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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복익님] 베르베르

2015. 3. 4. 00:01 | Posted by 호랑이!!!

해가 질 시간이지긴 하지만 밖은 매우 밝았다.

 

그러나 방 안은 어두웠다.

 

커튼을 젖히면 밝은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울텐데도, 방의 주인은 고집스레 커튼을 닫아두었다.

 

어두운 색의 두꺼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은 방 안의 불보다 밝았다.

 

겨우 문 하나 차이인데, 만약 누군가가 복도에 서 있다 그 방으로 들어섰다면 오래간 묵은 공기에 숨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라고 불리는 사람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딘지 권태로운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잘 맞는 정장에 바닥에 부딪혀 뚜벅뚜벅 소리를 내는 구두와 지팡이 대신 앞을 짚는 검은 우산.

 

그는 방 안으로 들어서서 문에 기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 장갑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 이탈리아.”

 

히죽 웃으면서 뒤를 이탈리아어로 말한다.

 

밝고 아름다운 도시.”

 

그는 거리에서 보았던 작은 소녀를 떠올렸다.

 

하얀색 천을 덧댄 분홍색의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볕 잘 드는 곳에 앉아 입에는 사탕을 물고 손에는 동화책을 들고 있었다.

 

위로 하나나 둘 정도 형제가 있었는지 책은 살짝 바래 있었고 몇 페이지는 끝이 접혔던 흔적이 보였다.

 

별로 예쁜 꼬마도 아니었고, 눈길을 끌 만한 무엇도 없었기에 베르나르는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느 페이지에 이르자 그 여자아이는 울었고, 어느 페이지에서는 웃었다.

 

여자아이가 그 짧은 책을 오래오래 읽을 동안 베르나르는 그 자리에 못박혀 그 아이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목도 외웠다.

 

Il Blue Bird.

 

독일어로는 ‘Der blaue Vogel’.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서점에 들렀었다.

 

아까 그 꼬마아이가 읽고 있던 것과 같은 책을 찾으려고 해 봤지만 똑같은 책은 없었다.

 

똑같이 바래고 똑같이 접힌 책이 갖고 싶었는데.

 

결국에는 같은 제목의 다른 책을 손에 들었다.

 

꽤나 세밀하고 멋진 삽화가 실린 책.

 

표지에 그려진 덩굴이 전부 몇 번이나 꼬였는지, 잎사귀가 몇 개나 달리고 꽃은 몇 송이나 피고 파랑새는 몇 마리나 날고 있는지 외울 정도로 보았지만, 표지조차 넘기지 못했다.

 

또 그런 것을 보고 있구나, 르미엘.’

 

환청처럼, 어릴 때 듣곤 했던 목소리가 기억 속에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목소리만 떠올렸을 뿐인데도 서늘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어 숨조차 조심스레 쉬어야 했던 분위기와 어머니가 즐겨 입던 드레스의 빛깔이 되살아나고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한 시선이 다가왔다.

 

베르나르는 결국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거기까지 회상했을 때 발치에서 작은 고양이 소리가 들려 현실로 깨어났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어느샌가 딱딱하게 인상을 썼던 베르나르는 나쁜 꿈을 꾼 사람이 그러하듯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깜박였다.

 

핸드폰을 보니 어느 동료가 한 전화였다.

 

, 심장이 뛴다.

 

그 박동을 새삼스럽다는 듯 느끼며 그는 전화를 받았다.

 

, 베르나르입니다~”

 

밝고, 어머니가 들었다면 경박하다고 할 만한 말투로 그는 전화를 받았다.

 

외울 정도로 보았던 동화책도, 소녀도, 서점에서 떠올렸던 그 생각들도.

 

모두, 곧 잊혀질 것이다.

 

어느샌가 그는 다시 권태롭기도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