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카투스는 여느 주말처럼 편지를 배달해왔다.
“안녕 얀! 다니엘! 왜 둘 다 죽을 상이야?”
“...다니엘이 괴롭혔네.”
“...얀이 나빠.”
오늘의 간식은 연어알을 넣은 카나페였다.
편지가 가득 든 가방을 뒤집어 털어낸 헬렌은 여느 날과 달리 다니엘 폰 카이트(듀크 단)와 헨리 제임스 헤일로(얀)가 축 처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싸우기라도 했어?”
“얀이 여왕님에게서 명령을 받았는데 지나치게 느긋합니다.”
아... 헬렌은 단박에 이해했다.
저 뼛속까지 충성심 넘치는 미래의 기사 나리는 여왕님의 명령이 최우선이니 그것부터 하라고 했을 것이고 우리들의 관리자는 무슨 꿍꿍이에서든 이때껏 미뤘겠지.
“뭐야, 무슨 일인데?”
“...무도회의 가수로 레이디 세이렌을 데려오라는데.”
“뭐어?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질질 끌고 있어?”
“하필이면 그 날이 추수제일세.”
그게 뭐 어때서?하는 친우를 보고 얀은 한숨을 쉬었다.
“푸른 여왕님은 뭘 맡고 계시지?”
“군권.”
“추수제는 누가 주도하지?”
“붉은 여왕님?”
끝이 왜 온점(.)이 아니라 물음표인데?
얀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행사나 축제는 붉은 여왕님이 주도하시는 일일세, 레이디 세이렌은 지금 최고의 가수이고.”
당연히 붉은 여왕님이 초대하셨겠지.
그런데 지금 푸른 여왕님이 자신의 손님으로 초대해 달라고 하는 것일세.
“다니엘 자네는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몰라.”
그 말에 단은 아, 하고 깨달았다.
“붉은 여왕님이 하시는 일이면 붉은 여왕님이 하게 하면 되지, 왜 푸른 여왕님이 초대하시는 건가? 푸른 여왕님이 초대한다면 붉은 여왕님의 일을 뺏는 것처럼 보일 텐데.”
한 절반 정도.
“자매끼리는 꽤나 다툴 거라 생각하네.”
그 말로 일축한 얀은 그대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하하, 그래도 여왕님의 명령인데 따라야지.”
헬렌은 소파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그들의 관리자 주위를 맴돌았다.
“...정신 사납대도.”
“신경쓰지 마.”
헬렌은 폴짝 뛰어 날아서 소파를 넘어가더니 바닥의 쟁반에 놓인 카나페를 가져다 입에 넣었다.
바작바작 톡톡 튀는 식감을 만끽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데 단이 찡그리는 것이 보인다.
“...있지, 얀?”
“...”
“듀크 단의 표정이 그닥 좋지가 않은데~”
공중에 둥둥 떠서는 귓가에 머리만 내밀어 속닥거리고 있지만 다 들린다.
단은 읽던 책마저 옆에다 내려놓고 얀을 노려보고 있었다.
“헬렌, 자네까지 나한테 재촉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귀찮아서 원.”
방금 그 말은 그래도 헬렌한테 너무한 게 아닌가 하여 단이 한 마디 하려는데, 헬렌은 화내는 대신 방긋 웃었다.
그러나 헬렌은 소파에 늘어진 얀의 양 다리를 잡더니, 그대로 날아서 열린 테라스 밖으로 던져 버렸다!
“헬렌!!! 카투스!!!”
“난 로즈랑 놀거니까, 썩 가시지!”
단은 화닥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겉옷인 망토만 손에 들고 얀을 따라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렸다.
“얀, 무사하냐!”
“잘 다녀와~”
“하여간 우리 애들은 너무 난폭해.”
얀은 다행스럽게도 푹신한 잔디 위에 떨어졌는데 그럼에도 아프다며 단이 뛰어내리는 그 때까지도 누워 있었다.
아주 깔끔한 자세로 잔디에 착지한 단은 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일으켜 주게.”
“잡고 일어나.”
“나는 청순가련하고 연약하네.”
헛소리, 라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음에도 얀은 그대로였고 단은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 등을 받쳐 일으켜 주었다.
“고맙네.”
“두 번은 없어.”
“단은 너무 나한테만 차가워.”
