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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XJ] 아무 날도 아닌 날

2015. 4. 12. 03:06 | Posted by 호랑이!!!




아무 날도 아닌 날이었다.

 

휴일도 생일도 기념일도 아닌 그런 날.

 

간만에 날씨는 좋고 따뜻해서 웨슬리는 외출할 때 으레 쓰곤 했던 중절모를 벗어 옆에 끼고 걸었다.

 

어제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둬서인지 겉옷의 소매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걸 매만져 펴면서 웨슬리는 어젯밤의 생각을 했다.

 

따뜻하게 데워진 방안의 공기와 음란하게 흔들리는 연인의 몸.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만인지도 모르겠다.

 

침대 옆에는 협탁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액자에조차 들어있지 않은 사진이 있었다.

 

앨범이라면 집의 책장에 꽂혀 있는데.

 

벌써 몇 년 전에 샀지만 아직 절반도 채우지 못한 앨범은 위에 먼지가 쌓일 정도였는데도.

 

그런데 청소도 하지 않는 협탁 위의 사진은 먼지가 쌓이기는커녕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젊은 날의 카인과 레나.

 

그리고 때마침 잡화점이 웨슬리의 눈에 띄었다.

 

...그래, 여태까지는 카인이 레나를 잊을 수 있게 노력했지.

 

그게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카인이 레나를 잊지 못하고 사랑한다고 해도 웨슬리는 그런 카인도 사랑할 수 있었다.

 

웨슬리는 잡화점으로 갔다.

 

 

 

 

 

간만에 날씨는 좋고 따뜻하니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날.

 

카인은 저녁부터 밤까지 웨슬리와 뒹굴었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으레 쓰던 도구가 든 협탁 위에는 흑백의 사진이 한 장, 액자도 없이 놓여 있었다.

 

카인은 그것을 쥐고 침대로 누웠다.

 

, 레나.

 

그대의 사진을 보며 웨슬리의 침대 위에 있어도, 이제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아.

 

어쩌면 지금껏 슬로언이 노력했던 것이 결실을 맺는지도 모르지.

 

슬로언은 벌써 몇 년이나 노력했으니까, 남자의 마음은 갈대라 이 말이야.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장 아래를 뒤져 벌써 옅게 먼지가 쌓인 앨범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는 앨범을 활짝 펼쳤다.

 

앨범에는 웨슬리와 자신과,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새삼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겨가며 사진과 거기 붙은 두줄짜리 메모를 보며 추억에 젖던 카인은 그 중에서 한 장을 꺼내들었다.

 

웨슬리와 함께 살기 시작한 날 집 앞에서 찍은 것.

 

그리고 그 자리에는 레나의 사진을 내려놓고 다시 얇은 비닐을 덮었다.

 

다시 앨범을 꽂아놓는데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웨슬리가 들어왔다.

 

다녀왔네.”

 

웨슬리는 들어오자마자 카인의 손에 납작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어서오게.”

 

자신의 마음에 웨슬리가 들어왔다.

 

자신의 예상보다 크게.

 

그 사실을 인정해서인지 카인의 마음은 꽤나 들떠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꺼내든 사진을 웨슬리 앞에 내밀었다.

 

슬로언, 앞으로 침대 옆의 테이블에 놓을 사진은 이걸세.”

 

그러자 웨슬리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카인은 테이블에 사진을 올려두고는 웨슬리가 준 선물의 포장지를 풀어보았다.

 

웬 건가?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네만.”

 

“...그냥 자네 생각이 나서 사 봤네.”

 

레나의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테의 액자.

 

카인은 그것을 들고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좋지 않은 때 사온 모양이지?”

 

“...전혀, 그렇지 않네.”

 

카인은 그 뚜껑을 열어서는 그 안에 자신이 빼 두었던 사진을 집어넣었다.

 

사진이 조금 더 컸지만 끝을 조금 접으니 무리 없이 들어간다.

 

팔을 쭉 뻗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기다리겠지만 그대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

 

나의 밤은 뜨겁지 않지만 따뜻하고 온화해.

 

그대와 하던 식사만큼 재미있지는 않지만 나는 즐거워.

 

그대와 있던 날은 아름다웠고 지금의 나는 행복해.

 

카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는 작게 웃음지었다.

 

“Auch er tief in mir einfiel.”

 

그는 내 마음 속에 너무나도 깊이 들어와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