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티엔은 제 몸이 묶인 것을 알아차렸다.
침상이 아닌 푹신한 침대에 몸이 묶이고 몸 위로 누가 올라타 있었다.
그 사람은 팔을 뻗어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고, 그제서야 하얗게 달빛이 쏟아들어왔다.
따뜻한 바람에 하얀 레이스 커튼이 나부끼고 티엔은 제 위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루시.
인생의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너머가 훤히 비치는 하얀 레이스로 된 원피스 같은 속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같은 색의 레이스로 만든 부채를 들고 웃고 있었다.
아 저 웃음.
아 저 야살스러운 웃음.
티엔은 미간을 찌푸렸다.
루시는 더 진하게 웃음을 피우며 펼쳐들고 가만히 부치던 부채를 접었다.
차르륵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루시는 그 위에서 몸을 앞으로 굽혔다.
몸을 앞으로 굽히자 가뜩이나 눈 둘 곳이 없어 곤란해하던 티엔은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반대로 돌렸지만 다시, 루시를 보게 된다.
하얀 레이스 부채가 턱을 간질이고 있었다.
고개를 이리 돌리면 부채는 제 뺨을 눌러 고개를 다시 저쪽으로 향하게 하고, 저리 돌리면 다시 루시를 보게 하고.
루시가 제아무리 능력자라지만 결국은 한낱 연약한 계집아이.
그런 계집아이가 부채로 농락하는 것에 제가 놀아나는 것인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턱 아래에 부채를 대는 것에 아예 눈을 감았더니 루시는 부채를 꽉 쥐었다가 제 뺨을 후려갈긴다.
짝, 짝, 짝, 부채가 제 얼굴을 때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결국 눈을 떴더니 루시는 부채를 활짝 펼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반투명하고 하얗게 반짝이는 부채 너머로는 빨간 입술이 어두운 방에 달빛만으로도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다.
“티엔.”
꿈에도 잊은 적 없는 목소리는 제 이름을 부르고 루시는 제 뺨을 쓰다듬었다.
맞아서 트고 부은 뺨은 부드럽지 않은 손에 열을 식히고.
티엔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이 곳은 루시의 방이다.
티엔은 묶인 손과 발을 조금씩 당겨 보았다.
가위일까?
루시는 여전히 그 위에 올라앉아 이 모든 것이 재미있다는 듯 여전히 웃고 있었다.
티엔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루시도 제 뺨을 내리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이름을 부르면 깰지도 모른다.
손가락을 한 번 까딱하면 깰지도 모르고.
이대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면, 다시 눈을 뜨면, 목소리를 내면, 깰지도 모른다.
하지만 티엔은 그 중 무엇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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