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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X빅터] 고양이 -02

2014. 10. 30. 19:24 | Posted by 호랑이!!!

 

빅터를 맡고 있던 사람들은 생각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은 공장일을 마치자마자 돌아와 설거지와 다른 자질구레한 일들을 마칠 것.

 

시간을 빠듯하게 써야겠지만 조금 더 서두르고 자신에게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이글형네 집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아는 중에 유일하게 혼자 살면서 고양이를 흔쾌히 맡아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빅터는 공장일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뛰어와 수프를 끓여놓았다.

 

집안을 청소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마른 옷을 잘 다려놓으면 할 일이 일단락된다.

 

마지막 옷을 다려놓자마자 세탁이 다 되었다는 소리에 후다닥 나가 빨랫줄에 널고 나니 정말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원래라면 저녁 내내 할 일을 고작 두 시간 안에 하려니 피곤하고 지쳤지만 이글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땀에 젖은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차가운 물로 몸을 닦았더니 그나마 정신이 든다.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닦고 이글의 집으로 날아가 문을 똑똑 두드렸더니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리고, 이글이 나왔다.

 

이제 왔어? 벌써 일곱시 반이야.”

 

“...”

 

“...늦은 건 아니니까 들어와.”

 

문을 열어주고, 빅터는 열린 문틈으로 들어왔다.

 

저녁 거의 다 됐으니까 거기 앉아 있어.”

 

저기, 고양이는...”

 

그러자 손가락으로 대충 소파를 가리킨다.

 

그리를 봤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말끔한 모습이었던 천 소파는 여기저기 튿어지고 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생각되는 은색 털에 초록색 눈을 가진 새끼고양이는 소파에다 앞발의 발톱으로 득득득 긁고 있다가 빅터와 눈이 마주치자 가냘프게 야옹- 하고 울었다.

 

! 소파를...!”

 

덥석 집어들자 이번에는 제 품으로 폭 뛰어든다.

 

털 때문에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폭신폭신하기도 하고, 그런데 잘못 쥐었다가 부러지거나 날아가거나 다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 녀석이 그 소파가 참- 마음에 드나 봐.”

 

이글이 그쪽을 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미안.”

 

됐어- 예상했던 일이니까. 오히려 소파 하나로 끝나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글은 건성건성 대꾸하며 그릇에다가 스튜를 듬뿍 떴다.

 

한창 자랄 때라 햄버그나 양 갈비 같은게 먹고 싶겠지만 내가 그나마 자신있게 만드는 게 이것밖에 없거든? 오늘은 이걸로 참아줘.”

 

고마워, 라고 대답하고 머뭇거리던 빅터는 수저를 찾아 식탁에다 가지런히 놓았다.

 

- , , 임마.”

 

이글은 빅터가 자리에 숟가락을 내려놓자 손가락으로 홱 가리켰다.

 

?”

 

내가 앉아있으랬지, 누가 일하랬어?”

 

빅터는 다시 소파로 가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그리고 제 무릎 위로 기어올라오는 새끼고양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윙- 하고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펄쩍 뛸 만큼 놀랐다.

 

, 뭐야, 놀랐잖아!”

 

머리 젖은 거 말려주려고 이러신다, ?”

 

이글은 드라이어를 가지고 빅터의 머리를 말려주다 새끼고양이가 쉬익 소리를 내며 발톱을 세우고 앞발을 뻗는 것을 보았다.

 

- 닮았다.

 

이글은 빅터의 머리를 말려주고 드라이어를 앞발로 툭 치고는 지레 놀라 화닥닥 도망가는 새끼고양이 쪽으로 드라이어를 밀어준 뒤 빅터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스튜 좋아해? , 이런 건 만들기 전에 말해야 하나?”

 

“...좋아해.”

 

빅터가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의 마법계는 꽤나 치열했다.

 

모두가 열광하는 퀴디치 시합 결과가 예언자일보 2면에 실릴 정도로.

 

퀴디치를 제치고 예언자일보 1면에 실린 내용은 머글 태생 초능력자에 관한 의견으로 싸우는 해리 포터와 지니 포터, 그리고 헤르미온느 위즐리에 관한 얘기였다.

 

프랑스인들 정치 얘기마냥 갑론을박이 온 나라에, 온 마법계에 치열했지만 딱 한군데, 이 모든곳과는 상관없는 곳이 있었다.

 

 

 

 

“...예언자일보도 참 할 일이 없군.”

 

다이무스 홀든은 1면을 다 읽고 감상을 말했다.

 

그에게 있어 이번 1면은 그저 유명인들이 가정 불화로 싸운다더라 하는 가십 기사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음 장으로 넘기는데, 옆에서 우아하게 포리지를 떠 먹던 벨져 홀든이 제 형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웬일로 조용하지, ?”

 

“...이렇게 순순히 아침을 보내게 할 리 없는데, 불안하군.”

 

하지만 겉보기만 봐서는 태평하기 그지없다.

 

혹시 모르지, 이글이 드디어...”

 

벨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란스런 새 소리가 들리고 부엉이들이 한데 얼키고 설켜 거대한 새 덩어리를 만들어 깃털을 흩뿌리며 연회장으로 들이닥쳤다.

 

“...드디어 뭐?”

 

실언이었다, 형아.”

 

깔끔하게 말하며 벨져는 토스트 한 쪽을 들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이글 홀든!”

 

이글!”

 

동시에, 슬리데린의 다이무스 홀든과 래번클로의 토마스 스티븐슨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항상 미안하다, 스티븐슨.”

 

“...다른 기숙사 일에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옆에서 보던 벨져는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적 증거는 없겠지만 이 소동의 주범은 자신의 동생, 홀든의 막내 이글 홀든이렷다.

 

이 망나니놈.

 

그리고 벨져는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망나니라는 천한 말을 생각했다는 것을 반성했다.

 

원래라면 형과 함께 이글을 혼내야겠지만 올해 래번클로 반장으로 임명된 토마스가 자신의 역할을 대신 해주니 뭐.

 

벨져는 이글과 같은 기숙사의 반장이라는 이유로 매일같이 뒤치다꺼리와 기타 잡무로 고생하는 토마스에게 애도를 표했다.

 

아 잠깐, 내년이면 형은 졸업하고 없을텐데, 다음 잔소리 담당은 나인가.

 

벨져는 미간을 꾹 눌렀다.

 

하늘을 베껴온 듯한 아름다운 천장과 말끔하고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

 

각 분야에서 이름난 마녀와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교수진.

 

저녁이면 길고 넓은 테이블 위로 수십가지 호화로운 만찬이 펼쳐지는 연회장.

 

그리고 여기저기로 우왕좌왕 뛰어다니는 동료들과 재밌다는 듯 같이 소리지르거나 비명을 지르며 숨는 선배들, 후배들.

 

바닥으로 눈처럼 떨어지는 수많은 부엉이 깃털, 귀를 울리는 꽥꽥거리는 소리.

 

그리고 신이 나서 무어라 소리지르다 토마스 스티븐슨과 제 형에게 잡혀서 혼나는 동생.

 

이것이 창립 이래 우수한 마법사와 마녀를 무수히 많이 배출하였으며 세상을 위협했던 볼드모트를 막아낸 마지막 격전지.

 

마법 학교 호그와트의 평화로운 아침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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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틀비<-토마] To.지민선배

2014. 10. 29. 22:33 | Posted by 호랑이!!!

토마스는 커다란 갈색 봉투를 안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오늘 장봐온 물품들이 가득했다.

 

어디보자... 휴톤씨랑 도일씨랑 레베카씨는 맥주... 이건 냉장고에 넣어야지.”

 

냉장고 맨 윗칸 오른쪽에 맥주 넣어놨어요 -토마스

 

친절하게 메모까지 해서 붙여놓고는 목록의 그 다음을 읽었다.

 

레이튼씨는 나사 몇 개...”

 

나이오비씨는 새로 나온 수학 잡지 한 권...”

 

나사는 공구통 옆에, 수학 잡지는 책상 위에.

 

이글형이 얘기했던 머리끈을 가져다주고 트리비아가 주문한 스타킹을 방 침대에다 올려놓은 뒤 방에서 나오며 토마스는 루이스를 찾았다.

 

선배- 얘기하셨던 공책이랑 펜 사 왔어요.”

 

수고했어, 그거 책상 위에 좀 놔줘.”

 

루이스의 방 책상에 새 공책과 펜을 내려놓던 토마스는 아직 갈색 봉투에 뭔가가 많이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고 안에 든 것을 꺼내보았다.

 

피터가 좋아하는 푸딩이었다.

 

, 맞다. 아직 피터한테 안 다녀왔네... 화내겠다.”

 

토마스.”

 

선배, 오늘 피터, 얌전히 있었어요? 오늘 장보는데 데려가지 않았다고 삐졌겠지만... 계속 안 보이는걸로 봐서 어디 숨어...”

 

있을 리 없었다.

 

루이스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토마스의 앞에 서 있었다.

 

토마스...”

 

“....”

 

토마스는 억지로 웃으려는 듯 입꼬리를 올렸지만 얼굴은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할 수 없죠, 엘리나 줘야지.”

 

과자 많이 사왔다고 엘리가 좋아하겠네요~

 

루이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친근하게, 토마스의 등을 두드렸다.

 

오늘 저녁에, 내 방에 와서 잘래?”

 

, 그래도 돼요?”

 

그래.”

 

토마스는 여전히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엘리한테 과자를 전해주러 방 밖으로 나갔고 트리비아는 토마스와 엇갈려 방에 들어왔다.

 

자기, 또 토마스를 재워주는거야?”

 

“...할 수 없잖아. 내 잘못이었으니까.”

 

풀죽은 애인의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트리비아는 생각했다.

