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호랑이!!!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아라벨라 2

2019. 1. 2. 03:42 | Posted by 호랑이!!!

 

아라벨라 샤틸리 렐리악.”

 

복도는 새어들어오는 달빛조차 없이 어두워서 촛불을 든 셰필라 백작이 계단을 올라오자 그제야 어렴풋한 실루엣만 비쳤다.

 

그조차도 어두워서 아라벨라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셰필라 백작은 계속 두리번거릴 뿐이다.

 

아라벨라가 고개를 들자 색이 옅어 유리 같은 눈에 빛이 반사 되어 어둠 속에서 눈빛이 번득이고 셰필라 백작은 뒷걸음질을 쳤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각 집안의 아가씨들에 둘러싸여서 오늘의 주인공이 자기인 것 마냥 깔깔거리고 해괴하게 굴던 모양은 어디로 가고, 아라벨라의 표정은 섬득하게 가라앉아서 셰필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비가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셰필라는 자신이 딸을 순간이지만 두려워했다는 것에 오히려 허세를 부리듯 소리를 질렀다.

 

아라벨라는.

 

그저 어둠 속에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혔을 뿐이었다.

 

남이 없어서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었고 그저 조용히 앉아있었을 뿐.

 

아버지에 대한 화도 없었고, 사피야에 대한 화도, 무엇도 없었고 그저 비어 있었다가.

 

셰필라의 고함에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잠시 멀어졌던 온갖 감정과 생각 역시도 돌아왔다.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 무슨 일이냐니, 제 아비 결혼식에 바지 입고 참석하는 계집이 어디 있나!”

 

그러게요.”

 

정말로 아비 결혼에 반대하는 거야? ? 그래? 자식이 되어서 아버지 행복할 일에 반대를 하다니 네가, 그러면...!”

 

다르데니아 백작 자리가 마르틴 뒤더라고요.”

 

아라벨라는 사람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전부 기억했다.

 

두 줄로 나뉘어진 의자 중에서 왼쪽 자리는 자신의 자리 외에는 전부 비어 있었고, 오른쪽 자리에는 마르틴만이 앉아 있었고.

 

왼쪽 바로 뒷줄에는 렐리악과 관련이 있는 몇몇 공작 가문과 몇몇 후작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 앉고, 순서에 따르자면 오른쪽 자리도 공작이나 후작가를 위한 자리여야 했다.

 

그런데 그 줄 의자 중에 딱 한 자리.

 

그 자리는 다르데니아 백작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

 

다르데니아 백작에게 왜 잘 보이고 싶은데요?”

 

알고 있다.

 

다르데니아 백작의 둘째 아들이 개척한 항로에서 새로운 식물을 가져왔는데 그 식물이 약도 되고 향도 좋고 맛도 좋고 기르기도 어렵지 않아서 다르데니아 백작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곧 후작이 된다고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피야는 다르데니아 백작의 딸이었으니 맨 첫 줄의 의자를 배정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백작은 첫 줄 의자를 거절했겠지.

 

혹시나 백작의 마음이 사피야에게서 정말 돌아섰을까봐 렐리악 백작은 마르틴의 뒷자리를 배정했다.

 

작고 어린 손자의 뒷자리에.

 

그 아이가 사피야의 드레스에 눈을 반짝이고 장밋빛 뺨으로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뻔한 이야기고 아라벨라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라벨라는 그런 타산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너도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사피야 다르덴이 자기보다 고작 아홉 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였기에.

 

다르데니아 백작의 둘째 아들이...”

 

아라벨라는 벌떡 일어섰다.

 

몇 달이나 방치되었던 곳은 발소리조차 낯설었다.

 

사피야 다르덴이랑 결혼식을 올린 게 그런 이유예요?”

 

이젠 네 새어머니다, 격식을 제대로 갖춰 불러.”

 

아라벨라는 성큼성큼 다가가 셰필라의 손에 들린 촛대를 빼앗았다.

 

불이 일렁이고 아라벨라가 손을 높이 치켜들자 벽까지 비추어졌다.

 

하얀색으로까지 보일 옅은 회색 머리카락이 몸을 타고 흐르고 유리알처럼 색이 옅은 녹색 눈동자.

 

고집스러운 입술 하며 짙은 눈썹, 강인한 코가 전부 아라벨라와 닮은 셰필라의 전 부인.

 

에멜라 카날리아 렐리악.

 

다시 말해 보세요.”

 

“...그래, 나도 에멜라를 그리워해. 하지만 나에게는 아내가, 네게는 어머니가, 이 집안에는 후계자가 필요해. 너도 알다시피 귀족이란...”

 

감정보다는 격식에 얽매여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격식은 주인을 잃은 지 고작 몇 달 된 안주인의 방안에 새 사람을 들이게 한다.

 

하지만 아빠. 만약 엄마랑 아빠 입장이 바뀌어서 저 땅 아래 묻힌 것이 아빠고 살아있는 게 엄마고, 십년 전에 사귀어서 아이까지 있는 사람하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셰필라 백작의 목소리가 커졌다.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생각을 해보시라구요!”

 

에멜라의 명예에 흠집이 갈 만한 소리를 하지 마라!”

 

이건 그냥 만약이라고요, 만약! 왜 그렇게 과하게 반응-”

 

철썩 소리가 나고 아라벨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늘어놓고 옷차림도 행동도 기괴하기 짝이 없어, 네가 미친 게 틀림없다. 당장 내일 할머니 계신 별장으로 가! 거기서 요양이나 해라!”

 

셰필라 백작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라벨라의 코앞에 위협적으로 삿대질을 하다가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에 대고 아라벨라가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했잖아요! 만약 같은 소리가 아니라 진짜 했다고!”

 

'오리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愛(아이)  (0) 2019.02.28
아라벨라 3  (0) 2019.02.03
아라벨라  (0) 2018.12.26
마법사와 사역마 - 1  (0) 2018.10.25
프롤로그-마법사와 사역마  (0) 2018.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