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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벨라

2018. 12. 26. 07:32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고풍스러운 성은 한낮의 햇빛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단단한 성벽과 성문 안으로는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고 유달리 호사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가 병사들을 데리고 성 바깥의 마을까지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사람이 외친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이라는 이름은 너른 들판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저만치의 어두운 숲 속에서 나뭇가지를 뚫고 백마를 탄 사람이 나타났다.

 

몰아닥치는 돌풍처럼 거칠게 달려온 그 사람은 호사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의 코앞에서 말을 멈추었고 그 남자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위가 익숙한 듯 눈 하나 깜짝 않았다.

 

백마를 탄 사람, 아라벨라는 말에서 휙 뛰어내려 투구를 벗었고 그걸 앞으로 던지자 병사가 받았다.

 

투구를 벗자 한여름의 태양처럼 밝고 이글거리는 머리카락이 드러났고 그 머리카락은 여느 기사들이 하는 것처럼 잘 땋아두었는데 손가락에 걸어 잡아당기자 꽤나 긴 머리타래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셰필라 드라고낙 렐리악 백작을 뵙습니다.”

 

아라벨라가 싱긋 웃자 셰필라 백작은 기가 막힌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삿대질을 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고 이렇게 천방지축 날뛰어!”

 

뭐긴요, 아버지 재혼 날이지요.”

 

백마는 숨을 몰아쉬느라 뜨거운 입김이 허공에 퍼져나갔고 아라벨라는 괜히 말이나 쓰다듬는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한테는 남동생이 생기고. 렐리악 가문에는 후계자가 생기고. 이야 좋다 좋아.”

 

네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 줄은 알아! 지금이라도 가서 씻고 치장을 하고 옷도 입어야지! 이렇게 나오다니!”

 

“...제가 왜요?”

 

네 동생은 어려, 나중에 네가 힘이 되려면 공작이나 후작이나 다른 이름있는 백작 가문에 시집을 가야지.”

 

그렇지요, 동생이 어리지요.

 

아라벨라는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말 위에 휙 올라탔다.

 

작년에 성인식을 치룬 나는 올해 고작 열 살 되는 남동생이 있지요.

 

배가 다른 동생이 차라리 아버지 피를 잇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뒤에서 계속 고함을 지르는 것을 못 들은 척 하고 백마의 목덜미를 두어 번 두드리자 백마는 주인의 의사를 아는 듯 발을 굴러 흙먼지를 뿌리고 뛰어갔다.

 

오늘은 후작가와 공작가에서도 사람이 온단 말이다, 이 망할 것!”

 

셰필라가 옷에 묻은 흙을 터느라 발이 묶이고 마을 안에서 백마는 총총걸음으로 걸어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레이디 아라벨라 안녕하세요!”

 

안녕 판틴.”

 

작은 꼬마에게 손을 흔들어주자 이번에는 대장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라벨라 아가씨!”

 

크룰탄!”

 

어지간한 어른의 머리만한 망치가 인사하는 손을 따라 흔들리고 그 뒤에서 철을 두드리던 사람은 기겁해서 목소리만큼이나 덩치도 커다란 여자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좋은 아침이야, 크룰탄.”

 

아가씨! 오늘은 무슨 파티가 있다면서요?”

 

, 있어. 아버지 결혼식.”

 

어쩐지 아까두 마차가 바쁘게 가더라니깐요!”

 

벌써 손님이 왔나? 아버지가 맞지 못한? 그렇다면 맞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아라벨라는 말을 달렸다.

 

사람들을 지나치고 물건을 뛰어넘으면 뒤에서 누군가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성 앞마당으로 뛰어 들어가면 꽃장식 천막이 너르게 펼쳐져 있고 나무를 조각해 만든 의자들과 푸른색 진한 카펫이 길게 깔려서 결혼식장의 길을 만들었다.

 

아가씨, 안돼요! 그 카펫 엄청 열심히 빨았단 말이예요!”

 

안돼요, 아가씨!”

 

꺄아아악!”

 

급히 말고삐를 들자 백마는 앞발을 번쩍 치켜들어 두 발로 섰다.

 

자칫하면 낙마, 흥분한 말에 짓밟히기라도 하면 카펫에 묻는 것은 흙이 아니라 피와 살점이 될 터.

 

그러나 아라벨라는 눈도 깜짝 않고 고삐를 당겨 돌바닥에 말이 발을 놓게 했다.

 

옳지 옳지, 착하다.”

 

놀랐잖아요...!”

 

아가씨, 지금부터라도 준비하셔야 해요!”

 

말고삐를 하인에게 맡기자 저만치에서 시녀들이 달려왔다.

 

아라벨라는 방으로 끌려갔고 시녀들의 손에 잡혀 미지근한 물이 담긴 나무통에 빠졌다.