 

그 토마스 스티븐슨이라면 아직 어린 피터 모나헌을 한창 싸우는 중인 루이스 앞으로 슬쩍 밀어넣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때 보았던, 웃는 얼굴도.

 

 

[이글X빅터] 고양이 -01

2014. 10. 25. 18:31 | Posted by 호랑이!!!

“도와줘.”

 

그건 비오는 날의 저녁이었다.

 

이제 슬슬 추워지는 날씨인데도 빅터 하스, 은발의 꼬마는 여름에 입던 그대로의 차림으로.

 

우산조차 쓰지 않고, 심지어 겉옷조차 입지 않아 새파래진 얼굴로 문간에 서 있었다.

 

전혀 예상외의 방문객이었지만 이글은 빅터를 따뜻한 거실로 안내했다.

 

마른 수건을 머리에 씌워주고 벽난로 앞의 푹신한 의자에 앉혀 놓고, 이글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가져왔다.

 

원래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들일 예정이 없던 집이라 의자가 하나뿐이어서 이글은 테이블을 끌어당겨 그 위에 앉았다.

 

“우유 마셔.”

 

“고맙... 습니다.”

 

파랗게 변했던 입술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떨림도 멎었다.

 

뺨도 제법 발그레해져 보기도 좋고.

 

이글은 빅터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비에 쫄딱 젖어서, 옷이라고 걸친 것도 빈약한 채로 외간 남자의 집에 무작정 와 ‘도와줘’라니.

 

왜?라고 생각했던 궁금증은 곧 풀렸다.

 

빅터가 안고 있던 파란 천꾸러미(겉옷)가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가냘프지만 분명하게 ‘야옹’이라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고양이?”

 

그러자 끄덕, 한다.

 

“왜?”

 

이글은 고개를 기울였다.

 

고개가 기울어짐을 따라 길고 결 좋은 머리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애가, 얼마 전부터 종이 박스에 담겨서... 공장 근처에...”

 

뻔하지.

 

버려졌고, 새끼 고양이고, 자신하고 처지가 겹쳐 보여 내버려 둘 수가 없었는데 집에 데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장에 둘 수도 없고, 도와주십사 그거겠지.

 

이글은 빅터의 겉옷을 뒤져 예상보다도 훨씬 작은 고양이 새끼를 찾아 뒷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닮았네.”

 

“응?”

 

연한 회색 태비(줄무늬) 고양이.

 

색이 아주 연해서 불빛에 따라 은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못생긴게 너랑 닮았어.”

 

“익...”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른들한테 억눌려서 자기 의견 한 번 말하지 못하고... 지냈겠지... 그리고 그게 습관이 되어서...

 

이글은 즉흥적으로 결정해버렸다.

 

“좋아, 내가 맡아 주지.”

 

“정말?”

 

“하지만 조건이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답답했다.

 

그까짓 어른이 뭐라고.

 

뭐라고 그렇게 잔뜩 겁먹어서 이깟 조그만 고양이새끼 한 마리 얘기도 못 꺼내.

 

못생겼다고 놀려도 잠깐 발끈했다가 지레 겁먹어서 눈치나 보고.

 

정말 답답하고, 짜증났다.

 

“매일 저녁은 여기서 먹어.”

 

“하지만-”

 

“좁겠지만, 자고 가도 괜찮아.”

 

설마 나한테 저거 뒤치다꺼리를 다 맡길 건 아니지?

 

빅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티엔X하랑] 생일 축하

2014. 10. 23. 00:53 | Posted by 호랑이!!!

하랑은 아버지가 이국으로 가는 날 주었던 주역을 펼쳐들었다.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었으나 부러 전등 대신 기름등잔을 꺼내었다.

 

바지직 바지직 기름 타들어가는 내음은 향긋하고 소리가 나직하니 마치 이 순간만이라도 고향으로 간 것 같다.

 

주역은 아직 어렵고, 어쩌면 아버지에게까지도 어려웠겠지만 이 책을 자신에게 준 것은 이국 땅을 밟을 자신에게 흉운이 멀어지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기원이렷다.

 

음기가 어쩌고, 양기가 어쩌고.

 

몇 장쯤 읽다 하랑은 공기가 더워 창을 열었다.

 

“거 달도 밝다.”

 

보름달도 아닌 것이 자그마해서 이곳의 가스등 따위에 빛이 위축될 만도 하건만 그러한 기색도 없이 깊고 어두운 밤하늘에 떠 밝게 비치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달 좋고, 주위도 모처럼 고요하니 좋고.

 

여기 향긋한 술이나 한 잔 있으면 좋으련만.

 

하랑은 아버지 몰래 한잔 두잔 빼어먹던 것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향긋하지 않아도 되니까 마시고 취할 곡차 한 잔만 있으면 좋으련만.”

 

하랑은 팔을 뒤로 돌려 머리에 대면서 휙 누웠다.

 

“어린놈이 술타령이라니 퍽이나 보기 좋은 모양새다.”

 

그런데 눕는 순간 들어오는 것이 사부의 얼굴이라니.

 

“거 인기척 좀 내고 다니쇼.”

 

하랑은 방금 누웠지만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호오, 주역?”

 

티엔은 책상 위에 놓인 책을 집어들었다.

 

“아버지가 주신 거요.”

 

티엔은 하랑의 옆에 앉더니 가지고 온 것들을 주섬주섬 풀어놓았다.

 

“떡, 전, 생선에 술? 이게 다 뭐야?”

 

이걸 여기서 볼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먹기 좋게 잘린 과일이 담긴 접시까지 나오자 하랑은 얼떨떨하면서도 기뻐 배 조각을 집었다.

 

조선 것보다야 무르지만 맛만은 같으니 입에다 톡 던져넣고 우물우물 먹는다.

 

티엔은 작은 잔 두 개를 꺼내더니 그 잔에다 술을 따랐다.

 

아까는 어린놈이 술타령이다 뭐다 하더니.

 

하랑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티엔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양과가 든 분홍색 상자를 주더니, 티엔이 입을 열었다.

 

“네놈 생일상이다.”

 

“...이 야밤에?”

 

“그래야 내가 네 생일을 제일 처음으로 축하해 준 사람이 되지 않나.”

 

뭘 그런 걸 신경쓰고 그러시나.

 

그러면서도 하랑은 양과자를 집어 티엔의 입에다 물려주었다.

 

“그래도 난 사부가 제일 먼저 축하해 주어서 기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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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카인/오메가버스] 기만하지 말게

2014. 10. 20. 00:41 | Posted by 호랑이!!!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관계를 정의해 보자면 이해하기 힘든 관계라고밖에 할 수 없다.

 

타고나면서부터의 우위는 저 쪽이 점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내가 왕족이라도 되는 양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꽃이나 반지 따위 노골적인 선물은 없었지만 늦게까지 깨어있는 날이면 커피와 간단한 다과를 내어주며 같이 깨어있어 준다던가.

 

아침이나 점심을 거르는 날이면 빵이나 샌드위치, 혹은 과자.

 

쉬는 날이면 끊임없이 제 집을 찾아와 자고 가도 된다는 허락을 조른다던가.

 

그와의 대외적인 관계를 말하라면 일단은 ‘연인’이다.

 

믿지도 않으면서 왜 연인이 되었냐고 한다면.

 

엄하지도 노골적이지도 않지만 분명한 신분제가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자신 같은 오메가가 웨슬리 슬로언쯤 되는 알파를 거부할 수 있을 리 없다...고 할까.

 

그러니까 자신에게 있어서 이건 독점과 안전을 주고받은 일종의 ‘거래’인 셈이고 저 쪽도 그걸 알고 있다.

 

알파들의 독점욕이 꽤나 심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연인 관계를 제시하고 승낙을 얻으면 그만둘 줄 알았지, 끊임없이 찾아오고, 먹이고, 재우고,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세심한 것에 신경을 써 주고, 더 잘해주지 못해 안달이고...

 

마치 정말로 사랑하기나 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 믿을 수 없다.

 

“카인, 셰퍼드 파이 좋아하나?”

 

“그럭저럭.”

 

“내일 모처럼 솜씨를 부려 볼까 해서.”

 

‘모처럼’은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였다.

 

“고기랑 밀가루가 집에 있으니까 그걸 쓰면 되겠군.”

 

“그럼 나는 좋은 와인이라도 가져오지.”

 

오븐이 없다는 핑계로 최근 그는 자신의 집에 매일같이 찾아와서 자고 갔다.

 

속 뻔히 보이는 술수지만 카인은 번번이 넘어가주고 있었다.

 

“슬로언.”

 

“응?”

 

“요즘 매일같이 찾아오는데, 자네 허리는 멀쩡한가? 그렇잖아도 슬슬 엔진 수명이 떨어질 때인데 그렇게 관리도 하지 않고 무리해서 쓰면 조만간 폐업할지도 모르네.”

 

“그 정도에 ‘무리’라고 하다니, 난 자네를 생각해 적당히 하고 있는 건데.”

 

흥, 허세부리긴.

 

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읽던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슬로언과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밤 시간은 총기를 손질하며 보냈지만 교제를 시작한 이후로 매일같이 찾아오는 통에 여유로운 밤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어서 차선책으로 아침에 받은 신문을 저녁에 함께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웨슬리는 10시가 되자 일어나 카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키스를 한 뒤 나갔다.

 

카인은 아까까지 마시던 찻잔을 비우고 모처럼 혼자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웨슬리는 얘기했던 대로 고기와 밀가루와 계란으로 셰퍼드 파이를 만들었고, 그가 요리 솜씨가 좋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 카인은 탐식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세 조각이나 먹었다.

 

셰퍼드 파이와 와인,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수순으로 침대까지 가서.

