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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냐.”

 

안녕, 우리 또 만났네?”

 

단단한 빙하는 어부 길드 앞에서 낯익은 사람들을 만났다.

 

봄처녀 드레스에 꽃이 달린 넓은 밀짚모자를 쓴 세 사람은 자매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닮아 있었으나 단단한 빙하의 앞을 가로막고 노려보는 것을 보자면 자매라기보다는 주종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언니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라, 이 벌레!”

 

무엇 때문에 이리 오는 것이냐, 먹이를 구하러 가든 짝을 찾으러든 가란 말이다.”

 

심지어 둘이 팔을 벌리고 막아선 것을 보자니 꼭 사나운 짐승이 다가오지 못하게 지키는 것 같으니 원.

 

예를 들면 멧돼지 같은 걸로부터.

 

우리 길드장님은 도끼로 마빡을 쪼개라고 했지만.

 

아무튼 이러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내가 뭘 했다고?

 

거기 아가씨.”

 

기껏해야 바람신의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달려가서 포옹하고 윙크하고 손 키스하고 또 뭐더라, 아무튼 그런 것밖에 안 했는데 말이야.

 

날씨도 좋은데 나랑 차 한 잔 어때?”

 

그러자 치라다와 수파르나는 캬악 소리를 냈다.

 

무례하다, 이놈!”

 

언니, 이런 녀석의 말은 들을 것도 없습니다.”

 

아웅다웅 하려는 때 선장이 끼어들었다.

 

이 배는 코스타 델 솔로 가는 배다. 갈 거면 얼른 타라고!”

 

가루다와 둘, 그리고 단단한 빙하는 조그만 배에 올라탔다.

 

돛을 불룩 부풀게 할 정도의 순풍이 계속해서 불었고, 선장은 이맘때에는 이런 바람이 불지 않는데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라다는 투명하게 빛나는 바닷물 아래로 보이는 수십 가지 산호초와 물고기들, 커다란 상어에 금방 시선이 팔렸고 상어가 배 옆을 지나가자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선장에게 제지당했다.

 

순식간에 항구에 도착한 배는 멀미로 고생하는 모험가들을 한 무더기나 쏟아냈고 가루다는 치라다와 수파르나를 데리고 사뿐하게 판자 위로 올라섰다.

 

아가씨, 이제 어디로 가?”

 

코스타 델 솔에 오면 게게루주라는 벌레에게 가 보라고 그러더구나, 그리로 갈 예정이다.”

 

뭐어? 누가 그런 말을 해?”

 

안경을 쓴 털꼬리 달린 것이 그러했다.”

 

게게루주 옆에 있는 그 사람인가.

 

그런 사람에게는 가는 거 아니라며 단단한 빙하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어디로 가고 싶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곳이 좋으니라.”

 

그리고 아마 바다에서 놀 만한 곳이겠지.

 

남의 눈이 쉽게 닿지 않을 장소라면 숨겨진 폭포가 있겠지만 거기에는 항상 호젓한 산골자기가 폭포 물을 맞고 있고, 그 앞에 있는 정자에는 항상 미코테족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다.

 

커다란 에테라이트를 지나고 바위가 깎여나간 아래로 한참이나 걸어서 데려간 곳은 흰 갈매기 탑 아래쪽 해안가.

 

이 즈음이면 괜찮겠다고 말을 하자마자 야만신과 그 분신은 옷과 모자를 벗어던졌다.

 

이 텐트 같은 것 정말 귀찮았느니라!”

 

귀찮았습니다-”

 

치라다는 첨벙 물에 뛰어들었고 수파르나는 모래 위에 돗자리를 깔고 커다란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바구니에서는 영원한 소녀 주점이나 레스토랑 비스마르크에서 사온 것이 분명한 다과와 차가 나왔고 가루다가 손짓하자 수파르나는 단단한 빙하 쪽을 힐끔힐끔 보았지만 결국 치라다를 따라 물에 들어갔다.

 

날씨는 정말 좋아서 바닷물은 햇빛에 반짝이며 바닥의 모래알까지 투명하게 비추었고 부드러운 모래에 달구어진 바람이 이국적인 꽃향기를 품고 몸에 감기는데다 이따끔 웃음소리가 들릴 때면 커다란 파도가 두 분신을 덮치며 부서졌다.

 

물이 짜! 라던가 깃털이 다 젖었다던가 하는 소리가 들리고 가루다는 비스마르크 샌드위치를 집어 포장 종이를 벗겼다.

 

포장 종이를 벗기고 호두가 박힌 빵을 들어 올리자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아삭 소리가 날 듯 신선한 라노시아 양상추와 쿡 찌르면 노른자가 흘러내릴 것 같은 아프칼루 알이 드러났고 단단한 빙하는 가루다가 양상추 냄새를 맡는 동안 바구니에서 마도사 모양 쿠키를 꺼냈다.

 

빼앗겼지만.

 

네놈에게 주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다!라고 가루다가 말한 것도 아니고.

 

수파르나가 빼앗은 것도 아니고.

 

치라다는 물 속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게 이미 한참이다.

 

고개를 돌린 단단한 빙하와 가루다는 한 떼의 노랗고 푸른 새와 마주쳤다.

 

납작하고 날렵한 날개에 뭉툭한 부리를 가진, 보통은 사람에게 먼저 덤비지 않는 새.

 

이 새들의 이름은 아프칼루라고 한다.

 

 

 

 

 

 

 

아프칼루들은 열심히 덤볐지만 한 명은 야만신이고 한 명은 그 야만신도 때려눕히는 전사였으니 결과는 안타까웠다.

 

그래도 비스마르크 샌드위치를 훔치는 데는 성공해서, 그 새떼들은 우르르 도망쳤고 단단한 빙하와 가루다는 뒤를 쫓아가려다 그 새들이 뱉어놓고 간 정어리를 밟고 미끄러졌다.

 

“...난폭한 새로다.”

 

가루다는 단단한 빙하의 갑옷에 얹힌 정어리를 집어 멀리멀리 던졌다.

 

- 갑옷에서 정어리 냄새 나겠네.”

 

무어 하느냐.”

 

가루다는 새 같은 발을 움직였다.

 

우리도 바다에 들어가도록 하지.”

 

 

 

 

 

오후 내도록 놀고, 어두워지면 산호에서 나오는 빛 위에서 또 놀고, 다시 림사 로민사로 돌아가는 배를 타러 갈 때는 한밤중이 된다.

 

벗어던진 봄 처녀 드레스를 다시 입고 밀짚모자를 쓰면 인간과 다른 부분은 가려지고 치라다와 수파르나는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돛대를 부풀렸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손길처럼 피부를 스친다.

 

달이 바다에 비치는 것을 보다가 단단한 빙하가 입을 열었다.

 

또 여행 갈 거야?”

 

인간의 관심이 이제 우리의 신도에게 있지 않으니 우리는 때로 불러와질 뿐 할 일이 없느니라.”

 

오고모로 화산구의 그 녀석처럼 아이들을 끌어안고 살지도 아니하고 잔라크의 그 녀석처럼 조용하게 수양할 생각도 없으니 나는 이렇게 다니는 것이다.

 

배는 어부 길드 앞에 닿았고 가루다는 두 분신을 데리고 배에서 내렸다.

 

한 번만 말하는 것이니 똑똑하게 듣거라.”

 

단단한 빙하는 절그럭거리는 갑옷을 메고 배에서 내렸다.

 

다음은 다날란이니라.”

 

 

[식칼님네 걔들]

2018. 4. 24. 10:27 | Posted by 호랑이!!!

적당히 따뜻하고 선선한 그리다니아에서 나와 천천히 걷다보면 조그마한 다람쥐나 무당벌레 같은 것들이 돌아다녔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깃털 달린 이크살족이 있다.

 

무당벌레가 있고, 청설모가 있고, 이크살족이랑, 그리고.

 

또 요엘과 에녹이 여기 있다.

 

이 쪽이지?”

 

우리 때랑 그렇게 많이 바뀌지는 않았네.”

 

요엘은 지도를 펼쳤다.

 

그거 알아? 우리 때랑 같은 지도를 쓰고 있더라고.”

 

그래?”

 

바보, 그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게 더 신기한 일이라고.”

 

심지어 청동호수 쪽 지도도 다르지 않단 말이지.

 

그렇지만 사람들이 커르다스에 대해 말한 것은 좀 다르다.

