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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의 가장자리

2018. 9. 26. 00:55 | Posted by 호랑이!!!

눈의 가장자리로 실 같은 것이 한 오라기 보였다.

 

모르는 사이에 머리카락이 우산에 걸린 것인가 하고 놀라서 보았지만 다시 빛에 비추어 보니 실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비가 오는 것 치고 날이 밝으니 떨어지는 빗방울이라도, 나뭇가지라도 잘못 본 모양.

 

가방에 우산에 또 가방 하나 더.

 

오늘따라 손에 든 것이 많으니 우산이고 가방이고 유달리 무겁다.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서 쉬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는데 집에 와서야 충전기를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비용 충전기도 없고.

 

따뜻하고 조용한 집 안에 있으니 문 뒤로 추적추적 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가기 싫은데.

 

어차피 내일도 갈 거, 눈 딱 감고 가지 말까.

 

그러나 핸드폰은 배터리가 2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우산을 집었다.

 

가방 두 개를 내려놓았는데도 이상하게 손이 무겁다.

 

어깨도 아프고 어딘지 몸도 무거운데 사람 없는 길을 걷고 있자니 저만치서 해가 잠기는 모습이 보여 다시 발을 억지로 빠르게 움직였다.

 

하늘 끝자락은 이미 어둠으로 물들어서 가지 많은 나무 옆을 휙 지나가니 또 눈가로 실 같은 것이 보였다.

 

아까는 한 올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더.

 

한 두세 가닥 정도.

 

.

 

또 나무를 지나자 그 수는 다섯 정도로 늘었다.

 

.

 

일곱.

 

.

 

아홉.

 

.

 

무수히 많이.

 

나무를 지나칠수록 우산에 매달린 실은 늘어났다.

 

신경이 쓰여 힐끗힐끗 우산 가장자리를 보면 그럴 때는 또 보이지 않다가 길고양이가 앞에 있다던가, 신호등이 있다던가 하여 시선을 돌리면 또 스르르 나타난다.

 

나뭇가지를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실은 갈수록 많아지고, 또 길어져서 도서관에 닿을 즈음에는 우산 가장자리가 카페트처럼 보였다.

 

그에 맞추어 걸음은 점점 빨라져 입구의 유리문이 가까워졌을 때에는 헐떡거리면서 뛰고 있었다.

 

우산을 내팽개치다시피 바닥에 던지고.

 

평소라면 젖은 발걸음이 신경쓰여 조심스럽게 들어갔을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놓아두었던 자리에 충전기가 얌전히 있다.

 

창백한 불빛이나마 밝게 켜두니 마음이 놓여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나보다.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드라이어로 머리 말리면서 코미디나 봐야지.

 

충전기를 쥔 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아까보다 느긋해진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오니 우산이 유리문 손잡이에 걸쳐 있다.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경비 아저씨가 계셨나보다.

 

간만에 느끼는 친절함에 다시 우산을 펴는 손길은 가벼워졌다.

 

아까는 어설프게 밝아서 잘못 봤겠지.

 

가는 길은 아예 어두우니 뭘 잘못 볼 일도 없을 거다.

 

뭐가 보여야 말이지!

 

우산을 어깨에 척하니 걸치자 욱신거리던 어깨엔 무거워서 똑바로 들었다.

 

그렇게 지나가는데 편의점 간판의 빛이 환하게 비쳤고 그때 또 눈 가장자리로 우산이 보였다.

 

실과.

 

뭉툭한 손가락.

 

그제야 깨달았다.

 

저것은 실이 아니라 머리카락이며.

 

누군가가 거꾸로 기어내려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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