 

카인은 취기를 빌어 웨슬리의 머리를 쓸어 보았다.

 

“처음 연애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뭐가 그리 급한 건가, 자네는?”

 

웨슬리는 킬킬 웃으면서 카인의 옷을 벗겨내려갔다.

 

“이렇게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면 자네를 홀든의 막내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

 

카인은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어째서 이런 실없는 장난질로 내 마음을 흔들려고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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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웨슬] 마법의 각설탕

2014. 10. 18. 16:23 | Posted by 호랑이!!!

카인은 그들이 ‘서재’라고 부르는 방에 있었다.

 

유달리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하룻밤을 통째로 새고...

 

창 밖을 보니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서재라고 해 봐야 책꽂이 몇 개가 있는 정도였지만 아직 카인이 손도 대지 않은 책도 여러 권 있겠다, 푹신한 안락의자와 부드러운 담요도 있겠다, 꽤나 만족스러웠다.

 

마지막으로 한 권만 더 읽고 두 시간쯤 자기로 한 카인은 책꽂이를 위 아래로 훑어보다 아주 얇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아주 얇고, 딱딱한 표지는 보라색 바탕에 금색으로 매듭 무늬가 들어가고.

 

모양만 보면 어린아이들 동화책인데, 이걸 웨슬리가 사 놓은 건가? 샬럿이나 엘리, 피터 같은 아이들에게라도 주려고?

 

카인은 그 책을 집어들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았다.

 

“‘검증된 마녀의 마법의 각설탕’...?”

 

책을 펼치니 책 안쪽이 움푹 파여 있었다.

 

움푹 파인 안에는 각설탕이 들어 있었고 카인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책에는 설명이 씌여 있었다.

 

⌜검증된 마녀의 각설탕 사용법 :

        1. 커피에 타서 먹이든 차에 타서 먹이든 그냥 먹이든 당신의 말을 듣게 하고 싶은 상대에게먹이세요!

        2. 그 상대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몸이 줄어들게 됩니다.

   ※절대로, 절대로 당신이 먹어서는 안 됩니다⌟

 

책이 아니라 한정판 설탕통인데 책 같아서 여기 둔 건가?

 

카인은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싸인 설탕 조각을 집어들었다.

 

하나밖에 없군.

 

그러고보니 모닝 커피에 넣을 설탕이 똑 떨어졌던가.

 

어차피 자신은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니 상관없지.

 

웨슬리의 컵에나 넣어줘야겠다.

 

카인은 부엌으로 가 주전자를 불에 올리고 프라이팬에는 계란을 두어개 톡톡 까 넣었다.

 

아침거리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는 것을 보다 카인은 커피콩을 갈아 커피를 내렸다.

 

하나는 설탕이나 크림 없이 블랙으로, 하나는 커피에 설탕만.

 

그러고는 쟁반에 커피 두 잔과 아침거리를 받쳐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웨슬리, 아침이네. 일어나게.”

 

“으음... 5분만...”

 

“일어나, 이 능구렁이 영감아.”

 

카인은 웨슬리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것을 보고 픽 웃었다.

 

“뭔가 잊은 거 아닌가?”

 

“실례했네.”

 

카인은 웨슬리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웨슬리는 카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럴 것이라고 예상했었기에 손의 쟁반을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하며 카인은 그 옆자리에 앉았다.

 

“침대에서 아침 식사라니, 귀족이라도 된 것 같군.”

 

“커피가 뜨거우니 조심하게. ...아니, 그거 말고. 스푼이 있는 쪽이 자네 거야.”

 

“고맙네.”

 

웨슬리는 하얀 머그잔에 입을 대었다.

 

“어제 설탕을 다 쓴 줄 알았더니, 나가서 사 온 건가?”

 

“아, 그거 말인데. 서재에 설탕상자가 있더군. 케이스가 책 모양이라 책꽂이에 꽂아둔 것 같네.”

 

“그랬어?”

 

“‘검증받은 마녀의 마법의 각설탕’인가 뭔가.”

 

“그런게 있었나...”

 

동화책으로 착각했나보지.

 

카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웨슬리는 커피를 다 마시고 벽에 기댔다.

 

“토스트도 먹어야지.”

 

“싫네.”

 

펑.

 

작은 폭음과 연기가 나며 웨슬리가 잠시 가려졌다.

 

그 연기가 가시자 카인은 입을 떡 벌렸다.

 

한눈에 보아도, 웨슬리는 작아졌다!

 

작아져서 소매가 남는 것을 보고 웨슬리는 카인에게 버럭 소리쳤다.

 

“카인 스타이거!!! 대체 내게 뭘 먹인 건가!!!”

 

“자, 잠깐 기다리게!”

 

카인은 서재로 달려갔다.

 

보라색, 얇은 두께의 동화책 같은 케이스.

 

금색으로 무늬가 들어간... 어디 있지?! 분명히 여기다 올려뒀는데?!

 

카인은 한참이나 서재를 뒤지다 웨슬리에게 돌아왔다.

 

“...찾지 못했네. 이 설탕은 뭔가 희귀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네.”

 

“...”

 

“...웨슬리, 일단 진정하고...”

 

카인은 웨슬리가 폭발하기 5초 전의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올렸다.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펑.

 

웨슬리가 줄었다, 또.

 

가뜩이나 품을 넉넉하게 하여 입던 파자마가 커졌다.

 

소매를 둘둘 걷어도 이내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벗겨지고 하는 것은 비단 소매뿐만은 아니라 카인은 눈 둘 곳을 몰랐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웨슬리가 어려보이기까지 했다.

 

“저기, 웨슬리. 지금 자네 모습이 많이... 그... 노출이 심하니 다른 옷을 가져다 줄까? 입는게 좋을 것 같은데.”

 

“싫네!”

 

펑.

 

“싫어!”

 

펑.

 

“싫어, 싫어, 싫어, 절대 싫어!!!”

 

퍼어엉.

 

“그만, 싫다고 하는 건 그만두고- 일단 옷부터...!”

 

“싫! 어!!!”

 

웨슬리는 점점 작아졌다.

 

옷에 가려서, 마침내 사라질까봐 단추를 허겁지겁 풀었지만 이미 거기에 웨슬리는 없었다.

 

“웨슬리! 웨슬리 슬로언!!!”

 

“싫네! 싫어!! 싫다고!!!”

 

“그만두라니까!”

 

방안이 빙글빙글 돌았다.

 

웨슬리의 싫다는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지만 막상 웨슬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 제발...”

 

그리고, 이번엔 자신의 몸이 흔들렸다.

 

 

 

 

“카인, 카인. 일어나보게.”

 

“으으... 웨슬리... 옷을...”

 

“카인!”

 

카인은 눈을 떴다.

 

침실, 웨슬리의 옆.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오전 6시였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일어나 앉으니 웨슬리가 슬금 제게 기대온다.

 

“그래, 무슨 꿈을 꿨길래 그리 잠꼬대가 심했나?”

 

카인은 잠시 꿈을 더듬어보더니, 말했다.

 

“자네의 옷을 벗기는 꿈.”




*마법의 각설탕 두 조각(미하일 엔데 원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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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글] 선택지

2014. 10. 7. 16:55 | Posted by 호랑이!!!

눈을 뜬 곳은 어두운 곳이었다.

 

어둡고, 춥고,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곳.

 

주위는 횃불이나 낡은 등불이 비춰주고 있었다.

 

숲인가, 나무가 많다.

 

그러고보니 좀 익숙한 곳이다.

 

...가문 소유의 사냥터?

 

옛날에는 사람 사냥도 빈번하게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오한이 끼쳤다.

 

머리를 젓고 주위를 다시 둘러보려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깼느냐, 이글.”

 

“다이무스 형!”

 

펄쩍 뛸 만큼 놀라고 반가워 돌아보려는데 몸이 기우뚱하더니 기세를 못 이기고 결국 쓰러진다.

 

뭐야, 하고 보았더니 밧줄이었다.

 

밧줄과 거기 묶인 자신의 몸과, 그리고 딱딱한 나무 의자.

 

“형아, 이것 좀 풀어줘...”

 

조금 이상한데.

 

왜 형이 칼을 빼들고 있지?

 

그러고보니 저 앞에 사람 같은 것이 보인다.

 

머리에는 검은 자루를 씌우고, 무릎 꿇려서 손은 뒤로 묶고.

 

“...루이스...?”

 

그중 하나, 옷이 낯익어 말을 걸었다.

 

“이글 홀든? 이게 무슨 일이야?”

 

“나야... 모르지...”

 

이상한데, 몹시 이상한데.

 

“선배예요?”

 

맙소사, 옆은 토마스.

 

그리고... 나이오비...

 

“형,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줄 좀 풀어주면 안 될까? 나랑, 쟤들이랑...”

 

“네 머리로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잖아! 내 상상력은 빈약하다구.”

 

“내가 너를 너무 과대평가 한 모양이군.”

 

다이무스가 말했다.

 

그러고는 이해를 도와주겠다, 며 루이스 쪽으로 다가가더니, 단번에 칼을 내리쳤다.

 

피가 분출되며 따뜻함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형아...?”

 

“사랑한다고 해 보거라.”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다이무스가 말했다.

 

“누굴... 형을?”

 

이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건 형이 아냐.

 

형일 리 없어.

 

다이무스 홀든은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역사서보다는 기사도 소설책을 좋아하면서... 질려하면서도 꾸역꾸역 성실하게 초콜릿을 먹어주고... 때때로 시나 지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흘리는....

 

검이 올라갔다.

 

횃불에 은빛으로 반짝 빛나 이글은 정신을 차렸다.

 

“미친거 아냐?! 그만둬 다이무스 홀든!”

 

가엾은 토마스는 무슨 일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면서 떨고 있었다.

