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시는 찰리의 괴롭힘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아이를 보는 마냥 가끔은 혀를 차거나 작은 목소리로 조언을 해주기도 했으니까.
사실, 에그시가 자라온 곳에서는 갓 일곱 살이 된 어린애조차 찰리보다는 그럴싸한 악의를 만들어내곤 했다.
자신이라면 얼마든 그것을 받아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찰리 그가 노선을 바꾸어 자신에게 접근한대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야, 에기.”
아, 오늘도 역시나로군.
에그시는 제 앞에 내밀어진 시계에 눈알만을 굴려 찰리 쪽으로 향했다.
“롤렉스?”
“윈체스터 주유소의 맥도날드 알바생도 알 만한 것으로 사왔지.”
재력 과시라니.
자신은 하찮게 여기는 우민에게도 번쩍거리는 고급 시계를 줄 수 있다 이거냐.
킹스맨에 취직하기 전의 자신이라면 고깝더라도 받아는 두겠지만, 이제 어머니와 데이지를 부양할 만큼 벌고 있으니 (아깝더라도)사양할 수 있다 이거야.
“유감스럽게도, 차야 하는 시계가 정해져 있어서.”
그러자 대번에 표정이 일그러진다.
혓바닥이라도 내밀면 더 일그러뜨리려나.
최근 매너 레슨을 가르치는 해리가 들었다간 한숨을 쉴 생각을 하며 에그시는 픽 웃었다.
신사는 어떻고, 매너는 어떻고, 그런 경박한 짓은 하면 되니 안되니.
“그러면 에기-”
삐. 삐. 삐.
알림음이 울렸다.
해리는 능력도 좋지, 어떻게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를 알고 연락을 한 걸까.
“해리가 불러서. 이만 간다?”
에그시는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찰리를 내버려두고 양복점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만찬장에 계십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자 그는 가벼운 고갯짓과 미소로 화답하며 위치를 말했다.
에그시는 그의 말대로 위로 올라가서는 일종의 회의실 겸으로 쓰는 만찬장으로 들어가며 그의 후견인의 이름을 불렀다.
“해~리~”
“노크부터 하라고 했잖니.”
“안녕하십니까 갤러해드.”
“안녕하세요 멀린.”
멀린은 영 탐탁찮다는 눈으로 해리를 보고 있었다.
아서의 기본적인 표정은 거만함이었고 전 란슬롯이 미소였다면 멀린은 확실히 어딘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이 기본이긴 한데.
저건 진짜 정말로 확실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다.
“해리, 그런데 저는 왜 부르셨어요?”
“갤러해드가 전 후보생이었던 찰리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아, 이것 때문이었나.
에그시는 멀린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그것 때문에만 부른 것은 아니란다. 자 여기를 보렴.”
새침하게 말한 해리는 멀린의 손에서 차트를 빼앗아 위의 손잡이를 돌렸다.
“이번 주 토요일에 데이지가 학교에서 연극을 한다고 하지 않았니? 토요일에 시간을 내려면 오늘 미리 일해두는 것도 좋겠지.”
“해리...”
에그시는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예전 V-day일도 해결한 너이니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테지만, 다녀오겠니?”
“다녀오겠습니다!”
에그시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료를 받아 밖으로 뛰어나갔다.
“신사는 뛰지 않는다니까.”
“...젊은이를 조련하는 짓은 좀 그만두십시오.”
“애정이 아니라 조련으로 보다니, 서운하군.”
해리는 전혀 서운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는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 갤러해드가 뭔가를 두고 간 걸까요?”
“에그시 발소리가 아닌데.”
멀린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찰리가 들어오자 질린 눈으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에그-”
두리번두리번.
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에그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단 넥타이부터 단정하게 조인 뒤 멀린에게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멀린, 이건 집에서 보내는 겁니다.”
멀린은 몇 장의 종이와 편지가 들었음이 분명한 봉투 하나를 들었다.
“나는 보이지 않나 보구나.”
“오, 안녕하십니까. 그러니까... 게리 하비?”
“해리 하트, 전 갤러해드란다. 그리고 덧붙여서, 일부러 이름을 틀리게 하는 일은 아주 유치하고 뻔한 일 중의 하나라고 덧붙여 두지.”
그러는 그쪽도 별로 어른스럽지 않게 굴고 있잖습니까.
멀린은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에그시는 내가 보낸 임무 때문에 한동안은 바쁠 것 같구나.”
못된 영감.
찰리는 억지로 웃어는 보였으나 속으로는 냉큼 그렇게 생각했다.
저거 틀림없이 내가 에그시랑 가까이 붙어있는 게 고까워서 그럴 거야.
멀린은 드물게도 한숨을 쉬며 찰리와 해리가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시계를 보았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지금 복귀했습니다. -찰리?”
“랜슬롯, 어서 오게.”
록산느는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을 보고 놀랐지만 잘 교육받은 귀족답게 티를 내지 않으며 보고서부터 멀린에게 넘겨주었다.
“이번 보고서입니다.”
“잘 썼군, 이건 차차 검토하겠네.”
멀린은 손으로 썼지만 깔끔하고 더할 나위 없이 읽기 편한 보고서를 슥 훑어 보았다.
“그리고 오자마자 미안하네만, 한 가지 더 맡겨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멀린은 옆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처럼 만났으니 동기끼리 바라도 다녀오게.”
록산느, 록시는 옆을 보았다.
고급 정장에 말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광택이 나도록 닦은 구두, 잘 교육받은 유서 깊은 귀족, 킹스맨 혹은 그 후보생(이었던), 신경전을 벌이던 둘은 귀족의 품위고 뭣이고를 집어던지기 직전이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금요일 저녁, 에그시는 기분이 좋았다.
