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정 티엔, 올해 열일곱이 되는 그가 그의 스승에 대해 가진 첫 번째 감상이었다.
양 팔에 희고 검은 반점을 가지고 태어나 다들 불길하다며 자신을 피할 때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거두어 주었다.
음양의 균형에 대해 어린 자신도 알 수 있도록 설명도 해 준데다 무술이며 몸의 균형을 위한 수련법도 가르쳐 주었다.
이름이 티엔이라 성은 무엇이냐고 묻기에 부모를 몰라 알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정’ 자를 주었고.
겨울이면 옛날 이야기, 여름이면 귀신 이야기, 재미난 이야기들로 밤을 보내었고 더운 날이면 글공부를 하다가도 천렵을 가자 이끌어서.
그래서 그가 스승으로, 형으로, 때로는 친우로까지 느껴지기도 했었다.
아아, 그것도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 때까지로.
마냥 행복했던 시절은 어느 유달리 잠이 오지 않던 밤 스승의 잠꼬대를 들으며 끝났다.
무슨 이유엔지 항상 옆에 붙어있던 스승은 잠잘 때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방에 있었고 자신은 그 말을 잘 들었지만...
어느 유달리 잠이 오지 않던 날, 몇 시간 자지도 않고 일어났었다.
밤은 고요했고 자신도 눈만 떠 어두운 천장을 보았다.
늘 시끄럽던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기이하다고 여기는데 흙벽 너머로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잠꼬대.
항상 웃었고, 의기양양했던 목소리는 간 데 없이 울음과 처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티엔은 깨달았다.
조선 사람이라는 그가 왜 중국 구석까지 왔는지.
수련하는 것은 자신인데 왜 사부가 수련이 싫다고 칭얼대듯 말하였는지.
왜 자신을 보는 눈에 때로 아픔이 깃들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어느 어렸던 밤부터 자신의 가슴에는 응어리가 생겼다.
“아-, 비오네.”
사부는 이제 저보다 작았다.
낼모레 서른이라고 하지만 장난기 넘치는 표정이나 놀자 하는 그 표정은 본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게 했다.
궂은비가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던 그는 땋은 머리의 끝을 끌어당겨 비비 꼬다가 역시나 ‘오늘은 놀자’며 샐쭉 웃어보였다.
“전이라도 부쳐 올까요?”
“술도 한 병, 너는 차 마시고.”
“알겠습니다.”
순순히 부엌에서 밀가루며 계란을 꺼내는데 밖에서 매캐한 냄새가 난다.
무슨 일인가 하여 밖을 보았더니 사부, 이 하랑이 긴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끝을 마루에 대고, 손으로 대를 잡아 입술을 둥글게 내미니 희뿌연 담배 연기가 흘러나와.
연기로 장막을 쳐 세상과 저 사이를 가르기라도 할 것처럼 넓게 뱉지만 바람에 연기는 흩어진다.
“사부님.”
“어엉? 기름이라도 떨어졌어?”
“담배 피셨습니까?”
“어어... 원래 피다가 잠깐 끊었었지.”
못된 장난질이라도 한 아이마냥 씨익 웃고 고개를 홱 돌려 다시 마당 구석께로 시선을 던진다.
"잔소리 할 사람이 없어졌거든."
앞으로 내려온 머리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태까지 그러했듯 웃는 것은 올라간 그 입꼬리 뿐일 것이었다.
"...연초는 몸에 나쁘니 적당히 태우십시오."
"..."
다시 담배 연기가 장막처럼 그를 둘러싸지만 비 섞인 습한 바람에 만들어지기 바쁘게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사부는 그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잡으려는 듯 다시 연기를 피워내고.
전을 접시에 담고 술병과 잔, 차 담은 주전자를 가지고 마루에 돌아와 앉았더니 냉큼 타박이 들어왔다.
"한 병 달랬다고 정말 한 병 가져오다니 정이 없다 티엔아."
"약주는 한 병으로 족합니다, 사부님."
"한 병... 아니 두 병 더 가져다 주렴."
"안됩니다."
"매정한 놈."