 

그리다니아보다 따뜻한 기후, 끝없이 펼쳐진 초원, 피어난 색색의 꽃과 나비가 기억하는 커르다스이건만 사람들에게 커르다스에 갈 거라고 이야기를 할 때 돌아오는 말이라고는 두꺼운 옷을 챙기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래서 구할 수 있는 만큼 두꺼운 방한모에 장갑과 외투, 신발을 준비했는데 가을박 마을을 다 지나갈 때까지도 날씨가 바뀌려는 기색은 없다.

 

그냥 그리다니아 시가지보다 조금 더 서늘하고 메마른 기후로군.

 

사람들 말을 들어보자면 가을박 마을 옆으로 난 길로 쭉 가면 된다고 했는데 얼마쯤 걸어가도 기후가 바뀌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조사가 더 필요했어.

 

요엘은 지도를 접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얼마간 걷다보니 뺨에 닿는 바람이 차가워졌다.

 

에녹은 요엘에게 외투를 둘러주었고 더 차가운 바람이 불수록 장갑, 모자를 짐에서 꺼내주었다.

 

가을처럼 높고 푸르렀던 하늘에는 서서히 먹구름이 끼고 풍요로워 보이던 황금빛 단풍들은 걸음을 뗄수록 칙칙한 색이 되어 요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춥고, 흐리고.

 

훅 내뿜은 입김이 안경에 하얗게 서려 잠깐 옷깃에 문질러 닦는데 무언가가 요엘의 얼굴에 닿았다.

 

차갑고, 얼굴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지는 것.

 

에녹은 하늘을 보더니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눈이다!”

 

? 눈이라고! 커르다스에?

 

요엘이 어이없어하는데 에녹은 요엘의 가방까지 등에 지더니 커르다스의 한복판까지 전력질주로 뛰었다.

 

, 슈가! , 아저씨야!”

 

 

데바데 헌트리스

2018. 4. 17. 16:29 | Posted by 호랑이!!!


[파판14] 우리집 집사는 캣맘!

2017. 11. 19. 00:59 | Posted by 호랑이!!!

그럼 이번에도 잘 다녀와.”

 

거대한 키에 검은 피부와 검은 뿔은 날카롭고 얼굴에 돋아난 비늘 아래 눈빛은 중후하다.

 

그 눈빛만큼이나 날카로운 바늘이 달린 길쭉한 막대를 등에 지고.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어부 집사 바리톤은 배웅을 받으며 길에 올랐다.

 

한 번 꺾고, 다시 쭉 직진, 아래로, 천천히 걸어내려오다가 바리톤은 누군가 반가운 얼굴들을 보고는 전력질주로 달려왔다.

 

치즈! 메기! 연어야! 아니 이건 또 처음보는 얼굴!”

 

하악-’

 

그러니까, 바리톤한테만 반가운 얼굴.

 

햇볕 아래서 낮잠을 자던 고양이들은 바리톤이 달려오던 말던 앞발을 핥아댔고 그나마 반응을 보여준 한 마리는 냅다 일어나 털을 세웠다.

 

저기요 바리톤, 그 커다란 덩치로 달려들면 애들이 겁먹는 다구요.”

 

비술서를 들고 있는 테너는 고양이들 사이에 앉더니 하악질을 하던 작은 녀석의 목덜미를 긁어주었다.

 

내가 고양이들한테 얼마나 인기 많은 줄 알아? 네가 아무리 같은 고양이라고 해도 나한테까지 하악질을 하는 그 녀석이...”

 

고르르륵~’

 

그래그래, 여기가 좋아? 내가 더 좋다고? , , 그래~”

 

테너는 보란 듯이 현란한 손짓으로 얼룩무늬 고양이의 턱을 긁어주었다.

 

고양이는 배를 보이고 뒤집어져서는 발을 바둥거렸다.

 

고양이들이란.”

 

테너는 제 거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바리톤이 입술을 삐쭉이자 웃음을 터뜨렸다.

 

배를 보이고 뒤집어져 있던 고양이는 테너가 손을 떼자 몇 번 앞발질을 하다가 다시 해 잘 드는 곳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렇게 투덜거려 봤자-거든요, 아저씨?”

 

! 어딜 때리는 거냐!”

 

내가 작아서 손을 올려봐야 아저씨 엉덩이인데 어쩔 수 없잖아?”

 

바리톤은 건방지게 살랑거리는 검은 꼬리를 잡아당기고는 냅다 비공정으로 뛰어갔다.

 

 

 

 

 

 

 

 

- 춥구먼-.”

 

비공정에서 내리면 성도다.

 

요즈음은 다른 제도인가 뭔가가 발견되었다고 해서인지 그 곳으로 떠나는 모험가들이 사람 수를 맞춰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성도에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모험가님 집사 수행하러 왔습니다.”

 

바리톤이 신분증명서를 내밀자 안내원은 신분증을 거의 보지도 않고 돌려주었다.

 

자주 보네.”

 

우리 집 모험가도 매일 일하는데 나도 일해야지.”

 

문을 지나 눈밭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걸어가고 다리도 하나 건너서 또 내려가다 보면 인간을 보고 좋아라 쫓아오는 거대한 마물들이 있다.

 

다음부터는 좀 안전한데만 골라서 다니던가 해야지.”

 

한참 쫓겨다니다 눈 쌓인 바위 뒤에서 숨을 고르자 저절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나온다.

 

얼마간이나 더 걷다 보면 조그맣게 얼지 않은 샘이 보이고 그 주위에는 또 옹기종기 앉아서 낚싯대를 드리운 집사들이 보인다.

 

그 중 하나가 바리톤을 알아보았는지 손을 흔들었다.

 

어이- 바 씨 왔어?”

 

루 씨도 여기 왔구만-”

 

아 조용히 좀 하라냐! 물고기 도망간다냥!”

 

미 씨도 잘 지냈는가?”

 

미 씨라고 불린 집사는 투덜거리면서도 낚싯대를 접었다.

 

그 발치에 있는 들통에는 물고기가 몇 마리나 잡혀 있었다.

 

오늘은 미씨가 좀 잡았는데?”

 

오늘 왠지 잘 잡혀!”

 

바리톤은 미코테와 루가딘 사이에 앉아서 커다란 병에 든 차를 한 잔씩 돌렸다.

 

숨만 쉬어도 하얗게 입김이 나오는 곳에서 따뜻한 차는 굴뚝처럼 모락모락 김이 뿜어져 나왔고 뜨거운 것을 잘 못 마신다는 미 씨도 불지 않고 홀짝 마셨다.

 

과자 먹을래? 우리 집 모험가가 만들어줬는데.”

 

루가딘 집사인 루 씨는 그 커다란 손에는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마도사 모양 쿠키를 꺼냈다.

 

그러자 질세라 미 씨도 주머니에서 말린 물고기를 꺼냈다.

 

미 씨네 모험가는 요리 못 하잖아? 웬 물고기야?”

 

매일매일 낚는 물고기를 조금씩 모아서 만들었다냐! 오늘 낚은 것 중에서도 산천어랑 빙어는 말릴 거다냐.”

 

들통을 힐끗 보자 그 안에는 산천어와 빙어만 바글바글했다.

 

그러면 모험가가 실망하지 않는가.”

 

저번에 물고기 낚았는데 다 먹어버렸다고 말하니까 잘 했다고 말했다냐.”

 

미 씨는 가끔이지만 비싸고 좋은 걸 잡아가니까.”

 

행운이 붙는 겨 행운이.”

 

바 씨, 나 차 한 잔만 더.”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낚시를 하다 보니 들통도 제법 찼다.

 

산천어, 빙어, 그리고 달그락거리는 게와 움직이는지 마는지 모를 성게.

 

미 씨와 루 씨는 먼저 가버렸고 바리톤만 털레털레 들통을 들고 비공정을 타러 왔다.

 

바 씨, 어때 오늘 많이 낚였어?”

 

이만하면 제법 낚였지.”

 

바리톤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산천어 한 마리를 꺼내 내밀었다.

 

날 추운데 기사단 사람들이랑 끓여먹던가.”

 

이슈가르드 사람이 춥다고 불평할 수는 없지! 늘 고마워.”

 

가장 바람이 덜 치는 자리에 앉아 비공정을 탔다가 내리자 뜨뜻한 다날란의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이렇게 뜨거운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듯 들통 안이 요란해졌고, 바리톤은 비늘 돋은 손으로 들통을 토닥거리면서 걸었다.

