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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타페드는 사방이 뚫린 것이나 다름없는 돌고래 주점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을 골라 앉았다.

 

돌고래 주점은 창문을 제외하고도 계단에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네 개나 있었으므로 어느 쪽으로 앉는다 한들 등이나 사각 중 한 곳은 드러나게 되어 있었기에 굳이 오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이 곳에서 제작 의뢰나 채집 의뢰를 받던 미숙한 모험자 시절에도 의뢰만 받으면 주점을 뛰쳐나가 어디든 구석진 곳에 쭈그려 앉아 제작을 했었지.

 

새삼스럽게 옛 생각을 하며 퀸타페드는 음식 몇 가지를 시켰다.

 

라노시아 특산품인 시트러스 류 과일이 듬뿍 들어간 과일 샐러드, 달걀이 올라간 피자, 그리고 품종 좋은 포도로 만들어진 포도주.

 

햇볕을 듬뿍 받고 자란 오렌지는 갓 껍질을 깐 것인지 온 샐러드 위에 단 향기를 뿌렸다.

 

레몬조차도 상큼하고 새큼한 향이 나기는 했지만 이걸 베어물면 단 맛이 날 테고.

 

씨만 솜씨 좋게 빼낸 올리브는 과즙이 들어차서 반질반질하게 빛났고 새까맣게 잘 익었다.

 

거기 섞인 포도는 까맣게 익어서 올리브와 헷갈릴 정도였는데 조금도 물러진 곳 없이 향긋하다.

 

퀸타페드는 준비된 식기를 밀어내고 손만 가볍게 씻은 뒤 냅킨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외지인을 위해 포크가 준비되긴 했지만 깨무는 순간 얇은 껍질이 툭 터지면서 과즙이 온통 줄줄 샐 테니 라노시아가 익숙한 모험가들은-혹은 현지인들이 선호하는 방식은 하나씩 손으로 집어먹는 것이니까.

 

하나씩 집어 입에 넣고 살짝 깨물면 얼핏 질긴 듯한 껍질이 갈라지고 혀 위로 새콤하고 단 즙이 주르르 흘러서 입 앞을 손으로 가린 뒤에 씹어 삼켜야 했다.

 

다음은 술.

 

한 잔을 주문했더니 이 해적 가득한 도시의 점원은 한 잔만요?’라는 눈빛을 하고는 유리잔 가득히 짙은 색 포도주를 따랐다.

 

퀸타페드는 배운대로 조심스럽게 림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고는 향을 한 번 맡았다.

 

다음으로는 혀 끝만 적실 정도로 조금 물고, 굴려야 했지.

 

하지만 역시 탄닌 향이 나고, 그 달고 맛있는 과일로 만들었다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쓰고... 이게 대체 무슨 맛이람.

 

이슈가르드에 처음 입성했을 때나 커르다스에서 헤매야 했을 때 감각을 둔하게 할 목적으로 술을 몇 번 마시기는 했지만 그 역시 필요에 의해 마셨을 뿐이라 역시 즐길 수 없었다.

 

라레타가 이런 걸 좋아하니 어떻게 취미라도 붙여보려고 했지만 수십여가지의 술을 마셔 보고도 자신이 구분할 줄 아는 것은 쓴 맛, 신 맛, 바각바각 맛 정도일까.

 

몇 달에 걸친 대장정이 끝난 뒤 라레타가 낸 술 알아맞히기 퀴즈에서 점수판을 받아든 퀸타페드는 대단하게 절망한 적도 있었다.

 

...이것도 맛은... 신 맛인가...? 거기에 쓴 맛이 있는...

 

일단 라레타가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저번에도 비슷한 맛이 나는 술을 한 병 가져갔는데 이게 아냐!’를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전번에 마신 거랑 비슷하지 않나...?

 

끙끙거리던 퀸타페드는 어차피 자신의 감각으로 고민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는 다시 점원을 불러 건포도가 있는지 물어보고 치즈와 같이 한움큼 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라레타가 좋아할만한 것을 찾으러 온 것이니 역시 제 혀는 믿지 말아야 겠습니다.

 

아무래도 전문가일테니 점원에게 추천 레시피가 있냐고 물어보는 수밖에.

 

그렇게 먹다 보면 비스마르크 레스토랑의 특기인 비스마르크 피자가 배달되었고 퀸타페드는 나이프를 들고 반숙 상태인 계란을 노려보았다.

 

이걸... 터뜨리지 않고 먹어야 할 텐데.

 

피자 조각을 사다리꼴로 자르면서 먹다 보면 가운데에 노른자만 남으려나.