얀은 망토 자락을 들고 눈가를 닦는 시늉을 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차갑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얀이 쫓아나가면 단은 마차를 잡고 문을 열어둔 채 기다리고 있다.
얀은 그 마차에 냉큼 올라탔다.
“골든 공연장까지 부탁하네.”
마차 바퀴가 굴렀다.
문을 닫고, 얀은 쿠션에 몸을 기댔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거네만, 레이디 세이렌은 현재 최고의 가수라고 불리며 그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은 천국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하지.”
“나도 레이디 세이렌이 누구인지는 알아. 몇 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공연을 본 적 있거든. 본 적은 그 때 한 번 뿐이지만 과연 아름답더라.”
“얼굴이, 아니면 노래가?”
얀이 짓궂게 물었다.
“가수가 여자라는 이유로 목소리 외의 것을 평가할 만큼 속물적이지 않아.”
단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 혹시 세이렌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가수?”
“아니. 신화 속의 세이렌.”
“모르는데.”
얀은 그럴 줄 알았다, 면서 설명했다.
“세이렌은 용이 살아있을 때 멸종당한 유일한 마법 생물이네. 여자의 얼굴에 몸은 새고 바다의 돌섬에 사는데 목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해서 배가 바위에 부딪혀 난파되도록 만들지.”
“상체가 여자, 하체가 새라는 하르퓌아랑 비슷하네. 뱃사람들이 죽지 않기 위해 세이렌을 전부 죽여버린 건가?”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귀족들이 호사한 취미를 누리기 위해 세이렌을 잡았다고 하더군.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날개의 깃털은 뽑아다 장식에 쓰고, 특별히 노랫소리가 아름다운 새가 낳은 알은 비싼 값에 매매되기도 했네.”
이게 역사든, 아니면 무슨 생물 수업이든 단에게 특별히 흥미진진한 수업은 아니었다.
“사람이 멸종시켰나?”
“그렇다고 해야 할까.”
얀은 잠시 말을 멈추어 단의 시선을 끌었다.
“기록된 문서에 따르자면 어느 날 세이렌들이 특별한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군. 대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짝짓기를 하고 싶다, 식사를 하고 싶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등의 막연한 이미지를 담은 것이었는데 이 날은 전부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사람에게 다가갔다고 하네.”
“어떤 이미지?”
“고향에 가고 싶다.”
서서히 단의 눈에 흥미로움이 차는 것이 보였다.
같이 지낸지가 거진 십 년이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면 궁금해 할 지 정도는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지.
얀은 소리 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세이렌을 기르는 사람들도, 사람들의 하인들도, 전부 고향으로 가버렸다네. 고향에 닿자마자 왜 여기 있는지 깨닫고 서둘러 세이렌에게 돌아갔지만 그 때는 이미 세이렌들이 굶어죽은 뒤였지. 낭만주의자들은 이 일에 대고 스스로 멸종한 생물이라고 부르고 있다네.”
“알이 남아있을 거 아니야?”
“당시 사람들은 세이렌에 대해 공부하기도 전에 무작정 잡아들였네. 알은 모종의 이유로 깨어나지 않았고 결국 남은 것은 알 껍데기 뿐이었지.”
“재미있네...”
마차가 멈추어 서고 마부가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착했습니다!”
얀은 마차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폼만은 좋았으나 착지에서 비틀거린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왜 오면서 세이렌 이야기를 했는지 알겠나?”
“가수 세이렌을 만나러 가니까.”
“자네가 세이렌에게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해서네.”
얀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극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아가씨 역시 우리 중 하나거든.”
세이렌이 얀의... 뭐라고 할까, 얀의 관리인? 관리 받는? 관리당하는? 일컬어 푸른 아이들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에 단은 로즈와 헬렌을 떠올렸다.
역시 그 실험인가 뭔가를 견뎌내고 계획적으로 길러진 아이들이라 그런지 어리건 여리건 당차고 강하고 그렇다.
그러면 세이렌도 그렇겠지?
세이렌은 멀리서 한 번 본 것이 전부였지만 몸에 주렁주렁 단 화려한 장신구며 그렇게 특색있는 오만한 목소리 하며.
개인적으로 만난 세이렌도 ‘~했냐?’같은 말투일지도 모른다.
바지를 입거나 푹신하다면 소파에라도 드러눕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단은 뭔가 빠뜨린 것 같다는 생각에 발을 멈추었다.
“왜 그러나?”
