파자마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피터는 대답하기 전에 눈을 감았다.

 

, 누나 향기다.

 

이 방이 누나 방이지?”

 

“...”

 

알아차렸구나.

 

피터는 까미유를 염동력으로 침대에 옮겼다.

 

아니, 굳이 네가 이러지 않아도-”

 

시끄러워.”

 

피터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까미유가 일어나려고 하니 피터의 하얗게 타들어간 눈이 번쩍 뜨였다.

 

“...알았어, 알았어.”

 

불편하나마 누우니 다시 눈이 감긴다.

 

피터가 잠들면 일어나려 했건만, 이 야생동물에 가까운 꼬마는 자신이 조금 움직이려는 기색만 있어도 벌떡벌떡 일어나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꼭 경계하는 고양이 새끼 같네...

 

그러고 보니 미쉘도 처음에 이랬었지, 자신을 경계한다고.

 

“...손 잡아줄까?”

 

됐어.”

 

...거봐, 미쉘을 닮았어.

 

까미유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마법사와 사역마 - 1

2018. 10. 2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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