 

여태껏 미동도 없던 꼬리가 스르륵, 뱀처럼 좌우로 한 번 물결쳤다.

 

뿔과 같은 재질의 뾰족한 비늘 끝이 나무로 된 주점 벽을 긁었다.

 

드득, , 단단한 케라틴이 몇 번이고 스치는데 근처에서 나무굽이 바닥 스치는 소리가 났다.

 

비늘 끝이 미세하게 일어서면서 움직임이 느려지고, 퀸타페드는 조용히 나이프를 들어 피자에 대었다.

 

반질반질하게 닦인 면으로 근처의 사람이 한 번씩 비추어지고 은색 날은 덜 익어 흐물거리는 흰자 속으로 파묻힌다.

 

걸음소리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지면 그제야 퀸타페드는 꼬리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

 

상대는 미코테 둘이었다.

 

하나는 라랑 헤어스타일이 닮았고, 하나는 머리카락 색이 비슷하네.

 

의도하지 않았지만 페드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저기요~”

 

우리 저기서 마시고 있는데, 같이 마실래요?”

 

...?

 

“...저 말입니까?”

 

!”

 

, 라 같은 소리 냈어.

 

혼자인 것 같아서요. 그 비술서를 보니 비술사 길드 사람이죠? 카벙클 부를 수 있어요?”

 

그제야 시선을 내리니 한 사람은 낚싯대를 허벅지에 매어 두었고 한 사람은 쌍검을 달아 놓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림사 로민사를 모체로 둔 길드끼리 친목이나 다져보자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한 손으로는 비술서를 펴고 다른 손으로 보지도 않고 수식을 적어내려가는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이 굴러갔다.

 

마지막 등호를 적어 답을 연산해내면 허공에서 빛이 갈라지며 노란색 카벙클이 데굴데굴 굴러나왔다.

 

, 파란색이 아니잖아? 노란색은 처음 봐. 진짜 불러줄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를 듣던 어느 때에, 비상한 퀸타페드의 두뇌가 한 가지 가설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까딱?

 

그들이 의문스럽다는 듯 귀를 까딱 움직였다.

 

라 닮았어.

 

라 보고싶다.

 

저는 결혼을 이미 했습니다.”

 

!?”

 

! 그렇게 안보인다냐!”

 

제법 공용어를 쓰던 쪽 역시 놀랐는지 냐투리가 튀어나왔다.

 

라는 냐투리 안 쓰지.

 

얼굴도 몸도 말투도 잘 삶은 달걀처럼 매끈매끈...

 

이미 애도 둘 있습니다.”

 

뭐다냐!”

 

, 조용히 해라냐... ...실례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그렇지만 냐투리를 쓰면 그건 그것대로 귀여울 것 같... 아니, 틀림없이 귀여워.

 

보통은 놀라거나 해야 냐 소리를 내는 것 같은데 라는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으니까.

 

그리고 굳이 놀래키고 싶지도 않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거나 하면 날 볼 때마다 긴장할 거잖아? 안 되지.

 

하지만 라가 침대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다던가... 그런데 보들보들한 꼬리를 살랑거린다던가... 그런데 졸린 듯이 눈을 깜박깜박 한다던가... 그러다가 눈이 마주친다던가... 하품을 한다던가, 고롱거리면서 배를 위로 하고 눕는다던가... 그러다가 냐- 한다던가...

 

어느샌가 미코테 둘은 떠나고 없었지만 퀸타페드는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꼬리가 무의식의 발로처럼 물결쳤다.

 

그 무의식은 꼬리와 뾰족한 끝을 무디게 할 생각도 않고 마룻바닥을 탕, 내리치기까지 했다.

 

저 사람 한 잔도 다 안 마시고 취했네!라며 점원이 뛰어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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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귈까?

2024. 7. 9. 00:30 | Posted by 호랑이!!!

 

 

A는 신나게 총질을 하다 차가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생각이 미쳤다.

 

잘 빠진 제 발이 액셀을 밟고 있으니 차야 어떻게든 구를 터지만 그 달리는 것은 제법 안정적이었다.

 

흔들림없는 총구가 그것을 증명한다.

 

여유부릴 때는 아니지만 옆을 흘끗 보자 태연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은 B가 있었다.

 

조수석에서 안전벨트까지 차고 잡은 터라 영 불편해 보였지만 표정만은 여느 때처럼 조금 짜증스러워 보이는 그대로였다.

 

상황이 정리되고 A의 비서인 C가 모는 차와 약속한 곳에서 만나게 되자 A는 손수 B의 차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B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구깃 구겨놓았지만 그런 표정을 하고서도 A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A는 차에서 내려 따라오는 차가 있는지 뒤를 살피는 B를 관찰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몸짓이군.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A가 더 잘 알았다.

