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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이글] 클론 이글과 이글이 만났다

2017. 3. 27. 19:10 | Posted by 호랑이!!!

황혼의 도시에도 밤은 온다.

 

유달리 어둡고, 빛이라고는 겨우 달밖에 없는 그런 밤이.

 

이상한 일을 조사하느라 시간이 늦어진 탓에 이글은 그 거리를 걷고 있었다.

 

자신을 사칭한 편지가 오질 않나, 갑자기 얼굴만 알던 사람이 아깐 왜 그랬어하고 말하지를 않나.

 

심지어는 엘리 꼬맹이가 아찌 머리 또 묶었네!’하고 알은체를 해 온다.

 

이 도시에서 수상쩍은 일을 한다면 역시 그 집단밖에 없지.

 

안타리우스, 뻔하다고.

 

그러나 목적이 뭘까? 하필 자신을 복제한 이유는?

 

걷다보니 문득 벽돌담에 엷은 빛줄기가 스쳤고 이글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 검을 꺼내 뒤돌았다.

 

아슬아슬하게, 찔러오는 검이 막혔다.

 

안녕, 원본.”

 

낯익은 얼굴에는 익숙하지도 않은 칼질로 억지로 긁어내린 것 같은 흉터가 있다.

 

이 정도는 막는군, 그래, 그래야지.”

 

이글은 검을 넣고 손을 들었다가 과장스럽게 마구 팔을 문질렀다.

 

으햐아, 목소리는 난데 벨져 형 말투잖아? 으엑 징그러! 아 소름끼쳐, 끼친다구!”

 

다른 이글은 드럼통 위에 걸터앉았다.

 

원본은 그렇게 행동하는군. 좋아, 다음번에는 그렇게 굴어 보지. 좀 더 답게.”

 

그래서, 나한테는 무슨 볼일인데? 도플갱어를 보면 죽는다더니, 진짜의 자리를 놓고 죽고 죽이고 싶은 거야?”

 

아직은 아냐.”

 

아까 그건 인사, 인사.

 

차갑고 느릿한 목소리로, 그 이글은 다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난 겨우 4개월이란 말이야,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지.”

 

그래서, 나는 궁금해.

 

왜 너의 가장 큰 관계는 블레이드... ‘큰형인지.

 

무슨 소리야?”

 

인간에게 커다란 관계란 가족과 애인이 주라고 하던데, 어째서 너는 그 커다란 관계를 한 사람에게 쏟아붓고 있는 거야?”

 

계란은 한 바구니에 쌓지 말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이상하다고.

 

어째서 둘 사이에는 그렇게 강한 믿음이 있고, 이해라는 것이 있고, 기타등등 많은 것이 있는 거지?

 

이게 사랑이야?”

보통 연인 간에는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나?”

그럼 는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지?”

 

이글은 그 이글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붉은 장식 술, 낯익은 크기와 모양, 보는 것만으로도 무게를 알 것 같은.

 

공기의 긴장이 팽팽해진다.

 

피부에 닿는 감각이 예리해지고 시선이 따끔거리며 닿는 것이 느껴졌기에 다른 이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희미한 달빛에 비쳐, 이글의 동공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네가 형과 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어?”

 

, 기분 좋은 반응.

 

다른 이글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형이니까.”

 

이글의 검이 발사되듯 뻗어나갔다.

 

다른 이글은 재빠르게 드럼통을 걷어차고 자리를 피했다.

 

“...웃기지 마, 이 빌어먹을 호문클로스.”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글은 한 단어씩 씹어 뱉었다.

 

난 그저 호기심이 많을 뿐이야. 모든 것이 궁금한 아기라니까.”

 

아기, 4개월짜리 아기라구.

 

그 이글은 낄낄 웃었다.

 

그러니까, 좀 빌려갈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고 싶다구.

 

어째서 그 사람은 내 편지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는지.

 

어째서 그 사람만이 단번에 나와 그를 알아보았는지.

 

어째서 그 사람에게 그렇게 짙은 관계를 느끼는지.

 

아아, 그 사람이 아니구나. -”

 

칼이 이글이 있던 곳의 뒤편 벽에 박혔다.

 

내 형이야. 이 살덩어리 자식이-”

 

뒤로 물러선 이글의 은발이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이젠 내 거야

 

 

[티엔하랑마틴] 그냥 차를 마실 뿐인 글

2017. 3. 18. 02:19 | Posted by 호랑이!!!

이하랑의 수련이 끝나고 마틴은 티타임이라며 하랑을 데리고 티타임 장소로 갔다.

 

자리에 모인 것은 브루스, 마틴, 하랑.

 

거기까지라면 그야말로 평화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데.

 

한사람이 더 있다.

 

티엔 정.

 

마틴은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가 브루스가 돌아보자 활짝 웃었다.

 

가는 길에 티엔 정이 있기에 불러봤네.”

 

그렇...군요.”

 

웃고 있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마틴이 내놓은 것은 디저트였다.

 

티타임이라더니 아이스크림을 꺼내왔군.”

 

하랑 입맛에 맞을만한 것 위주로 가져와 보았죠. 차에는 익숙하지 않다고 했으니까요.”

 

티엔 정은 몰랐겠지만.

 

마틴은 굳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랑은 준비된 자리에 앉아 먼저 동글동글한 과자를 집어 들었다.

 

접시에는 색색깔 다양한 과자가 있었고 어딘가 단 향이 났다.

 

그거 맛있어요. 제대로 만드는 가게가 적어서 요 며칠 찾아다녔는데-”

 

과연, 그래서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우곤 한 거군.”

 

하랑의 백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분 탓인가, 뱀의 한숨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처음에는 마틴과 티엔이 다정한 대화를 할 적마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는 했던 하랑의 붉은 강아지들은, 이제는 둘이 대화를 어떻게 하건 아랑곳 않고 자기 꼬리를 쫓아 빙글빙글 돌곤 한다.

 

그리고 개들만큼이나 저 둘에게 익숙해진 하랑은 저 다정한 둘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걸러내며 과자를 한 입 물었다.

 

딱딱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맨 위의 얇은 껍질 뿐.

 

조금 더 힘을 주면 쫀득한 과자가 늘어지는 것 같은 식감으로 떨어진다.

 

남은 부분을 한 입에 털어넣고 이번에는 다른 색 과자를 들어서 둘로 나누었는데 크림이 묻은 쪽과 묻지 않은 쪽으로 나뉘었다.

 

조심조심, 이로 크림을 긁어내는데 차가 한 잔 턱 내밀어진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더니 한잔이 더 내밀어진다.

 

차를 양 손에 들고 마시라는 건가? 마카롱이랑 같이 들고? 나 손 두 개밖에 없는데?

 

과자 한쪽에 이를 박은 채 고개를 들었더니 티엔과 마틴이 차 한 잔씩을 내밀고 있었다.

 

이하랑은 진한 맛 차를 좋아한다.”

 

과자 맛이 진하니까 굳이 차까지 맛이 진할 필요는 없다구요.”

 

그럼 우유라도 부으면 되지.”

 

어떻게 차에 우유를 부을 수가 있어요, 이 야만인!”

 

그럼 차에 우유를 붓지 어디에 우유를 부어?

 

양반이 요상한 소리를 하네, 라는 표정인 하랑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마틴은 새 찻잔을 꺼냈다.

 

하랑, 잘 봐요. 이렇게 마시면 더 맛있어진답니다.”

 

찻잔에 우유를 따르고 거기에 차를 붓자 연한 꽃빛으로 차 안이 물든다.

 

거기에 마틴은 각설탕을 두어 개 떨어뜨려 주었다.

 

달고 맛있어 보이는구만!

 

하랑은 덥썩! 마틴이 내민 잔을 받았다가 눈을 마주쳐 버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어두운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 같은 눈.

 

그러니까, 텅 빈 눈으로 이쪽을 보는 티엔의 눈 말이다.

 

“..., 맛을 비교해보고 싶으니까 이것도.”

 

그렇게 받아가자 눈에 파앗- 생기가 돈다.

 

하랑은 참 착하네요. 굳이 티엔을 배려해서 마셔주지 않아도 될 텐데.”

 

지금 시비라도 거는 건가? 헛수고다.”

 

아까까지 시커먼 구렁텅이 같던 눈을 한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샌가 의기양양해져서는 마틴 쪽으로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여유롭게!

 

그러고 어느샌가 다시 싸울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도무지 둘을 붙여 놓을 수가 없어, 정말이지.

 

어쨌거나 어른스러운 내가 중재를 해야지 어쩌겠어.

 

하랑은 브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은 어느 쪽이 좋수? 차에 우유를 탄 것, 우유에 차를 탄 것.”

 

브루스는 벌컥벌컥 마시고 있던 커다란 잔을 텅, 내려놓았다.

 

어지간한 어른 머리통만해서는 잘못 맞았다가는 골로 갈 것 같이 생겼다.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은 브루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에는 설탕이다.”

 

 

[제키릭벨져] 릭 생일 축하해!

2016. 12. 13. 21:10 | Posted by 호랑이!!!

늘상 이 곳은 공기가 무겁고 눅눅했다.

 

알지 못했지만.

 

빛은 어렴풋하고, 때문에 차가웠다.

 

알지 못하지만.

 

그나마 빛이 드는 곳.

 

공간의 가운데.

 

그 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한때 우주의 별을 바라보던 눈은 빛조차 알지 못하게 되고.

 

한때 어디든지 걷던 발은 이 곳에 못 박힌 채로.

 

이 곳은 그럭저럭 넓다고 할만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갇힌 것처럼 좁게만 느껴졌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지만.

 

신도여.”

 

그 좁은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이어 다른 사람 또한 들어왔다.

 

뒤이어 들리는 것은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였고.

 

공간 안으로 두 검을 사용하는 사람이 뛰쳐들어왔다.

 

뒤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침입자에게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일어나라, 나가야 한다!”

 

어딜 간단 말이냐.”

 

가느다란 줄기의 빛으로도 그 사람은 반짝였다.

 

머리카락도, 그리고 파랗게 타오르는 안광도.

 

침입자를 바라보며 아직도 앉아있는 그는, 문득 들짐승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 단어조차 인식의 검은 물 아래로 끌려들어가 사라질 즈음 그가 교주라고 부르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신도여.”

 

그는 교주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알았다.

 

고개를 들어 반응을 하자, 그는 팔을 들어 침입자를 가리켰다.

 

이제 그 침입자는 그를 따라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잡혀 있었다.

 

아마도 그 침입자가 자신을 잡아들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도망쳤겠지.

 

그러나 어째서일까, 침입자는 여전히 헛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교주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없애라, 나를 위해.”

 

교주님을 기쁘게 해야 돼.

 

우주와 이 곳을 연결하면, 불이 끓는 화산과 이 곳을 연결하면, 저 차가운 심해 어딘가와 이 곳을 연결하면 사람 하나는 손쉽게 죽일 수 있다.

 

그는 팔을 들었다.

 

어째서인지 지나치게 가벼운 팔을.

 

, 톰슨!”

 

침입자는 사람의 이름 같은 비명을 질렀고, 때문인지 교주가 웃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는 자신이 교주를 기쁘게 했음을 알았다.

 

 

[다이토마] 마녀AU로 전에 쓰던거 발견

2016. 12. 2. 19:05 | Posted by 호랑이!!!

intro

마녀의 이동 도구는 기본적으로 가사일에 도움이 되는도구이다. 악마와 거래하는 것이 예로부터 여자로 한정되었고, 옛날에는 사람이 몸을 실을만한 가사도구가 청소용구인 빗자루(때로 흰염소, 솥단지)였기 때문에 아직도 이동수단은 청소용구가 많다. 하지만 최근에는 빗자루를 잘 쓰지 않으니까 모임에 참가하여 확인해도 진공청소기 투성이다. 가끔 로봇 청소기도 보이기는 하지만 타기 힘들기 때문에 위험한 것을 좋아하는 젊은 마녀들 사이에서 익스트림 스포츠 대용인 것 같다.

이렇듯, 마녀들도 현대 사회에 발맞추어 변화하는데, 이는 이동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몇백년 전까지는 십대 초반에 독립하고는 했지만 현대에는 성인이 되면서 독립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Prol

 

토마스 스티븐슨의 특기 분야는 내지는 얼음마법이다.