 

많이 낚았겠다,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걷고 있는데 누군가 바지에 확 매달렸다.

 

! 치즈야!”

 

, 연어 너까지! 비늘, 비늘 조심...!”

 

메기! 아아악! 메기! 아야야 발톱!”

 

바리톤은 자그마한 생선을 들통에서 꺼냈으나 고양이들의 가차 없는 발길질만 거세어졌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산천어.

 

여전히 발길질은 가차 없다.

 

고양이들의 발톱은 바리톤이 가장 커다란 빙어를 꺼내고서야 사라졌다.

 

바리톤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빙어를 그 자리에서 해체해서 뼈를 발라주었다.

 

애옹

 

냐아

 

우우웅

 

“......그래, 이제 만족하냐.”

 

애앵!’

 

분명 처음에는 세 마리 뿐이었는데.

 

그 다음 한 마리를 꺼낼 때는 다섯 마리가 되었다가.

 

그 다음 다음으로 산천어를 꺼낼 때에는 열 마리가 되어 있었다.

 

다날란 고양이들은 다 여기 모여 있나.

 

바리톤은 통통한 살점에 제일 먼저 달려든 고양이를 알아보고는 소리를 질렀다.

 

너 나한테 하악질 한 그 녀석이지!”

 

므냐아-’

 

얼룩고양이는 바리톤의 다리에 몸을 한껏 부비면서 그릉그릉 소리를 냈다.

 

거기에 마음이 풀린 바리톤은 조금 더 큰 살점을 떼어서 그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그걸 덥썩 받아무는 녀석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하악!!!’

 

그리고 한 대 얻어맞았다.

 

 

 

 

 

 

 

그렇게 물고기를 나눠주고 오는 길, 가벼워진 들통에는 달그락 달그락 게 소리만 난다.

 

검은 뿔인 자신과는 다르게 하얀 뿔을 가지고 있는 주인의 눈이 가벼운 들통을 한 번 보았다가 자신을 본다.

 

어쩐지,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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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스터+로키] 길쭉한 소파 방

2017. 11. 15. 01:27 | Posted by 호랑이!!!

잔인한 경기를 볼 생각에 흥분한 관중들이 투기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좋아하는 챔피언의 탈을 쓰기도 하고, 얼굴에 색을 칠하거나 상징적인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즈음 가장 유행하는 것은 녹색이어서 둥글게 내려다보이는 관중석은 온통 초록 물결이었다.

 

번쩍이는 홀로그램 마스터가 나타나자 관중석에서는 비명과 환호소리가 높아졌고 마스터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들은 길쭉한 소파로도 모자라 방 여기저기에서 술잔을 들고 웃어댔다.

 

그리고 그 방 가장자리, 로키는 흥미롭다는 표정만은 얼굴 가득 띄운 채 서 있었다.

 

빌지스나입이 싸우는 것도 아니고 겨우 인간과 인간이 싸우는 건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챔피언이 나오고 검투사가 나오는 중에도 방 안의 사람들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요즘은 어딜 가도 초록색이 보이더군요 마스터.”

 

역시 마스터에게 귀한 것들이 모이나 봅니다.”

 

흐뭇하시겠습니다.”

 

마스터가 자리에 앉자 사람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찬사를 던졌고 그 중 누군가가 로키를 가리켰다.

 

이봐, ! 너도 챔피언 때문에 수트를 새로 맞춘 사람인가?”

 

순간 모두의 시선이 로키에게 돌아갔다.

 

충분히 그 눈길을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는 초록색 자락을 들어 펼쳤다.

 

사실은, 새로 맞춰야 하는 쪽이지.”

 

웃던 사람들은 마스터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일어나 비켰다.

 

이 쪽으로 꽂히듯이 다가오는 시선은 노골적이라 로키는 보지 않아도 마스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난 초록색이 싫거든.”

 

느리게 겉옷이 벗겨졌다.

 

어떻게 해야 더 우아하게 보일지, 더 시선을 사로잡을지 로키는 알고 있었고, 옷을 벗으며 가슴을 한껏 내밀자 시선이 따갑게까지 느껴졌다.

 

이 겉옷도 마음에 안 들고.”

 

소매를 조인 단추를 풀고 살짝 쓸어올리자 뼈가 도드라진 손목이 드러났고 옷의 여밈을 당기자 그 사이가 벌어졌다.

 

마악 사람을 하나 더 집어던진 것 때문에 바깥에서는 그렇게 큰 환호 소리가 나는데도 방안은 놀라울 만큼이나 조용해서,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옷을 벗을 것처럼 잡았다가, 오히려 더 꽉 틀어쥔다.

 

이 자리에서 이게 마음에 들지 않기는 조금 부적절한 것 같군요.”

 

길쭉한 소파가 있는 이 방이 깨끗하게 비워지는데는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로키가 마스터의 옆자리에 앉자 마스터는 옷깃을 쥔 로키의 손 위에 그의 손을 얹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로키.”

 

소파에 기대듯이 머리를 기울이자, 로키의 손 위에 마스터의 손이 얹혔다.

 

마스터, 이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그렇겠지.”

 

아직 조심스러운 척 눈만 움직여 마스터를 보면서 두드리듯 손가락을 튕겨 아래를 가리켰다.

 

바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물론이지.”

 

속옷도?”


마스터는 그 말에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로키가 웃었다.


옷자락에서 로키의 손이 떨어졌다.

 

그건 내가 마음에 안 드는걸.”

 

 

[청의 엑소시스트(시로X메피)] 가장 강한 것은

2017. 8. 6. 20:09 | Posted by 호랑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뭐라고 생각해?


메피스토에게 던져진 것은 흔하고 뻔한 질문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커다란 고릴라나 공룡, 기차와 비행기를 가져오고는 하는 그런 질문.


저 인간이 저런 질문도 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메피스토는 마악 다섯번째 줄을 쓰던 보고서를 덮었다.


벌써 늦은 시간이라 끓여둔 커피에서는 향긋한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시로는 멋대로 메피스토의 잔을 가져가 마셨다.


"당신네 어린애들이 물어보던가요? 시로가 제일 세다고 말했겠군요."


"그랬지."


그러다보니 너는 뭘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져서 말이야.


"역시 네 아버지냐?"


"웃기지 마세요. 그러는 시로야말로 사랑을 제일 강하다고 말할 겁니까?"


"사랑이라고 말해도 납득이 안 갈테니까."


그럼 이 세계 정도는 날려버릴 수 있는 거대한 병기인가?


그럼 너를 호시탐탐 암살하려고 기회를 보는 사람들인가?


그럼 악랄하고 간사하기가 악마 보다도 더한 인간들인가?


그럼 


"당장은 시로네 어린애들이 제일 강한 것 같군요. '그' 시로를 이렇게 인간처럼 바꿔 놓고."


이것 봐요, 당신 손톱에 보라색 크레파스가 묻어 있는 것 알고 있었어요?


메피스토는 쓰다 만 보고서를 들었다.


지금까지 뭐라고 쓰고 있었더라?


앞서 썼던 다섯 줄은 한 줄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시간인가?」


메피스토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 앞에서 불량한 자세로 앉아있던 후지모토는 없었다.


없어지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첫 번째는 후지모토 시로가 앉아있던 의자.


두 번째는 시로가 피우던 담배.


세 번째는 그에게 내밀었던 찻잔.


네 번째는 그 사람이 어지르던 흔적.


다섯 번째는.


...내가 누구를 찾고 있었지?









메피스토는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후지모토 시로를 잊어버리는 꿈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악몽이다.


악마가 악몽이라니 일등석에서 보는 불쾌한 코미디와도 같은.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침식사는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보좌관이다.


"일식? 양식? 메피스토 스페셜?"


"...커피에 토스트."


"알겠습니다."


우산을 휘두르자 두꺼운 커튼이 걷히고 하얗게 느껴질만큼 밝은 빛이 쏟아졌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


어두운 밤 유령처럼 날아다니며 사람들 마음을 들쑤셔 놓고는, 아침이면 사라지는 것.


"...그것은 꿈."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꿈속의, 이제는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낙엽님께

2017. 7. 5.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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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엘리야, 키만 컸지 저렇게 가늘고, 말랐고, 바람만 불면 휘청휘청할 것 같은데...’

 

나단은 소파에 엎드려서 턱을 괴었다.