 

총을 딱히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 더 가까웠다.

 

아픔도 느끼고, 그렇다면 두려움도 있을 터.

 

하지만 이건 제법.

 

B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A와 눈을 마주치더니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A는 그 눈빛을 받고 더없이 활짝 웃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사양 말고 더 먹어.”

 

B는 자신의 잔에 와인이 차오르는 걸 감흥없는 눈으로 보았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B는 스스로를 퍽 단순한 인간으로 생각했다.

 

한 병에 월급 두 달 치인 와인이건, 여태 평생 올 일 없었던 라운지에서 음식을 대접받건.

 

특별히 해가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보니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어서 먹어봐. 잘라놨어.”

 

대체 언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것을 멈추고 B는 깔끔하게 잘린 튀김...같은 것을 입에 넣었다.

 

...이건 맛있네.

 

건너편에 앉은 A가 어쩐지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지만 B는 거기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잠시 음식에 감탄했다.

 

음식을 배 채우는 이상의 용도로 생각해본 적은 적은데.

 

다음 몇 조각을 입에 묵묵히 밀어넣는데 A가 와인을 삼키더니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럼 이건 용건인데, 내 회사에서 일하는 거 어때.”

 

싫어요.”

 

바삭.

 

월급 두 배. 연차도 두 배로 줄게.”

 

어제 한국에서 총격전을 보게 해놓고 승낙할거라고 생각합니까?”

 

이럴수가, 연애할 때도 이렇게 마음 쓴 적은 없는데.

 

당신이 하는 건 연애가 아니니까 그렇죠.

 

그렇게 핀잔을 준 B는 와인으로 입가심하고 잔을 내려놓으려다 다시 들어올려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일자리는 왜 거절하는데?”

 

합법적이고 안전한 데서 일하고 싶습니다.”

 

합법적이고 안전한 일 하게 해 줄게.”

 

연차에 월급 두 배.

 

당연히 어제의 그런 위험한 일 시키려고 그러나?했건만 그조차 아니었다.

 

입막음인가? 하지만 그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럼 당신이 얻는 이득은 뭐가 있습니까?”

 

글쎄... 나랑 연애할까? 나는 B한테 좋은 일자리를 주고, B는 나랑 연애를 하는 거지.”

 

B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A를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부자 놈의 이상한 취미 같은 건가보다.

 

만화책에서도 보면 돈이 너무 많은 재벌 같은 사람은 거대한 데스 게임도 만들고 이상한 쇼 프로그램 같은 것도 만들고 하지 않던가.

 

사람 죽는 것보단 연애 쪽이 차라리 온건한 편이긴 하겠지.

 

B는 으깬 감자를 삼켰다.

 

그럽시다.”

 

! 좋아. 그럼 계약서부터 쓸까?”

 

그럼 취직 쪽부터 쓰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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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님... ...”

 

“...형제님...”

 

어딘가 곤란한 듯, 망설이는 듯이 부르는 소리에 크나트는 길게 하품했다.

 

“...으응... 달링...?”

 

“...이 새벽에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으으음...”

 

크나트는 제대로 눈뜨지도 않고 얇은 허리를 더듬었다.

 

그러나 율리안은 넓적한 손이 닿자 조금 움찔했을 뿐, 피하지도 야단치지도 않아서 크나트는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문지르다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야한 상황인가?”

 

“...아닙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에 곤란해보이는 얼굴 윤곽이 드러난다.

 

이런데 왜 야한 상황이 아니지? 크나트는 반쯤 몸을 일으킨 율리안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시계를 확인하였더니 새벽 네 시.

 

네 시에 율리안이 자신을 깨울 일이 있나?

 

역시 야한 상황 아니야?

 

섰어?”

 

“...아닙니다. 그게... 이 시간에 정말 실례되는 이야기지만... 갑자기 폰 프라이모에서 파는 칠리 프라이즈가 너무 먹고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안 될까요?”

 

칠리 프라이즈 맛있지.

 

감자튀김에 새콤달콤한 칠리 소스를 듬뿍 뿌리고 두 가지 치즈를 쌓아서 오븐에 녹여 준다고.

 

율리안은 거기에 다진 고기를 추가하는 걸 좋아하지.

 

몇 유로 더 내면 나초도 먹을 수 있고.

 

세트로 된 것을 시키면 맥주나 탄산음료도 마실 수 있었다.

 

이 새벽에 갑자기 먹고 싶어서 눈을 뜨다니, 건강하기도 하지.