임무에서 입었던 가벼운 상처는 대강 다 나았고, 토요일 저녁 식사는 집에서 가족들과 해리, 그리고 친구 몇 명과 즐겁게 보낼 예정인데다.
멋대로 사진을 찍지 말라던 데이지도 내일 연극에 쓸 의상을 입은 모습을 미리 사진 찍어도 좋다고 허락해준 것이다.
찰칵 찰칵.
에그시는 기분 좋게 핸드폰 카메라를 썼다.
“데이지 연극이 뭐라고 했지?”
“뱃써... 백설공주.”
“그래서 그렇게 왕관을 썼구나? 목걸이도 예쁘네~”
그런데.
데이지는 그 말을 듣자 놀란 표정을 짓더니 허둥지둥 목에 걸린 목걸이를 옷 속으로 숨기는 것이다.
“데이지?”
“왜?”
“그 목걸이, 오빠가 봐도 될까?”
그러자 데이지는 의상의 목 쪽에 손을 얹더니 꾸욱 누르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자신의 방으로 화닥닥 뛰어가버렸다.
에그시는 침착하게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친구, 록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에그시?]
“록시... 데이지가...”
[무슨 일인데?]
“데이지가...!!!!!!!!!!”
[에그시?!]
그리고 록산느는 ‘데이지가 오빠에게 비밀을 만들고 있어’라는 주제로 세 시간,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주제로 세 시간, 기타등등의 주제까지 모두 여덟 시간을 에그시의 울음 섞인 한탄을 듣는데 사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데이지의 학교에서 눈이 부은 에그시를 만난 록산느는 한 마디 쏘아붙여주려다 그 퉁퉁 부은 눈 때문에 관두었다.
“오셨네요 해리.”
“좋은 아침이네.”
그 옆에서 멀린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이렇게 일찍 오는 모습을 보여주시죠.”
“다음부터는 그러도록 하지.”
록산느는 커피를 사 와서 홀짝이며 의자에 앉았다.
“랜... 록산느, 무슨 일이지?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누구누구네 오빠가 동생 때문에 서운하다고 여덟 시간이나 통화를 해서 말이죠. 정보국에서 봤다면 스파이라고 의심받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런, 에그시가?”
그러자 아직도 한스러운지 에그시는 멀린을 붙들고 떠들다가 체육관 밖으로 쫓겨났다.
멀린은 에그시의 핸드폰을 넘겨받더니 사진을 상비하는 ‘간단한’ 도구들로 확대하고 확인하기 시작했다.
“백금이군, 보석은 유리구슬로 만든 가짜지만. 데이지에게 용돈을 많이 주나 보지?”
“저 나이 때 적당할 정도만 쥐어주고 있어요.”
“데이지가 돈을 버나?”
“그럴 리가요.”
에그시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가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딘... 이 인간이... 설마 데이지를...”
“침착하렴.”
“전 이미 침착해요 멀린. 어쩌죠? 딘 그 인간이 데이지를 몰래 만난다던가, 그러면서 용돈을 쥐여준다던가, 선물 같은걸 하면 어쩌죠?”
“...”
그래도 아버지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멀린은 그렇게 생각만 했다.
벌겋게 퉁퉁 부은 얼굴로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아무래도 당분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노점을 찾으려 고개를 들었더니.
저만치 익숙한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에그시.”
“네?”
“찰리가 오는구나.”
뭐라고요.
에그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의 보기만 해도 짜증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면상은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더니, 어딘가 살금살금 피하는 모습으로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저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날 것 같아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탕 먹는 거 잊지 말고.”
멀린은 에그시가 찰리의 뒤를 따라 체육관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에그시는 찰리의 뒤를 따라 들어가긴 했지만, 워낙에 사람이 많았던 터라 결국 잡지 못했고.
다시 얼굴을 마주한 것은 저녁의 홈파티에서였다.
“.........그래서, 찰리?”
에그시는 다시 마주한 그를 한껏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내 귀엽고 천사 같은 동생)데이지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건데?”
“친구다.”
“웃기지 마아아아!!!!”
해리, 멀린, 록시는 안락의자에 앉아 와인과 감자튀김을 먹으며 느긋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얘랑 친구인게 뭐가 나빠!”
“나빠! 대체 뭣 때문에 친해지려고 한 건데! 쟤 목걸이도 네가 줬지!”
“아 친구끼리 선물 좀 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왜 데이지랑 네가 친구냐고?!”
“그야 데이지는 미래의 내...!”
저놈이 내 밤잠을 앗아간 원인이었군.
록산느는 크림을 가득 넣은 커피잔을 들었다.
“미래의~~~~? 아무리 우리 데이지가 예쁘다지만 미래의 아내 따위를 말했다간...”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말해보시지!”
“미래의... 에잇, 말 안 해!!!”
멀린은 우유와 얼음을 담은 커피를 홀짝였다.
록산느는 데이지가 가져다준 파이 조각에 포크를 꽂아서 크림과 과일을 가득 떠 입에 물었다.
“...찰리는 언제쯤 제대로 말할까요.”
“찰리가 에그시한테 고백하는게 빠를지, 에그시가 해리한테 고백하는게 빠를지 내기하겠나?”
“찰리한테 백 파운드 걸지.”
“해리는 지각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걸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만.”
그들은 아직도 아웅다웅 싸워대는 둘을 보더니, 각자 들고 있던 음식을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샤토 디캠에 트윙키가 먹고 싶군.”
“저는 스노우볼 쪽이 취향입니다.”
“데이지? 저기 두 남정네가 널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는데, 좀 말려주지 않을래?”
데이지는 아직도 연극 의상 그대로, 싸우는 둘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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