 

“너무하는거 아닌가, 형한테 미쳤다니.”

 

“형! 다이무스! 그만두라고 다이무스!!!”

 

서걱.

 

그리고 툭, 하는 소리가 났다.

 

다이무스의 검날이 다시 빛을 반사했다.

 

제발, 안돼.

 

엘리가 나이오비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동화책을 읽어 달라며 양손으로 커다란 책을 들고 침대 위에 앉아 있을 텐데.

 

이글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해! 사랑해 형! 사랑한다고!”

 

서걱.

 

머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잉게 나이오비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실망이다, 이글.”

 

다이무스는 한숨을 쉬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나?”

 

“했잖아! 했잖아 미친놈아!”

 

이글은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친했던 세 사람은 죽어버리고, 여태까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따르던 큰형은 손에 검을 들고 피를 묻힌 채 무엇이 잘못이냐는 듯 평온하게 말을 한다.

 

“저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날 사랑해서 하는 말이 듣고 싶은 거다. 빨리 말하거라, 나는 인내심이 없다.”

 

“...제발, 형...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쩌면.

 

다음은 레베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트리비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어쩌면 엘리나 피터나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겠지.

 

“나는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만, 이글.”

 

다이무스가 재촉해 왔다.

 

“사, 사랑해... 형, 사랑해, 진짜 사랑한다고!!!”

 

절박하게 소리 질렀는데, 어깨로 검이 찔러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음에도 신음소리는 흘러나왔다.

 

“형이 거짓말은 나쁘다고 누누이 얘기했잖느냐.”

 

사람 어깨에 칼을 꽂아 놓고서 안타깝다는 듯, 나쁜 아이를 야단치는 듯한 목소리로 혀를 찬다.

 

검의 날이 다시 반짝이며 빛을 반사했다.

 

이번에는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이글은 섬뜩해지는 느낌에 조금 더 필사적으로 다이무스를 올려다보았다.

 

“사랑해...”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사랑해 다이무스.... 흑... 흐으....”

 

“사랑한다고? 정말로?”

 

다이무스가 역겨우리만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제 앞에 무릎을 구부려 시선을 맞추고,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진심이야.. 흑... 사랑해... 정말로...”

 

문득 불빛에 비친 다이무스의 눈이 정말 자신을 죽일 수 있을거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시선을 마주치기 싫었다.

 

자신이 사랑한다는 것을 좀 더 말하고 싶어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정말로-”

 

“고맙구나 이글, 형은 기쁘다.”

 

다이무스가 웃었다.

 

치켜올라갔던 눈꼬리는 미미하지만 부드럽게 휘어졌고 입도 천천히 확실하게 웃는 모양이 되었다.

 

“기쁘다.”

 

푸욱.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소리가 들리고, 몸 가운데를 무언가가 가르고 들어온다는 느낌이 들고.

 

고통은 그 다음에 찾아온다.

 

이글 홀든은 모래바닥에 뉘여졌다.

 

이곳은 사냥터, 이 일은 없던 일이 될 것이다.




[다이글] 선물, 서투름

2014. 10. 2. 05:19 | Posted by 호랑이!!!

“다이무스 도련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오늘은 꽃이었다.

 

인근의 장미란 장미는 다 긁어모은 것인지 한아름도 넘는 꽃다발이 제 품에 안겼고, 방이 장미 화원이라도 된 마냥 장미로 가득차 온통 붉었다.

 

공사다망한 큰형은 종종 며칠씩 집을 비우곤 했는데 최근 들어 그런 날이면 이런 ‘선물’을 보내곤 하였다.

 

처음에는 새 옷(을 지을 재단사), 그 다음에는 최신 유행의 모자와 신발, 그 다음에는 은시계와 백금 시곗줄(아니, 크리스마스의 선물도 아니고 대체 왜?), 이오니아 산의 금빛나는 오렌지와 향긋한 포도주.

 

그리고 오늘은 장미라.

 

이글은 메이드가 나가자 품에 안았던 장미 꽃다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툭 찼다.

 

한껏 보기좋게 벌어진 연한 분홍색과 붉은색의 꽃잎이 바닥에 흩어졌다.

 

막상 집에 붙어있을 때는 담소는 고사하고 저녁식사 외에는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주제에 출장만 갔다 하면 특별히 가족애라도 생기는 건가, 웃기지도 않아서.

 

이글은 특별히 싱싱하고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골라 들고 한나에게 갔다.

 

“한나.”

 

“이글 도련님.”

 

“선물이야.”

 

가시를 쳐내고 잎을 잘라 다듬은 장미송이를 내밀고 한나가 앉으라는 얘기를 하기도 전에 테이블 옆에 의자를 끌어당겨 털석 앉았다.

 

“형이 이상해.”

 

“다이무스 도련님이요?”

 

“응-”

 

작은형은 항상 이상했으니까 새삼 이상한짓 한 대도 이상하지 않다구.

 

이글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곤 최근 받았던 선물에 대해 줄줄이 말하곤 짤막한 의견까지 덧붙였다.

 

“꼭- 남자가 여자 환심을 사려고 하는 멍청한 짓 같잖아. 조만간 직접 쓴 사랑시와 함께 반지라도 배달되면 딱이겠어.”

 

“또 가볍게 생각하는 거죠? 만약 진짜면 어쩌려구요.”

 

“뭐 어때~ 형 성격에 사귀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테고, 사랑하는 걸로 만족한다면 그러라고 하지 뭐. 내 용돈으로 살 수 없는 물건도 들어오는데.”

 

물론 내 용돈을 올려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이라며 시큰둥하게 앞주머니의 은시계를 꺼내 흔들었다.

 

진짜일 리가, 어디서든 인기 폭발하시는 그 다이무스 홀든이 이런 서툴러 빠진 짓을 할 리가 있나.

 

“조만간 비둘기 깃펜으로 쓴 사랑시가 도착하길 바랄게요.”

 

“뭐어-? 농담도!”

 

우웩, 기분 나빠.

 

이글은 킬킬 웃으며 다른 얘기를 꺼내려다 들리는 노크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노크 소리부터 절제된 인간은 자신이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나, 들어오라고 했더니 익숙한 얼굴, 다이무스 홀든이 들어왔다.

 

“이글, 네가 여기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유모.”

 

“어어- 나 여기 있어- ...?”

 

다이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엇을 봤는데?

 

시선을 따라가 보았더니 유모의 손에 들린, 자신이 준 장미.

 

아 설마.

 

아닐거야.

 

별거 아니잖아.

 

그 커다란 장미 다발과 방을 가득 메운 장미의 물결 속에서 딱 한 송이라고.

 

게다가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릴 적부터 키워준 유모인데!

 

아- 설마, 설마, 설마!!!

 

“저녁식사 시간이다. 이 내가 손수 널 찾아다녀야겠느냐.”

 

“나가, 나간다고.”

 

문을 닫고, 다이무스의 뒤를 따라가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화났다는 건 알겠다.

 

“...이글.”

 

“어, 어엉?”

 

“...장미 말이다, 싫던가?”

 

“에에, 그건 아닌데-.”

 

다이무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너를 생각해서 고른 선물이 함부로 다루어진다니 썩 기쁘지는 않더구나.”

 

함부로~?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까 장미 다발을 떨어뜨린 것도 있겠다, 찬 것도 있겠다, 거기에 보모에게 장미 준 것도 들켰고.

 

지금 한창 열받은 인간에게 변명을 해 봤자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밖에 안 되겠지.

 

아까 돌아볼 때 보니까 눈빛이 흉흉하던데 저기서 더 긁었다간 최소한 오늘 저녁은 다 먹었다.

 

다이무스는 팔에 달라붙는 이글의 팔에 힐끗 내려다보았다.

 

“형아야~”

 

다이무스는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가 들어가 착 달라붙는 것 같은 이 목소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 좋아해?”

 

농담의 껍질을 뒤집어쓴 속에는 이쪽을 바로 바라보는 시린 눈동자가 있었다.

 

심지어 떠 보는 것도 아닐 터, 의뭉을 떠는 것이다.

 

거기에 저 좋냐는 물음은 형제로서 갖는 당연스러운 호감을 묻는 것도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자신이 이것을 안다는 것을 이글도 안다는 것.

 

슬쩍 흘려버리는 일 따윈 불가능했다.

 

“...오늘 저녁은 다진 오리로 속을 채워 구운 송아지와 무화과를 넣은 케이크다.”

 

“형, 다이무스 형.”

 

이글이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내었지만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 질문을 무시하겠다고?”

 

“그렇다.”

 

이글은 다이무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째려보듯 날카로워진 눈이지만, 자신은 알고 있다.

 

다이무스 홀든, 저 천하의 냉혈한이 지금 자신의 질문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 아, 이거 정말 재밌는데.

 

놀리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

 

다만 형이 자신이 놀렸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만은 저도 모르니까.

 

제가 원하는 대로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면 좋겠지만 상처 입은 짐승마냥 달려들어 공격이라도 하면 저는 끝이다.

 

“형아~.”

 

“...”

 

“혀엉아아~”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처해하는 것이 다 보인다.

 

회피하지 않고 무엇에도 당당하게 맞서는 그 다이무스 홀든이 한낱 망나니 동생의 질문에 쩔쩔매다니, 이거 꽤 기분 좋지 않은가!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던 이글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밝은 식당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딱 다물었다.

 

시치미를 떼고 제 자리에 앉아 소스에 적신 송아지 요리를 덜어내는데 사용인 중 하나가 다이무스에게 무어라 전했다.

 

“뭐야, 형?”

 

“크리스티네가 물건을 전하러 왔다.”

 

헹, 퍽이나.

 

크리스가 진짜로 전하고 싶은 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겠지.