 

그보다 율리안이 뭔가 먹고 싶다고 자신을 깨우다니 기특도 하고,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 율리안이 이 시간에 심지어 자신을 깨워서 말을 하겠어.

 

크나트는 대충 바지를 꿰어 입고는 자동차 열쇠를 꺼냈다.

 

폰 프라이모가 24시간 영업이라 다행이다.

 

차로 30분만 가면 되니 전화로 주문만이라도 먼저 해 둘까.

 

이전번에도 잘 먹는다 싶더라니 역시 마음에 든 모양이지.

 

슬쩍 돌아보았더니 율리안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율리안은 큰 손이 덥썩, 제 뺨을 잡고 이마에 입맞추는 것을 가만 두었다.

 

잘 관리된 자동차는 이 새벽에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 볼륨으로 시동이 걸리더니 스르르 떠났다.

 

이 새벽에 갑자기 그런 게 너무 먹고 싶어지다니.

 

면목이 없는 걸.

 

율리안은 멋쩍은 얼굴로 몸을 일으킨 채 헝클어진 침대를 정리했다.

 

다녀오는 데에는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지금은 일어나서 방 정리도 조금 하고 식탁도 미리 차려 놔야-

 

하암, 율리안은 하품을 했다.

 

테이블 매트만 미리 깔아 두고...

 

삼십분만 자고 일어나자 역시.

 

율리안은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다시 푹신한 베개 위로 쓰러졌다.

 

 

 

 

 

한 손에는 폰 프라이모의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를 든 채, 크나트는 불 꺼진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율리안이 자신을 내보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혹시 필요한 것이 음식 같은 게 아니라 자신을 집 밖으로 내보내는 일 그 자체였나?

 

크나트의 손이 품 속의 너클로 향했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게 칠리 프라이즈를 식탁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크나트는 안방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 하나 없이 열린 문 안은 자신이 나가기 전과 거의 같았다.

 

잘 닫힌 커튼.

 

천장에 잘 매달린 커다란 텔레비전, 마찬가지로 잘 닫힌 욕실 문.

 

조금 더 문을 열면 멀쩡한 침대가 보이고, 그 위에 엎어진 율리안이-

 

달링?”

 

급히 다가가면 숨을 쉬고 있다.

 

덧붙여서 그저 잠든 것 뿐인 것 같고.

 

한동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크나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냉큼 율리안을 바르게 눕혔다.

 

그 서슬에 깬 율리안은 길게 하품을 하다가 자신이 사람을 새벽에 내보내놓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들었다는 것에 화다닥 일어나 앉았다.

 

, 죄송합니다. 얼른 식탁이라도 차리겠습-”

 

누워있도록 해. 당장.”

 

아닙니다. 혼자 잠들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율리안은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뜨뜻한 손이 자신을 눕히자 반쯤 뜬 눈으로 진지해 보이는 크나트를 올려다보았다.

 

프라이모는 데워 줄테니 내일... 자고 일어나서 먹도록 해.”

 

“...그렇다면 정말 죄송하지만 먼저 수면을... 하아암. 저도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임신 초기에는 잠도 많이 오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 걱정 말고 자.”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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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2024. 4. 15.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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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갈리엔/데임] 오지 마!

2024. 2. 17. 20:22 | Posted by 호랑이!!!

 

아니, 우린 왜 여기로 갑니까? , 목적지는 저 쪽이라면서요? 그런데, , 굳이 둘러서 갈 이유우와아아악!”

 

비명과 함께 청년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낙엽도 눈도 없는 흙바닥에 경갑까지 착용한 몸은 우당탕 소리까지 요란해서 숲 안쪽의 무수한 생물들까지 다 깨울 것 같았다.

 

어디에선가는 눈이 녹아 개울이 졸졸 흐르고 여기저기에서 작은 싹이 터 녹색이 점점이 찍힌 땅의 평화로운 한때를 깨뜨리며 식식거리는 청년 곁으로 회색 털에 쫑긋한 귀를 가진 청년 둘이 와 섰다.

 

넘어지더라도 조용히 넘어져야 한다니까-?”

 

입을 막고 넘어져, 입을~”

 

갑옷 소리도 안 나게 말이야!”

 

, 그런... , 허어... 가능, 하겠! 습니까!”

 

넘어진 청년, 웨일런의 주위를 맴돌던 두 마리 청년은 그의 항의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둘은 어딘가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렸는지 동시에 귀를 까딱 움직이더니 그를 놀리던 것을 멈추고 물을 뜨러 간다, 나뭇가지를 줍는다더니 분주한 꿀벌처럼 윙윙거리며 떠나갔다.

