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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와 뜨개 가방

2023. 6. 12. 01:20 | Posted by 호랑이!!!

A는 오래된 건물에 들어갔다.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건물은 부분부분이 깨져서 햇살이 들이치고 식물이 자랐지만 그래도 바깥보다는 제법 사람 손을 탄 티가 났다.

 

이모들은 건물이 과거에 ‘ktx’를 타기 위한 곳이라고 했다.

 

A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계단은 흰색 계단과 검은 색 계단이 있었는데 이모는 꼭 하얀 계단만 밟고 올라가야 안전하다고 알려주었다.

 

그 이모는 아는 것도 많고 다 좋은데 너무 걱정이 많단 말이야.

 

ktx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엄청나게 빨리 달리는 탈것인데 바닥에 있는 을 따라 간다고 했다.

 

길이라... 저 아래 있는 거지?

 

움푹 파인 곳은 풀이 웃자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동안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내려다보던 A는 그 안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풀과 꽃으로 뒤덮인 사이에서 때묻은 이 보였다.

 

, 너무 작지 않나?

 

A는 몰래 길을 만져보았다.

 

이모가 보았다면 파상풍에 걸리니까 안돼!라고 하겠지만 A는 파상풍이 뭔지 몰랐다.

 

이모는 죽는 병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병은 어차피 죽는 병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 이모는 걱정이 너무 많아.

 

해 아래 나갈 때는 피부암!’이라며 모자라도 쓰게 했고 모르는 개가 다가오면 광견병!’을 외쳤다.

 

크든 작든 구분없이.

 

언젠가 한 번은 하얗고 작은 강아지가 다가오길래 잡으려 했더니 그건 다 큰 개라며 못 잡게 했다.

 

그렇게 작은 개가 어딨어!

 

이모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라고 말했지만 이 역시 A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하간.

 

A는 턱에 손을 대고 너비를 가늠해보았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이 앉기도 힘들어 보이는걸.

 

그리고 왜 이렇게 깊은 곳에 을 만든 걸까?

 

이 곳에 물 같은 걸 채우고 배를 띄운 걸까?

 

A는 부서진 테이블 판을 그 레일 위에 올렸다.

 

이번 역은~ -경주~ 신경주 역입니다~”

 

이모들은 이 근처를 지날 때면 합창하고는 그게 무슨 농담인 것처럼 키득거렸다.

 

A도 따라하곤 했지만 이모들은 늘 그게 아니라고 얘기했다.

 

뭐 어때, 난 이렇게 할거야.

 

이번 역은 신경주~ 신경주 역입니다.”

 

위 윌 어라이빙-

 

몸을 들썩일 때마다 단단한 합판 테이블이 덜그럭거렸다.

 

A는 이모가 만들어 준 가방을 아래 깔았다.

 

이모는 쇠로 만든 바늘이 든 낡은 가방을 갖고 다니는데 밤이면 늘 그걸로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것은 가방일 때도 있고 몸에 두르는 긴 천일 때도 있었고 함정에 쓸 재료일 때도 있었고 A가 어릴 때에는 안고 잘 수 있는 인형이 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더 커다란 가방이었지만 그 안에 든 실을 하나씩 쓰다보니 점점 작아졌고 몇 번이나 다시 풀고 뜨고 하더니 이제는 겨우 바늘만 들어가는 종류가 되었다.

 

마지막 실로 A의 모자를 떠주던 날, 이모는 이제 식물 줄기에서 실을 뽑을 거라며 쾌활하게 웃었지만 그 날 밤 몰래 물을 마시러 나온 A는 이모가 이럴 줄 알았다면 싼 실 말고 더 예쁘고 양 많은 실을 사둘 걸 그랬다며 우는 것을 들었다.

 

뭐 그렇겠지.

 

한참을 그렇게 들썩거리는데 저만치나 떨어진 곳에서 저벅,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사슴이나 토끼면 좋겠다.

 

다람쥐나 청설모까지도 괜찮아.

 

고양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아냐 역시 토끼가 좋겠어.

 

칼을 쥐고 조심조심 돌아보는데 다시금 육중한 발소리가 다른 곳에서도 났다.

 

높은 해자 위로 살점이 흘러내린 뼈와 피부가 녹색처럼 보일 정도로 곪아 흐르는 진물과 이지를 잃어버린 채 원시적인 위협음을 내는 유사 인간들.

 

A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 , , ,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불규칙하게 살점 붙은 몸이 해자 안으로 툭 툭 떨어지면서 철퍽 소리가 났다.

 

녹색으로 반짝이던 이파리며 노랗게 흔들리는 꽃에 질척한 살점이 달라붙어 아래로 잡아끌었다.

 

이모들이랑 언니한테 토끼는 못 갖다주겠네.

 

칼이 손 안에서 빙글 돌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자신에게 다가오던 첫 번째 놈의 머리를 걷어차 날렸다.

 

딱딱하고 두꺼운 밑창 아래로 골반뼈를 으스러뜨리며 다음 놈의 배를 밀어내듯이 차자 살점이 떨어져 가벼워진 몸이 뒤로 밀려나다 벽에 부딪히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뼈가 드러난 손 네 개가 A의 움직임을 봉인하려 다가왔다.