 

형이 그걸 모를까봐서- 아니, 모를지도.

 

모를거야 저 둔한 인간은.

 

이글은 속으로 히죽거리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크리스가 어떤 치마를 입고 왔을지도 궁금하지만 형아를 좀 더 놀려줄 것 없나 하여.

 

다이무스의 방문을 열었다.

 

빛깔 좋은 오크목의 책상이 깊은 색을 내며 자리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묵직한 펜이 있었고 양피지도 펼쳐져 있었다.

 

서류- 라기엔 빛깔이 좀 다른걸.

 

아니, 양피지도 아니잖아.

 

그냥 종이다.

 

그것도 빨간 하트와 리본 그림이 있는.

 

한창 아가씨들과 연인들에게 인기 좋다는 그거다.

 

“우와, 징그러.”

 

입 밖으로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그 냉혈한, 목석인 큰 형이 아기자기한 가게에 가서 이런걸 고르고 있다고?

 

“기분 나빠.”

 

뭔가 더러운 것이라도 집듯 손끝으로 편지지를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는데 뒤에서 뻗어나온 손이 그것을 잡아채 찢었다.

 

“이글.”

 

그 목소리에 이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형-...”

 

“식사중에 자리를 뜨는 것은 예의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아니, 형, 이건 말이야...”

 

“주인 없는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도 그렇지.”

 

다이무스의 표정은 얼음장 같았다.

 

읽어낼 수 없는데 냉기가 흘러나왔다.

 

다이무스는 손에 들린 상자를 내려다보더니 이글을 문 밖으로 떼밀었다.

 

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고 안에서는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이글은 그답잖게 일찍 일어나 식사 자리로 갔다.

 

여느 날처럼 다이무스는 셔츠와 조끼를 입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형!”

 

다이무스는 어제 같은 무표정으로 이글을 바라보았다.

 

“그... 있지... 잘 잤어?”

 

쭈삣쭈삣 인사를 건네며 맞은편에 앉았더니 대답 대신 신문을 거칠게 펴 든다.

 

“있지이, 내가 어제 기분 나쁘다고 한 건 말야...”

 

“되었다.”

 

“...형이 그런 편지지를...”

 

“되었다니까.”

 

신문이 파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쓸 줄은...”

 

파각.

 

신문이 반으로 접혔다.

 

“별로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형! 미안하다고! 내가 뭘 잘못했던!”

 

다이무스는 마시던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네 사과를 받아줄 기분이 아니다. 먼저 일어나마.”

 

다이무스는 자신의 방으로 가는 대신 서재로 갔고, 이글은 다이무스의 방으로 갔다.

 

아직 메이드가 청소하기 전인 방은 평소보다 어수선했고 바닥에는 나무판 조각이 널려 있었다.

 

이글은 벽난로를 보았다.

 

타다 만 종잇조각에는 빨간 하트와 리본이 그려져 있었다.

 

타다만 나무 위에는 어그러지고 녹은 은 목걸이가 있었다.

 

이 근처에서는 구하기 힘든 모양으로, 이글의 눈과 같은 색의 보석이 펜던트로 매달려 있었다.

 

형이 몹시 멀게 느껴졌다.

 

자신이 편안히 기대 응석을 부리던 관계가 마치 이 목걸이처럼, 자신의 손 안에서 우그러진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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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X이글X토마스] 고백

2014. 9. 15. 01:51 | Posted by 호랑이!!!

이글 홀든은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긴 머리카락 때문인지 머리가 무거워 일어나기도 힘들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하고 돌이켜 보면.

 

모처럼 좋은 일이 있어서 진탕 술을 마시고, 다들 제 갈 길 가고 토마스랑 단둘이 남아 다시 술을 퍼마시고.

 

그래, 토마스랑... 그리고... 여관에 가서... 가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렸고.. 샤워실 문이 열렸고...

 

하얀색 수건 하나만을 두른 토마스가 나왔었다.

 

뜨거운 물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그 하얗던 몸에 온통 홍조를 띄우고.

 

주저하던 것이 보였는지 안경을 손가락으로 끌어 벗으며 ‘무서우신가요? 도련님’...이라고 했었지.

 

...어제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토마스가 하얀 시트를 몸에 친친 감고 자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미치겠네.

 

내가 이런 꼬마랑 하다니.

 

이글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나 앉았다.

 

토마스는 말이 스물 하나지 영웅타령 하는 것이나 평소의 행실을 보고 있자면 사춘기도 오지 않은 새나라의 어린이 같으니 원.

 

이글로서는 토마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문제 이전에 어린애랑 섹스한 기분이라 영 꺼림칙했던 것이다.

 

봐라 봐라, 저 눈감고 입 우물우물 하는 거.

 

웃고 있네, 무슨 좋은 꿈을 꾸면.

 

인상을 찌푸리는데 토마스가 반짝 눈을 떴다.

 

“...잘 잤냐?”

 

“네, 좋은 아침이예요 이글 형.”

 

쯔쯔, 이글은 혀를 찼다.

 

얜 지금 아직도 술이 덜 깨서 자기가 무슨 짓 했는지도 모르는 거야, 기억도 못할 걸.

 

아무리 취했다지만 한 살이라도 많은 내가 어른스럽게 밀어냈어야 했는데.

 

그러는데 토마스는 몸을 일으켜 이글의 뺨, 입술 가까이에 자신의 입술을 댄 것이다!

 

“덕분에 좋은 밤 보냈어요, 먼저 씻고 나와도 괜찮죠?”

 

부끄러움도 없이 슥 일어나니 몸에서 이불이 스륵 흘러내린다.

 

술이든 열기이든 그것에서 벗어나니 이제 토마스의 몸은 다시 새하얘져서 이글이 멋모르고 하나 남겼던 빨간 자국은 그림의 인장 마냥 붉게 남았다.

 

“야, 뭐라도 걸쳐. 거기 샤워 가운 같은 거라도.”

 

“이런 곳에는 그런 거 없어요, 이글 형.”

 

제정신이구나.

 

도련님이 아니라 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제의 일은 하룻밤의 꿈처럼, 마치 찬물을 맞아 잠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아- 내가 미쳤지 미쳤지- 머리를 감싸고 앉아 오랫동안 자책하고 있으려니 수건 하나만 아랫도리에 두른 토마스가 밖으로 나왔다.

 

“형도 씻어요, 찝찝하지 않아요?”

 

“아, 아아, 씻어야지.”

 

따뜻한 물을 맞고 있자니 욕조에서 졸 것 같아 수도꼭지를 찬물 쪽으로 확 틀었다.

 

으하아악 차가워~!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며 부르르 몸을 떨고 가운이 없길래 수건 세 장으로 몸을 닦으며 나오는데 물기 때문인지 몸이 휘청한다.

 

잠도 술도 덜 깨서 넘어지겠구나! 했는데 토마스의 팔이 허리에 감겼다.

 

“괜찮아요?”

 

“어, 어어, 괜찮아.”

 

허리가 아플법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으켜주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옷을 입는다.

 

...하아?

 

순간적으로 꽤나 두근거렸는데 말이지.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이런데 두근거려야 해?

 

새침해져서 수건을 집어 토마스 쪽으로 휙 던졌다.

 

“난 이런거 해본 적 없으니까 네가 정리해.”

 

“네- 네.”

 

수건 치워줘, 눕고 싶으니까 이불 정리해줘, 겉옷 입혀줘, 목걸이 걸어줘.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도 싫은 내색 없이 네 네 한다.

 

화도 안 내냐.

 

이글은 드라이어를 다소 거칠게 내밀었다.

 

“머리 길어서 말리기 힘드니까 네가 말려줘!”

 

이번만큼은 토마스가 드라이어를 받는 손이 한 박자 늦었다.

 

혹시 화난건가 해서 슬쩍 눈치를 살폈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변해 얌전히 드라이어를 받아 주었다.

 

“알았어요, 말려 줄게요. 형 머리 말리면 형이 제 머리 말려 주시기예요?”

 

“엉~”

 

화나지 않았구나, 이글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흔쾌히 대답했다.

 

머리에 와 닿는 손이 생각보다 섬세하고 편해서 자연스럽게 만족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토마스의 머리를 말려주려는데 언제 자기가 남의 머리를 말려 봤겠냐고.

 

겉만 살살 말려놓고는 드라이어 바람으로 데워진 머리를 만져보는데 따끈따끈하고 폭신폭신해서 뭔가 다른 동물이라도 만지는 기분이었다.

 

신기해서 헤집으면서 놀다가 문득 거울을 보니 토마스가 이쪽을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보인다.

 

...고놈, 머리 내리니 꽤 어른스럽고 잘 생겼네.

 

이글은 마주 웃지도 못하고 고개를 팩 돌려 다시 머리를 말리는 일에 집중했다.

 

닭이 땅 헤집듯 헤집어놓은 데다 신기하다고 이래저래 만져놨더니 왁스로 머리를 만들어놓은 것처럼 잔뜩 서 있었다.

 

“으아, 이게 뭐예요, 새집?”

 

시덥잖은 농담을 나누며 웃지만 이글은 거울 너머로라도 토마스의 눈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차비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쩌면 토마스가 고백해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토마스가 연합 앞에서 고백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토마스가 연합 문 앞에서 키스할지도 모르고.

 

아침 삼으려고 토마스더러는 기다리라고 한 후 빵과 마실 것을 샀다.

 

생각보다 계산이며 흥정이 빨리 끝나 토마스 쪽으로 가는데, 토마스가 꽃 파는 소녀에게서 꽃 한 다발을 사는 것을 보았다.

 

하, 귀여운 녀석, 꽃이라니.

 

어린애 같으니라고, 꽃은 너무 티나지 않아?