 

, 드디어 혼자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위에 웨일런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불을 피울 자리를 잘 고르고 낙엽이며 이것저것을 긁어모아 쌓았다.

 

고요하다.

 

명예로운 일인데다 변방에서의 생활을 동경해 스콜드로 지원을 했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지만... 창문조차 작은 좁은 건물 안에서 복닥복닥하게 여럿이서 생활하는 일은 영 좋지 못했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정말로 좋은 거였구나.

 

부싯돌을 딱 딱 맞부딪치면 자그마한 불꽃이 튀고 그게 지푸라기에 옮겨붙기를 기다리는 작업은 단순해서 금세 빠져든다.

 

불꽃이 쏟아지는 것을 멍하니 보는데 문득, 시야 가장자리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적인가?

 

아니면 식인을 하는 동물?

 

제길, 비스와 틸은 어디까지 간 거지?

 

불을 피우느라 숙인 시선 가로 다시금 흰 것이 스쳐지나갔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였다.

 

뻣뻣한 털로 뒤덮인 흰 꼬리다.

 

비스나 틸, 부대 사람들은 회색 털인데.

 

녹색이끼나 검은 흙에서는 지나치게 눈에 띌 법한 색이었다.

 

웨일런은 나뭇가지와 반쯤 썩은 잎을 그러모아 불을 키워보려고 했지만 큰 육식동물이 제 주위를 맴돌 때는 갑작스럽게 움직이거나 큰 소리를 내면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사이, 다시금 시야 끝에 흰 털이 스르륵 움직여 사라진다.

 

이 마물은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피를 빨기 전에 가지고 노는 것인가.

 

틀림없어!

 

그러나 이 몸은 스콜드라고!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으냐!

 

땅에 내려놓았던 창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고, 허리춤에 찬 검을 확인한다.

 

조금씩, 조금씩.

 

제기랄,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나를 보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군.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끝이 창대에 닿은 순간 그는 이대로 손이 붙어버려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창을 바투 쥐고 등 뒤의 적을 향해 홱 돌아선다.

 

으이야아아악!”

 

그 순간, 손이 창대를 쳐서 그렇게 강한 힘이 아닌데도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마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그가 창대를 가볍게 밀어내고 떨어뜨릴 때에서야 웨일런은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희어서 겨울이라면 그가 제 앞으로 똑바로 걸어온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녹지 못한 눈처럼 생긴 중년의 이는 다시금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더니 친근함을 표시하듯 웨일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는 꾸욱 눌렀다.

 

아저씨!” “삼촌!”

 

때마침 비스와 틸이 쏘아지듯 날아와 그의 품에 안겼다.

 

풍성한 꼬리가 살랑거리며 기분 좋은 바람을 만들었다.

 

그는 방금 웨일런에게 한 것처럼 이마를 두 젊은이에게 번갈아 기대고 놓아주었고 두 사람은 신이 나서 어린 새끼들처럼 그 곁에서 장난을 치고 폴짝거렸다.

 

저기, 처음 뵙겠습니다...? 얼마전에 부대에 합류하게 된 웨일런입니다.”

 

남부 억양인데. 거기 출신?”

 

, . 항구 쪽이요.”

 

흉터가 남은 얼굴이 제법 매끈한 것과는 달리 목소리는 대화할 일이 없었던 것처럼 거칠었다.

 

그의 목이 쇠로 줄을 한 현악기였다면, 한 번 켤 때마다 쇳가루가 부슬거리겠지.

 

삼촌, 그게 아니지-.”

 

아니지~!”

 

그러자 그는 비스와 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무슨 의도인지 짚어낸 둘은 스스로를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이름!” “이름-.”

 

“....”

 

이해해줘, 삼촌이 새로운 사람이랑 만나는 일이 없거든.”

 

“...‘별로없는 거지.”

 

옛날에 황궁에 간 적이 있다는데 그 때 너무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난 부작용일 거야.”

 

맨날 이런 데 틀어박혀 있어서 그런 거야, .”

 

그는 신나서 까불어대는 두 청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꼬리로 그들의 종아리를 철썩 쳤다.

 

이히히히.”

 

아야야야-”

 

두 마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무 둥치에 걸터앉자 그는 웨일런이 넘어지며 부딪친 다리를 잡아들었다.

 

부츠를 벗기고, 발과 다리를 살피는 중 나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아저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혼자 따로 나와 산다? 그래서 이 쪽으로 온 거야.”

 

여기 혼자 산다구요?”