 

본디 마녀의 독립은 마녀의 특기 분야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인데 이래서야 큰일이다.

 

요즘은 누구라도 쉽게 얼음을 구할 수 있고 인공눈까지도 만들고 있으니까.

 

인건비와 기계의 비용을 비교해도 자신이 더 싸다고는 할 수 없을뿐더러 기계 대신 써달라고 말하기에도 영 마뜩찮다.

 

자신이 내리는 눈으로 사람들이 기뻐해주는 것이야 좋지만 영 충족감이 생기지 않으니까.

 

물론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 토마스!”

 

익숙한 목소리다 했더니 같은 동아리 선배인 이글 홀든이었다.

 

이글은 척척 다가와 토마스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걸쳤다.

 

너 방 남냐?”

 

?”

 

, 그동안 큰형이랑 살고 있었는데 말이지. 형이 자꾸 구박하잖아! 확 나와버리려고.”

 

네에?!”

 

그런 이유로 집을 나온단 말이야?

 

토마스는 입을 딱 벌렸다.

 

그래서, 방 없어? 컴퓨터랑 TV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는데. 일주일만... 아니, 사흘도 좋으니까 재워줘!”

 

제 방이라도 좋다면야...”

 

토마스는 수락했다.

 

그리고 토마스의 방에 들어와서 이글은 필터 없는 감상을 첫 마디로 삼았다.

 

폐가?”

 

무슨 말이예요! 이래봬도 제가 2년째 살고 있는 방이라구요.”

 

춥고, 좁고, 어둡다.

 

듣자하니 부엌의 스토브도 영 시원찮은 모양인데, 지금까지 자신이 살던 방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객관적으로 이 집은 못 살 집이다.

 

야아아옹

 

이글은 고양이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눈동자에 검은자위가 없는 듯한 검은 고양이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안녕, 피터. 집 잘 보고 있었어?”

 

토마스가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코를 살짝 가져다 대어 코인사를 하고는 이글 쪽으로 다가갔다.

 

피터, 그 쪽은 이글 선배야. 몇 번 얘기했지? 선배, 그 쪽은 피터예요.”

 

안녕 야옹아~”

 

피터를 두어번 쓰다듬어 주고 이글은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 내가 저번에 얘기했던... 아니, 걔 말고. 토마스 스티븐슨. , . 걔네 집에 와 봤는데 집이 끝내주는 폐가거든?”

 

여기까지만 해도 토마스는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했고, 당장 항의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형아, 얘랑 살아.”

 

이글 선배!?”

 

그런 걸 맘대로 정하면 어떡해요!

 

토마스가 외쳤지만 이글은 태평하게 그 형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마치고서야 느긋하게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형이 너 만나보자는데?”

 

, 생각해봐.

 

형이 사는 저쪽 동네는 네가 다니는 단과대학과도 가깝고, 집 근처에 장보기 좋은 마트도 하나 있어. 방은 넓고 깨끗하고 동네 치안도 좋고, 관리도 잘 해준다고? 그야 여기보단 비싸지만, 둘이서 나눠 내는 거잖아. 지금 내는 거랑 크게 차이나지 않을 거야...

 

...에 기초한 이글의 설득에, 토마스는 자기도 모르게 만나는 보겠다고 해 버렸다.

 

토마스의 대답을 듣자 이글은 만족했다는 듯 욕실로 들어갔고, 요란스레 씻기 시작했다.

 

어쩔 생각이야?’

 

피터가 토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꼬리는 책상 아래로 늘어졌고, 불쾌하다는 듯 탁탁 서랍을 쳤다.

 

뭐가?”

 

룸메이트를 구한다니, 말도 안 돼

 

그것도 나 외에.

 

피터는 책상을 꼬리로 찰싹 때렸다.

 

진짜 할 생각이야?’

 

일단 나쁜 얘기는 아니잖아.”

 

피터는 불만스럽다는 듯 낮게 우우- 소리를 냈다.

 

토마스는 무어라 하려다 이글이 수건 한 장만 걸치고 나오자 드라이어를 찾아 내밀었다.

 

다음날은 마침 토요일이었고 이글은 일어나기 싫다고 중얼거리면서 이불에 돌돌 말려 있었다.

 

토요일인걸요, 더 주무세요.”

 

여느 때와 같은 시각에 일어난 토마스는 피터 밥을 챙긴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운지 오래였고 분주하게 움직인 다음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수업 교재를 펼쳤다.

 

안돼, 벌써 열한 시 반인걸.”

 

그렇네요.”

 

벌써 점심때구나.

 

꼭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글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형이 열두시에 나 데리러 오겠다고 했어.”

 

그걸 왜 지금 말해요!”

 

토마스는 창문을 활짝 열고는 원래도 아무것도 없던 방안을 청소하겠다며 청소기를 들었다.

 

“...그런데 선배, 선배네 형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예요?”

 

너랑 살기에는 나쁘지 않을 거야.”

 

잔소리를 빼면 조용한 편인데 형이 너한테 잔소리를 할 리도 없고. 배려심? 있는 편이지. 책임감도 강하고...

 

무엇보다! 맨날 야근하니까 술 마시고 놀다가 느지막느지막 들어와도 돼! 말이 룸메이트지 주말에나 만나는 주말부부나 다름없다고~”

 

나름 객관적인 정보니까 믿어도 돼!라며 이글은 팽개쳐둔 옷을 입었다.

 

오른쪽 양말까지 다 신은 순간,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 누구세요-”

 

문을 열자, 거기에는 더없이 이글과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서 있었다.

 

이글이 여기 있다 들었다만.”

 

형아~ 나 보고 싶었어?”

 

하나도 안 닮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았지만 안 닮았다!

 

이글이 토마스의 어깨를 누르며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 않았고, 이글은 그게 또 익숙하다는 듯 소개를 시작해서 토마스를 당황시켰다.

 

토마스, 이 쪽은 우리 잔소리쟁이에 구박쟁이 다이무스 형이야. 절대 안 웃어.”

 

내가 잔소리를 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글.”

 

이글은 못 들은체 하고 토마스의 뺨을 꾸욱 찔렀다.

 

얘는 토마스 스티븐슨. 어때, 귀엽지? 나만큼은 아니지만!”

 

목례로 인사를 마치고 그는 고양이용 간식 캔을 내밀었다.

 

고양이를 키운다기에 사 봤다. 좋아할지는 모르겠군.”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이무스 형.”

 

뭐냐.”

 

나 피자 먹고싶어.”

 

가서 먹을거냐 주문할거냐.”

 

역시 형은 상냥해.

 

양손으로 손가락 총 빵야빵야에 윙크라니, 막내는 정말 애교가 많구나.

 

토마스는 감탄했다.

 

 

[이하랑] 기우제

2016. 10. 18. 18:14 | Posted by 호랑이!!!

하랑은 손을 들었다.

 

붉은 색으로 물들인 넓은 소매가 하늘 가득하게 펼쳐졌다가 땅으로 가라앉았다.

 

앞으로 펼친 병풍도 화려하고 그 앞의 제사상도 딴에는 화려하고, 귀로 들리는 소리도 꽹과리며 북이며 요란하다.

 

알록달록 물들인 천을 나풀거리는 하랑까지 그야말로 눈도 귀도 소란한 가운데 하랑의 눈빛만은 이질적으로 고요했다.

 

신령님, 신령님

 

비를 내려주십사

 

농작물이 풍족하게

 

올해 배는 곯지 않도록

 

비야 비야 내려라.

 

비야 내려라.

 

그런 소원을 뒤로하고 하랑이는 다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렸다.

 

그 눈 아프도록 짙게 물들인 소매가 하늘을 덮었다가 다시 가라앉자 멀리서 구름 무리가 나타났다.

 

커다란 구름 무리.

 

사람들은 그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하랑의 눈에는 그 구름을 몰고 오는 이무기가 똑똑히 보였다.

 

소매가 더욱 화려하게 춤추었다.

 

돌풍이다

 

비구름을 몰고 오는 돌풍이다!”

 

그 거대한 것이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점점 바람이 강해지더니 빗방울이 뚝 떨어졌다.

 

굵은 빗방울 하나가 땅에 닿는 것 하나를 기점으로 폭풍이라고 할 정도의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지지대를 세우러 가자

 

논일은 우리가 할 테니 당신들은 그저 있으소

 

사람들은 바삐 걷고 뛰었다.

 

그 가운데 하랑이는 뛰고 돌고 손을 들어 소매를 휘날렸다.

 

이 돌풍 속에서도 미동조차 없는 병풍 뒤로 거대한 호랑이가 이무기와 마주하고 있었다.

 

요란하게 꽹과리가 울었다.

 

호랑이가 이를 드러내었다.

 

바람이 일순 멎었다.

 

하랑의 손짓에 악기가 멎자 이무기가 구슬을 움키고 비가 거세게 내렸다.

 

다시, 음악소리가 커졌다.

 

 

 

 

 

 

 

 

 

비는 정확히 마을 사람들이 원하던 만큼 내렸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적당히.

 

비가 멎고 나서야 하랑이는 춤을 멈추었다.

 

비가 아닌 땀에 젖어서.

 

그리고 누군가는 지쳤다는 것이 역력한 그의 눈만은 마치 싸움이라도 한바탕 한 것처럼 흥분으로 번뜩이더라고 말하였다.

 

 

지금 유니언의 홀든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

 

무슨 일인데, 대디?’

 

그냥... 그냥 골치가 아파

 

그런 대화를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은 빅터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혹시라도 유니언의 홀든을 만나면,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말고 도망쳐

 

...라고.

 

그리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빅터는 생각했다.

 

 

 

 

 

 

 

 

불과 일주일 전, 빅터는 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집이라고 해 봐야 부엌, 화장실, 거실이 딸려있는 아주 작은 아파트지만.

 

집안은 호화스럽지 않다, 로는 모자랄 만큼 초라했다.

 

있는 거라고는 침대(베개 하나. 얇은 이불 하나. 작음)에 식탁조차 없고 소파는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파란색 천을 씌운 소파가 있고 무언가 커다란 쿠션이 있다.

 

가전제품이야 으레 있을 텔레비전(, 이건 좀 컸다), 그 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고.

 

굳이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더럽다. 매우. 굉장히. -.

 

어질러진 정도라면 말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이며 바닥이나 소파에 어질러진 옷에는 머리카락에, 먼지에, 동물이라도 있었던 건지 뭔가 하얀 털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마신 음료수병에, 과자 봉지에, 그런 것들이 구겨지거나 접혀서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방에 대한 이야기는 둘째치더라도, 이 집의 주인이라는 이글 홀든은 빅터에게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머리가 좋다는 사람이 내 몸에 수갑 하나도 안 채우냐

 

빅터가 배달 당한날 이글은 이 어질러진 집에서 소파 등받이와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시간은 마악 오후가 된 참인데 창문의 커튼이라는 커튼은 다 치고.

 

적대 조직에 잡혀서 납치된 몸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빅터의 긴장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솔직하게 빅터의 첫 감상을 말해 보자.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폐인인가

 

...였다.

 

익숙한 일인지 빅터를 데려온 그 사람은 이글을 깨워서 네가 좀 맡으라고 이야기를 했었고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애첩이라는 말에 빅터를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싫어, 차라리 토미나 다른 녀석들한테 보내

 

바쁘다

 

아 싫다고

 

라면서 이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어린애가 있으면 야동을 볼 수 없단 말이야

 

하마터면 난 다 컸다고!’라고 말할 뻔 했었다.

 

문은 바깥에서 잠겼고 이글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빅터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빅터도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나보고 지금 어린애를 돌보라는 거야?’라고 했던 사람들.

 

그래서 빅터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으레 했던 짓을 하였다.

 

누워있는 위에 올라타는 것.

 

굳이 웃지 않아도 색기어린 표정은 흉내 낼 수 있었고 상대가 그럴 기분이 아니더라도 벗겨놓으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익숙한 일이었다.

 

익숙해진 일이었고.

 

빅터는 이 일에 대해 꽤나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가 좋다 어떻다 하는 사람들이더라도 잠자리를 하면 그만큼 보상을 주기도 했었으니.