 

앞에서 엘리야는 비술서를 읽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요정이 장난스럽게 엘리야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책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요정이 방해하는 것에도 꾸준히 비술서를 읽는 모습에 나단도 왠지 장난기가 돌아 살금살금 엘리야의 등 뒤로 돌아갔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톡톡 잡아당기고, 밑으로 늘어진 옷자락도 들추고...

 

역시나일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단은 바닥에 엎드리는 척 하며 엘리야의 발목을 잡아 보았다.

 

, 한 손에 쏙 들어오네, 가늘어! 뼈하고 가죽밖에 없는 거 아냐?

 

어디어디, 다른 곳은 어떨까... 하며 나단은 엘리야의 어깨를 잡았다.

 

역시나 가녀린데다가 입은 옷도 겨우 얇은 천이라 더 가냘프게 느껴진다.

 

거의 매일같이 가죽이나 금속재로 된 옷을 입는 자신하고도 달라.

 

어깨를 만지작거리는데 손 위에 요정이 와 섰다.

 

뭐야 너, 저리 가.

 

입모양으로 벙긋거리는데 요정은 들은체도 하지 않고 나단의 손 위에 발을 탕탕 굴렀다.

 

저리 가, 저리 가라니까.

 

이 어깨는 내 거야, 하고 손을 휘저었지만 요정은 다시 화르르 날아와서 손가락을 잡아당기고 깨물려고 덤빈다.

 

한참이나 파닥거리려는 때, 엘리야가 몸을 확 돌렸다.

 

너희 둘.”

 

우당탕, 요란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넘어진 나단, 그리고 그 위에 나단과 똑같은 자세로 넘어진 요정.

 

이 작고 귀여운 두 명을 어쩌면 좋을까.

 

엘리야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둘 다.”

 

 

이거 2편 




“안녕, 예쁜 아가씨.”

 

가루다는 칼라인 카페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검은 장막 숲이라 하더라도 이크살족의 마을과 이 그리다니아 시가지는 몹시 달랐기에 한껏 인간을 즐기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 아니, 에테르가 느껴졌다. 그 사람은 검은 머리를 맵시 있게 틀어올리고 옷은 건강미를 뽐내는 몸을 드러내며... 그제야 가루다는 깨달았다. 그 루가딘의 성별이 바뀌었구나. 비록 여전한 것은 그녀의 등에 매달린 커다란 도끼뿐이었지만 그래도 어째서인지 가루다는 그녀가 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 자리 있어~?”

 

가루다가 앉은 테이블은 휴런과 미코테의 키에 맞춘 것으로 1인분 롤란베리 빙수와 한 잔의 오렌지주스가 놓여있을 뿐이었지만 가루다는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거긴 치라다의 자리다.”

 

“여기는~?”

 

“거기는 수파르나.”

 

검은 머리의 루가딘은 그런 말에도 아랑곳않고 옆 테이블의 의자를 당겨 걸터앉았다.

 

가루다는 루가딘이 앉는 것에 미간을 찡그리기는 했으나 자리를 뜨거나 막지는 않았다.

 

“여기! 영양 스테이크!”

 

루가딘이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가 앞에 놓였다.

 

“다음번에는 림사 로민사에도 가지 않을래?”

 

“다음번은 없다.”

 

“내가 세 도시 중에서 제일 먼저 간 곳인데, 거기에는 레스토랑 비스마르크라는 곳이 있거든? 거기 자리에 앉으면 말이야, 옆으로는 새파란 바다가 보이고...”

 

새파란 바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새하얀 건물. 항구로 들어오고 나가는 돛단배. 거칠게까지 느껴지는 활기 넘치는 사람들. 도끼나 쌍검, 비술서를 옆에 낀 모험가들과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는 색색의 카벙클, 빰빰 울음소리.

 

가루다는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 도시에는 어떤 식물이 자라지?”

 

“거기?”

 

일단 여기보다는 적은데... 루가딘은 습관적으로 턱을 만지다가 손을 내렸다.

 

“아냐, 일단 도시에는 식물이 없어.”

 

“없단 말이냐?”

 

“적어도 도끼술사 길드에는, 응.”

 

그렇지만 말이야, 내 친구 중에 생선을 낚아서 구워오는 미코테가 있는데. 그 애 말로는 림사 로민사 도시 바깥에서 포도를 딸 수 있대. 포도가 뭐냐면 말이야, 어두운 보랏빛을 띄는 커다란 머루 같은 것인데... 루가딘이 말을 이을수록 가루다는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기도 하고 눈을 굴리거나 감아서 떠올리려고도 했으며 그러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생각했는지 찡그린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문 바깥을 보니 해가 져 있었다. 다 녹은 빙수 그릇을 밀어내고, 가루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울다하 얘기 해 줄까? 내가 거기서 검을 배웠는데 말이야-.”

 

그렇게나 이야기에 빠져버릴 줄이야.

 

가루다는 고개를 팩 돌렸다.

 

“다음 같은 것은 없다.”

 

 

[모험가X가루다]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모 분에게

2017. 4. 23. 05:55 | Posted by 호랑이!!!

이크살 족이 불러낸 야만신 가루다는 거대한 태풍의 눈 속에서 반대편 끝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언제나 아이들에게 소환당해 이 자리에 불려오면 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저 맞은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여럿 데려와서 나타나고는 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올 테니까 나타나고는 한다라고 말해야 할까. 그리고 이런 감상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인간의 배 앞머리가 태풍을 뚫고 나타났다. 나는 또 저 인간들을 죽여야겠구나. 나는 신이라지만 결국 내 아이들의 소원에 매어 있는 존재이니까.

 

가루다의 눈은 자리를 잡는 그 인간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이크살 족과 달리 인간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생김이 조금씩 구분되었다. 이것은 큰 것, 저것은 작은 것, 이것은 물고기도 아닌데 비늘이 달린 것, 저것은 짐승처럼 털이 달린 귀와 꼬리를 가진 것. 그리고 저것은...

 

가루다!!!!!!”

 

그것이다.

 

---하자!!!!!!!”

 

등에 거대한 도끼를 맨 거대한 루가딘 족 인간은 못잖게 커다란 목소리로 이 폭풍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것 외에 찾아온 인간 중에 몇 명인가는 낯익은 얼굴이었고, 이제는 표정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가루다가 인식하기에는 아무리 보아도 질린 표정이다.

 

하찮은 인간이여, 두 번 다시는 올 엄두가 나지 않도록 갈기갈기 찢어 주마!

 

폭풍 안에 있던 돌탑이 날아가고, 두 명의 분신이 나타나고, 날카로운 깃털이 사람을 베고 찌르고 몸에 박히고. 처음에 찾아온 것은 인간 여덟이었지만 이제 바닥에서 움직이지 않게 된 인간이 반수가 넘었다. 몇 명을 더 죽이면 되는지 헤아려보던 가루다의 시선이 도끼를 든 루가딘에게 향했다. 그 루가딘은 피가 나고, 베이고, 바람 때문에 살이 갈라진 지금에도 처음처럼 눈을 번뜩이며 이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루다아아아!!!! 나를 봐라!!!!!!”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적었고, 가냘펐다. 저 루가딘이 얼마나 사납게 도끼를 휘두르던 그렇게까지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가루다는 땅으로 내려왔다. 발굽이 땅을 딛어 따각 소리를 내었다. 땅으로 내려와 무릎까지 꿇어앉았는데도 자신에 비하면 이 루가딘은 아직 작았다.

 

모험가여, 어째서 매번 찾아오느냐

 

네가 날 죽이면 나의 아이들이 염원을 담아 다시 나를 불러온다

 

죽여 나를 없애더라도 그것은 잠시 뿐, 더 강한 내가 돌아오는데도

 

말하라, 어째서 매번 찾아오는 것이냐

 

잠시 무기를 내려놓았던 루가딘은 가루다의 뒤를 보더니 다시 도끼를 들어올렸다. 가루다는 불러 두었던 분신과 깃털을 돌아보았다. 없다.

 

일어나는 게 좋을 거야.”

 

인간

 

하늘에 날아오르는 네 모습은 아름다우니까.”

 

가루다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는 숨이 미약했던 검은 털꼬리를 가진 인간 하나만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일어서서 이 쪽을 보고 있었다.

 

이제 죽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가루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를 여느 때보다 활짝 펴고 발은 땅에서 떨어져 더 높은 곳에 둔다.

 

버러지 주제에!