 

응 응, 마수도 혼자 잡고-”

 

마수우? 이제는 없지 않습니까? 없다고 들었는데!?”

 

대답을 요구하듯이 그 쪽으로 보았지만 그는 귀만 한 번 까딱할 뿐 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답은 두 명에게서 나왔다.

 

요즘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릴 때 본 적 있거든- 그냥 덩치 큰 동물 같은 걸 생각하면 안돼.”

 

물론 덩치도 크지만!”

 

이만한 거- 이만큼- 하면서 팔을 벌려보이는 둘에 웨일런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가 봄임에도 여전히 낡고 부드러운 가죽옷을 입은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혼자요?”

 

그는 웨일런과는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젠 나도 가능하지.”

 

나도라니?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가 가까이에서 고개를 돌리자 웨일런은 또 한가지 차이점을 발견했다.

 

스콜드 부대원은 이제 봄이라며 머리를 잘랐고, 여름에는 깎는다고 들었는데 이 사람은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와 아직도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웨일런의 다리가 괜찮으니 이제 다시 이동하라고 이야기하였지만 아직 해가 빨리 지는 데다 배가 고픈데다 삼촌 집에 가고 싶은데다 부상자가(아닙니다!) 있다며 조르는 두 청년에게 격침당하고 작은 오두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의 겉에는 이끼가 앉고 작은 새가 둥지를 튼 흔적도 보인다.

 

문을 열자 향긋하게 마른 풀 냄새가 훅 끼쳐왔고, 아담하고 정갈한 첫인상과는 달리 약초며 건조식량이며 털가죽 같은 것이 잡다한 물건과 뒤섞여 영 엉망진창이었다.

 

웨일런은 손으로 깎은 듯한 장식적인 창틀을 구경하려다 천장에 덩굴같이 매달린 돌멩이에 이마를 부딪쳤다.

 

으악!”

 

조심해! 여긴 완전-”

 

전쟁터 같다니까?”

 

그의 손가락이 벽을 툭툭 두드렸다.

 

그들이 사용하는 모종의 신호인 듯했으나 두 청년은 못 본 체, 못 들은 체를 하며 이 어지러운 방안에 대해 곰팡이가 핀다니, 딱정벌레도 도망간다니 찧고 까불다가 그가 팔을 들어올리고 덤비자 엉망인 방 안에서 도망을 다니며 더욱 엉망으로 만들었다.

 

깔깔거리며 웃고 털이 흩날리는 한 켠에서 웨일런은 다시 방안을 찬찬히 구경했다.

 

잘 말린 나무로 창틀을 만들고, 탁자와 침상을 만들고, 선반을 깎은 것들은 오래 손을 탔는지 반질반질했고 오래 공을 들였는지 곰, 늑대, , 왕관, 전설 속의 거인 같은 문양이 다채롭게 아로새겨져서 실내의 불에 음영을 드리운다.

 

비스의 꼬리를 밟지 않게 조심하고, 틸의 다리를 걸지 않게 조심하면서-그는 발을 걸라고 소리쳤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움직이다 무언가가 웨일런의 시선을 끌었다.

 

이 집안에서도 화려하게 조각되고 채색된 나무 상자.

 

비스듬하게 열린 안에서는 가장 낡은 천으로 감싼 것이.

 

웨일런은 머뭇거리다가 녹은 촛대와 깃펜 덩어리를 살짝 밀어내고 손가락 끝으로 뚜껑을 들어올렸다.

 

내용물은 병 몇 개... 정도였다.

 

안에 든 것은 금 같았지만 상자가 움직이자 마치 액체처럼 기이하게 흔들렸는데-

 

달칵.

 

장갑을 낀 손이 뚜껑을 눌렀다.

 

주인의 물건을 허가도 없이 들여다본 셈이므로 웨일런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튜 그릇을 받아 들 때엔 결국 물어보고야 말았다.

 

연금술사인가요?”

 

, 연금술사?” “그게 뭐야?”

 

제가 스콜드에 합류하기 전에 연금술이 유행했었거든요. 돌을 무슨 금으로 바꾸는 거라던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두 젊은이들이 그릇이나 솥을 씻는다, 자리를 정돈한다며 돌아다니자 그럴 필요 없으니 잠이나 자라고 핀잔을 했다.

 

아무튼 그런 것과는 상관 없어. 나는 날 때부터 스콜드였으니까. 조만간 사용해야 하는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거든.”

 

그런 것치고는 너무 허술하게 둔 것이 아닌가.

 

솥에는 물을 담아 불 위에 걸고 벽난로 안에는 장작 몇 개비를 더해 잘 준비를 마치면 그가 나눠주는 모포와 가죽을 덮고 그들은 제각기 자리를 잡고 웅크렸다.