 

그게 가장자리가 탄 빵조각 하나라던가, 공책이나 펜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글은 빅터가 올라타서 셔츠 단추에 손을 대기도 전에 달랑 들더니, 이불과 베개만 놓여있는 침대에다 내려놓았다.

 

애는 그거 써.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애 아니거든!이라는 말이 또 나올 뻔 했다.

 

하지만 빅터는 정말 그 말을 입에서 내기보다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침대 더러워! 냄새 나!”

 

어쩔 수 없어, 다른 이불들은 다 버렸거든.”

 

이글은 하품을 하고 다시 소파 위에서 기지개를 켰다.

 

빅터는 그걸 기가 막힌 듯 보다가 침대 위의 먼지를 전부 털고, 쳐내고, 쓸었다.

 

그리고 그 이후 화장실에 갈 때와 씻을 때 외에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

 

빅터는 이글이 준 동화책을 들었다.

 

왜 하필 동화책이야! 싶었으나 저쪽이 이쪽을 만만하게 보면 볼수록 자기한테 유리하다...는 말을 애써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동화책을 펼쳐 고개를 푹 파묻고, 빅터는 생각에 빠졌다.

 

저쪽을 무력화한 다음에 도망칠까?

 

빅터는 책을 내리고 창문을 보았다.

 

오늘도 커튼이 쳐져 있긴 하지만 여기는 꽤 높았다.

 

청소할 때 보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적어도 5층 이상의 건물이겠지.

 

높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만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여지껏 숨겨두었던 능력에 대한 일이다.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장의 수라고 생각하고 숨겨두었는데...

 

...도망치지 말까?

 

기껏해야 자신은 대디의 밤 시중 상대 같은 것이고, 그렇게만 알고 있을 터이니까.

 

어쩌면 별 거 아닌 정보로 자신을 놓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은 대디랑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대디는 구하러 올까?’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쩌면

 

아주 만약에, 라는 확률 만큼이지만.

 

그래도 아는 것이 있으니까, 구하러 오지 않을까.

 

빅터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글자 못 읽어?”

 

그거 때문에 한숨 쉰 거 아니거든.”

 

빅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대디가 구하러 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방구석을 조금이라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바꾸어 보자!

 

 

 

 

 

 

 

 

 

이글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그 날 저녁이었다.

 

방청소를 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낮잠도 좀 자고 눈을 떴더니 이글이 중국 음식을 배달시켰다며 깨웠다.

 

중국 음식이라니.

 

그야 무난한 음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야 하지만.

 

빅터는 소파 앞에 이글이 음식을 늘어놓은 앞으로 왔다.

 

같이 먹자며 부르긴 했으나 빅터가 음식 앞에 앉을 즈음 이글은 이미 이것저것 음식 통을 열어놓고 익숙하게 젓가락을 써서 먹고 있었다.

 

빅터는 이글의 먼 쪽에 앉아 면을 야채와 볶은 요리가 담긴 네모난 종이 박스를 하나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힐끗 이글을 보았는데,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빅터가 모르는 영화로-아니,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이따끔 어두운 방 안에서 번쩍 번쩍하는 빛이 얼굴에 닿아 눈이 부시게 했다.

 

우적우적 면만 젓가락에 감아 먹는데 이글이 먼저 말을 붙여 왔다.

 

젓가락질 잘 하네? 포크 줄까 했는데.”

 

“...예전에,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 해서.”

 

네가?”

 

그건 또 무슨 의미야? 하고 눈을 팩 치켜뜨려 했는데, 그 대신 빅터는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왜 아무것도 안 해?”

 

, 덮치는 거?”

 

그런 거 말고!”

 

,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빅터는 면이 담긴 종이 상자를 꽉 잡았다.

 

“...수갑을 채운다던가, ... 때린다던가, 알고 있는 걸 불어! 같은... .”

 

.”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나를 왜 맡았어?”

 

이글은 만둣국이 담긴 플라스틱 통을 가져갔다.

 

커다란 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에 넣고는 몇 번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젓가락으로 빅터를 가리켰다.

 

난 딱히 너 맡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왕 온 거, 며칠 맡으면 돈을 많이 준다기에 그냥 그러겠다고 했지 뭐.

 

그렇게 말하고 이글은 씨익 웃었다.

 

기가 막혀.

 

빅터는 이글이 내밀어준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따 안에 든 것을 마셨다.

 

 

 

 

 

 

 

 

 

다음날 오후, 빅터는 책을 전부 읽었다.

 

부엌을 청소했고 싱크대며 냉장고 안까지 전부 구석구석 치웠다.

 

나온 쓰레기는 귀찮아하면서도 이글이 버렸고 빅터는 뒤에서 감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빅터는 책을 두 번째로 다 읽었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벌써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졌다.

 

평소에는 뭘 했더라.

 

평소에는 읽을 책이 잔뜩 있었고 심심하면 자신의 집이지만 구경했었지.

 

때로는 대디의 취향에 맞게 영화를 보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도 했었고 가끔은 커다란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다.

 

아주 가끔은, 읽는 법이나 쓰는 법, 숫자에 대해 혼자 공부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여기는 무엇이든 풍족하던 빅터의 집이 아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좁고 삭막한 방 한 칸과 어린이용 동화책 한 권, 그리고 텔레비전 뿐.

 

, 그리고 저기 저 남자 하나도.

 

빅터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글이 이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배고파?”

 

심심해.”

 

그래?”

 

이글은 소파 앞에 앉아 있었다.

 

빅터는 도무지 그가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평소에는 허리가 부러진 마냥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서 앉으면 밥 먹을 거라고 그 앞 깔개에 앉아있던가 텔레비전하고 연결해서 하는 게임을 하는 때이다.

 

지금처럼.

 

너도 이거 하자.”

 

게임?”

 

애들은 게임 좋아하잖아.”

 

아무튼 한 마디가 많다.

 

이글은 빅터가 저만치에 앉은 것을 질질 끌어다가 자기 옆에 두었다.

 

이건 게임 패드라는 거야.”

 

알아.”

 

어린애 같을까봐 사달라고 말을 하지 않았던 수많은 물건 중의 하나다.

 

이글이 넘겨준 패드를 받고 화면을 보니 조그만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작법은 간단했고, 빅터는 금세 게임에 빠져들었다.

 

이글은 다른 게임패드를 꺼냈고 한동안 둘 사이에서는 거기서 왼쪽, 오른쪽, 아이템 가져가, 그런 이야기만 오갔다.

 

 

 

 

 

 

 

 

 

 

 

정말이지 나태한 나날이다.

 

자고, 먹고, 게임을 하고.

 

그 후로 며칠 안 가서 빅터는 시끄러운 통화 소리에 느지막하게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이 멍청아,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이글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기에서 귀를 떼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쳤다.

 

깼어?’

 

이글이 입을 벙긋거렸다.

 

잠깐만, 이라고 손가락을 하나 들고는 이글이 씩 웃고 다시 통화로 돌아갔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그 기다려 달라는 말을 지금 며칠째 하고 있는지 알아!]

 

메찔째 하고 있눈지 아라~ 이글은 입술을 비쭉 내밀고 흉내를 냈다.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그래서 빅터는 고개를 돌리고 동화책을 펼쳐 책을 읽는 척 했다.

 

갑자기 통화 소리가 작아졌다.

 

한동안 전화를 받더니, 이글은 또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동안 이글이 빅터에게 건넨 말은 딱 한마디였다.

 

샌드위치 좋아해?”

 

냉장고 안에는 오래 둔 것 같은 감자와 당근, 계란, 치즈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걸 냉장고에 넣어두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빅터는 놀랍다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고 이글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사둔 건 아니고, 우리 형 취미가 날 먹이는 거거든.”

 

? 무슨 형?”

 

큰형.”

 

보스?”

 

아니, 진짜 형.”

 

그러니까, 진짜 친형 말이야?”

 

그래, 진짜 친형.”

 

형이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하던데...

 

이글은 감자를 씻어 껍질을 자르고 냄비에 물을 받아 끓는 안에 집어넣었다.

 

도마 위에서 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빅터였다.

 

가족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을 하지?”

 

그건 비밀.”

 

너도 엄마가 버리고 갔어?”

 

아니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감자는 삶아서 샐러드로 만든 다음 빵 사이에 소스나 다른 것들과 함께 끼웠다.

 

빅터는 욕심을 내어 햄을 두 장 끼웠고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대디는 너한테 얼마나 자주 와?”

 

이제 심문하는 거야?”

 

수갑이라도 채워주고 시작할까?”

 

밥 먹으면서 해도 돼?”

 

아마도 되지 않을까?”

 

이글은 반으로 접은 샌드위치 한 쪽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자주 와. 일주일에 세 번, 많으면 네 번도.”

 

자주 온다고 생각해?”

 

자주 온다고 생각해.”

 

빅터는 컵에 담긴 우유를 마셨다.

 

가장 최근에 준 선물은 뭐야?”

 

깃털 달린 레오파드 무늬 코트.”

 

마음에 들었어?”

 

.”

 

?”

 

다소 망설였지만, 빅터는 답을 주었다.

 

그걸 입으면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이거 정말 심문 맞아?”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하는 게임이랑 놋쇠 기병.”

 

만약에, 내가 지금 당장 나랑 떠나자고 한다면 나랑 같이 갈래?”

 

빅터는 다시 베어물려던 샌드위치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글은 심지어 이 쪽을 보지도 않고 다른 식빵에다 양상추를 한 장, 두 장 얹고 있었다.

 

떠보는 거야?”

 

.”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폭음에 빅터는 고개를 들었지만 이글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빵 위에 양상추를 쌓았다.

 

“...조금 늦었네.”

 

바깥에서 걸어 잠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빅터, 대디가 왔단다!”

 

이상하게도, 빅터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글은 한 손에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

 

이 좁은 방안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건가? 우습군! 빅터, 조금만 기다려라.”

 

.

 

방 안에서 폭음이 울렸다.

 

빅터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어 나야 할 비릿한 피 냄새나 둔탁하게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빨리 온 건 예상 외였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당당하게, 혹은 의기양양하게 들려야 할 말은 어쩐지 약이 올라 보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더니, 이글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대디가 총을 잘못 쏜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대디가 총을 쏘았다.

 

빅터는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를 쥔 이글의 손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아마도.

 

사실 빅터가 본 것은 번쩍 빛을 반사한 검날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저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대디와 이글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 틈을 타 빅터가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나부꼈다.

 

밖은 아직 밝았다.

 

하늘의 가장자리에 약간의 붉은 기가 돌 뿐.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 정도로.

 

대디.”

 

빅터는 이글을 잡았다.

 

지금까지 길러준 거, 잊지 않을게.”

 

바람이라는 능력을 꺼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늘을 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무거워...”

 

아까 떠날거냐고 물었을 때는 싫다더니.”

 

시끄러워.”

 

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어?

 

왜 너는 나를 데리고 뛰어내렸어?

 

왜 나에게 동화책을 줬어?

 

왜 너는 나한테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어?

 

왜 너는.

 

왜 나에게.

 

답 없는 질문을 수십 개나 던지다, 이글은 고개를 돌려 집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매달려서 이 쪽을 허망하게, 놀랍게 바라보고 있었고 꽤나 요란스러움에도 저 아래의 사람들은 이쪽을 보지 않아서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도망치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그런 상상은 이내 끝났다.

 

빅터가 아래로 뚝 떨어질 뻔 한 것이다.

 

놀랐어?”

 

당연히 놀라지! 나 죽거든?”

 

어느 정도 떨어진, 걸어오려면 꽤나 걸리는 높은 건물이 보였다.

 

진짜 무겁다.”

 

당연하지, 나 너보다 키가 이만큼이나 크다고.”

 

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만약에.”

 

?”

 

네가 일주일에 세 번, 네 번 찾아온다면.”

 

이글의 머리 위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떨어지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갑자기 첫날에 못 한 그거 생각난다.”

 

네가 올라탔던 그거, 막지 말 걸.

 

이글의 발이 난간에 올라섰다.

 

빅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찾아온다면 말이야.”

 

이글은 쉽게 난간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자주, 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손가락은 닿지 않았다.

 

전혀 다른 세계.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 꼬마의 손이 제 손에 잡혀있는 곳.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밤도 없고,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도 없고.

 

 

 

이글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아래로 향했다.

 

어느샌가 날은 어두워지고,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고.