 

죽어도 죽어도, 혹은 죽여도 끝없이 찾아오는 성가신 버러지 같으니. 지긋지긋하고 귀찮고 짜증나는 인간.

 

마지막 순간 가루다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익숙해질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에테르로 변해 흩어지는 감각은 이제 퍽이나 자연스럽다. 거대한 에테르의 순환 속으로 삼켜지기 전에, 가루다는 루가딘을 노려보았다.

 

나는 돌아올 것이다

 

더욱 강한 힘을 지니고, 너희를 갈가리 찢어버릴 것이다

 

아무에게나 언약을 외치는 엉덩이 가벼운 인간아. 그렇게 가루다가 노려보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은 그 루가딘은 사라지는 바람의 벽 너머로 보이는 비공정으로 향하다 멈췄다. 너한테 맞설 더 커다란 힘을 가지고.

 

또 올거야!”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이제는 인간 사이에서 집어낼 수 있는, 눈에 익은 인간.

 

가루다는 눈을 감았다. 무어라 할 말이 있었던 것도 같았지만. 어차피 다음에도 볼 테니까.

 

 

[식칼님 용솬] 설정날조 판타지임

2017. 4. 22. 19:22 | Posted by 호랑이!!!

미코테족은 뚱냥이와의 관계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에오르제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뚱냥이나 고양이와 미코테족의 습성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때로 사정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쉬운대로 고양이에 대한 책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미코테족을 잘 아는 사람들은 고양이의 습성이 적힌 책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며 놀리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미코테와 가까우면서도 고양이의 습성이 적힌 책을 통해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하나.

 

고양이들이 몸을 부비는 것은 영역표시에 가깝습니다. 만약 당신이 목욕하고 나왔는데 고양이가 몸을 부빈다면...”

 

모세는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마물을 잡고 돌아와 샤워를 마친 요나가 보였다. 물에 젖은 것 때문인지 꼬리가 굉장히 불만스럽다는 듯 양쪽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이제 다 씻었는데. 모세는 슬금슬금 다가가서 요나의 옆에 앉았다.

 

요나.”

 

?”

 

혹시 요나는 샤워를 한 사람한테 가서... ... 머리를 기대거나 한 적 있어요?”

 

그러자 요나는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는 표정이 되었다. , 저런 표정까지 귀여워. 모세는 고양이의 습성에 대해 적힌 책을 꽉 쥐었다.

 

그런 건 고양이나 하는 짓이잖냥?”

 

... 그런가요, 역시?”

 

모세는 은근슬쩍 책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딘가 아쉬운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불 빨래한거냥?”

 

, , 오늘 날씨가 좋은 김에 해치웠어요.”

 

요나의 꼬리가 불만스러운 홱홱에서 흥미로운 살랑살랑으로 변했다. 그런가보다 하며 책을 꽂으러 가다가, 모세는 보았다.

 

한껏 가르랑거리며 요나가 두터운 이불 위에 엎어져 바르작거리다가 일어나는 것을.

 

머리를 기대는 것조차도 아니라고 하더니. 요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고 모세는 팔짱을 끼고 소파를 노려보다가 요나가 완전히 자리를 벗어난 것을 확인하고서는 아예 머리를 박았다.

 

"왜 너만...!”

 

그리고 마침 모세를 부르러 왔던 미리암은 그 꼴을 보고 말았다.

 

“...미리암... 요나가...”

 

모세는 여전히 소파에 머리를 박은 채로 웅얼웅얼 입을 열었고 미리암은 그 말을 칼같이 잘랐다.

 

적당히 좀 해라.”

 

 

엘리야는 침실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느 때와 같은, 깨끗한 방이다. 이불, 베개, 모두 하얀 색으로 맞추고 침대와 커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니까.

 

지나칠 정도로.

 

아까 연락이 온 것을 듣자하니 오늘 저녁에는 드디어 집에 나단이 온다. 2주 만에. 아무리 자신이 무덤덤하게 군다고 해도 2주 만에 집에 돌아오는 연인한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할 것 같단 말이지.

 

엘리야는 예전에 읽을 기회가 있었던 소설을 떠올렸다. 그 책에 따르자면 이런저런 것들은 분위기를 많이 띄워준다고 했지. 예를 들자면 술이라던가, 꽃이라던가, 그것도 아니면 예쁜 옷 같은 거... 종종 마시곤 하는 얼린 칵테일을 꺼내 보자니, 엘리야는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요정을 불러 깽판을 치고 싶어진다. 이건 아닌 것 같다.

 

꽃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요즘 올드 로즈를 사서 색색으로 물들이는 게 유행이라고 매점 주인이 보증해주었다. 장미를 적당하게 잘라 꽃병에다가 꽂아 놓고, 꽃병을 방에 두기 위해 협탁 위에 두었던 비술서도 간만에 치워 버렸다. 다음은 옷인가. 옷이 뭐가 있지.

 

옷장에는 옷이 몇 벌 있었다. 외출복, 잠옷, 평상복, 이건 던전 갈 때, 이건 늑대우리 갈 때 입는... 그 옷들을 다 젖혀 보니 그 아래에서 그래도 괜찮은 옷이 몇 벌 보였다. 얇은 천으로 만들어서 잘 보면 비칠 것 같은 옷과 아예 적은 천과 끈으로 만든 것. 둘 중에 어느 것을 입느냐가 문제인데.

 

천이 적은 쪽? 천이 얇은 쪽?

 

아 이거 진짜 고민되네!

 

톤베리 스승님이 봤다가는 별 쓸데없는 걸로 고민 하는구나라고 말하겠지만 엘리야는 진지했다. 어떻게 하면 활력 수치가 높은 애인을 침대로 꼬드기면서도 지나치게 흥분시키지 않아 자신의 체력이 바닥나지 않게 할까. 한참 고민하던 학자는 끈을 집었다.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이었다.

 

아니, 한낮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오후.

 

나단은 이미 일어나 있었는지 엘리야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다.

 

좋은 아침, 학자!”

 

“...넌 이게 아침으로...”

 

, , 학자는 목을 가다듬었지만 여전히 쇳소리가 났다. 팩 하고 노려보자 나단은 무슨 일 있냐는 듯 활짝 웃는다. 내가 못 살아.

 

일어나서 나 놀랐지 뭐야! 방안에 꽃이 있었어! 이거 그거지? 요즘 유행하는 올드 로즈?”

 

학자가 일어나 앉자 몸에서 얇은 이불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깜짝 놀란 전사는 양 뺨을 잡고 있었다.

 

... 옷이...!”

 

“..., 옷이.”

 

야해....!”

 

뭐야, 못 봤나.

 

입은 보람이 없구만.

 

학자, 엘리야는 짧게 한숨을 쉬고 차를 마시려고 했다.

 

전사가 달려든 덕분에 다 쏟아버렸지만.

 

 

유진은 그의 벙커에 있었다. 익숙한 안락의자는 몸을 틀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요란했고 중고품을 주워모은 모니터는 이따끔 꺼지거나 노이즈로 가득차고는 했다. 때로 델신이 새 걸로 갖다줄까?’하고 물어보고는 했으나 유진은 아직 고개를 저었다.

 

[유진, 지금 시간 있어?]

 

헤드셋에서 델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뒤로 젖혀 천국의 지옥불 플레이 영상을 보던 유진은 부리나케 바른 자세로 앉으며 헤드셋을 귀에 꾹 눌렀다.

 

, 있어.”

 

[--구역에 있는데 근처에 뭐 보여?]

 

달그락거리는 키보드를 눌러 게임 영상 대신 cctv 화면으로 전환하며 유진은 마우스를 돌렸다. 델신은 이 세계에서 자신을 구해주려고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명령을 하더라도 들어줄 수 있을 텐데, 언제나 정중하게(어쩌면 그렇게 정중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는) 이야기했다. 때문에 유진은 델신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이 때가 좋았다.

 

그 앞골목, 왼쪽으로 틀면 두 명. 둘 다 능력자고 50m 반경 안에 지원 차량이 한 대 있어.”

 

[지원사격으로 한 번에 보내줄래?]

 

그 정도야.

 

그에게 가장 가까운 거리에 모니터가... 있다. 커다란 모니터를 찾고, 상호를 찾아 건물을 해킹하고, 그 모니터에 천국의 지옥불 영상을 송신한 다음 악마를 소환하면...

 

델신.”

 

[? 뭐야?]