 

장미나 백합이나 튤립도 아니고 저렇게 작은 꽃 따위 누가 받아준다고.

 

하하 속으로 웃었다.

 

토마스는 주머니에 꽃을 집어넣었고 이글한테서 주스와 빵을 받아들었다.

 

“와, 안에 햄이 들어있네요. 맛있다~”

 

“그렇지? 이거 저기에서 제일 맛있는 거야.”

 

하하 웃는데 실수로 주스를 떨어뜨렸다.

 

컵은 바닥에 떨어져 구겨졌고 내용물은 바닥으로 퍼져 버렸다.

 

“...”

 

신경질적으로 빵을 덥썩 베어물었더니 옆에서 컵이 내밀어졌다.

 

“...뭐야.”

 

“형 마셔요, 전 빵만 먹어도 되거든요.”

 

라면서 제 손에 억지로 주스컵을 쥐어준다.

 

“아, 그래도 가끔 한모금씩은 주셔야 해요!”

 

...뭐, 작은 꽃도 예쁘지.

 

아까 보니 하얀색이던데 하얀 들꽃 예쁘잖아.

 

연합이 보였다.

 

“토마스.”

 

“네, 이글 형?”

 

“아까 그 꽃 산 거 있잖아-”

 

그 때 문이 요란스레 열리고 엘리가 화다닥 튀어나와 토마스에게 안겼다.

 

“토마쯔 오빠!”

 

“안녕 엘리!”

 

토마스의 손이 조끼 앞주머니로 향하더니, 작은 들꽃 다발을 꺼냈다.

 

“자, 선물.”

 

엘리는 꽃다발을 받고 꺅 꺅 소리지르면서 폴짝폴짝 뛰어들어갔다.

 

“...아, 뭐라고 하셨어요 이글 형?”

 

이글은 몇 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러기를 수 차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활짝, 활짝- 웃으며 엘리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졸리니까 가서 잘게!”

 

억지로 웃는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휘어진 눈가가 감길 듯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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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날씨는 어떻지?”

 

“나도 모르네.”

 

카인은 탁자 위에 던져진 자신의 드라그노프를 보았다.

 

언제든 쓸 수 있도록 광이 나게 닦아둔 것이지만 지금은 얇은 먼지층에 덮여 있었다.

 

바깥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쳤지만 창문 너머로는 비라도 오는 것인지 어둑했고 추적추적 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늘 저녁에는 밖으로 나가고 싶네.”

 

방안은 어두웠다.

 

하나 있는 등잔은 따뜻한 오렌지 빛이었지만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빛이라 방안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까.

 

“간만에 중국 음식이 먹고 싶으이.”

 

“...생각해보지.”

 

여기 온지 삼일째던가.

 

마치 감금 같다.

 

그래서 카인은 한숨을 쉬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생각하다보니 울컥해서 허리의 끈을 끌러낸 후 총을 찾아 그것을 웨슬리의 입 앞에 바짝 들이대었다.

 

웨슬리도 순식간에 반응해 총을 꺼내어 든다.

 

“반응하는 게 늦어진 것 같은데 슬로언. 녹이라도 슬었나?”

 

“자네 입에다 처넣는 데는 아무 문제없다네, 스타이거.”

 

카인이 무어라 얘기하려 하자 웨슬리는 벌어진 입에 빠른 속도로 총을 쑤셔 넣었다.

 

입 안에 딱딱한 것이 들어와 혀를 누르기에 노려보았지만, 요 며칠간 더욱 지나치게 익숙해진 물건이라 이내 체념한 듯 눈을 감는다.

 

착하군 스타이거.

 

웨슬리는 슬그머니 미소를 띄우며 제 앞의, 카인의 총구에 쪽 입을 맞추었다.

 

“중국 음식은- 배달시켜도 되지 않을까?”

 

카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엔 웃어서.

 

둘은 서로의 총을 입안에 넣고 웃는 모양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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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마틴] 베이커리

2014. 9. 5. 04:38 | Posted by 호랑이!!!



마틴 챌피는 작은 베이커리의 종업원이다.

 

분홍빛 벽돌이 깔린 거리에 작고 아기자기한 마을의 아가씨들은 설탕 같은 목소리를 가진 금발 종업원을 만나기 위해 찾아와 케이크와 홍차를 시키곤 했다.

 

마틴은 오늘도 생크림과 딸기를 듬뿍 얹은 타르트에 향 좋은 홍차를 끓여 티 테이블로 가져갔다.

 

“딸기 타르트와 홍차입니다.”

 

세팅을 마치면 아가씨들은 저에게도 한 자리 내어준다.

 

마틴은 이러한 호의가 이성으로서의 호감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호감은 호감이지만, 그것은 목소리 때문에 얻은 것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유달리 민감했던 그라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아, 향 좋다.”

 

“음- 딸기에 설탕이라니, 달콤해~”

 

마틴은 아가씨들이 행복해하자 방긋 웃었다.

 

이 설탕 케이크와 홍차가 이 아가씨들이 하루에 누리는 것 중 가장 사치스럽겠지.

 

이런 귀여운 아가씨들의 이번 대화 주제는 낯선 이.

 

외부인이 적은 마을이다 보니 다들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한듯 싶었다.

 

“어투가 미국식이었어, 진짜 미국인일지도 몰라.”

 

“그 옷 봤어? 코트는 점잖지만 안에 입은 건 이상해.”

 

“맞아, 셔츠도 타이도 없고 색깔은 밝은 파랑색이잖아!”

 

“쇼 하는 사람일까? 노래나 마술 같은 거.”

 

“쇼 하는 사람의 옷 치곤 수수하던걸, 정말 정체가 뭘까?”

 

홍차잔을 꼭 쥔 채 아가씨들의 대화는 이제 특유의 로맨틱한 상상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경박하지만 다들 축제처럼 들떠있다고 하던 걸. ...어쩌면 있지, 미국의 왕자 같은 거 아닐까?”

 

“미국은 왕자 같은 거 없어, 바보.”

 

“아무렴 어때, 미국의 젊은 사업가가 영국 여행을 왔을 수도 있지.”

 

아가씨들은 꿈꾸는 것처럼 손을 모으고 상상이라도 하듯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는거야.”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왔어’... 꺄악!”

 

첫눈에 반한다던가, 운명이라던가, 그런 얘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둘 다 믿지 않으니까.

 

뭐, 금슬 좋은 부모님을 보자면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고, 흔히 볼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고 홍차 잔이 비워지면 아가씨들은 돌아가 버렸다.

 

귀족 집 아가씨들처럼 즐기고 싶어 하지만 결국 집안일을 도우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바라는 소박한 아가씨들이니까.

 

이제 빵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더 없으려나, 마틴은 주방을 정리하고 쓰레기 봉지를 꽉 묶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매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낮에 아가씨들이 말하던 이방인이 가게 안에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블론디.”

 

그리고 그 놀람이 가시기도 전에 여태껏 느껴본 감정 중 가장 특별한 것이 느껴졌다.

 

마치 깃털로 스치듯 간질거리고 한겨울 벽난로보다 따뜻하며 새로 만든 솜털 이불처럼 폭신폭신하고 새끼고양이의 가슴털만큼 보드라웠다.

 

짧은 말이었지만 미국식 억양임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는데, 그 미국인은 성큼성큼 걸어와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보고싶었소.”

 

마틴은 잠시 고민했다.

 

빵 반죽을 펼 때 쓰는 밀대로 때려야 할까?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몸을 떨어뜨렸다.

 

“...당신은 날 처음 보는 거겠군, 나는 릭 톰슨이라 하오.”

 

178센티미터에 70킬로그램의 나이스 바디에 33살, 코드명 타키온.

 

“사랑스러운 어트랙티브,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만큼이나 먼 곳으로 왔소이다.”

 

릭은 아직 얼떨떨해하는 마틴의 입술 앞에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처음은 아주 사소했지,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보자 싶었소.”

 

어릴 때의 나는... 그러니까 20대까지의 나는 몹시 겁이 없었거든.

 

죽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말야.

 

그래서 목숨 내놓고 한계를 시험해보자 한 거지.

 

그러니까 또 다른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되었어.

 

마틴은 감정 저편에서 처음으로 무언가 영상을 보았다.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 쪽에서의 저는 죽었나요?”

 

그러자 다른 모습들이 어두운 밤 강에 등을 띄우듯 나타났다.

 

모두 자신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방법이나 상황은 달랐지만 전부 죽어가고 있었다.

 

이 사람은 어째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서도 다음, 다음의 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나 무리하는 것일까.

 

마틴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릭을 만져 보았다.

 

따뜻하고 간질거리고 폭신한 느낌 너머로 아주 무거운 것이 느껴졌다.

 

아주 무겁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

 

아직 어린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이라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힘들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만약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요. 아프니까.”

 

그러자 깃 세운 코트에 파란 옷을 입은 그 사람은 과장된 몸짓으로 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종내엔 고개를 들고 밝게 웃어 보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전 다시, 수천번이라도 다시 그랬을 겁니다!”




[티엔하랑] 노래

2014. 9. 1. 20:57 | Posted by 호랑이!!!

“달빛 어스름 한밤중에-, 깊은 산-길 걸어가다...”

 

그랑플람 재단의 숙소는 크게 동양식과 서양식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동양식이라는 것도 꽤 그럴싸하여 하랑은 마루에 앉아 발을 까딱이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달도 더덩실 떴겠다 고향 생각도 났으니 한 곡 구성지게 뽑기엔 아주 그만인 밤 아니더냐.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가 방망이 들고서 에헤야 둥둥-.”

 

“잘도 부르는구나.”

 

아 깜짝이야.

 

“사부가 무슨 돗가비요? 소리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게?”

 

“그런 셈 치던가.”