 

 

 

불과 몇 분 지났을 뿐인데.

 

총성으로 요란하던 주위는 간 데 없고 높다란 빌딩의 고층 건물에는 침묵만이 쌓인다.

 

 

홀든의 사람들은 나이가 차면 검을 받는다.

 

그 검은 지금까지 썼던 목검이나 가검, 혹은 날을 무디게 만든 예식용 검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홀든의 이름 아래에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글 홀든이 검을 받을 때 반대했다.

 

이글은 아직 사람의 목숨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이글은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한 젊은이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위의 두 형의 반응은 판이하게 갈라졌다.

 

다이무스는,

 

네가 그만한 무게를 보여주지 않아서다. 어른스럽게 굴어라

 

벨져는,

 

남들이 널 판단하게 하지 말고 네 손으로 선택해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이글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벨져의 의견을 수용해서 한참 이글에게 검을 주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분분한 안으로 들어가서 대뜸 가장 무겁고 긴 검을 채어 나왔다.

 

왜 하필 가장 길고 무거운 검이었나.”

 

이글은 남들이 말하는 종류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신경써본 적 없었지만, 다이무스가 묻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너답군.”

 

그래서 다이무스가 짧게 뱉은 마지막 말에는 상처받았었나 보다.

 

아니, 상처 같은 거창한 것 말고, 그냥 한 대 맞은 정도

 

...라고 이글은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글이 방에 들어가서 본 것은 수많은 검이었다.

 

전부 홀든을 위해 만들어지는 고급품의 것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과 특기에 맞게 홈이 더 패어있다던가, 모양이 다르거나, 날이 셋 달리는 등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다.

 

가장 이글의 눈을 끈 것은 검집에 날개가 음각되어 가죽끈과 깃으로 장식된 화려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눈을 끈 것은 검신이 두텁고 무게감이 강한 짧은 검.

 

어쩌면 그것이 이글에게 더 잘 맞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글은 그 중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것을 집었다.

 

그는 절대로 벨져처럼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살 수 없었으니까.

 

그에게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빨리 어른이 되어 한 몫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옆에 나란히 서거나, 혹은 그 이상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길고 무거운 검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 검을 쉽게 잘 다룬다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처음에는 검이었던 것은 계속 바뀌었다.

 

형을 따라 영국으로 간다면, 다른 세력에서 나 자신을 증명한다면, 나 혼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처음에는 그저 잘 보이고 싶은, 이었다.

 

하지만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한 목표가 바뀔수록 마음 역시 바뀌어갔다.

 

 

 

 

 

 

어느 날 이글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본가로 가자.”

 

“...얼씨구, 그 말을 왜-애 벨져 형이 할까나...?”

 

벨져는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망나니 혼자 사는 것 치고는 말끔한 집이군.

 

덧붙여 집 안에서 셔츠는 고사하고 속옷이나 걸칠까 싶던 녀석은 의외로 당장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은 차림이었다.

 

집에서 네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축하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축하? 무슨 축하? 아버지... 하암, 승진이라도 하셨어? 아니면 어머니? 아니면 삼촌들이나 뭐 문하생이 어디 나가서 훈장이라도 따 왔대...?”

 

태평한 척 하품을 하는 저 머릿속에서는 아마 최근 신문이나 벨져 자신, 혹은 다이무스 형의 태도에서 본가와 관련된 무언가가 없나 팽팽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이무스 형인가? 그 형 요즘 외출하고 출장이 잦더라니.”

 

그래.”

 

, 축하는 축하고. 어차피 트와일라잇으로 돌아올 거 아냐. 난 됐어.”

 

벨져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글에게 어떤 말을 해야 데려갈 수 있을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훈장이라던가, 어디에서 공적을 세우거나 하는 시시한 일이 아니다.”

 

! 하하하하, 형이 그런 말을 하니 되게 웃기네!”

 

이 웃음은 꽤나 진심이다.

 

이글은 폭소를 터뜨리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탁탁 털었다.

 

그럼 뭔데?”

 

결혼이다.”

 

벨져는 자신의 말 한 마디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잘 못 들었는데 말이야, ?”

 

상대는 아버지 아는 분의 막내딸이다. 정치적으로 보아도 양질의 결합인데 그 상대가 형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더군.”

 

“...5분 기다려, 옷 입고 나올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바깥에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이글이 들어가고, 안쪽에서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딴에는 제 귀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저 안쪽에서 성질을 부리는 모양이지.

 

정확히 4분하고 45초가 지나고 이글이 뛰어나왔다.

 

벨져와 이글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조용하군.”

 

뭐가?”

 

그런 여자랑 형은 어울리지 않아, 못해도 3일이면 형에게 질려서 결혼을 후회할 걸, 형에게 결혼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왜 하필 다이무스 형이랑 결혼하는 거야.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만.”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형은 성실하니 마음이 없더라도 가정에 충실할 것이다, 그렇다고 집안을 떠난 너나 기사단에 뼈를 묻을 나와 결혼할 수는 없잖느냐. ...라고 할 거잖아.”

 

벨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다들 이글의 등장에 대해 놀라워하고 우려를 표했기에 이글은 축하만 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이야기를 하고, 행사를 하고, 연회를 즐기고, 그 모든 일이 끝나 쉴 즈음은 밤이었다.

 

이글은 방을 나섰다.

 

갑주도 없고, 장갑도 없고, 익숙하지 않은 맨손으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구나.”

 

문을 열자 포도주 향이 물씬 풍겼다.

 

탄야의 독만큼이나 어둡고 무거운 것이 열린 문으로 흘러넘쳐서 이글은 잠시지만 익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물속으로 들어가듯이 다이무스의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형의 일인데, 와야지.”

 

다이무스는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간혹 도자기 찻잔이 놓이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 서류나 편지가 쌓이는 모습을 보았지만 술병이 놓인 것은 처음 본 것 같다.

 

잔은 없고, 술병이 몇 개 굴러다녔다.

 

잔은?”

 

마시다보니 필요 없어져서 씻으라고 내놓았다.”

 

이글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결혼.”

 

방이 어둡다.

 

이글은 방이 어두운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해.”

 

“...”

 

선물은 없어. 그야~ 나 형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도 오늘 처음 들었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구도 나한테 집 얘기는 해주지도 않고~”

 

네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잖느냐.”

 

아하하, 그랬나?”

 

방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다.

 

이글이 웃을 때마다, 다이무스가 입을 열 때마다 청소한지 오래된 물건을 건드리듯 무거움이 피어올랐다가 풀썩 가라앉았다.

 

있잖아, .”

 

뭐냐.”

 

사람이 결혼하면, 어른스러움이 늘어나는 걸까.”

 

다이무스는 그 말에 고통스러운 듯한 소리로 웃었다.

 

나도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데, 그럴 리 없겠지.”

 

형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고?”

 

나는?이라고 이글은 묻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읽은 것인지, 다이무스가 이어 말했다.

 

너는... 그렇게나 다 큰 것 같은데.”

 

“...내가, 어른 같아?”

 

가장 무겁고 긴 검을 휘두르고,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내고 있으니.”

 

다이무스는 이글 쪽으로 새 병을 내밀었다.

 

마실 테냐.”

 

이글은 그 병을 받았다.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마시다가.

 

...아니, 사실은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대화를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글이 입을 열었다.

 

몇 년이나 망설인 말이었다.

 

알고 있었지?”

 

내가, 형을.

 

다이무스는 마시려고 들었던 병을 천천히 내렸다.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만약에 내가 형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뭔가 바뀌었을까?”

 

만약에 네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더라면.

 

다이무스는 몇 가지 가능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일을 꺼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영국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이무스가 말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서기 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무거운 향에 익사하고 싶었다.

 

이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글의 발은 움직였고, 사용하는 방으로 돌아갔다.

 

열린 창문에서 맑은 바람이 꽃과 풀의 향기와 탄산수에 넣는 레몬의 향을 싣고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공기다.

 

차라리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자 힘으로 뭐든 해낸다는 내가 형에게 묶여서 말조차 하지 못해.”

 

차라리 어리다고 해줘.

 

결혼하지 말라고 울면서 떼쓰게 해줘.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의 무거운 공기가 사라진다.

 

이글은 코와 입을 눌러 숨을 참았다.

 

 

 

[루드빅X탄야] 연구소(선비님 썰 기반)

2016. 8. 21. 23:30 | Posted by 호랑이!!!

연구소장 탄야는 처음부터 루드빅이 싫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프로일라인.”

 

루드빅이 자신의 손을 끌어 입술 앞으로 가져가려고 하자 탄야는 냉랭하게 내려다보며 손을 빼었다.

 

저런 경박함이라니 어이없어서 눈물이 날 것 같군. 이런 연구실보다는 어디 무대 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탄야의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찰나, 다른 연구원이 와서 그녀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어디 유명한 대학 교수의 추천을 받았음, 성적 우수, 수재, 등등.

 

이 파일은 루드비히 와일드에 대해 추천받았을 때에도 읽었던 것이다.

 

글을 읽으며 수식어만 놓고 보았을 때, 탄야가 기대했던 것은 백의가 잘 어울리며 단정한 차림에 수수한 인상의 남자였다.

 

약간의 취향을 곁들이자면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준수한 용모... 정도.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어떤가?

 

겉에 걸친 저것은 아무리 봐도 가죽옷이다.

 

그나마도 맨가슴이 훤히 드러난.

 

단정? 가슴이 드러났다니까!

 

심지어 몸에 저게 뭐야, 문신? 목에는 초커?

 

아무리 그런 것을 요새 젊은 애들(루드비히가 자신보다 나이 많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유행이라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눈두덩에 저건 노란 섀도우다.

 

자신도 진한 화장에 노출이 있는 옷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았지만...

 

탄야의 눈이 위에서 아래로 루드빅을 훑어보았다.

 

아래로... 아래로...

 

세상에, 지금 속옷도 안 입은 거야!?

 

 

 

 

 

 

 

 

 

어떻습니까?”

 

뭐가 어때.”

 

안경을 써 봤거든요. 이런 것이 취향이라고 하길래.”

 

탄야는 루드빅이 검은색 반-무테 안경을 치켜올리자 지나가던 라이샌더를 끌어당겼다.

 

이쪽이 내 취향이거든?”

 

탄야 선생님?”

 

사랑스럽게 구불거리는 금발, 동글동글 귀여운 파란 눈, 그리고 그 위에 걸친 것은 빨간색 뿔테 안경.

 

말랑말랑한 볼을 주물거리는 탄야에게 그만해달라고 말하려던 라이샌더는 그 커다란 신입 연구원이 일부러 허리를 숙여 자기에게 눈높이를 맞추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흐으으응...”

 

턱을 잡고 이쪽, 저쪽, 머리를 숙이게 했다가 들게 했다가...

 

루드빅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라이샌더는 탄야가 서류를 받아주자마자 인사도 없이 도망쳤다.

 

같은 금발에, 눈 색이야 뭐 그렇다 치고... 다른 거라면 이것밖에 없군요.”

 

루드빅은 라이샌더가 쓰고 있던 빨간 뿔테안경을 들어올렸다.

 

그건 또 언제 낚아챈거야?”

 

아까?”

 

루드빅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빨간 뿔테 안경을 코에 걸쳐 보았다.

 

아까 그 애도 그렇게 시력이 나쁘지는 않군요.”

 

유리에 흐릿하게 비치는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루드빅은 어떠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탄야를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역시 본판이 괜찮으니 뭘 써도 그럴싸...”

 

당장 돌려줘.”

 

루드빅은 어깨를 으쓱했다.

 

탄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한테, 서류 주고. 가서, 안경 돌려주고.”

 

네 네, 여기 실험 보고서입니다.”

 

탄야는 보고서를 받자마자 표지부터 넘겨 보았다.

 

일부러 까다로운 실험을 넘겨주었는데, 과연 수재라는 말만은 진짜인지 실험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쓰인 보고서가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때, 합격점입니까?”

 

탄야가 흘긋 쳐다보자, 루드빅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보고서군.”

 

그러면...”

 

루드빅은 탄야의 손을 잡았다.

 

손이 천천히 입가로 가다가 멈추었다.

 

상은?”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댔다가는 해고당할 줄 알아.”

 

꼭 돈일 필요는 없는데.”