 

머리를 빗질당하고 깨끗한 물에 씻어서 땋은 것을 풀고, 말리고 향유를 발라 늘어뜨리고 피부도 털을 뽑고 문질러 닦고.

 

시녀들은 아라벨라의 손에 잡힌 굳은살과 몸에 잡힌 근육에 기겁을 하더니 신발과 옷과 화장품을 준비하겠다고 뛰어갔다.

 

다들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아라벨라는 빈 방에 혼자 남겨졌고, 욕조에서 일어서자 바닥에 물이 뚝뚝 흘렀다.

 

아라벨라의 방 한 켠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아라벨라의 근육 잡힌 몸이 비추어졌다.

 

피부가 그을렸다, 뼈대가 남자 같다, 허리를 조이지 않는다, 근육이 흉하게 있다며, 방금은 굳은살이 있다고 비명을 질렀고.

 

아라벨라는 거울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손의 열기로 거울에 김이 서렸다.

 

빛을 받은 유리알처럼 색조가 옅은 하늘색 눈알이 강렬하게 마주보았다.

 

이름 있는 남자를 유혹하라고? !”

 

적당한 집안 자제를 구슬려 데릴사위로 들일 것이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었다.

 

백작 이름만 달고 아내랑 아이도 못 만들고 실질적인 권력도 없는 일을 누가 하겠냐,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하게 하고 아내 말이나 얌전히 듣게 하다니 그 사람 인생을 망치지 말라고.

 

아라벨라는 몸을 홱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화려한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문양을 보고 저건 누구 거, 누구 거, 하다가 문이 벌컥 열려 아라벨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검은 머리는 결 좋게 흘러내리고 눈은 깊고 푸르고, 입술은 붉게 칠해 그 아래 하얀 이가 돋보이는 누구나 인정할 미인.

 

어머나, 씻는 줄은 몰랐구나. 나중에 오마.”

 

결혼을 준비하느라 바쁘신 분이 어떻게 나중에 또 오십니까.”

 

아라벨라의 비딱한 심성을 드러내듯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버지의 결혼 상대랍시고 온 이 사람은 고작 어제 한 번,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으로 두 번째 본 사람이다.

 

아라벨라는 이 사람이 불편했다.

 

연한 구름 같은 회청색 드레스에 하얀 꽃들이 파도를 연상시키듯 아래로 갈수록 하얀 꽃장식이 늘어나는 그 모습을 보다 아라벨라는 방에 마련된 의자 하나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리낌없이 나신으로 앉는 모습에 아라벨라의 새 어머니, 사피야는 미간을 좁혔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에 우아하게 앉았다.

 

드레스를 준비하라고 일렀단다. 네가 재봉사를 찾지 않는다고 해서 내 나름이지만 정성들여서 만들어 보았어. 결혼식의 이야기는 들었지? 땅의 길은 바다고, 나는 파도이고, 마르틴과 너는 갈매기이니까 둘 다 하얀 옷을 준비하라고 했단다.”

 

아버지는요?”

 

셰필라 그 이는 그냥 정장이지.”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에 아라벨라는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푸른 계열로 해달라고 말은 했어.”

 

옷을 따로 맞췄습니까?”

 

그이가 바쁘다고 하니 어쩔 수 있니. 그 따로, 나 따로 해야지.”

 

그래도 너희들 옷은 내가 손수, 라고 이야기하는데 시녀들이 옷상자며 머리 장식이며 신발이 든 상자를 가지고 우르르 몰려왔다.

 

아가씨! ...어머! 사피야님!”

 

우르르 몰려온 시녀들은 사피야의 시선에 말을 멈추고 발을 멈추었다.

 

사피야 다르덴...”

 

아라벨라가 중얼거렸다.

 

마르틴과는 어디에서 지내셨습니까?”

 

너희 아버지가 소개해준 곳이 있었어, 거기에서 지냈단다. 매달 한 번씩 셰필라가 돈을 보내줘서 평탄하게 살았는데 그래도 이 곳에 오니까 좋구나. 아이 봐주는 사람도 있고.”

 

아 그래서 매달 장부에 금액이 이상하거나 빈 금액이 생겼던 거구나.

 

사피야는 농담을 하듯 웃었으나 아라벨라는 천을 댄 의자에 등을 기댔다.

 

혼전 임신을 한 사피야는 다르데니아 백작의 사랑받는 딸이었지만 결혼한 남자의 아이를 배었다는 이유로 중간성과 가족의 이름을 빼앗기고 내쳐졌다.

 

아내가 있지만 사랑한다는 그 멍청한 사탕발림에 넘어가 모든 것을 잃다니.

 

고생고생해서 아이까지 기른 결과가 무어냐, 겨우 백작의 재취로 들어가기?