 

“헤엥, 사부는 방망이도 없잖소.”

 

없긴 왜 없어.

 

그럼, 있우?

 

“육방망이가 있잖느냐.”

 

“이런 미친, 자기가 무슨 이몽룡인 줄 알아.”

 

모처럼 감상에 푹 젖어 있으려는데 파토가 났다.

 

하랑은 머리를 긁적이며 옆에 와 앉는 티엔에게 폭 기댔다.

 

“계속 불러 보거라, 그래서 도깨비를 만난 이는 어찌 되었나.”

 

“어쩌긴 뭘 어째,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지.”

 

부러 몸을 치대며 하랑은 팔을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켜는 척 티엔의 머리를 밀어내곤 그 다리를 베고 누웠다.

 

“흥이 다 깨졌수다.”

 

“...잘 부르더만.”

 

“옛부터 신한테 바치는 공물 중에 제일은 춤하고 술하고 노래라지.”

 

그래도 칭찬이라고 불콰하지 않아 하랑이 어깨를 으쓱 한다.

 

티엔은 무릎을 베고 누운 하랑의 머리를 쓰다듬는 체 하여 앞머리를 넘긴 뒤 허리를 숙여 이마에다 입술을 대었다.

 

“분위기 없는 소리를 하여 네 속이 또 삐딱해진 것인가.”

 

“‘또’는 빼시지, ‘또’는.”

 

옳다는 대답이라, 티엔은 속을 풀라며 몇 번이고, 하랑이 귀찮다며 일어나 앉을 때까지 입술을 대었다.

 

하랑아 삐졌느냐, 속 풀거라, 응? 하는 것이 그리 귀여워 보일 수 없어 하랑은 마침내 웃으며 앉았다.

 

“좀 풀렸느냐.”

 

“좀 풀리었소.”

 

“그럼 아까 그거나 다시 불러 보거라.”

 

“결국 제 원하는 것을 채우려는 속셈이었구만?”

 

키들거리는 웃음을 흘리는 그 눈매가 곱기도 곱게 휘어진다.

 

달도 훤하고 바람도 선선하고, 툇마루에 둘이서만 앉아 그리 좋을 수 없더라니.

 

하랑은 결국 그 사부를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티엔하랑/연령반전] 잠꼬대

2014. 8. 30. 19:46 | Posted by 호랑이!!!

좋은 사람.

 

정 티엔, 올해 열일곱이 되는 그가 그의 스승에 대해 가진 첫 번째 감상이었다.

 

양 팔에 희고 검은 반점을 가지고 태어나 다들 불길하다며 자신을 피할 때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거두어 주었다.

 

음양의 균형에 대해 어린 자신도 알 수 있도록 설명도 해 준데다 무술이며 몸의 균형을 위한 수련법도 가르쳐 주었다.

 

이름이 티엔이라 성은 무엇이냐고 묻기에 부모를 몰라 알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정’ 자를 주었고.

 

겨울이면 옛날 이야기, 여름이면 귀신 이야기, 재미난 이야기들로 밤을 보내었고 더운 날이면 글공부를 하다가도 천렵을 가자 이끌어서.

 

그래서 그가 스승으로, 형으로, 때로는 친우로까지 느껴지기도 했었다.

 

아아, 그것도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 때까지로.

 

마냥 행복했던 시절은 어느 유달리 잠이 오지 않던 밤 스승의 잠꼬대를 들으며 끝났다.

 

무슨 이유엔지 항상 옆에 붙어있던 스승은 잠잘 때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방에 있었고 자신은 그 말을 잘 들었지만...

 

어느 유달리 잠이 오지 않던 날, 몇 시간 자지도 않고 일어났었다.

 

밤은 고요했고 자신도 눈만 떠 어두운 천장을 보았다.

 

늘 시끄럽던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기이하다고 여기는데 흙벽 너머로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잠꼬대.

 

항상 웃었고, 의기양양했던 목소리는 간 데 없이 울음과 처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티엔은 깨달았다.

 

조선 사람이라는 그가 왜 중국 구석까지 왔는지.

 

수련하는 것은 자신인데 왜 사부가 수련이 싫다고 칭얼대듯 말하였는지.

 

왜 자신을 보는 눈에 때로 아픔이 깃들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어느 어렸던 밤부터 자신의 가슴에는 응어리가 생겼다.

 

“아-, 비오네.”

 

사부는 이제 저보다 작았다.

 

낼모레 서른이라고 하지만 장난기 넘치는 표정이나 놀자 하는 그 표정은 본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게 했다.

 

궂은비가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던 그는 땋은 머리의 끝을 끌어당겨 비비 꼬다가 역시나 ‘오늘은 놀자’며 샐쭉 웃어보였다.

 

“전이라도 부쳐 올까요?”

 

“술도 한 병, 너는 차 마시고.”

 

“알겠습니다.”

 

순순히 부엌에서 밀가루며 계란을 꺼내는데 밖에서 매캐한 냄새가 난다.

 

무슨 일인가 하여 밖을 보았더니 사부, 이 하랑이 긴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끝을 마루에 대고, 손으로 대를 잡아 입술을 둥글게 내미니 희뿌연 담배 연기가 흘러나와.

 

연기로 장막을 쳐 세상과 저 사이를 가르기라도 할 것처럼 넓게 뱉지만 바람에 연기는 흩어진다.

 

“사부님.”

 

“어엉? 기름이라도 떨어졌어?”

 

“담배 피셨습니까?”

 

“어어... 원래 피다가 잠깐 끊었었지.”

 

못된 장난질이라도 한 아이마냥 씨익 웃고 고개를 홱 돌려 다시 마당 구석께로 시선을 던진다.

 

"잔소리 할 사람이 없어졌거든."

 

앞으로 내려온 머리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태까지 그러했듯 웃는 것은 올라간 그 입꼬리 뿐일 것이었다.

 

"...연초는 몸에 나쁘니 적당히 태우십시오."

 

"..."

 

다시 담배 연기가 장막처럼 그를 둘러싸지만 비 섞인 습한 바람에 만들어지기 바쁘게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사부는 그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잡으려는 듯 다시 연기를 피워내고.

 

전을 접시에 담고 술병과 잔, 차 담은 주전자를 가지고 마루에 돌아와 앉았더니 냉큼 타박이 들어왔다.

 

"한 병 달랬다고 정말 한 병 가져오다니 정이 없다 티엔아."

 

"약주는 한 병으로 족합니다, 사부님."

 

"한 병... 아니 두 병 더 가져다 주렴."

 

"안됩니다."

 

"매정한 놈."

 

하지만 사부가 말과는 달리 속으로는 자신이 막는 걸 기꺼워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티엔은 그 점이 못내 못마땅하여 아예 술병도 빼앗았다.

 

이러면 사부가 화를 내지 않으려나.

 

그러나 사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수줍게 고개 돌려버린다.

 

살짝 벌어진 입새로는 옅게 연기를 흘리면서.

 

"화나지 않으십니까?"

 

"제자가 사부를 걱정해주는데 들어야지 어쩌겠어."

 

이번에는 티엔이 화낼 차례다.

 

차마 어깨조차 잡지 못하고.

 

바닥을 손으로 탕 쳐놓고도 사부에게 대든다는 사실에 외려 자신이 깜짝 놀랐다.

 

"사부님! 저를 누구랑 겹쳐 보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인지. 손에 쥔 술병의 향에 취하기라도 한 거냐?"

 

"거짓말 마십시오, 매번, 매일, 매 시각을 사부님의 사부였다던 그 분과 겹쳐서 보지 않으십니까!"

 

정이라는 성도 그 분 때문에 정해주신 것 아닙니까!

 

티엔은 화마를 억누르고 손을 하랑이 기댄 기둥에 대었다.

 

이제 한참이나 커진 덩치라 압도당한 하랑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렸다.

 

"저를 저로서만 보아 주십시오. 저는 사부님의 그 분이 아닙니다...!"

 

젠장, 하랑의 입이 움직였다.

 

"이러지 마..."

 

"저는 사부님의 사부가 아닙니다! 티엔이라는 제자입니다!"

 

"나도 알아, 넌 그냥 닮은 다른 사람인 걸!"

 

그러나 그 닮았다는 것은 단정하고 멀끔한 외향은 물론이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이며 사소한 습관-

 

그래, 예를 들면 일을 하는 순서라던가, 문득 눈이 마주치면 짓는 부드러운 눈웃음이라던가.

 

슬금슬금 옆에 다가앉아 찌르면 손을 덮는 커다란 손이라던가.

 

그런 말을 토하며 이마에 손을 얹는 것을 보고 티엔은 깨달았다.

 

그 분은 사부님과 정을, 그것도 연정을 통하던 사이였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티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한동안은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희뿌연 담바고 연기만이 둘 사이에 흐르고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하랑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담배 연기보다 옅게 흘러나와 바람 소리에 묻히는 말.

 

그리고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묻기도 전에 하랑은 생긋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럼 우리 티엔이 부친 전 맛 좀 볼까! 식으면 맛 없는데 벌써 식진 않았겠지- 야 티엔아 뭐하냐, 사부 술 좀 따르지 않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쩌면 평소 이상으로 밝은 목소리로 주저리 주저리 말하며 하랑은 젓가락으로 전을 쭉쭉 찢어 입에다 넣는다.

 

"하아 맛있구만! 역시 비 오는 날에는 전하고 막걸리지! 너 뭐하냐, 사부가 따라보라고 했는데."

 

"사부님은- 아니, 아닙니다."

 

혹시 제가 그 분과 닮아서 저를 거두신 겁니까.

 

제게서 그 분의 그림자를 보았기에 혹시라도, 저를 조금이나마 마음에라도 두시고 계십니까.