 

루드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탄야는 손을 홱 비틀어 뺐다.

 

 

[루드라이화클] 서커스의 숙소에서 2

2016. 7. 26. 03:59 | Posted by 호랑이!!!

라이샌더는 안고 있던 꽃다발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오늘도 땀과 화장을 씻고 하얀 와이셔츠, 갈색 반바지를 입을 즈음이면 문이 열리고 

루드빅이 들어왔다.


제대로 머리를 말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루드빅이 마른 수건을 가져다가 라이샌더의 머리에 대고 탈탈 털자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와이셔츠에 점점이 자국을 남겼다.


앞의 거울을 통해서 흘긋 보았지만 라이샌더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이고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그렇게 활짝 웃던 아이가.


그렇다고 가엾게 여길 수는 없지만


루드빅은 여느 때처럼 라이샌더를 화이트 클라프의 방에 데려다 놓고 혹시나 누가 문을 열거나, 방해하는 일을 막기 위해 문간에 기대섰다.


5분 정도.


갑자기 화이트 클라프가 루드빅을 손짓하여 불렀다.


뭡니까.”


자네도 끼지 않겠나?”


저 말입니까?”


내가 왜 자네에게 그 키워드를 알려줬다고 생각하지?”


루드빅은 화이트 클라프를 쳐다보았다가 그의 무릎에 앉아서 헐떡이는 라이샌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가리개를 하고, 입었던 갈색 반바지는 진즉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처음부터 크다 싶었던 하얀 와이셔츠는 어깨가 드러나도록 흘러내릴 것을 손으로 쥐어 막고 있었다.


어차피 화이트가 손을 놓으라고 하면 바로 놓아 버릴 것이면서.


저것은 오기라고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부끄러움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일까.


루드빅은 그들이 있는 침대 위로 가 앉으며 생각했다.


라이샌더, 그대로 허리를 숙여라.”


화이트 클라프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던 라이샌더는 그의 말에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침대를 손으로 짚어 몸을 지탱해야 했으므로, 쥐고 있던 옷깃을 놓아 벌어진 사이로 발갛게 익은 몸이 보였다.

 

아무런 감흥 없이, 루드빅은 라이샌더를 내려다보았다.


지퍼를 열어드려라.”


라이샌더는 시키는 대로 바지의 벨트며 지퍼를 풀었다.


입에 물어.”


화이트 클라프가 명령하면 라이샌더는 실행한다.


꽤나 열심이지만 아직은 서투름에, 루드빅은 라이샌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손 아래에서, 작은 머리통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손으로 쥐고... 굳이 입에 다 넣을 필요는 없으니까.”


마침내 어느 정도 만족스러워졌을 때 루드빅은 라이샌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했습니다.”


쓰다듬어 준다고 해서 단박에 긴장이 풀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루드빅이 보지 못한 것을 화이트 클라프가 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도록 꽉 쥔 손이 조금 풀린 것을.


그 일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도구 외의 방면으로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아이는 내 것이고, 루드빅은 이 아이에게 아무런 감정을 품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 시간이 지난 뒤 라이샌더의 몸에는, 더 정확히 말해 화이트 클라프의 손이 닿은 허리와 손목과 허벅지에는 불그스름한 손자국이 남았다.

 

여태껏 남아본 적 없던 것이.

 

 

 

 

 

 

 

 

 

루드빅은 옷만 겨우 주워 입은 라이샌더를 안고 복도를 걸어갔다.

 

라이샌더를 방으로 옮긴 후 화이트 클라프의 방에 청소할 사람을 부르는 것도 루드빅이 할 일이었다.

 

저벅, 저벅.

 

품에 안겨서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라이샌더는 그 걸음소리가 오늘따라 느리게 난다고 생각했다.

 

라이샌더.”

 

이름이 불리자 라이샌더가 고개를 들었다.

 

화이트가 무섭습니까?”

 

방을 나온 뒤 풀어지려던 몸이 그 말에 다시금 굳어간다.

 

품 속에 안긴 것이 꼬물거리더니 손가락이 나와 눈을 가린 천을 당겨 벗었다.

 

왜요?”

 

그건 답이 될 수 없는데요.”

 

라이샌더는 입을 닫아버렸다.

 

루드빅은 라이샌더를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젖은 옷가지를 벗겨 주느라 새파란 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화이트가 무섭습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라이샌더는 잠시 쭈뼛거리면서 루드빅 쪽을 보다가 수건조차 가져가지 않고 욕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억지로 열지는 않겠지만, 문에 손을 대어 보니 묵직한 것이 걸렸다.

 

어린아이가 두려워할 때 그러는 것처럼 문 앞에 누군가 주저앉아 있는 것 같았다.

 

루드빅은 닫힌 문의 문고리를 쳐다보았다.

 

잠금쇠조차 없는 문이니까, 손을 대어 밀기만 하면 열린다.

 

하지만 고작 그런 질문에 그렇게 행동할 필요는 없겠지.

 

루드빅이 라이샌더의 옷을 가져가려고 할 때, 문 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몰라요.”

 

루드빅은 방에서 나가려다 멈추고 주머니를 뒤졌다.

 

별다른 것이...

 

, 있다.

 

꽃다발을 사고 남은 잔돈이 거슬렸었지.

 

루드빅은 작은 사탕을 꽃다발이 있는 책상 위에 놓고 방을 나서다가 문득 우스워졌다.

 

저 애한테 뭘 하고 싶은 거지? 친절이라도 베풀고 싶은 건가?

 

겨우 몸 한 번 섞었다고?

 

이것도 일종의 충동이겠거니 하며 루드빅은 세탁물 바구니에 옷가지를 던져 넣었다.

 

 

[다이글] 살인하는 새 조롱하기

2016. 6. 22. 23:41 | Posted by 호랑이!!!

이글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옆에 있었던 사람은 사라져 있었다, 역시나.

 

옆자리의 체온은 사라졌지만 체향은 남아서, 베개를 끌어안고 코를 묻었다.

 

손으로 자주 잡는 베개의 옆 부분은 쇠와 가죽 냄새가 배었고, 머리가 닿는 부분에는 다이무스가 애용하는 샴푸와 화장수 향이 났다.

 

그리고 그 아랫부분에는.

 

피 냄새

 

말라붙으면, 씻으면, 쉽게 사라지는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떨어지지 않는.

 

아직 잠이 온다.

 

눈을 감고 설핏 잠들려는 찰나에 달그락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크지 않아서.

 

일부러 소리를 작게 하려고 노력하는 티가 나는 소리라 더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이어 들리는 발소리는 다이무스의 것이었다.

 

이어 풍기는 것은 다이무스와 아침까지 함께 보내며 익숙해진 피 냄새였고.

 

다이무스는 입었던 것 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한 옷을 벗어 옆에 내려놓다가 다시 가져가 목덜미 같은 곳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이어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일어나서 이번 주에만 벌써 두 건이잖아, 너무 많은 거 아냐?’라고 하면 놀랄까?

 

실행에 옮기는 대신 이글은 머리를 들고 욕실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마도 다이무스의 칼에 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얼마 전에 엿들었던 방해물일 것이다.

 

대상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하자면 회사의 적들.

 

물소리는 금방 그쳤고, 욕실 문이 열리자 그 틈으로 진한 샴푸 향이 흘러나왔다.

 

“..., 일찍 일어났네.”

 

반쯤 감은 눈을 부비며 베개에 머리를 기대자 아직 물기가 남은 따뜻한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자라, 이글.”

 

나른한 미소가 입가로 퍼졌다.

 

졸음을 이기고 가늘게 눈을 뜨자 다이무스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서 커튼이 화악 휘날리는 것이 다이무스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있잖아 형아, 방금 바람이 불어서... 커튼이 날렸.. 후아암...”

 

일어날 거냐?”

 

여기서 보니까 꼭 날개 같아.. 흐흐, 새 날개.”

 

아마도 다이무스는 실없는 소리, 라고 일축하면서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가서 식사를 만들 것이다.

 

다시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빠져들며 이글은 생각했다.

 

새라면 윙컷을 당한 새겠지

 

살인하는 새.

 

그리고 의뭉을 떠는 나.

 

 

[다이글] 한 가지만 남긴다면

2016. 6. 14. 18:41 | Posted by 호랑이!!!

그는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침대 옆, 탁자에 있는 거울이었다.

 

하얀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넘겼고, 엄한 표정이지만 그럭저럭 잘 생겼으리라고 짐작되는 얼굴에는 가면 위에 간 금처럼 흉터가 있었다.

 

얼굴에는 흉터가 있고 손에는 두 가지 굳은살이 있었는데 하나는 검을 쥐었기 때문에 생긴 손바닥의 굳은살, 그리고 다른 하나는 펜을 오래 쥐었기 때문에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이다.

 

거울속의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빤히 바라보았다.

 

오래 일해서인지 눈 아래에는 푹 잤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 있다.

 

펜 때문에 생긴 굳은살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근육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팔뚝이 그렇게나 매끈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약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는 거울을 덮어두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연한 노란색 벽지에서 하얀 시트로 시선을 느리게 내리면서 머릿속 서랍을 뒤졌다.

 

이 침대에 눕기 전에, 눈을 감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진공 청소기라는 단어를 누구에게서 들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제, 아까, 혹은 그 전에 내가 무슨 옷을 입었지? 내가 무엇을 마지막으로 입에 대었지?

 

수없이 많은 서랍장이 열렸다가 제대로 닫히지도 않고 다음, 다음으로 이어졌다.

 

한참이나 희미한 안을 뒤적거리던 그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연노랑 벽지를 쳐다보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지?

 

잠시 눈을 깜박였다.

 

문득 열린 서랍장 안쪽에, 바스락거리는 포장지가 있었다.

 

빨간색,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포장지.

 

테두리는 황금색이고 동그란 초콜릿을 싼 것.

 

그 초콜릿을 집은 길쭉한 손이 있었다.

 

자신처럼 검 때문에 생긴 굳은살이 울퉁불퉁한, 빈말로도 곱다고는 못 할 그런 손.

 

그 손가락이 동그란 초콜릿을 집어 제게 내밀었다.

 

이미 단 것을 지나치게 먹어 속이 더부룩한 상태였지만, 어째서인지 그것만은 기분좋게 삼켰던 기억이 났다.

 

그것을 입으로 받아 물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기분좋게 눈을 가늘게 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미소지었다.

 

이글...”

 

깨자마자 그 녀석부터 찾아?”

 

문이 열리고 아마도 알고 있을 사람이 들어왔다.

 

같은 색의 머리카락은 빗어서 물결치고 그야말로 우아하다는 느낌의 사람이.

 

몸은 좀 어때?”

 

누구냐 넌.”

 

이글놈은 기억하면서 난 기억 못 하나?”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난 누구지?”

 

다이무스 홀든, 내 형이다.”

 

뭔가 필요한 거 없나? 물이라도 좀 가지고 오라고 이를까?

 

다이무스는 하얀 머리카락을 빤히 보다가, 짧게 말했다.

 

초콜릿.”

 

 

 

 

 

 

같은 시각, 이글 홀든도 잠에서 깨어났다.

 

이글 홀든은 일어나자마자 몸의 상태부터 살폈다.

 

그의 머릿속은 처음부터 한 가지 강렬한 기억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안타리우스의 마크가 언뜻 드러난 단도가 달빛 아래 번뜩이는 기억이.

 

도의 날은 예리했고, 푸르스름하게 빛을 반사했고, 두 사람을 베었다.

 

단번에.

 

그리고 누군가 외쳤다.

 

그 능력자는 하나를 제외한 사람의 기억을 빼앗아간다고.

 

그래서 이글 홀든은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기억을 빼앗아간 그 사람의 얼굴을 이 눈에 새겨서 반드시 처치해버릴 것이라고.

 

 

[다이글] 봄비

2016. 4. 27. 21:11 | Posted by 호랑이!!!

비가 내렸다.

 

하도 조용히 내려서 내리는 줄도 몰랐던 것이 집을 나서보니 내리고 있기에 무심코 손을 내밀었더니 따뜻하여 내심 놀랐다.

 

과연, 봄이구나.

 

네가 태어난 봄이다.

 

꽃들은 피어나고 온갖 생물이 자라고 생명을 얻는 봄이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에 차가 멈춰 섰다.