하지만 사부가 말과는 달리 속으로는 자신이 막는 걸 기꺼워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티엔은 그 점이 못내 못마땅하여 아예 술병도 빼앗았다.
이러면 사부가 화를 내지 않으려나.
그러나 사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수줍게 고개 돌려버린다.
살짝 벌어진 입새로는 옅게 연기를 흘리면서.
"화나지 않으십니까?"
"제자가 사부를 걱정해주는데 들어야지 어쩌겠어."
이번에는 티엔이 화낼 차례다.
차마 어깨조차 잡지 못하고.
바닥을 손으로 탕 쳐놓고도 사부에게 대든다는 사실에 외려 자신이 깜짝 놀랐다.
"사부님! 저를 누구랑 겹쳐 보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인지. 손에 쥔 술병의 향에 취하기라도 한 거냐?"
"거짓말 마십시오, 매번, 매일, 매 시각을 사부님의 사부였다던 그 분과 겹쳐서 보지 않으십니까!"
정이라는 성도 그 분 때문에 정해주신 것 아닙니까!
티엔은 화마를 억누르고 손을 하랑이 기댄 기둥에 대었다.
이제 한참이나 커진 덩치라 압도당한 하랑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렸다.
"저를 저로서만 보아 주십시오. 저는 사부님의 그 분이 아닙니다...!"
젠장, 하랑의 입이 움직였다.
"이러지 마..."
"저는 사부님의 사부가 아닙니다! 티엔이라는 제자입니다!"
"나도 알아, 넌 그냥 닮은 다른 사람인 걸!"
그러나 그 닮았다는 것은 단정하고 멀끔한 외향은 물론이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이며 사소한 습관-
그래, 예를 들면 일을 하는 순서라던가, 문득 눈이 마주치면 짓는 부드러운 눈웃음이라던가.
슬금슬금 옆에 다가앉아 찌르면 손을 덮는 커다란 손이라던가.
그런 말을 토하며 이마에 손을 얹는 것을 보고 티엔은 깨달았다.
그 분은 사부님과 정을, 그것도 연정을 통하던 사이였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티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한동안은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희뿌연 담바고 연기만이 둘 사이에 흐르고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하랑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담배 연기보다 옅게 흘러나와 바람 소리에 묻히는 말.
그리고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묻기도 전에 하랑은 생긋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럼 우리 티엔이 부친 전 맛 좀 볼까! 식으면 맛 없는데 벌써 식진 않았겠지- 야 티엔아 뭐하냐, 사부 술 좀 따르지 않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쩌면 평소 이상으로 밝은 목소리로 주저리 주저리 말하며 하랑은 젓가락으로 전을 쭉쭉 찢어 입에다 넣는다.
"하아 맛있구만! 역시 비 오는 날에는 전하고 막걸리지! 너 뭐하냐, 사부가 따라보라고 했는데."
"사부님은- 아니, 아닙니다."
혹시 제가 그 분과 닮아서 저를 거두신 겁니까.
제게서 그 분의 그림자를 보았기에 혹시라도, 저를 조금이나마 마음에라도 두시고 계십니까.
묻고 싶었지만 어떤 대답이 돌아올 지 무서워 잔에 묵묵히 술을 따른다.
"티엔, 너도 한 잔 받을테냐?"
"사양하겠습... 아니, 기꺼이 받겠습니다."
잔을 내미니 놀란 듯 하다가도 농담이었다며 야살스레 웃고 병을 채어 간다.
말없이 저분질만 바쁜데.
그 와중에 역시나 병은 하나에서 둘이 되고 둘에서 셋이 되고, 그것이 다섯이 되어 이건 너무 많지 않나 하는데 픽- 사부가 쓰러졌다.
남은 것을 간단히 정리하여 두고 방으로 옮기기 위해 몸을 들어올렸더니 잠꼬대인 듯한 말이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미안해 사부, 미안해-"
누군가를 찾던 잠꼬대는 언제부터인가 사과로 바뀌어 있었다.
티엔은 잠든 사부의 입술에 남몰래 입술을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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