 

잘 갈아둔 칼을 휘두르자 첫 번째에는 손가락이, 두 번째에는 손목까지 잘려 땅에 떨어진다.

 

세 번의 칼질로 마침내 목 두 개를 취하면 이번에는 뒤쪽에서 가까워진 소리가 났다.

 

보지 않고 주먹을 뻗는다.

 

그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머리통을 비껴나고 반쯤 드러난 턱뼈가 벌어지며 그 팔을 노린다.

 

그러나 A는 몸을 숙이며 그 품 안으로 더 빠르게 돌아 들어갔고 주먹보다 단단한 팔꿈치가 반쯤 삭은 갈비뼈를 부수며 파고들었다.

 

팔이 밀리지 않게 주먹을 받치면 그 안쪽의 물어뜯긴 폐와 허상 같은 척추까지 허물어졌다.

 

이걸로 다섯.

 

이어서 여섯, 일곱, 여덟.

 

마지막으로 아호-

 

마지막까지 일어서 있던 것의 목을 부수고 떨어뜨리는 순간 아래에서 몸이 솟구쳤다.

 

목을 끊지는 않았던 것이 스르륵 일어나 덤벼들었다!

 

A는 반사적으로 두껍게 뜬 가방 끈을 잡고 벌린 입으로 밀어 넣었다.

 

이가 벌어졌다 다시 닫혔지만 끈을 재갈처럼 물기나 할 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이거 폭신폭신 하는 기능만이 있나 했었는데 의외로 이 끈, 꽤 튼튼한 모양이야.

 

하지만 아끼는 물건이 더럽혀지는 것은 달갑지 않아-비록 아끼는 물건을 아까까지 깔고 앉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A는 주저없이 칼을 휘둘렀다.

 

“..., 이거 제복이다.”

 

열쇠 같은 게 나오면 좋댔는데.

 

비록 좀비사태가 터지기 직전에는 전자식 도어락을 달곤 했다지만 자판기라던가 특정 문, 특히 일하는 사람들이 쉬는 곳은 열쇠를 쓰는 곳이 많았다.

 

옷을 뒤집어 털자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앗싸 신난다.

 

A는 열쇠가 몇 개나 붙은 열쇠고리를 신나게 들어올렸다.

 

금속 장식이 반짝거리는 것은 예쁘니까 가방에 넣고 해자에서 뛰어올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자판기, 아니고.

 

화장실, 아니고.

 

창고? , 돌아간다.

 

그렇지만 창고는 물건이 많을 테니까 내일 다른 사람들이랑 와야지.

 

A는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다 마지막 열쇠에 딱 맞는 곳을 찾았다.

 

검은 색 네모판이 한 벽을 메우는 곳에 책상 몇 개와 의자와 캐비넷이 있다.

 

캐비넷도 볼 거지만, 책상 서랍을 뒤지는 것은 꽤 보물찾기하는 기분이라.

 

대다수는 필기구 같은 게 나오지만-이것도 잘 쓰기는 한다- 의외의 물건이 나오면 여기저기 자랑하기도 좋았다.

 

하나, 수첩.

 

, 사탕과 과자가 든 작은 통.

 

이건 이대로 가져가야지!

 

이것만으로 충분한 소득이었기에 무심코 지나칠 뻔 했다가 A는 마지막 책상을 열었다.

 

세 번째 책상 서랍 맨 아래칸에는 보라색이며 초록색이며 사람 머리통만한 실이 가득했다.

 

둘러진 종이 띠를 살짝 만지면 버석했지만 실은 보드라웠다.

 

꽃잎보다 부드러운 것을 만지자 머릿속까지 찌릿찌릿했다.

 

이게 오늘 얻은 최고의 보물인지도 몰라!

 

A는 과자통을 놓을 수 없었기에 몇 번이나 책상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결국 통은 가방에 쑤셔넣고 실 뭉치를 한아름 품에 안았다.

 

이걸 보면 다들 얼마나 기뻐할까.

 

풍요로웠고 기술의 극치를 달렸다는 과거의 산물답게 한아름이나 안은 실은 부드럽고 가볍기까지 했다.

 

이모는 이걸 보면 무슨무슨 얀이니 울이니 하면서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할거고 다른 이모들한테 이걸 만져보라고 하겠지.

 

그럼 다른 이모들은 이모가 첫 뜨개질로 만들었다는 그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또 웃을 거다.

 

고양이가 낚아채길래 목에다 매 줬더니 그대로 고장났다는 그거.

 

그럼 그 시대를 모르는 나와 B는 과자나 까먹으며 잡담을 하다 웃을 거고, 뜨개질을 배우는 B는 내일부터 이걸로 뭔가를 만들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 모자를 만들든 판초를 만들든 가방 끈을 만들든 첫 번째 것은 무조건 나 달라고 해야지.

 

신이 디디는 바닥에서는 투박하고 무거운 소리가 났지만 A의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오늘은 수확이 아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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