 

검은색, 낯익은 차였으나 내가 탈 일은 그렇게 많지 않던.

 

내가 탄 차는 비 내리는 거리를 지나갔다.

 

도착해서 들어가 보니 벨져 녀석이 웬일로 갑주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 녀석이 언젠가 갑주가 아닌 것은 옷이 너무 가벼워서 입은 느낌도 나지 않더라고, 지나가는 말로 투덜거린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너.

 

너는 꽃에 파묻혀 있었다.

 

꽃들이 피어나는 때에, 피어난 꽃들은 목이 잘려 네 곁에 누워있다.

 

하얀 꽃들 사이에 조그만 풀꽃들을 빨간 리본으로 묶은 것이 눈에 띄었다.

 

리본은 익숙한 것이었다.

 

아마도 네가 예뻐한다는 그 꼬마 것이겠지.

 

그 애는 지금도 저 한쪽에서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싫어안돼만 반복하고 있다.

 

네 옆에 꽃 한 송이를 더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원래는 일터로 가려고 했지만 조노비치가 며칠 쉬다 와라고 했다.

 

사실은 그래도 갈 생각이었으나, 어쩐지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오지 말라면 좀 가지 마’, ‘언제까지 일만 할 거야?’. ‘아 좀! 이 일에 미친 인간아!’.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저 말밖에 없구나.

 

이렇게 가지 않는 날이 올 줄 알았다면, 진작에 가지 않았을 것을.

 

차를 기다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네가 없는 세상의 비는 이렇게나 차가운데.

 

차가울 터인데.

 

차가워야 할 텐데.

 

[다이글] 날이 덥다

2016. 4. 25. 20:44 | Posted by 호랑이!!!

날은 이제 더워지고 있었다.

 

말수 적은 피터라도 연합으로 들어올 때는 더워가 한 마디 추가되었고 빙결 능력자인 토마스나 루이스 곁에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간식으로 과자나 핫초콜릿 보다는 아이스크림이나 셔벗을 선호하는 사람도 늘어났고.

 

그러나 이글로서는 셔벗이나 능력자의 서늘함으로는 뭔가 만족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한여름이었으면 마음껏 살을 태우면서 땀을 흘릴 텐데, 뭐냔 말이다 이 애매한 날씨!

 

...이 말에는 지나가던 엘리가 봄이야 봄!’이라며 지나갔지만.

 

이글은 이 때까지는 선선한 저택을 떠올렸다.

 

널찍하고 발코니로 이어지는 커다란 문을 열면 얼마든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데다 정원이며 구석구석에 녹음이 드리워졌지.

 

어쩌면 몸을 움직이느라 몸에 열 떨어질 일 없는 사람들을 위해 소소하게 꾸며졌을까.

 

...어쨌거나 저택이었다면 정원 가득하게 심어진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트와일라잇 광장에는 울창하다고 부를 만 한 나무숲이 없었고, 때문에 이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의 집으로 찾아갔다.

 

다이무스의 집은 깨끗하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잘 정돈되었다 정도로는 부족하고, 어딘가 지나치게 청결해서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서늘함이 있다.

 

비록 침대와 책상, 옷장이 있는 작은 방이지만 침대는 꽤나 널찍하고 나뭇잎이 해를 가려줘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아아... 시원해...”

 

이글은 땀에 젖은 채 침대에 누우려다 마악 퇴근한 참인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던 다이무스의 눈총 아래 찬물로 몸부터 씻고, 샤워가운 하나만 입은 채 차게 식은 시트 위에 누웠다.

 

몸의 열기가 한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는 잘 말리라니까, 감기 든다.”

 

타박하면서도 다이무스는 쉴 참이라며 그 옆에 누웠다.

 

달그락, 얼음이 부딪히는 유리컵이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만으로도 서늘하다.

 

눈조차 뜨지 않았지만 익숙한 체중이 푹신한 침대를 누른다.

 

이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 좋다... 벌써부터 이렇게 더운데 이번 여름에는 정말 푹푹 찌겠어. 여름에는 매일 와야겠는걸? 맥주라도 한 캔 사들고... 형이 맥주를 마시던가? 형은 맥주보다는 와인 파였지? 그렇지만 형이 병맥주를 들고 마시는 건 왜인지 멋있을 거 같은데... , 듣고 있어? . , 다이무스 형아?”

 

“...듣고 있다.”

 

아이구 그러세요, 뭘 듣고 계시길래 질문에는 대답도 없어?”

 

다이무스는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떴다가 이내 다시 감았다.

 

.”

 

형은 참.”

 

이상하다니까, 하는 뒤의 말이 흩어졌다.

 

 

철그렁, 사슬이 흔들렸다.

 

잠에서 깨어난 이글은 제 손목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어떤 질 나쁜 장난인지 알아차리려는 듯 힘을 주어 당겨보았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이건 또 무슨 일 일까나?”

 

, 어제 일을 돌이켜 보자.

 

웬일로 벨져 형이 찾아와서, 휴가를 받았으니 형제끼리 꽃이나 보러 가자고 했지.

 

큰형이 감상에 젖은 모습을 보고 놀려나 줄까 싶어서 찬성했었고, 다이무스 형이 퇴근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납치하다시피 해서 한적한 곳으로 갔다.

 

처음에야 놀려줄 생각이었지만 이 감상적인 인간이 어릴적부터 한 번도 제가 원하는대로 고집 부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오늘의 야근도 그다지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리라 지레짐작하고 그만두기로 했었고.

 

한창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보며 반은 강제적으로 형들이 제공한 고급 술을 부어라 마셔라 먹이고 또 먹고, 웬일로 싸움도 없고 서로 싫은 소리도 없이 실컷 즐겼는데... 역시 독한 술이었는지 잠이...

 

어째서 이상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지?

 

이글은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부터?

 

벨져 그 이기적인 인간이 큰형 위문이니 뭐니를 얘기할 때부터?

 

다이무스 그 고집불통이 빠져나가지 않고 납치되어 준 데부터?

 

우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은 작고, 지하실 특유의 냄새가 난다.

 

방치된 지 몇 달은 되었을 것 같고... 나 때문에 급하게 치운 모양이네~?

 

작은 창문조차 없는데다 저 구석에 있는 문은 아마도 화장실이겠지.

 

방 안에는 이글이 누워있는 1인용 철제 침대와 침대 옆 협탁 외에는 가구조차 없었다.

 

철로 뼈대를 짠 위에 매트리스 한 장이라니, 튼튼함만 생각하느라 편안함은 생각하지 않았나 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지 협탁 위에는 등에 담긴 촛불이 하나 방을 밝히고.

 

몸을 살펴보면 술이 아니고 약이어서인지 속이 조금 울렁거렸으나 이 정도는 몇 분 있으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손에 채워진 수갑은 신체강화 능력자도 구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사이의 사슬 길이는 짧지 않아서 일상생활이라면 할 수 있다.

 

심지어 짧은 도라면 어찌저찌 사용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도 들고.

 

발목에도 족갑이 채워져 있었는데 매달린 쇠사슬의 길이는 저만치에 보이는 화장실에 갈 수 있도록 2미터가 조금 넘었고 쇠로 만들어진 튼튼한 침대 다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침대 다리와 이걸 분리할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침대 다리와 단단히 붙어 있고 침대 다리는 또 바닥에 고정되었다.

 

침대에 앉아 몸을 숙여 살펴보던 이글은 열쇠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이무스 혀~~”

 

대상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이 무슨 중세시대야? 전기도 없고, 촛불이라니!”

 

깨어났군. 배가 고픈가? 아니면 목이 마른가?”

 

수갑 말인데~ 형한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이야, 놀랐지 뭐야?”

 

다이무스는 문을 닫고 기대 섰다.

 

이렇게 묶어둘 거면 망사 스타킹에 빨간 힐이라도 신어 주라~”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군.”

 

할 거면 잘 조사했어야지, 이거 잘못 긁히면 상처가 난다고. 요즘에는 안에 천이나 털이 덧대인 것도 있구.”

 

조만간 오스트리아로 이송될 거다.”

 

일부러 서로 다른 소리만 하던 그 신경전은 다이무스의 승리였다.

 

“...형이 그걸 용납했다고?”

 

내가 잠시 눈감아 주었던 것은 네가 그 뒤로 이어지는 책임도 짊어지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네 방종에 따라온 책임 중 하나일 뿐이다.”

 

“‘-중 하나’? 그럼 다른 것은?”

 

네 목숨이다.”

 

다이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성큼성큼 이글 가까이로 걸어갔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 할 거냐. 매번 새로운 능력자들이 합류하는 이 국면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던가? 벨져의 기사단은 하나의 패고, 나는 오스트리아와 가문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너는 지금의 방해물 자리에 앉아 있다.”

 

이글은 이를 사려물었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 너무들 하시네~ 지금의 방해물은 언젠가의 패다, 그걸 고려하지 않을 리 없잖아? 강한 적은 강한 패가 된다, 그렇지?”

 

그러나 연합은 우리 쪽에 안겨주는 손실이 너무 크고, 너는 그 전력이 되는 사람이기에 가만 둘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우리’? 형의 그 우우리이가 누군데? 가문? 나라? 회사?”

 

기가 막히다는 듯 이글이 물었으나 다이무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둘 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이글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말해줄 수 없다.”

 

정말로?”

 

다이무스는 이글의 눈을 피했다.

 

그 순간, 이글은 덤벼들어 다이무스를 바닥에 찍어 눌렀다.

 

검과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혀 울렸다.

 

이글은 그 위에 올라타 무릎으로 그의 팔을 누르고 양 손목에 감긴 사슬로 그의 목을 눌렀다.

 

열쇠 내놔.”

 

손목 사이의 사슬 길이를 더 짧게 해야겠군.”

 

목 대신 손목의 힘줄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그 전에 쓸 수 있을 만큼 써야하지 않겠어?”

 

벨져가 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군, 너를 속인 것이 미안하다며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

 

이글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벨져 형도 한통속이었다 이거구만? 꼴에 양심이 있는 척이라니, 웃겨 죽을 것 같네.”

 

벨져도 나도 네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다.”

 

정말 그러면, 내가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지금은 날 놔주지 않을래?”

 

이글이 한쪽 팔을 놓아주자 다이무스는 주머니의 열쇠를 꺼내는가 싶더니 이글의 얼굴을 잡고 몸을 뒤집었다.

 

재빨리 뒤로 뛰어 침대 너머로 넘어간 이글은 손목에 차고 다니는 머리끈을 꺼내 머리를 묶었다.

 

이 안에서 형이 칼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아?”

 

일반적인 검보다 몇 배는 길고 몇 배는 무거운 걸, 이 좁아터진 곳에서 휘둘렀다가는 짐밖에 되지 않는데!

 

묶였다지만 이쪽이 훨씬 유리해.

 

이글은 사슬 묶인 발을 휘둘렀다.

 

다이무스는 발을 피하고 이어 날아오는 사슬을 뒤로 물러서 피했다.

 

함께 공성에 참전한지도 꽤나 오래 되었고, 서로에 대해서라면 자신을 보듯이 샅샅이 알고 있다.

 

머리를 제대로 써서 덤빈다면 저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이글은 거의 쓰지 않는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 즈음, 이글은 침대 위를 뛰어넘어서 몸을 날렸다.

 

봐라, 일단 달려들고 보지.

 

다이무스는 허리춤의 검을 꺼내 제 앞에 꺼내들고 버티고 섰다.

 

이글은 칼등을 누르고 곡예라도 하듯이 짚었고 다이무스는 검에 힘을 주어 앞으로 밀어냈다.

 

내동댕이쳐진 이글은 뒤로 굴러 재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발에 묶어둔 사슬이 역시 너무 긴 건가.

 

다이무스는 혀를 차고는 사슬 아래에 발을 걸어 바닥에 힘주어 눌렀다.

 

이글은 사슬이 당겨지자 거기 저항하는 대신 오히려 날아와서는 다이무스를 다시 타고 눌렀다.

 

침대 옆이라 길이가 남는 사슬은 다이무스의 다리를 묶고 있었다.

 

“...하아, ... 두 번이나 나한테 위를 내줬네?”