 

내가 갈까?”

 

슬슬 델신이 올 시기였으니까. 이번만은 이쪽에서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모니터 너머에서 델신의 입술이 움직였다.

 

[됐어, 이따 내가 갈게]

 

됐어, 이따 내가 갈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흉내를 내고 유진은 천사와 악마 친구들을 델신 쪽으로 보내는 데 집중했다. 이내 지원 차량은 폭발했고 두어 번 시간을 두고 터진 차량은 검은 연기를 쏟아내며 그 자리에 멈추었다. 차 문이 반동으로 떨어져 나갔고... 유진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더 숙였다.

 

“...하나, , ... 넷다섯...”

 

이상하다, 이런 차에는 보통 여섯 명이 타야 하는데. 나머지 한 명은 어디에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자니 다섯 명의 것 외에 팔다리가 후둑 굴러떨어졌다.

 

좋아, 다 있어.”

 

처음에는 타버린 손가락 하나도 보기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차도 박살내고 악당도 무찌르고 팔다리도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유진은 스스로의 발전에 뿌듯해하며 다시 헤드셋을 귀에 꾹 눌렀다.

 

여보세요 델신?”

 

[차는 부쉈어?]

 

깔끔하게.”

 

시체도 길바닥에 나뒹굴지 않고 차는 움직일 수 없게 박살. 아주 깔끔하지. 유진은 마우스 커서를 아래로 내려 천국의 지옥불 BGM을 재생했다.

 

델신 있잖아, 오늘 올 때 말이야.”

 

아까 지원차량을 파괴할 때 BGM을 틀어놓을걸. 그러면 천국의 지옥불에 차가 생긴 것처럼 보였을 텐데.

 

다음번에는 BGM을 틀어두고 기타 소리에 맞춰서 사람을 하나씩 날려 볼까. 유진은 모니터로 델신이 콘크리트 능력자 둘을 메다꽂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니터 가져다줘. 큰 걸로.”

 

 

[청의 엑소시스트/린총수] 전에 쓰다가 말았던 거

2017. 1. 20. 17:25 | Posted by 호랑이!!!

어느 날 유키오는 밥을 먹다말고 인상을 찌푸리는 린을 보았다.

, 왜 그래?”

못 먹겠어.”

린은 퉤퉤거리며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어느 날 유키오는 간식을 잔뜩 만들어놓고 자신은 손도 대지 않는 린을 보았다.

, 왜 그래?”

요즘 살이 쪄서.”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유키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배에.”

? 유키오는 한쪽 손을 린의 배에 얹었다.

그리고 손 아래에서 전해오는 떨림.

. 형이 복화술을 배웠나 보네!

아니, 배 근육운동을 많이 한 건가?

하하, 나도 참.

유키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무시했다. 하려 했다.

“...우엑!”

으아아아!!!!!!!!!!”

...그래, 린이 헛구역질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유키오는 숨을 몰아쉬는 린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어대었다.

누가 내 형수님이야!!!!!!!!”

, 정황상으로는 형수라기보다는 자형이지만.

 

 

 

메피스토 펠레스. 정십자 유일의 순수혈통 악마.

그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이사장실의 의자에 앉아 고급스러운 찻잔에 담긴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따뜻하게 내리쬐는 해, 게헤나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하늘.

살짝 열어둔 창으로 새어들어오는 바람과 달콤한 쿠키의 향기.

차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말 안 듣는 동생, 아마이몬이 이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문이 덜컥 열렸다.

무슨일이냐 아마... 아니. 무슨 일이지요?”

문 밖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의 막내동생 오쿠무라 린. 전혀 뜻밖의 사람에 치밀어오르던 짜증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왜 왔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린의 뒤에서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유키오에 그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유키오 선...?”

범인을 색출해 주십시오.”

범인이라니?”

으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설마 이 성실하고 얌전, 순한 유키오 선생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메피스토는 유키오의 손에 양 어깨를 잡혔다.

, 아야야...”

내 형과 교미한 잡놈을 잡아 달라고!!!”

 

 

==

 

 

뭐가 어쩌고 어째?

전혀 뜻밖의 단어 나열에 메피스토 그는 입을 딱 벌렸다.

“...그보다, 하필 입니까.”

“...분명히 상대는 남자입니다.”

린이 어깨를 두드리자 가까스로 진정한 유키오가 한 마디 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메피스토는 하, 짧게 숨을 내뱉고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동성애를 터부시하는 것은 너희 인간 뿐입니다. 게헤나에서는 물론 정십자 안에서도 종종 동성애자인 여성 기사나 남성 기사가 나오곤 하지요. 일전에 보았던 모 엔젤 군도 미소년과 밀회한다는 소문이...”

형이 그 상대자를 깔았다면 모를까, 깔렸다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

그 유키오의 입에서 저속한 용어라니.

다소간의 신선함을 느끼며 그는 린에게 말을 걸었다.

유키오 선생님에게 섹스 장면이라도 들킨 겁니까? 꽤 이것저것 알고 있네요.”

“...그게 말이지... 충격 먹지 말고 들어봐.”

이번에는 드물게 린이 설명이라는 것을 하려 한다?!

이 이상의 충격이 있겠느냐고 안일하게 생각하던 메피스토는, 이어지는 말에. 격하게. 홍차를 오랄 분사했다.

나 임신했어.”

푸우우우!!!!!!!!!!!!!!!”

 

[마스터/재명장군] 펭귄 카피페

2017. 1. 16. 13:17 | Posted by 호랑이!!!

사무실.

 

언제나 들리던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없다 싶더니, 장군이와 경남이는 색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빨간색, 보라색, 노란색 등으로 인쇄된 색종이는 비닐에 담겨서, 혹은 빠져나와서 책상에 널부러져 있었다.

 

뒷정리 제대로 해야 해.”

 

아이한테 말하는 것처럼 재명이 한 마디 하자 장군이는 알았다는 듯 경례를 했다.

 

아 재명씨는 며칠만에 들어와서 하는 첫마디가 잔소리야.”

 

사소한 궁금함이라도 풀려야 직성이 풀리는 젬마는 경남이와 장군이가 종이를 접는 드문드문 쳐다보는 모니터를 쪼르르 가서 보았다.

 

따라해 봅시다 : 펭귄 접기!

 

오늘은 펭귄이네?”

 

오늘? 나 없는 동안에 종이접기나 하고 있었어?”

 

김팀 모르셨구나, 얘들 그동안 공룡이랑 나비 같은 거 접고 있었어요.”

 

장군이가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우리한테 관심이 없어 관심이~ 에잉, 무정한 사람~ 무심한 사아라암~”

 

이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밖에서 알게 되면 그게 더 큰일이지.

 

뻔히 알면서도 낼름낼름 혀를 내미는 꼴이 얄밉다.

 

그 펭귄들, 여기 안 좋아할 건데.”

 

그건 또 무슨 말?”

 

추운 곳을 좋아하잖아. 펭귄은.”

 

커피가 든 머그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재명이 웃었다.

 

누굴 어린애로 아시나.

 

그럼 갖다가-”

 

따뜻한 곳에서 사는 펭귄도 있, 거든요...!”

 

넌 또 뭘 진지하게 대답해주고 그러냐.

 

장군이가 경남이를 콕콕 찌르는 것을 보며 재명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팀.”

 

.”

 

감정표현도 할 줄 알고, 좀 인간 같아졌네?”

 

젬마는 히죽 웃고는 자료를 준비한다며 저 쪽으로 갔다.

 

재명은 고개를 다시 저으려다가 미간을 짚는 것으로 참았다.

 

“...됐고, 일 할 준비는 다들 됐나?”

 

 

 

 

 

 

 

 

다음날 사무실을 찾은 재명이는 어제까지만 해도 색종이로 어지러웠던 책상이 말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좋아, 그래도 뒷정리는 하는군.

 

그러고는 찬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연 김재명은 불의의 기습을 받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박장군...!”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던 박장군의 빨간 펭귄들이, 냉장고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오순도순 모여 있었다.





[하이큐/네코마] 하산님 뱀파이어 au

2017. 1. 13. 00:35 | Posted by 호랑이!!!

일어났어, 켄마?”

 

“......”

 

켄마는 침대를 덮은 얇은 천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었다.

 

아주 얇은 천이 흔들리는 소리는 얼마 전까지였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또렷하게 들린다.

