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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와 마법사

2023. 4. 4. 03:05 | Posted by 호랑이!!!

여기까지 오는 데 네 공이 컸다.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메디아.”

 

해 아래 금발이 반짝였다.

 

미소가 또 다른 해처럼 눈부셨다.

 

메디아, 너도 가자.”

 

청년은 손을 내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황녀님. 제가 저런 자리에 갈 수는 없어요.”

 

네가 없었으면 나도 저 자리에 없었을 거야. 그러니 오늘의 영광도 네 것이지.”

 

그러나 붉은 머리의 그는 건물의 그림자에 몸을 더 숨길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제가 원한 것은 명예도 부도 아니고...”

 

내가 다음 황태자가 되는 것. 알고 있어.”

 

틸렌은 메디아가 미는 손에, 해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틸렌 황녀님이시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와 박수가 요란해졌다.

 

“...가세요.”

 

어휴, 황녀는 짧게 한숨 쉬고는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꽃잎과 쌀알을 뿌렸다.

 

미리 준비한 것인지 꽃 자수가 놓인 노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길 가운데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갹출하여 마련했을 옷은 한 눈에 보아도 품이 들어간 멋진 옷이라 입은 아이도 가슴을 펴고 한 뼘이라도 더 커 보이려 했다.

 

안녕! 하세요! 황녀님! 저는! ... 트리엔! 마을 출신이에요! 황녀님의 덕분에! 낭냥 왕국에 팔려갔다가 돌아올 수 있었어요!”

 

뒤에서 마우양 왕국!이라고 급히 정정해주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준비해 온 인삿말을 또랑또랑하게 말했지만 점점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은지 어...를 잇다가 결국 감사합니다!며 허리를 숙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와르륵 터져 나왔다.

 

틸렌 황녀는 아이가 내민 하얀 풀꽃을 단춧구멍에 꽂고는 그대로 아이를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렸다.

 

아이의 짧은 생 내도록 이어진 고난이 아이의 팔에 흉터를 남겼고 괴로움이 아이의 몸을 말렸지만 황녀가 놀아주는 지금만큼은 웃음이 얼굴 위에서 반짝였다.

 

황자님, 저도요!”

 

아니, , 나가면 안돼!”

 

마르타, 돌아와!”

 

줄 서면 안돼!”

 

되었으니 두거라.”

 

황녀는 어느샌가 생겨난 작은 줄에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을 두 바퀴씩 돌려주었다.

 

서른 명쯤 아이들과 놀아주자 여기저기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틸렌이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 아이보고 안기라는 듯 팔을 벌렸으나 아이가 질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 보호자의 품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웃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짙은 꽃내음이 풍기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것이 틸렌이 꿈꾸던 그대로였다.

 

해상 제독의 일과 순시, 행정 감독, 모든 일을 자신이 검토하고 행하며 몸이 부서져라 일한 보람이 있어.

 

시작은 메디아가 권한 일이었으나 결국에는 자신이 다 맡았지.

 

어쩌면 그것도 메디아가 계산한 그대로려나.

 

틸렌은 백성들이 꽃을 뿌려 만들어준 붉은 길 위를 걸어 황제가 기다리는 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때는 사교계의 모든 춤을 섭렵했고 한때는 최전방에서 일만 군대를 호령했던 그는 이제 세월이 내려준 흰 서리와 눈을 이고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였다.

 

틸렌, 나의 딸아.”

 

황제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의 자랑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네 인기가 그래도 내 절반은 되는 것 같구나.”

 

황제가 던지는 농에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가볍게 웃음이 일었다.

 

황녀 역시 재기 넘치는 웃음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황제는 맹약의 검을 들어올렸다.

 

틸렌, 메즈노어의 백작, 와이트워크의 후작, 아즐란 해의 제독, 셴차의 학살자, 헤르파노의 감시자, 기르파 용의 후손이자 적법한 황녀여.”

 

엄숙한 표정으로 황제가 황녀의 호칭을 꺼내어들자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대는 스스로의 막중한 책임을 마주하고 만백성을 위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후계로서 무던히 노력할 각오가 되었는가.”

 

모든 강과 바다에 맹세코 그러하겠습니다.”

 

황제가 쥔 술잔이 불길하리만치 붉게 빛났다.

 

그는 한 손에는 빛나는 술잔을, 한 손에는 빛나는 검을 들어 보였다.

 

이제 그대는 신성한 술로 그 맹세를 몸속에 새기거나, 스스로의 말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지금 이 검에 몸을 던져 그 목숨을 끊으라.”

 

틸렌 황녀가 일어섰다.

 

잘생긴 얼굴은 의기가 충만하여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미소 위로 긴장감어린 떨림이 스쳐지나가자 사람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금잔을 높이 들자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틸렌 황녀는.

 

틸렌 황태자는 빛나는 맹세를 받아들였다.

 

흐뭇한 눈으로 후계를 바라보던 황제는 반짝이는 푸른 눈이 메마르는 것을 보았다.

 

금잔이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황태자의 몸이 흙에 닿지 않도록 제각기 손을 내뻗었다.

 

비명소리가 났다.

 

모두가 지지하던 황태자가 죽었으므로 황제 슬하의 두 사람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수도 근처의 큰 영지까지 크고 작은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원할 것 같았던 신뢰가 무너졌다.

 

평탄하게 일하고 풍요로이 식사하고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던 일상에는 금이 갔다.

 

수없이 흐르는 그 피, , .

 

결국 외척의 손에 황제의 목이 떨어진 날.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황태자의 가장 신뢰하던 마법사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돌벽에 온통 메아리쳐 울렸다.

 

황제가 서거한 날이건만 거기에 느껴지는 감정이라고는 온통 기쁨 뿐이라니.

 

웃음이 광물이라면 그것은 유황.

 

웃음이 꽃이라면 그것은 흰독말풀.

 

광기까지 그 지독함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붉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그렇게 비명 같은 소리로 웃었다.

 

그가 곱게 틀을 다지고 반석을 쌓은 나라였다.

 

모든 하중이 황태자라는 돌에 가해지도록 만들어진 그 아름답고 단단한 나라는 그 돌 하나만 빼내었을 뿐인데 형태도 없이 와르르 무너진다.

 

제국이 흔들리니 주변의 나라도 흔들린다.

 

어떤 나라는 사라졌고, 어떤 나라는 몸을 사리고, 어떤 나라는 이것이 기회라는 듯 호시탐탐 주위를 노려보았다.

 

문명, 신뢰, 애정, 상생이라는 그 아름다운 단어들은 피와 탐욕에 밀려나고 온 세상이 손아귀에서 소용돌이친다.

 

아아, 세상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

 

이 가슴 벅찬 감정이야말로 사랑이겠지.

 

붉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다시 쌓는 것조차 마다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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