 

즐거웠다며 이글은 다이무스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우선 제 발목을 죄는 것을 풀어놓고 손목의 수갑도 풀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능력자용 수갑이라 그런가 묵직하게 철그렁 소리가 났다.

 

, 이것 봐. 역시 상처가 났어.”

 

“...아직이다 이글.”

 

뭐어?”

 

정말 포기할 줄 모르네!

 

발목도 묶어 뒀고, 이제 유유히 탈출할 차례, 인데.

 

문이 벌컥 열렸다.

 

이글의 눈동자가 그 쪽으로 돌아갔다.

 

, 작은 형? 벨져?! 어떻게 여기...”

 

벨져는 예상했다는 듯 성큼성큼 들어왔다.

 

이글은 일어나려 했지만 다이무스의 손이 그의 다리를 잡고 있었다.

 

한번 더 의심했어야지.”

 

벨져는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은 하랑의 첫 히트 사이클이다.

 

재단에는 알파가 꽤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그리고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브루스 보이틀러가 여러 곳의 협력으로 추측해낸 것이었다.

 

그 결과가 나오자 이제 어른이니 축하한다며 작은 파티도 열어 지금 하랑의 방에는 이런저런 선물들이 방 한쪽을 메우고 있었다.

 

축하와는 별개로 하랑의 상태는 주위에 좋든 싫든 영향을 미치고, 어쩌면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므로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오늘 하루 재단 내 알파들은 조기퇴근을 했다.

 

티엔을 제외하고.

 

평소 스스로를 잘 제어하는 분이니 이번에도 잘 할 것이라고 믿을게요. 그럼 안녕!”

 

이런저런 지침이 적힌 종이를 주고 마틴은 총총 사라졌다.

 

저것도 알파라고, 티엔이 입엣말로 중얼거렸다.

 

파티가 있기 전에 브루스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말했고 하랑은 제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듣더니, 짧게 일축했다.

 

그러니까 지성이 있고 이성이 없는 짐승이네?’

 

이해력이 빠른 것은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고는 재단 기숙사에 사는 오메가가 열락의 기간이 오면 사용하는 방을 빌리겠다고 했다.

 

방은 침대와 테이블, 의자가 있는 꼭대기 구석의 소박한 방이고 안에 화장실과 샤워실까지 딸려 있어서 음식만 있다면 얼마간 지낼 만 했다.

 

이전까지 많은 오메가들이 쓴 방이긴 했지만 그래도 재단의 소중한 막내랍시고 청소를 다시 한다, 뜯어진 시트를 새 것으로 바꾼다, 뭘 한다 하도 부산을 떨어서 티엔은 마지막으로 제자를 위해 방을 점검했다.

 

혹시나 냄새가 새어나갈까 창문을 꽉 닫고 커튼을 치고.

 

으으... 이 방 추워...”

 

오메가들의 그 기간에는 체온이 급격이 상승하기에 일부러 가장 춥고 그늘진 방을 골라서 만든 것이니까.

 

곧 춥지 않게 될 거다.”

 

티엔은 방 안 테이블에 하랑이 먹을 음식을 내려놓았다.

 

이게 이틀 분이던가? 히트 사이클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는군.

 

티엔이 일하는 뒤로 기웃거리던 하랑은 문의 잠금쇠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문 너무 쉽게 열릴 것 같은데?”

 

열쇠로 잠그는 문이다.”

 

그래도 이거, 바늘이나 작은 칼 같은걸로 이래저래 쑤시면 안에서도 열 수 있는걸.”

 

그도 그렇군.

 

게다가 하랑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 문을 열지 않아도 나갈 수 있을 테고.

 

어떻게 해 주면 좋겠나.”

 

보자아...”

 

하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짐을 포장할 때 쓰는 노끈을 가져왔다.

 

, 이거!”

 

그러고는 손과 발을 내민다.

 

티엔은 잠시 내려다보다가 순순히 묶어 주고는 풀리지 않을 것을 확인했다.

 

이러면 불편하지 않겠나?”

 

몰라?”

 

하랑은 일어서서 방 안을 통 통 뛰어다녔다.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서 물건도 잡고, 사용하고.

 

생활에 문제는 없겠군.

 

하랑이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침대 위에 앉는 것을 뒤로 하고 티엔은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확실히, 쇠에 긁힌 자국도 많이 나 있고 비틀어 연 흔적도 있군.

 

거 봐, 그거 잘 하면 열린다니까.”

 

보이틀러 씨 만큼 힘이 센 사람이 몸으로 들이받거나 하면 열리겠어.

 

그만큼 힘 센 사람은 잘 없거든?”

 

아무래도 이 자물쇠를 좀 더 튼튼한 것으로 바꿔 달아야...

 

“...으아아아, 나 지금 되게 긴장돼...”

 

걱정 말아라, 괜찮을...”

 

바람 없이 묵직한 방 안의 공기가 움직였다.

 

유혹적으로 달근한 살내음이 숨막히게 피어나서 그들을 감싸 죄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대고 말 것 같은.

 

눈이 마주치자 하랑이 배시시 웃었다.

 

, 사부가 있어 준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열이 오른 것인가.

 

하랑의 눈가가 달아올라 있었다.

 

만지지 않아도 체온이 서서히 올라 이 방을 덥히는 것이 느껴졌다.

 

난 이만 나가보겠다.”

 

티엔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머리에 열이 오르면 저렇게 되는군.

 

티엔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문지르며, 드물게도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 안, 하랑이 중얼거리는 것은 듣지도 못 하고.

 

, 이것도 안 먹히네.”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알파들의 로망이라고 했는데.

 

, 짧게 혀를 차며 하랑은 뒤로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 다리를 꼬려다, 요란하게 넘어졌다.

 

 

[루드라이화클] 서커스의 숙소에서

2016. 2. 22. 00:28 | Posted by 호랑이!!!

짝짝! 와 대단해요!”

 

공을 돌리면 실패해서 아래로 떨어지고 외발자전거를 타더라도 넘어지고 구르고.

 

웃으면 안 되는 어릿광대이지만 목소리는 발랄하고 밀짚색의 머리카락과 크게 뜬 푸른 눈은 반짝여서 꼬마 광대가 까르르 웃을 때면 요란한 음악과 어우러진 빛이 부서진다.

 

천막의 사람들은 꼬마 광대가 넘어지거나, 실수를 하거나, 물을 뒤집어쓸 때마다 목소리의 높아짐과 낮아짐, 표정의 변화, 손가락 끝까지의 움직임에 집중하여 와아 소리내어 웃거나 꺄악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귀여운 광대가 몸을 늘리는 능력을 보여주는 이 인기있는 쇼는, 단장이 그 화이트 클라프라는 것에 힘입어 연일 상승세를 탔다.

 

마지막으로 팔을 쭉 늘려 인사하자 위에서 관중들이 던지는 꽃이 쏟아졌다.

 

고마워요!”

 

꽃 한 다발을 들고 휙휙 휘두르고 퇴장하자 뒤에서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꼬마 광대.

 

라이샌더는 천막 문을 나섰다.

 

조명 아래에서 어두운 복도로 나가면서 반짝이는 푸른 눈은 가라앉고 활짝 웃음 짓던 발그레한 뺨도, 입술도 서서히 하얗게 질리며 표정을 지워갔다.

 

잘 만든 인형이래도 믿을 모습으로 눈조차 깜박이지 않으며.

 

너 숙소를 단장님이랑 같은 건물로 쓴다고? 좋겠다~’

 

역시 인기인은 다르다니까

 

...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던 소리도 있었지.

 

라이샌더는 어두침침한 복도를 걸어갔다.

 

자신의 방은 1.

 

안으로 들어가서.

 

품에 안았던 꽃다발을 책상 위에 던지고는 몸을 씻었다.

 

머리를 말리고 하얀 셔츠에 연한 갈색 반바지를 찾아 입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화이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방 입을게요.”

 

익숙한 일이라는 듯, 라이샌더는 맨몸에 셔츠와 바지만을 걸치고는 뒤로 돌았다.

 

루드빅은 뒤로 내민 그 양 손을 하얀 천으로 묶고 같은 천으로 눈을 가려 묶었다.

 

물이 뚝, 떨어졌다.

 

루드빅은 라이샌더가 던져놓은 수건을 집어다가 그의 머리에 대고 물기를 털었다.

 

아무리 머리가 짧아서 금방 마른다지만,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감기 걸립니다?”

 

재갈을 물리지는 않았지만 라이샌더는 대답이 없었다.

 

그를 안아들던 루드빅은 책상 위의 꽃다발을 보았다.

 

공단 천으로 묶은 그 끝에는 T.P가 새겨져 있었지만-

 

아마 이 꼬마는 보지 못하겠지.

 

화이트 클라프의 방은 3층의 맨 구석이었다.

 

그 방 앞에 맨발의 소년을 내려놓고 루드빅은 문을 열었다.

 

라이샌더는 그의 손에 끌려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화이트 클라프의 발 아래 내던져졌고 화이트 클라프는 그의 외알 안경을 떼어 조끼에 문지르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소근거리면 라이샌더는 무릎으로 기어와서 화이트 클라프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세뇌를 쓰시는 겁니까.”

 

교육이 덜 되어서 말이지.”

 

화이트 클라프는 점잔을 빼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한참이나 갈 길이 멀어.”

 

큭큭 웃음을 참는 소리였다.

 

루드빅은 예의 그 웃음으로 답하고는 문에 기대섰다.

 

라이샌더는 이제 화이트 클라프의 무릎 위에 앉고 있었다.

 

자기인형 같던 하얀 피부가 연한 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는데 눈을 가린 천이 희어서 더욱 붉은 빛이 눈에 띄었다.

 

이봐, 자네.”

 

부르셨습니까?”

 

흥미가 있다면 자네에게도 알려주지. 키워드.”

 

화이트 클라프는 그에게 손짓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나 선량하고 존경받는 이가 이런 취미가 있다니 세상 일은 참 알 수 없지.

 

루드빅은 다가가 귀를 가까이했다.

 

- 착하게 굴면, 친구들을 돌려주지

 

 

[데샹바레] 히카르도 안나오는 쌍충

2016. 1. 29. 02:20 | Posted by 호랑이!!!

미아, 뭐 해?”

 

오빠한테 보내는 편지 쓰고 있어! 마침 잘 왔다, 나 제대로 썼는지 봐줄래?”

 

, 나도 철자법은 잘... , 데샹! 이것 좀 봐줄 수 있어?”

 

미쉘은 지나치려던 데샹의 가운을 잡았다.

 

나 바빠.”

 

잠깐이면 돼.”

 

까미유는 미쉘을 내려다보다가 미아가 쓰는 편지를 받아 철자를 고쳐 주었다.

 

여기서 ai가 아니고 y, 여기도... 여기는...”

 

그 때 문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바빠, 너 바빠, 서로 바쁜 사람인데 불러놓고 한가하게 굴기는.”

 

잠깐이면 돼.”

 

내가 너한테 내줄 수 있는 시간은 30분까지야.”

 

문가 그늘에 몸을 숨긴 채 탄야는 마치 유치원 선생님 같다고 킥킥 웃었다.

 

낮고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분명 기분이 좋아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까미유는 마저 여기, 여기라고 급하게 짚어준 뒤 저만치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웃기지, 그 애는 더 이상 편지를 받아 볼 상태가 아닌데 여동생이 열심히 편지를 쓰고 있다니까.”

 

까미유는 책상 너머에서 서랍을 열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일 얘기나 할까?”

 

만인의 자상한 의사 선생님, 까미유 데샹이 감동받아 손수 편지를 봐줄 만큼.”

 

네가 의뢰한 건 이미 했어. 그 애 오빠를 죽지 못하게, 그러나 살지도 않게. 그러니까 네가 맡은 일을 할 차례잖아?”

 

까미유가 아무렇지 않게 평소의 매끄러운 목소리로 점잔을 빼며 탄야 앞으로 종이를 내밀자 탄야는 후후 웃더니 갑자기 힘을 주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책상이 덜컹였고 탄야의 주위에서는 눈에 보일 정도의 어두운 보라색 독기가 물결을 이루어 위협적으로 물씬 피어올랐다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까불지 마, 긴 경고는 필요없겠지.”

 

흐름을 바꿀 힘을 찾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비용에 대비해서 결과 산출이 나쁠까봐 쓰지 않는 방법일 뿐이지.”