 

그 외에 먼지가 떨어지는 소리,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이 다물렸다 떨어지는 소리, 조그마한 곤충의 심장 뛰는 소리까지도.

 

너무 시끄러워서 아직 적응이 안 돼.”

 

그러자 친구는 웃었다.

 

익숙해질 거야.”

 

붉은 백합 무늬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열자 안으로 달빛이 환하게 비쳤다.

 

귀를 조금 더 기울이면 달빛이 내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먼저 방 밖으로 나선 쿠로오를 따라나가며 켄마가 생각했다.

 

 

 

 

 

 

낡은 복도는 아무리 잘 보수한다고 해도 티가 났다.

 

예를 들자면 복도에는 켄마를 위해 푹신한 카페트가 새로 깔려 있었지만 발을 옮길 때마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이 밟혀 딱딱거리는 소리가 나고는 했다.

 

분명 같은 복도를 걷고 있는데도, 분명 같은 신발인데도 앞서가는 쿠로오의 발 아래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서 켄마가 쿠로오를 볼 때면 다른 세계를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쿠로.”

 

켄마는 쿠로오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웬 정장이야?”

 

그제야 쿠로오는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빨간색과 검은색을 기조로 하여 셔츠, 조끼, 구두에 망토까지.

 

평소에 입던 것이 가벼운 차림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은 유별나다.

 

, 이거.”

 

쿠로오는 발을 들었다가 구두의 앞굽으로 바닥을 찍었다.

 

따악-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따다닥, , 가벼운 스텝을 밟고 쿠로오는 뽐내는 듯이 과장스레 인사를 했다.

 

내려가서 알려 줄게.”

 

저 미소만 아니었다면 우아하게 한 팔을 들어올렸다고 할 텐데.

 

저 미소가 우아하게라는 단어를 우아한 척으로 바꾸어버린다.

 

다소 악질적으로 본다면 비꼬듯이라는 단어까지 붙어서.

 

쿠로를 따라 내려간 가장 아래층은 홀이다.

 

넓기는 했지만 복도만큼이나 낡았고, 방을 밝히는 것이 겨우 촛불 하나라는 것 때문에 그 이상으로 어두운 홀.

 

가뜩이나 밤이라 어두운데 창문에는 두터운 커튼을 쳤고 작은 틈까지 막아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없도록 싸맨 것 같다.

 

꼭꼭 숨어버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모인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외출용 옷을 입고 있었지만.

 

“...뭐야?”

 

가끔 이러고 놀거든여.”

 

키가 큰 탓에 리에프의 망토는 배로 길고 넓었다.

 

탱고는 출 줄 알아?”

 

“...아니.”

 

괜찮아. 탱고를 추는 게 목적은 아니니까.”

 

야쿠와 이야기하는데 어깨에 쿠로오의 손이 얹혔다.

 

한 번 해 보면 알게 될 거야.”

 

자아 레디.

 

쿠로오는 은촛대를 들었다.

 

그 신호에 맞추어 사람들은 가느다란 검은 끈을 꺼내, 기대되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가에 두르고 꽉 묶었다.

 

나도 눈가리개를 해야 해?라고 묻기 위해 켄마는 고개를 돌렸다.

 

묶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쿠로오는 이미 검은 끈을 눈가에 매어서 웃고 있었다.

 

-.”

 

 

[마스터/진회장군] 다른 엔딩 2

2017. 1. 4. 19:58 | Posted by 호랑이!!!

 

얇은, 제정신이 아닌 지금 상태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얇은 저 천 너머에 사람이 앉아있다.

 

오른편에 하나, , 그리고 이 편에도 하나, ... ?

 

최소한 네 명.

 

판판한 바닥이 흔들리고 배 바깥에서는 파도가 친다.

 

역시 여기에서 죽는건가.

 

몸이 이만큼 상했으니 장기도 못 판다는 사채업자 말이 생각났다.

 

이대로 수장될 거라면 정신이나 계속 잃고 있을 것이지 괜히 이 몸은 생존욕만 높아서.

 

장군이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회장니임, 나한테 이래도 돼?”

 

그 구체적인 씹새끼는 실패했나? 하긴 실패했으니까 내가 여기 이러고 있겠지. 여차하면 돈 다 돌려주고 튀어야 하나?

 

이 모습을 그 형사가 봤으면 너 또 머리 굴리지?’...왜 뜬금없이 얼굴이 생각나고 있어.

 

나 아니면 그 돈 못 찾을 텐데?”

 

네가 내 브레인이기는 한데, 너만한 애는 한국에, 아니, 이 지구에 널렸어. 여기서 한 5퍼센트 떼 줄테니까 찾아달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

 

장군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 찾아?”

 

날 뭐에 매달아서 빠뜨리려나~? 하고.”

 

내가 너한테 뭘 어쩐다던?”

 

물론 어쩌기는 하겠지만.

 

진현필이 웃었다.

 

우리 장군이가 아직 나를 잘 몰라. 이 회장님 막 섭섭할려구 그래.”

 

어디 보자, 라며 진현필은 손을 뻗었다.

 

독약 먹여놓고 할 소리야? 어유 나 막 무서워지려고 그러네, 이렇게 회장님이 싸이코패스였나 싶구.”

 

? 독약?”

 

무슨 독약?하고 물어보던 진현필은 이내 박장대소했다.

 

장군이는 귀가 먹먹하도록 울리는 웃음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빌어먹을, 감각이 제멋대로야.

 

손으로 바닥을 내리치면서 알았는데 아프다던가, 나쁜 감각이 없다.

 

파도에 배가 흔들리는 것 같은 중립적인 감각은, 심지어 저 요란한 소리까지도 자극적으로 다가온다.

 

기분 좋은 쪽으로.

 

아 젠장, 무슨 반짝이가 떨어지고 하늘이 무지갯빛인 요정 나라냐고.

 

돈도 돈인데 말이야, 나한테는 네가 차-암 중요하거든.”

 

웃음을 그친 진현필이 무언가를 들었다.

 

어두운 안에서도 차갑게 빛을 내는 것은 장군이가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조각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래도 내 옆에 있을 앤데, 이런 거 입고 다니면 내 가오가 안 살지. 나중에 배 내리면 우리 옷이나 사러 가자?”

 

그말인즉 살려놓고, 옷 입히고, 어딘가에 쓸 데가 있으니 살려놓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나 그 말에 기뻐하고 안심하기에는 몸이 여전히 이상하다.

 

겨우 바닷바람 한 줄기가 얇은 커튼 아래로 불어와서 몸에 부딪혔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이상하다고밖에 하지 못할 것 같이.

 

허벅지를 핥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스터/진회장군] 다른 엔딩 1

2016. 12. 29. 22:29 | Posted by 호랑이!!!

장군이는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신을 차렸다기보다는...

 

그래, 우습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정신을 차렸더라 정도가 맞는 것 같았다.

 

시야는 흐려졌다가 어둑해졌다가 다시 밝아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두워지지 않았다.

 

대신 귓가로 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들려왔고 다른 감각도 서서히 몸에 깨어났다.

 

이거 이놈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일부러 쬐끔만 썼는데.”

 

진회장 목소리가 들리더니 배에 무언가가 닿았다.

 

? 손이구나.

 

손가락이 배에 난 흉터를 따라 몸을 내려갔다.

 

간이 반이 아작났다고 그랬나? 그러니까 얘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지.”

 

야 너, 적당히 찌르지 그랬어.라고 혀를 찬다.

 

이어 찰싹, 뺨에 손이 닿았다.

 

“...... .....”

 

일어났어?”

 

“..., , 씨이....”

 

일어났구나.”

 

내가 이것까지는 그래도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네.

 

예쁘다고 오냐오냐했더니 말이야, 누구한테서 날아가려구.

 

주절주절 떠드는 소리가 어딘가 이상하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아니, 들리는 소리만 이상한 것이 아니네?

 

감각이 이상하다.

 

어떤 느낌은 너무 강하게, 어떤 느낌은 너무 약하다.

 

이상하게도 몸이 묶여있거나 하지를 않아서 손을 들어올렸다가 바닥을 탕, 내리쳐 보았다.

 

어우, 왜 그러니. 깜짝 놀랐네.”

 

전혀 놀라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다.

 

장군이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손을 들어서 다시 바닥을 내리쳤다.

 

... 했어.”

 

목소리가 낯설다.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자신이 내는 것인데도.

 

.”

 

약이라고 해도 비타민제나 감기약 따위가 아니겠지.

