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안, 왜 안된다는 거예요!”
“마리, 마릴린, 마릴린 오슬리테아. 여기에 ‘그런’물건을 두면 안되지. 여기는 그저 휴식을 위한 조용한 정원이라고.”
“이젠 아니에요.”
게다가, 이 정도는 그 작자들이 하는 데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라며 마릴린이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약하게 미혹하는 마법이 걸린 향낭을 차고, 같은 물건을 액체로 만들어 술이며 분수대에 뿌리면 마릴린을 찬양하는 향이 은근하게 흘러나와 사람들의 머릿속에 속삭인다.
유일한 적자인 황녀에게 웃어 보이라고.
마릴린 오슬리테아는 목에 건 로켓을 꽉 쥐었다.
10년 전 리안 오슬리테아가 암살당한 후 그의 차림은 날이 갈수록 화려하고 위압적이고 완벽하게 변해 갔지만 그 낡은 로켓만은 항상 그대로, 화려한 모슬린과 레이스 아래에서 그의 심장을 눌렀다.
금색과 적색으로 짙게 화장한 눈초리가 카디안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카디안은 분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를 어렵잖게 읽어내며 손짓만으로 분수에 섞인 향수 방울을 분리했다.
더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마리.”
“...‘린’이에요.”
“...마리. 나의 황녀님.”
“...”
“...네 정책은 훌륭해. 백성들이 여가 시간을 갖거나 행복을 느끼면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아는 머저리들도 솔깃할만한 이득이 있어. 너도 그걸 설득할만한 능력이 되고.”
그러니 이런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
그렇게 속삭이며 주먹을 꽉 쥐자 향수 방울은 그대로 사라졌다.
“...디안...”
마릴린은 정원 한쪽에 의자 대신 놓은 커다란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카디안은 자연스럽게 그 앞에 섰다가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 포켓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냈으나 마릴린의 손은 손수건 대신 반듯하게 정리된 그의 목깃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드리워진 그늘 아래로 금속 같은 빛을 내는 눈동자가 형형했다.
“닥쳐. 카디안 웨르제.”
“마릴린 님.”
“오빠 친구라서 좋게좋게 대해주니 진짜로 네가 내 오빠라도 되는 것 같아?”
부드러운 실크 장갑 아래에서 물어뜯은 손톱이 천을 긁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빌어먹을 잡놈이 내 오빠의 자리에 앉는 꼴은 못 봐. 오빠의 정책이 사장되는 꼴도 못 봐.”
오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개판이 되도록 놔둘 수 없어.
카디안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마릴린은 품에서 그 향수를 꺼내더니 몇 방울 남지 않은 것을 병째로 분수에 내던졌다.
반짝이는 병은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며 그 안에 든 분홍색 액체를 서서히 퍼뜨리고 분수에서도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
“나는 뭐든 할 거야. 온 나라의 귀족을 세뇌하고 유혹해서 내 꼭두각시로 만들어야 한다면 전부 내 손아귀에 쥐고 흔들 거야.”
카디안은 분수대에 빠진 유리병을 건져 왔다.
손수건으로 닦아 양 손으로 바치면 마릴린은 그 병을 한 손으로 받아 가방에 처박았다.
“하지만 마릴린 님-”
“황녀 폐하! 먼저 와 계셨군요. 오늘도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그 사이로 유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릴린은 언제 화를 내었냐는 양, 어느샌가 고귀하고 우아한 황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첫 손님을 맞았다.
“후후, 고맙소. 이 정원은 오라버니가 내게 준 것이니 늘 신경써 가꾸고 있지.”
사람이 늘어난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향에 감싸여 마릴린의 정책에 고개 끄덕이며 집중하고 찬성한다.
그 가장자리에서 카디안은 젊은 귀족층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마릴린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이 정원이 잘 가꾸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리안이 살아 있을 적, 그러니 10년 전에는 리안과 카디안이 늘어져 시며 연극을 토론하고, 때로는 종이 검으로 유치한 칼싸움도 하고, 아직 어린 마릴린이 어린이용 차와 과자를 가져오면 인형이 쓰는 헤드드레스나 턱받이를 맨 채 자그마한 컵을 들고 오호호 웃었지.
그들만의 장소였기에 바깥에서는 목까지 단추를 채우고 번듯하던 리안도 제멋대로 늘어져 눕고 마릴린도 오빠를 따라한다며 드러누웠다가 풀물이 다 들었었고.
이제는 리안의 마지막 모습만큼 자란 마릴린이 뒷배도 없이 혼자 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린 황녀님!”
“아름다운 린 님!”
“천사같은 린 황녀님!”
오빠의 장소에서, 오빠의 자리를 위해, 오빠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카디안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빠져나왔다.
“...린...”
네가 없으니 육체가 나이 들지 않는다.
너를 보고 하나씩 몸을 수선하면 그 바위에 옆으로 누워서는 ‘내가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라고 신기해했지.
나는 이제 한동안 이 모습으로 지내게 되겠구나.
“...아, 린.”
카디안은 정원을 떠나려다 구석에 숨겨진 아티팩트를 발견했다.
소리와 모습을 녹화하는 마법 도구다.
손 사이에 놓고 지그시 누르면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서서히 형체를 잃고 납작하게 변해 부서졌다.
“너는 멍청이야.”
저만치에서 이 파티를 훼방 놓기 위해 다가오는 황자 무리가 보였다.
육중한 군마 위에 올라타서 난폭하게 몰아대니 잘 가꿔진 잔디는 엉망으로 패이고 낮은 관목은 부러지거나 꼴사납게 가지를 떨어뜨린다.
저런 것이 작은 정원을 지나가면... 뻔하지.
“와하하하! 달려라 달려!”
“휘이이익! 다 비켜라! 다친다 다쳐!”
“거기! 비켜! 비키라고!!!”
카디안은 그들을 지켜보다가 저만치 놓인 정원 수레바퀴 아래의 쐐기를 없애버렸다.
흙과 태울 것들이 가득 실린 수레가 비탈을 따라 굴러오면 그 망나니들은 길을 막아서는 수레를 피하거나 걸려 날아가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다 발걸음을 돌리며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나더러 마릴린을 돌보라고 했어야지.
사람 없는 곳에 다다르자 손짓이 어둡게 빛나는 포털을 열었다.
인간의 목을 꺾어버리는 것따위 어렵지 않다.
저들을 없애버리고 마릴린에게 축복을 내려 황제로 삼는 것도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 린은, 리안은.
마릴린더러 카디안을 돌보라는 말을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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