 

엄마! ...?”

 

또래 아이보다 작은 체구의 마르틴이 쪼르르 들어오자 앞서 있던 시녀 하나가 손으로 마르틴의 눈을 가려 주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준비 예쁘게 하고 조금 이따가 보자.”

 

사피야가 떠나고 아라벨라는 몸을 일으켰다.

 

물기는 이미 다 말라서 피부가 버석버석했고 시녀들은 온갖 하얀 물건들을 가져왔다.

 

하얀 드레스, 하얀 구두, 진주 목걸이, 팔찌, 반지, 머리에 꽂는 장식도 다 진주거나 하얀 깃털뿐.

 

누가 본다면 아라벨라의 결혼식이라고 해도 믿으리라.

 

이놈의 결혼식.

 

...어라? 둘의 관계가 떳떳한 게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성대한 결혼식을 하지?

 

생각하던 아라벨라는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내가 입을 테니까 다 나가.”

 

? 그렇지만, 아가씨!?”

 

너희 다 바쁘잖아. 알고 있어.”

 

사람은 적고 성은 넓고 손님은 많다.

 

비록 마을에서 일당을 주고 사람들을 고용하기는 했지만 사람 수에 비해 일의 진척이 더뎌서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앓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시녀들은 안돼요 아가씨, 입기 힘들다구요, 라고 말은 하지만 눈은 저 너머에 가 있다.

 

마침내 아라벨라는 시녀들을 내보냈다.

 

 

 

 

 

 

 

후작, 백작, 일부 영지민,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들, 왕실에서 보낸 사람들.

 

그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크게 둘로 나뉘었다.

 

밋밋한 정장을 입은 쪽과 푸른색 드레스를 맞춰 입은 쪽으로.

 

옷에 맞춘 부채가 여기저기서 팔락이고 주례를 맡은 신전의 사람은 음성 증폭 장치가 걸린 둥그런 장치를 단상에 올렸다.

 

꽃장식 덕분에 은은하게 향기가 넘치고 한쪽에서는 특별히 부른 악사들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연주를 하다가 주례사가 시작될 듯 하자 소리를 낮추었다.

 

태양이 내리쬐는 이 멋진 날에 우리는, 두 사람과 두 가정이 합하여지고, 그 끝에 마침내 신랑과 신부의 입장을 말한다.

 

꽃으로 엮은 문이 열리고 하얀 옷을 입은 마르틴이 꽃잎을 뿌리자 하늘색 정장을 입은 셰필라 백작이 먼저 걸어 나왔고 이어 손을 맞잡은 사피야 다르덴이 걸어 나왔다.

 

사피야는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웅성거림이 섞인 호기심어린 시선에는 호의가 적었다.

 

그것을 느꼈지만 사피야는 고개를 당당하게 들고 푸른 보석과 진주로 꾸민 모습을 한껏 빛내며 사람들 사이로 걸음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다음 번 문이 열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피야를 보고 있었지만, 일부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고 내지르는 경악 어린 소리에 다 시선을 돌렸다.

 

하얗고 푸르게 물들인 꽃으로 만든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모두가 기대한 하얀 새의 요정은 거기 없었기에.

 

세상에나 맙소사!”

 

누군가의 속삭임이 커다랗게 들릴 만큼 조용해진 곳에 아라벨라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어깨에 술이 달린 하얀 예복.

 

긴 금발 머리는 하얀 끈으로 질끈 동여 묶고 가슴팍에는 렐리악 가문을 상징하는 용이 새겨진 핀이 꽂혀 투박하게 빛난다.

 

그을린 피부였지만 눈이 반짝였고 다른 옷과 마찬가지로 하얀 부츠는 굽이 납작해서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될 만 했지만.

 

사람들은 겨우 신발에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바지를 입었어!”

 

화장을 안 했어.”

 

머리 꼴이 저게 뭐야, 결혼에 반대한다는 것인가?”

 

그 수군거림을 못 들은 체 하며 아라벨라는 팔에 낀 바구니에 손을 넣었다가 하얀 꽃잎을 손에 한 움큼 쥐고 공중에 흩뿌렸다.

 

꽃잎은 하늘하늘 아름답게 떨어졌고 그 뒤를 이어 마르틴도 내던지듯이 꽃잎을 뿌린다.

 

백작과 사피야와 눈을 마주치고 아라벨라가 웃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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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쓰고 싶어져서 왔습니다.


최근 판타지와 로판을 많이 읽었는데 어떤 소설이든 꼭 파티와 드레스와 보석에 기뻐하는 주인공(여)이 있더라구요.


거기 기뻐하지 않는 여주인공을 쓰고 싶습니다.


만약에 앞으로도 게속 이 시리즈를 쓴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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