 

웨일런은 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올 듯 반짝이는 무수한 별과 손에 잡힐 것처럼 뚜렷한 흰 달빛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저 병에 담긴 것들은 어디에 쓰는 것인지 하는 궁금증이 들었으나 이미 주위 사람들은 잠이 든 뒤였다.

 

장작이 거의 다 타고 불빛이 사그라들던 어느 때에, 웨일런도 잠들었다.

 

 

 

 

 

 

 

잘 자네.”

 

이봐, 일어나. 이제.”

 

흐으어...?”

 

웨일런은 눈을 떴다.

 

어제의 지저분한 집안은 비스와 틸이 청소를 해 놓은 것인지 제법 정돈되고 비질되어 깨끗해져 있었다.

 

내 책상 건드리지 말라니까!”

 

아저씨 그 상자는 안 건드렸어!”

 

걱정 말아요~ 우리가 한두 번 온 줄 알구.”

 

이 망나니 녀석들!”

 

나 배고픈데. 밥 주세요!”

 

고맙다고? 별 말씀을~”

 

그는 두 젊은이를 향해 으르릉거리긴 했지만 결국은 부엌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이 나이가 되니 온몸이 삐걱거린다며 팔다리를 쭉쭉 뻗고, 신선한 새 알과 비스킷과 과일 같은 것을 잔뜩 내 왔다.

 

이거 먹고 가고, 다음부터는 오지 마. 와도 내가 없을 거야.”

 

? 어디서 지원 요청 들어왔어?” “?”

 

너흰 몰라도 돼. 어른들하고는 얘기 다 해놨으니까 그렇게 알고.”

 

그런 게 어딨어!”

 

우리도 인젠 어른인데!”

 

그는 코웃음으로 그들의 항의를 일축했다.

 

“...그건 그렇고, 이젠 좀 살만하다지만 스콜드에 자원하다니 특이한 녀석이야.”

 

꼬리가 등을 툭 치는 바람에 웨일런은 마악 입에 넣으려던 딸기 비슷한 과일을 떨어뜨릴 뻔 했다.

 

스콜드, 멋지잖아요.”

 

“...우리 때는 그런 취급이 아니었는데.”

 

그는 비스가 마악 베어물려던 과일을 빼앗아 크게 한 입 깨물었다.

 

와사삭 하는 시원스러운 소리가 나고 으적으적 씹히는 소리가 이어진다.

 

나중에 혹시 오거든, 기억해. 저 쪽에 약이 있고 저 쪽에는 건조 식량, 뒤편으로 나가면 샘이 있어.”

 

아저씨 보물은 더 없어?”

 

“...마쟈, 부대, 에 있는 그 엄청 화려한 공... 같은 거.”

 

어이구, 하고 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다음에 가면 가구 장식 좀 뜯어 올게.”

 

에이!” “에이이-”

 

짜식들이, 라며 그는 틸이 집던 비스킷을 낚아챘다.

 

그 투닥거림은 그들이 뒷정리를 하고 짐을 싸서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이제 우리 갈게!”

 

오지 마, 이젠!”

 

우리 보고 싶을 텐데!”

 

안 보고 싶어-?”

 

그 말에 그는 그 둘을 쳐다보다가, 양 손을 주머니에 꾹 찔러 넣었다.

 

빨리 가기나 해!”

 

에이이-” “-”

 

웨일런은 묵직한 짐을 어깨에 고쳐 지고는 끈으로 한 번 더 고정했다.

 

저 녀석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생각 없고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가고 단순하고 멍청하지만...”

 

다 들려!” “코앞에서 뒷말하다니!”

 

“.........아마도, 착한 애들이니까...”

 

아마도라니! 하고 항의가 이어진다.

 

웨일런은 웃었다.

 

잘 지내십시오. ....”

 

데임.”

 

잘 지내세요, 데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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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느낌으로 어쩌구

2023. 10. 16. 01:45 | Posted by 호랑이!!!

 

웬일이야.”

 

바질 실버루트는 전서구가 물어다 준 쪽지를 다시 눈높이까지 들어 읽었다.

 

오늘 수업은 빠질게. 좀 쉬려고 디디-

 

바질은 쪽지를 뒤집어도 보고 빛에 비추어도 보았지만 디에고 드라질리 특유의 날림체 외에 다른 문장이 숨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픈가?”

 

디에고 드라질리가 아플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 세상은 넓고 수많은 일은 일어나니까.