 

억지로 눈을 떠서 쳐다보자 이 쪽을 보며 웃고 있다.

 

나밖에 못 구하는 거야.”

 

바다의 잔물결까지 느껴지는 작은 배.

 

칸을 나누는 것은 얇아서 너머가 들여다보이는 천 한 장.

 

그 너머에는 진회장의 보디가드 여러 명.

 

그리고 이 편에는.

 

나랑 진회장 뿐이군

 

자신과 진회장 뿐.

 

[하이큐/아사노야] 아사히가 알고 보니...의 au

2016. 12. 28. 16:12 | Posted by 호랑이!!!

, 아사히씨!”

 

니시노야는 낯익은 사람이 보여 그가 있는 쪽으로 총총 달려갔다.

 

여기까지는 웬일이세요?”

 

노야구나.”

 

이 근처에 일이 있어서, 라고 말하는 아사히는 니시노야가 우연히 알게 된 나이 많은 친구였다.

 

겉은 얼핏 보면 무섭다지만 속은 성실하고 착하다 못해 소심하기까지 한 사람으로 니시노야는 그와 종종 놀러가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집 안에서는 운동복 차림으로 자주 보았지만 오늘은- 정장 차림이네.

 

깎지 않은 수염에 긴 머리에 단정하지 않은 사람이 잘 다린 양복을 입고 있으니까 어딘가 우습다.

 

아사히는 이 근처 마트의 로고가 인쇄된 비닐봉지를 들어 보여주었다.

 

치약도 다 썼고, 반찬 재료도 좀 사러 왔거든.”

 

아 맞다, 치약. 말해주셨으면 제가 사갈 텐데!”

 

아냐, 노야한테 사오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러면서 웃어 보이는데, 아사히씨는 날 애 취급한단 말이야.

 

니시노야는 아사히가 자연스럽게 차도 쪽으로 가서 서는 것을 보았다.

 

언제 한 번은 억지를 부려 자신이 차도로 걸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오는 차를 피하는 척 하며 자신을 인도 안쪽으로 끌어당겼지.

 

아마 애 취급하지 말라고 말해도 소용없으리라고 짐작하고, 노야는 그를 따라 나란히 걸었다.

 

날이 추워진 요즈음은 해가 짧아서인지 거리는 벌써 어둑해져 있었고 가게들은 하나둘씩 불을 밝혔다.

 

화악 불이 켜진 가게에 눈이 부시다는 듯 니시노야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데 아사히가 그 손을 잡았다.

 

왜 그러세요 아사히씨?”

 

손이 왜 이래?”

 

“....”

 

벌써 아사히가 사는 집 앞이었기에 니시노야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왔네요, 뛸까요!”

 

아사히의 집 앞으로 모르는 척 빠르게 걷다가 노야는 어느 생각이 떠올라 아차했다.

 

집 안은 아까 거리에서보다 밝겠지.

 

그럼! 데려다 드렸으니 저는 이만-.”

 

어딜.”

 

니시노야는 팔이 잡혀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탁한 색 현관등이 켜지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환한 빛이 밝혀졌고 동시에 아사히의 기가 막히다는 비명 역시 터졌다.

 

노야!”

 

질질 끌려서 니시노야는 소파에 앉혀졌다.

 

팽팽한 가죽 재질, 몸을 숙이거나 자세를 바꾸면 소리가 나는 익숙한 소파 표면을 새삼스럽다는 듯 만지작거리자 아사히가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추었다.

 

“...노야.”

 

“...”

 

니시노야가 가장 좋아하는 차이나칼라 교복은 부분부분 먼지가 묻어 있었다.

 

겉옷이 바닥에 떨어지고, 다음은 구겨진 와이셔츠.

 

와이셔츠에는 물로 씻어낸 것 같은 작은 얼룩이 몇 개나 있었고, 그 아래 티셔츠까지 벗기자 니시노야의 상처가 드러났다.

 

몇 개는 이제 아물어가는 것, 몇 개는 아물다가 터진 것, 새로 생긴 것까지 해서 니시노야의 몸은 엉망이었다.

 

“...”

 

“...별 건 아니고...”

 

척 보아도 아무렇지 않은 일은 아니었지만 아사히는 그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상처를 살필 뿐, 반박하지 않았고 조용해지는 것이 싫어서였는지 니시노야는 주절주절 변명을 한 마디씩 꺼냈다.

 

“...그 왜, 그런 규칙 있잖아요. 운동부 애들은 싸우면 출장정지.”

 

어떻게 싸우겠어요.

 

니시노야는 배시시 웃었다.

 

저는 카라스노의 수호신인데.”

 

, 소독약이 상처에 닿자 니시노야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따가워!!”

 

소독약과 연고와 붕대까지.

 

묵묵히 상처 처치만 하다가 마지막 반창고를 붙이고 아사히가 일어섰다.

 

잠깐 나갔다올게.”

 

여전히 정장 차림으로.

 

? 어디를요?”

 

니시노야는 벌떡 일어났다.

 

저도 같이...”

 

-갈래요, 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몸이 다시 소파에 앉혀졌다.

 

삐걱삐걱 소파가 소리를 냈고 어깨에는 아사히의 손이 얹혀 있다.

 

.

 

가끔 잡아 보았던.

 

크기를 대 보겠다고 손바닥을 대 보았던.

 

따뜻한.

 

그러나 커다란.

 

겨우 손 하나일 뿐인데 니시노야는 일어날 수 없었다.

 

이래봬도 운동부인 자신인데 힘에서... 아냐, 힘에서 눌린 것이 아니다.

 

앞서 자신이 성실하고 착하고 소심하다고까지 이야기한 아사히인데...

 

기다려.”

 

손이 떨어졌는데도 니시노야는 일어날 수 없었다.

 

아사히는 노야의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고는 어깨를 다시 톡톡 두드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딱 딱 칼로 잰 것 같은 발소리가 멀어졌다.

 

 

[단편] 바다와 바람 (파랑을 듣고)

2016. 10. 25. 06:06 | Posted by 호랑이!!!

발이 물 속에 빠졌다.

 

처음에 발목까지 오던 물은 어느샌가 내 다리를 휘감아 무릎까지 왔고, 조금 더 지나니 허리까지 왔다.

 

이 곳은 작은 바위조차 솟아나지 않은 바다의 한복판.

 

물 밖으로 발을 꺼내려고 했지만 바다는 나를 삼키지도, 뱉지도 않은 채 그저 물고만 있다.

 

나는 물결을 밟으려던 것을 포기하고는 그 위에 드러누웠다.

 

머리카락 아래로 거대한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검푸른색 바다는 하얗게 부서지는 색의 추억으로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눈앞이 하얗게만 보일 정도로 강렬하게 내리쬐던 햇빛.

 

내 무거운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강한 바람.

 

발 아래 해파리가 온갖 색으로 떠오르고 유달리 커다란 물결이 올 때마다 펄쩍 뛰어넘던 나와, 너와, 우리.

 

하늘은 끝없이 푸르고 바다도 끝없이 푸르고.

 

마치 이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지던 날들.

 

그 때를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어느 물고기가 만들어낸 작은 파도를 발견하고 무심코 뛰어넘었다.

 

무심코, 이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너를 찾았다.

 

너는 이제 여기 없는데.

 

누군가 만들어낸 파도가 여러 겹 다가와 부딪혔다.

 

작은 물고기의 파도를 뛰어넘은 나의 발이 그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그 물은 나를 휘감았다.

 

.

 

복사뼈.

 

종아리.

 

이 검푸르게 넓고 깊은 바다에 내가 가라앉는다.

 

마치 끌려가듯이.

 

한 때 세상의 중심에는 우리가 있었는데.

 

나는 이제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가운데로 가라앉는다.

 

 

 

 

 

 

 

 

 

내 손 옆으로 잔물결이 일었다.

 

아주 가볍고 부드러워서 알아차리지 못할 뻔한.

 

내 손 옆에 하얀 깃털이 떠 있었다.

 

잔물결이 일었다.

 

잔물결이 일었다.

 

잔물결이 또 일었다.

 

네가 아닐까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손에 하얀 깃털이 쥐였다.

 

깃털 하나.

 

깃털 둘.

 

하얀 깃털 작은 다발.

 

네가 아닐까봐, 라는 말을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검푸른 물 속에서 뛰쳐나왔다.

 

햇살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가운데 우리는 바다에서 가장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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