“뭔가 빠뜨린 것 같은... 느낌이... 아!”
단은 입구 쪽으로 서둘러 걸어가서는 바로 옆의 꽃집에서 커다란 꽃다발을 살폈다.
“걸... 걸음이 빠른, 하아.. 빠르네, 단!”
“헨리, 종종 하는 말이지만 너도 역시 운동을 좀 해야 해.”
“칼 들고 뜀박질하고 그런 건 내 적성과 안 맞아. 후우... 그리고, 얀이라니까...”
얼마 안 되는 짧은 거리였음에도 얀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뭘 사가나? 웬 꽃? 설마 세이렌에게 주려고?”
“그래야지.”
“왜? 세이렌은 그냥 가수일 뿐인데. 자네한테는 평민이기도 하고.”
“네가 더 이해가 안 가는데. 레이디를 만나러 가는데 선물 없이 어떻게 만나?”
얀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단을 쳐다보았다.
단은 튤립과 장미가 섞인 꽃다발을 집어서 주인에게 값을 치렀다.
지위가 남작이라 하더라도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푸른 여왕이 직속으로 그를 부리기 위해 명목상 부여한 것에 불과하니 예의가 어떻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하는 것은 책을 통해 배운다고 그랬던가.
“넌 세이렌이나 악마나 좀브 같은 건 잘 알면서 이런 걸 잘 모르더라.”
“왜 모르는지 이젠 알지 않나. 그리고 그거 좀비네.”
얀은 단이 든 꽃다발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여자를 만나러 갈 때는 꽃을 사서 들고 가는 것이라고 머릿속에 입력하는 중일 것이다.
극장 안, 붉은 벽지에 호화로운 그림이나 조각을 군데군데 두어 꾸민 복도를 따라 걸으니 이 앞이 대기실이라며 지키고 선 사람이 보였다.
얀이 손을 까딱하자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냈고 단도 가볍게 인사를 보내고 서둘러 얀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따라 걷자 안에서부터 은은하게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래 좋다.”
몇 걸음 더 걷자 노랫소리가 더 커졌다.
어린 공주의 책임과 소녀로서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 어딘가 찡하게 했다.
코 끝이 매워 오는 것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데 얀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가시밭길의 소녀로군.”
어찌나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표정이었는지, 눈물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믿지 못할 뻔 했다.
“고전소설 「어느 왕자에 대하여」를 각색한 「여왕의 길」이라는 극의 아리아지.”
“멋진 노래야... 조금 들었을 뿐인데도 울 것 같네.”
“멋진 노래지. 부른 사람은 더 멋지고 말이네.”
노랫소리는 가장 안쪽 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얀과 단이 다가갈수록 노래는 조금씩 바뀌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다른 곡을 불렀다.
“밝고... 신나는 노래군. 뛰고 싶어지는데?”
“이번에는 뱃사람들 노래군. 세이렌이 가장 즐겨 부르는 것일세.”
“세이렌이 뱃노래를 안다고?”
아리아만 부를 것 같은 가수가 남자들이나 부르는 뱃노래를 부른다니, 하지만 마물 세이렌을 생각하면 알아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하며 단은 앞장서 노크를 두어 번 했다.
“세이렌 양, 계십니까?”
“어머?”
나온 사람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길게 길러 진주장식 끈으로 정리한 하얀 머리카락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붉어져 머리카락에 색을 입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러면 대개 머릿결이 상함에도 어지간히 공을 들였는지 윤기나게 찰랑거렸다. 키는 가장 보기 좋다는 키에 몸은 늘씬하고 가벼운 레이스가 달린 실내복 한 장으로 감쌌을 뿐인데도 사랑스럽게 어여뻤다. 그리고 온순하게 아래로 끝이 내려간 눈은 속눈썹이 풍성하고...
이런 묘사를 구구절절 왜 하고 있느냐면.
세이렌의 목소리가 달콤했기 때문이다.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책을 읽으며 모든 남자들이 상상했을 맑고 부드러운, 마치 꽃잎이 다가와 사뿐히 피부에 닿는 듯 가녀린 목소리가 목소리와 어울리는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는 헨리가 온 줄... 헨리! 어서와요! 아아, 날 만나러 올 줄 알았어!”
세이렌임이 분명한 그 아가씨는 단을 쳐다보았다가 얀으로 시선이 가 멎자 활짝 웃으며 얀의 품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