 

묻고 싶었지만 어떤 대답이 돌아올 지 무서워 잔에 묵묵히 술을 따른다.

 

"티엔, 너도 한 잔 받을테냐?"

 

"사양하겠습... 아니, 기꺼이 받겠습니다."

 

잔을 내미니 놀란 듯 하다가도 농담이었다며 야살스레 웃고 병을 채어 간다.

 

말없이 저분질만 바쁜데.

 

그 와중에 역시나 병은 하나에서 둘이 되고 둘에서 셋이 되고, 그것이 다섯이 되어 이건 너무 많지 않나 하는데 픽- 사부가 쓰러졌다.

 

남은 것을 간단히 정리하여 두고 방으로 옮기기 위해 몸을 들어올렸더니 잠꼬대인 듯한 말이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미안해 사부, 미안해-"

 

누군가를 찾던 잠꼬대는 언제부터인가 사과로 바뀌어 있었다.

 

티엔은 잠든 사부의 입술에 남몰래 입술을 대었다.

 

 




“야."


늦은 시각, 학교에서 돌아온 피터는 방 안에 떡하니 자리잡은 허연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부르셨어요, 형?"

 

“저 털뭉치는 뭐야.”

 

“닭이예요.”

 

혹시 학교와 집만 다니느라 산 닭은 처음 보는 걸까?

 

토마스의 고개가 갸웃거리자 피터의 미간은 더더욱 구겨졌다.

 

“누가 몰라서 물어? 저게 왜 방 안에 들어와 있는데?”

 

“엘리엇이 아까 개랑 싸우다가 다쳤어요.”

 

“다친 닭 같은 건 잡아먹어 버리면 되잖아. 암탉도 아니고 수탉인데.”

 

저게 뭐라고 이름까지 붙여?

 

고분고분했던 여태까지의 토마스를 보아 ‘잡아 버리자’고 했더니 놀랍게도 거부한다.

 

“안돼요, 엘리엇은 특별한 닭이라구요!”

 

“닭 같은 게 뭐가 특별해.”

 

“엘리엇은 다른 닭보다 울음소리도 멋있고 힘도 세고 머리도 좋다구요. 게다가 처음에 이 마을에 와서 개한테 물릴 뻔 했을 때 엘리엇이 구해줬어요.”

 

완고한 모습에 피터는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이름은 왜 하필 ‘엘리엇’인데?”

 

“멋있잖아요. 이름이.”

 

“...내 이름도 멋있어.”

 

그러나 영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라 어떻게 하면 멋있을 것 같냐고 은근하게 물었더니 주저주저하다 대답하는 것이 가관이다.

 

“피터우스 파니니 칭키스칸 3세 같은 거요.”

 

“무슨 근본없는 이름이야 그건. 애가 겉멋만 들어서.”

 

“...겉멋만 든 애라서 그래요.”

 

그러곤 칫! 고개를 돌린다.

 

삐진 것 같아 슬쩍 다가갔더니 모른 체한다.

 

“토마스.”

 

“...”

 

모른 체하고 닭의 상처 자리에 약만 바르기에 쓰윽 더 가까이 갔더니 모르는 척 하면서도 이쪽을 신경 쓰는 것이 너무 티가 나 웃음이 나올 정도다.

 

“...기다려 엘리엇, 모이랑 물 가져올게.”

 

피터가 바짝 붙는 것을 견디지 못한 토마스는 닭 모이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피터는 슬그머니 바닥에 끌릴 듯 긴 자락의 옷을 밟아버렸다.

 

콰당.

 

요란스레 넘어지는 소리가 나고 이렇게 세게 넘어질 줄 몰랐던 피터가 놀라 일으켜 보니 이마가 빨갛게 되어 있었다.

 

괜찮냐는 말도 못 하고 있으려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이쪽을 보다 팩 가버린다.

 

“...다 너 때문이잖아. 엘리엇인지 엘리인지 모를 닭 놈아.”

 

엄한 닭에게 화풀이 하고 있으려니 토마스가 들어온다.

 

“...야.”

 

“....”

 

“야, 토마스.”

 

“....”

 

“꼬마야.”

 

그러나 묵묵부답으로 닭 앞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그릇에 모이와 물을 부어준다.

 

눈은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너 그러다 다리 저려.”

 

“....”

 

“삐졌냐?”

 

“아니예요!”

 

삐졌구만 뭘.

 

삐져서 입 딱 닫고 꽁하게 있다가 삐졌냐는 말에 아니라고 냉큼 부정하는 것이 제법 아이다웠다.

 

지금까지가 상냥하고 어른스러워 귀여웠다면 지금은 신선하게도 어려 보인다고 해야 할까.

 

“삐졌지?”

 

“아니예요.”

 

“삐졌네.”

 

“아니라구요.”

 

“삐졌구만.”

 

“아니라니까요!”

 

어쭈, 이제 소리도 질렀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모습이 굉장히 귀여워 킥킥 웃던 피터는 토마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놀리던 것을 멈췄다.

 

토마스는 눈물을 흘리다 급기야 소리까지 내어 울더니, 딱 한 마디를 했다.

 

“형 미워요.”

 

둘 다 저녁이 되어 잠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피터의 돌아누운 등에 붙어 자곤 하던 토마스는 천을 감아 만든 엘리엇의 임시 둥지에 손을 올리고 잠들었다.

 

 

 

 

 

 

“토마스, 엘리엇은 어때?”

 

“아침에 물도 잘 마시고 모이도 잘 쪼았어요, 상처가 깊긴 하지만 곧 나을 것 같아요.”

 

재잘재잘 잘도 얘기하는 것을 보던 피터는 토마스가 평소와 달리 후다닥 일어나 닭을 보러 가는 것을 뚱하니 쳐다보았다가 옆으로 말을 걸었다.

 

“엘리엇?”

 

“그 왜, 토마스가 좋아하는 닭 있잖아.”

 

“꽤 마음에 들었는지 이름까지 붙여주더라고, 잡아먹으면 우는 건 아닐까 몰라.”

 

나 빼고는 다 알잖아.

 

피터는 남은 것을 입에 밀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토마스가 울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수업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주의도 받고 하였지만 토마스가 울던 모습과, 재잘거리던 웃는 얼굴이 번갈아가며 보이는 것 같아 수업의 내용보다도 어떻게 하면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것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결국 수업을 마치고, 피터는 장터로 발을 옮겼다.

 

아이들은 과자를 좋아하니까.

 

이 먼 길을 걸어 시장까지 와 놓고는 다른 것은 보지 않고 튀김과자만 한 자루 사서 발길을 되돌렸다.

 

나귀를 탈 생각도 하지 않고 걸어갔다 왔더니 늦은 시각이라 이미 해는 졌고 별이 총총하게 떠 있었다.

 

집에 미리 연락을 해두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찾느라 큰일이 날 뻔 했네.

 

한참이나 걸어 발은 물집이 잡히고 피곤했지만 이걸 받으면 다시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힘들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서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간단한 과일과 빵으로 요기한 뒤 제 방으로 가니 토마스는 이불 위에 이미 잠들어 있었다.

 

하기사 아직 한참 어린아이니, 잠이 많겠지.

 

머리맡의 닭 둥지에 팔을 얹은 건 싫었지만 다른 손에는 제 베개 귀퉁이가 잡혀 있어 자신을 기다렸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에 과자 자루를 보면 얼마나 기뻐할까.

 

과자가 든 자루를 머리 위쪽에 놔두고 자신도 이불 속에 들어갔다.

 

기대에 한참이나 뒤척거리다 간신히 잠들었건만.

 

다음날 일어났더니 자루는 찢어져 있었다.

 

애초에 질기지 않은 것이라 장닭인 엘리엇이 발톱으로 할퀴고 부리로 쪼니 헤쳐져서 과자가 반이나 아작이 나 있었던 것이다.

 

“...이... 멍청한 닭이...”

 

잡으려 했더니 다쳤다는 녀석이 퍼득퍼득 뛰고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다닌다.

 

그걸 잡는답시고 저도 방 안을 뛰어다녔더니 그 소란에 토마스가 놀라 일어났다.

 

아직 기뻐하는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데 이 닭이 자기 계획을 망쳐 버렸다.

 

저걸 꼭 잡아 국이라도 끓여 버리겠노라 생각하는데 토마스가 그 앞을 막았다.

 

“이 과자, 저 주려고 사 오신 거예요?”

 

속상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토마스는 부스러기를 치우고 성한 것들을 골라 빈 바구니에 옮겨 담고 양손으로 들어 제게 보인다.

 

“이것 봐요, 아직 이만큼이나 남았어요.”

 

이렇게 과자가 많은 건 처음 봐요, 정말 고마워요.

 

피터는 잠시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고 다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다음에 갈 때 하미과(멜론의 일종)를 사 올게.”

 

“정말요?”

 

“장식 구슬도 사 오고.”

 

참 착한 아이다.

 

이런 걸로도 기쁘다면야.

 

더 기쁘게 해주기 위해 피터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걸로 뭔가 만들어 줘, 항상 하고 다닐 테니까.”

 

그러고도 아직 부족한 듯하여, 뭔가 갖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다.

 

“가지고 싶은 건 없지만요 형.”

 

무거운지 토마스는 바구니를 옆으로 내려놓고 폭 안겼다.

 

“...밉다고 말해서 미안해요. 사실 형 하나도 안 미워요.”

 

아직 아기처럼 말랑거리는 몸에서 단 향내가 난다.

 

넘어질 때 부딪힌 이마는 괜찮으냐고 한참 늦은 걱정을 하면 토마스는 몸을 물렸다.

 

“아팠어요. 그러니까 호- 해줘요.”

 

후-

 

입김을 불어주면 그제야.

 

토마스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환한 웃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