 

그래, 네가 너의 그 작은 친구를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까미유의 입매가 불쾌하다는 듯 끝이 내려갔다.

 

네 충직한 친구가 날 찾아왔었지, 불과 며칠 전에 말이야.”

 

그건 그냥 내 불량품 중 하나에 불과해.”

 

나한테 딱 한 마디 하더군. ‘물러서라고.”

 

내 알 바 아냐.”

 

탄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내가 기른 어둠의 능력자 군대를 써서 널 괴롭히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야.”

 

저 말은 협박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었다.

 

그것은 까미유의 눈에 꽤나 명백했다.

 

그리고 능력자들이 괴롭힐 대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탄야는 까미유가 내민 종이를 받아서는 부채라도 되는 것처럼 제 입가에 대고 웃었다.

 

난 항상 그렇게 충직한 도베르만이 갖고 싶었어. 어린것들보다야 물들이는 것이 힘들겠지만... 여유를 갖고 천천히, 느긋하게 한다면... 후후후.”

 

“...할 일부터 빨리 하는게 어떨까, 시뇨라?”

 

그래, 이만 가볼게.”

 

탄야는 소리없이 문을 열고는 한 발을 밖으로 뺐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애를 잘 보살펴 두라고. 이래봬도 꽤나 아끼고 있거든.”

 

흘끗, 시선이 밖에서 편지에 꽃이며 나비를 그려넣는 소녀에게 닿았다.

 

그리고 네 강아지 말인데, 교육을 좀 시켜놓는게 쓰기 편할거야.”

 

히카르도를 사용할 일은 없어.”

 

어떨까.”

 

디딘 곳마다 검게 반짝이는 보라색 액체가 머물렀다가 이내 수증기로 변하여 사라졌다.

 

까미유는 눈가에 걸친 색유리 너머로 여유롭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빅터이글] 그 사람을 떠올리는

2016. 1. 26. 02:35 | Posted by 호랑이!!!

빅터의 키가 컸다.

 

처음에 보았을 때보다 적어도 몇 피트는 더 커서 이젠 이글이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였다.

 

머리는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듯 짧게 잘라 뒤로 넘기고 공성전의 상처가 뺨에 남아서 마치 누군가를 연상케 한다.

 

빅터는 러닝셔츠에 겉옷 하나만 걸친 그 큰 몸을 카페테리아의 야외 테이블의 작은 의자에 구겨앉아서는 어릴 적에는 써서 싫다는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글은 새삼 어릴 적의 얼굴을 그의 위에 겹쳐 보다가 가느다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식사는 하고 다녀? 좀 마른 것 같은데.”

 

그러는 형은 담배까지 피면서. 몇 파운드는 빠진 것 같아.”

 

피자라도 시켜 줄까?”

 

됐어.”

 

이글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는 길게 연기를 뱉었다.

 

빅터는 그 연기들이 제 가까이로 오지 못하게 하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

 

눈동자를 굴려 이글의 혓바닥이 사탕 막대라도 물듯 가는 막대를 감싸 입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콜록, 콜록!”

 

보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리다가 사례가 들리자 이글이 깔깔 웃었다.

 

그래, 이럴 때 난 네가 귀엽더라고.”

 

이글은 빅터의 손에서 빈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귀여운 거겠지.”

 

내가 연상시키는 누군가.

 

빅터가 노려보자, 이글은 배실배실 웃음을 띄웠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래, 그 표정도야.”

 

“...”

 

이글은 커피자욱이 남은 빅터의 옷을 잡아당겼다.

 

내 집에 가서 세탁할까? 더러워졌는데.”

 

빅터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인상을 쓰자 이글은 샐쭉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껐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 쪽으로 걷다가 이글은 그를 툭 쳤다.

 

벌써 몇 년이나 되었는데 포기 못 했어?”

 

아직 몇 년밖에 안된거야.”

 

이글은 그 답에 다시 깔깔 웃으며 길쭉하고 가느다란 새 담배를 꺼내물었다.

 

 

사람의 마음에 음악이 있다면.

 

이미 마틴, 그에게는 사람의 마음이 들리지만.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멜로디가 울리고 나이를 먹고 경험이 짙어질수록 다채로운 소리가 들린다.

 

공성전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만난 안타리우스의 사람들은 무언가 음악이 흐르는 것 같긴 했지만 그들의 소리 위에는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위를 덮고 있었다.

 

그 다음 만난 것은 하얗고 검은 가면을 쓴 안타리우스의 사신이었는데 그는 말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면 뒤는 조화롭지 못한 소리로 시끄러웠다.

 

시끄러운 안타리우스라.

 

안녕하세요, 아이작.”

 

뭐냐, .”

 

재단의 마틴 챌피라고 해요.”

 

왜 건거지, 말을?”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니예요.”

 

특이하게도,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그가 선호하는 곳은 조용한 곳이었다.

 

잔디밭의 나무 그늘 아래, 개울의 옆, 운행 전후의 기차역 같은 곳.

 

처음 몇 번은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멀리 던져질 뻔 했지만 몇 번 마주치고 나니 포기가 빠른건지, 그는 더 이상 던지려고 들지 않았다.

 

오늘은 만나곤 하는 장소에 마틴이 먼저 와 있었다.

 

저녁볕이 따스하게 내리는 잔디의 커다란 나무에 등을 대고 앉으니 머리 위에서 나뭇잎이 천천히 흔들려 떨어지는 것이 보였고, 한가로운 마음에 손을 뻗어 잡는 즈음에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쨍그랑 수런수런 째깍째깍 찰칵찰칵 지잉지잉.

 

부서지는 소리, 사람 웅성이는 소리, 톱니바퀴 맞물리는 소리와 기계가 돌아가고 잘리고 무엇인가가 자라는 소리.

 

한 사람 안에서 들리는 것 치고는 두서없고 무질서하게 들려온다.

 

오셨어요?”

 

기분 나빠, 네녀석.”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이야, 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제게서 한 걸음쯤 떨어진 자리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중에 제일 가까운 자리다.

 

이것이 바로 길들인다는 느낌일까.

 

누군가의 호감을 사고 경계를 낮추는 일은 지금까지도 셀 수 없이 해온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상대가 상대라서일까, 각별했다.

 

그러고 보니 안타리우스의 제키엘씨도 별 문제 없이 마음의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제키엘씨는 사도이고 교주라고도 불리는 것 같던데 아이작씨도 사도나 교주나... 그런 급인가요?”

 

관심없어, 그런 건.”

 

안타리우스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아이작이 신경을 쓰는 것인지 그 이미지는 금세 검은색으로 덧칠되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지만 마틴은 거기에서 이것저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첫 번째, 확실한 것은 제키엘보다는 입지가 좁아도 한참이나 좁다는 것.

 

두 번째, 안타리우스가 시키는대로 일은 하지만 자유도가 높아서 어쩌면 껄끄럽게 여겨질 지도 모른다...는 건 추측이 많이 섞인 말이지만.

 

걱정된다고 말하면 마음을 읽는다고 기분 나빠 하겠지.

 

그쯤이야 능력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까, 생일이 언제라고 하셨죠?”

 

알려준 적 없어.”

 

그럼... 다음번에는 언제 쉬세요? 머리끈이 남는데 오늘은 가져오지 않아서요.”

 

재단의 긴머리 꼬맹이한테 주고 남은거냐.

 

“...몰라, 다음주면 시간이 날 지도.”

 

바쁘시네요.”

 

일할 게 있으니 돌아오라고 하더군.”

 

속으로 질색하는 것이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다음 목요일 즈음에, 공성 마치고 여기에서 볼까요.”

 

시간이 된다면 말이지.”

 

그의 가면 너머는 항상 소란스러웠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싶을 정도로.

 

그러나 이번만은 자신이 능력이 없더라도 그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봐요.”

 

그리고 저, 한 번도 하랑한테 머리끈을 선물해준 적은 없어요.

 

그렇게 덧붙이자 가면을 쓴 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헤어졌고, 만나기로 한 다음 주 목요일에 다시 그 자리로 갔지만 아이작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하여 밖으로 나돌았지만 다시 만난 것은 그 다음번의 공성전에서였다.

 

아이작.”

 

그러자 앞을 보던 눈동자가 굴러 자신을 쳐다보았다.

 

반가움에 남들에게는 억지로 짓는 미소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마치고 저 좀 봐요.”

 

잔디밭, 나무 그늘 아래에서.

 

머리끈, 검은색 질 좋은 실로 엮은 것을 건네주고.

 

어쩌면 오늘은 바로 곁에 앉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면 같이 하자고 할지도 모르고.

 

가까이 오지 마.”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뭐라구요?”

 

그는 몸을 돌려서 저 앞의 상황을 살피러 갔다.

 

이상해.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점을 꼽으려 그의 등을 쳐다보다가 문득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다른 안타리우스들은 자신들이 내는 소리 위에 전파의 잡음이 강하게 덧씌워져 있었다.

 

제키엘과 아이작의 소리 위에는 그러한 잡음이 없었다.

 

없었는데.

 

아이작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침묵.

 

여태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의 침묵이 그의 마음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벨루벨] 벨져 생일 축하해

2016. 1. 12. 02:45 | Posted by 호랑이!!!

좋아, 잘했어! 믿음직스럽군!”

 

그 말에 벨져는 루이스를 흘끗 돌아보았다.

 

공성을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벨져는 루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잘했다, 믿음직스럽다니.”

 

그게 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덕분에 살았어요같은 소리를 하던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새삼스러워서 그렇다.”

 

“...그게 얼마나 옛날 일인데.”

 

루이스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렇게 오래지도 않았다.”

 

그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다, 루이스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지?”

 

우리가 이런 말을 나눌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이 뒤에 시간 있어?”

 

왜인지 들어보고 결정하지.”

 

그러자 루이스는 잠시 어물거리다가 옷의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냈다.

 

일전에 받은 티켓인데-”

 

안 간다.”

 

“-네가 오늘 생일이라는 말을 들어서, 괜찮다면 써 줄래?”

 

벨져는 성가시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티켓을 쳐다보다가 티켓 대신 루이스의 팔을 잡았다.

 

앞장서라.”

 

?”

 

내 생일 때문이라고 말한 건 너잖나.”

 

, 그건 그렇지만.

 

우리 너무 진도 빨라...!”

 

그러나 그 말은 무시당했다.

 

새로 개업한 레스토랑의 내부 구조는 말끔했고 꽤나 현대적이었다.

 

벨져라면 좀 더 고풍스러운 쪽을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티켓을 제시하자 이어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요리들도 클래식과는 거리가 멀군.

 

루이스는 맛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맛이 어때?”

 

건넛자리의 벨져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말 그대로 우아한 모습으로 애피타이저를 맛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요즘 먹던 것보다는 월등히 좋군.”

 

놀랍네. 항상 훨씬 좋은 걸 먹고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많아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 미국인처럼 빵 사이에 고기나 야채를 끼워 일을 하며 먹거나, 그조차 준비할 시간이 없으면 건량을 씹으면서 지냈지.”

 

오늘은?”

 

생일이라 억지로 쉬는 시간을 만들었지.”

 

의외로 대화는 부드럽게 풀려 나갔다.

 

메인을 돌려보내고 커피와 디저트가 나왔다.

 

과일을 얹은 달지 않은 케이크 조각을 잘라내다가 루이스는 아까부터 신경쓰이던 것을 물었다.

 

대화가 잘 되네.”

 

그런 말을 들을 줄도 몰랐군.”

 

난 네가 날 싫어할 줄 알았어.”

 

? 네가 날 이긴 전적이 있기 때문에?”

 

루이스는 슬그머니 눈길을 아래로 내렸고 벨져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루이스가 아무 말도 없자, 벨져는 짧게 웃었다.

 

그런 것을 신경쓰고 있었던 거냐.”

 

벨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믿음직스럽군!이라고 외치게 된 녀석이.”

 

그거 놀리는 거지?”

 

놀리는 거다.”

 

그러자 루이스가 부루퉁한 목소리를 내었다.

 

디저트 접시까지 비우고 일어날 차비를 하며 벨져는 툭 뱉듯 말했다.

 

축하 고맙다 루이스.”

 

“...별 말씀을.”

 

이 뒤의 찻집은 내가 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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