 

오늘의 방과 후에는 승마회가 하나, 저녁에는 독서클럽, 밤에는 마력학 복습을 하고 갈릭의 정령생태학 이론을 봐 주기로 했지만 얼마 전에 자신이 아플 때 디에고가 이것저것 해 주었던 일이 있으니까.

 

바질은 쪽지를 잘 접어 아카데미 제복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10월이었다.

 

이번 주에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게 인턴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1지망에서 3지망까지 황궁 마법부, 황궁 행정부, 황궁 소속 마탑으로 전부 황궁 지망이었고, 때문에 디에고와 한 내기도 다음 주가 마지막이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정확하게는 엿새.

 

자의식 과잉에 공부만 잘하지 멍청하고 제멋대로고 나태한 녀석과 지낸 것치고는 꽤 즐거웠지만 역시 얼굴만으로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구나.

 

상가에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입구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바질은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매고 와이셔츠를 정리한 뒤 낑낑거리며 커다란 냄비를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퍽석.

 

들고 있던 도자기 그릇이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감기에 좋다는 남부식 스튜가 피처럼 붉게 복도를 물들였다.

 

차라리 사 오길 잘 했어.

 

이걸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 비참했으리라.

 

바질은 눈 앞에 펼쳐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굳은 채 방 안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얽혀 있던 실루엣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떨어지자, 그제야 바질은 뒷걸음질을 쳤다.

 

아마도 디에고는 무어라고 소리쳤겠지만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디에고 옆에 있던 건 페퍼였어.

 

페퍼가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을 비웃을 게 뻔했다.

 

몸을 돌리고 바질은 달렸다.

 

멍청한 짓이야.

 

바질이 내심으로 속삭였다.

 

자신이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발이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뭐라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우리는 아무 사이 아니잖아, 그렇지?

 

비록 우리가 오십하고 오 일이나 연인처럼 다니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내기잖아.

 

내기였잖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뒤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바질은 그 옆의 비상계단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계단은 불이 어둑했다.

 

담배 금지 마법이 걸린 후로는 누구도 오지 않았는지 딱딱한 구두굽이 디디는 소리만 공허한 공간에 울린다.

 

달칵.

 

뛰어내려갈 때마다 앞에서 불이 켜졌다.

 

그 앞은 어둡고, 계단 아래는 더욱 어두워서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소매가 잡혔다.

 

잠깐만! ...... 오해야.”

 

바질은 여전히 돌아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디에고는 소매를 꽉 쥐고 숨을 헐떡였다.

 

하아! 후우, ... ...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안 했어.”

 

목이 메었다.

 

소매를 당겨 보았지만, 조금도 멀어지게 둘 수 없다는 듯, 빠져나오지 않는다.

 

고개를 약간이라도 돌린다면.

 

빛이 조금 더 강해진다면.

 

자리를 옮겨서, 내 얼굴이, 표정이, 이 모든 감정이 드러나 버린다면.

 

바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겠구나, 드라질리.”

 

그러나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다.

 

표정조차도 바꿀 수 없었다.

 

간신히 목이 삐걱거리지 않을 정도로만 목소리를 내는 게 한계였다.

 

때리고 싶었다.

 

욕설을 퍼붓고, 소리치고, 있는 힘껏 비난하고, 정강이를 걷어차고.

 

네가 말하는 그 오해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황궁에서 볼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까.”

 

억지로 몸이 돌아갔다.

 

불빛이 어두웠다.

 

고개를 숙였으니 표정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소매를 잡은 힘이 빠지는 것을 보니 디에고는 이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기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 사이가 아닌 거야.

 

입술을 꽉 깨무는데 디에고가 다시 어깨로 손을 뻗으려 했다.

 

바질-”

 

부르지 마!”

 

짝 소리가 나도록 손이 떨어졌다.

 

물건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당장 던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머니 속의 망할 쪽지 뿐이다.

 

다시는, 내 이름... 부르지 마!”

 

, 타악-

 

아무렇게나 구겨진 쪽지가 잘 생긴 얼굴을 때렸다.

 

두 번이나 얼굴을 때렸지만 가벼운 것은 아프지조차 않았다.

 

닿았다는 느낌도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디에고는 아까까지만 해도 바질이 서 있었던 계단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발자국은 희미해져서 그 앞을 기점으로 뚝 끊겨 있었다.

 

그 곁으로는 구겨진 쪽지 두 개가 나란히 놓여서.

 

디에고는 그 두 장을 집어 들었다.

 

한 장은 아까 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 봐. 기대된다

 

낡은 종이였다.

 

주머니에 넣고 오래 만지작거려 낡아진 종이였다.

 

그 날이구나

 

그리고 계단의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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